5. 부서진 환상
정선우는 화장실 문을 잠그고 세면대로 다가갔다. 흐린 시야 속에서도 수도꼭지 뒤에 있던 비누를 찾아 흐르는 물에 손을 정성껏 씻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왼쪽 눈꺼풀 아래로 들어간 렌즈가 눈물샘을 쿡쿡 찔러댔다. 그가 원하지 않아도 왼쪽 눈에서는 계속해서 눈물이 나왔다.
지금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이상하게 보일지 생각하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답답한 마음 탓인지 손끝과 손가락 사이사이를 문질러대던 손길이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세면대 옆에 1회용 렌즈 팩을 올려두고 물기를 털어낸 손으로 왼쪽 눈 아래를 당겨 렌즈를 꺼냈다. 통증이 사라지자 눈물도 멈췄다.
눈을 감고 광대뼈를 꾹꾹 누르자 긴장이 풀리며 자그마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꺼내둔 렌즈 팩을 찢어 거울에 얼굴을 바싹 대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렌즈를 넣었다. 한쪽이라도 시야가 맑아지자 꽉 막힌 숨통이 트였다. 오른쪽 눈도 위치를 벗어난 렌즈를 찾아 버리고 새로운 렌즈를 넣고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주위 사물이 기억과 같은 것을 확인하자 겨우 답답함이 가셨다.
그러나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자 다시 숨이 막혀왔다. 눈가는 붉게 변해있고 입술에는 피가 맺혀 있었다. 아랫입술을 살짝 뒤집어보자 얼마나 씹어댔는지 입술 안쪽이 퉁퉁 부어있었다. 그나마 겉으로 보기엔 그리 티가 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차가운 물로 얼굴을 씻어내며 입안을 헹궜다. 입안에 고여 있던 피 맛이 사라지자 답답하던 마음도 조금은 풀어졌다.
불안하면 아랫입술 안쪽을 씹는 건 아주 오래된 버릇이었다. 언제 생겼는지도 모르는 버릇은 너무나 익숙해져 긴장이나 불안감을 스스로 인식하기도 전에 입안에 피가 고였다.
덕분에 입안은 언제나 찢어지거나 헐어 있어서 뜨거운 음식이나 매운 음식은 먹을 엄두도 못 냈다. 상사나 동료는 그런 그에게 점잔을 뺀다느니 여자들에게 인기를 얻으려 한다느니 하면서 나무랐다. 다시 답답해졌다.
정선우는 이제 더 이상 사내 식당에서 듣고 싶지 않은 소리를 들으며 밥을 먹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얼굴에 남은 물기를 손수건으로 닦아내고 머리를 정리하다 뒤통수에 단단하게 솟은 혹이 만져졌다. 살짝 스치기만 해도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다짜고짜 구두를 벗어 던진 남자의 얼굴이 떠오르자 짜증이 치밀었다. 반질거리는 낯짝을 한 남자의 멱살을 틀어쥐고 대체 왜 자신을 쫓아왔냐고 묻고 싶었다.
스치듯 소개받았던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필사적으로 쫓아올 때는 정말 무서웠다. 또라이로 소문이 자자한 백경 감독의 처남이라더니 백경 못지않게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길에서 그런 끔찍한 별명을 외쳐대며 자신을 쫓아올 리가 없었다. 구두에 맞고 렌즈가 돌아가지 않았으면 지금도 도망치고 있었을 것 같았다.
정선우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자신이 아직도 화장실에 있음을 깨달았다.
재빨리 문을 열고 나가 술집 내부를 둘러보자 바 테이블에 앉아 있던 남자가 그를 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그는 자신을 구두로 폭행한 남자를 향해 걸어가며 제발 대화가 되는 사람이길 바랐다.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키는 서도운을 보며 정선우는 잠깐 고민하다 바 체어를 멀찌감치 끌어당겼다. 옆자리에 앉기는 했지만 서도운과 그의 사이에 한 사람은 더 앉을 수 있는 간격이 있었다. 그런 그의 행동이 재미있는지 서도운이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
“술은 뭘로 할래요?”
정선우는 서도운의 앞에 놓인 기네스와 봄베이 사파이어 병을 흘깃 살피고는 대답했다.
“……밀러요.”
양원구가 코스터와 마른 과일이 담긴 작은 접시를 놓으며 두 남자를 빤히 봤다.
“눈이 즐겁긴 한데, 그렇게 둘이 있으니 신기하다아.”
“뭐가?”
밀러와 맥주잔을 놓아주던 양원구가 서도운의 물음에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했다.
“옆에 있는 사람을 오징어로 만드는 사람 둘이 같이 있으니 둘 다 사람으로 보여서. 희한하게 어울리네.”
양원구의 말에 서도운이 큰 소리로 웃었다. 술집 내부에 웃음소리가 퍼졌지만 다른 손님들은 고개를 돌려 바에 기대앉은 서도운을 보고는 다시 자신들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안 그래도 경운이가 한국 5대 미남 게이 중에 두 명이라고 그러더라.”
서도운의 말에 양원구가 낄낄거리며 대꾸했다.
“걘 헛소리를 진짜 진지하게 해. 너무 진지해서 헛소리처럼 안 들린다니까아.”
“그래서 경운이랑 놀면 재미있어. 특이하잖아.”
“경운이가 특이하긴 하지. 그런 변태 같은 취향을 가진 놈이 흔하냐?”
혀를 차는 양원구를 보며 서도운이 웃음을 터뜨렸다.
정선우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망고 칩을 입에 넣었다. 한 모금도 안 되게 따라둔 맥주잔은 손을 대지도 않았다.
“렌즈 돌아간 건 괜찮아요? 이젠 제대로 보여요?”
서도운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가장 간단한 것을 택했다.
“네.”
“머리는요? 그 정도면 혹 생겼을 것 같은데…….”
“생겼습니다.”
그의 답에 서도운은 ‘어우’라고 소리를 내며 눈썹을 늘어뜨렸다. 조금 전 쾌활하게 웃던 얼굴이 표정을 바꿔 측은한 얼굴로 변했다. 한순간에 바뀌는 표정이 신기했다.
“미안해요, 정선우 씨. 다치게 할 생각은 없었어요. 홧김에 던졌는데 맞을 줄은 몰랐어요.”
순순한 사과와 미안해 보이는 표정이 어우러지니 뭐라 트집을 잡을 수 없는 제대로 된 사과로 느껴졌다.
“내버려두면 없어진다고 혼자 끙끙거리지 말고 병원 다녀와요. 나 돈 많으니까 치료비는 넉넉하게 청구하세요.”
서도운은 웃으며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그의 맥주잔 옆에 올려놨다.
개와 고양이가 그려진 명함에는 ‘MOON 동물병원 내과 과장 서도운’이라는 직함이 동글동글한 글씨로 새겨져 있었다. ‘서 선생’이라 부르기에 막연하게 학교 선생님인 줄 알았는데 수의사라 그렇게 불렀구나 싶었다.
“그런데 왜 도망갔어요?”
정선우는 서도운의 물음에 당황해, 질문하는 서도운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오히려 그가 묻고 싶었다. 대체 왜 쫓아 왔는지!
“……쫓아와서요.”
그의 대답에 서도운도 당황했는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날 보고 그대로 가게 밖으로 나갔잖아요. 왜 그랬어요?”
정선우는 무어라 답해야 할까 고민했다. 그런 곳에서 아는 얼굴을 마주하는 건 처음이라 놀랐다.
그뿐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 대부분 실망하는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은 그가 드라마 대사 같은 멋진 말을 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그는 TV를 보지도 않고 소설책이나 시집도 읽지 않았다. 그가 보는 건 보고서와 숫자가 가득 적힌 서류들뿐이었다.
시험지에는 정답이 하나뿐이지만 사람의 질문에는 정답과 원하는 답이란 두 개의 답이 있었다. 정답과 원하는 답이 같을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았다. 타인이 원하는 답을 말하는 건 그에겐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그는 한 모금밖에 따르지 않은 맥주잔을 들어 비웠다.
유리벽을 따라 흘러내리는 거품을 보며, 단지 놀라서 도망갔을 뿐이라고 말하면 서도운은 어떤 반응을 할까 생각했다.
바보 같다며 큰소리로 웃을 수도 있었다. 입가를 일그러뜨리며 비웃을 수도 있었다. 왜 놀랐냐며 또 다른 질문을 할 수도 있었다.
맥주잔에 다시 맥주를 따를까 말까 고민을 하며 병을 만지작거리다 말간 맥주병에 비친 자신을 보았다. 꾹 다물어진 굳은 입매는 입술 안쪽을 깨물고 있을 때 짓는 표정이었다. 살짝 입을 벌리자 이 사이에 눌린 살이 빠져나왔다. 부풀어 오른 여린 살이 혀끝에 닿았다.
다시 깨물지 않으려 입을 벌렸을 뿐인데 고민을 끝내지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놀라서요.”
“하긴, 내가 좀 잘생겼죠.”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고개를 돌리자 부드럽게 웃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정선우 씨가 너무 놀라서 도망가기에 무슨 일인가 싶어서 쫓아간 것뿐이에요. 다음에 만날 땐 모른 척하세요. 나도 그럴 테니까.”
서도운의 목소리는 웃음만큼 부드러웠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다음에는 굳이 쫓아가서 아는 척하지 않을게요.”
눈꺼풀 아래의 어둠은 완전한 어둠이 아니었다. 그 속에는 자신만이 볼 수 있는 빛이 있었다. 그 흐릿한 어둠 속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난 여기서 만난 사람이 다른 곳에서 모른 척한다고 해서 예의 없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드러내는 사람도 있고 숨기는 사람도 있죠. 그건 자신의 삶을 위한 선택일 뿐이에요. 그 선택은 존중해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게 매너잖아요.”
그때 귓가에 어른거리는 부드럽고 나긋한 목소리는 그를 달래는 것 같았다. 지금도 그랬다. 나지막한 속삭임은 마치 주문처럼 불안감을 재웠다.
그가 멍하니 쳐다보자 서도운은 입꼬리를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눈 끝에 걸린 웃음이 빛이 되어 주위로 퍼지는 것 같았다. 서도운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정선우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갑자기 얼굴이 뜨거워졌다.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둔 남자는 빙긋 웃으며 다시 말을 건넸다.
“그렇게 마시면 맛없어요. 원구 형, 여기 잔이랑 밀러 한 병 더 줘.”
양원구가 새 맥주와 잔을 바 테이블 위에 올려놓자 서도운은 맥주를 잔에 따르기 시작했다. 몽글거리며 올라오는 거품 때문에 넘칠 거라고 생각했지만 딱 맞춘 것처럼 맥주 한 병이 잔 하나에 채워졌다.
서도운은 그의 앞에 맥주잔을 내밀었다.
“천천히 마셔도 이렇게 마시는 게 맛있어요.”
그는 아슬아슬하게 채워진 잔을 조심스럽게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맛이 달랐다.
들고 있던 잔을 잠시 내려다보다 다시 입으로 가져갔다.
거품은 단단하게 느껴질 만큼 밀도가 있었고 그에 비해 맥주는 산뜻하고 달았다. 이전에 마셨던 것과 다른 맥주라고 할 만큼 맛이 좋았다.
“……괜찮은 것 같아요.”
“그렇죠?”
“네.”
느긋하게 술을 마시는 서도운을 보며 함께 술잔을 들었다.
넘칠 것 같은 거품이 아래로 가라앉으며 자국을 남겼다. 그 선명한 자국에 아쉬움도 늘어갔다.
괜찮은 것 같다고 말할 게 아니라 “맛있어요”라고 했어야 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맛있다고 말할까, 그렇게 말해도 되는 걸까, 지금 말하면 뜬금없지 않을까……. 거품처럼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에서 부풀어 올랐다.
“백 감독이랑 같이 일하는 건 어때요? 할 만해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맡은 업무가 없어서…….”
“오 이사님 아직 안 만났어요?
“오 이사님이요?
그가 멀뚱하게 되묻자 서도운은 곤란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일한 지 한 달 정도 지났다고 들었는데 아니에요?”
“C그룹 쪽에서 인수인계가 늦어져서 출근은 지난주부터 했습니다.”
“출근하고 백 감독이 뭐라던가요?”
이직한 회사 이야기가 나오자 정선우는 반쯤 마신 맥주잔을 내려놨다.
“제가 감독님 부인을 만나야 하는데 부인이 바빠서 시간이 안 난다고 약속 잡히면 알려준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뭐라던가요?”
“프로덕션에서 같이 일할 분들 소개받고, 경리 담당하시는 분이 도와달라고 하셔서……. 지난번에 맡은 프로젝트와 관련해 M그룹에서 서류를 요청했는데 백 감독님이 전혀 협조를 안 해줘서 너무 힘들다고…….”
그의 말에 서도운은 심각한 얼굴로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조그맣게 “시발놈, 그럴 줄 알았다”라든가, “씹새끼, 더럽게 말을 안 듣지”라든가, “그 새끼랑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무슨 죄야”라든가……, 무어라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욕이라고는 한마디도 못 할 것 같은 사람이 악의를 담아 내뱉는 말에 놀라, 정선우는 입에 넣은 마른 오렌지 조각을 삼키지도 못하고 씹고 또 씹었다.
“그럼 정선우 씨는 지금 상황은 전혀 모르는 거네요?”
“……그런 것 같은데요.”
“백경 이 새끼…….”
다시 무어라 욕을 하던 서도운이 갑자기 그를 보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정선우 씨는 놀러 나온 건데, 정말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오늘 내가 정선우 씨한테 이래저래 미안할 일을 많이 하네요.”
눈썹을 축 늘어뜨리고 입술을 삐죽이는 얼굴은 아이같이 느껴졌다. 너무나 다양한 표정에 그는 서도운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이렇게 할래요? 기왕 시작했으니까 끝을 내죠. 여기서 계속 일 이야기를 하면 내일 외근처리해 줄게요. 출근하지 마세요.”
정선우는 서도운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그를 보며 서도운은 무언가 깨달은 듯 말을 덧붙였다.
“정선우 씨가 이직한 그 회사, 백경 프로덕션 소유주가 나랑 누나예요.”
양원구에게 빈 안주 접시를 내민 남자는 바 테이블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향해 슬며시 몸을 기울였다.
“……처음 설립 때와는 완전히 달라요. 지금 지분은 ‘더 문’이 4, 누나랑 내가 3, 백 감독이 2, 오 감독님이 1을 가지고 있는 구조예요.”
“오 감독님이면 촬영감독인 오경식 감독님이요?”
“네, 백 감독이 오 감독님께 신세진 게 워낙 많아서 양도했는데 안 받는다는 걸 억지로 떠맡긴 거라서 지분 권리는…….”
양원구가 접시 가득 커피 땅콩을 담아 내밀자 남자는 기울였던 몸을 바로 하고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계속 이래?”
“재무제표가 어쩌고저쩌고 그런 거밖에 없더라. 업무 관계로 아는 사이인가 봐.”
양원구의 말에 남자는 다시 진지한 얼굴로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는 두 사람을 쳐다봤다.
“자회사로 편입을 안 시키려고 지분을 나눈 건가요?”
“그렇죠, 백 감독이 마누라 잘 만났다는 소리를 듣긴 해도 마누라가 회사를 차려준 거랑 마누라 밑에서 일하는 건 다르니까요. 백 감독은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은 아닌데 주위에서 계속 뭐라고 해대서요.”
“그럼 운영을 백 감독님 부인이 하시는 건가요?”
“그게 문제예요. 처음에는 백 감독한테 맡겼는데 그 새끼가…….”
남자는 양원구에게 안주 접시를 받아들고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술맛 떨어지는 이야기네.”
“뭘 기대했는데?”
낄낄거리는 양원구를 보며 남자는 머쓱한 얼굴로 대꾸했다.
“뭐, 그림이 되잖아.”
“그림이야 좋지, 우리가 예상한 그림이 아니라서 그렇지이.”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양원구는 어둑한 술집의 조명으로 더욱 잘생겨 보이는 두 남자를 보며 혀를 찼다. 생긴 것도 분위기도 잘 어울리는 두 남자가 고작 한다는 이야기가 로맨틱함은 눈곱만큼도 없는 일 얘기라니, 저러다 치워야 할 놈이 하나 더 늘어나면 어쩌나 싶었다.
서도운은 휴대폰 창에 재무제표를 띄워 건넸다. 정선우는 화면을 확대해 작은 숫자들을 들여다보다 메시지가 왔음을 알리는 알람에 놀라 서도운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화면을 두드려 메시지를 확인하던 서도운이 피식 웃고는 그를 쳐다봤다. 그는 서도운의 시선에 담긴 뜻을 알 수 없어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정선우 씨 애인이 이쪽으로 온다고 하네요.”
이어진 말에 정선우는 아까 갔던 바에서 사귀고 있는 남자를 만나기로 했었다는 걸 떠올렸다. 그러나 서도운과의 대화가 길어질 것 같아 약속을 취소하는 메시지를 보냈고 알았다는 답도 받았다. 대체 뭐가 문제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요?”
“나랑 정선우 씨 사이를 오해한 것 같아요.”
“오해요?”
정선우는 자신과 서도운 사이를 오해할 만한 이유를 떠올릴 수 없었다. 그들 사이에는 ‘백경 프로덕션’ 외에 관련성이 전혀 없었다.
그가 아무런 말이 없자 서도운은 휴대폰 화면에 대화창을 띄워 보여줬다.
“정선우 씨와 제가 굉장히 특이하게 퇴장을 해서 다들 놀랐나 봐요.”
서도운이 내민 휴대폰 화면 속에는 커다란 눈을 반짝이는 오리 이모티콘이 보였다.
[문경운 : 여기 난리 났어]
[문경운 : 팝콘을 가마니로 튀기고 있습니다]
[문경운 : 난 형이랑 씹선비가 전생의 연인이었다는 걸 밀고 있어]
[문경운 : 여기 애들 아침 드라마를 너무 봤어]
[문경운 : 막장이라니! 이게 막장이라니!]
[문경운 : 아, 궁금해~~~~~~~~~]
발을 구르며 바닥을 뒹구는 오리 이모티콘 이후에도 일방적으로 보내는 메시지는 계속 이어졌다.
[문경운 : 아직도 둘이 같이 있어?]
[문경운 : 심장이 콩닥콩닥]
[문경운 : 거기 원구 형네지?]
[문경운 : 이거 진짜 막장?]
[문경운 : 씹선비 애인이 거기 간다는데]
[문경운 : 채널 고정]
[문경운 : 30초 후를 기대하세요]
기도하듯 두 손을 꼭 모으고 눈을 깜박이는 오리가 나타나며 화면이 멈추었다.
정선우는 화면을 움직여 길게 이어지는 메시지의 행렬을 다시 봤지만, 이 이야기의 맥락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서도운 씨와 제가 왜 전생의 연인이라는 거죠?”
그의 말에 서도운은 커다랗게 소리 내 웃었다. 듣는 사람까지 기분이 좋아지는 특이한 웃음소리였다.
“그러게요. 따지면 폭행 가해자와 피해자쯤 되겠군요.”
정선우는 남은 맥주를 홀짝이며 옆자리에 앉은 남자를 바라봤다. 이런 곳에서 대화할 주제는 아니지만, 최근에 누군가와 대화한 시간 중 가장 편안한 시간이었다.
독서 취향이나 최근에 본 영화에 대해 묻고 답하는 것보다 재무제표를 들여다보며 지분관계나 보유자산의 유동성을 이야기하는 게 더 좋았다. 게다가 이 대화에는 내일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보너스까지 붙어있었다.
쓸데없는 이유로 대화의 흐름이 깨졌다는 게 아쉬웠다.
“더 마실래요?”
부드럽게 물어오는 목소리에 정선우는 자신의 술잔을 내려 봤다. 하얀 거품 자국만 남은 빈 잔을 보며 더 마셔도 될까 고민했다. 원래 술이 약한 데다 몇 년 동안 맥주 두어 잔 정도밖에 입에 대지 않았다.
“다 마셨으면 치워줄까?”
이어진 양원구의 물음에 더 마셔야 할지 그만 마셔야 할지 혼란스러워져 선뜻 답할 수 없었다.
“형, 거긴 그대로 두고 얼음이나 줘. 내가 보내준 후추로 만든 거나 내놔봐.”
그가 무어라 대답하기 전 서도운이 끼어들어 자신의 빈 잔을 가리켰다. 양원구는 새로운 잔에 얼음을 가득 채워 서도운의 앞에 내려놨다.
“그 후추가 맛있기는 하더라. 역시 후추는 좋은 거 먹어야 해.”
양원구가 냉동실에서 통을 하나 꺼내 무언가 접시에 담아 건넸다. 서도운은 접시에서 한 조각을 들어 입에 넣고 그의 앞에 접시를 내밀었다.
“베이컨 칩이에요. 먹어봐요.”
정선우는 접시 위에 놓인 것 중 가장 작아 보이는 걸 골랐다.
베이컨 위에 후추가 뿌려져 있을 뿐 특이한 건 없어 보였다. 입에 넣고 천천히 씹자 그가 알고 있는 베이컨 맛이 느껴졌다.
짜고 느끼하고 매운……, 모두 혀가 아는 익숙한 맛이었지만 달랐다.
“맛있어요.”
그의 말에 얼음 가득한 자신의 잔에 기네스를 따르던 서도운이 방긋 웃었다. 그 웃음에 정선우는 해야 할 말을 제때 한 것 같아 만족스러웠다.
빈 잔에서 흘러내린 물기에 종이 코스터가 불어있었다. 부푼 종이 귀퉁이를 긁으며 입안에 남은 후추 알갱이를 혀로 굴렸다. 묘한 단맛이 느껴졌다. 빈 잔을 보자 혀에 남은 짠맛에 목이 탔다. 맥주가 마시고 싶어졌다.
거칠게 문이 열리는 소리에 술집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출입구를 향했다. 우르르 떼를 지어 들어오는 사람들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남자는 바 테이블로 걸어와 두 사람 사이에 섰다. 옷에 술을 엎지르기라도 한 듯 독한 술 냄새가 흘러나왔다.
“두 사람, 무슨 사이야?”
그는 서도운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자신과 서도운을 번갈아 가며 살피는 시선도, 질문의 내용도 불쾌했다.
그가 입을 다물자 기묘한 긴장감이 그들 사이에서 퍼져나갔다.
“그 질문, 나한테 해줄래요?”
그를 노려보던 남자는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서도운이에요.”
남자는 자신을 향해 내밀어진 손을 머뭇거리다 잡았다.
“최영해입니다.”
“안녕하세요, 공식적인 직함이 없어서 정선우 씨가 뭐라 소개를 못 하는 것 같은데, 이번에 정선우 씨가 이직한 회사에서 제가 이사 정도 되거든요.”
웃음만큼이나 말투도 가벼웠다. 그러나 그 가벼운 말에 담긴 뜻에 최영해의 눈과 입이 점점 벌어졌다.
“그럼……, 같은 회사란 말인가요?”
“제가 정선우 씨 직장 상사예요.”
세 남자를 향했던 시선이 우수수 흩어지며, “어우, 진짜 싫다”라는 말을 시작으로 비슷한 맥락의 말들이 쏟아졌다. “후배도 싫은데 상사래”, “상상만 해도 소름 끼치네”, “마주치는 순간 퇴사야”……. 수군거리는 말들 사이로 술을 더 주문하는 소리가 곳곳에서 이어졌다.
손님들이 다시 각자의 대화에 다시 열중하자 문가에 서 있던 이들은 당황한 얼굴로 밖으로 나갔다. 그들과 함께 있던 인상 좋은 남자가 바 테이블로 다가와 정선우에게 아는 체를 했다.
“안녕하세요, 전 도운이 형 친구인 문경운이에요. 담에 찐하게 술 한잔해요.”
술술 흘러나오는 소개에 정선우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소개도, 악수도 건네지 않았지만 문경운은 상관없다는 듯 쪼르르 서도운에게 다가갔다.
“형, 잘생겼는데 재무회계 담당자라던 사람이 씹선비야?”
문경운은 가까이 있는 사람은 모두가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서도운에게 물었다.
“응.”
서도운은 봄베이 사파이어 병의 뚜껑을 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형네 회사 중에 어느 거?”
“백 감독.”
“아, 그쪽.”
술잔에 진을 따르고 남은 양을 확인한 서도운은 무심한 어투로 말을 건넸다.
“정선우 씨, 어쩔래요? 내일 출근해서 계속할까요?”
정선우는 최영해를 피해 서도운의 모습을 보기 위해 이리저리 몸을 움직였다.
“아니요, 여기서 계속했으면 좋겠습니다.”
“뭘 계속하는데?”
최영해의 질문에 그는 자신이 뭐라고 답하든 최영해를 만족시켜줄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무슨 말을 해도 그것은 오답이고, 원하는 답이 아니라면 답을 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보여주신 재무제표가 4년 전이죠? 다음 해 지분을 나누면서 채무는 어떻게 처리했습니까?”
“아, 그걸 ‘더 문’이 갚아 주느냐, 누나가 갚아 주느냐로 말이 많았는데 백 감독 개인 채무로 처리했어요. 그때 집도 팔고, 차도 팔고 백 감독 명의로 된 개인 자산은 다 처분했죠. 지금 백 감독 개인 자산은 프로덕션 지분 2할뿐이에요.”
목소리만 들릴 뿐 얼굴이 보이지 않자 답답했다. 정선우는 자신의 앞에 선 남자에게 무표정한 얼굴로 요구했다.
“비켜.”
“왜 날 무시해?”
“일하는데 방해했잖아.”
“몰라서 그랬어.”
“알았으면 비켜.”
그를 노려보는 최영해의 눈 끝이 매섭게 올라갔다.
“야, 네가 뭔데!”
최영해의 고함 소리에 술집에 있던 사람들이 입을 다물고 두 사람을 쳐다봤다.
“네가 얼굴 말고 볼 게 뭐 있다고 날 무시해!”
무표정하게 쳐다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자 최영해는 주먹을 움켜쥐고 그를 노려봤다.
“시발, 좆도 없는 새끼가…….”
최영해는 욕을 잔뜩 해대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시근덕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그 뒤를 문경운이 쫓아갔다.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은 사람이 사라지자 서도운이 보였다. 부드럽게 웃는 남자의 얼굴은 소란이 일어나기 전과 변함이 없었다.
“한 잔 더 할래요?”
서도운의 물음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