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재투성이 남자 (6/35)

6. 재투성이 남자

“원구 형, 밀러 하나 줘.”

서도운은 다시 한 병을 한 잔으로 만들어 그의 앞에 내밀었다. 다시 봐도 신기해서 조심스럽게 돌려가며 살폈다.

“신기해요?”

그런 물음은 고민하지 않고 답할 수 있었다. 정선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서도운은 생긋 웃었다.

“유명 맥주 브랜드는 전용 잔이 있어요. 전용 잔은 그 맥주를 가장 맛있게 마실 수 있는 형태를 하고 있거든요, 맥주 한 병이 잔 하나에 채워질 수 있도록 디자인되어 있어요.”

맥주병을 가져와 잔 옆에 두고 높이를 비교하자니 맥주병과 맥주잔의 용량이 얼추 비슷한 것 같았다.

맥주를 마시며 자신이 신기해하는 걸 서도운이 어떻게 알았을까 궁금했다. 맥주잔에 대한 의문이 해결되자 또 다른 의문이 생겼다. 베이컨 칩 하나를 입에 넣으며 서도운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 시선을 읽은 듯 서도운이 말을 이었다.

“잔 용량이 병 용량이랑 같다는 건 모르는 사람이 보면 꽤 신기할 일이죠.”

정선우는 놀라 베이컨을 씹던 걸 멈추고 서도운을 쳐다봤다.

그가 일순 정지하자 서도운은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쾌활한 웃음소리가 술집 내부에 울렸다. 비웃는 기색은 아니기에 그는 다시 베이컨을 씹으며 서도운을 바라봤다.

웃음을 그친 서도운은 그의 얼굴을 가리켰다.

“정선우 씨 얼굴에 쓰여 있어요.”

“얼굴이요?”

“표정 말이에요.”

서도운의 목소리와 함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가 익숙한 통증과 함께 웃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혀끝에 피 맛이 느껴졌다.

그럴 리가 없었다.

어릴 때부터 아이답지 않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언제부터인가 얼굴 근육을 움직여 표정을 만들어 낼 수 없었다.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표정은 물론 화를 내는 것도 불가능했다.

사람들 사이에 적당하게 섞여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럴듯한 표정을 지을 수 있어야 했다.

편하게 살기 위해서는 즐겁지 않아도 웃을 수 있어야 하고, 적당히 화도 낼 수 있어야 하고, 가끔 슬픈 척하는 것도 필요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표정을 만들어낼 수가 없었다.

중, 고등학교에서는 등교해서 하교할 때까지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대학교 때는 다들 그에게 “그 얼굴로 왜 그렇게 사냐”라거나 “얼굴값 못하는 놈”이라고 짜증을 냈다. 군대에 가서는 선임이 생긴 게 아깝다며 볼 때마다 웃으라고 명령을 했고, 회사에 들어가서는 “눈치 없는 새끼”라며 연차가 쌓일 때까지 욕을 들었다.

입사해서 4년 동안 그가 들었던 말은 “분위기 파악 못 하는 병신”, “반반한 얼굴 믿고 까부는 거만한 새끼”, “웃는 낯으로 술 한잔 못 따르는 싸가지 없는 놈”, “듣기 싫은 말만 골라 하는 주둥이가 비틀어진 자식” 같은 말이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그도 가끔 거울 속의 표정 없는 자신을 보며 뭐가 문제일까 생각하곤 했다. 기쁘거나 슬픈 감정을 느낄 수 없어 표정이 없을 수도 있고, 너무나 오랫동안 무표정하게 지내서 얼굴 근육을 움직이는 법을 잊은 건지도 몰랐다.

29살의 정선우가 지을 수 있는 표정은 우울해하거나 피곤에 지친, 그런 표정뿐이었다.

“정선우 씨 감정이 저한테는 보여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입안에 고인 피를 삼켰다.

그는 자신의 얼굴 근육이 움직이고 있다는 건 느꼈지만 그것이 어떤 표정인지, 어떤 감정을 드러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난 수의사잖아요.”

커다란 비밀이라도 말해주는 듯 고개를 기울여 속삭이는 서도운의 얼굴에는 장난스러운 웃음이 맺혀 있었다.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들은 사람처럼 표정으로 감정을 나타내지 않아요. 가끔 사람 같은 표정을 하기도 하지만 온몸으로 감정을 표현하죠.”

손끝으로 만지면 촉감이 느껴질 것 같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가슴을 쓰다듬었다.

“정선우 씨는 표정은 변화가 없지만, 몸짓이나 분위기가 여러 가지 감정을 드러내고 있어요. 근데 워낙 잘생겨서 다들 얼굴만 보느라 다른 부분은 눈에 안 들어올 거예요.”

서도운의 눈이 살며시 휘어졌다. 눈에서 시작된 웃음이 얼굴 전체로 퍼졌다. 말 그대로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 같은 환한 미소였다.

신기했다.

여러 가지 얼굴로 웃을 수 있는 남자를 정선우는 멍하니 바라봤다.

서도운은 그런 그를 보며 다시 웃었다. 그건 또 다른 웃음이었다.

마주친 시선에서 시작된 미소가 입술을 따라 흘러내려 왔다. 술에 젖은 입술이 한쪽 끝을 끌어당겨 비틀린 곡선을 만들어냈다.

그 비틀림은 어딘가 이상했다.

알 수 없는 감각에 그는 시선을 내려 맥주잔을 따라 생긴 거품의 자취를 쫓았다. 목이 말라왔다.

“내일 출근 안 하려면 하던 이야기나 계속하죠.

서도운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3년 전에 백 감독이 날릴 거 다 날리고 운영에는 관여하지 않기로 했어요. 그나마 자기가 거기엔 전혀 능력이 없다는 걸 알고 깨끗하게 포기해서 다행인데, 못 고친 버릇이 있어서…….”

또 다른 서류를 화면에 띄운 서도운이 휴대폰을 내밀었다. 정선우는 휴대폰을 받아 페이지를 넘겨 가며 꼭 확인해야 할 항목들을 살폈다. 몇 가지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어 그에 대해 말하려니 자신과 서도운 사이의 빈 공간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정선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 체어를 서도운 쪽으로 밀었다. 충분히 가까워진 자리에 앉아 서도운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이제 화면에 띄워진 숫자를 서도운과 함께 볼 수 있었다.

“백 감독님이 횡령을 하고 있는 겁니까?”

“그렇게 안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죠. 일단 ‘더 문’ 쪽은 이렇게 처리하고 있는데…….”

서도운은 새로운 서류를 찾아 휴대폰 화면에 띄우고는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화면 속의 숫자를 가리키며 그에게 바싹 다가왔다.

서도운의 무릎이 허벅지에 닿았다. 옷감 아래로도 타인의 몸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정선우는 자세를 바꿀까 고민하다 그걸 신경 쓰는 게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새롭게 나타난 숫자와 그것을 설명하는 서도운의 목소리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여긴 회계 사무소, 이건 ‘더 문’ 쪽 재정 담당자인 오동석 이사님, 이건 서도희 부원장 번호예요. 백 감독 사모라고 하면 질색하니까 절대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광고나 영상 쪽에서는 백 감독이 유명하지만 백 감독이 서 부원장 키링이라는 건 아는 사람은 다 알거든요.”

그는 서도운이 알려주는 전화번호를 차례차례 자신의 휴대폰에 저장했다.

“수경 씨가 급하다니까 정리되면 연락 주세요. 오 이사님이나 김 소장님을 만나야 제대로 업무 파악을 할 수 있을 거예요.”

“최대한 빨리 연락드리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그를 보며 서도운은 부드럽게 웃었다.

“천천히 해요. 업무 공백이 있는 것도 아니고 거긴 급할 게 없는 곳이니까요. 그리고 당분간 백 감독이 사고를 안 칠 것 같거든요.”

서도운이 쾌활한 어조로 말하는 걸 들으며 그는 맥주잔을 들었다.

아직도 닿아있는 무릎이 보였다. 누구도 그들 사이에 끼어들 수 없을 것 같았다.

문득 자신의 얼굴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감정을 드러낸 얼굴이 낯설어 맥주잔을 입가로 가져가 얼굴을 가렸다.

맥주잔 너머 자신을 보고 있는 눈이 보였다. 잔을 치우면 표정이 읽힐 것 같아 얼굴 위에 떠오른 감정이 가라앉을 때까지 조금씩 맥주를 마셨다.

그가 텅 빈 잔을 내려놓자 서도운이 자신의 잔을 들며 말을 건넸다.

“안 마실 줄 알았는데 아니네요.”

“굉장히……, 맛있어요.”

“한 병 더 마실래요?”

“네.”

또 제멋대로 얼굴 근육이 움직였다. 괴상하게 보일 것이 분명한 얼굴을 가릴 잔이 없어 고개를 숙였다.

아직도 서도운과 닿아있는 작은 접점이 보였다.

맥주를 주문하는 소리와 발소리가 들리고 양원구의 커다란 손이 맥주잔과 병을 치우는 게 보였다. 냉장고 문을 여닫는 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살그머니 눈을 들어 옆에 앉은 남자를 보았다. 시선이 닿자 술을 마시던 서도운은 술잔을 내리고 부드럽게 웃었다. 그 웃음에 그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상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서도운은 그에게 고개를 들라고 말하지 않았다.

맥주가 가득 찬 새로운 잔을 그의 앞에 밀어놓고 마시라고 권하지도 않았다. 정선우는 손끝으로 코스터 끝을 긁으며 언제쯤 맥주잔을 들어야 할까 생각했다.

“정선우 씨, 내 얼굴이 보기 싫어요? 되게 재수 없게 구네.”, “야, 왜 사람을 똑바로 못 봐? 죄지었어?”, “사내새끼가 그게 뭐야! 그럴 거면 대가리를 아예 땅바닥에 박아!”…….

고개를 들어서 자신을 보라고 하던 수많은 말들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궁금했다.

고개를 들어서 자신을 보라고 하지 않는 남자의 표정이 보고 싶었다. 시선을 마주치면 다시 웃어줄지도 몰랐다.

고개를 들어 맥주잔을 입에 대고 서도운을 쳐다봤다. 눈가에 어린 미소가 그에게 흘러왔다.

“맛있어요?”

“네.”

몇 모금 마신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서도운은 아주 큰 칭찬을 들은 듯 환하게 웃었다.

“이쯤 하면 대충 마무리해도 될 것 같은데, 쉬러 나온 사람을 붙잡고 일 이야기해서 미안해요.”

“아뇨, 괜찮습니다.”

“술값 같은 건 걱정하지 말고 마음껏 마시고 내일 출근하지 마세요. 그 회사에서 노예처럼 일해야 하는 사람은 백 감독밖에 없어요. 적당히 놀면서 일해요. 무조건 정시 퇴근, 야근은 절대 금지예요.”

이상한 당부에 또다시 제멋대로 얼굴이 움직였다. 어떤 표정인지는 모르지만 서도운은 생긋 웃으며 그의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 말이 그렇게 좋아요?”

서도운과 닿았던 어깨와 팔을 따라 소름이 돋아나는 게 느껴졌다. 피부가 아려와 정선우는 재킷 위로 자신의 팔을 쓸어내렸다.

“역시 직장인은 출근이랑 야근하지 말라는 소리가 제일 듣기 좋나 보네요.”

멀어지는 서도운의 어깨가 아쉬웠다. 그래도 아직 그와 서도운의 무릎이 닿아있었다. 그 접점을 놓치지 않으려 좀 더 다가갔다.

“원구 형, 기네스 하나 더.”

양원구는 기네스 병과 새 잔을 테이블 위에 놓으며 봄베이 사파이어 병을 들어 남은 양을 확인했다. 얼마 남지 않은 진을 보며 혀를 찼다.

“작작 처먹어어. 소주도 아니고…….”

“미국에서 이 정도는 센 것도 아냐.”

“네가 술꾼인 건 아는데 그러다 죽어.”

서도운은 기네스를 잔에 따르려다 그를 쳐다봤다.

“기네스는 좀 다른데, 볼래요?”

뭐가 다르다는 건지 모르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이며 ‘네’라고 대답했다.

그의 앞으로 기네스 잔을 옮긴 서도운은 어두운 빛깔의 맥주를 단숨에 채웠다.

크림색의 거품이 구름처럼 일어나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잔 가까이 얼굴을 가져갔다. 거품은 잔의 표면을 따라 끊임없이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이거 이상한데요.”

조그맣게 속삭인 그 말에 서도운은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밝은 웃음소리에는 그저 즐거움만 담겨있어 정선우는 그 웃음이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정선우 씨는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네요.”

웃음기가 남은 서도운의 목소리는 너무나 달콤하게 들렸다.

“다른 맥주는 탄산이 들어가 있는데 기네스는 질소가 들어있어서 그래요. 질소가…….”

맥주잔을 가리키며 설명하던 서도운이 휴대폰 화면이 깜박이며 연이어 나타나는 알림 창에 말을 멈췄다.

“드라마틱하네…….”

휴대폰을 확인한 서도운은 정선우를 향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정선우 씨 애인이 격분해서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데, 술에 완전히 취해서 대화가 불가능한 상태라고 하네요.”

“네?”

“원구 형, 옥상 열쇠 좀.”

양원구가 테이블 아래서 열쇠뭉치를 꺼내 던지자 서도운은 허공에서 낚아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선우 씨, 나가서 이야기합시다. 여기서 구경거리가 될 필요는 없죠.”

그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난 서도운을 따라 가게 밖으로 나갔다.

서도운은 건물 밖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아니라 문 옆에 쌓여있는 술병 박스를 밀었다. 박스 뒤로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잠시만요…….”

휴대폰의 플래시가 켜지고 먼지로 뒤덮인 계단이 보였다.

정선우는 서도운의 뒤를 따라 꿉꿉한 공기로 채워진 계단을 천천히 올라갔다. 계단 끝에 이르자 서도운은 양원구에게 건네받은 열쇠뭉치를 뒤져 문고리에 밀어 넣었다. 두꺼운 철문이 열리자 시야와 공기가 갑자기 맑아졌다. 정선우는 낯선 공간에 선뜻 발을 내딛지 못하고 바쁘게 움직이는 서도운의 뒷모습을 눈으로 뒤쫓았다.

어디선가 낡은 접이식 의자를 꺼내온 서도운이 의자에 쌓인 먼지를 대충 털어내고 그를 향해 외쳤다.

“이리 와요.”

정선우는 삐걱대는 의자에 앉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특별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옥상이 있는 줄 몰랐어요.”

“원구 형이 처음에는 옥상 문을 열어뒀어요. 화장실에서 담배 냄새나는 게 싫다고 담배 피우고 싶으면 여기서 피우라고요. 근데 몇몇이 좀 다른 용도로 쓰면서 항의가 들어와서 막아버렸죠.”

“다른 용도요?”

“음란행위요. 건물이 낮아서 주위에서 다 보이거든요.”

정선우는 다시 주위를 둘러봤다.

오래된 2층 건물은 길가의 전면 외에 좌우, 뒤로 모두 높은 건물에 둘러싸여 있었다. 언뜻 봐도 십여 층은 넘을 빌딩의 창의 대부분은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고 창문가에 어른거리는 사람 그림자도 보였다.

“……이런 곳에서 뭔가를 한다고요?”

“이런 장소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서도운은 그를 보며 슬며시 입술 끝을 끌어 올렸다.

그가 지나온 어둠 속에서 여러 가지 소리가 들렸다. 실랑이를 벌이는 목소리와 날카로운 외침, 쿵쿵거리는 발소리.

그의 심장도 부산스러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최영해가 뛰어나와 곧장 정선우를 향해 달려와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야, 이 새끼야! 네가 뭔데 그래!”

주변 빌딩의 창에서 흘러나온 불빛으로도 최영해의 붉어진 얼굴이 보였다. 흘러나오는 호흡에 밴 소주 냄새만으로 정선우는 취할 것 같았다. 고개를 돌리며 입을 다물자 최영해가 목이 죄도록 멱살을 끌어당겼다.

“내가 그렇게 싫어?”

“놔.”

그가 옷깃을 붙잡은 최영해의 손목을 잡아당기자 절대 놓지 않을 것 같은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이거……, 네가 처음으로 내 몸에 손댄 거야.”

누군가를 죽일 것 같았던 화난 얼굴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최영해는 울기 시작했다.

“내가 너랑 사귄 거 맞아? 대답 좀 해봐…….”

“맞아.”

정선우의 대답에 최영해는 울음을 그치고 비슬비슬 웃었다.

“……아냐, 이건 사귀는 거 아냐. 나한테 한 번이라도 웃어준 적 있어? 볼 때마다 짜증 내고……, 만나는 날마다 기분 나쁘고…….”

“미안해.”

“너 말 잘하더라……. 나한테 세 마디 이상 한 적 없어서 원래 그런 줄 알았지. 뭘 물어도 ‘아니’, ‘싫어’…… 이거밖에 안 하잖아.”

최영해의 일그러진 얼굴은 흐릿한 어둠 속에 더욱 사납게 보였다.

“사람 무시하고 비참하게 만들고……. 시발, 네가 뭐 대단한 스타라도 되는 줄 알아? 아이돌도 너보다는 팬 서비스 좋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 그를 향해 최영해는 몇 번이고 주먹을 쥐었다 풀었다.

“섹스하기 싫다기에 섹스만 그런 줄 알았지……. 얼마나 귀하신 몸인지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도 못하는데 누가 너 같은 거랑 사귀겠어?”

최영해는 고인 눈물을 아이처럼 손등으로 비벼 닦고는 그를 빤히 쳐다봤다.

“넌 결벽증 정신병자야! 너 같은 새끼는 죽을 때까지 혼자 살아야 돼!”

속에 있는 말을 다 꺼냈는지 최영해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갔다.

옥상 철문에 기대선 문경운이 보였다. 서도운은 문경운에게 다가가 조그만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고는 철문을 닫고 처음 앉았던 낡은 접이식 의자에 앉았다.

지나가는 누군가의 웃음소리 사이로 금속이 긁어대는 소리가 섞였다. 멀리서 들리는 경적소리와 스쿠터의 낡은 엔진 소리, 누군가의 욕설, 셔터가 내려앉는 소음이 그의 주위를 채우는 동안 서도운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정선우는 서도운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지 확인하려 고개를 들었다. 어둠 속에 빛이 있었고, 그 속에 서도운이 그를 향해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이리 와서 앉아요.”

곁에 있는 의자를 가리키는 서도운의 손짓에 그는 빈자리로 천천히 걸어갔다.

“다음엔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을 만나요. 정선우 씨는, ……느리니까.”

서도운의 말에 그는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대답하는 거요?”

“아니, 전부 느려.”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고개를 숙여 내려다본 바닥에는 서도운의 구두가 보였다. 구두 끝에 매달린 그림자가 그의 발치로 이어졌다. 그림자에도 색이 있다면 어쩐지 서도운의 그림자는 자신의 것과 달리 밝고 예쁜 색일 것 같았다.

느리다는 게 무슨 뜻인지 묻고 싶었다.

고개를 들자 부드럽게 휘어진 눈가와 희미한 빛에 깊게 팬 입술 끝이 보였다.

“술 더 마실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