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 강아지 코의 마법 (7/35)

7. 강아지 코의 마법

등에 업은 정선우를 호텔 침대에 내려놓은 서도운은 참았던 숨을 헐떡였다.

“환장하겠네…….”

정선우가 완전히 의식이 없었다면 업고 오는 게 편했을 텐데, 반만 의식이 없어서 오는 내내 그의 등에서 일어나려 했다. 등에서 버둥거리는 길고 뻣뻣한 몸뚱이를 떨어뜨리지 않게 업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호텔 입구부터 객실까지 긴 거리가 아님에도 체력이 바닥난 기분이었다.

미니바로 걸어가며 잔뜩 뭉쳐진 어깨를 돌리자 “아이고” 소리가 절로 입에서 흘러나왔다. 생수병을 꺼내 물을 마시려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돌아보자 눕혀둔 정선우가 눈을 말똥거리며 일어나 앉아있었다.

“이건 또 뭐야…….”

긴긴 밤이 될 것 같았다. 

* * *

옥상에서 내려온 그들은 두고 간 맥주잔을 들었다.

서도운은 잔에 가득 담긴 기네스를 몇 모금 마시고 봄베이 사파이어로 빈 공간을 채웠다.

호기심 어린 시선에 ‘Dog's Nose’라는 흑맥주 칵테일이라고 알려주자 정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그의 잔을 쳐다보는 정선우의 모습에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정선우의 시선은 너무나 솔직했다.

그건 무슨 맛인가요?

그 솔직함에 웃음을 터뜨리며 아직 마시지 않은 자신의 잔을 정선우에게 내밀었다. 맛을 보라고 권하자 한참을 망설이다 겨우 잔을 들었다. 정선우는 한 모금 마시고는 놀란 얼굴로 “엄청 센데요”라며 잔을 내려놨다.

짧은 숨을 뱉어내고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괴로워하기에 베이컨 칩을 먹으라고 권하자 두말없이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베이컨 칩을 하나 더 먹고는 겨우 진정 되었는지 가볍게 한숨을 내뱉었다.

호기심이 충족되었는지 정선우는 자신의 맥주잔을 들었다. 몇 모금 마시고는 잔을 내려놓고 자신의 맥주잔과 그의 흑맥주 칵테일 잔을 번갈아 쳐다봤다.

서도운은 정선우를 지켜보며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았다.

잘생긴 남자가 무표정하게 두 개의 술잔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듯 보였지만 그의 눈에는 지금까지 맛있게 먹은 맥주의 맛이 달라져 당황하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정선우는 매우 진지한 얼굴로 “이거 이상해!”, “왜 이렇지?”라고 외치고 있었다.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왜 나한테 안 물어요?”

“……뭘요?”

“맥주 맛이 달라져서 놀랐잖아요.”

동그랗게 눈을 뜨고 그를 보는 정선우에게 서도운은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Dog's Nose’는 도수가 꽤 높아요. 45도가 넘는 걸 섞었거든요. 그걸 마시고 맥주를 마시니까 맥주 맛이 밍밍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정선우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맥주잔을 만지작거리던 손이 사라져 있었다. 사라진 손을 찾아 시선을 내리니 테이블 아래 얌전히 모아 쥐고 있었다. 꼭 쥐고 있는 두 손이 겁먹은 듯 보여서 안쓰러웠다.

“물어보면 가르쳐 줄 텐데 왜 혼자서 고민해요?”

정선우는 물음에 답하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서도운은 답을 재촉하는 대신 자신의 잔을 들었다. 잔을 모두 비울 때쯤 정선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바보 같잖아요.”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정선우를 쳐다봤다. 대체 어떤 얼굴로 저런 말을 하는지 궁금했지만 고개를 숙이고 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코스터를 만지작거리는 남자의 손이 혼나는 아이처럼 느껴져 달래줘야 할 것 같았다.

“그게 왜 바보 같아요?”

정선우는 살짝 얼굴을 들고 그를 쳐다봤다.

“이런 거…… 알아야 하잖아요.”

계속 예상외의 대답이 이어지자 흥미로웠다. 양원구에게 새 기네스와 잔을 받아 따랐다. 잔 속에 피어나는 거품이 가라앉는 걸 보며 뭐라고 말해야 할까 생각했다.

“술 좋아해요?”

봄베이 사파이어를 기네스 잔에 부으며 물었다. 넘칠 것처럼 가득 채우고서야 손을 멈추고 병을 내려뒀다. 고개를 돌리자 그를 보고 있는 정선우의 얼굴이 보였다. 겨우 마주한 시선에 부드럽게 웃어주자 정선우는 조그맣게 “아니요”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몰라도 돼요.”

정선우의 시선이 머무는 동안 그는 계속 웃었다. 웃음을 거두면 정선우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보여주지 않을 것 같았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만 아는 건가요?”

“좋아하는 사람도 몰라도 되는 거예요. 알고 싶은 사람만 알면 돼요. 그래야 정선우 씨처럼 모르는 사람한테 자랑할 수 있죠.”

서도운의 말에 정선우의 얼굴에 어렸던 긴장이 천천히 풀어지며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러나 말 대신 그는 자신의 맥주잔을 들어 마시기 시작했다.

“정선우 씨, 몇 살이에요?”

그의 물음에 마시던 정선우는 맥주잔을 입에서 떼고 대답했다.

“스물아홉이요.”

“스물아홉, 좋네.”

“서도운 씨는 몇 살인데요?”

“서른셋.”

맥주잔을 만지작거리는 모양새가 뭔가 또 걸리는 게 있는 것 같았다.

서도운은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스물아홉 살이라지만 때때로 조카인 백도경보다 어리게 느껴지는 남자였다. 그런 남자가 마시고 놀랐던 술을 그는 능숙하게 목구멍으로 넘겼다.

정선우는 맥주잔을 비우고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나이가…… 더 많을 줄 알았어요. 생각보다 어려서…, 놀랐어요.”

“늙어 보여요?”

“아니요, 그런 거 말고…… 굉장히, 어른 같아서요.”

“멋진 어른 남자?”

“네.”

농담으로 건넨 말에 정선우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키득거리며 웃음을 터뜨리자 정선우는 시무룩한 기색으로 고개를 내렸다.

그 앞에 놓인 텅 빈 맥주잔을 보고 그는 자신의 잔을 정선우 앞에 내려놨다.

“다시 마셔 볼래요?”

앞에 놓인 술잔을 노려보던 정선우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술잔을 들었다.

서도운은 입을 막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정말 마실까 하는 기대감에 두근거리며 바라보자 정선우는 고집부리는 아이처럼 술잔을 입에 가져가 두어 모금 마신 후 하얗게 질린 얼굴로 술잔을 내려놨다. 다급하게 베이컨 칩을 입에 넣고 꾹꾹 씹어댔다.

정선우가 두 번째 베이컨 칩을 입에 넣는 순간 그는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커다랗게 소리 내 웃다가 테이블 위로 엎드려 끅끅거리는 소리를 내며 웃음을 이어갔다. 간신히 웃음을 그친 그는 베이컨 칩 네 개를 먹은 후 심호흡을 하고 있는 정선우를 보며 다시 터지려는 웃음을 참고 말했다.

“어때요?”

“이거랑, 먹으면……, 먹을 수 있어요.”

“끅끅……. 정선우 씨, 그러다 죽어요.”

서도운은 다시 터진 웃음을 참지 못하고 웃어대다 정선우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일어나자 웃음을 멈췄다.

“괜찮아요?”

“저…… 화장실 좀…….”

가쁜 숨을 내쉬는 정선우를 따라 그도 일어났다. 휘청거리며 발을 떼는 모습이 위험하게 느껴져 팔을 뻗었다. 정선우는 그대로 그의 품으로 쓰러졌다.

“정선우 씨!”

그가 정선우의 맥박과 호흡을 확인하는 동안 양원구는 술을 못 마시는 사람한테 어떻게 47도짜리를 술을 먹이냐며 그의 뒤통수를 두 대나 때리고, 살인 미수범이라며 119를 부르라고 난리를 쳤다. 뒤통수를 세 대째 맞고, 핸드폰을 들어 119에 도움을 요청하려 할 때 정선우가 눈을 떴다.

깨어난 정선우는 아주 평범한 취객이었다. 완전히 풀린 눈으로 “안 취했어요”라는 말을 반복하며 술을 더 마실 수 있다고 우겨댔다.

양원구는 술을 먹인 사람이 알아서 하라며 화를 냈다. 서도운은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정선우를 이끌고 좁은 계단을 내려와 택시를 불렀다.

택시를 기다리는 내내 어디로 가냐는 정선우의 물음에 그는 호텔에 간다고 몇 번이나 대답했고 왜 호텔에 가냐는 물음에 술을 마시러 간다는 말을 들은 후에야 정선우는 조용해졌다.

호텔로 가는 택시에서 조용하다 싶어 봤더니 정선우는 완전히 의식을 잃은 채 잠들어 있었다. 그는 오히려 이게 다행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내내 아침까지 잠들어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객실로 가는 동안 서서히 눈을 뜨더니 객실 침대에 내려놓자 알코올 좀비 상태로 깨어났다.

“정선우 씨, 물 마실래요?”

“……네.”

생수병을 열어 건네자 정선우의 손이 허공에서 허우적거렸다. 서도운은 한숨을 내쉬며 생수병을 입에 대고 조금씩 먹여줬다. 목이 말랐는지 거의 반병을 마신 후에야 멈췄다.

“정선우 씨, 이대로 곱게 잠들어서 내일 아침에 해장이나 하러 가요. 여기 뒤쪽에 수육국밥 잘하는 데 있거든요.”

“……네.”

얌전히 대답하는 정선우가 마음에 들었다.

“자, 옷 벗고…….”

그는 정선우의 재킷을 벗겨 대충 던져두고 구두를 벗기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 아무렇게나 늘어뜨리고 있는 다리가 길기도 하다 싶었다. 구두를 벗기고 난 다음 양말을 벗겨야 하나 고민하다 고개를 들자 졸린 듯 반쯤 눈을 감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술에 취해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이는 얼굴도 그림이 되는 남자였다.

“양말도 벗겨줄까?”

“네에…….”

양말을 벗기자 여자처럼 길고 갸름한 발이 나타났다. 흉터도 각질도 없는 하얀 피부 아래로 푸른 혈관이 여리게 비쳤다. 무심코 손에 쥔 발목은 가냘프게 보이는 외견과 달리 단단하고 굵었다. 남자의 것이었다.

“정선우 씨는…… 안 예쁜 데가 없네.”

어쩐지 목이 타는 기분이라 발목에서 손을 떼고 일어났다.

그가 움직이자 정선우의 시선도 그를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유순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정선우의 모습에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손을 뻗어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겨주자 쌍꺼풀 없는 아몬드형의 눈이 사르르 감기며 입꼬리를 살며시 끌어 올렸다.

“좋아?”

“네…….”

까만 머리카락은 손가락 사이를 흘러내리듯 매끈하게 빠져나갔다.

“모질이 좋네. 아, 모질이 아니지.”

서도운은 자신도 모르게 정선우를 개로 취급한 게 미안해 넥타이 매듭을 끌어당겨 풀어냈다. 셔츠 단추를 풀며 어쩐지 부루퉁한 얼굴을 하고 있는 정선우에게 당부했다.

“정선우 씨, 토할 것 같거나 화장실 가고 싶으면 말해요.”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를 침대에 뉘어주며 다시 한번 당부했다.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고, 이대로 얌전하게 자요.”

금방이라도 잠들 듯 눈을 감은 정선우가 갑자기 손을 들어 자신의 눈알을 파내려 했다.

“으아아악!”

정선우의 뜬금없는 미친 짓에 놀라 비명을 지르며 팔을 붙잡았다.

“왜? 뭐!”

“……렌즈.”

“렌즈?”

“렌즈…… 빼야…….”

“아! 그 렌즈…….”

손을 놓자 정선우는 자연스럽게 눈가로 손을 가져가더니 꼭 감은 눈 위를 손톱으로 긁어댔다.

“잠깐! 아니! 그걸 그렇게 하면!”

서도운은 정선우의 행동에 기겁해, 놓아줬던 양손을 다시 붙잡았다.

대체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 싶었다. 이대로 두면 정선우가 그의 앞에서 자신의 눈을 후벼 파는 끔찍한 장면을 보여줄 것 같았다.

“어우, 이걸, 뭐…….”

그는 잡고 있던 정선우의 손을 천천히 내려 침대에 눌렀다.

“정선우 씨, 잠시만, 잠시만 이대로 있어 봐.”

서도운은 침대 위에 얌전히 누운 남자의 몸에서 서서히 손을 떼며 물러났다.

“그대로 기다려. 알았지? 그대로…….”

그의 애원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듯 정선우의 손이 휙 하니 자신의 눈으로 향했다.

“안 돼!”

서도운은 정선우의 몸에 올라타 팔을 내리눌렸다.

“알았어, 내가 해줄게! 내가 해줄 테니까 움직이지 마!”

미칠 것 같았다.

그의 그런 마음 따위는 전혀 모른다는 듯 정선우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무어라 중얼거렸다. 알아들을 수 없어 몇 번이나 다시 묻고서야 그게 “렌즈 돌아갔어”라는 말이라는 걸 알아들었다.

“정선우 씨, 손 씻고 올 테니까 그때까지만 좀 참아 봐요.”

정선우는 대답이라도 하듯 입을 방긋거렸지만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입가에 귀를 가져다 대자 “눈 아파”라고 말하는 조그만 목소리가 들렸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는 침대 위에 던져둔 정선우의 넥타이를 가져와 손을 묶었다. 손을 씻고 나왔을 때 눈에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끔찍한 장면을 목격하지 않으려면 이 방법밖에 없을 것 같았다.

“시발, 렌즈……. 내가 꼭 라식이든 라섹이든 해주고 만다.”

손을 씻고 나와 침대 위에서 손이 묶인 채 버둥대는 남자를 보자 납치범이라도 된 것 같았다. 말도 안 되는 난감한 상황을 최대한 빨리 해치우려 정선우를 똑바로 눕혔다. 눈이 아픈지 처연한 얼굴로 눈물을 줄줄 쏟고 있는 모습이 묶여있는 모습과 참으로 조화로웠다.

“정선우 씨, 내가 사람은 처음이에요. 거기다 술도 마셨잖아요. 서로 협조를 해야 무사히 일이 해결될 수 있으니까 제발 움직이지 마세요.”

알아듣든 말든 그는 일단 정선우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버둥대지 못하게 정선우의 몸에 올라타 체중으로 눌렀다.

늘 눈을 까뒤집어보는 개나 고양이 등 소동물이라고 생각하고 위아래 눈꺼풀을 벌려 안구 어딘가에 있는 렌즈를 찾았다. 하나는 아래 눈꺼풀 사이에서, 하나는 눈물샘 쪽에서 찾아내 버리고 나자 정선우는 언제 그랬냐는 듯 눈물을 그쳤다. 배실배실 웃는 남자를 보며 정말 별꼴을 다 겪는다 싶었다.

워낙 술을 잘 마시기에 대부분의 술자리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사람들을 돌보는 것도 익숙했다. 그러나 사람을 묶어놓고 눈을 까뒤집어 렌즈를 꺼낸 건 처음이었다.

서도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사다난한 하루였다고 생각했다. 설마 이것보다 더한 일은 있을 리가 없을 것 같았다.

“흐음…… 화장실…… 오줌 마려…….”

조그맣게 울리는 정선우의 목소리에 서도운은 아직 하루가 끝나지 않았음을 알았다.

“쌀 것 같아…….”

“정선우 씨, 잠시만 참아 봐! 나도 숨 돌릴 틈은 줘야 할 거 아냐!”

손을 묶은 넥타이를 풀려고 했지만, 워낙 단단히 묶은 탓인지 마음이 급한 탓인지 매듭이 풀리지가 않았다.

“못 참겠어…….”

정선우가 그를 보며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그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답했다.

“제발 참아 봐!”

“쌀래…….”

“시발!”

정선우를 일으켜 팔을 묶은 채로 화장실로 데려갔다. 다급하게 바지 버튼과 지퍼를 열어 팬티를 끌어 내리고 정선우의 성기를 꺼냈다.

“싸.”

나지막한 한숨 소리와 함께 변기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분이 묘했다.

남자의 성기를 만지는 건 익숙했다. 그러나 정액은 싸게 해 봤어도 소변은 처음이었다.

나올 게 많았는지 정선우는 한참 볼일을 봤고 서도운은 본의 아니게 정선우의 성기를 주물럭거릴 수밖에 없었다. 부피나 질량이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퍽 괜찮은 편이었다.

그런데 손에 닿는 느낌이 뭔가 묘했다. 성기 주변의 음모가 음모로 느껴지지 않았다. 음모란 대부분 억세고 성긴데 이건 부드러웠다.

그는 어깨너머로 슬그머니 정선우의 성기를 내려다봤다. 분명히 자신이 만지작거리고 있는 게 정선우의 음모가 맞았다. 생식기 주변의 그 털이었다. 그러나 아주 부드러웠다.

성기의 묵직한 부피감과 더불어 중독될 것 같은 촉감을 가진 음모였다.

“흐응…….”

애교 섞인 비음이 귓가에서 울리자 서도운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머쓱한 얼굴로 정선우의 성기를 잘 닦아 제자리에 넣고 변기에 앉혔다.

손에 남은 감촉이 사라지지 않았다.

“어우, 젠장……. 씻어야지…….”

손을 씻으려 내려보자 손아귀 가득 쥐어지던 묵직한 성기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필사적으로 성기의 부피와 무게감을 지우기 위해 비누를 짜내 열심히 문지르자 몽글몽글한 비누 거품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갔다.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비누 거품에 손가락 끝에서 맴돌던 부드러운 음모의 감촉이 떠올랐다.

언제 섹스를 했는지 기억을 더듬다 금욕기간이 너무 길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수술실에 들어가는 기분으로 손을 씻으며 정선우의 성기와 음모에 대한 기억도 물에 흘려보냈다.

모든 것을 지워낸 손을 닦아내며 뒤를 돌아보자 다시 한숨이 나왔다.

정선우가 변기에 앉아 잠들어 있었다.

“정선우 씨, 침대로 가서 자요! 여기 화장실이야!”

어깨를 흔들며 소리쳤지만 일어날 기미는 전혀 없었다.

결국 정선우를 깨우는 걸 포기하고 질질 끌어다 침대에 눕혔다. 이제 남은 건 넥타이뿐이었다.

그 후 1시간 40여 분 만에 넥타이를 풀어낸 서도운은 앞으로 넥타이는 원래 용도로만 쓰기로 했다.

* * *

정선우는 누군가 자신을 흔드는 느낌에 놀라 눈을 떴다. 혼자 사는 그를 누군가 흔들어 깨울 리가 없었다.

“깼어요?”

사람 모양을 한 흐릿한 그림자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귀에 감겼다. 분명 기억에 있는 목소리였다.

“……서도운?”

“네, 서도운이에요. 정선우 씨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는데 배가 고파서 안 되겠어요.”

그는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덮고 있던 이불을 꼭 쥐고 왜 서도운과 자신이 한 방에, 한 침대에 있는지 머릿속을 뒤졌다.

양원구의 술집에서 술을 마신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서도운이 마시던 독한 술을 마신 것도 기억이 났다.

그 후 기억이 없었다.

토할 것 같았다.

그런 기색을 눈치챘는지 서도운은 그를 일으켜 화장실로 데려갔다. 속에 있는 걸 모두 게워내도 구토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물을 마시겠냐는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자 서도운이 생수병을 손에 쥐여주었다. 입을 씻어내고 물을 마시고 다시 물을 게워내는 것을 반복했다.

얼마나 그렇게 했는지 모르지만,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 보니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미안해요. 내가 술을 권하는 게 아니었는데….”

“……제가 마신 거죠.”

기억 속에서 서도운은 분명히 마시지 말라고 하고 있었다.

정선우는 천천히 일어나 주위를 둘러봤다. 더 이상 구토감은 들지 않았지만 어지러웠다. 서도운이 그의 손을 잡아 따뜻한 잔을 쥐여주었다.

연한 녹차였다. 천천히 마시는 동안 어지럼증이 가라앉았다. 다 마신 녹차 잔을 어디에 둬야 하나 둘러보는데 서도운이 손에서 잔을 가져갔다.

단단한 남자의 손이 그의 손을 잡았다. 찻잔의 남은 온기인지 때문인지 따뜻하게 느껴졌다.

“일어날 수 있겠어요?”

“네.”

“렌즈 있어요?”

“네, 양복 주머니에 하나 더 있어요.”

주머니에 여벌로 넣어둔 1회용 렌즈를 떠올리며 답했다.

“손 씻어요. 렌즈 찾아줄 테니까.”

“네.”

정선우는 욕실 세면대에서 손을 씻으며 이 상황이 이상하게 자연스럽다는 걸 알았다.

서도운은 어제 만나 사람이었다. 만난 지 겨우 하루도 지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이런 편안함을 느끼는 건 이상했다.

“정선우 씨, 렌즈 여기 있어요.”

정선우는 손을 펼쳐 서도운이 쥐여준 1회용 렌즈 케이스를 쳐다봤다. 고도근시에 좌우 시력도 달라서 헷갈리지 않도록 매직으로 커다랗게 ‘R’, ‘L’이라고 표시해둔 통이 각각 오른손과 왼손에 쥐어져 있었다.

사소한,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지도 모르는 작은 배려였다.

그러나 사적인 관계가 없는 타인에게 이런 일상적인 배려를 받는 건 처음이었다.

그는 친구나 애인 같은 사적으로 친밀한 사람은 물론, 동료 같은 공적으로 친밀한 사람도 없었다.

누군가 지적해주지 않아도 자신이 재미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게는 흥미를 끌 만한 구석도 없었고 대화를 이끌어나갈 말주변도 없었다. 외모에 혹해 다가왔다가 혐오스럽다는 얼굴을 하고 떠났다.

그는 사적이든 공적이든 타인과 관계를 맺는 게 힘들었다. 사회성, 사교술, 대화법에 대한 책을 아무리 읽어도 사람과의 관계는 이해하기도, 실천하기도 힘들었다. ‘고독’이라는 인간의 사회성을 나타내는 말은 그에게 해당되지 않았다. 그는 홀로 존재할 때 가장 편안했다.

정선우는 렌즈를 넣고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여전히 어색했다.

잘생겼다는 건 자신 같은 인간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니었다. 잘생기고 멋지다는 건 ‘서도운’ 같은 사람에게 해당하는 말이었다.

활짝 핀 꽃처럼 당당하고 아름다운 남자였다.

그런 남자가 자신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그를 올려봤다. 살짝 비틀린 채 웃고 있는 입술이 벌어지며 그에게 말했다.

〈벗겨줄까?〉

정선우는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욕실 문은 여전히 닫혀있었고 그곳에는 자신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귀에는 분명히 서도운의 목소리가 들렸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셔츠 위로 팔을 비비며 욕실을 돌아봤다. 아무도 없었다.

다시 서도운의 목소리가 들렸다.

〈벗겨줄까?〉

야릇한 미소를 짓고 있는 서도운의 목소리는 귀가 아닌 머릿속에서 들렸다.

갑자기 왼쪽 복숭아뼈가 간지러웠다. 손을 내려 발등과 복숭아뼈를 긁었지만, 머릿속에서, 혹은 마음속에서 그게 아니라고 안타까워했다.

아직 술이 덜 깬 게 확실했다. 아니면 자신이 미친 게 틀림없었다.

남은 알코올을 털어내려 옷을 벗고 물을 틀었다. 뜨거운 물이 머리카락 사이로 흘러내리자 체온을 가진 따뜻한 손이 쓰다듬는 것 같았다. 커다란 손이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고, 감각이 없는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서도운이 그에게 물었다.

〈좋아?〉

온몸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정선우는 샤워기 물을 잠그고 자신이 미친 것과 미쳐가는 것 중 어느 것일지 생각했다. 둘 다 아니라면 기억나지 않는 어젯밤에 그와 서도운 사이에 성적인 무언가가 있었을지도 몰랐다.

뜨거운 물 때문인지 성적인 무언가를 떠올려서인지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성적인 무언가를 상상하며 자신의 아래를 내려다봤다.

축 늘어진 그의 성기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흉물스럽게까지 느껴지는 성기에 고개를 돌렸다. 안도감에 한숨이 흘러나왔다.

달아올랐다 식어버린 얼굴처럼 그의 마음도 그랬다. 무얼 기대했는지 모르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난 해장으로 가리는 거 없어요. 좋아하는 거나 싫어하는 거 있어요? 못 먹는 건?”

서도운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쾌활한 목소리로 물었다.

“……매운 건 못 먹어요.”

“또?”

“뜨거운 것도…….”

“그럼 피자로 해장할래요? 난 그것도 좋아하는데. 이 호텔 브런치도 괜찮고, 좀 걸으면 이탈리아식 화덕 피자랑 커피 잘하는 곳이 있는데 거기도 좋아요. 어디로 갈래요?”

그가 아무런 대답하지 않자 서도운은 웃으며 “천천히 생각해요”라고 덧붙였다.

서도운이 아무리 기다려도 그는 답을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머릿속에 든 것은 브런치나 화덕 피자가 아니었다.

옆에 선 서도운이 그의 몸 위에 올라타고 있었다. 배 위에 느껴지는 무게감이 사실적으로 느껴졌다.

〈움직이지 마〉

부드러운 명령은 그를 완전히 옭아매 숨도 쉴 수 없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했음 알리는 소리에 겨우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엘리베이터에 탔다.

뜨거운 물로 샤워도 했고 술도 깬 것 같은데 어째서 이런 생각이 계속 떠오르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전날 마신 술로 뇌의 어느 부분이 망가진 게 분명했다.

정선우는 머릿속에서 떠오른 모습을 지우려 현실 속의 서도운을 쳐다봤다. 전날 독한 술을 마셔댄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깔끔한 모습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서도운은 그를 향해 생긋 웃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서도운의 뒤를 따르면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서도운에게 자신이 어딘가 이상해졌다고 도와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체크아웃하고 올 테니 저기 앉아서 잠시만 기다려 줄래요?”

머릿속에서 울리는 서도운의 목소리와 현실 속의 서도운의 목소리가 겹쳐서 들렸다.

〈기다려〉

“……네.”

서도운이 가리킨 소파로 걸어가며 울고 싶어졌다.

소파에 앉자 탈력감이 온몸을 덮쳤다. 대체 이런 일이 왜 일어나는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술이 깨면 사라질 줄 알았는데 점점 심해졌다.

무릎에 올려둔 손이 어딘가 묶어둔 것처럼 저려왔다.

〈내가 해줄게〉

서도운이 자신의 손을, 손목을 잡고 만지자 아픔이 사라졌다.

미쳐버린 게 틀림없었다.

이대로라면 삶이 망가질 것 같았다.

서도운이라면 어떻게 된 건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려줄 것 같았다. 주위를 둘러보며 서도운을 찾았다. 프런트에 선 서도운의 뒷모습이 보였다. 제발 빨리 돌아오기만을 바랐다.

〈정선우 씨가 처음이에요〉

그의 얼굴을 잡고 서도운이 속삭였다.

거짓말……, 당신 같은 사람은 누구든 원할 수 있잖아.

서도운이 그의 볼을 부드럽게 만졌다. 그를 향해 다가오는 서도운의 얼굴이 다가왔다.

〈움직이지 마세요〉

네, 시키는 대로 할게요.

그러니,

내게 키스해주세요.

정선우는 입을 틀어막고 주위를 둘러봤다.

입 밖으로 소리 내 말 한 건지 아닌지도 모르겠지만 다행스럽게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달아오른 얼굴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침을 삼키는 소리가 너무 커서 귀가 터질 것 같았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축축하게 느껴질 정도로 손바닥에 땀이 고였다. 손을 펼쳐 바지에 닦으며 생각을, 상상을, 머리를, 뇌를 멈추려고 했다.

아무것도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자신의 성기를 만지는 서도운의 손이 떠올랐다. 목소리만큼이나 부드럽게 성기를 쓰다듬었다. 신음이 새어 나올 것 같아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정선우 씨, 침대로 가요〉

귓가에 울리는 서도운의 목소리가 너무 달콤했다.

확신했다.

서도운이 그렇게 말한다면 자신은 망설이지 않고 ‘네’라고 답하리라고.

정선우는 그제야 자신이 원하는 것을 깨달았다. 뇌의 어디가 망가진 건지 알았다.

서도운을 원했다.

처음으로 누군가를 원했다. 아마도 ‘첫사랑’이라고 말하는 그런 것이 분명했다.

그것뿐이라면 좋겠지만 첫사랑과 함께 또 다른 것도 느꼈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첫 욕정’이었다.

자신은 서도운을 원하기도 했지만 서도운과의 섹스도 원하는 것 같았다.

“정선우 씨, 거기 있었어요?”

체크아웃을 마친 서도운이 그를 보고 다가왔다.

숨을 쉴 수 없었다.

정선우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도운을 피해 호텔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돌아보자 서도운이 쫓아오고 있었다.

무서웠다.

그는 호텔 문밖으로 뛰어나갔다. 등 뒤로 그를 부르는 서도운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하고 달렸다. 그 자리에서 심장이 터져 죽는 것보다 길바닥에서 호흡곤란으로 죽는 게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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