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요정의 눈
오늘 아침 백도경은 삼촌이나 할머니가 깨우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일어났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 감기, 폐렴, 장염 등등으로 아프지 않은 날이 없었다. 열두 살 때쯤, 폐렴으로 입원 중인 그녀를 문병 온 백경은 자기도 그랬다며 열다섯 살을 넘기면 멀쩡해지니까 걱정 말라고 웃으며 말했다.
허약체질조차 꼴 보기 싫은 아빠 탓이었다. 그러나 열다섯 살을 넘기면 괜찮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닌지, 어릴 때와 달리 지금은 특별히 아픈 곳은 없었다. 여전히 작고 말랐지만 하고 싶은 일은 마음껏 할 수 있었다.
백도경은 어제저녁에 세운 계획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빠를 만나러 가는데 같이 가달라는 부탁에 삼촌은 치사하게 조퇴증을 요구했다. 그쯤이야 사소한 희생이라고 생각하고 일단 학교에 갔다.
어차피 알아듣지도 못하는 수업 따위는 과감하게 무시하고 자신이 세운 계획을 점검했다.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시뮬레이션을 마치고,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을 때의 대처법도 마련했다.
점심시간에 맞춰 그녀는 조퇴증을 받아 삼촌에게 사진을 찍어 보냈다.
이것은 그녀가 꿈꾸는 미래를 위한 첫걸음이었다.
백도경은 사흘 전 아주 원대하고 아름다운 계획을 세웠다. 그녀는 자신이 아는 가장 잘생긴 두 남자, 서도운과 정선우를 커플로 만들기로 했다.
삼촌과 어울리는 남자를 찾는다며 서도운의 옆자리에 연예인부터 시작해 잘생긴 남자들의 얼굴은 죄다 넣어보는 게 그녀의 취미 생활이었다.
불행하게도 지금까지 그녀를 흡족하게 하는 남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의 삼촌은 연예인을 능가할 만큼 잘생긴 데다 돈, 성격, 능력까지 모두 갖춘 완벽한 남자였다.
그러나 서도운의 취향은 끔찍했다. 지금까지 사귄 남자들은 외모뿐만 아니라 성격이나 능력도 모두 하나같이 하찮았다.
이건 서도운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고, 삼촌이 사귀는 남자를 모두 만나본 그녀는 절망스러울 정도로 잘 아는 사실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녀는 서도운의 애인이 될 사람은 얼굴부터 성격, 능력, 돈까지 모두 완벽한 건 기본이고, 서도운만 사랑하고, 서도운만 바라보고, 서도운을 위해 목숨을 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남자에게만 삼촌의 연인 자리를 내어줄 수 있었다.
이대로 두면 그녀의 삼촌은 또다시 보잘것없고 끔찍한 남자를 애인으로 사귈 게 뻔했다.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녀가 나서야 했다.
백도경은 주위에 있는 괜찮은 남자의 신상명세는 죄다 끌어모았다. 그러나 서도운 주위의 괜찮은 남자는 모두 애인이 있거나 유부남이었다.
그런 그녀 앞에 운명인 듯 정선우가 나타났다.
백도경은 아빠의 사무실로 숨어 들어가 정선우의 이력서를 복사했다. 몇몇 사람들이 그걸 보기는 했지만, 개와 고양이처럼 싸워대는 부녀 사이를 잘 알고 있어 아빠인 백경을 골탕 먹이려 한다고만 생각했다. 그녀가 함께 일하는 직원의 개인정보를 훔치고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범죄를 저지른다는 자각은 눈곱만큼도 없어서, 정선우의 신상을 빼내는 김에 도촬도 좀 했다.
도촬한 정선우의 사진을 편집해 서도운 옆에 넣으니 그녀가 꿈에도 그리던 그런 모습이 나타났다.
정선우는 삼촌을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이 두 남자를 커플로 만드는 것이 그녀에게 내려진 사명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그것을 위해서라면 학교도 가고, 아빠인 백경과 웃으며 밥도 먹을 수 있었다!
점심시간에 맞춰 백경의 회사로 온 그녀는 삼촌의 차에서 내리자마자 1층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가방에서 빗을 꺼내 가운데 가르마를 타고 느슨하게 내린 옆머리를 끌어 올려 고무줄로 묶었다. 그 위로 빨간색의 커다란 리본 머리핀을 달았다. 빨간 리본핀은 그녀를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캐릭터처럼 보이게 했다.
그녀는 거울을 보여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촉촉하고 자연스러운 입술을 위해 체리색 립밤을 입술에 바르고, 눈에는 보습 기능이 강화된 인공눈물도 넣었다. 교복 셔츠를 정리하고 체크 무늬 리본도 예쁘게 다시 맸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아이템을 가방에서 꺼내 목에 걸었다.
교내에서도 하고 다니지 않는 명찰이었다. 적당히 눈에 띄면서 적당히 눈에 들어오지 않을 위치를 잡아 끈 길이를 조절했다. 그녀는 다시 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어리고, 무해하고, 사랑스럽게 보였다.
정말 역겨웠다.
백도경이 자신의 머리에 허락하는 건 검은색 고무줄과 반짝이는 스왈로브스키 티아라뿐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애처럼 보이는데 분홍색이나 빨간색의 리본이나 커다란 머리 장식은 젖병을 물고 다니는 애새끼처럼 느껴져 극도로 혐오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삼촌을 위해서라면 발레복을 입고 요술봉이라도 휘두를 수 있었다. 그녀는 두 주먹을 움켜쥐고 마음속으로 ‘사소한 희생, 원대한 계획’이라고 수십 번 외쳤다.
완벽한 남자에게는 완벽한 애인이 필요했다!
백도경은 만족한 얼굴로 화장실에서 나와 엘리베이터 앞에 선 서도운에게 걸어갔다. 그녀를 본 서도운은 처음 보는 조카의 행색에 말을 잇지 못했다.
“자학이야? 아, 백 감독이 정말 싫어하겠다. 근데 그렇게까지 해서 괴롭혀야겠어?”
서도운은 그녀의 큰 그림을 짐작하지 못하고 그저 백경을 괴롭히는 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백도경은 만족했다.
일타이피.
백경은 왜소한 체격에 예쁘장한 외모를 가진 남자였다. 그래서인지 아이 같고 사랑스러운 것들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자신을 꼭 닮은 딸이 그런 꼴을 하고 나타나면 질색을 할 게 뻔했다.
“미쳤어? 꼴이 그게 뭐야?”
사랑스러운 딸의 모습을 본 백경의 얼굴이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백경은 그녀에게 근처에도 오지 말라며 악을 쓰고, 밥맛 떨어진다며 달아났다.
그녀는 체셔 고양이처럼 웃으며 정선우를 찾아 나섰다.
백경 프로덕션은 5, 6층을 사용했다. 6층 스튜디오에는 제작팀이, 기획팀은 5층 회의실에 주로 모여 있었다.
503호실은 백경이 동료나 서도운에게 끌려가 혼나는 곳이었고, 504호실은 경리인 박수경이 백경을 붙잡고 우는 곳이었다.
백도경은 505호실과 506호실 앞에 서서 어느 문을 두드릴까 고민했다.
* * *
정선우는 자신의 휴대폰 화면에 떠오른 대화창을 멍하니 쳐다봤다. 백경 프로덕션에 이직 후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박수경이 보내온 메시지는 그를 깊은 고민에 빠지게 했다.
[박수경 : 앗싸아아아~ 오늘 점심 한우!]
[박수경 : 서 선생님이 쏜대!!!]
[박수경 : 정선우 씨도 가는 거지?]
참석하거나, 참석하지 않거나 전적으로 그의 선택이었다.
이곳은 그가 무얼 하든 아무도 그에게 이유를 묻거나 나무라지 않았다.
사무실과 해야 할 일이 주어진 후, “환영회 한 번 해야지”라던 기획팀장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서도운과 만났다는 말에 “그래?”라고 대꾸하더니 그걸로 끝이었다. 덕분에 20여 명도 안 되는 직원들이 근무하는 곳이지만 누가 누군지 몰랐다. 같이 엘리베이터에 탔다가 5층에서 함께 내리며 “여기서 근무하세요?”라고 묻는 사람이 아직도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제대로 일을 할 수 있을까 싶은데 희한하게 일은 잘했다. 게다가 놀랄 정도로 친절했다.
박수경은 묵묵하게 자신의 일을 도와주는 정선우에게 매우 고마워하며 마법의 주문을 알려주었다.
〈백경이 사고를 쳐서 일이 많습니다〉
그 한마디면 이곳 사람들은 자신이 하던 일도 멈추고 도와줄 거라고 했다.
설마 그럴까 싶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기술팀원에게 재무회계 담당이라는 소개를 하자 눈빛이 이상해졌다.
혹시나 해서 박수경이 알려준 마법의 주문을 외우자 기술팀원은 깊은 동정의 눈빛과 함께 “제가 엑셀은 좀 하는데 도와드릴까요?”라더니, 먼저 내리는 그를 향해 “무리하지 마세요!”라고 당부했다.
모든 사람이 백경을 향한 증오심으로 뭉쳐있었다.
이런 감정을 가지고 함께 작업을 할 수 있을까 싶은데 희한하게 결과물은 좋았다. 백경을 공공의 적으로 두고 모두 협력하고 있었다.
백경은 자신의 분야에서는 모두가 인정하는 ‘프로’였고, ‘천재’였다.
그러나 그 외에는 쓸모없었다.
백경이 이러니 모두들 자신의 분야에서는 최선을 다하고 그 외의 부분은 ‘백경 정도만 아니면 된다’라고 생각했다. 그 때문인지 모두 이상할 정도로 느긋했고 백경 이외의 사람에게는 너그러웠다.
정선우에게 이곳을 소개해 준 이는 ‘성향에 맞으면 천국 같은 곳이지만 그게 아니면 역겨울 정도로 짜증 나는 곳’이라고 표현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백경 프로덕션은 백경이라는 인간을 돌보기 위한 곳이었다. 스펙이나 더 큰 삶의 이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곳이었다.
그는 지난 한 달 동안 이곳에서 일하는 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자신은 높은 곳에 오르긴 글러 먹은 인간이었다.
스물아홉 살의 정선우는 몇 년간의 직장 생활 끝에 자신은 사회에서 도태되는 게 당연한 인간이라는 걸 깨달았다. 누가 내려준 줄인지 모를 라인을 타고 처세술을 발휘해 절벽을 오르는 삶은 타고난 사람만 가능했다. 그는 ‘무리’ 속에 섞이는 것도, ‘무리’를 짓는 것도, ‘무리’를 이끄는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삶이라는 무대에서 아무런 역할이 없었다. 그저 시간이 흘러가기를 기다리는 사물이었다. 그는 그 무대에서 내려오고 싶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부양해야 할 어머니가 있었고, 자식의 의무를 다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돈이 필요했고 일을 해야 했다.
백경 프로덕션은 영화 외에는 실패한 적이 없는, 완벽하게 클라이언트를 만족시키는 곳이었다. 업계의 평은 좋았다. 연봉도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사물이라면 무대를 옮겨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옮겨온 무대는 생각 외로 만족스러웠다.
볕이 잘 드는 개인 사무실이 마음에 들었고, 언제 누구와 밥을 먹든 말든 아무도 상관하지 않았다. 회식도 없었고 야근도 없었다.
게다가 백경의 처남인 서도운이 있었다.
그와 서도운은 접점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도 아니었고, 술을 마시는 걸 즐기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나 백경이 있었다. 정선우에게 백경은 견뎌야 할 악몽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
백경이 사고를 치면 서도운이 나타난다고, 백경이 사고 치지 않도록 서도운이 종종 들른다고 했다.
이곳에 있으면 언젠가는 다시 기회가 주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서도운과 다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기회, 다시 단둘이 있을 수 있는 기회, 그가 느꼈던 환상을 다시 볼 수 있는 기회…….
호텔 로비에서 도망친 후에도 망상은 계속되었다.
서도운은 그에게 예쁘다고 말해주기도 했고, 함께 자자고 하거나 머릿결이 좋다고 칭찬하기도 했다. 때때로 성적 욕망이 섞여 그의 성기를 만지며 사정하라고 명령하거나 참으라고 윽박지르기도 했다.
그는 서도운을 다시 만나 함께 술을 마시고 싶기도 했고, 먼발치에서만 보고 싶기도 했다.
‘정선우 씨’라고 불러주는 목소리를 다시 듣고 싶었지만, 그의 속삭임을 들으면 견디지 못하고 또 도망갈 것 같았다.
서도운은 주연배우 같은 사람이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을 빼앗고 마음을 사로잡았다. 무대에서 내려갈 시간만 기다리며 빈 공간을 채우던 그도 멍하니 서도운을 볼 수밖에 없었다.
정선우는 휴대폰 가장자리를 만지작거리며 뭐라고 답을 보내야 할지 생각했다. 간다고 하면 26일 만에 서도운을 다시 볼 수 있었다.
서도운을 다시 보고…….
언제나 그렇듯 멍청이처럼 굴 게 뻔했다.
“정선우 씨, 눈치 있게 굴어”, “사람이 그렇게 딱딱해서 어디다 써?”, “기껏 그런 얼굴로 태어났는데 좀 웃으면 안 돼?”, “여자도 아니고 웃으면서 술 따르란 말이 그렇게 기분 나빠?”…….
이제 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그때처럼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되고, 바보 같은 말을 한다고 해도 비웃을 사람이 없는 그런 곳에서 서도운과 단둘이 있고 싶었다.
[정선우 : 죄송합니다]
[정선우 : 일이 남아서요]
[정선우 : 맛있게 드세요]
정선우는 최대한 무난해 보이는 메시지를 보내고 휴대폰 화면을 껐다.
아쉬움에 흘러나오는 한숨을 멈출 수 없었다.
책상 위에 엎드려 핸드폰 가장자리를 만지작거리면서 서도운에게 전화나 메시지가 오는 걸 상상했다. 새까만 화면이 밝아지고 ‘서도운’이라는 이름이 나타난다면 어쩌나 생각했다.
바보 같은 생각에 다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는 마음껏 한숨을 쉴 수 있는 혼자만의 사무실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의 공간을 누군가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그의 사무실 문을 노크하는 사람은 박수경과 기획팀장뿐이었고, 두 사람의 노크 소리는 이렇게 조심스럽지 않았다.
누굴까 궁금해하며 문을 열자 서도운이 서 있었다.
* * *
오른쪽과 왼쪽 문을 가리키며 “어느 쪽을 할까요”라며 노래를 부르던 백도경은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놀라 노래를 멈췄다.
“여기서 뭐해?”
서도운의 물음에 그녀는 대답보다는 물음을 택했다.
“삼촌은?”
“정선우 씨한테 볼 일이 있어서. 넌?”
재차 묻는 말에도 답을 피하는 그녀를 보며 서도운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백도경, 삼촌이 전에 예의에 대해 말한 거 기억하지?”
서도운의 물음에 그녀는 조그만 입을 삐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아.”
그녀가 사랑하는 완벽한 남자는, 남자를 사랑했다.
백도경은 남자가 여자가 아닌 남자를 사랑하는 의미가 무언지 알기도 전에 삼촌인 서도운은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라는 사실을 먼저 받아들였다.
가족들이나 삼촌의 친구들, 병원 직원들, 그녀가 아는 모두가 그것에 대해 이상한 눈으로 보거나 나쁘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녀의 세계에서는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고 여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 남자와 여자가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당연했다.
그러나 학교에 가고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게 되자 그녀의 세계는 비정상적이고 이상한 것이 되었다.
그것은 더럽고 역겨운 것이었다.
그녀는 아이들의 비난과 놀림 속에서 가족을 거부하느니 ‘호모 병균을 옮기는 아이’로 따돌려지는 걸 택했다.
학교에서 따돌림당한다는 걸 뒤늦게 안 그녀의 가족들은 학교와 따돌린 아이들의 부모를 상대로 격렬하게 항의했다. 그러나 10살도 안 되는 아이들을 상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입을 다물고 할 말을 가려서 하는 법을 익혀야 했다.
부유하고 권력을 가진 부모를 둔 아이들이 다니던 사립학교에서 일반 학교로 옮겼다. 백도경은 전교 꼴찌에 학교 가기를 싫어하는 평범한 아이가 되었고 그 삶에 만족했다.
시간이 지났지만 그녀의 세계는 여전히 달랐다.
하지만 그녀의 세계는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다른 것을 틀렸다고 말했다.
그녀는 큰 소리로 “틀린 건 당신들이야”라고 외치고 싶었다. 서도운은 그녀의 분노를 ‘예의와 존중’이라는 말로 달랬다.
“삼촌이 이번에는 정말 키 크고 잘생긴 남자랑 사귈게.”
“그런 거 아냐.”
“삼촌 못 믿어? 삼촌이 그런 사람 못 사귈 것 같아?”
“……믿어.”
서도운의 말에 그녀는 손을 내밀어 삼촌의 손을 붙잡았다.
“백도경, 오늘 엄청 귀엽네. 싫어하는 건데 이렇게 어울려서 어떡해?”
서도운은 그녀의 머리에 달린 리본을 톡톡 건드렸다.
고개를 들자 창으로 비치는 햇살을 등 뒤에 달고 있는 서도운이 보였다. 늘 보는 얼굴인데도 새삼 더 멋지게 느껴졌다. 서도운의 손을 잡은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니, 못 믿어.’
그녀는 웃으며 마음속으로 외쳤다.
‘하나도 안 믿어! 지금까지 데려온 남자들이 다 그 모양 그 꼴인데 어떻게 믿어!’
10여 년이 쌓인 분노였다.
‘얼굴이 문제가 아냐! 하나같이 진상들이잖아! 삼촌이 뭐가 모자라서 그딴 것들을 만나!’
열다섯의 세계는 언제나 아름답지는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익힌 침묵과 인내는 그녀의 세계를 어둡게 만들었다.
그녀의 세계는 틀리지 않았다. 틀린 건 그들의 세계였다.
누구도 서도운을,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을 모욕할 수 없었다.
그녀의 세계는 완벽해야 했다. 그것을 위해 서도운은 행복해야만 했다.
“505? 506?”
백도경의 물음에 서도운은 506호실을 가리켰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506호실의 문을 두드렸다.
그녀의 노크 소리에 답하듯 열린 문 사이로 정선우가 보였다.
정선우는 문 앞에 선 서도운을 보고 놀란 듯, 눈도 깜박이지 않고 바라보았다.
506호실의 문은 열렸지만 세 사람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어야 했다.
열린 문은 그다지 넓지 않아서, 정선우가 스스로 비켜주지 않으면 누구도 들어갈 수 없었다. 정선우는 문을 열고 비켜서서 그들에게 들어오라고 권하지도 않았고, 그들이 있는 복도로 나오지도 않았다. 그저 열린 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채 가만히 있었다.
그 틈으로 보이는 정선우의 얼굴에 백도경은 감탄이 절로 나왔다.
관리해주는 샵이 어딘지 묻고 싶을 정도로 깨끗한 피부에 속눈썹이 가지런히 내려앉은 쌍꺼풀 없는 아몬드형 눈, 이마에서 미간, 콧대, 코끝까지 이어진 선은 틀어지거나 휘어진 곳 없이 유려했다. 이 정도만 해도 신이 그의 얼굴을 만들 때 공을 들였구나 싶은데, 잘 다듬어진 얼굴형과 매끈한 턱선까지 더하니 신의 편애를 받은 외모라 할 만했다.
그러나 이 아름다움은 어딘가 이상했다.
처음 문이 열리고 나타난 건 사람이었지만 새하얀 얼굴에서 천천히 표정이 사라지며 인간다움도 사라졌다.
백도경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이한 불편함에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삼촌은 그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지 조금 전과 다름없이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서도운은 표정 없는 남자의 공간으로 들어가거나 자신이 있는 곳으로 나오라고 하지 않았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정선우에게 말을 걸었다.
“잘 지냈어요?”
“……네.”
“다행이네. 남은 일이 많아요?”
정선우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는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서도운은 무어라 채근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한참 기다린 후에 조그만 목소리로 정선우가 답했다.
“일이……, 조금 있어요.”
“고기 먹으러 갈 건데 급한 거 아니면 같이 갈래요?”
“다 같이요?”
“네.”
다시 입을 다문 정선우를 보며 서도운은 다시 기다렸다.
정선우는 그녀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듯 무시했지만 백도경은 끼어들지 않고 기다렸다. 서도운의 태도에서 이 상황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정선우에게 말을 거는 서도운의 목소리는 매우 예민한 상태의 동물을 달랠 때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기척을 죽이고 조용하게 눈만 굴리고 서 있었다.
“……다음에 먹을게요.”
“그래요, 그렇게 해요.”
정선우의 얼굴이 천천히 아래로 가라앉았다. 바닥으로 떨어진 시선은 다시 올라오지 않았다.
백도경은 숨도 크게 내쉬지 못하고 멍하니 정선우를 올려다봤다.
오늘 그녀는 늘 넣고 다니는 키 높이 깔창도 빼고 플랫슈즈를 신어 맨발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와 180cm가 넘는 정선우는 거의 머리 하나만큼 키 차이가 났다. 작은 그녀에게는 정선우의 얼굴이 환하게 보였다.
서도운의 말에 표정 없는 남자의 얼굴이 변하는 모습이!
“수경 씨가 급한 건 대충 끝났다던데 지난번에 말한 약속 잡을까요?”
“무슨 약속이요?”
다시 고개를 든 정선우의 얼굴에는 표정이 지워져 있었다.
“지난번에 급한 일 정리되면 재무회계 담당자들이 모일 자리를 마련해준다고 말했잖아요.”
“아…….”
“언제 시간 돼요?”
“아무 때나 괜찮습니다.”
서도운은 그 대답에 가볍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렇게 말하면 정선우 씨가 내 연락만 기다린다고 오해하잖아요. 다음 주는 어때요?”
“네, 괜찮아요.”
정선우는 끄덕임과 함께 조그만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백도경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그녀는 똑똑히 봤다.
정선우의 눈이 사르르 감겨들며, 살며시 끌어당긴 입술 위로 여린 미소를 만들었다가 곧 지워내는 것을.
“그 형님들이 술을 좋아해서 저녁에 보면 엄청 마실 건데, 차라리 점심을 같이 할까요?”
“네.”
“뜨거운 거, 매운 거 못 먹는다고 했으니까 회는 어때요? 좋아해요?”
“……먹을 수 있어요.”
“어차피 코스로 먹을 테니 입에 맞는 게 하나쯤은 있을 거예요. 맛보고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그것만 먹어요.”
“네.”
“만나보면 알겠지만 격식 따지고 그런 분들은 아니니까 편하게 나와요.”
“네.”
“퇴근 전까지는 약속 잡아서 메시지 보내줄게요. 괜찮죠?”
“네.”
정선우는 ‘아니오’라는 말은 모르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네’라는 말만 반복했다.
백도경은 서도운 앞에서 저런 태도를 취하는 사람을 무수하게 봤다.
서도운은 온화하게 웃으며 다정한 말을 건네는 남자였다. 그런 모습에 수많은 여자들이 착각을 했다. 그들은 서도운의 요구나 부탁을 받는 건 자신들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절대 ‘아니오’라고 말하지 않았다.
물론 이곳이 직장이며 서도운이 압도적인 ‘갑’의 위치라는 건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공적인 관계를 떠나 서도운이 무얼 요구해도 정선우는 ‘네’라고 대답할 것 같았다.
백도경의 눈에는 서도운에게 반한 여자들과 정선우가 똑같아 보였다.
모두에게 예의 바르고 친절한 남자에게 여자가 꼬이는 건 일상이었지만 남자가 꼬이는 걸 본 건 그녀도 처음이었다.
일단 그녀는 자신의 눈이나 감을 의심했다. 정선우를 삼촌의 애인으로 낙점하며 콩깍지가 덜컥 눈에 달라붙었을 수도 있었다.
“근데 그날 왜 도망갔어요?”
서도운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정선우의 고개가 갑자기 푹 숙어졌다.
“그렇게 부끄러웠어요? 술이 세서 취한 친구들을 많이 돌봤는데, 정선우 씨 술주정은 특이하긴 해도 심한 건 아니었어요.”
156cm의 눈높이.
고개를 들지 않는 정선우의 얼굴이 그녀에게 모두 보였다.
발그스름하게 달아오른 얼굴과 울 것 같이 떨리는 가지런한 속눈썹이,
이어지는 침묵 속에 겁먹은 얼굴로 아주 살며시 고개를 들어 서도운을 살피는 시선이,
서도운의 여전한 미소에 안도하며 달싹이는 입술까지.
백도경은 처음으로 아빠인 백경에게 감사했다. 망할 스머프 유전자가 쓸모 있는 날이 올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