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노래하는 요정
밤새 스튜디오에서 편집 작업을 하고 5층으로 내려온 백경은 이상한 생물체를 발견했다.
‘백도경’이라고 불리는 그 생물체는 작은 요정처럼 생긴 외모와 달리 아주 집요하고 흉악한 몬스터였다. 그는 그 몬스터의 특성을 잘 알기에 바로 접근하지 않고 출입문 뒤에 숨어 무슨 짓을 하는지 관찰했다.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 백경은 다시 머리를 내밀어 5층 복도 끝에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을 확인했다.
오전 10시 27분.
백도경은 이 시간, 이곳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생물체였다.
평범한 열다섯 살이라면 학교에 있을 시간이지만 백도경은 학교를 어쩌다가 한 번씩 가는 곳으로 알고 있었다. 출석일이 결석일보다 많았고 출석한 날도 정상적으로 하교하는 날이 드물었다.
그녀가 학교에 가지 않고 위험한 일탈 행동을 한다면 서도운이나 서도희도 가만있지 않을 테지만, 동물병원 잔디공원에서 풀을 뽑거나 유기동물보호소에서 아픈 동물들을 돌보는 것뿐이라서 혼낼 수 없었다. 그저 약간의 잔소리와 함께 졸업만 하라고 타일렀다.
땡땡이친 백도경이 숨어있는 곳은 대부분 동물병원이나 유기동물보호소로 아버지인 백경의 회사는 절대 아니었다.
그녀가 아버지의 회사에 오는 이유는 오로지 서도희가 주는 용돈 때문이었다. 함께 식사를 하고 그걸 인증해야 용돈을 받을 수 있기에, 마지못해 같이 먹는 것뿐이었다. 그를 극도로 혐오하는 백도경이 이 시간에 그의 회사에 있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백경은 다시 고개를 내밀어 딸의 모습을 쳐다봤다. 그녀는 몇 번의 심호흡을 한 후, 506호실 문을 두드렸다.
506호실……, 정선우의 사무실이었다.
백도경이 이 시간, 그의 회사에 있는 이유가 정선우라면 무슨 짓을 하려는지 뻔했다.
그는 문 뒤에서 나와 살그머니 다가갔다. 딸의 삼촌을 향한 사랑이 지나치다고 해도 설마 그런 미친 소리를 대놓고 할 리는 없었다.
506호실 문이 열리고, 열린 문틈을 향해 쾌활하게 말하는 백도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삼촌이랑 사귀실래요?”
대놓고 했다!
“야, 백도경!”
백경은 달려가 자신의 딸을 낚아채 입부터 틀어막았다.
“얘가 잘생긴 사람한테는 다 이래! 농담이야, 농담!”
그는 발버둥 치는 백도경의 입을 막은 채 질질 끌고 가며 정선우를 향해 소리쳤다.
“정선우 씨, 좀 이따 다시 말하자! 미안!”
503호실에 백도경을 밀어 넣은 백경은 자신의 딸이자 정신 나간 몬스터가 탈출하지 못하도록 문 앞을 막아섰다.
“미쳤어?”
백경 물음에 그녀는 입을 삐죽이며 노려봤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백경이 문 앞에서 비켜줄 것 같지 않자 심드렁한 얼굴로 사무실 한쪽에 놓인 소파에 앉았다.
“너 이게 얼마나 서 선생을 난처하게 만드는 건 줄 알아?”
“뭐가?”
“서 선생이 엄청나게 괜찮은 남자인 건 맞는데, 남자야. 남자라고!”
“그게 왜?”
“남자는 서도운이 아니라 서도희에게 반하고, 여자는 서도희가 아니라 서도운한테 반해.”
“그래서 뭐?”
“원래 그래. 그게 당연한 거야.”
“그래서 어쩌라고? 뭘 말하고 싶은데?”
서도희와 서도운 남매를 꼭 닮은 쌍꺼풀 깊은 눈이 표독스럽게 쳐다보자 그는 답답함에 온몸을 꼬아대며 제자리에서 발을 굴렀다.
“아~주 적은 숫자의 사람이, 아~주 소수가 같은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 그래서 성소수자라고 하는 거야. 세상 모든 남자가 서도운한테 반하고 서도운을 좋아하는 게 아니란 말이야!”
그의 말에 백도경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더니 벌떡 일어나 사무실이 떠나가라 외쳤다.
“아빤 모르면 가만히 있어!”
“너나 모르면 가만히 있어!”
“이건 달라!”
“뭐가 달라!”
“다르다고!”
“뭐가!”
“이, 이, 멍청이 스머프가…….”
백도경은 더 이상 무어라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씩씩거리다 소파에 털썩 주저앉더니 조그만 주먹을 꼭 쥐고 소파에 놓인 쿠션을 마구 두드렸다.
백경은 그 모습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삼촌 품에서 애지중지 자란 탓인지 백도경은 삼촌을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남자라고 생각했다. 그도 자신의 처남이 잘생기고 능력 좋고 돈 많은 건 인정했다.
그러나 착하거나 선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시람들은 서도희, 서도운 남매의 화려한 외모와 친절하고 예의 바른 모습만 겉모습만 알고 있을 뿐, 상냥하게 웃으며 화를 내고 친절한 만큼 무자비하다는 사실은 몰랐다.
백경은 두 사람을 화나게 한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지 잘 알았다. 피가 섞인 친인척, 오래된 친구, 애인……. 남매가 분노하면 예외도 망설임도 없었다. 그들은 잔혹할 만큼 상대를 부수고 짓밟았다.
어릴 때 학교에서 백도경이 따돌림당한 것을 알고 서도운과 서도희는 그녀를 안고 아이들이 그녀에게 무슨 말을 했고, 무슨 짓을 했는지 조곤조곤 물었다.
처음에는 입을 삐죽거리며 말을 하지 않던 아이는 삼촌과 엄마의 미소에 홀랑 넘어가 재잘거리며 온갖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다 참았던 서러움이 터졌는지 울어대기 시작했고 좀처럼 그치지 않는 그녀를 달래며 서도운은 “웃어”라고 말했다. “화나는데 어떻게 웃어”라고 울먹이는 아이를 향해 서도운은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 애들을 어떻게 괴롭혀 줄지 생각해. 그럼 웃을 수 있어.”
그 말을 들은 백도경은 입술을 우물거리다 울음을 그치더니 히죽거리기 시작했다.
그때만 떠올리면 백경은 아직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백도경이 서도운을 천사 같다고 말할 때면 기가 막혔다. ‘복수의 천사’라든가 ‘신의 징벌을 내리는 천사’라면 모를까 서도운은 ‘자애’나 ‘자비’라는 단어는 모르는 인간이었다.
연애도 마찬가지였다.
서도운은 관심이 가는 남자가 있으면 말 그대로 ‘간택’했다. 그가 선택하는 순간 연애가 시작되고 그의 흥미가 떨어지는 순간, 연인 관계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인생도 함께 끝났다. 서도운과 사귄 모든 남자가 그랬다.
백경은 그런 남자의 연애 사정을 백도경이 왜 걱정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걱정해야 할 건 서도운에게 ‘간택’되는 남자였다.
“서 선생은 자기 앞가림 자기가 잘하는 사람이야. 네가 안 도와줘도 알아서 잘해.”
그의 말에 백도경은 쿠션을 후려치던 손을 멈췄다.
“잘하긴 뭘 잘해!”
그녀는 빽하니 소리치며 아빠를 향해 쿠션을 집어던졌다. 백경은 갑자기 날아온 쿠션을 받아들고 자신의 딸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잘하는데 그런 남자들을 사귄다는 거야?”
“그건 서 선생 취향이니 존중해 줘야지.”
“그런 취향이 어디 있어! 삼촌이 알아서 잘할 거라고 생각하고 다들 신경 안 써서 그런 거야!”
백도경은 울분에 차서 소리를 질렀다. 이게 다 그렇게 무심해서 생긴 일이었다.
“백도경, 남의 연애는 상관하는 게 아냐.”
“삼촌이 왜 남이야!”
백도경의 항의에 그는 머쓱해졌다.
“남은 아니지만……. 야, 백도경! 이건 네가 끼어들어서 될 일이 아냐.”
“끼어들 거야!”
“말 좀 들어!”
“못 들어!”
백경은 자신의 딸을 설득하는 건 불가능한 일임을 깨달았다. 대체 누굴 닮아 저렇게 고집이 센지 알 수 없었다.
“난 분명히 말렸어. 일이 잘못돼서 서 선생이 화나면 난 끌어들이지 마.”
“아빠는 방해나 하지 마.”
“좋아, 그럼 각서 쓰자.”
“알았어, 나 다이어리 쓰려면 사진도 찍어야 해.”
백도경과 백경은 서로의 일에 간섭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는 각서를 작성해 각자의 핸드폰에 보냈다. 이 일이 강요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두 사람이 웃으며 함께 있는 모습도 사진으로 남겼다.
증거물로 찍은 사진은 부녀가 함께 찍은 첫 사진이었지만 두 사람은 그런 것에는 전혀 의미를 두지 않았다.
* * *
소리 없이 문이 닫히며 정선우의 사무실은 다시 복도와 분리되었다.
서도운의 조카이자 백경의 딸이라는 소녀는 언뜻 들었던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그녀는 그의 공간과 마음에 함부로 침입했다.
그는 손잡이에 달린 버튼을 눌러 문까지 잠갔다.
잠겨진 문.
이미 누른 버튼을 다시 눌러 문밖의 세상으로부터 그의 공간을 확실하게 차단시켰다. 그러나 그의 손은 여전히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우리 삼촌이랑 사귀실래요?”
그는 답하지 않았다.
대답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무어라 답하려 했을까 생각했다.
이어진 백경의 외침이 떠올랐다.
“농담이야, 농담!”
답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무어라 답하려 했을까, 답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체온으로 미지근해진 금속 손잡이를 손에서 놓았지만 문 앞을 떠날 수 없었다. 문을 닫고 싶지만 열고 싶기도 했다. 열어서 무얼 하고 싶은지 생각했다.
그 아이에게, 서도운의 조카에게, 그 농담에 답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답을 한다면, 사귀고 싶다고 한다면 그와 서도운과 사귀게 되는 걸까.
그럴 리가 없었다. 그건 농담일 뿐이었다.
답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느려서 다행이었다.
그는 책상에 앉아 박수경이 준 서류철을 펼쳤다. 그녀는 일을 잘했다. 회계사와 주고받은 서류가 잘 정리되어 있었다. 종이 위에 늘어선 숫자를 보여 집중하려 애썼다.
어차피 자신은 서도운과 사귈 수 없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일, 가능성 없는 일, 기대하면 안 되는 일, 바라서는 안 되는 일, 원해서는 안 되는 일…….
곱게 정리된 서류가 들어있는 비닐 귀퉁이를 만지작거리며 되뇌었다.
다음에 그와 식사를 할 수 있으면 꼭 가야 할 것 같았다. 멍청이가 되더라도, 바보라고 놀림 받더라도 서도운을 볼 수 있다면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다행스럽게도 기억력이 좋은 편이라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서도운의 모습을 머릿속에 넣고 또 넣을 생각이었다. 그럼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 따위는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서류는 어느 순간부터 엉망이 되어있었다. 대충 맞춰진 숫자와 난잡하게 나열된 항목들에 집중하자 모든 생각이 지워졌다.
변동이 있을 수 없는 급여비용이 수시로 증가했다 감소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성과급과 경비가 지급된 내역을 보며 불법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서류가 몇 장 더 넘어가자 분명히 존재하던 손해는 어느 순간 사라졌다.
‘백경 프로덕션’의 회계 장부와 재무제표는 모두 조작되어 누군가의 범법 행위를 덮어주고 있었다. 정선우는 자신의 앞에 놓인 서류는 보며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에 생각을 멈추고 문을 쳐다봤다.
다시 이야기하자고 말하던 백경이 떠올랐다. 백경이라면 그가 본 서류들의 의미를 말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일어나 문을 열었다. 그러나 문을 두드린 사람은 백경이 아니라 백도경이었다.
“들어가게 해주시면 안 될까요?”
정선우가 몸을 비켜 사무실 안으로 갈 수 있는 공간을 주지 않자 백도경이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교복 치마를 꼭 쥐었다. 작은 손에 쥐어진 치마는 잔뜩 주름을 만들며 구겨졌다. 자신이 작은 아이를 곤란하게 만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선우는 문손잡이를 놓고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고맙습니다.”
사무실로 들어온 백도경이 그를 바라보며 짙은 쌍꺼풀이 진 눈을 한껏 휘며 앙증맞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아까 농담한 거 아니에요. 우리 삼촌이랑 사귈래요?”
예상치 못한 말에 정선우의 무표정이 무너졌다.
답할 수 없었다.
그는 입을 다물고 얼굴을 덮고 있던 가면이 뜯겨져 나가는 것을 필사적으로 잡았다.
백도경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마치 그녀의 삼촌처럼, 서도운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그를 바라보았다. 깊이 쌍꺼풀진 커다란 눈은 서도운을 떠올리게 했다. 그녀의 얼굴에 서도운의 일부가 있었다.
정선우는 어리석은 대답을 할 것 같아 굳게 입을 다물고 시선을 떨궜다. 대리석 무늬의 리놀륨 타일 위로 작은 리본이 달린 구두 끝이 보였다.
고개를 들어 힐긋 백도경의 얼굴을 살폈다. 그녀는 시선을 거둬들이지 않고 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견디기 힘들었다.
‘아니’라고 대답하면 그것으로 편해질 수 있었다. 저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니’라고 답하고 싶지 않았다.
시선 끝에 자리한 구두가 사라져 고개를 들자 창가에 있는 작은 테이블로 걸어가는 백도경이 보였다. 그녀는 두 개의 1인용 소파 중 하나에 앉아 창가에 비치는 햇살에 뒤지지 않을 만큼 환한 얼굴로 말했다.
“전 선우 아저씨가 키가 커서 좋아요. 우리 삼촌은 177cm인데 선우 아저씨는 키가 몇이에요?”
원치 않아도 머릿속에 숫자가 들어왔다.
“……184.”
“7cm면 키스하기 딱 좋은 키 차이네요, 그렇죠?”
머리가 텅 비어서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백도경은 그에게 답을 원하지 않았다. 그저 여러 가지 숫자와 정보들을 말했다. 모두 서도운에 대한 것이었다.
생일, 혈액형, 졸업한 고등학교, 입학한 대학, 전공, 군대에 간 나이, 복무한 부대, 유학한 곳……. 서도운의 신상과 삶에 대해 일방적으로 계속 말했다. 원치 않아도 어린 소녀의 목소리는 계속 그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그는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들어야 할 때, 그 시간을 견디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생각을 멈추고 자신과 관계없는 말이라고 귀를 닫아버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럴 수가 없었다. 백도경의 말이, 서도운에 대한 것들이 차곡차곡 머릿속에 들어와 쌓여갔다.
서도운의 혈액형이 A형이라는 사실이나 군대에서 군견을 돌봤다는 이야기는 자신의 삶과는 전혀 상관없었다.
모든 운동을 잘하고, 테니스는 잘하지만 싫어하고, 골프는 사교용으로 치고, 수영은 수준급이라는 그런 모든 것은 자신과 상관없었다.
정선우는 자신이 서도운과 사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런 걸 말해줘도 자신과 상관없었다.
웃으며 말하고 있던 백도경의 목소리가 갑자기 끊어졌다. 백도경이 일어나 그에게 다가왔다. 그는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소녀를 피해 뒤로 물러섰다.
문손잡이가 등에 닿았다.
등 뒤로 손을 넣어 문을 열고 사무실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소녀는 그런 그를 스쳐지나 사무실 구석에 놓인 커피와 녹차 티백이 있는 작은 테이블에서 컵을 꺼내 정수기에서 물을 받았다.
“커피로 하실래요? 녹차? 물?”
말 없는 정선우의 대답을 들은 것처럼 백도경은 두 개의 컵을 꺼내고 따뜻한 물을 받았다. 컵과 녹차 티백 두 개를 손에 든 소녀는 창가로 돌아와 테이블에 위에 컵을 내려뒀다.
백도경은 볕이 잘 드는 창가의 소파에 앉아 그를 바라봤다. 그것이 자신의 자리라는 듯 그녀는 그의 공간을 차지했다.
“점심으로 뭐 먹고 싶으세요? 같이 나가서 적당히 분위기 봐서 피해드릴게요.”
백도경의 눈이 곱게 휘어지며 눈 끝에서 입술 끝으로, 너무나 즐겁다는 듯 웃었다.
“삼촌이랑 둘이서 먹고 싶은 게 있어요?”
이루어질 수 없어도 바랄 수는 있었다.
그는 천천히 그녀에게 걸어갔다. 맞은편 소파에 앉아 그녀가 놔둔 컵을 쥐었다.
뜨겁지 않은, 적당히 따뜻한 물에 데워진 컵.
옆에 놓인 티백을 찢어 물에 담갔다. 서서히 변해가는 물의 색을 보며 이제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빛나는 사람의 시선을 잠깐 멈추게 할 수 있다면, 그 시간을 독점할 수 있다면…….
사물이든 뭐든 무대 위에 남아있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그가 손쉽게 말할 수 있는 건 재무회계와 관련한 것뿐이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누군가를 원한다는 말을 표현할 단어가 없었다.
서도운이라면, 그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지 않을까 생각했다.
정선우가 서도운이라는 남자를 원한다는 것을…….
손에 쥔 컵이 식어갔다.
“여기에 티백 버리세요.”
백도경이 자신의 컵을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너무 오래 우려내면 떫잖아요.”
그녀의 말에 컵 가장자리에 늘어진 끈을 들어 티백을 빈 컵에 넣었다. 그 행동이 대단한 것이라도 되는 듯 그녀는 그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우리 삼촌은요, 어딘가 좀 문제 있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그는 손에 든 컵을 꼭 쥐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사귄 남자들은 다 엉망진창이었어요. 선우 아저씨, 사채 같은 거 쓴 적 있어요?”
“아니.”
사채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는 재무 관련 업무를 하는 사람이었다. 빚도 없거니와 필요하다면 가장 저렴한 이자로 제1금융권에서 대출을 받을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알고 있었다.
“아깝네요, 삼촌 두 번째 애인이 도박을 좋아해서 빚이 좀 있었거든요.”
대체 뭐가 아까운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술 잘 마셔요?”
“아니.”
“다섯 번째가 알코올 중독이 약간 있었어요. 삼촌이랑 사귀는 동안엔 다 고쳤지만요.”
알코올 중독이라니, 황당했다. 그는 술에 약했다. 약해서…….
“……술주정 같은 건?”
“술 마시고 폭력 같은 거 휘둘러요?”
백도경의 말에 그는 얼굴을 단단히 굳히고 고개를 저었다.
“뭐 없어요?”
정선우는 자신의 문제를 떠올렸다. 아주 심각한 문제였다.
그건 누군가와 사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문제였다. 그걸 ‘문제’라는 단어로 말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컵을 들어 미지근하게 식어버린 녹차를 마셨다.
왜 그런 사람과 사귄 걸까. 그걸 알면…….
“서도운 씨는…… 왜 그런 사람을 사귀는 거야?”
그의 물음에 백도경은 생긋 웃었다.
“저도 잘 몰라요. 아마 삼촌이 너무 완벽해서 그런 게 아닐까요? 직업이기도 하지만 삼촌은 동물들을 굉장히 잘 돌보거든요. 삼촌은 어딘가 부족한 사람을 돌보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어딘가 부족한 사람.
이상한 단어였다.
컵을 들어 녹차를 마셨다. 마시는 동안에도 목이 말랐다.
그는 다 마신 컵을 내려놓고 그것을 쳐다봤다. 자신이 보고 있는 컵처럼 텅 빈 존재라 해도 괜찮은 걸까.
어딘가 부족한 사람……. 정말 이상한 단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