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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상처투성이 발 (10/35)

10. 상처투성이 발

백도경이 한 제안은 이뤄지지 않았다. 아버지의 회사로 와달라는 그녀의 메시지에 서도운은 긴급수술 중인 서도희를 대신해 진료 중이라는 답을 보내왔다.

이런 상황은 예상치 못한 듯 백도경은 계속 미안하다고 말하며, 꼭 데이트를 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런 말은 지켜지지 않을 의례적인 약속이라고 생각했지만,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마음 한구석이 부풀었다.

문 앞에서 “또 올게요”라고 손을 흔드는 소녀를 보며 그도 손을 흔들었다.

백도경이 떠나간 뒤 사무실 문을 꼭 잠그고 소파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대화도 아니고 백도경이 주절거리는 말을 일방적으로 듣고 있었을 뿐인데 전력 질주라도 한 듯한 기분이었다.

서도운과 만나지 못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머릿속에 가득한 정보를 정리하기도 전에 서도운을 만난다면 생각지도 못한 바보 같은 소리를 해댈 게 뻔했다. 적어도 사흘이나 일주일 뒤에 본다면 부드럽게 대화를 이어나가지 못해도 멍청한 짓은 안 할 것 같았다.

서도운을 생각하면 아주 예쁘고 화려한 깃털이 가슴 위를 쓰다듬는 것 같았다. 손을 들어 셔츠 위를 눌러도 그 감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깃털은 그의 손을 피해 피부 속을 파고들어 심장 위를 스쳐 지나갔다. 토할 것 같이 속이 울렁거렸다.

백도경을 만나고 난 다음, 숫자 하나가 그의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7cm…….

사무실 문 앞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던 서도운의 눈높이를 다시 떠올리려 했지만, 바닥만 보고 있었던 탓인지 생각나지 않았다.

서도운은 그를 올려보거나 내려다보지 않았다. 같은 높이에서 그를 보고 있었다. 그와 키 차이가 7cm나 차이가 날 것 같지 않았다. 백도경이 잘못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자를 꺼내 책상에 올려놓고 7cm를 어느 정도 되는지 확인했다. 손가락 하나 길이도 되지 않았다. 그 정도면 무시해도 좋을만한 차이였다.

7cm…….

그러나 자신의 입술에서 7cm 아래에 있는 서도운의 입술을 떠올리자 상당한 차이로 느껴졌다. 7cm나 아래에 있는 입술에 닿으려면 얼마나 고개를 숙여야 할까 상상이 되지 않았다.

엉망진창이었다.

이대로라면 재무회계 담당자들과 함께하기로 한 점심 약속에서 바보 같은 짓을 해댈 게 틀림없었다.

그는 서류 관련 업무 외에는 쓸모없는 인간이었다. 숫자를 들여다보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이 서툴렀다. 긴장하면 더 실수가 많아졌다. 들뜬 심장을 가라앉힐 시간이 필요했다. 일주일도 모자랐다. 적어도 한두 달은 지나야 서도운과 시선을 마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 *

정선우는 알람 소리에 눈을 뜨며 C그룹에 입사 후 퇴사할 때까지 했던 모든 실수를 떠올렸다.

끔찍했다.

자신 같은 모자라는 인간은 이대로 죽어버리는 게 나았다. 벽을 보고 누워 왜 살아야 하는지 계속 생각했다.

이직을 하고 괜찮아졌는데 왜 다시 이렇게 된 건지 원인을 따졌다. 서도운을 만난다는 생각에 며칠 전부터 잠이 오지 않아 수면유도제를 먹었다. 수면제가 아니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오랜만에 겪는 부작용은 지독했다.

가시지 않는 우울함에 출근하면서 회사를 그만두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3개월도 지나지 않아 자리를 옮긴다면 정당한 사유가 필요했다. 그에겐 이곳을 그만둘 이유가 아무 것도 없었다.

게다가 이 느슨하고 이상한 곳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제법 잘 적응하고 있었다.

C그룹과 비슷한 분위기의 회사로 이직하게 된다면, C그룹 때보다 더 상태가 나빠질 것 같았다. 겨우 끊었던 수면제를 다시 먹고 싶지 않았다.

출근 후 사무실 문을 잠그고 블라인드를 걷었다. 커다란 창으로 환하게 햇살이 비쳤다. 

6월의 볕은 제법 뜨거워 곧 몸이 따끈하게 데워졌다. 개나 고양이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왜 사람으로 태어났을까 생각했다. 개나 고양이로 변해 서도운에게 가고 싶었다.

책상 위에 올려둔 휴대폰이 진동하는 소리에 소파에서 일어났다.

화면에는 서도운의 이름이 떠올라 있었다. 대화창을 여니 일식집 이름과 지도를 캡처한 이미지가 보였다.

그는 시간을 확인하고 자신이 소파에 앉아서 졸았다는 걸 알았다. 앞으로 수면제든 수면유도제든 죽을 만큼 힘들지 않으면 먹지 않기로 했다. 

오늘 재무회계 담당자들을 만나 업무인수인계를 받고 나면 해야 할 일이 쌓일 테고 피곤할 때까지 일을 하면 어떻게든 약 없이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들이 좋은 사람들이길 바랐다.

악수하는 법을 모른다고, 웃지 않는다고, 예의 차린 인사말도 할 줄 모른다고 화내지 않는 사람이기를 바랐다.

서도운은 그들을 격식을 따지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격식을 따지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만나자마자 몇 년생인지, 어느 학교, 어느 과를 졸업했는지, 양친의 직업은 무엇인지 묻는 그런 사람은 아닐 거다. 

술을 못 마신다고 그를 다그치지도 않았으면 했다.

술이 약하다는 말에 마셔야 느는 거라며 술잔이 넘치도록 술을 따르거나, 아버지가 간경화로 돌아가셨다는 말에 인상을 쓰며 혀를 차는 그런 사람도 아니었으면 했다.

“정선우 씨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보여요.”

서도운은 그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도와달라고 말하지 않아도 그의 앞에 놓인 술잔을 치워줄 것 같았다.

벗어둔 여름용 재킷을 입고 가방에 휴대폰을 넣었다. 불안감에 잔뜩 넣어둔 1회용 렌즈가 가방 속에 가득했다.

천천히 심호흡하며 사무실 문을 열었다. 울 것 같은 얼굴 위로 지친 얼굴이 떠오르고, 다시 무표정한 가면이 덧씌워졌다.

일식집은 그가 접대에 끌려다니며 갔던 곳과 달랐다. 곧 폐업을 할 것처럼 가게 내부는 어수선했다.

객실 앞 쪽마루에 앉아 구두를 벗는데 쪽마루 한쪽에 가득 쌓인 신문 더미가 무너졌다. 당황해 바닥에 떨어진 신문을 줍고 있으니 객실 문이 열렸다.

“왔어요?”

보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그리웠던 남자의 만났다는 기쁨을 느끼기도 전에 어째서 이런 모습밖에 보여줄 수 없는지 부끄러워졌다. 신문을 주우며 입안을 또 물어뜯었는지 혀끝에 익숙한 맛이 느껴졌다. 벗어둔 구두를 다시 신고 그대로 가게 밖으로 나가버리고 싶었다.

무어라 말하며 이곳을 벗어나야 할까. 변명거리를 필사적으로 생각했지만, 머릿속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뭘 그렇게 열심히 해요? 대충하고 들어와요.”

신문을 가지런히 쌓고 있는 그를 보며 서도운이 빙긋 웃었다.

“이 양반이 그리 치우라고 해도 말 안 듣더니, 결국은 손님이 청소를 하게 만드네. 그냥 놔두고 들어가요.”

가져온 쟁반을 객실 입구에 내려놓은 중년 여성이 그를 끌어 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이미 음식이 가득 차려진 상 주위에 앉은 세 남자가 객실 입구에 선 정선우를 빤히 봤다. 서도운이 자신의 옆에 놓인 방석을 두드리며 손짓했다.

그는 굳은 얼굴로 서도운 곁에 앉으며 맞은편에 앉은 두 중년 남자를 살폈다.

“아이고, 잘생겼다더니 이건 그냥 잘생긴 게 아니네. 난 ‘더 문’에 이사로 있는 오동석이요.”

숱 많은 부스스한 새치 머리의 남자가 얼른 물수건에 손을 닦고는 그에게 내밀었다.

“정선우입니다.”

정선우는 두 손을 내밀어 그 손을 잡았다. 의례적인 악수로 끝날 줄 알았는데 오동석은 정선우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쥐고는 토닥였다.

“듣자니 능력도 출중하다던데, 잘 와줬어.”

“오 이사, 부담 주면 도망간다니까.”

옆자리에 앉은 남자의 핀잔에 오동석은 머쓱한 얼굴로 정선우의 손을 놓았다.

“회계 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는 김현승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합니다.”

오동석과 달리 머리숱이 빈약한 남자는 테가 굵은 안경 너머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공손한 인사에 그도 고개를 숙이며 손을 내밀었다. 오동석 못지않게 단단한 악수였다.

“일하다가 힘든 일 있으면 무조건 연락해요. 혼자서 용을 써봐야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백경 놈 때문에 내 머리가 얼마나 빠졌는지 말을 다 못해요. 다 같이 생각하면 방법이 있으니까 어렵다 생각하지 말고 연락하세요.”

두 사람은 벗어둔 옷을 뒤져 명함을 꺼내 건넸다. 정선우는 공손하게 명함을 받았다. 명함을 가방에 넣으며 자신의 명함을 만들지 않았다는 걸 그제야 떠올렸다. 일을 한 지 몇 달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명함이 없다는 걸 어떻게 설명하나 머리가 아득해졌다.

손이 굳어버려 가방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그가 이상했는지 서도운이 작은 소리로 물었다.

“전화 왔어요?”

그는 “아니요”라고 답하며 이런 바보 같은 실수를 서도운에게 말해도 될까 생각했다.

“왜요? 렌즈 돌아갔어요?”

“명함이…… 없어요.”

어물거리는 정선우의 말에 서도운은 생긋 웃었다.

“누가 말 안 해주던가요? 거기 사람들은 ‘백경’이라는 이름이 재수 없다고 명함 안 써요. 명함으로 불을 지르다 화재경보기가 울린 후로는 다 같이 명함은 안 뽑기로 했어요.”

백경은 ‘공공의 적’일 뿐만 아니라 ‘저주의 대상’인 듯했다.

“필요해요? 만들어 줄까요?”

“……아니요.”

굳었던 손이 천천히 풀어지며 가방에서 손이 떨어졌다.

서도운이 부드럽게 웃으며 물수건을 내밀었다. 그는 돌돌 말린 물수건을 받아 주물거리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요.”

“네.”

그들을 신경 쓰지도 않고 김현승과 무언가 신나게 떠들어대던 오동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객실 문을 열고 소리쳤다.

“장 사장아, 올 사람 다 왔다! 어제 잡아 온 거 다 꺼내라!”

그에 못지않게 커다란 목소리가 주방에서 들렸다.

“술이나 시켜!”

오동석은 앉아 있는 세 사람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술은 뭘로?”

“소맥.”

김현승이 대답했다. 두 남자의 눈이 서도운에게 향했다.

“전 청하요.”

이제 그에게 시선이 모였다.

“저도……, 청하로.”

그리고 정선우는 이상한 것을 경험했다.

세 사람은 서로의 술잔에 술을 따르지 않았다. 서로 술을 권하지도 않았고, 건배를 외치지도 않았다.

오동석은 잔을 채우기 무섭게 마셔대더니 벌써 소주 반병을 비웠고 김현승은 바텐더처럼 소주를 계량해 소맥을 만들어 원샷을 해댔다.

그는 자신의 앞에 놓인 청하 잔을 가만히 봤다. 한 번도 들지 않은 잔에는 여전히 술이 가득 차 있었다.

“정선우 씨는 그것만 마셔요.”

곁에 앉은 서도운이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꼭 닿아있는 어깨와 팔에 서도운의 체온이 느껴졌다. 셔츠 너머, 맞닿은 부분으로 전해지는 열기는 커다란 날개로 변해 그를 쓰다듬었다. 그 날갯짓은 소설이나 영화에 묘사된 것처럼 뜨겁지는 않았지만 그를 무척이나 두근거리게 했다.

술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얼굴이 달아올랐다. 방석을 옮겨 서도운과 약간의 거리를 만들었다. 이상하게 여길까 쳐다보자 서도운은 살며시 웃으며 들고 있던 잔을 입술에 가져갔다. 단번에 비워낸 술잔이 입술에서 떨어지며 조그맣게 혀가 나와 술에 젖은 입술을 핥고 사라졌다.

그는 서도운을 향한 시선을 간신히 떼어내 다시 자신의 술잔을 봤다.

술이 마시고 싶어졌다.

작은 술잔을 들어 입에 가져가자 소주처럼 역한 냄새는 나지 않았다. 술잔을 기울여 조금 맛을 보니 충분히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 입술을 적시듯 술을 흘려 넣었다.

빈 잔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서도운을 바라봤다.

“나도 술을 좀 마시는데 저 형님들하고는 대작을 못 해요. 절대 저분들 페이스로 술 마실 생각 말고 음식 맛이 좋아지게 두어 잔만 마셔요.”

흉이라도 보듯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는 술보다 더 취기를 불러일으켰다. 다시 떠오르는 망상에 빈 술잔을 꼭 잡고 서도운 앞으로 내밀었다.

“이것도…… 맛있게…….”

그의 말에 서도운은 웃음을 터뜨렸다.

“정선우 씨는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네요.”

웃음기가 배인 목소리에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앞에 놓인 젓가락과 숟가락을 몇 번이고 가지런히 정리했다.

“청하는 차게 마시는 게 맛있기는 하죠.”

객실 밖으로 나간 서도운은 얼음이 가득 담긴 작은 금속 통을 가져와 마시던 청하 두 병을 얼음 사이에 끼워 넣었다.

“오늘 정선우 씨 덕분에 엄청 마시게 생겼네요.”

“왜요?”

“더워서 시원한 술이 땡겼거든요.”

술잔을 든 오동석이 벌떡 일어나 객실 문을 열고 외쳤다.

“장 사장아, 왜 서 선생만 아이스 버킷 주는데! 우리도 아이스 버킷 도!”

“이 미친놈이, 니가 가져가라!”

“저놈이 손님한테 욕을 하네!”

주방에서 날아온 욕설이 섞인 외침에 오동석은 슬리퍼를 끄는 소리를 내며 달려갔다. 곧 이놈, 저놈 하는 소리에 김현승도 일어나 객실 밖으로 나갔다.

정선우는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할지 알 수 없어 젓가락 끝을 계속 만지작거렸다.

“세 분이 굉장히 친한 친구세요. 주인인 장 사장님은 호텔 일식 조리사를 하시다 건강에 문제가 생겨서 그만두셨는데 요리하는 걸 너무 좋아하셔서 또 가게를 내셨어요. 여긴 장 사장님 컨디션에 따라서 문을 여는 곳이라 장사를 안 하는 날이 더 많아요.”

서도운은 아이스 버킷에 든 술병을 꺼내 두 개의 잔을 채웠다.

“낚시를 좋아하셔서 뭘 잡은 다음 날은 꼭 친구들을 부르시거든요. 마침 낚시가신다기에 여기로 불렀어요. 가게가 허름해서 놀랐죠?”

작은 술잔 주위로 하얀 김이 서렸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들까 말까 고민했다.

“혹시 낚시 좋아해요?”

“아니요.”

“잘됐네요. 저 형님들이 술이 좀 되면 분명히 낚시 좋아하냐고 물을 거예요. 낚시광이거든요.”

고개를 들어 쳐다본 서도운의 얼굴엔 장난기 어린 웃음이 걸려있었다.

“딱 잘라서 싫다고 해요. 수영도 못하고 바다도 싫다고 하세요.”

“……그렇게 말해도 되나요?”

“안 그러면 주말마다 낚시하자고 불러내요. 얼마나 귀찮은데요.”

서도운이 물방울이 하나둘 맺힌 술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술잔을 든 손은 화려한 얼굴과 달리 단단해 보였다. 손목에서 내려온 새파란 혈관이 관절을 감고 손가락까지 이어져 있었다. 입술에 술잔이 닿는 순간 젖은 입술을 핥던 작은 혀가 떠올라 정선우는 고개를 숙였다.

술잔을 내려놓는 소리와 함께 서도운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저 형님들은 자기들이 노니까 직장인들 주말이 얼마나 귀한지 몰라요. 무조건 싫다고 하세요.”

그는 앞에 놓인 술잔에 맺힌 물방울을 가만히 쳐다봤다. 물방울은 점점 커져 곧 흘러내릴 듯 커다랗게 부풀었다.

어느 날 부장이 주말에 골프장으로 나오라고 했었다.

이사와 골프를 치러 가는데 그도 끼워주겠다고 했다. 그는 태어나서 한 번도 골프를 쳐본 적이 없었다. 칠 줄 모른다고 했더니 부장은 혀를 차며 당장 스크린 골프장에 가서 골프채를 잡는 법만이라도 배워오라 했다. 장비는 어느 회사, 어느 제품이 좋다며 그걸로 사라고 했다.

“넌 잘생겨서 끼워주는 거야. 다들 이사님이랑 골프 한 번 치려고 얼마나 아등바등하는 줄 알아? 남자고 여자고 얼굴 좀 반반하면 사는 게 이렇게 쉽다니까.”

그는 운동에는 소질이 없어서 한 번 잡아 본 골프채로 조그만 공을 제대로 맞히는 것도 힘들었다. 

이사는 골프공을 치지도 못하는 그를 보며 껄껄거렸다.

“골프는 얼굴만 못하네. 이거 수준 안 맞아서 같이 못 치겠구만.”

월요일에 출근하자마자 부장에게 불려갔다.

“못 치면 못 친다고 해야 할 거 아냐! 못 치는 주제에 옷은 왜 프로처럼 입고 나타나?”

다행스럽게도 다시 골프를 칠 일은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부장의 명령으로 구입한 골프용품은 하나같이 비싸서 그냥 버리기 아까웠다. 단 하루, 단 한 번 쓴 골프용품은 모두 중고로 팔았다.

부장에게 싫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술잔을 들었다.

입안에 흘려 넣은 술은 달았다.

텅 빈 술잔을 서도운 앞으로 밀었다. 술잔은 길게 물 자국을 남기며 서도운 앞에 멈췄다.

“……한 잔…… 더 주세요.”

서도운은 적당히 술잔을 채워 그의 앞에 내려놓고 말했다.

“내 잔도 채워줄래요?”

그를 보는 갸름하게 뜬 눈과 한쪽 끝만 끌어올린 비뚤어진 붉은 입술에서 흘러나온 말에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심장이 수천 개의 꽃잎에 휩싸인 것 같았다.

정선우는 간신히 술병을 들어 서도운의 술잔을 채웠다. 손이 떨려 넘치지 않도록 따르는 것도 힘들었다.

“잘 마실게요.”

꽃 같은 남자가 입술 끝에 웃음을 걸친 채 그가 채워준 술잔을 들었다. 술잔이 입술에 닿는 걸 보며 정선우는 부드럽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가지런한 속눈썹에 가려진 눈동자가 기쁨으로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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