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 맨발로 다가오는 남자 (11/35)

11. 맨발로 다가오는 남자

정선우를 호텔 침대에 눕힌 서도운은 참았던 한숨을 내쉬었다.

“미치겠네…….”

두 번째라고 쉬운 건 아니었다.

지난번과 달리 쓰러지자마자 바로 술자리를 정리하고 호텔로 옮겼다. 호텔로 가는 택시 안에서 깨어난 정선우는 “어디로 가요?” 술주정을 시작했다.

대낮에 취객의 술주정을 들어야 했던 택시 기사에게 미안해 사과와 함께 두둑한 요금을 지불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선우는 몸을 가눌 수는 있었다. 택시에서 내리고 혼자서 호텔 입구를 향해 걸어가더니 갑자기 쓰러졌다. 간신히 붙잡아 바닥에 머리를 부딪치는 건 피했지만, 갑자기 의식을 잃으니 서도운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달려온 호텔 직원의 도움으로 겨우 정선우를 객실로 옮길 수 있었다.

여전히 의식이 없는 정선우의 호흡과 맥박을 확인한 그는 두 번째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의 옷을 벗기는 건 좋지만 의식이 없는 남자는 취향이 아니었다.

세 번째 한숨을 쉬며 정선우의 신발을 벗기고 넥타이를 풀었다. 목을 조이던 셔츠 단추까지 풀어주자 정선우가 부드러운 신음 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자신의 옷을 벗기는 남자가 누구인지 알아봤는지 살며시 웃었다.

그는 네 번째 한숨을 쉬며 풀어둔 넥타이를 다시 들었다.

“정선우 씨, 일단 손부터 묶자.”

정선우는 두 손을 그에게 내밀며 “네”라고 대답했다.

* * *

주방으로 달려가 장 사장의 할아버지 족보까지 들먹이던 오동석은 술병과 아이스 버킷을 들고 방으로 돌아왔다. 말리러 나갔던 김현승도 아이스 버킷에 맥주를 가득 채워 뒤따라 들어왔다.

오동석은 자리에 앉으며 서도운에게 손에 든 술병을 자랑하듯 내보였다.

“이 좋은 걸 저 혼자 먹겠다고 말이야! 서 선생, 디스크 환자는 술 마시면 안 되지?”

장 사장은 술을 즐기지는 않아도 술을 모으는 게 취미였다. 지인들은 그런 장 사장을 위해 특이하고 좋은 술을 선물했고, 술꾼인 두 친구는 장 사장의 수집품을 하나씩 까먹는 재미로 가게를 찾았다.

“그럼요, 환자는 술 마시면 안 되죠.”

“서 선생도 같이 마실래?”

“저까지 공범으로 만들지 말아주세요.”

그가 고개를 젓자 오동석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40도가 넘는 일본식 소주병을 열었다.

도수가 높은 술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천천히, 느긋하게 마시는 게 좋았다. 게다가 오늘은 신경 써야 할 사람도 있었다. 흘러가는 시선으로 본 정선우는 샐러드만 야금거리고 있었다. 상 위에는 커다란 접시 가득 장 사장이 직접 잡아 온 농어회가 있었지만, 정선우는 손도 대지 않았다.

“이건 입에 안 맞아요? 장 사장님은 정통 일식부터 가정식까지 모두 하실 수 있으니까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하세요.”

그의 말에 정선우는 대답 없이 순무와 오이 피클만 빤히 봤다. 젓가락을 든 채 고민하는 모습은 오디션 프로그램의 심사위원처럼 진지했다. 순무와 오이 중 다음 경선 진출자를 결정했는지 그의 귀에 대고 조그맣게 속삭였다.

“……실은…… 생 걸 잘 못 먹어요.”

서도운은 웃음을 참으며 급히 술잔을 들었다. 웃음과 함께 술을 삼키며 좀 더 센 술이었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빈 술잔을 내려놓으며 그도 정선우의 귀에 조그맣게 속삭였다.

“연어 스테이크는 어때요?”

이내 돌아온 “그건 먹을 수 있어요”라는 대답에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상 위로 손을 뻗어 소라 숙회가 담겨있는 접시를 들어 정선우의 앞으로 놓았다.

“이건 숙회라 괜찮을 거예요.”

정선우의 젓가락이 허공에서 잠시 머뭇거리다 소라 숙회를 한 점 들어 입에 넣었다.

살짝 눈을 내리뜨고 천천히 입에 든 음식을 씹는 정선우의 모습은 그의 시선을 붙잡았다. 매끈한 턱 아래 살짝 튀어나온 울대뼈가 움직이며 입에 든 걸 삼킨 후 그를 바라봤다. 무어라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이 오물거렸다.

그는 정선우가 무슨 말을 할까 기대하며 입술을 쳐다봤다. 윗입술보다 도톰한 아랫입술을 보며 남자의 전 애인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결벽증 정신병자.

사귀는 사람의 접촉도 거부하는 남자가 타인과 입을 맞춘 적이 있을까 궁금했다.

“……이거, 맛있어요.”

서도운은 ‘맛있다’라는 말조차 망설이다 꺼내는 남자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다 먹고……, 더 먹고 싶으면 말해요.”

“네.”

서도운은 주방으로 가서 장 사장에게 연어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그의 부탁에 매운 것과 뜨거운 것을 제외한 요리를 준비한 장 사장은 ‘날것’도 제외해달라고 하자 들고 있던 칼을 내려놨다.

장 사장은 전체 메뉴를 바꿀 건지 한 사람을 위한 요리를 따로 준비해야 할지 물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 같은 메뉴를 1인분씩 따로 담아달라고 답했다. 책보다 칼을 먼저 잡았다고 자랑하던 요리사는 “편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해야겠네”라며 빙긋 웃었다.

주문을 마치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다 문밖으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멈춰 섰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세 사람의 목소리가 제각각 버석대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거, 일이 없으면 좀 놀지, 왜 있는 서류, 없는 서류 죄다 꺼내 봐서는…….”

원망 섞인 오동석의 목소리에 김현승의 그만하라는 핀잔이 이어졌다.

“일 찾아서 하는 사람을 왜 탓해! 오 이사가 심통 나서 혼잣말하는 거니까 정선우 씨는 신경 쓰지 말아요.”

“이번에 나온 재무제표도 손대셨던데 박수경 씨는 저한테는 아무런 설명도 안 하더군요.”

“아니, 그건 작년 결산이고…….”

“저는 재무회계 담당으로 4월에 이곳에 왔습니다. 저를 두고 그런 식으로 일을 진행하는 건 업무상 따돌림 아닌가요?”

“아이고, 정선우 씨~ 그런 거 아니야!”

정선우의 말에 놀란 오동석의 목소리가 튀었다.

“우리가 늦게 알았어요. 사람이 새로 왔으면 왔다고 해야 되는데…….”

“맞아, 백경 놈이 그런 말은 하나도 안 했어!”

“우리 일이 이달에 이거, 저 달에 저거, 딱딱 정해져 있잖아요. 5월이니까 늘 하던 대로 한 거예요.”

“정선우 씨가 이렇게 온 줄 알았으면 우리가 벌써 불렀지!”

오동석의 앓는 소리와 김현승 특유의 조곤조곤 타이르는 말이 이어졌다.

그는 지금이라도 객실에 들어가 오동석과 김현승을 도와줄까 하다 이어지는 정선우의 말에 쪽마루에 앉아 좀 더 기다리기로 했다.

“‘백경 프로덕션’은 법인이고, 백 감독님은 고용자에 불과합니다. 그런 백 감독님이 회사 자금을 멋대로 사용하고 있더군요. 명백한 횡령입니다.”

“아이고, 우리가 그걸 못하게 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 그놈은 말리면 더해!”

“이게 구멍가게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놈이 자기가 쓴 돈을 채워 넣는 것도 아니니 우리가 아주 죽을 지경입니다.”

뒤이은 오동석과 김현승의 말에 서도운은 밖으로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으려 입을 막았다. 둑이 무너진 듯 오동석과 김현승의 입에서 지금까지 백경이 저지른 여러 가지 정신 나간 짓거리들을 줄줄이 쏟아졌다.

“미국에 뭐 주문했다고 서류 들이미는데, 뒤에 동그라미 세다가 내가 미치는 줄 알았다니까!”

“그런 게 한두 번이어야지! 대출 서류 가져 왔을 때는 이건 뭐…….”

“그놈은 못 하게 하면 사채를 끌어다 쓸 놈이야!

백경은 최신 장비를 보면 무조건 사고 보는 인간이라, 새로운 제품이 출시되면 제 돈과 남의 돈을 구분하지 않고 죄다 끌어다 샀다. 거하게 말아먹고 나서부터 운영에는 관여하지 않게 되었지만, 공사 구분 없이 돈을 써대는 건 여전했다.

정선우에게 백경으로 인해 썩어들어가는 마음을 토해낸 두 사람은 빈자리를 술로 채울 생각인지 연이어 술잔을 테이블에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 서도운 씨를 만났을 때 백 감독님의 문제에 대해서 충분히 설명해주더군요. 횡령이 성립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고요. 백 감독님은 ‘백경 프로덕션’에서 노예처럼 일해야 한다고 했을 때 농담인 줄 알았는데 금액을 보니 정말 노예처럼 일하셔야 되겠더군요.”

정선우의 입에서 자신이 지나가듯 한 농담이 나오자 서도운은 슬며시 웃었다. 그래서 결론이 뭘까 궁금해졌다.

“저는 불법적인 일에는 관여할 생각이 없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탈세를 하고 있다면 신고할 생각이었습니다만 세금 부분은 아주 깔끔하더군요.”

“아이고, 탈세는 무슨! 김 소장아, 정선우 씨 성격 보통 아니다.”

“세무서에서 우리 서류는 확인도 않고 넘깁니다. 내가 회계사로 있는 한, 절세는 있어도 탈세는 없어요.”

“백 감독님이 회사 돈을 자신의 돈처럼 쓰고 있는 건 맞지만, 구입한 물품은 모두 법인 자산으로 처리해서 횡령도 성립이 안 되더군요. 그렇게 따지면 백 감독님은 ‘백경 프로덕션’에 어떤 손해도 끼치지 않는 셈입니다. 실제로는 어떻습니까? 숨겨둔 채무라도 있습니까?”

정선우의 물음에 오동석은 앓는 소리와 함께 술잔을 탁자에 내려놨다.

“……빚은 없지. 근데 제로야, 제로! 그놈이 지가 버는 만큼 다 써.”

“오 이사 말대로 운영비, 임금 빼고 나면 소득이 없어요.”

“김 소장, 건물임대료 제대로 받으면 마이너스야. 우리가 임대료를 얼마나 싸게 받는데.”

“그거라도 받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지! 정선우 씨, 그놈은 몇십억을 벌든 버는 족족 다 쓰는 놈입니다.”

“내가 살다 살다 그런 놈은 처음 본다니까!”

다들 입을 다물고 술을 마시는지 침묵이 이어졌다.

“그럼 재무제표를 조작하는 이유가 뭡니까? 탈세를 위한 것도 아니고, 투자자를 모으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정선우의 물음에 오동석과 김현승이 서로에게 미루다 결국 김현승이 입을 열었다.

“그놈이 운영할 때는 세금 관련된 것 외에는 신경을 안 썼습니다. 빚이 있든 말든 알아서 하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놈이 영화 할 때 같이 일하는 사람들한테 투자를 받았어요. 영화가 잘 되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으니까…….”

서도운은 김현승의 말에 누나의 분노를 떠올렸다.

그때가 처음이었다. 서도희가 백경에게 화를 낸 건.

“투자 회사나 있는 사람이 여윳돈으로 투자한 거야 무슨 상관있겠습니까. 그런데 아닌 사람이 많았나 봅디다. 투자가 원래 그런 거니까 다들 그놈한테 뭐라 말도 못 하고……. 그때 백경 주위에 있던 사람이 많이 떠났어요.”

서도희가 화를 낸 건 돈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는 백경이 돈을 얼마를 날려도 상관없었다. 돈은 넘치게 있었다. 백경이 한 짓은 그를 믿은 사람을 배신한 것이었고, 서도희는 그것에 분노했다.

백경은 이틀을 꼬박 울면서 엎드려 빌었지만 서도희의 분노는 그것으로 가라앉지 않았다. 일이 해결될 때까지 보고 싶지 않다고 쫓아내자, 백경은 탈진과 충격으로 정신을 잃었다.

서도운은 그런 백경을 입원시키고 서도희가 부를 때까지 자숙하라는 말을 전했다. 백경은 퇴원 후 영화계 선배의 집으로 들어가 그녀가 용서해주기만을 기다렸다.

“서 부원장이 백경이 개인적으로 투자받은 사람들 투자금은 전부 돌려줬지만 한 번 잃었던 신용은 되찾기 힘들지요. 거기서 그럽디다. 백경은 제 밑에 있는 사람들 돈도 뜯어내는 놈이라고…….”

오동석이 혀를 차는 소리가 문 너머에까지 들렸다. 무거운 침묵 속에 술잔을 들었다 내려놓는 소리가 울렸다.

“지금이야 우리도 있고, 서 서생이 지키고 있으니 그럴 일은 없지만, 이런저런 사정을 사람들이 다 알 리는 없지요.”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서류 한 장 보여주는 게 빠르지, 특히나 돈 문제는.”

쪽마루에 앉아 있는 서도운을 본 정 사장은 기다려 달라는 그의 손짓에 고개를 끄덕였다.

“난 정선우 씨가 우리랑 오래오래 같이 일했으면 좋겠어요. 그 대쪽 같은 성미도 내 맘에 쏙 듭니다. 오 이사는 어때?”

“그렇지, 남의 돈을 만지는 사람은 유들유들하면 안 돼. 보니까 백경 놈한테도 하나도 안 밀리겠다.”

“가만있자, 4월달에 옮겼다고 했으니까……. 수습 기간 3개월 잡고 연봉협상 다시 합시다.”

“그래, 김 소장! 말 잘 꺼냈다. 서 선생도 있으니까 여기서 이야기 끝내고 가면 되겠네!”

서도운은 자신이 등장할 때가 된 것을 알았다. 소주와 맥주병을 챙겨 들고 나타나자 오동석과 김현승이 반색을 했다. 김현승은 마실 술이 없어 목이 말랐다며 냉큼 맥주병을 받아들어 뚜껑을 땄다.

“서 선생, 밖에서 뭐 했어? 왜 이제 들어와?”

“먹고 싶은 게 있어서 몇 가지 부탁드리고 왔어요.”

오동석의 말에 대답하며 그는 곁눈질로 정선우를 살폈다.

여전히 가득한 잔을 보며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딱 한 점 줄어든 소라 숙회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새로 준비한 음식이 정선우의 입에 맞기를 바랐다.

객실 문이 열리고 장 사장이 카트에 준비한 음식을 그들의 앞에 내려놨다. 모든 요리는 그릇에 1인분씩 담겨있었다.

그는 자신의 앞에 놓인 참치 타다키 샐러드의 붉은 살을 보고 슬며시 정선우의 샐러드 그릇을 확인했다. 그와 달리 정선우의 것은 완전히 익혀져 있는 것을 보고 장 사장을 향해 눈인사를 건넸다.

“장 사장, 문어도 잡았나?”

“서 선생이 오랜만에 온다기에 제철인 건 다 한 마리씩 샀지.”

“야들야들하니 술이 입에 붙어.”

그는 껄껄거리는 세 남자를 두고 정선우를 곁눈질로 살폈다. 망설이던 전과는 달리 정선우는 자신의 앞에 놓인 음식을 모두 맛보고는 연어 스테이크와 문어 가라아게가 마음에 들었는지 이번에는 제법 열심히 젓가락질을 했다.

“서 선생, 나랑 김 소장은 정선우 씨가 너무 맘에 든다. 그렇지, 김 소장?”

기분 좋게 술잔을 비운 오동석이 김현승을 보며 껄껄 웃었다.

“어디서 이런 보물을 찾았나 했다니까.”

“그렇게 좋으세요?”

그의 물음에 김현승은 방긋 웃는 얼굴로 정선우를 쳐다봤다.

“서 선생, 정선우 씨 어디 못 가게 꼭 잡아.”

“네, 어디 못 가게 제 옆에 꼭 붙들어 놓겠습니다.”

정선우가 젓가락질을 멈추고 슬며시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도 정선우 씨가 마음에 들어요.”

시선이 마주치자 정선우는 그를 보지 않았다는 듯 얼른 고개를 내리고 계속 젓가락질을 이어갔다.

“백경 프로덕션이 규모가 작은 것도 아닌데 재무회계 담당자 없이 오 이사님과 김 소장님이 맡아서 하고 있는 이유는 다들 백 감독을 못 견디고 도망가서 그렇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도 설명했지만, 정선우 씨가 하게 될 주 업무는 백 감독 횡령을 합법적으로 처리하는 겁니다.”

서도운은 자신의 앞에 놓인 잔을 채우고 말을 이었다.

“도망가지 않을 자신이 있으면 뭐든 원하는 대로 맞춰드릴게요.”

정선우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를 보는 눈에 묘한 기대감이 어려 있었다. 가득 채운 술잔을 비우고 내려놓자 정선우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럼……, 서도운 씨가 제 상사가 되는 건가요?”

“그런 셈이죠.”

“……업무 보고도 서도운 씨에게 하면 되나요?”

“업무적인 것 외에 백 감독 욕을 하고 싶을 때나 맛있는 걸 먹고 싶을 때도 연락하세요. 그거 직원 복지예요.”

그는 빈 술잔을 채우며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도망치지 말고 계속 나랑 같이 일해요.”

가득 채워진 잔을 만지작거리는 정선우의 손이 떨리며 술잔 속의 술이 찰랑거렸다. 말려야 할까 잠시 고민하는 사이, 정선우는 말끔하게 잔을 비워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잔을…… 채워주세요.”

그는 술병을 들어 남은 술을 정선우의 잔에 채웠다. 겨우 두어 잔의 술에도 술기운이 오르는 듯 그를 바라보는 정선우의 눈가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래서 대답은 뭔가요?”

“계속, 같이…… 함께…….”

귀를 기울여야 겨우 들리는 조그만 목소리는 오동석과 김현승에게 불법적인 일은 할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하던 목소리와 다르게 느껴졌다.

“그럼 연봉협상부터 다시 해야겠네요. 세게 불러요. 전에도 말했지만 나 돈 많아요.”

“네.”

작은 목소리지만 정선우의 답을 들은 서도운은 농어 낚시에 대해 토론 중인 세 사람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정선우 씨가 계속 우리랑 같이 일한답니다.”

“아이고, 드디어 우리가 그놈을 벗어나는구나!”

“정선우 씨, 절대 말 바꾸면 안 됩니다!”

세 사람은 얼싸안고 기쁨을 나누다 갑자기 정선우를 쳐다봤다.

“정선우 씨, 낚시 좋아해요?”

“우리 이번 주말에 배 타고 바다 나갈 건데, 정선우 씨도 같이 가자!”

“낚시 못 해도 되니까 바다 구경하는 셈 치고 같이 갑시다.”

“우리가 다 준비할 테니 정선우 씨는 그냥 몸만 와”

세 사람은 잔뜩 기대감이 어린 눈으로 정선우를 쳐다봤다. 정선우는 부담스러운지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이리저리 헤매던 시선이 그에게 머물렀다. 

슬쩍 웃으며 고개를 젓자 정선우는 입매를 굳히고 세 사람을 향해 입을 열었다.

“가기 싫습니다. 낚시도 싫어합니다. 수영도 못합니다.”

단호한 대답에 세 남자는 실망한 듯했지만, 백경으로부터 자유를 얻었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어디로 낚시를 갈 건지 신나게 떠들어댔다.

오동석과 김현승은 그를 만날 때마다 백경 욕을 하며 우는소리를 했다. 앞으로는 정선우가 그를 붙잡고 우는소리를 할지도 몰랐다.

‘백경 개새끼’라고 욕을 해대는 정선우를 떠올리자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혼자 키득거리며 정선우를 쳐다보자 그가 돌아봐 주기를 기다렸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그 모습에 어쩐지 칭찬을 해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잘했어요.”

그의 말에 정선우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무표정한 얼굴을 지우고 모든 감정을 드러냈다. 커다랗게 뜬 눈과 작게 벌어졌다 다물어지며 우물거리는 입술은 어쩔 줄 모르는 아이 같았다.

“저, 저, 화, 화장실 좀…….”

몸을 일으키던 정선우가 다시 주저앉더니 그대로 쓰러졌다.

“정선우 씨! 정선우 씨!”

서도운은 정신을 잃은 정선우의 맥박과 호흡을 확인하고 아이스 버킷에 든 술병을 꺼냈다.

술병 두 개가 모두 비어있었다.

그는 상 너머에 얼빠진 얼굴로 앉아 있는 세 사람을 향해 술병을 들어 보였다.

“제가 나가 있는 동안 정선우 씨가 술 마셨어요?”

“우리 마실 때 같이 한 잔씩 마시던데.”

“몇 잔 안 마셨어.”

오동석과 김현승의 대답에 그는 빈 술병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었다.

* * *

그는 전과는 달리 풀기 쉬운 나비매듭으로 정선우의 손목을 묶고 당부했다.

“정선우 씨, 손 씻고 와서 렌즈 빼줄 테니까 얌전히 있어요.”

“네, 얌전히…… 기다릴게요.”

정선우는 기도하는 듯 두 손을 가슴 위에 모으고 가만히 대답했다.

하얀 베개 위에 흩어진 머리카락이 유난히 까맣게 보여 독 사과를 먹고 잠든 백설 공주 같았다.

서도운은 손을 씻다가 자신의 손목을 잡아 두께를 쟀다. 넥타이로 묶으며 잡아본 정선우의 손목도 그의 것과 비슷했다. 가늘어 보였지만 그와 똑같은 남자의 것이었다.

갑자기 정선우의 몸에 있는 모든 관절이 가느다랗고 여리게 느껴지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셔츠를 벗겨 턱에서 후두 돌기로 이어지는 미려한 목선이 그대로 가슴과 어깨로 이어지는 것을 보고 싶었다.

서도운은 수건에 손을 닦으며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깨닫고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이만큼 홀릴 정도면 정선우란 남자의 껍데기가 퍽 대단한 모양이었다.

“정선우 씨, 자요?”

눈을 감고 얌전히 누워있던 정선우가 천천히 눈을 뜨더니, ‘아니요’라고 답했다. 울지 않는 걸로 봐서는 렌즈가 돌아간 것 같지는 않았다.

“렌즈 빼줄 테니까 가만히 있어요.”

“네.”

그는 전처럼 배 위에 앉아 턱을 잡아 얼굴을 바로 했다. 눈꺼풀을 벌리려 손을 눈가로 가져가자 정선우가 눈을 꼭 감았다.

“정선우 씨, 눈 떠요.”

“싫어요…….”

“눈을 떠야 렌즈를 꺼내죠.”

“싫어요…….”

“그럼 억지로 벌릴 거예요.”

서도운의 말에 정선우는 살며시 눈을 뜨더니 입술을 뿌루퉁하게 내밀었다.

“키스는…… 눈 감고 하는 건데…….”

“네? 뭘 해요?”

“……키스요.”

작은 목소리지만 명확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무시했다. 술에 취한 인간의 말은 진지하게 들을 필요가 없었다.

그는 정선우의 눈꺼풀을 벌려 안구에 달라붙어 있는 렌즈를 빼서 버리고 손을 묶은 넥타이도 풀었다.

“얌전히 잠이나 자요. 토할 것 같으면 말하고.”

이불을 덮어주고 일어나자 이불 밖으로 빠져나온 손이 그의 셔츠를 붙잡았다.

“가지 마세요……. 옆에 있어요…….”

예쁜 껍데기로 유혹했다면 끌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그를 부르는 소리가 커다란 개가 기가 죽어 낑낑거리는 소리 같아서 홀로 내버려둘 수 없었다.

침대 가에 앉으며 애처로운 얼굴로 그의 셔츠를 꼭 쥐고 있는 손을 두드리며 말했다.

“안 갈 테니 손 놔요.”

“싫어요…….”

“정선우 씨는 싫어하는 게 많네.”

“아니요……, 서도운 씨 안 싫어해요……. 서도운 씨 좋아요. 너무 좋아요…….”

이상한 고백이었다.

“내가 왜 좋아요?”

그의 물음에 정선우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여리게 웃었다.

“너무…… 멋있어요.”

“얼굴이요?”

“전부 반짝반짝……. 서도운 씨가…… 형이었으면… 좋겠어요.”

“나도 정선우 씨 같은 동생은 괜찮을 것 같네요. 앞으로는 형이라고 불러요.”

“네.”

어차피 술이 깨면 기억하지 못할 테지만 작은 아이 느껴져 매정하게 대할 수 없었다. 손을 뻗어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려주자 살며시 눈을 감았다. 더없이 유순하게 구는 남자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내려 볼을 만져주자 셔츠를 쥐고 있던 손이 떨어져 나와 그의 손을 겹쳐 잡고 볼을 비볐다. 얼굴 가득 원하던 것을, 바라던 것을 손에 넣었다는 기쁨이 드러났다.

“더 해주세요.”

눈을 감고 그의 손에 얼굴을 비비는 정선우의 모습은 애교를 부리는 개 같았다.

“귀엽네…….”

살며시 뜬 눈꺼풀 사이로 정선우의 까만 눈이 반짝였다. 한껏 기쁨에 취해 웃고 있는 입술이 벌어졌다.

“……귀여워요?”

“그래, 귀여워.”

“정말…… 귀여워요?”

“응.”

“내가? 귀여워?”

“그래.”

잘생겼다는 말을, 찬탄을 아낌없이 들었을 남자는 ‘귀엽다’는 말이 아주 대단한 칭찬인 듯 반복해서 묻고 확인했다.

“아… 어쩌지…….”

행복해 죽겠다는 남자의 얼굴이 갑작스레 울 것 같은 얼굴로 변했다.

“왜?”

“형이면 안 되잖아…….”

“뭐가?”

“형이면…… 키스하고… 그런 거, 못하잖아……. 하고 싶은데…….”

생각지도 못한 말에 서도운은 웃음을 터뜨렸다.

정선우는 성욕이 없어 씹선비라고 놀림 받고, 스킨십을 거부하다 결벽증으로 차인 남자가 아니었던가.

“너 결벽증이잖아. 그런데 나랑 키스하고 싶어?”

“……아니야, 그런 거.”

“뭐가 아닌데?”

“결벽증 아냐…….”

“그럼 뭔데?”

“나…… 안 서.”

“뭐가? ……발기?”

혹시나 하는 물음에 정선우는 입술을 삐죽이며 “응”하고 대답했다.

‘씹선비’는 성욕이 없거나 결벽증이 있는 게 아니라 섹스를 못 하는 거였다!

예상치 못한 사실에 그는 이것이 아주 사적인 일이며 정선우가 술에 취해서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도 잊고 호기심을 드러냈다.

“언제부터? 병원은 가봤어?”

“……모르겠어. 한 번?”

“뭐가 모르겠다는 거야?”

“서는 거…….”

언제 발기불능이 되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고백한 남자는 천진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스무 살 이후야? 이전이야?”

“음……, 대학 가서… 처음인데, 여자랑……. 그때도… 그랬어…….”

“스무 살 때?”

“응.”

“그럼 섹스한 적 없어?”

“……없어. 나… 싫어하지 마. 응? …바보 같다고… 그러지 마…….”

정선우는 그의 손에 볼을 부비며 속삭였다.

가지런하게 내려앉은 속눈썹이 금방이라도 젖어 들 듯했지만 눈가에 걸린 눈물은 거기서 멈췄다.

손바닥에 기이한 느낌이 전해졌다. 정선우의 얼굴 근육이 잔뜩 긴장했다가 놀란 듯 짧게 경련을 일으켰다 풀어졌다. 불쾌감이 몸 구석구석 퍼졌다. 본능이 눈앞에서 ‘나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알려왔다.

서도운은 이상하리만치 꾹 다물고 있는 정선우의 입술을 억지로 열었다. 고여 있던 피가 입술 사이로 흘러내렸다.

“너…….”

버둥거리는 몸을 눌러 억지로 턱을 비틀어 벌리자 입안 가득 고여 있던 피가 쏟아졌다.

나이트 테이블에 놓인 티슈를 무더기로 뽑아내 입안에 밀어 넣었다. 티슈가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다. 

두어 번 반복해 입안에 고였던 피를 닦아내고 손가락을 넣어 혀와 물어뜯기 쉬운 볼 안쪽을 만져봤지만 상처는 없었다. 다시 고인 피를 닦아내고 입술 안쪽을 살피자 아랫입술 안쪽에 아직도 피가 새어 나오는 상처가 있었다.

티슈를 뭉쳐 피를 닦아내고 상처를 살폈다. 반복적으로 물어뜯어서 생긴 잇자국과 흉터로 남은 상처가 가득했다.

습관적인 행위라는 뜻이었다.

티슈를 뭉쳐 상처에 대고 내려다보자 정선우의 눈가에 고였던 눈물이 그제야 흘러내렸다.

피가 멈췄을 때 정선우의 머리맡에는 피에 젖은 티슈가 꽃처럼 쌓였다. 새까만 머리와 하얀 피부, 검붉은 자해의 흔적을 가진 남자가 그를 바라봤다.

“계속…… 보고 싶었어…….”

멈추지 않는 눈물에 발갛게 부어오른 눈이 그를 유혹하는 듯했다. 서도운은 손을 내밀어 붉은 눈가를 손끝으로 문질렀다. 고여 있던 눈물이 다시 흘러내렸다.

“……예쁘네.”

정선우는 눈가를 만지는 그의 손을 꼭 붙잡아 젖은 볼을 비볐다.

“이렇게 예쁜데……, 내 개가 되고 싶어?”

작은 속삭임에 정선우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고양이도…… 괜찮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