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여물지 못한 상처를 위한 기다림
백도경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동물을 학대하는 사람이었고, 두 번째로 싫은 건 키우던 반려동물을 버리는 사람이었다. 세 번째는 밀렵꾼이었고, 네 번째는 동물을 이용해 제 이득만 챙기는 사람이었다.
다섯 번째가 아빠인 백경으로, 백경은 물론 가족들 모두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첫 번째가 아니니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라며 말했지만, 실은 동물과 관계없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아빠란 걸 다들 알고 있었다.
그녀는 며칠 전 ‘세상에서 제일 싫은 사람’과 ‘세상에서 꼴도 보기 싫은 사람’의 순위에서 백경을 제외했다.
망할 스머프가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하늘이 이렇게 부녀지간을 화해시키고 싶었던 모양이라고 감동하며, “이런 화해는 환영한다!”라고 학교 옥상에서 포효했다.
백도경은 자신의 계획에 멋진 이름도 붙였다.
〈서도운의 사랑을 위한 원대하고 아름다운 프로젝트〉
뭐든 이름부터 좋아야 했다.
담임으로부터 받은 조퇴증이 오늘따라 더욱 예뻐 보였다. 조퇴증은 자신의 조퇴는 물론 서도운과 정선우의 사랑을 이뤄줄 수단이었다. 백도경은 삼촌에게 조퇴증을 찍어 보내며 아빠의 회사로 데리러 와달라는 메시지를 더했다.
아빠인 백경과 점심을 먹을 때 삼촌을 부르려면 출석 증명을 해야 하는 사실이 매우 슬펐지만, 그 정도는 사소한 희생이었다. 어떻게든 두 사람을 만나게 해야 했다.
가방을 챙겨 교문으로 향하는 동안 노래가 절로 나왔다. 물론 사랑 노래였다.
그녀는 요즘 환각을 보거나 환청이 듣는 일이 종종 있었다. 대부분 서도운에 대한 것으로 서도운이 운전하는 차를 보면 조수석에 앉아 있는 정선우가 보이거나, 서도운이 결혼하자는 말에 정선우가 수줍게 “네”라고 답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백도경은 이 환상이 현실로 실현되기를 간절하게 바랐다. 새하얀 턱시도를 입은 두 사람의 앞길에 자신이 꽃을 뿌릴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나 잊을만하면 뒤통수를 후려치는 게 인생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공부하라는 부모님의 잔소리도 없고, 하고 싶은 일만 하는 돈 많은 열다섯 살 소녀의 삶도 그 뒤통수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행복하기만 할 것 같은 그녀에게 하늘은 ‘백경’이라는 인간을 아버지로 보내지 않았던가!
지금은 필요한 것은 신중함이었다.
그녀는 삼촌의 앞길에 꽃을 뿌리기 전, 탐지견이 되어 장애물과 함정을 모두 치우기로 했다. 그러다 자신의 삶에서 장애물을 치우는 걸 잊었다.
엄마의 손에 기말고사 성적표가 들어갔다.
서도희와 백경 부부가 분가해 가족 모두가 한자리에 모이는 건 오랜만이었다.
거실에 둘러앉은 다섯 명의 사람들 사이로 한쪽 눈이 없는 턱시도 고양이가 지나가자 그 뒤를 꼬리가 뭉툭한 노란 태비가 쫓아갔다. 거실 한쪽에서 푸다닥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들은 익숙한 일인 듯 신경 쓰지 않았다.
서도희는 테이블 위에 종이 한 장을 내려놨다.
외할머니인 문현정은 테이블 위의 종이를 들어 “어머”, “어휴”, “세상에”라는 말로 놀람을 표시했다. 문현정이 서도운에게 넘겨주자 서도운은 보지도 않고 백경에게 넘겼다. 백경은 성적표를 보자마자 감탄사를 내질렀다.
“이야, 이거 완전 꼴통이네.”
백도경은 평소처럼 소리를 지르려다 할머니를 보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찍어도 이런 성적은 안 나와. 시험 칠 때 잤어?”
이때다 싶은지 마음껏 놀려대는 백경을 보며 세 사람은 어쩌면 저렇게 딸에게 미움받을 짓만 골라서 하나 감탄했다.
“……아빠 닮아서 그런 거야. 엄마 닮았으면 안 그래.”
“천재 감독 백경 몰라? 나도 머리 좋거든.”
“여기서 제일 머리 나쁜 사람은 아빠잖아!”
백도경은 참다못해 소리를 질렀다.
백경은 딸의 말에 반박을 하려다 주위를 둘러봤다. S대 수의학과 동문으로 박사 학위를 가진 세 사람이 빤히 보고 있었다. 학벌이나 학력으로 똑똑한 걸 증명할 수는 없지만 이 자리에 있는 세 사람이 그보다 똑똑한 건 사실이었다.
“나도 어디 가서 머리 나쁘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는데…….”
그는 ‘아빠를 닮아 머리가 나쁘다’라는 딸의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백도경, 아무리 중학교 성적이 중요하지 않다지만 이건 너무 심하잖아.”
엄마의 말에 백도경은 커다란 눈을 데굴데굴 굴려 삼촌을 쳐다봤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녀를 도와줄 사람은 삼촌밖에 없었다.
“괜찮아, 졸업은 할 수 있어.”
역시나 삼촌뿐이었다.
“너 혹시 이거 알고 있었어?”
서도희는 미심쩍은 눈길로 서도운을 쳐다봤다.
그는 누나의 시선에 한숨을 내쉬었다. 중간고사 후 너무나 처참한 성적에 가정에 문제가 있는지 걱정이 된 담임이 학부모 면담을 요청했다. 당연하게도 백도경은 엄마나 아빠가 아닌 삼촌인 서도운을 학부모로 소환했다.
담임은 서도운에게 백도경이 전교 꼴찌를 했다며 아마도 장난을 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미 전산처리가 되어 어쩔 수가 없다며 내신에 반영될 거라고 전했다. 기말고사에서는 제발 그런 장난을 못 치게 해달라며 사정했다.
서도운은 백도경의 중간고사 성적표를 확인하고 나름 열심히 풀어서 그 지경이 된 것을 알았다.
서도운은 그날 백도경의 성적을 완전히 포기했다.
“공부 말고 잘하는 거 많잖아.”
“그래도 이건 너무했어.”
서도희는 성적표를 집어 들고 다시 살폈다. 전 과목별 점수 평균 이하, 과목별 석차 꼴찌, 전교 석차 꼴찌라는 성적으로는 고등학교에 가는 것도 힘들어 보였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딸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도경아, 구구단은 외울 줄 알아?”
엄마의 말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백도경은 조그만 입술을 삐죽하게 내밀고 고개를 끄덕였다.
“7×8?”
“56.”
“8×6?”
“54.”
깊은 침묵이 그들 사이에 내려앉았다.
“도경아, 다른 건 못해도 돈 계산은 할 줄 알아야 사는 게 편해.”
“포, 폰에 계산기 있잖아.”
“전원 꺼지면 어쩔 거야?”
서도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타이르자 백도경은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런 딸을 보며 서도희는 자괴감이 들었다. 딸이 공부를 싫어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구구단도 외우지 못할 줄은 몰랐다.
“도경아, 엄마랑 공부하자.”
“싫어! 엄마랑은 안 해!”
백도경은 기겁하고 서도운의 등 뒤에 숨어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문현정은 티슈를 잔뜩 뽑아 손녀의 눈가를 닦았다. 할머니의 손길에 백도경이 커다란 눈을 껌벅이며 눈물을 쏟아냈다.
“우리 도경이 구구단 외울 수 있지?”
할머니의 토닥임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코를 풀었다.
“응, 헷갈린 거야.”
“8×6?”
“48!”
“6×7?”
“42!”
“7×8?”
“54!”
“아휴, 이를 어째.”
할머니의 한숨에 그녀는 이제 달아날 곳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도경아, 엄마가 다른 건 공부하란 소리는 안 할게. 구구단만 외우자.”
“안 해, 나 바빠!”
“너 요즘 보호소에도 안 가잖아. 엄마랑 구구단만 외우자.”
“싫어, 바쁘다고 했잖아!”
백도경은 서도운의 등 뒤에 웅크려 엉엉 소리를 내 울었다. 문현정은 다시 티슈를 잔뜩 뽑아 백도경의 얼굴을 닦아냈다.
“엄마가 싫으면 할머니랑 공부할래?”
“할머니도 안 돼, 나 바쁘단 말이야.”
막무가내로 떼를 쓰는 백도경을 보며 세 사람은 백경을 쳐다봤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백경을 빼다 박았을까 싶었다.
어딘가 닮은 세 사람의 시선에 백경은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저었다.
“난 쟤랑 공부하기 싫어.”
백경의 말에 서도운의 등 뒤에서 꽥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멍청이 스머프랑은 안 해!”
“구구단도 못 외우는 게 누굴 보고 멍청이래!”
“구구단 외울 수 있어!”
늘 그렇듯 악악거리는 부녀지간의 다툼에 서도희는 이마를 짚었다.
“그만! 백도경, 왜 싫은지 말해. 엄마가 납득할 수 있는 이유면 구구단 외우라고 안 할게.”
백도경은 고개를 팩 돌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에 백경은 무언가를 떠올렸다.
“혹시 그거 정선우 씨랑 관계있는 거야?”
“아, 아냐아!”
놀란 백도경이 서도운의 등 뒤에서 튀어나와 외쳤다. 백경은 자신이 제대로 짚었다는 걸 알았다.
“아니긴 뭘, 그거네!”
“아냐, 그거 아냐! 그런 거 아니란 말이야!”
“서 선생, 얘가 서 선생이랑 정선우 씨랑 엮어주려고 하는 거 알아?”
“아니라고 하잖아! 바보! 멍청이! 망할 스머프!”
백도경은 발을 동동 구르며 백경을 향해 악을 쓰다 바닥에 엎드려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각서까지 쓰고는…….”
믿어서는 안 되는 거였다.
프로덕션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욕을 해대는 걸 옆에서 들었으면서 각서 한 장 썼다고 믿어버렸다. 화가 나서 눈물밖에 안 나왔다. 어떻게 아빠란 사람이 딸과 한 약속도 저렇게 쉽게 어긴단 말인가, 백도경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후회했다.
이제 다 틀렸다.
〈서도운의 사랑을 위한 원대하고 아름다운 프로젝트〉가 구구단 때문에 망할 줄이야, 그것도 8단 때문이라니! 6단까지는 괜찮은데 솔직히 7, 8, 9단은 헷갈렸다.
모든 게 아빠 때문이었다.
각서를 쓰고도 어겼으니 거액의 배상금을 뜯어내리라 마음먹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각서 끝에 계약 불이행 시 배상금 항목을 넣어두긴 했지만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다.
백도경은 쏟아지는 눈물을 닦으며 망할 스머프에게 반드시 1억을 받아 내리라고 다짐했다.
“도경아.”
서도운은 대성통곡을 하고 있는 백도경을 일으켜 안았다. 삼촌의 품에 안긴 백도경은 더욱 서럽게 울어댔다. 그는 그런 조카의 등을 토닥이며 말을 걸었다.
“삼촌이랑 정선우 씨가 사귀었으면 좋겠어?”
백도경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은 물론 콧물과 침까지 흘려 얼굴이 엉망이었다. 문현정은 그런 손녀딸이 안쓰러워 티슈를 잔뜩 뽑아 손에 쥐여줬다.
“그렇게 정선우 씨가 마음에 들어?”
서도운의 물음에 백도경은 코를 풀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우 아저씨는… 전에 삼촌이 사귄 사람들이랑 달라.”
“어떻게 다른데?”
“엄청 잘생기고……, 빚도 없고, 술도 못 마셔. 술주정도 그냥 자는 거래. 도박 같은 것도 한 적 없다고 그랬어.”
그녀는 필사적으로 정선우의 좋은 점을 말했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가족은 엄마뿐이래. 엄마도 빚 같은 거 없다고 했어. 선우 아저씨가 연금이랑 연금 보험이랑 이런 거 막 설명해줬는데, 하여간 그렇대.”
잔뜩 부은 눈으로 콧물을 훌쩍이며 주절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서도운은 웃음을 터뜨렸다. 경계심 많은 부끄럼쟁이에게 가족 채무 관계까지 알아내온 백도경의 능력이 감탄스러웠다.
“선우 아저씨는 엄청 착해서 절대 바람 안 피울 거야.”
그는 우느라 엉망이 된 백도경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그걸 어떻게 다 아는 거야?”
“물어보면 다 말해줘.”
백도경의 말에 백경은 무언가 반박을 하려다 서도운이 노려보자 슬며시 입을 닫았다.
“따로 만나는 건 못 본 것 같은데 언제 그렇게 친해졌어?”
“……조퇴하고 매일 선우 아저씨 사무실에 갔어.”
혼날 거라고 생각했는지 백도경은 시선을 피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꼬았다.
서도운은 조카의 동그란 이마에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딱히 혼낼 생각은 없었다. 어쩐지 동물병원에도 안 나타난다 싶어서 걱정했는데 정선우의 사무실로 땡땡이치는 장소를 바꾼 것뿐이라면 문제 될 건 없었다.
“삼촌, 난 삼촌이 선우 아저씨랑 결혼했으면 좋겠어.”
그는 시작하지도 않은 연애의 엔딩을 말하는 백도경의 말에 말갛게 웃었다.
“정선우 씨는 삼촌이랑 사귈 마음이 없는 것 같은데.”
“아냐, 선우 아저씨는 삼촌 좋아해!”
“정선우 씨가 그런 것도 말해 줬어?”
답을 기다리듯 빤히 쳐다보고 있는 서도운의 얼굴에 백도경은 입술을 우물거리며 몇 번이고 말을 삼켰다.
“삼촌만 보면 선우 아저씨 얼굴이 빨갛게 변해. 삼촌이 한마디 할 때마다 울 것 같기도 하고 부끄러워하고 그래.”
“야, 백도경! 거짓말하지 마!”
서도운의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고 있던 백경은 참다못해 끼어들었다.
“정선우 씨가 미남인 건 맞는데 로봇이야, 로봇! 그거 우리 회사 사람들 다 알아. 업무 외에는 다른 말도 안 하고 수경이 말고는 정선우 씨랑 밥 먹은 사람도 없어.”
“선우 아저씨는 다른 사람한테는 안 그래. 아무한테나 막 웃고 다니는 남자가 아니거든!”
“동명이인 아냐? 내가 아는 정선우랑 완전히 다른 사람인데.”
“그래서 정선우가 누구야?”
가만히 보고만 있던 서도희가 끼어들어 묻자 백경과 백도경이 동시에 입을 열어 말을 쏟아냈다. 서도희는 아빠라는 위치를 완전히 잊고 딸에게 미움받을 짓만 골라서 하고 있는 백경을 노려봤다. 그 눈길에 백경은 완전히 쪼그라들었다.
아빠가 입을 다물자 백도경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휴대폰을 꺼내 갤러리를 열었다.
“아빠 회사에 새로 온 재무회계 담당자야. 엄청 잘생겼어.”
그녀는 언제 울었냐는 듯 할머니와 엄마에게 정선우의 사진을 보여주며 흥분해 떠들어댔다.
서도운은 정선우의 예쁜 껍데기를 떠올렸다.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잘생긴 남자였다.
그러나 그와는 상관없었다.
그는 타인의 외모에서는 아무런 매력을 못 느꼈다. 외모란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자기 자신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관심이 있는 건 껍데기 속의 영혼이었다.
씹을 필요도 없는 야들한 영혼,
썩을 정도로 익어버린 달콤한 영혼,
자신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진 인간, 너무나 연약해 스스로 망가져 버린 인간이 예뻤다.
백도경은 그런 그의 취향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나이는 아니었다. 그저 운이 없어서 그런 사람과 만났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어린 조카가 가능한 한 오래 착각해 주기를 바랐다. 좀 더 자라서, 완벽한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난 후에 알게 되기를 바랐다.
누나인 서도희는 그런 그를 이해했으며, 어머니인 문현정은 안타까워했다. 그 외의 친구들, 양원구나 문경운은 어렴풋 짐작은 했지만 사적인 부분이기에 깊이 간섭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는, 정상적인 인간과 섹스는 할 수 있어도 감정은 줄 수 없었다. 그들과는 친구는 될 수 있어도 연인은 될 수 없었다.
세상에는 감정이나 욕망을 조절하지 못하고, 그것에 휘둘려 망가진 사람이 넘쳐났다. 바닥을 구르는 쓰레기 중에 예뻐 보이는 걸 주우면 되는 거였다.
하지만 쓰레기는 쓰레기일 뿐이었다.
그들은 기본적인 인간관계를 이해하지 못했다. 연인 사이도 수많은 인간관계 중 하나이기에 서로 신뢰해야만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들은 연약해서 외로움을 견디지 못했고, 연약해서 그를 기다리지 못했고, 연약해서 다른 사람을 찾았다.
언제 배신할지 모르는 인간에게는 애정을 줄 수 없었다. 신뢰할 수 없는 인간은 곁에 둘 가치가 없었다.
그래서 주웠을 때처럼 그렇게,
쓰레기로 만들어서 버렸다.
딸의 재잘거림을 듣고 있던 서도희와 시선이 닿았다.
“도경이가 이렇게 사정하는데 어쩔래? 사귈 거야?”
서도운은 자신의 유일한 이해자를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정선우 씨는……, 예뻐.”
의외의 대답에 서도희는 놀랐는지 멈칫거리다 이내 그와 꼭 닮은 눈을 한껏 휘며 활짝 웃었다.
“그럼 기대해도 돼?”
“노력해 볼게.”
“도경아, 들었어? 삼촌이 노력해 보겠대.”
엄마의 말에 백도경은 환호성을 질러댔다.
“삼촌이 사귀자고 하면 선우 아저씨는 너무 놀라서 대답도 못 할 거야!”
사귀자고 했을 때 정선우의 반응이 생각나 그는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정선우는 열다섯 살짜리에게도 환하게 읽히는 사람이었다.
감정을 숨길 줄 모르는 이의 가면은 두려움을 감추기 위한 것이었다. 두려움을 걷어낸 상대에게는 호감을 감출 줄도 모르고, 그것이 어떻게 이용당하고 있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어리숙한 사람이었다.
정선우의 무표정은 사냥을 위한 위장색이 아니라 살기 위한 보호색이었다. 그것 외에는 자신을 지킬만한 것이라고는 없는 연약한 존재였다.
껍데기도, 그 안에 든 것도 예쁜 인간은 처음이었다.
그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정선우의 가슴 속에 넘쳐흐를 듯 쌓아 올린 상처가 보였다.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릴 만큼 가득 찬 가슴은 말 한마디, 손짓 하나에도 부서질 것 같았다.
부서진 가슴을 끌어안고 자신의 감정과 고통 속에서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리는 걸 보고 싶었다. 빠져 죽기 직전까지 내몰려도 그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 알고 싶었다.
정선우는 부서진다면, 그것 나름으로 예쁠 사람이었다.
의식이 없는 사람은 결코 배신하지 않을 테니 완전히 망가진 상태로 곁에 두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연약한지 알아야 했다.
언제쯤 무너져 내릴지, 언제쯤 그를 배신할지 알아야 했다.
스스로를 물어뜯는 것으로 자기 자신을 지켜온 남자의 이빨을 모두 뽑아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방에 가두고 싶었다. 외로움에 미쳐가면서도 그가 꺼내줄 때까지 기다려 줄 수 있는 인간이라면 얼마든지 사랑해줄 수 있었다.
정선우가 그런 인간이라면 죽더라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그건 시체라도 해도 그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