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떨어지는 달
“……서도운 씨.”
“형.”
“……저.”
“형.”
“그게…….”
그가 어물거리자 앞에 앉아 있던 남자는 보고 있던 메뉴판을 테이블에 내려놨다.
“글자 수를 따져도 ‘서도운 씨’보다 ‘형’이 간단하잖아.”
서도운의 말에 그는 아무런 대꾸를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얼마 전부터 서도운은 ‘형’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대답하지 않거나 그가 하는 말을 모두 무시했다.
어쩔 수 없이 형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외동으로 자란 데다 형이라 부를 만큼 가까운 사람이 없어 누군가를 형이라고 불러본 적이 없었다.
“형이라고 부르기 싫어?”
“그냥, 어색해서…….”
“그럼 자주 부르는 수밖에 없겠네. 집에서 연습하고 와.”
웃음이 섞인 목소리가 듣기 좋아 정선우는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닿자 서도운은 기다렸다는 듯 환하게 웃어주었다. 그 웃음을 마주하면 무슨 말이든 해도 될 것 같았다. 몇 번이나 삼킨 말을 다시 꺼내려 입술을 달싹였다.
“연습했는데……, 그게, 잘 안 돼요.”
부끄러움에 목소리가 다시 목구멍으로 기어들어 갔다. 그런 목소리라도 들렸는지 서도운은 다시 부드럽게 웃었다.
“천천히 해.”
“네.”
“말도 편하게 놔. 너랑 난 공적으로도 관계가 있잖아. 둘만 있을 때도 높임말을 쓰면 그게 계속 이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야. 날 밀어내는 것 같아서 서운해.”
아니라고 할 수가 없어 그는 다시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했다.
사귀자는 말을 한 후 64일이 지났다.
서도운은 기다려 준다는 말처럼 그에게 대답을 요구하지 않았다.
64일 동안 서도운과 18번의 점심 식사와 7번의 저녁 식사를 했다. 시간이 맞으면 일주일에 서너 번 정도 함께 점심을 먹고 때때로 근사한 곳에서 저녁을 먹은 후 산책을 하거나 차를 마셨다.
그가 사람이 많은 곳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난 다음에는 대부분 단둘만 있을 수 있는 공간이나 조용한 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서도운과 함께 있는 시간은 어색하지 않았다. 견딜 수 없는 침묵이 아니라 부드럽고 따뜻한 침묵의 시간이 이어졌다. 억지로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부담감이 사라지자 그는 둘만 있는 공간에서는 좀 더 많은 말을 할 수 있었다. 요즘은 자신도 모르게 재잘거리다 놀라 입을 다물어 버리는 일이 종종 생겼다.
함께 있는 시간은 즐거웠다. 너무 즐거워서 그 시간이 지나 홀로 있는 시간이 점점 견디기 힘들어졌다.
겨우 64일 동안 대답을 미뤘을 뿐이었다.
이대로라면 6개월도 견디지 못하고 서도운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자신의 비밀을 고할 것 같았다. 자신의 모자람을 고백하며 버리지 말아 달라고 엎드려서 빌게 될 것 같았다. 온전히 가지는 건 바라지 않을 테니 약간의 시간과 웃음을 나눠 달라고 애원할 것 같았다.
이제 겨우 64일이 지났을 뿐이었다.
“먹고 싶은 건 골랐어?”
“아뇨.”
그는 서도운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메뉴판을 보는 내내 다른 생각을 하느라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고르기 애매하면 파스타 중에서 골라. 여긴 파스타를 잘하거든.”
“……형은… 뭐, 먹을 거예요?”
그의 말에 서도운은 생긋 웃었다.
“푸타네스카.”
“……저도.”
“매워서 안 돼.”
서도운의 거절에 정선우는 시무룩한 얼굴로 들고 있던 메뉴판을 내려놨다.
요즘은 입안을 덜 물어뜯어 매운 것도 먹을 수 있었지만 매운 것, 뜨거운 것, 날것을 못 먹는다고 한 탓에 서도운은 그런 음식을 아예 먹지 못하도록 했다. 그렇다고 이제는 먹을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없어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음식은 늘 한정적이었다.
“그럼 뭐 먹어요?”
“토마토 치즈 파스타나 뇨끼.”
“파스타로…….”
“샐러드나 사이드는?”
고개도 들지 않고 꾹 하니 입을 다물고 있는 그를 보며 서도운은 웃음을 터트렸다.
“삐졌어?”
“……아니요.”
“페퍼론치노는 빼고 해달라고 할까? 그럼 안 매울 텐데.”
“그렇게 먹어도 돼요?”
“이탈리아에서는 흔한 파스타야. 토마토랑 엔초비만 들어가면 돼.”
“그럼 그거요.”
그가 살며시 고개를 들며 말하자 서도운은 커다랗게 소리 내 웃었다. 여름날에 어울리는 밝고 가벼운 웃음소리였다.
* * *
“이거 안 먹을 거지?”
문경운은 자신이 주문한 오렌지 바바로아가 올려진 접시를 끌고 가는 김세나를 보며 눈을 흘겼다.
“보면 몰라? 안 먹은 게 아니라 못 먹은 거잖아.”
“앞에 두고 왜 못 먹어?”
“저기 신경 쓰느라 그랬지.”
김세나의 포크 아래 케이크가 뭉개지는 걸 보며 문경운은 조그맣게 ‘오크 같은 년’이라며 욕을 했다. 김세나는 욕을 들어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방긋방긋 웃으며 순식간에 남은 케이크를 다 먹어치웠다.
“사이드랑 후식까지 네가 다 먹어놓고는 반반 내자고 하지 마.”
오랜 친구이자 동업자이기도 한 김세나는 불면 날아가게 생긴 것과 달리 돼지갈비 5인분 정도는 혼자서 먹어치우는 대식가였다. 십여 년 동안 음식을 빼앗긴 문경운은 이게 팔자려니 하고 포기하려 했지만, 무얼 먹든 돈은 반을 내니 음식이 아니라 돈을 뜯기는 기분이라 당할 때마다 억울했다.
“그래서?”
“뭐?”
김세나의 물음에 그는 불퉁한 얼굴로 되물으며 아이스티 잔을 들었다.
“뭐가 신경 쓰이는데 그렇게 훔쳐봐?”
그녀의 말에 문경운은 다시 테이블 두 개 너머에 있는 남자들을 쳐다봤다.
이 이탈리안 레스토랑은 파스타 맛집으로 손꼽히기도 했지만, 건물 중앙의 계단을 따라 거대한 아이비 덩굴이 늘어져 있는 인테리어로 더 유명했다. 울창한 나무들 사이에 드문드문 테이블이 놓여있는 옥상 테라스 석은 프로포즈 명소로 유명해 1년 내내 예약이 필수였다.
데이트가 취소된 친구가 예약해둔 것이 아깝다며 둘이서 구경이나 가라고 권하지 않았다면 김세나와 이런 곳에 올 이유가 없었다.
“오늘 눈도 호강하고 입도 호강하네. 저렇게 있으니까 꼭 화보 같네.”
김세나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숨만 쉬어도 화보처럼 보이는 두 남자였지만, 두 사람이 ‘폐기물 처리반’과 ‘씹선비’라고 불리는 걸 떠올리자 더없이 괴악한 조합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뭐야, 빨리 말해봐. 사귀는 거야, 아니야?”
문경운은 게이인 두 남자가 유명 데이트 장소에서 다정하게 식사를 한다고 해도 경솔하게 ‘사귀는 사이’라고 단정할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두 사람이 ‘고용자’와 피고용자’의 관계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저거 봐, 네 브로가 맘이 있나 봐.”
그녀의 말에 문경운은 다시 고개를 슬쩍 돌려 두 남자를 쳐다봤다. 늘어진 가지 사이로 음식들을 덜어주거나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건네는 서도운의 모습이 보였다.
“저 형은 아무한테나 다 저래.”
서도운은 모두에게 다정한 남자였다.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면 성별을 가리지 않고 흐물흐물하게 녹을 정도로 잘해줬다.
“아무한테나 다 그러면 바람둥이잖아.”
“바람둥이는 절대 아냐, 그래서 더 문제지…….”
서도운은 제 것이 아니면 눈앞에서 벗고 덤벼도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부드럽게 웃으며 벗어 던진 옷을 주워 입혀주는 ‘위인’이었다.
그 신사적인 태도에 홀딱 반한 게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연애운이 나쁜 서도운을 구할 사람이 자신이라며 쫓아다닌 사람도 여럿이었고, 인품만큼이나 섹스도 훌륭하다는 소문에 원나잇이라도 해보려는 남자가 널려있었다.
서도운은 자신의 주위에 몰려든 남자 중 원하는 남자를 골라 연애를 했고, 다들 서도운의 선택을 받은 남자를 부러워했다. 그러나 그 끝은 아주 끔찍했다.
그는 서도운을 좋아하지만 가끔 무섭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서도운은 어딘가 비틀린 인간이었다.
서도운의 선택을 받은 남자는 서도운과 사귀는 내내 마약에 취한 것 같았다. 서도운에게 취하는 건 실제 마약과 다름없는 듯 삶이 완전히 망가졌다.
술을 절제하지 못하고, 종종 포커를 치러 다니고, 섹스를 좋아하고, 명품에 미쳐있고……, 모두 문제가 있긴 했지만, 일상생활은 가능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서도운과 만난 후 그들은 ‘갱생’이라고 할 정도로 말끔해졌다가 어느 순간 알코올 의존증, 도박중독, 섹스중독……, 일상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누군가는 정신병원에 입원 중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감옥에 들어갔다고 했다.
서도운은 선량하고 좋은 사람이었다. 그의 ‘비틀림’은 오로지 연애 관계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는 서도운이 파괴적인 연애를 그만두고 정착하기를 간절하게 바랐다.
“다 먹었어, 가자.”
김세나는 레몬 타르트까지 삭삭 긁어먹고 포크를 내려놨다.
“……넌 이런 데 밥만 먹으러 오니?”
“그럼 밥 먹으러 와서 밥만 먹으면 되는 거지 뭘 더 해?”
“조 실장 덕분에 좋은 데 왔는데 좀 노닥거리다 가자.”
“내 가게 두고 왜 남의 가게에서 죽쳐?”
“거기랑 여기랑 같아?”
그는 로맨틱함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십년지기 28세의 여자 사람 친구를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문경운, 지금 네가 죽어간다면 여기야? 아님 우리 작업실 레이스 더미야?
“그야 당연히 레이스지. 근데 지금 죽는 거 아니잖아.”
“언제 죽을지 어떻게 알아.”
그의 말을 귓구멍에서 튕겨내는 김세나를 보며 문경운은 다 포기하고 일어났다.
“이렇게 된 거 저기 인사나 하고 가자.”
문경운이 두 남자가 있는 테이블을 가리키자 그녀는 떫은 얼굴로 되물었다.
“내가 왜? 너나 가.”
“말이 꼬여서 오해받으면 나만 이상한 놈 된단 말이야. 그냥 얼굴 구경 간다고 생각하고 따라와.”
그의 말에 김세나는 입술을 삐죽이다 두 남자를 힐긋 보고는 눈을 반짝였다. 그녀도 친구인 문경운 못지않게 중증의 얼굴 밝힘증을 가지고 있었다.
“오, 도운이 형도 여기 밥 먹으러 왔어?”
들어왔을 때부터 보고 있으면서 이제야 알아차린 듯 말하는 문경운의 뻔뻔함에 김세나는 새삼 감동했다.
“여긴 늘 말하던 그 친구.”
“안녕하세요, 김세나입니다.”
그녀는 문경운만큼 말재간이 없었다. 대화가 길어지면 “당신들을 쭉 관찰하고 밥 먹는 내내 당신들 이야기를 했어요”라고 입을 놀릴까 불안했다. 미남 구경도 좋지만 얼른 인사를 마치고 이곳을 나가고 싶었다.
“김세나 씨면, 경운이랑 같이 일한다는 친구분이시군요. 이야기는 종종 들었습니다.”
머리 좋은 남자는 금세 이름을 기억해 내고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서도운이 내민 손을 잡으려 시선을 내리다 셔츠 소매에 있는 자수를 봤다. 악수를 해야 한다는 사실도 잊고 서도운의 팔목을 움켜쥐었다.
“이거, 심학철 선생님 시그니쳐 아닌가요?”
“심학철 테일러를 아세요?”
“네, 알죠! 당연히 알죠!”
문경운은 십년지기 친구의 목소리가 3단 발성을 하는 것을 들으며 불안해졌다.
“야, 김세나, 손 놔.”
옆구리를 찌르며 주의를 줬지만 김세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셔츠, 심 선생님이 제작하신 건가요? 만져 봐도 되나요?”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그녀의 손은 서도운의 어깨를 쓰다듬고 가슴을 매만졌다.
“김세나! 야, 야!”
그는 서도운의 손을 구명줄처럼 움켜쥐고 있는 김세나의 손을 떼어내려 했지만 작은 손에서 나오는 악력이 얼마나 센지 도무지 떨어지지 않았다.
“하아, 실크 린넨이네요.”
문경운은 김세나가 정신줄을 놨다는 걸 깨달았다.
김세나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테일러’라는 직업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문제는 슈트를 너무나 사랑해 사람을 슈트 옷걸이로 여겼다. 멋지게 슈트를 입고 다니는 남자는 세상에서 둘도 없는 아름다운 존재고,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아무렇게나 걸치고 다니는 남자는 장작으로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린 톤이 피부색이랑 잘 어울리세요. 하악하악, 이 자수하며……. 심 선생님은 여전하시네요!”
김세나에게는 셔츠 깃과 솔기 부분을 만져서 확인하고 있는 것뿐이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웬 여자가 처음 만나는 남자의 온몸을, 대낮에 레스토랑 한가운데서 더듬어대고 있는 것뿐이었다.
문경운은 이대로 김세나를 버리고 도망가고 싶었다. 십년지기 친구가 자기 못지않은 변태인 건 알지만 이렇게까지 정신을 놓을 줄은 몰랐다.
그는 서도운을 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형, 미안해. 얘도 좀 그래.”
* * *
처음 보는 여자가 몸을 더듬어대자 당황했던 서도운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불쾌함 따위는 담겨있지 않은 쾌활한 웃음이었다.
“김세나 씨, 일단 앉아서 이야기해요.”
서도운은 여전히 자신의 팔을 꼭 잡고 있는 여자에게 자리를 권했다.
“셔츠든 바지든 원하면 벗어 줄 테니까 일단 앉으세요.”
“바지도 심 선생님이 제작하신 건가요?”
“만지면 안 줄 거예요.”
김세나는 얼른 손을 놓고 의자에 앉았다. 마치 간식을 준다는 말에 얌전히 앉아서 기다리는 개 같았다.
“경운아, 난 괜찮으니까 너도 앉아.”
그제야 정선우가 눈에 들어왔는지 문경운은 그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작은 목소리로 사과하고 빈 의자에 주저앉았다.
“정선우 씨, 오랜만인데 이상한 꼴을 보이네요. 죄송합니다. 제 친구가 좀 변태라서 그렇지 나쁜 애는 아니에요. 오해는 하지 말아주세요.”
문경운은 당혹함이 가득한 얼굴로 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다. 그는 문경운의 사과에 답하지 않았다. 울렁거리는 가슴 속을 생각하면 죄송해야 하는 게 당연했고 더 죄송해지기 전에 떠나줬으면 했다.
그러나 그런 그의 마음을 서도운은 모르는 듯했다. 알아차려 주기를 바라며 바라봤지만 내내 그를 향하던 시선은 이제 다른 사람을 보고 있었다.
“김세나 씨가 경운이랑 같이 드레스를 만드는 줄 알고 있는데, 드레스 쪽이 아닌가 봐요.”
“전 테일러예요.”
서도운의 물음에 답하는 김세나의 목소리에는 자부심이 가득 담겨있었다.
“심학철 테일러랑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인가요?”
서도운의 물음에 김세나는 조금 머뭇거리다 말을 꺼냈다.
“심 선생님은 절 기억 못 하실 거예요. 굉장히 어렸을 때 뵀거든요.”
부드러운 미소를 띤 서도운의 얼굴에 김세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랑 어머니가 심 선생님이랑 같이 일하셨는데, 아버지가 독립하실 때 심 선생님이 많이 도와주셨어요.”
“부모님도 슈트를 만드셨군요.”
“네, 아버지가 심 선생님을 굉장히 존경하셨어요. 저도 그렇고요. 근데 심 선생님이 은퇴하시고 연락이 끊어져서…….”
“이탈리아로 가셔서 그럴 거예요.”
“이탈리아요?”
정선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도운을 바라보는 김세나를 보며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김세나는 백도경과 체격이 비슷했다. 그러나 김세나는 백도경이 아니었다.
백도경은 아버지인 백경과 닮았지만 외삼촌인 서도운과 닮은 구석도 있었다. 함께 있으면 누가 봐도 가족으로 보였다.
서도운의 곁에 남자가 있는 것도 싫었지만 여자가 있는 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함께 있을 때는 자신만을 봐줬으면 했다. 서도운의 곁에는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었으면 했다.
“심학철 테일러가 은퇴하신 이유를 아세요?”
“사모님이 암으로 돌아가시고 가게를 정리했다고 들었어요.”
“부인이 세상을 떠나고 많이 힘들어하셨어요. 그래서 아드님이 이탈리아로 모시고 가신 거예요. 한국에 돌아오신 지 3년쯤 되셨어요.”
서도운의 말에 김세나의 목소리가 기쁨으로 달아올랐다.
“혹시 심 선생님 연락처가 있으시면…….”
“지금 병원에 계세요.”
“네?”
“말기 암이세요.”
기뻐하던 표정이 일순간 망연자실하게 변했다.
“아버지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심 선생님을… 어흐으윽…….”
서도운은 재빨리 김세나에게 냅킨을 내밀었다. 울음소리에 놀란 직원이 다가오려 하자 서도운이 멈추라는 손짓과 함께 문경운에게 눈짓했다. 황당한 얼굴을 하고 있던 문경운은 서도운의 신호에 어쩔 줄 모르고 선 직원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사과를 했다.
김세나는 서도운의 품에 안겨서 어린애처럼 펑펑 울어댔다. 울음 사이사이 간신히 알아들은 말은 아버지가 은인인 심학철을 무척이나 만나고 싶어 했는데 뵙지 못하고 돌아가셨다고 했다.
“어흑흑… 엄마도, 심 선생님을… 만나려고…, 물어봐도… 아는 사람이, 어흐으, 없었어서… 내가, 미, 안해서…….”
“경운이한테 심학철 테일러가 입원한 병원이랑 아드님 연락처를 보내 놓을 테니까 어머니랑 뵈러 가세요.”
“정말, 흡, 정말…, 감사, 합니, 다아…….”
서도운은 몸을 둥글게 말고 울음을 삼키는 김세나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울지 말라거나 따뜻한 위로는 없었지만 다정한 손길이 모든 말을 대신했다.
정선우는 체한 것처럼 속이 뒤틀려 입가를 눌렀다.
갑자기 누군가가 몸을 더듬고 흥분해서 날뛰고 갑자기 울어댄다면 자신은 놀라 어쩔 줄 몰랐을 테지만, 서도운은 내내 온화하게 웃으며 김세나를 대했다. 한 번도 얼굴을 찌푸리거나 미소를 잃은 적이 없었다.
그에게 그랬던 것처럼.
정선우를 황홀하게 했던 그 부드러운 미소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김세나가 있는 서도운의 품도 그의 것이 아니었다. 누구든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서도운은 그에게만 다정한 남자가 아니었다.
모두에게 다정한 남자였다.
서도운이 그에게 베푼 부드러운 미소와 따뜻함은 그가 특별하기에 베푼 것이 아니었다.
이유 모를 서러움에 코끝이 시큰거렸다.
서도운을 만나는 순간 그의 감정이, 그의 세계가 움직였다.
자신의 감정을 깨닫는 순간 이미 서도운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었다.
달이 되고 싶었다. 지구를 맴도는 달처럼 서도운의 주위를 맴돌고 싶었다.
가능한 한 오래, 할 수만 있다면 평생을 그렇게 맴돌았으면 했다. 영원히 자신의 어두운 그림자를 보여주지 않고, 그렇게 맴돌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달이 될 수 없듯 서도운도 지구가 아니었다.
모두에게 빛과 온기를 나눠주는 남자는 태양이었다. 서도운의 주위에 수십 개의 행성이 늘어서서 맴돌고 있었다. 그는 서도운의 주위를 맴도는 수많은 행성 중 하나에 불과했다.
서도운은 그가 아무리 욕심내도 가질 수 없는 남자였다.
서럽게 울어대던 김세나는 겨우 진정된 듯 몸을 일으켰다.
“……죄송합니다.”
김세나는 서도운이 쥐여주었던 냅킨으로 얼굴을 닦아내며 고개를 숙였다. 하얗던 냅킨은 눈물과 함께 닦아낸 화장으로 얼룩져있었다.
“속이 거북하거나 어지럽지는 않아요?”
“아뇨, 괜찮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나도 괜찮아요.”
거듭 사과하는 김세나를 향해 서도운은 온화하게 웃었다.
정선우는 떨리는 손을 감추려 냅킨을 움켜쥐었다. 눈앞이 흐려지며 입안에 익숙한 피 맛이 퍼졌다.
그렇게 웃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그렇게 다정하게 말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그가 소중히 여긴 그 다정함을 아무에게나 주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서도운이 문경운을 향해 손짓했다. 곁에 선 문경운이 얼른 서도운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돌아가서 음료수 종류로 충분히 마시게 하고, 안정되면 연락해.”
“알았어.”
문경운은 친구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김세나는 퉁퉁 부은 얼굴로 서도운을 향해 다시 고개를 숙이고 문경운의 뒤를 따라 나갔다.
문경운과 김세나가 완전히 사라지자 정선우는 가만히 서도운을 바라봤다. 서도운은 이런 일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흐트러진 셔츠를 가벼운 손길로 정리하는 것으로 모든 소란을 끝냈다.
그가 매혹된 남자는 태양이었다.
태양을 향해 날아오르는 이카로스가 떠올랐다. 그 열기에 날개가 녹을 것을 알고 있음에도 태양을 향해 날아간 어리석은 존재가 자신인 듯했다.
서도운은 그를 향해 언제나처럼 부드럽게 웃었다.
“괜찮아?”
괜찮다고, 아무렇지도 않다고 대답하고 싶었다.
괜찮지 않다고, 화나고, 슬프고, 답답해서 미칠 것 같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고 싶은 말들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모두 삼켜야 했다. 그래야만 곁에 있을 수 있었다.
정선우는 입안을 가득 채운 피를 삼켰다. 눈가가 뜨거웠다.
“놀랐어? 녹차 마실래?”
서도운의 물음에 그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입을 여는 순간 피와 함께 입안을 채운 말이 흘러넘칠 것 같았다.
‘네, 사귀고 싶어요.’
‘네, 곁에 있고 싶어요.’
‘네, 당신을 좋아해요.’
‘네, 당신을 가지고 싶어요.’
가슴에서 게워진 말이 목구멍을 타고 입안에 가득 찼다. 입을 열지 않기 위해, 말하지 않기 위해, 다시 입안을 물어뜯었다.
아픔과 함께 입안 가득 피가 고이자 그 속에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말이 녹았다. 피와 함께 천천히 그 말들을 삼켰다.
“선우야.”
서도운이 옆으로 자리를 옮겨와 앉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불렀다. 귓가에 꽃잎이 살랑거리는 것 같아 간지러움에 귓가를 쓸어내렸다.
“선우야.”
술렁이는 가슴에 겨우 삼킨 말들이 다시 목구멍으로 넘어올 것 같았다.
고개를 들자 온화하게 웃고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시선을 마주한 이 순간만은 서도운은 자신의 것이었다. 피하지 않고 바라보자 서도운의 웃음이 점점 짙어졌다. 눈가에서 달콤함이 흘러내려 입술에 고였다. 붉은 입술이 자신의 이름을 속삭였다.
“선우야…….”
서도운이 테이블 위에 냅킨을 들어 그의 입가를 눌렀다.
“왜 또 물어뜯었어?”
숨을 쉴 수 없었다.
“이러면 아프잖아.”
지그시 입가를 누르는 서도운의 손이 목을 움켜쥐고 조이는 것 같았다.
“겨우 나아서 매운 것도 좀 먹을 수 있었는데, 한동안 부드러운 것밖에 못 먹겠네…….”
서도운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발밑이 먼지처럼 무너져 내렸다. 그는 날개도 없이 추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