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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죽은 개 (15/35)

15. 죽은 개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남은 거라고는 빚으로 남은 병원비와 작은 아파트 한 채뿐이었다.

빚을 갚기 위해 아파트를 팔았다. 방 한 칸짜리 전셋집으로 찾아온 외가 사람들은 어머니의 젊음과 미모가 아깝다며 울었다. 몇 번이고 찾아와 그를 친가로 보내고 재혼하라고 사정했지만, 어머니는 그때마다 “죽어서 그 사람 다시 만날 거예요”라며 거절했다. 외가 사람들은 어머니가 미친 게 틀림없다며 욕을 했다.

살기 위해 어머니는 무슨 일이든 해야 했다. 입학식에 왔던 학부모 중 가장 젊고 아름다웠던 여자는 단번에 시들었다.

학부모 면담 중 담임 선생님은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을 위로하며 아들을 보며 힘을 내라고 위로했다. 어머니는 담임 선생님의 말에 “남편을 따라 죽으려고 했는데 애가 있어서 못 했어요”라고 말했다. 담임 선생님은 그가 착하고 영리한 아이라고 몇 번이고 칭찬했지만, 어머니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한 건 그즈음이었다.

염증으로 손가락이 부어올라 병원을 다녀온 날부터 어머니는 매일 저녁 퇴근 후 그의 손을 검사했다. 매일 저녁 혼나도 좀처럼 고쳐지지 않았다. 다시 병원에 다녀온 날 어머니는 그의 손톱을 짧게 잘라주며 말했다.

“엄마 죽는 꼴 볼래?”

손톱을 물어뜯으면 정말로 어머니가 죽어버릴 것 같아 무서웠다. 그러나 무언가 물어뜯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눈에 띄지 않는 곳을 물어뜯기 시작하자 어머니는 나쁜 버릇을 고쳤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 혼내지 않았다.

그가 지금도 여전히 어딘가를 물어뜯고 있다는 건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었다.

그걸 서도운은 알고 있었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꿈같은 64일이었다.

출근하자마자 세무 스케줄부터 확인했다.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도록 모든 걸 정리해두고 싶었다.

오전 내내 늘어놓은 서류를 확인하고 분류하는 일만 했다. 오동석과 김현승에게서 받은 회계서류 중에 아직 살펴보지 않은 것도 있었고, 라이센스와 관련된 건 워낙 다양해 대충 훑어봤을 뿐이었다.

서류를 정리하며 자신이 얼마나 느긋하게 지냈는지 깨달았다. 예전이라면 상사의 재촉에 벌써 끝냈을 일들이었다. 늘 다급하게 시간에 쫓길 때는 이런 여유를 간절하게 바랐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바라던 여유가 그를 힘들게 했다.

여유는 틈을 만들었고 틈 사이를 서도운이 파고들었다. 그의 머릿속에 서도운이란 존재가 뿌리를 내리고 거대한 덩굴을 이뤘다. 무얼 떠올리든 모든 것이 서도운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서류를 보면서도 곁눈질로 휴대폰을 쳐다봤다.

그가 숨겨왔던 것을 들킨 다음 날부터 서도운에게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서도운은 사귀자고 말한 후 매일 아침 [잘 잤어?]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뭐라고 답할까 고민하다 결국 보내는 건 [네]라는 한마디뿐이었다. 이렇게 61번의 물음으로 끝날 줄 알았으면 하고 싶은 말을 다 보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잘 잤어요?], [전 잘 못 잤어요.], [꿈에 서도운 씨가 나왔어요.], [전 오늘 늦잠을 잤어요.], [지각할 것 같아요.]……[어제는 왜 잘 잤냐고 안 물어봤어요?], [오늘도 잘 잤는지 안 물어보나요?], [내일은 잘 잤는지 꼭 물어봐 주세요.], [기다릴게요.]…….

노크 소리에 새카만 폰 화면에서 시선을 거뒀다.

문을 열기 위해 의자에서 일어나다 정선우는 현기증을 느끼며 다시 주저앉았다. 이틀 동안 거의 잠을 자지 못한 탓이었다.

다시 들리는 노크 소리에 그는 답답한 한숨을 내쉬며 일어났다. 노크를 한 사람이 누구든 용건만 마치고 빨리 가주길 바라며 문을 열었다.

“일하고 있었어?”

그는 문 앞에 선 서도운을 멍하니 쳐다봤다.

“안색이 나쁘네, 괜찮아?”

서도운이 그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렇게 서 있어?”

답하지 않는 그를 향해 서도운이 한 걸음 다가왔다.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물러서는 그를 보며 서도운은 생긋 웃었다. 서도운이 다시 한 걸음 다가오자 그도 다시 한 걸음 물러섰다.

서도운은 비켜선 그를 지나 창가에 있는 테이블 앞에 섰다.

그리고는 언제나처럼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이리 와.”

가고 싶지 않았다.

고개를 저으며 뒤로 물러났다.

문은 여전히 열려있었다. 이대로 문밖으로 나가 서도운의 앞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싶었다.

“선우야, 도망치지 마.”

그에게는 육체에 매어진 커다란 족쇄를 끌고 서도운의 곁으로 갈 용기도, 서도운의 말을 거부할 용기도 없었다.

“이리 와.”

64일 동안 들었던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그의 마음은 이미 서도운을 향해 비틀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내딛는 걸음마다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서도운의 귀에도 그 소리가 들렸는지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정선우는 자신에게 내밀어진 손을 거부할 수 없었다. 서도운의 손을 향해 걸어갔다.

“잘했어.”

그의 손을 잡은 서도운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서도운은 그를 소파에 앉히고 가져온 종이 백에서 죽과 밑반찬을 꺼내 테이블 위에 늘어놓았다.

“식기 전에 먹어.”

시키는 대로 숟가락을 들어 아직도 따뜻한 죽을 입에 넣었다. 먹으면 먹을수록 허기져서 숟가락질이 점점 빨라졌다. 깨끗하게 빈 그릇을 보고 서도운은 평소처럼 다정하게 웃으며 배가 많이 고팠냐고 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도운이 내민 종이컵을 받았다. 따뜻한 녹차를 마시며 꿈이 아닐까 생각했다.

아직 그에게 기회가 있을지도 몰랐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나쁜 버릇을 고치겠다고, 한 번 만 더 기회를 달라고 하면 서도운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줄 것 같았다.

화를 내고 실망했다고 질책한다고 해도 괜찮았다. 너무나 아프고 죽을 정도로 고통스러울 것 같았지만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서도운은 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아무 일 없이 65일이 지나갔다.

함께하는 날들이 흘러가며 정선우를 붙잡던 족쇄들이 하나씩 뜯겨나갔다. 욕심내서는 안 된다며 삼켰던 말들이 하나씩 흘러나왔다.

어색하게 입안에서 맴돌던 ‘형’이라는 말은 자연스럽게 나왔다. 당연한 것처럼 말을 놓았다.

가끔 식사에 백도경이 함께 하는 일은 있었지만, 우연히 누군가를 만나는 일은 없었다.

서도운와 함께하는 시간은 온전히 그의 것이었다.

서도운은 그에게만 시선을 주고, 그에게만 웃어주고, 그에게만 다정했다.

마음 한구석에서 어쩌면 괜찮을지 모른다고, 서도운이라면 괜찮을지 모른다고 속삭였다. 착각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계속 말했지만, 어느새 그의 어깨에는 서도운을 향한 날개가 돋아나 있었다.

* * *

그가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자 곁에 앉은 서도운이 깨끗하게 비운 접시를 보며 물었다.

“더 먹을래?”

“아니, 배불러.”

그의 대답에 서도운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더워서 그런지 한동안 먹는 양이 줄어서 걱정했어. 입맛이 돌아와서 다행이야.”

“이젠 괜찮아.”

“삼촌, 내가 영양제랑 비타민도 챙겨 먹이고 있어.”

“고마워, 삼촌은 도경이만 믿을게.”

“응, 걱정 마.”

이어지는 삼촌과 조카의 대화에 정선우는 부끄러워졌다.

열다섯 살 소녀가 스물아홉의 성인 남자에게 허약해 보인다며 보약을 먹어보겠냐고 권유한 건 충격적이었다. 그가 고개를 내젓자 백도경은 가방 가득 영양제와 비타민을 챙겨와 책상 위에 늘어놓고 뭐가 어디에 좋은지, 언제 먹어야 하는지 설명해주며 꼭 먹으라고 당부했다.

수면제를 먹지 않고 정상적으로 잠을 자면서 안색이나 체력이 좋아졌다고 생각했지만, 남들이 보기엔 그게 아닌 듯했다.

그는 곁에 앉은 서도운을 쳐다봤다. 서도운은 언제나처럼 빠르고 깔끔하게 자신의 몫으로 나온 식사를 마치고 정선우와 백도경이 식사를 하는 것을 살피고 있었다.

정선우는 오동석, 김현승과 함께 때때로 처음 만났던 일식집에서 식사를 했다. 식사를 하며 나누는 이야기는 대부분 백경이 저지른 미친 짓들에 대해서였다.

백경의 미친 짓을 이해하려면 부인인 서도희가 가진 재산에 대해 알아야 했다. 두 사람은 서도희와 서도운 남매가 현재 소유하고 있는 재산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해줬다.

남매는 동물병원부터 애견용품 수입과 판매, 목장과 승마장, 경기도 일대의 부동산 임대까지 놀랄 정도로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었다. 더 놀란 건 모든 부분에서 엄청난 수익을 거두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수익이 나오지 않는 곳은 ‘백경 프로덕션’ 뿐이었다.

오동석과 김현승은 남매가 본업인 수의사로서도 뛰어나지만 사업가로서의 능력도 못지않게 뛰어나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누나인 서도희가 뛰어난 사업 감각으로 돈이 되는 것을 알아내면 서도운이 그것을 운영하고 관리했다. 각 사업체별로 전문 경영인을 두고 있지만, 결정권자는 남매였다. 두 가지 일을 모두 처리하기 위해서 남매는 늘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서도운이 병원 진료를 시작하자 느긋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할 수 있는 건 저녁이나 쉬는 날에만 가능했다.

동물병원에서 일하는 수의사들의 근무 일정을 환하게 알고 있는 백도경은 서도운의 진료시간과 스케줄 확인해 매주 알려줬다.

서도운은 정선우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진료시간을 조정할 수 있는 예약 진료만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도 되냐는 물음에 백도경은 무척 자랑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삼촌은 내분비학에서 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전문가예요. 예약 진료만 해도 엄청나게 바빠요.”

주말에 진료를 하는 날도 있었고, 밤에는 당직근무까지 했다. 쉬는 날에는 주로 사업적인 업무와 미팅을 처리했다. 백도경이 전하는 서도운의 일주일 스케줄은 지독한 일 중독자였다. 

서도운은 일하는 사이사이 어떻게든 시간을 만들어 그를 만나고 있었다. 정선우도 죽을 만큼 일에 치여 살아봤기에 서도운이 자신을 위해 무리를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게 미안했지만 죄책감은 한순간이었다.

서도운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저 행복했다.

서도운이라면 괜찮을 거라고, 서도운이라면 그를 받아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계속해서 자라났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서도운의 물음에 ‘네’라고 말하고 싶었다. 답하기만 하면 지금까지 누려온 모든 행복이 영원히 자신의 것이 될 것 같았다.

서도운 곁에서 느꼈던 행복은 홀로 집에 있을 때면 두려움과 공포로 변했다.

그가 어떤 인간인지 알게 된 서도운이 떠난다고 생각하자 무서워서 숨도 쉴 수 없었다. 자신이 얼마나 하찮은 인간인지 알기에 이불 속에서 숨죽여 울며 서도운의 옆자리가 자신의 것이 되기를 빌었다.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것으로 가질 수 있다면 온몸이 찢어지도록 기어가서라도 서도운의 발에 매달릴 수 있었다.

머리를 조아리고 빌어서라도 서도운이란 남자를 가지고 싶었다.

서도운은 몇 번의 포크질로 디저트로 나온 케이크를 다 먹고 그가 먹는 것을 지켜봤다. 그가 먹어야 할 몫을 다 먹으면 서도운은 늘 ‘잘했어’라고 칭찬했다.

겨우 밥을 먹는 것으로 칭찬받을 줄은 몰라서 놀리는 게 아닐까 했지만 흐뭇해하는 서도운을 보면 어쩐지 기뻐서 열심히 먹었다.

그가 남은 케이크 조각을 입에 넣자 서도운이 생긋 웃으며 물었다.

“더 먹을래?”

“아니.”

연하게 우려낸 녹차를 마시며 고개를 젓자 백도경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선우 삼촌은 먹는 것도 예뻐. 삼촌도 그렇게 생각하지?”

“응, 예뻐.”

열다섯 살 소녀의 칭찬과 그에 동의하는 서도운의 말에 정선우는 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무어라 대꾸할 말이 없어 고개를 숙인 채 다리 위에 펼쳐 둔 냅킨을 만지작거렸다.

서도운의 휴대폰이 진동하며 테이블 전체를 울렸다. 전화한 이를 확인한 서도운이 바로 휴대폰을 들었다.

“네, 박 실장님.”

휴대폰 너머 다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응급팀 대기 시켜주시고, 이 실장님한테 무조건 심장만……. 그건 이 실장님 저보다 더 잘 알겠네요. 부원장님도 연락해서 병원으로 돌아오라고 해주세요.”

통화 내용과 서도운의 심각한 표정에 백도경의 얼굴도 굳었다.

“삼촌, 누구야? 연이? 베리?”

“크림이. 이걸로 계산해, 차 가지고 나올 테니까 앞에서 보자.”

서도운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두고 다급하게 룸을 빠져나갔다. 백도경은 서도운이 꺼낸 카드를 꼭 쥐고 일어났다.

“선우 삼촌, 빨리 가야 해요.”

그는 가방을 들고 바로 백도경의 뒤를 따라 룸을 나섰다. 그녀는 프런트로 걸어가는 동안 훌쩍거리며 울기 시작해 동물병원으로 가는 내내 울었다.

동물병원에 도착한 서도운은 여전히 훌쩍거리는 백도경을 향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계속 울 거면 진료실에 가 있어.”

가슴이 섬뜩해졌다.

부녀나 남매라고 해도 될 만큼 사이가 좋은 삼촌과 조카였다. 울고 있는 조카에게 서도운이 그렇게 냉정하게 말할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선우야, 형이 사무실에 못 데려다줄 것 같아, 미안해.”

평소와 달리 표정이 지워진 서도운의 얼굴을 보며 그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혼자 갈 수 있어.”

서도운은 잘 가란 말 한마디 없이 병원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잔뜩 움츠러든 마음 옆에 섭섭함이 자리 잡았다. 애써 표정을 지우고 여전히 울고 있는 백도경을 봤다. 먼저 가보겠다든지, 잘 있으라든지, 또 보자는 말을 하려 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열다섯 살짜리 여자아이를 달래는 법을 몰랐다. 다만 저렇게 우는 아이를 혼자 둬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집에 바래다줄까?”

백도경은 그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진료실에 있을 거예요…….”

여전히 훌쩍이는 백도경의 뒤를 따라 병원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진료실 6’이라는 명찰이 달린 문을 열고 들어가 의자에 앉았다. 그도 옆에 있는 의자에 앉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희미하게 서도운의 체취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도경아……, 조금 전에 형이 화낸 거 맞아?”

“네, 지금 삼촌은 엄청 화나 있을걸요.”

“형이…… 너한테 자주 화내?”

그녀는 책상 위에 있는 티슈를 가득 뽑아 코를 풀며 그를 빤히 봤다. 그 눈길은 서도운이 ‘계속 말해봐’라고 할 때와 비슷해 무언가 더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너한테 울지 말라고 화냈잖아.”

“우리 삼촌은 저한테 절대 화 안내요.”

정선우의 말에 그녀는 빨갛게 변한 코를 훌쩍이며 배시시 웃었다.

“삼촌은 선우 삼촌한테도 절대 화 안낼 거예요. …근데 그 사람들은 아니에요. 삼촌이 가만 안 둘걸요.”

“누굴 말하는 거야?”

그의 물음에 백도경의 입술 가에 작은 보조개가 피어났다.

“세상에서 제일 나쁜 사람이랑 그 사람보다 더 나쁜 사람들이요. ……크림이를 그렇게 만든 사람들이요.”

그녀는 불쌍한 개와 나쁜 사람과 더 나쁜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시각장애인을 위한 안내견’ 사업은 A그룹의 사회공헌사업 중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사업이었다.

이 사업은 A그룹이 좋은 일을 한다는 이미지를 심어주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안내견들은 훈련을 받는 과정에서 A그룹 로고가 박힌 조끼를 입고 대학로나 번화가를 걸어 다니고 지하철 유명 노선을 이용했다. 안내견에 대해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때라 사람들은 착하고 순한 얼굴을 가진 커다란 개를 신기한 눈으로 보며 너나 할 것 없이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사업을 실행한 지 20여 년이 넘어가자 캠페인 효과는 떨어지고 사회공헌의 기능만 남았다. A그룹의 홍보실은 이 사업을 대대적으로 다시 광고하기로 했다. 그룹에 불이익이 되는 일은 아무도 모르게, 이익이 되는 일은 널리 알리는 게 그들이 존재하는 이유였다.

그들은 시각장애를 가진 젊은 성악가를 발굴해 ‘먹힐 만한’ 스토리를 만들고 한국의 ‘안드레아 보첼리’라고 부르며 방송에 내보냈다. 그 남자의 곁에는 당연히 A그룹에서 지원한 안내견이 함께했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목소리와 비극적인 스토리를 가진 남자에게 호의적인 시선을 보냈다. 장애를 극복한 용기 있고 선량한 남자는 곧 스타가 되었고, A그룹 홍보실은 안내견과 함께 있는 선한 얼굴의 남자를 모델로 내세워 대대적으로 그룹 광고를 했다. 광고는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장애를 극복한 용기 있고 선량한 남자는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일 뿐이었다.

남자는 자신의 안내견을 학대했다.

A그룹 홍보실은 난감했다. 이 사실을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들인 돈과 시간도 아깝지만 엄청난 망신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존재 이유를 따르기로 했다.

덮었다.

첫 번째 안내견이 죽자 그들은 모색이 같은 안내견을 구했다.

크림이는 그 남자의 두 번째 안내견이었다.

크림이는 매우 훌륭한 성적으로 안내견 교육을 마친 개였다. 그러나 크림이가 받은 교육에는 학대에 대한 것이 없었다. 크림이가 배운 건 헌신과 복종이었다. 크림이는 배운 대로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

크림이는 1년 만에 일어나지도 못하는 상태로 안내견 훈련학교로 돌아왔다.

크림이를 훈련시킨 훈련사는 기가 막혔다.

안내견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우수해야 했고, 지속적으로 관리를 받았다. 본능을 참느라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고 해도 세 살도 채 되지 않은 안내견이 이렇게 만신창이가 될 수는 없었다.

데려갔던 홍보실 직원은 혈통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둘러댔지만, 유전적인 결함이 있었다면 안내견 선발 과정에서 당연히 배제되었을 터였다. 크림이는 그가 훈련한 개들 중에서도 아주 우수한 안내견이었다.

죽어가고 있는 크림이를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었다.

체육과 교수인 최일영은 은퇴하며 그렇게 바라던 큰 개를 기르기로 했다. 우연한 기회에 A그룹의 안내견이 될 강아지를 기르는 사회화 과정 자원봉사에 대해 알게 되었고 처음으로 그의 집에 온 강아지가 크림이었다. 가족 모두 크림이가 예뻐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렇게 애지중지 기른 강아지가 안내견 적합 판정을 받았을 때는 자식이 대학에 들어간 것처럼 기뻤다. 크림이를 떠나보내며 최일영은 훈련사에게 크림이가 은퇴하게 되면 꼭 연락을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훈련사에게 크림이가 돌아왔다는 연락을 받은 최일영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크림이를 보러 오라는 말에 사고라도 난 건가 불안했다. 크림이를 본 최일영은 차라리 사고가 나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크림이의 몸에는 학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는 당장 크림이를 집으로 데려왔다.

세 번째 안내견을 데리러 온 홍보실 직원은 훈련사가 크림이를 위탁 가정으로 보냈다는 말에 부랴부랴 최일영을 찾아왔다. 말이 새어 나갈 것을 염려한 A그룹 홍보실 측은 크림이가 아직 최일영에게 양도되지 않았으므로 A그룹 소유라며 크림이를 반환하라고 요구했다. 최일영은 유도선수 출신이었고, 아직도 장정 두서넛은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그는 크림이를 데리러 온 A그룹 직원의 멱살을 잡아 집 밖으로 내보냈다.

문제는 크림이의 치료였다. A그룹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을 수의사나 동물병원을 찾아야 했다. 동료 교수는 능력과 재력이 넘쳐나는 개인병원을 그에게 소개해줬다.

서도운과 상담 후 최일영은 이 젊은 수의사에게 크림이를 맡기기로 했다.

사고나 선천적 질병으로 크림이보다 훨씬 더 어린 나이에 사망하는 개들도 많았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관리를 받아야 하는 안내견이 지속적으로 학대를 받은 경우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특히 이마와 발바닥에 남은 동그란 흉터에 동물병원에 근무하는 모든 사람이 말을 잇지 못했다.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검사가 진행되고 결과를 보며 서도운은 격분했다.

크림이의 간과 신장은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정상적인 장기는 하나도 없었다. 모든 장기에 퍼진 염증으로 인해 언제든 다발성 장기부전이 일어날 수 있었다. 나이가 어리기에 심장만 겨우 제 기능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남자는 크림이를 학대했을 뿐이지만 A그룹은 학대를 묵인하며 크림이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서도운이 이러한 검사 결과를 전하자 최일영은 아이처럼 펑펑 울었다. 겨우 세 살이었다. 곱게 길러 품에서 떠나보낸 게 2년도 채 되지 않았다. 서도운은 그를 다독이며 크림이가 삶의 의지가 있다면, 스스로 밥을 먹기 시작하면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약속했다. 지금 크림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안전하다고 믿을 수 있는 공간이라고 판단해 입원보다는 통원 치료를 권했다.

누워서 움직이지 못하는 크림이의 수발을 최일영이 도맡았다. 그가 자리를 비우면 부인과 큰딸, 작은딸이 돌아가며 크림이를 돌봤다. 크림이는 자신의 곁을 지키는 가족을 보여 사랑받던 곳으로 돌아온 걸 알았는지 밥을 먹기 시작했다. 기적처럼 모든 수치가 정상에 가깝게 변하고 크림이는 한 달 후 걸어서 진료실에 들어왔다. 최일영은 크림이가 예전처럼 집안 이곳저곳을 돌아본다며 울면서 자랑을 했다.

그 사이 A그룹은 최일영에게 크림이에 대한 소유물반환을 청구했다. 최일영의 집 앞에는 늘 누군가 기다리고 있었고 매일같이 전화가 왔다.

최일영은 법원 통지서를 찢어 버리고, 집 앞을 지키는 남자들과 싸웠다. 가족 모두 핸드폰 번호를 바꿨다.

그런 상황에 불안감을 느꼈는지 크림이의 상태가 다시 나빠졌다. 좋아지던 수치는 미친 듯 날뛰었다. 복수가 차기 시작했고 호흡에도 문제가 생겼다. 경련이 반복되며 의식이 없는 시간이 길어졌다. 서도운은 최일영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으라고 전할 수밖에 없었다.

최일영은 막내딸이라고 부르던 커다란 개를 끌어안고 울었다.

집으로 돌아와도 크림이는 짖거나 울지 않았다. 크림이는 배운 대로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았다. 가족들을 보면 꼬리만 열심히 흔들어댔다. 그의 품에 안긴 크림이는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했지만 괜찮다는 듯 열심히 꼬리를 흔들었다.

최일영은 크림이의 털 하나도 A그룹에는 넘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 * *

최일영이 곧 도착한다는 전화에 서도운과 응급실 스태프들은 주차장에 나와 기다렸다. 차가 주차장에 들어서자 뒷자리에 있던 큰딸은 차가 채 멈추기도 전에 문을 열었다. 서도운은 달려가 큰딸의 품에 안긴 크림이의 상태를 확인했다.

크림이는 이미 숨을 쉬고 있지 않았다.

죽은 개는 다시 살아나지 못했다.

서도운이 크림이의 죽음을 전하자 큰딸은 비명 같은 울음을 터뜨렸다. 최일영이 진정시키려 했지만 “그놈들이 우리 막내를 죽였어”라는 딸의 울부짖음에 그도 함께 울 수밖에 없었다.

박희선은 바닥에 엎드려 울고 있는 큰딸을 끌어안았다. 차분한 목소리로 다독이는 말에 고통스러운 울음이 잦아들었다. 두 사람이 안정되는 듯하자 박희선은 곁에 선 서도운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서 선생님, 크림이 데리고 나올 수 있어요?”

고개를 끄덕이는 서도운을 보며 박희선은 품에 안긴 큰딸을 일으켰다.

“크림이가 좋아하는 데서 크림이 기다립시다.”

두 사람은 부녀를 부축해 잔디공원으로 나갔다.

하얀 시트에 쌓인 크림이는 병원에 올 때처럼 큰딸의 품에 안겼다. 안내견으로 선발되어 떠나보낼 때 30kg이 넘던 커다란 개는 뼈와 가죽만 남아 20kg도 되지 않았다. 그녀는 작고 가벼워진 막냇동생을 꼭 끌어안았다.

크림이의 죽음은 그들과 관계없던 이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대기실에 있던 사람들도 그들이 데려온 동물들도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았다. 몇몇 보호자는 자신의 개를 끌어안고 울었고 이동 가방 안에 몸을 숨긴 강아지를 달래는 작은 목소리도 들렸다.

죽음이 남긴 감정의 잔상으로 대기실 공기는 숨 막힐 정도로 답답했다. 그 속에 신경질적으로 자동문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울렸다.

동물들이 나가는 걸 막기 위해 대기실 입구에 설치된 자동문은 일반적인 자동문보다 천천히 열리고 천천히 닫혔다. 슈트를 갖춰 입은 두 남자가 그런 문을 우악스럽게 열어젖히고 들어와 커다란 목소리로 물었다.

“크림이라는 안내견을 여기서 치료하고 있다는데 어떻게 됐습니까?”

박희선이 비운 자리를 맡고 있는 건 이제 인턴을 벗어난 수의간호사였다. 그녀는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남자의 물음에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조금 전에 사망했습니다.”

“어휴, 다행이네.”

남자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대기실이 워낙 조용한 탓에 커다랗게 울렸다.

“A그룹에서 나왔습니다. 크림이가 저희 그룹 안내견인 건 아시죠?”

그는 들고 있던 파일에서 서류 몇 장을 꺼내 접수대 위로 내밀었다.

“여기, 크림이가 저희 쪽 소유라는 서류입니다. 지금 바로 크림이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아, 빈 상자 같은 게 있으면 넣어주세요.”

수의간호사는 손에 든 서류를 멍하니 쳐다봤다. 그는 뒤에 선 남자를 향해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죽은 동물을 차에 실으면 재수 없다던데……. 김 대리, 뒷자리에 넣는 건 좀 그렇지? 트렁크에 들어가려나?”

두 남자는 죽은 개를 어디다 실어야 할지 이야기하다 무겁게 내려앉은 대기실 공기에 주위를 둘러봤다. 모두가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이 입을 다물자 겨우 정신을 차린 수의간호사는 서류를 들고 자신이 가장 믿고 있는 사람에게 달려갔다.

“박 실장님, 박 실장님!”

병원 뒤뜰 쪽에서 욕설과 비명 소리, 날카로운 외침이 연이어 들렸다.

부서질 듯 커다란 소리와 함께 대기실로 달려온 최일영은 박희선과 수의간호사의 손을 뿌리치고 A그룹에서 나왔다는 남자의 얼굴을 후려쳤다. 최일영의 주먹에 남자는 힘없이 나가떨어져 바닥을 뒹굴었다.

“이 새끼들아, 여기가 어디라고 와!”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동물을 끌어안았다. 난데없는 소동에 진료 중이던 수의사와 보호자들도 밖으로 나왔다.

“이 짐승만도 못한 놈들이!”

최일영은 쓰러진 남자의 멱살을 쥐고 다시 주먹을 치켜들었다. 박희선은 있는 힘껏 그의 팔에 매달렸다. 진료실에서 나온 수의사도 달려와 최일영을 그 남자에게서 떼어냈다. 버둥거리는 그를 수의사들이 달라붙어 몸으로 눌렀다. 뜻대로 주먹을 휘두를 수 없자 그는 울음 섞인 괴성을 질렀다.

“놔아! 네놈들은 사람도 아냐!”

박희선이 멍하니 선 수의간호사에게 외쳤다.

“빨리 서 선생 불러!”

수의간호사가 응급실로 뛰어가자 박희선은 구석으로 도망가 있던 보호자와 동물을 진료실로 대피시켰다. 그들은 희게 질린 얼굴로 자신들의 동물을 꼭 끌어안고 진료실 문틈으로 밖을 내다봤다.

최일영은 수의사들 틈에서 발버둥 치며 울부짖었다.

“그 새끼가 크림이를 패는 걸 알았잖아! 못 패게 했어야지! 못 패게 했어야 할 거 아냐!”

얻어맞은 남자는 동료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켰다. 그는 바닥에 엎드려 울고 있는 최일영을 보며 입을 열었다.

“최 교수님, 이만하면 마음도 풀리셨을 테니 그만합시다.”

“뭘 그만해! 애가 죽었는데 뭘 그만해!”

최일영이 몸을 일으키려 악을 썼다. 그를 붙잡고 있던 수의사가 몇 명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응급실 스태프와 함께 달려온 서도운은 바닥을 구르고 있는 수의사들을 일으키며 난장판이 된 병원 대기실을 둘러봤다.

불쾌한 표정으로 최일영을 내려보는 남자 둘을 발견하고 다가갔다.

“누구시죠?”

“A그룹에서 나왔습니다.”

한 명이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서도운에게 건넸다.

“A그룹 홍보실이네요. 그래서 여긴 무슨 일입니까?”

“원장님이나 대표님 있으면 만나 뵙고 싶은데, 안내해주시죠.”

남자는 부어오르는 얼굴을 문지르며 거만하게 말했다. 그런 남자의 태도에 최일영이 분에 찬 목소리로 서도운에게 외쳤다.

“서 선생, 저 새끼들 우리 크림이 데려가려고 온 거야!”

서도운의 손짓에 최일영을 붙잡고 있던 수의사들이 물러났다. 그는 최일영을 일으켜 등을 토닥였다. 육십을 훌쩍 넘긴 남자는 애처로운 목소리로 울먹이며 서도운의 옷깃을 꼭 잡았다.

“서 선생…, 서 선생…, 난 우리 크림이 절대 못 줘…….”

“네, 걱정하지 마세요.”

한참 울던 최일영은 A그룹에서 나온 남자를 바라보며 눈을 번뜩였다.

“내가 다시는 내 새끼 안 뺏겨,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우리 크림이 못 데려가…….”

최일영의 말에 남자는 한숨을 쉬며 대꾸했다.

“최 교수님, 저희가 최선을 다해서 보상해드릴 테니 이쯤에서 그만하시죠.”

“보상 같은 거 필요 없으니까 죽은 애나 살려내!”

“거참, 배우신 분이 안 되는 걸 뻔히 아시면서 그렇게 우기시면 어쩌라는 건지…. 일단 크림이는 저희 측 소유니까 치료 과정에서 들어간 비용은 저희가 다 지불하겠습니다. 그리고 크림이랑 같은 혈통인 개가 있다고 하니까 크림이다 생각하고 새로 기르시면…….”

“야이, 시발놈아! 그걸 말이라고…….”

남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최일영의 입에서 욕이 터져 나왔다. 주먹을 움켜쥐고 달려가려는 최일영의 앞을 서도운이 막아섰다. 최일영은 버티고 선 서도운을 밀쳐내고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서도운은 차분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흥분하시면 크림이를 또 잃습니다.”

최일영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뒤로 물러났다. 분을 참지 못해 시뻘겋게 변한 얼굴로 서도운의 어깨너머 남자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새로 길러? 자식 같은 애를 죽여 놓고는 한다는 소리가…….”

그의 말을 들은 남자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을 늘어놓았다.

“최 교수님, 마음은 이해가 가는데 개랑 사람이랑 어떻게 같습니까? 사람은 사람이고, 개는 개죠. 오래 데리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1년도 안 된다고 하던데 뭘 그렇게…….”

최일영이 무어라 하기도 전 서도운은 몸을 돌려 남자를 향해 날카롭게 외쳤다.

“입 다물어!”

서도운의 일갈에 남자는 움찔거리며 물러섰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서 그런 말을 지껄이는 겁니까? 죽은 사람만큼이나 죽은 개가 의미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말을 가려서 하세요.”

함께 일하던 병원 사람들도 처음 듣는 서도운의 싸늘한 목소리에 놀라 몸을 굳혔다.

“여긴 당신 같은 사람이 오는 곳이 아닙니다. 꼴 보기 싫으니까 꺼져주시죠. 버티면 경찰을 부르겠습니다.”

남자는 서도운에게 무어라 말하지 못하고 잔뜩 찌푸린 얼굴로 접수대에 있던 수의간호사를 가리키며 손짓했다.

“거기, 내가 준 서류 가져와.”

남자의 명령에 당황한 수의간호사는 박희선을 쳐다봤다. 그녀의 시선에 박희선은 주머니에서 잔뜩 구겨진 종이뭉치를 꺼내 이리저리 펼쳤다. 반쯤 찢어지고 너덜거리는 종이는 이미 쓰레기나 다름없었다. 남자는 짜증 난 얼굴로 박희선의 손에서 서류를 낚아채 서도운에게 내밀었다.

“크림이는 죽었든 살았든 A그룹 소유입니다.”

“그래서요?”

“뭘 못 알아듣는 척을 해? 그 개는 죽었든 살았든 A그룹 소유물이란 말입니다. 주인이 가져가겠다는 겁니다.”

“못 줍니다.”

“절도죄로 신고하기 전에 내놓으세요.”

“신고하세요.”

“거 참, 죽은 개 한 마리 가지고…. 말이 안 통하네. 여기 대표가 누굽니까?”

남자의 짜증 섞인 말에 서도운은 고개를 돌려 수의사들 사이에 선 서도희를 불렀다.

“부원장님, 이분이 찾으시네요.”

수의사들 틈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그녀는 동생의 부름에 앞으로 나섰다.

“절 찾으셨나요?”

서도희가 서늘한 얼굴로 남자를 쳐다보며 물었다. 남자는 갑자기 나타난 압도적인 미모를 가진 여자를 어리둥절한 얼굴로 쳐다봤다.

대학 행사에 참석했다가 연락을 받고 급하게 돌아온 탓에 서도희는 가운이 아닌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금빛의 실크 블라우스 위로 부드럽게 웨이브가 들어간 검은 머리가 흘러내리고 하얀 타이트스커트 아래 금색 힐을 신은 서도희는 모델처럼 보였다.

“누구……신지?”

“여기 부원장입니다. 무슨 용건이신가요?”

그는 손에 든 구겨진 서류를 서도희에게 내밀었다.

“이 사람들이 말을 못 알아듣는데, 그 죽은 개만 주시면 됩니다. 더 이상 복잡하게 만들지 말고 이쯤에서 정리해 주시죠.”

그녀는 서류를 받아 힐긋 내려보고는 꼬깃꼬깃 뭉쳐 바닥에 던졌다.

“얼마든지 복잡하게 만드세요.”

“거참 말귀 어두우시네. A그룹 법무팀 상대할 자신 있으세요? 자꾸 이러시면 법대로 합니다.”

“네, 법대로 하세요.”

서도희는 몸을 돌려 박희선에게 말했다.

“박 실장님, 이 변호사님께 연락해 지금 바로 오라고 해주세요. 혹시 기사 제보를 할 수 있는 방송국 연락처가 있나요?”

“어느 방송국에 연락할까요? 병원 취재 온 PD랑 기자들 연락처는 다 있어요.”

“지상파 3사 중에 오늘 저녁 뉴스에 넣을 수 있다는 방송국이 있으면 약속 잡아주세요.”

그녀의 말에 두 남자는 삽시간에 표정이 변해 서도희를 붙잡으려 했다. 그녀를 향해 뻗어진 남자의 손을 서도운이 쳐냈다.

“어딜 손을 대!”

서도운의 기세에 주위에 있던 병원 스태프들의 표정도 싸늘하게 변했다. 두 남자는 굳은 얼굴로 뒤로 물러났다.

“이제 보니 A그룹은 개도 때리고 사람도 때리는 곳이네요. 박 실장님, CCTV도 확인해 주세요. 이 변호사님이랑 기자들한테 브리핑할 때 첨부해야겠네요.”

그녀는 몸을 돌려 진료실 문 앞에 서서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혹시 여기 계신 분 중에 방금 일어난 일을 촬영하신 분이나 녹취하신 분이 계신가요? 있으면 크림이한테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서도희의 물음에 여기저기서 손을 들고 핸드폰을 흔들었다.

“감사합니다, 곧 오실 변호사님이 여러분이 촬영한 것을 법적인 증거나 방송국에서 이용하는 것에 대해 자문을 해드릴 겁니다. A그룹에서 안내견 학대를 방조한 일에 대해 꼭 대가를 치르게 하겠습니다.”

그녀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숙이자 곳곳에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

“박 실장님, 오늘 진료 오신 분들 진료비는 무료로 해주시고, 서 선생님 오후 진료 예약은 저한테 돌려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박희선은 고개를 끄덕이고 수의사와 수의간호사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내렸다. 난장판이던 대기실은 그녀의 지휘에 빠르게 정리되었다.

잠시 얼이 빠져있던 A그룹의 두 남자는 다급하게 서도희에게 다가갔다.

“원장님, 이야기 좀 하십시다! 잠깐이면 됩니다!”

“원장님! 잠시만요!”

“아직 원장은 아닙니다. 호칭도 제대로 부르지 못하는 분들과 대화하고 싶지 않군요.”

서도희가 차가운 얼굴로 위층으로 올라가 버리자 두 남자는 당황한 얼굴로 서도운을 쳐다봤다.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휴대폰을 들었다.

“매형, 부탁한 거 구했어요?”

백경의 목소리가 스피커폰을 통해 대기실에 울렸다.

-처남이 부탁한 건데 당연히 구했지. 이 새끼 정말 쓰레기던데. 우리도 보고 기겁을 했다니까. 근데 이거 어디다 올릴 거야? 방송국? 인터넷?

“어느 쪽이 좋겠어요?”

-용량이 많아서 둘 다 될걸. 한두 건이 아니거든.

“인터넷은 매형이 편집해서 올려주실래요?”

-알았어, 백경이 이런 고발 다큐에도 능력이 있다는 걸 보여주지. 제목으로 ‘인간의 악의’, 이런 거 어때?

“믿고 맡기죠. A그룹 로고가 잘 나오게 편집해 주세요.”

-나만 믿어. ‘5분의 기적’이 뭔지 보여줄게.

발랄한 백경의 웃음소리에 서도운은 두 남자를 향해 녹을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도운을 보던 두 남자의 얼굴이 점점 새하얗게 변했다. 그들은 휴대폰으로 어딘가 전화를 하며 다급하게 병원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들이 만들어낸 남자의 참모습을, 그들이 덮었던 모든 것을 죽은 개 한 마리가 파헤치고 있었다.

* * *

진료실 문틈 사이로 지켜보고 있던 백도경은 서도운이 분노에 차 소리를 지르자 문밖으로 나갔다. 정선우도 놀라 그녀의 곁에 섰다.

수의사와 병원 스태프들이 둘러싸고 있어 언뜻언뜻 보이는 서도운의 뒷모습으로는 표정을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다만 온기라고는 느낄 수 없는 목소리에 얼마나 화가 났는지 짐작할 뿐이었다.

손등을 톡톡 두드리는 백도경의 손짓에 정선우는 그녀를 쳐다봤다.

“걱정 마세요. 선우 삼촌한테는 절대 저렇게 화 안 내요.”

그의 굳은 표정을 읽었는지 그녀는 생긋 웃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삼촌은 바람만 안 피우면 무슨 짓을 해도 용서해줘요. 다른 건 다 해도 되는데 우리 삼촌을 두고 다른 남자를 만나면 안 돼요.”

작은 소녀의 엄중한 경고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도운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 행복해서 서도운이 다른 사람을 볼까, 서도운에게 버림받을까 두려워서 숨도 쉴 수 없는데 어떻게 서도운을 두고 다른 사람을 볼 수가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서도운이 사귀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모자란 인간들이, 연인이라는 분에 넘치는 자리를 차지한 별 볼일 없는 인간들이 서도운에게 상처 입혔다는 걸 용서할 수 없었다.

자신이 서도운의 연인이라면, 너무 기뻐서 서도운 외에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그에겐 서도운만 보였다.

흩어지는 사람들 사이로 하늘색 가운을 입은 서도운이 있었다. 서도운은 같은 색의 가운을 입은 사람들과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눴다. 사람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속삭이거나 잔뜩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기실에 모여 있던 수의사와 스태프들이 돌아가고 최일영과 서도운만 남았다.

등을 보이고 선 서도운의 모습이 눈에 새겨졌다.

하늘색 가운 위로 드러난 목덜미는 곧은 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 위로 늘어진 머리카락이 뒤집어진 게 보였다. 윤이 나는 검은 머리카락 사이를 쓸어내려 정리해 주고 싶었다. 살짝 숙인 목덜미에 도드라진 뼈를 보며 그에 이어지는 모든 뼈에 입을 맞추고, 헐렁한 가운 아래 가려진 단단한 등 근육과 매끈한 피부를 매만지고 싶었다.

서도운에게 닿고 싶었다.

그의 바람을 듣기라도 한 듯 서도운이 그를 향해 돌아섰다. 흐르던 시선이 그에게 멈추고 서도운이 웃었다.

그 웃음에 서도운을 향한 날개에 몇 개의 깃이 더 돋아났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서도운을 향해 날아가려 발을 구르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를 향해 서도운이 웃어주길 바라면서도 제발 그러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서도운이 웃어줄 때마다 얽매인 사슬 아래에 있던 기대감이 몸을 부풀렸다. 어쩌면 괜찮을지 몰라, 어쩌면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닐지도 몰라, 어쩌면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줄지도 몰라, 어쩌면, 어쩌면……. 때가 되면 서도운의 곁을 떠날 거라는 각오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가슴에서 기어 올라온 말이 차곡차곡 입안에 쌓여, 입을 여는 순간 소리 내서 말할 것 같았다.

‘네, 사귀고 싶어요.’

‘네, 형을 원해요.’

‘네, 형을 가지고 싶어요.’

멀리 선 서도운을 향해 입술만 달싹였다.

서도운의 물음에 소리 내 답할 수 없는 그는 결코 서도운에게 닿을 수 없었다. 소리가 되지 못한 말을 삼켜 다시 가슴 속에 가라앉혔다.

크림이를 안고 뒤뜰에 숨어있던 최일영의 딸이 대기실을 기웃거렸다. 최일영은 얼른 달려가 딸의 품에서 크림이를 건네받았다. 여전히 겁에 질려 있는 딸의 얼굴에 최일영은 곁에 선 서도운을 쳐다봤다.

“오늘은 이렇게 넘어간 것 같은데, A그룹에서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최악의 경우, A그룹과 법적으로 다퉈야 할 겁니다.”

“소송하면 어떻게 되나요?”

“일단 크림이 사체가 증거로 쓰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저희는 크림이가 죽게 된 원인을 학대라고 생각하지만, A그룹은 부정할 겁니다.”

“그, 그럼…….”

“힘드실 겁니다.”

서도운의 말에 큰딸은 소리도 내지 못하고 눈물만 뚝뚝 흘렸다.

“소송을 하면 A그룹은 시간을 끌 겁니다. 포기하도록 하는 거죠. 크림이네가 하는 것보다는 저희 쪽에서 크림이를 맡아서 소송을 진행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얼마나…, 얼마나 기다려야…….”

“여론의 움직임에 따라 결정될 것 같습니다. 나쁜 결과는 아닐 겁니다.”

“흐으윽…, 막내야, 막내야…….”

마침내 그녀의 입에서 서러운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서도운은 그런 그녀를 안고 다독였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대기실에서 자신들이 겪은 일에 대해 흥분해 떠들어대던 사람들이 슬며시 입을 닫았다.

백도경이 죽은 개를 안고 있는 부녀를 보며 펑펑 울자 정선우는 허둥대며 주위를 둘러봤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울음소리는 마땅히 동정해야 할 것을 동정하고, 모두 슬퍼하니까 그 또한 당연히 슬퍼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 같았다.

슬픈 영화를 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스크린을 보고 있는 것 같아서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불편한 마음을 감추려 진료실에서 티슈를 들고 나와 새빨간 얼굴로 울고 있는 소녀에게 내밀었다.

백도경은 티슈를 잔뜩 뽑아 코를 풀며 고맙다고 말했다.

그는 백도경의 눈물에 공감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동물과 사람이 다르다며 반려동물을 하찮게 여기는 건 아니었다. 종종 서도운이 키우는 개나 고양이가 되고 싶었으니 반려동물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마음은 이해했다.

그가 이해할 수 없는 건 가족을 잃었거나 소중한 존재를 떠나보냈을 때의 감정이었다.

그에게 죽음은 슬픔이 아니라 두려움이었다. 아버지가 죽었을 때 그는 하나도 슬프지 않았다. 모든 것이 무서웠다.

상실의 슬픔이란 느껴본 적이 없는 감정이었다.

그에게는 불쌍한 어느 개의 삶과 죽음보다는 백도경의 눈물이 더 안타까웠다.

타인을 위로해 본 적도 없고, 누군가의 감정에 관심을 가진 적도 없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힘들어서 어머니의 울음소리조차 무시했다.

그러나 백도경의 울음소리는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의 곁에서 재잘대는 작은 아이가 좋았다. 그의 대답 따위는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떠들어대도 무시한다고 느껴지지 않는 이상한 존재였다. 서도운과 닮은 눈매로 웃는 게 무척이나 예쁜 소녀였다.

그는 백도경이 울지 않았으면 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저 티슈 갑만 만지작거리다 서도운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모습이 떠올랐다. 손을 내밀어 등에 흘러내린 백도경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아이는 팔을 벌려 그에게 안겨 왔다. 동그란 머리 위에 손을 올려 천천히 쓰다듬자 훌쩍이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백도경이 기대어 있는 가슴 근처가 따뜻했다.

정선우는 열다섯 살 여자아이를 위로하는 법을 알게 된 것 같아 기뻤다.

병원 한쪽에서 그와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품에 안고 위로하는 남자를 바라봤다. 타인을 위로하는 데 익숙한 남자는 누구든 안아주고 누구의 감정이든 토닥여주었다.

하지 말라고, 자신 외에는 누구도 품에 안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서도운의 다정함도 자신만의 것으로 독점하고 싶었다.

입안에 맴도는 말을 또 하나 삼켜 가슴에 담았다.

울음을 그친 딸은 최일영의 품에 안긴 크림이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본 후 머리 근처에 늘어진 시트를 곱게 여몄다. 부녀는 몇 번이고 잘 부탁한다고 말하며 크림이를 서도운에게 건넸다.

서도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곧 만나게 될 병원 측 변호사에 대해 몇 가지 더 일러주고 응급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순간 그와 서도운의 시선이 얽혔다.

그러나 서도운은 그의 시선을 무시했다. 서도운은 더없이 소중한 것인 듯 크림이를 단단하게 끌어안고 정선우를 스쳐 갔다.

지나가는 서도운의 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어째서일까 생각했다.

눈이 마주쳤는데 어째서 웃어주지 않는 걸까.

자신을 봤는데 어째서 웃어주지 않는 걸까.

서도운이 안고 있던 크림이를 떠올렸다.

그의 세계는, 그에게는 서도운만 존재하는데 서도운에게는 가족, 친구, 동료, 일과 관계된 사람까지 너무 많았다.

서도운의 곁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있었다.

이젠 죽은 개까지!

그는 서도운의 주위에 둘러싼 그 어떤 사람보다 특별해지고 싶었다.

적어도 죽은 개보다는 서도운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죽은 개가 아닌 자신을 그렇게 소중하게 다뤄주길 바랐다.

그런 죽은 개 따위가 아닌 자신을 봐주기를 원했다.

고작 죽은 개에게 관심을 뺏기고 싶지 않았다.

품에 안겨있던 백도경이 몸을 떼며 그의 손에서 티슈 갑을 들고 갔다.

“걱정하지 마세요. 삼촌이 그 사람들 혼내줄 거예요. 선우 삼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화내는 사람은 처음 봐요.”

티슈를 뽑아 코를 풀면서 하는 말에 정선우는 숨을 멈췄다.

순간 입안에 피가 퍼져나갔다.

그건 분노가 아니었다, 질투였다.

자신이 죽은 개를 질투했다는 사실을 깨닫자 그는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다는 걸 알았다.

바닥이었다.

자신의 추한 모습보다 더 고통스러운 건 죽은 개를 질투할 권리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네’라고 답할 수 없는 정선우는 서도운에게 어떤 의미도 없었다. 버림받고 싶지 않아서 입을 다물었기에 그와 서도운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지난 90여 일 동안의 관계는 오로지 서도운의 배려에 의해 성립된 것이었다. 서도운의 마음이 변하는 순간 정선우에게는 그 어떤 기회도 없었다.

평생을 기다려 준다는 서도운의 말에 자신에게 선택권이 있다고 착각했다. 모두가 탐을 내는 다정한 남자가 자신의 선택만 바라며 곁에 있다고 착각했다.

그는 죽은 개보다 못한 존재였다.

그에게는 서도운에게 사랑받을 권리도 삶을 간섭할 권리도 없었다.

괜찮을 거라고 필사적으로 달랬던 가슴은 조여 오는 현실에 찢겨져 나갈 것 같았다. 기대감에 차올라 온몸을 뒤흔들 듯 커다란 소리로 두근거리던 심장이 모든 희망을 토해냈다. 하얗게 마른 껍질만 남은 심장은 너무나 약해서 곧 부서질 것 같았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네”라고 말하는 것으로 기다리게 한 것을 용서받을 수 있을까.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붙잡을 수 있을까.

“가지고 싶다”고 말하는 것으로 버림받지 않을 수 있을까.

백도경이 그를 진료실로 이끌었다. 그녀가 권하는 대로 의자에 앉아 그녀가 쥐여준 티슈로 얼굴을 가렸다. 머리도 가슴도 서도운으로 가득한데 어째서인지 눈물밖에 나오지 않았다.

“화났다고 삼촌한테 말해요. 선우 삼촌이 울었다고 하면 삼촌이 알아서 해줄 거예요.”

지금 상황과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 백도경의 말에 눈물 사이로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돼?”

“네, 삼촌은 선우 삼촌을 좋아하니까 선우 삼촌이 원하는 건 다 해줄 거예요.”

백도경이 다시 티슈를 잔뜩 뽑아 건네며 말했다. 흘러나오는 눈물을 보이기 싫어 손에 쥔 티슈 뭉치로 가렸다.

백도경의 말처럼 되었으면 했다.

그녀의 말처럼 그가 원하는 것을 서도운이 들어줬으면 했다.

서도운이 그의 것이 되기를 바랐다.

백도경은 울고 있는 그를 두고 진료실을 나갔다.

그는 얼굴을 가리고 조용히 울었다.

버림받는 게 무서워 서도운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적당히 떨어져 서도운을 바라봤다.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고,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는 거리.

그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그어놓은 선을 서도운은 단 한 번도 넘어오지 않았다. 그것이 서도운의 배려라고 생각했다. 특별한 사람이 받는 특별한 배려라고 생각했다. 누구도 가질 수 없는 특별함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래서 착각했다.

언제든 서도운을 가질 수 있다고, 저 사람은 내 것이라고, 손을 뻗으면 언제든 서도운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잡을 수 없었다.

정선우가 서도운의 것이 아니듯, 서도운도 정선우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그어놓은 선이 어떤 것인지 이제야 알았다. 길을 걷는 행인들 간의 배려, 관계없는 타인과 닿지 않으려는 거리……. 상처받지 않는 거리라는 건 그런 것이었다. 특별함이란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제야 서도운의 성의가 무엇인지 알았다.

서도운은 한 번도 그의 몸에 손을 댄 적이 없었다. 실수로라도, 일상적으로 부딪힐 수 있는 접촉도 없었다.

손을 내밀 뿐, 그의 손을 먼저 잡은 적이 없었다.

그가 스스로 선을 지우고 손을 뻗어 잡지 않으면 서도운은 닿을 수 없는 존재였다.

서도운은 그가 대답했을 때 가질 수 있는 것을 보여주었다. 서도운을 독점하는 게 어떤 것인지 그 일부를 맛보여줬다.

지금까지 겪은 것만 주어진다 해도 무릎을 꿇고 애원할 수 있었다.

이제는 홀로 있고 싶지 않았다.

서도운의 일부가 아닌 모든 것을, 영원히 가지고 싶었다.

듣고 싶지 않은 모든 소리를 지워낼 목소리를,

부드럽고 따뜻하게 다가오는 침묵을,

어리석음을 감싸주는 다정함을,

텅 빈 그를 채우는 웃음을,

서도운의 체온과 단단한 손까지 모두 가지고 싶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조심스럽게 울렸다. 눈물을 닦고 문을 열자 그 앞에는 보고 싶은 사람이, 가지고 싶은 사람이 서 있었다.

“……형, 대답할게. 지금 대답할게.”

잔뜩 쉰 그의 목소리에 서도운은 부드럽게 웃었다.

“들어가서 들어도 돼?”

“응.”

서도운은 그의 곁에 앉아 티슈를 잔뜩 뽑아 내밀었다. 내밀어진 티슈를 받아 얼굴을 닦아내고 서도운을 바라봤다.

“……잘못했어.”

서도운이 그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서도운의 눈에 그가 담겨있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몰랐어, 잘 모르니까, 그래서……, 그랬어. 내가, 어떻게, 해야…….”

자신만을 바라보는 서도운의 시선이 기뻐서 눈물이 났다. 서도운이 손을 내밀어 눈가를 쓰다듬고 눈물이 흘러내린 볼을 만졌다. 원하던 남자의 손길이란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황홀했다.

정선우는 볼을 감싼 서도운의 손을 꼭 잡았다.

“내가, 어떻게……, 어떻게… 해야…….”

울음이 섞여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사랑해 달라고 해.”

서도운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형, 사랑, 해줘. 나만……, 나만, 사랑해줘.”

“그래.”

“실망, 하면… 안 돼. 실망해서, 버리면… 안 돼. ……버리지 마.”

“네가 날 사랑하면 안 버려.”

서도운의 말에 그는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형, 사랑해. 정말 사랑해.”

“알아.”

자신을 향해 웃어주는 남자는 이제 그의 것이었다.

“선우야, 렌즈 빼.”

이해할 수 없는 요구에 그는 눈을 깜박였다.

“그럼, 형이…… 안 보여.”

“안 보여도 내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을 거야.”

서도운은 정선우를 향해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눈가에서 흘러내린 웃음이 입술 끝에 맺혔다.

-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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