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나비 날개
때때로 잠을 못 잘 때도 있었지만 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걱정이 많아서, 예민해서 그렇다고 여겼다.
일상생활에 문제가 생긴 건 군대에서부터였다. 깊이 잠들지 못해 늘 피곤했다. 제대를 하면 나아질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그때부터 수면유도제나 수면보조제를 먹기 시작했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는 먹지 않는 날보다 먹어야만 잠들 수 있는 날이 더 많았다.
C그룹에 입사하고 나서는 아무리 애를 써도 잠을 잘 수 없었다. 잠을 자기 위해 병원을 찾았고, 그의 몰골을 본 의사는 수면제를 처방해줬다.
수면제는 몇 주, 몇 달을 주기로 부작용이 나타나 계속 약을 바꿨다.
어떤 약은 잠에서 깰 때 죽고 싶을 정도로 우울해지기도 했고, 어떤 약은 육체의 일부가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져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때로는 벗어둔 슈트를 입고 잠들어 있기도 했고, 현관이나 화장실에서 깨어날 때도 있었다.
두려움 속에서 깨어나 출근을 하고 퇴근해서 돌아와 잠이 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결국 약을 먹고 다시 두려움 속에 깨어나는 일을 계속 반복했다. 그럴 때면 차라리 야근을 하는 게 나았다. 지쳐서 기절해버리면 약을 먹지 않아도 잠들 수 있었다.
술을 마시면 약을 먹을 수 없기 때문에 회식을 한다는 말이 정말 싫었다. 돌아가신 아버지 핑계를 대며 따라주는 술을 거절했지만, 강요에 못 이겨 한 잔이라도 마신 날이면 아침이 될 때까지 침대에 앉아 멍하니 벽을 보고 있어야 했다.
점점 수면제에 의존하는 날이 늘어나자 어느 순간부터 깨어있는 시간에도 부작용이 나타났다. 실수가 잦아졌고 가끔 기억나지 않는 시간이 생겼다.
사람들은 그가 일을 잘해도 욕을 하고, 잘못해도 욕을 했다. 그들은 그것을 ‘얼굴값’이라고 말했다. 모두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있었다. 그들에게 그의 실수는 용서할 수 없는 죄였다.
하루하루가 죽는 게 나을 것 같은 날이었다.
약을 먹고 잠들기를 기다릴 때면 다음 날 아침에 깨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럴 수 있다면 뭐든 줄 수 있었다. 그가 가진 걸 모두 주고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얼굴도, 큰 키도, 대기업 사원증도 모두 줄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에겐 C그룹의 사원증이 없었다.
그는 C그룹에서 퇴직했다.
쫓겨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던 곳을 스스로 나왔다.
그에겐 C그룹 명함 대신 볕이 잘 들고 점심때가 되면 예쁜 아이가 나타나는 사무실이 생겼다.
깊은 쌍꺼풀이 진 눈에 인형처럼 생긴 작은 아이가 말했다.
“선우 삼촌이 우리 삼촌이랑 사귀는 게 너무 좋아요.”
그는 백도경의 삼촌, 서도운과 사귀고 있었다.
그는 서도운의 연인이었다.
어쩌면,
이건 현실이 아닐지도 몰랐다.
가질 수 없는 욕망이 그런 꿈을 꾸도록 한 건지도 몰랐다. 꿈이라면 이대로 죽어버렸으면 했다.
“정선우!”
그를 부르는 서도운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어나!”
형, 날 이 꿈에서 깨우지 마.
“입 벌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들어온 손가락이 억지로 턱을 벌리고 입안으로 들어왔다.
안 돼.
손가락을 입에 넣으면 엄마에게 혼났다. 입에 들어온 손가락을 밀어내려 힘껏 깨물었지만 손가락은 사라지지 않았다.
엄마에게 들키면 안 돼.
엄마는 매일 저녁 퇴근해 그의 손을 검사했다. 손가락을 빨거나 손톱을 물어뜯은 흔적이 있으면 그의 입에 나무젓가락을 물려주고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거울 보면서 반성해.”
잘못했다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말하고 싶은데, 물고 있는 젓가락이 떨어지면 벌을 받는 시간은 더 길어졌다. 엄마가 저녁을 다 차리고 부를 때까지 그는 거울 속에서 침을 흘리며 울고 있는 아이를 보고 있어야 했다.
“선우야…….”
눈을 뜨자 꽃처럼 화려한 남자의 시선이 그를 향해 있었다. 깊은 쌍꺼풀 아래로 보이는 눈은 빽빽한 속눈썹 덕분에 더욱 짙게 느껴졌다.
형, 잘못했어. 다시는 안 그럴게.
“괜찮아.”
새까만 눈이 그를 향해 웃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이 부끄러워 눈을 감자 볼을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볼을 쓰다듬던 손이 입술을 만졌다.
“입 벌려.”
손가락이 벌어진 입술 사이로 들어왔다.
“빨아.”
그는 입안에 들어온 서도운의 손가락에 혀를 감았다. 손가락은 그의 입안을 이곳저곳 만지며 혀를 누르고 입천장을 비비기도 했다. 단지 손가락을 빠는 것뿐인데 몸이 달아올랐다.
조금씩 숨이 가빠져 코끝으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웃음소리가 들리고 성기 주위를 쓰다듬는 서도운의 손길이 느껴졌다.
크고 단단한 남자의 손 안에서 성기가 부풀었다. 성기에서 시작된 흥분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뿌리부터 귀두 아래까지 천천히 오가던 손길이 점차 빨라지자 흥분에 못 이겨 입안에 든 손가락을 게걸스럽게 빨았다. 입가로 침이 흐르는 느낌이 났지만 서도운의 손가락을 빠는 것이 더 중요했다.
“흐응, 음…….”
자신의 신음 소리를 들을 때면 언제나 현실이 아닌 것 같았다.
서도운과 사귀게 되고 자신의 문제가 극복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스스로 만져본 적이 있었다. 이전과 달리 발기는 했지만 서도운이 만져줄 때 같은 쾌감은 없었다. 단단해지지도 않고 대충 부풀어 오르더니 줄줄 싸기 시작해 놀라서 손을 거뒀다.
그의 성기는 여전히 쓸모없었고, 자위를 하거나 타인과의 섹스를 떠올리는 것도 불쾌했다. 나아지거나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달았지만 실망스럽지 않았다.
‘서도운’이 예외였을 뿐이었다.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성적인 쾌감은 서도운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서도운이 시선을 주는 것만으로 흥분했고, 의미 없는 스침에도 좋아서 덜덜 떨었다.
왜 그런지, 이유는 궁금하지 않았다. 서도운이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서도운은 그런 존재였다.
감았던 눈을 떴다.
언제나 그렇듯 희미하고 흐릿한 세상이 보였다. 그러나 보이지 않아도 명확하게 느껴지는 게 있었다.
팔을 들어 그의 몸을 내리누르고 있는 남자를 끌어안았다.
입에서 손가락이 빠져나가자 참았던 쾌감이 흘러넘치며 신음이 터져 나왔다.
“하아, 형……, 좋아, 더…, 더 해줘…….”
허리를 흔들며 서도운의 손에 성기를 비볐다.
“형, 아! 흐읏!”
미친 듯 허리를 흔들어대자 쾌감은 금세 한계까지 치달았다. 당장이라도 사정할 것 같은 기분에 움직임을 멈추고 숨을 삼켰다.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정액이 흘러나올 것 같아 발가락 끝으로 시트를 밀어내며 품속의 남자를 힘껏 끌어안았다.
서도운이 부드럽게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속삭였다.
“잘했어, 이제 싸도 돼.”
귓가에 흐르는 웃음에 온몸의 긴장이 풀렸다.
“……형, 키스, 키스해줘.”
사정의 쾌감이 나른한 몸을 타고 끝도 없이 퍼져갔다.
머리카락 한 올까지 서도운이 건네준 쾌감으로 채워지자 심장이 떨려왔다. 목구멍을 타고 올라온 떨림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그건 말도, 소리도 되지 못한 깊고 긴 탄식이었다.
황홀하고 기쁠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째서인지 아팠다.
너무 아파서 매달렸다.
“형……, 키스…….”
눈가에 내린 서도운의 입술이 눈물에 흘러내려 입술 위에 멈췄다.
서도운의 시선이 언제나 자신에게 향하기를 바랐다.
녹을 듯한 그 미소가 제 것이길 원했다.
손끝이 닿는 사람이 자신이었으면 했다.
“선우야.”
익숙한 목소리에 눈을 뜨자 손에 안경이 쥐어졌다.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고 안경을 쓰자 곁에 앉아 있는 서도운이 보였다.
“선우야, 형 배고파 죽을 것 같아. 밥 먹고 다시 자.”
“……밥?”
낯선 천장과 낯선 침구에 그는 주위를 둘러봤다. 서서히 잠에서 깨어나며 자신이 서도운의 침대에 누워있다는 걸 깨달았다.
“얼른 일어나.”
단단한 남자의 손이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잠에 취한 몸이 균형을 잡지 못해 휘청거리자 서도운이 웃음을 터뜨리며 그를 끌어당겼다. 그는 팔을 벌려 환하게 웃고 있는 남자를 안았다.
“형…….”
품에 안은 남자의 몸에 기대며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가슴 가득 행복감이 차올랐다.
악몽과 선잠이 반복되며 잠을 자는 것도 깨어나는 것도 두려웠다. 그러나 이렇게 깨워진다면 다음 날 아침을 기대하며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잠에서 깨어나 살아있다는 사실을 기뻐한 건 처음이었다.
* * *
정선우는 욕조에 기대앉아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욕실은 그가 아는 것과 달랐다.
성인 남자 둘이 들어가고도 남을 커다란 욕조와 유리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방 같은 샤워 부스, 거기다 욕실은 거실 쪽 벽이 전부 유리로 되어있었다. 불투명한 유리도 아니고 환하게 안팎을 모두 볼 수 있는 유리였다.
그의 빈약한 상상력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이상한 공간이라 서도운의 집에 있다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따뜻한 물에서 피어난 수증기 때문에 안경에 김이 서려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제구실을 못 하는 안경을 벗어 세면대 옆에 올려놓고 눈을 감았다.
어딘가에 매달려 있던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욕실을 울렸다.
감았던 눈을 뜨고 주위를 돌아봤다. 흐릿한 시야에 비친 곳은 낯선 공간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곳은 언제나 그를 불안하게 했다. 그런 곳에서는 잠을 잘 수도 안경을 벗을 수도 없었다.
학교에서 단체로 여행을 가면 항상 숙소 구석에 쪼그려 앉아 동영상 강의를 들여다보다 잠들곤 했다. 반 아이들은 그를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취급해 그가 무얼 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
편하고 외로운 시간이었다.
방 하나가 딸린 조그만 전셋집에서 그의 공간은 부엌 겸 거실로 쓰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건 공부를 하거나 TV를 보는 것뿐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와 밥을 차려주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들 사이의 대화는 지친 얼굴로 나누는 인사와 필요한 것을 말하는 것뿐이었다.
가끔 방문 틈으로 희미한 울음소리가 흘러나와 TV 속의 웃음소리와 섞였다. 그는 TV 볼륨을 높여 어머니의 울음소리를 지우는 것보다 TV를 끄고 잠드는 것을 택했다.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어쓰고 제발 빨리 잠들기만을 바랐지만,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그치고 나서야 잠을 잘 수 있었다.
점점 TV를 보는 시간이 줄어들었고, 어느 순간 그의 집에서는 TV가 사라졌다.
그는 TV도 보지 않고 게임도 하지 않고 만화나 소설도 읽지 않았다. 그에겐 반 아이들과 나눌 수 있는 접점이 없었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를 배제했다. 때때로 외롭다고 생각했지만, 친구를 사귀는 것보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받는 일이 그에겐 더 중요했다.
그들과 같은 교실에 있어도 그는 고립된 섬 같은 존재였다. 가끔은 누군가가 배를 타고 그에게 찾아와주기를 바랐지만 지나친 욕심이라고 생각했다. 소외되고 따돌려지는 것에 익숙해져 버린 그에겐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친구가 되는 일이 너무나 어려웠다. 그는 열심히 공부하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차가워진 물방울이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갑작스러운 한기에 놀라 그는 따뜻한 물속으로 가라앉듯 파고들었다. 욕조에 가득 찬 물이 움직임에 따라 몸을 감쌌다.
살랑이는 물결에 서도운의 손길이 떠올랐다. 따뜻하고 커다란 손은 그의 몸을 스치듯 가볍게 만지기도 했고 아플 만큼 강하게 잡아끌기도 했다.
처음이었다.
누군가의 앞에서 스스로 옷을 벗고 몸을 드러내는 것도, 누군가에게 그의 몸을 만지도록 내어주는 것도…….
성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안 다음, 타인의 앞에서 옷을 벗고 몸을 드러내는 건 두려움이 되었다.
강제로 타인 앞에서 옷을 벗어야 하는 군대에서의 생활은 하루하루가 끔찍했다. 비웃음과 조롱 섞인 말을 들어도 안경을 빼앗겨 누구인지 확인할 수도 없었다.
고개를 숙인 채 입안을 가득 채운 피가 흘러내리지 않게 입을 다물었다. 꾹 다문 입술 사이로는 어떤 소리도 새어 나갈 수 없어 도와달라는 말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너무 오래 들어가 있는 거 아니야? 감기 들겠어.”
욕실을 울리는 남자의 목소리에 그는 벗어둔 안경을 썼다.
“……괜찮아.”
문 앞에 선 서도운은 그의 대답에 미간을 설핏 찡그리더니 욕실로 들어와 욕조에 손을 넣었다.
“따뜻해.”
서도운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온수를 틀었다. 가느다란 물줄기에서 퍼져 나온 수증기가 금세 욕실을 채웠다. 그는 김이 서린 안경을 벗어 물에 씻어 다시 썼다. 안경에 물기가 어려 서도운의 모습이 명확하게 보이지 않았다.
“기분 좋아?”
“응.”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서도운은 빙긋 웃으며 세면대 아래 선반에서 수건을 꺼내 욕조 턱에 올려놓고 앉았다.
욕조를 짚고 있는 서도운의 손에 눈이 갔다. 오른손 손가락에 두툼하게 붕대가 감겨 있었다. 함께 밥을 먹을 때는 식탁 아래로 손을 내리고 있어서 보지 못했다.
그의 시선을 알아챘는지 서도운은 손을 거둬 숨겼다.
“다쳤어?”
그의 물음에 서도운은 가벼운 목소리로 답했다.
“물렸어.”
“언제?”
“네가 잠들었을 때.”
서도운의 곁으로 다가가자 욕조 속의 물이 출렁이며 그의 몸을 스쳐 지나갔다. 무릎 위에 놓인 오른손을 가만히 쳐다보자 서도운은 왼손을 뻗어 이마에 달라붙은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많이 다쳤어?”
“그냥, 살짝 물린 거야.”
백도경은 늘 수의사는 체력이 많이 필요한 일이라고 했다. 물거나 할퀴는 동물도 흔하다고 말했다. 서도운의 직업에 대해 충분히 설명을 들었어도 실제로 다치는 걸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개? 고양이?”
서도운은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부드럽게 웃었다.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던 손이 귓가로 내려가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조그만 살덩이가 서도운의 손길에 녹을 듯 뜨거워져 귀는 물론이고 얼굴까지 달아올랐다.
“걱정 마, 하나도 안 아파. 이런 건 처음이야.”
“물리는 거?”
“전부 다.”
“도경이 설명이랑 다르네.”
“도경이가 뭐랬는데?”
“수의사는 자주 다친다고 했거든.”
“틀린 말은 아니지만 도경이가 모든 걸 다 아는 건 아니야.”
서도운은 생긋 웃으며 귓가를 만지던 손을 거뒀다. 정선우는 더 만져달라고 할 것 같아 안경을 벗어 욕조에 넣어 흔들었다.
“집이…… 특이해.”
그의 말에 서도운은 나지막하게 웃었다.
“신기해?”
“응.”
한 층을 다 쓰는 커다란 빌라에는 드레스 룸을 빼고는 벽이 없었다. 스튜디오처럼 모든 곳이 환하게 보였다. 거기다 가구라고는 킹사이즈의 두 배는 됨직한 거대하고 낮은 침대 하나뿐이었다.
“……큰 개를 키우고 싶었거든.”
크림이 같은 레트리버가 꼬리를 살랑이며 서도운을 쫓아 집 안 구석구석을 누비며 모습이 떠올랐다. 그 개는 서도운과 자고 서도운과 씻고 서도운과 밥을 먹고 모든 것을 같이했다.
개를 위한 집.
그가 서도운과 섹스를 하고 잠들었던 침대마저 개를 위한 것이었다. 불쾌감에 일그러지는 눈가를 감추려 물방울이 흘러내리는 안경을 썼다.
이 모든 게 자신을 위한 거였으면 했다. 한순간만이라도 서도운의 삶에서 모든 것을 지우고 자신만 남았으면 했다.
뜨거워지는 눈가에 고개를 숙였다. 하얗게 김이 서리는 안경이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흉한 얼굴이 모두 가려졌으면 바랐다.
눈을 깜박이자 속눈썹에 매달려 있던 눈물이 안경 위로 떨어졌다. 울음을 참으려 입을 다물자 삼켜낸 눈물로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질투심으로 얼룩진 마음을 서도운이 절대 알지 못하기를 바라면서도 제발 알아줬으면 했다.
“왜 울어?”
“……안 울었어.”
서도운의 물음에 간신히 입을 열어 대답했다. 타버린 목구멍에서 새어 나온 목소리는 그가 듣기에도 이상했다.
서도운의 손이 다가와 그의 안경을 벗겼다.
안경이 아니라 옷이 벗겨지는 것 같았다. 이미 아무것도 입지 않고 있는데 다시 한번 벌거벗겨지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가리고 싶었지만 흐릿한 윤곽이라도 서도운을 시야에서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의 볼을 쓸어내린 서도운의 손이 축축하게 젖은 입술을 문질렀다. 입술 위를 부드럽게 스쳐 가는 손가락이 심장을 어루만지는 듯해 가슴 속이 간질거렸다.
손가락을 빨고 싶어 입을 벌렸다.
입안에 넣어주길 바랐지만, 손가락은 입가에서만 맴돌았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이 새어 나오고, 입안 가득 고인 침을 삼키는 소리가 커다랗게 욕실에 울렸다.
키스할 듯 몸을 숙인 서도운이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선우야, 원하는 걸 말해.”
속삭이는 목소리가 고막이 아닌 그의 심장을 울렸다. 가빠지는 숨소리가 조용한 욕실을 채우고 다시 그의 귀에 들어왔다.
말하고 싶었다.
참고 삼켰던 모든 말이 목구멍으로 한꺼번에 기어 올라왔다. 너무나 많은 말이 입안에 고여 숨이 막혔다. 하고 싶은 말은 넘치는데 그 무엇도 말할 수 없었다. 입이 틀어 막히자 갈 곳을 잃은 말이 눈물이 되어 쏟아졌다.
“형……, 키, 스…….”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은 그것뿐이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서도운의 혀가 들어와 그의 입안을 더듬자 헐떡임 대신 긴 신음이 흘러나왔다. 안도감에 혀를 비비며 세차게 빨았다.
정선우는 젖은 목덜미를 매만지는 서도운의 손을 꼭 잡았다.
입안에 고였던 말들을 서도운이 삼켜주기를 바랐다.
혀끝으로 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바랐다.
서도운과 맞닿은 입술 사이에서 들리는 소리는 정선우의 심장을 쥐어짜던 말들은 아니었지만 숨을 쉴 수 있게 해줬다.
지금은 그것만으로 만족했다.
그러나 욕실 벽을 타고 서도운의 나른한 한숨 소리가 울리자 그의 목구멍은 또 다른 것으로 틀어막혔다.
“형, 더…….”
입술 위로 속삭이는 애원을 들었는지 서도운의 웃음소리가 욕실을 채웠다. 서도운은 손을 들어 흐트러진 그의 머리카락을 다시 쓸어 넘겼다. 머리카락 끝에 매달려 있던 물방울이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다.
“네가 원하는 건 다 들어줄게.”
서도운의 목소리가 젖은 공기와 섞여 귓가에 내려앉았다. 몸으로 어루만지는 속삭임에 쾌감이 퍼져나갔다.
서도운의 시선만으로 심장이 달아올라 욕조의 물이 차갑게 느껴졌다. 말이 되지 못한 욕망에 몸이 뜨거워져 떨리는 입술 사이로 흐느낌 같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견딜 수 없어 옷깃을 당기자 작은 손짓에 담긴 그 마음을 알아챘는지 서도운은 자신의 품을 내어주었다. 그는 서도운을 힘껏 끌어안고 매달리듯 셔츠를 움켜쥐었다.
“형, 나만……, 나만 사랑해줘.”
커다란 남자의 손이 물기가 가득한 젖은 등을 쓸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