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 뱀의 허물 (22/35)

22. 뱀의 허물

백도경은 호텔 스위트룸의 응접실에 앉아 회의실 문을 노려봤다. 모나게 뜬 눈과 툭 튀어나온 입술은 어떻게 봐도 즐거운 표정이라고 하기 힘들었다.

저녁 식사 시간이 가까워져서야 회의실 문이 열리며 지친 얼굴을 한 사람들이 나왔다. 그들은 뿌루퉁한 얼굴로 응접실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소녀를 발견하고 말을 걸었다.

“도경아, 관광은 했어? 내가 부산 구경시켜 줄까?”

한때 서울 본점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이가 친근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지만 그녀는 작은 입술을 더욱 삐죽하게 내밀고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가 서 과장을 너무 오래 잡고 있었나 보네. 서 과장, 조카가 삐진 것 같은데?”

누군가 회의실을 들여다보며 말하자 백도경은 안락의자에 작은 몸을 묻으며 그들을 노려봤다. 그런 그녀에게 버릇없다고 하는 이는 없었다. 그들은 저 작고 예쁜 소녀가 결국 모든 것을 가지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서도운은 부산 2호점 개원을 앞두고 부산으로 내려와 일주일째 머무르고 있었다. 부산에 도착한 다음 날은 병원 건물의 공사 진행 상황을 확인하느라 밖에 나갔지만, 다음 날부터 서도운은 줄곧 2호점 운영진과 스위트룸의 회의실에 틀어박혔다.

덕분에 백도경도 스위트룸과 호텔 내부만 돌아다니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면 사방에 난 창으로 겨울 바다가 보였지만 그뿐이었다. 서도운은 그녀 혼자서 밖에 나가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부산에 같이 가자기에 즐거운 여행을 생각하고 냉큼 따라왔지만 이건 감금이나 다름없었다. 운동 시설부터 쇼핑까지 호텔 내부 시설을 이용하는 것도 이젠 질렸다. 스위트룸에 갇히느니 유기동물 보호소에 가서 개똥을 치우고 싶었다.

“괜찮아요, 좀 이따 이명진 선생 올 거예요.”

백도경이 뚱한 얼굴로 답을 하지 않자 회의실 안쪽에서 답이 들렸다.

“이 실장도 내려왔어? 어디 있는데 코빼기도 안 비쳐?”

“범어사에 템플스테이 갔어요.”

서도운의 말에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명진은 장난이 심하고, 흥미를 끄는 일이라면 집요하게 파고들지만, 죽음 앞에서는 더없이 진지했다. 1학년 때, 해부 실습 후 희생된 동물을 곱게 상자에 넣어 묻어주고는 그 앞에서 향을 피우고 불경을 외웠다. 승려가 되려 했지만 집안의 반대로 포기했다며, 너무나 경견한 모습에 하나둘 그에게 실험동물의 사체를 맡겼고, 졸업할 때까지 동물들의 장례를 도맡았다.

“스타팅 멤버도 확정되었는데 오늘 같은 날은 한잔해야지. 서 과장, 나가자.”

개원을 앞둔 2호점의 원장이자 선배이기도 한 중년 남자가 회의실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김 원장님, 지금 해운대점 때문에 전국이 쑥대밭이에요.”

“허허허, 그런가?”

남자는 서도운의 한숨을 피하며 뻔뻔하게 웃었다. 여기저기서 핀잔을 주는 목소리가 이어지고 다들 도망치듯 스위트룸을 빠져나갔다.

2호점 근무 지원자에 한해 6개월간 특별 보너스가 주어진다는 소식에 전 지점에서 지원을 해, 처음 예상과 달리 인력이 모자라는 게 아니라 넘쳐났다.

2호점 운영진은 이 같은 상황에 즐거워하며 지원자들 중 가장 능숙하고 경험 많은 이들을 골라냈다. 덕분에 본점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점에서 주요 스태프들이 빠져나가 서도운에게 각 지점의 항의가 쏟아졌다.

MOON 동물병원은 근무하는 사람들에게 연봉과 복지를 최고 수준으로 주는 대신 높은 수준의 능력과 지식을 원했다. 수의사든 수의테크니션이든 본점에서 교육을 마치지 않은 이는 근무를 허가하지 않았고 교육 기간은 최소 4개월 이상 걸렸다. 지금 당장 신규 인력을 모집해 교육한다고 해도 몇몇 지점은 운영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었다.

서도운은 부산 2호점의 개원 준비는 물론, 인력 부족으로 공백이 생기는 지점들을 지원할 본점 인력의 스케줄까지 조정해야 했다.

텅 빈 응접실에 홀로 앉아 있던 백도경은 씩씩거리며 회의실로 향했다. 한참을 회의실 입구에 서 있었지만 서도운은 그녀에게 시선도 주지 않았다. 결국 참다못해 빽 하니 소리를 질렀다.

“삼촌!”

“응.”

대답은 했지만 그의 눈은 노트북 화면을 벗어나지 않았다.

“삼촌!”

“듣고 있어.”

“나 서울 갈 거야!”

그제야 서도운의 시선이 백도경에게 향했다. 제 딴에는 인상을 쓴 듯 잔뜩 눈썹을 찌푸리고 있는 얼굴을 흘깃 확인하고는 다시 노트북으로 시선을 옮겼다.

“안 돼.”

“심심해 죽을 것 같아. 여기 있기 싫어.”

“이 선생 템플스테이 가는데 같이 가랬잖아.”

“거긴 더 재미없어! 그럼 폰이라도 새로 사줘.”

서도운은 삐죽하게 입을 내밀고 있는 조카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서울 가서 사줄게.”

“싫어, 지금 사줘!”

백도경은 그의 곁에 서서 발을 동동 굴렀다.

KTX를 타고 내릴 때였는지 집게발 고로케를 먹을 때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호텔에 도착하고 나서야 휴대폰이 없어진 걸 알았다. 언제나처럼 삼촌에게 새로 사달라고 했지만, 평소와 다르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사주지 않고 있었다.

“급할 거 없잖아. 폰 있어도 연락할 사람도 없으면서.”

“아냐, 있어! 엄청 많아!”

“누구? 메시지 주고받는 사람은 이 선생이랑 선우뿐이잖아. 이 선생은 같이 내려왔고 선우한테는 네가 폰 잃어버렸다고 했어.”

그녀는 삼촌의 말에 반박하고 싶지만 말이 나오지 않아 입을 뻐금거리다 훌쩍이기 시작했다.

학교에 제대로 가지 않으니 연락할 친구가 없었다. 옆자리에 앉은 반 아이보다 병원 스태프들과 더 가까웠지만, 그들은 열다섯의 소녀를 귀엽게 여길 뿐 그 이상은 상대해주지 않았다. 그녀가 수다와 일상을 나누는 이는 삼촌과 삼촌의 친구, 삼촌의 애인이었다.

“……아냐아, 톡 친구 많아…. 나 팔로우랑 인친도 많단 말이야. 히잉…….”

서도운은 울먹이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손을 내밀었지만, 그의 손길을 피해 회의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할머니한테 데리러 오라고 할 거야! 다시는 부산에 안 올 거야! 부산 싫어!”

제대로 닫히지 않은 메인 침실 문 사이로 백도경의 울음소리가 스위트룸에 퍼졌다. 서도운은 한숨을 내쉬며 회의실 문을 닫으려다 응접실 구석에 서 있던 이명진과 눈이 마주쳤다.

“언제 왔어?”

“방금.”

이명진의 떨떠름한 표정이 두꺼운 테의 안경 너머로도 보였다.

“왜 애를 울리고 그래?”

친구의 핀잔에 서도운은 대답 없이 몸을 돌려 회의실로 들어갔다. 등 뒤로 이명진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따라 들어온 이명진은 회의실 문을 닫고 의자 하나를 꺼내 앉았다. 그는 190cm가 넘는 키에 커다란 체격을 가졌지만, 구부정한 자세와 학자 같은 인상 탓에 무척이나 온화하게 보였다.

“어쩔 거야?”

이명진의 물음에 서도운은 말없이 보고 있던 노트북을 덮었다. 서늘한 얼굴을 하고 있던 남자가 한참 후 입을 뗐다.

“도경이한테 서울 올라갈 때까지 폰 사주지 마. 네 폰도 빌려주지 마.”

“하여간, 독한 놈…….”

이명진은 다시 혀를 찼다.

출석 일수가 모자라 졸업을 못 하게 될지도 모른다며 조카를 업고 학교에 데려다주던 놈이,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르는 부산 출장에 조카를 데려왔다. 그때부터 뭔가 꺼림칙했다.

서도운은 부산으로 내려오는 KTX에서 잠든 백도경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내더니 자신의 가방에 넣고는 입을 다물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명진은 자신과 백도경을 부산에 함께 끌고 내려온 건 꿍꿍이가 있어서란 걸 알아챘다. 그건 백도경이 그렇게 자랑을 하는 서도운의 애인과 관련된 일이 분명했다.

휴대폰이 없어진 걸 안 백도경은 야단법석을 떨었다. 펑펑 우는 아이를 능청스럽게 달래는 서도운을 보며 이명진은 기가 막혔다. 서도운이 뻔뻔한 놈인 건 알았지만 애지중지 아끼는 조카에게까지 태연하게 거짓말을 할 줄은 몰랐다.

“도경이는 네가 데리고 다니면서 좀 달래줘.”

서도운의 말에 이명진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한 번도 너한테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처음으로 한마디만 할게. 도운아, 네 욕심과 감정으로 다른 사람까지 다치게 하지 마. 결국 다 네 업으로 돌아와.”

이명진은 회의실 문을 닫으며 커다란 테이블 앞에 홀로 앉아 있는 서도운을 쳐다봤다. 노트북 화면을 보고 있는 서도운의 얼굴에는 기이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언제나처럼 보는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그런 웃음이 아니었다.

섬뜩함에 서도운이 전 애인들에게 신체적 위해만은 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앞으로도 제발 그러기를 바라며 조용히 회의실 문을 닫았다.

회의실 문 앞에 서서 메인 침실 쪽을 쳐다보며 귀를 기울였다. 조그맣게 들리는 백도경의 울음소리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머쓱하게 뒷머리만 매만졌다.

* * *

서도운도 이명진도 입학할 때부터 유명했다.

서도운의 외할아버지와 어머니, 누나까지 모두 같은 과 동문이라는 것과 TV 화면에서 튀어나온 듯한 화려한 외모는 눈에 띄지 않으려고 해도 그럴 수 없었다. 이명진도 국내 3대 제약 회사 중 하나의 막내아들이라는 사실이 알려져, 입학 전부터 관련 학과의 교수들은 모두 그의 이름과 얼굴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 해 입학한 이들 중 가장 눈에 띄는 배경을 가지고 있었고, 대학 생활은 어릴 때부터 익혀온 사교적이고 가식적인 인간관계의 연장선이 되었다. 웃는 얼굴로 악수를 청하는 눈치 빠른 이들과 친인척의 이름을 대며 인맥을 찾는 이들까지, 단 며칠 사이에 그들은 동기들 사이에서 기름처럼 떠올랐다. 도저히 섞일 수가 없었다.

이명진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경원시되고 있는 서도운을 보았다. 그러나 서도운은 그런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이제 갓 스무 살을 넘긴 미성숙한 이들이 내뿜는 감정을 능숙하게 받아주고 피해갔다. 서도운도 자신도 섞일 수 없는 기름이었지만, 그 의미가 다른 듯했다.

이명진은 물 대신 기름에게 손을 내밀었다. 서도운은 그가 내민 손을 잡으며 자신이 ‘게이’라고 말했다. 그는 ‘중’이 되려고 1년 정도 절에 들어가 있다가 잡혀 왔다고 대답했다. 그는 서도운의 성 정체성에 신경 쓰지 않았고, 서도운은 그의 종교에 신경 쓰지 않았다. 두 사람은 꽤 잘 맞았고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서도운과 친구가 된 이명진은 서도희가 유학 가기 전에 그녀를 소개받았다.

입학 때부터 ‘수의학과의 전설’이라 불리던 서도희는 할 말을 잃게 만드는 미녀였다. 남매가 함께 있으면 드라마 속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그들을 ‘신의 특혜를 받은 남매’라고 말했다.

두 사람을 실제로 겪은 이명진은 그 말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남매는 공부만이 아니라 사업적 재능도 뛰어났다. 외모뿐만 아니라 머리도, 성격도 완벽했다. 타인의 위에 군림해 세상을 살아가는 게 당연한 인간으로 보였다.

묘한 건 두 사람의 관계였다. 이명진은 아들뻘 되는 막냇동생인 자신과 형들의 관계도 평범하지는 않다고 생각했지만, 서도희와 서도운의 관계도 평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남매는 각별하게 사이가 좋았다. 서도희는 다섯 살 아래의 남동생을 품 안의 자식처럼 대했고, 서도운은 누나를 숭배했다.

친구로 지낸 십여 년 동안 이명진은 두 사람이 사소한 말다툼을 하는 것도 본 적이 없었다. 그가 불교의 교리에 심취해 그에 따라 삶을 살아가려 하듯, 서도운은 서도희의 뜻을 절대 거스르지 않았다. 남매가 때때로 작은 목소리로 대화하며 눈빛을 주고받을 때는 그들의 어머니도 끼어들지 못했다. 그들의 어머니는 그런 모습을 애달프게 쳐다봤다.

이명진은 세 사람을 보며 타인은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했다. 남편도 자식도 버리고 비구니가 되어버린 그의 어머니처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가족에게는 그들 나름의 사정이 있기 마련이었다.

서도희가 누군가와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다는 소문은 그가 입학할 때부터 있었다. 그 역시 그 소문을 들었고 그것이 사실인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교육받은 사교적인 언행의 첫 번째는 호기심을 감추고 입 밖으로 내지 않는 법이었다.

궁금증은 어느 날 서도운이 서너 살짜리 아이를 안고 나타남으로 해결되었다.

서도운은 그 아이를 조카라고 소개했다. ‘전설’이라고 불리는 서도희의 딸은 작은 인형 같았다.

졸업할 때까지 서도운은 틈만 나면 조카를 데리고 학교에 와 품에 안고 수업을 듣고 쉬는 시간에는 기저귀를 갈고, 우유를 먹였다.

문제가 될 법도 했지만 ‘서도희’의 딸이기에 교수도 다른 학생도 입을 다물었다. 우습게도 아이를 데리고 수업을 듣는 서도운의 모습은 진보적이고 양성평등한 모습이라 소개되었다.

아이가 예뻐서, 혹은 서도운이나 서도희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아이와 친해지려 노력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아이는 서도운의 손길 외에는 모두 거부했다. 울지도 않고 보채지도 않았다. 진짜 인형처럼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았다.

어디선가 ‘서도희의 딸은 자폐아’고 ‘딸을 버리고 미국으로 갔다’라는 말이 나왔다. 소문은 순식간에 사람들 사이에서 퍼지고 서도운의 귀에도 들어갔다.

화를 낼 줄 알았다. 서도운이 자신의 누나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기에 모욕으로 받아들이리라 생각했지만, 서도운은 완벽한 기름이었다. 수면 아래에서 무슨 말을 하든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여왕처럼 군림하던 서도희와 다르게 아이는 수줍고 낯가림이 심했다. 아이는 늘 서도운과 함께 붙어 다니는 그가 눈에 익자 조그만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인형처럼 예쁜 아이는 서도운을 ‘아빠’라고 불렀다. 서도운은 그 말을 들으며 기뻐했다.

그 모습을 보며 가슴 속에 번진 것은 본능적인 거부감이었다. 너무나 사이가 좋은 남매이기에, 서도희의 남편이 누구인지 모르기에, 혹시나 하는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애 아빠가 들으면 싫어하겠어. 삼촌이라고 고쳐줘.”

그의 말에 서도운은 씁쓸한 얼굴로 웃었다.

“어차피 나이가 들면 삼촌이라고 부를 거야. 도경이가 날 아빠라고 부르는 건 잠깐이야. 내가 아빠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건 아마 지금뿐일 걸…….”

이명진은 그때에서야 서도운이 ‘게이’라는 것을 체감했다.

지금까지는 서도운이 게이라는 걸 알았지만 전혀 실감하지 못했다. 그저 흔치 않은 성향이라고, 개성이라고 가볍게 여겼음을 알았다. 그제야 서도운의 삶이 어떤 것인지 느껴졌다.

기름은 물이 될 수 없었다.

서도운도 그도 물이 될 수 없었다.

그들은 기름이기에 섞일 수 없었다.

세상을 뒤집어 흔들어도 그들은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나도 엄마를 엄마라고 안 불러. 우리 엄마……, 내가 열두 살 때 머리 깎고 절에 들어갔거든.”

“그럼 뭐라고 불러?”

“스님.”

서도운은 고개를 끄덕였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를 동정하는 눈빛을 보내지도 않았고 집안 사정을 묻지도 않았다.

그날 이후 이명진은 서도운과 진짜 친구가 되었다.

* * *

이명진은 메인 침실의 반쯤 열린 문 사이로 머리를 집어넣고 방안을 살폈다. 침대 위에 봉긋하게 말린 이불 더미를 보니 절로 ‘아이고’ 소리가 나왔다.

“꼬맹아, 다 울었어?”

이불 속에서도 용케 그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백도경이 머리를 내밀었다.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산발을 한 백도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들어간다?”

소녀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코가 퉁퉁 부어 빨갛게 변해있었다.

“아주 엉망이구만.”

이명진은 욕실로 가서 찬물에 수건을 적셔와 내밀었다. 수건을 받아 얼굴을 닦던 백도경이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또 왜 울어?”

“히잉……, 삼촌이… 나 친구 없다고, 폰 필요 없다고….”

“그렇게 말했어? 이야, 서도운 이거 아주 나쁜 놈이네.”

“아니, 나쁜 놈은 아닌데…. 히이잉, 나 친구 많아. 인친도 친구잖아…….”

그는 수건에 얼굴을 파묻고 훌쩍이는 백도경의 등을 토닥였다. ‘신의 특혜를 받은 여자’라고 불리는 서도희와 달리 아이는 모든 것이 서툴렀다. 

낯가림이 심하던 아이는 십여 년이 지금도 여전했다. 낯선 사람을 보거나 낯선 장소에 가면 제 삼촌의 등 뒤에 숨어 나오지를 않았다.

“요즘엔 인친도 친구 맞아. 내가 폰 사줄까?”

“……삼촌이 사줘도 된대?”

서도희와 다르다고 해서 바보란 뜻은 아니었다. 백도경은 분위기를 잘 읽고 눈치가 빨랐다. 그가 답하지 못하자 조그만 입을 삐죽이며 눈을 흘겼다.

“명진 삼촌은 이기지도 못하면서 센척해.”

“걔가 못돼서 그래.”

“삼촌은 못된 거 아냐. ……화내면 좀 무서운 것뿐이야.”

백도경이 코를 훌쩍이며 종알거렸다.

이명진은 잔뜩 맘이 상했으면서도 서도운의 편을 드는 아이의 모습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좀 무서운 게 아니지. 걔가 화를 내면 누구 하나는 관에 들어가. 네 삼촌은 위험인물이야.”

남매는 언성을 높이거나 폭력을 휘두르지는 않았다. 웃으며 누군가의 인생을 망가뜨렸다. 그나마 서도희가 법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인다면 서도운은 그런 한계도 없었다.

“그 사람들이 잘못했잖아. 삼촌을 두고 어떻게 바람을 피워? 그건 화내도 되는 거야!”

백도경은 잔뜩 토라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바람피우는 건 세상에서 제일 나쁜 짓이야. 동물 학대만큼 나쁜 거란 말이야! 성경에는 바람피우면 안 된다고 적혀있다는데 불경에는 그런 거 없어?”

서도운의 결백을 주장하는 백도경의 말에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바람피우는 건 천벌 받을 짓이지.”

“맞아, 당연히 천벌을 받아야지! 근데, 이젠 괜찮아. 선우 삼촌은 그 사람들이랑 다르거든.”

“어떻게 다른데?”

이명진의 물음에 백도경의 얼굴 가득 미소가 맺혔다.

“선우 삼촌은 ‘예쁘다’만 해줘야 하는 사람이야.”

그는 서도운의 새로운 애인을 떠올렸다. 백도경이 휴대폰으로 보여준 남자는 남매와 견주어도 지지 않을 정도의 미남이었다.

“엄청나게 잘생긴 건 맞지.”

“얼굴 말고, 애들한테 하는 거…….”

백도경의 작은 손이 수건을 안고 쓰다듬었다. 이명진은 그것이 개나 고양이를 품에 안고 어르는 행동이란 걸 알아채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우 삼촌은 진짜 예뻐. 눈이 반짝반짝해. 삼촌만 보고 있다가 삼촌이 움직이면 졸졸 따라다녀.”

아이가 말하는 건 사람이 아니라 개나 고양이 같았다. 어리둥절한 그의 얼굴이 우스운지 아이는 키득거렸다.

“선우 삼촌이 먼저 좋아했고 훨씬 더 좋아해. 선우 삼촌은 정말 삼촌을 좋아해.”

백도경의 목소리에는 애정과 자랑스러움이 잔뜩 담겨있었다.

“삼촌이 전에 사귄 사람들은 나한테 삼촌이 뭘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물었거든. 근데 선우 삼촌은 그런 걸 한 번도 물은 적이 없어. 선우 삼촌은 삼촌이 가지고 있는 걸 좋아하는 게 아니야. 그냥 삼촌이 좋은 거야.”

이명진은 멍하니 열다섯 살의 아이를 쳐다봤다. 그저 눈치가 빠르다고 생각했던 아이는 놀랄 만큼 정확하게 사람을 구분하고 있었다.

“……도경이가 사람 보는 눈이 좋구나.”

웃음으로 답하는 백도경의 얼굴에는 남매의 흔적이 짙게 드러났다.

늘 곁에 있던 아이의 얼굴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어리다고 생각했던 아이는 더 이상 어리지 않았다.

걸음마도 하지 못하는 아이를 안고 수업을 듣던 서도운이 떠올랐다. 세월이 흘러 아이는 어른이 되었지만 서도운은 여전했다. 더없이 화려하고 매력적이며 깔끔한 남자였다.

이명진은 그런 서도운이 뱀 같다고 생각했다.

꽃 덤불 아래에 몸을 숨기고 있는 뱀은 꽃처럼 아름다운 무늬의 비늘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맹독을 가지고 있다는 표시였다.

뱀은 자신이 품고 있는 것을 건드리면 누구도 예외 없이 물어뜯었고 주위에는 시체가 장식품처럼 쌓여있었다.

누구든 죽일 수 있는 치명적인 독을 가지고 있다 해도, 뱀은 연약한 변온동물이었다.

변온동물이란 스스로 체온을 유지할 수 없기에, 뜨거우면 피가 끓어 죽고 추우면 얼어 죽었다.

그들에게 겨울잠이란 죽지 않기 위해, 죽음과 가까운 가사 상태로 잠드는 것에 불과했다. 잔뜩 몸을 불려 잠든 채 봄을 기다리는 온혈동물과는 달랐다.

그들에게는 사물이 어떤 형태를 지녔는지, 어떤 색을 띠고 있는지 중요하지 않았다. 뱀의 눈에 보이는 세상은 차가운 것과 따뜻한 것이었다.

서도운도 그랬다.

잘생기고 돈 많고 사교성이 좋은 남자는 타인이 주는 사랑을 당연하게 여길 것 같았지만, 언제나 겸손하게 굴었다.

서도운은 사랑받기 위해 심장도 호흡도 멈추는 뱀처럼 저 자신을 죽였다.

뱀과 같은 남자는 살기 위해 자신만의 태양을, 따뜻한 몸을 가진 누군가를 찾아 헤맸다.

이명진은 ‘예쁘다’만 해줘야 하는 남자를 떠올렸다. 열다섯 살 소녀의 눈에 개나 고양이로 보이는 남자는 서도운이 원하던 그런 존재일지도 몰랐다.

병원 근처에 있는 건물에서 동물들의 울음소리가 거슬린다고 항의를 하자 남매는 주위 건물을 모두 사들이는 것으로 민원을 해결했다. 그중 병원 바로 뒤에 있는 빌라는 수의사나 수의테크니션이 교육을 받으러 왔을 때 머무르는 숙소였다.

그 빌라의 제일 위층에 서도운의 집이 있었다. 그곳은 서도운에게 아주 특별한 곳이었다.

서도운은 가끔 하얗고 커다란 개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누군가 결혼해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미래를 말하듯, 서도운은 하얗고 커다란 개와 함께 하는 삶을 말했다. 이명진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서도운이 삶의 동반자로 사람이 아닌 ‘개’를 선택한 것을 알았다.

함께할 개를 위해 집 구조를 변경하고 가구를 주문했다. 모든 것을 그 개를 위해 준비했다.

그 집은 서도운이 그 개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 준비한 집이었다.

서도운은 그 집의 열쇠를 한 남자에게 줬다.

“도경아, 정선우 씨랑 도운이랑 잘 될 것 같아?”

“응.”

백도경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근데 엄청 웃겨. 삼촌도 좋아하면서 안 그런 척해.”

“서도운이 그런다고?”

“응, 혼자 있을 때도 입꼬리가 실룩실룩거려.”

“진짜?”

“근데 선우 삼촌이 겁이 많아서 어쩔 수 없어. 선우 삼촌을 보면 나도 만지고 싶어서 손이 근질근질하거든. 참느라고 힘들어 죽겠어.”

이명진은 정선우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실은 ‘개’일지도 모른다는 실없는 생각을 했다.

“도경아, 정선우 씨가 하얗고 커?”

“응, 키도 크고 피부도 하얗고 깨끗해.”

“개가 아니라 사람 맞지?”

백도경은 그의 말에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명진 삼촌, 바보야? 내가 사진도 보여줬잖아.”

“바보라니, 너무한데.”

그가 토라진 척 고개를 돌리자 백도경은 답삭 안겨들며 웃었다.

이명진은 울어서 잔뜩 부은 얼굴을 쓰다듬으며 품 안의 아이가 천천히 어른이 되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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