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흐린 세상을 더듬는 손
백도경과 이명진은 씨앗 호떡집의 원조가 어디냐를 두고 벌써 30분째 현관에서 다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자신이 본 곳이 원조라며 각자의 의견을 전혀 굽히지 않았다. 의미 없는 다툼은 씨앗 호떡 외에 먹기로 한 다른 맛집의 메뉴로 번져, 둘은 서로의 입맛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완당 만드는 거 동영상 봤지? 딱 봐도 먹고 싶어지잖아.”
“싫어, 난 안 먹고 싶어.”
“어우, 입맛이 완전히 애야, 애.”
“애니까 입맛도 애지! 명진 삼촌 입맛은 완전 할배거든!”
“할배? 내가 어떻게 할배야?”
“그럼 할매야?”
“우와, 백도경……, 너 진짜!”
“왜, 할배라고 해서 억울해? 억울하면 늦게 태어나지 그랬어? 왜 일찍 태어나서 그렇게 나이를 먹었어?”
갑자기 회의실 문이 열리고 서도운이 밖으로 나왔다. 현관에 선 두 사람을 발견하고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 서울로 가려면 뭐가 제일 빨라?”
이명진이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어물거리자 백도경이 그의 손에서 휴대폰을 낚아채고 화면을 두드렸다.
“KTX. 2시간 반 걸린대.”
“좌석은?”
“주말이라 입석밖에 없어.”
백도경의 대답에 서도운은 다시 회의실로 들어가 외투와 가방을 챙겨 나왔다. 이명진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뛰어나가는 서도운의 뒤를 쫓았다.
“왜? 병원에서 급하대? 뭐 문제 생겼어?”
“병원 일 아냐.”
“어머니나 도희 누나한테 무슨 일 생겼어?”
“그런 거 아냐. 도경이 좀 챙겨줘.”
“야, 대체 뭔데?”
서도운은 그의 물음을 무시하고 엘리베이터 문을 닫았다.
“이것 봐, 내 말이 맞지? 내가 말한 곳이 원조라잖아!”
얼빠진 표정으로 선 이명진의 코앞에 백도경이 휴대폰을 내밀었다.
“뭐가?”
“씨앗 호떡.”
“아…….”
그녀는 멍청하게 선 그를 지나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그럼 내가 말한 곳에 가는 거지?”
“어딜?”
“씨앗 호떡.”
백도경이 천진하게 웃으며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타자 그도 멍하니 뒤를 따랐다.
“도경아, 네 삼촌이 정신이 나간 것 같은데 걱정 안 돼?”
“무슨 걱정?”
“쟤 지금 이상하잖아.”
“아, 명진 삼촌은 연애를 안 해봐서 모르겠네. 사랑에 빠지면 다 저래.”
싱글거리며 말하는 백도경의 모습에 이명진은 기가 찼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다급하게 반박했다.
“야아, 내가 나이가 몇인데! 당연히 해봤지.”
“불제자가 되려면 속세의 인연은 맺으면 안 된다고 했잖아.”
백도경이 샐쭉한 표정으로 눈을 흘기자 그는 어린 소녀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그, 그건 그렇지…….”
“삼촌이 여자 손이라고는 내 손밖에 잡아본 적 없는 동정이라도 괜찮아. 난 순결한 명진 삼촌이 좋아.”
백도경의 말에 엘리베이터 한쪽 구석에 서 있던 벨보이가 얼굴을 가리고 웃었다. 그는 엘리베이터가 도착할 때까지 내내 시뻘게진 얼굴로 반야심경을 중얼거렸다.
엘리베이터가 플로어에 멈추자 작은 소녀는 발랄한 걸음으로 앞장섰다. 이명진은 팔랑거리며 앞서가는 백도경의 뒤를 따르며 앞으로 서씨 남매와 백씨 부녀의 일은 절대 걱정을 않기로 했다. 더불어 서도운의 연애가 순탄하지 않기를 마음을 다해 빌었다.
* * *
서도운은 열차에 오르고 나서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열린 문밖으로 자신의 좌석을 확인하며 달려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캐리어 바퀴가 시끄럽게 울리며 자그마한 체구의 중년 여성이 다급하게 그가 서 있던 통로로 달려왔다.
중년 여성은 숨을 헐떡이며 열차의 출입구의 계단 위로 캐리어를 올리려 했다. 커다란 캐리어는 그녀가 들기에는 벅찬지 계단 턱에 부딪혀 미끄러졌다.
서도운은 계단을 내려가 캐리어를 들어 열차 통로에 내려놨다. 갑작스러운 도움에 당황하던 중년 여성은 그가 부드럽게 웃어 보이자 이내 함께 미소를 지어 보이며 열차에 올라탔다.
그녀가 마지막 승객이었는지 열차의 문이 일제히 닫혔다. 흔들리던 열차가 점차 속도를 올리며 부드러운 진동으로 바뀌었다.
그는 흔들리는 벽에 기대서 이리저리 시선을 옮기다가 작은 창으로 보이는 풍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모든 것이 빠른 속도로 뒤로 밀려가고 있었다. 혹은 아주 빠른 속도로 앞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2시간 42분.
2시간 42분 후에는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서울역에서 빌라까지 또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생각했다.
4시간, 적어도 4시간 동안은 아무 일도 없기를 바랐다.
그가 도착할 때까지, 곁에 갈 때까지.
열차가 터널을 지나가면서 창은 검은 거울처럼 변해 그의 모습을 비췄다.
사람들은 그의 껍데기를 좋아했고, 웃고 있는 얼굴 껍데기는 특히 더 좋아했다.
그는 그저 남들보다 좀 나은 껍데기를 가진 쓰레기일 뿐이었다. 환하게, 다정하게 웃고 있는 얼굴을 거울로 볼 때마다 역겨웠다. 외모를 칭찬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웃음으로 답하면서도 신물이 올라왔다.
쓸 만한 껍데기를 이용해 편하고 쉽게 사는 게 싫으면서도 가진 것을 이용하는 게 뭐가 나쁘냐고, 그렇게 타고났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정선우에게 다가갈 때도 그 껍데기를 이용했다.
시선을 맞추고 웃어주면 정선우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다 결국은 그를 보며 웃었다.
수줍고 여린 미소였다.
목적과 의도를 가진 자신의 웃음과는 달랐다.
그에게 ‘반짝반짝’하다고 말하던 정선우가 떠올랐다.
어디가 반짝이는 걸까 물어보고 싶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반짝이는 건 자신이 아니라 정선우였다.
자신 못지않게 좋은 껍데기를 가졌지만, 정선우는 얼굴이 보이지 않게 푹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인지 얼굴보다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 보이는 귀와 늘 무언가를 만지작거리는 손가락이 더 눈에 익었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달아오른 귀와 손가락으로 어떤 표정인지 환하게 보였다.
모든 것이 환하게 보였다.
정선우는 그림자도 투명한 유리 같았다.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열차가 멈춰서기에 그는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정차역을 확인했다. 대구였다.
아직 한 시간도 지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초조해졌다.
제때 서울에 도착할 수 있을까. 멈췄던 열차가 출발하자 불안했던 마음이 다시 가라앉았다.
1분, 1분, 1분…….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보고 있다가 결국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시계를 본다고 해서, 시간을 확인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달리는 열차 안에서 발을 굴러도 더 빨리 서울에 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답답한 마음에 주머니 속 휴대폰을 만지작대다 손을 뺐다.
왜 전화를 하지 않았을까…….
정선우가 전화를 걸어 힘들다고, 보고 싶다고 말했다면 당장 서울로 갔을 것 같았다.
그러나 정선우는 그의 집으로 온 이후, 하루에 한 통씩 두 번, 그에게 전화를 했다. 벨은 길게 이어지지도 않았다. 단 두 번, 그렇게 짧게 울리는 것으로 끝날 줄 알았다면 받았을지도 모른다.
돌이켜 보면 정선우는 한 번도 그에게 먼저 전화를 한 적이 없었다.
항상 전화도 그가 걸고 메시지도 먼저 보냈다. 정선우는 그가 건 전화를 받고 그가 보낸 메시지에 답을 했다.
다들 그가 선택한 순간부터 그를 찾았다. 그의 돈을 찾든, 그와 섹스를 원해서든, 그의 영향력을 바라서든 그를 찾았다.
그러나 정선우는 그를 찾지 않았다.
대전에서 멈춰 섰던 열차가 다시 출발했다. 부산에서 출발한 지 1시간이 지나있었다.
지금까지 열차를 타고 다니는 동안 출발하는 역과 도착하는 역 이외에 다른 걸 신경 쓴 적이 없었다. 어디에 멈춰 서고 얼마 동안 멈춰있는지, 그런 건 알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알고 싶지 않아도 눈에 들어왔다. 매시간 바뀌는 작은 창밖에 보이는 풍경, 통로의 문을 열고 지나가는 사람의 얼굴, 열차가 속도를 줄이고 멈추는 역들의 모습이 모두 머릿속에 박혔다.
누군가 통로 문을 열고 나오며 객차의 더운 공기가 흘러나왔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의 몸에 밴 공기는 따뜻했지만 답답하고 무겁게 느껴졌다. 벽에 몸을 기대자 등을 타고 금속의 한기가 전해졌다. 속도를 올린 열차의 부드러운 진동이 몸을 울렸다.
어째서 정선우는 그를 찾지 않을까…….
이전에 사귀었던 이들의 행동을 떠올렸다.
그가 일이 바쁘다며 처음 곁을 비웠을 때는 그들도 기다렸다. 그러나 홀로 두는 시간이 반복되자 결국은 배신했다. 배신의 증거를 들이밀며 헤어짐을 요구했을 때 순순히 받아들인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를 탓하며 울부짖고 악을 쓰고 난동을 부렸다.
동물병원까지 쫓아와 난리를 부리는 이가 있었기에 누구에게도 일하는 곳을 알려주지 않았다. 아무리 오픈한 게이라고 해도 사적인 일로 병원을 어지럽히고 싶지 않았다.
정선우는 처음부터 사적인 관계가 아닌, 공적으로 얽힌 관계였다.
백경의 번호는 물론, 누나인 서도희의 번호도 모두 가지고 있었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 찾으려고 하면 전화 한 통으로 알 수 있었다.
게다가 그가 어디서 일하는지도 알고, 지금 정선우가 있는 곳은 동물병원과 소방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동물병원으로 걸어가 그를 찾으면 알려줬을 텐데, 정선우는 그를 찾기 위해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정선우는 서도운이 어디에, 누구와 있는지 궁금하지도 않은 것 같았다.
갑자기 정선우의 행적을 모두 알고 있는 자신이 우스워졌다.
이전에 사귀었던 이들처럼 정선우의 휴대폰을 복제하고, 위치를 확인하고, 누구와 연락하고 누구와 만나는지 모두 지켜봤다. 정선우가 자신 외에는 누구와 연락하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내심 기뻐했다.
정선우에게는 서도운뿐이었다.
그럼 자신을 찾아야 했다. 애타게 자신을 찾아 헤매야 했다.
굳은 눈가를 문지르며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곧 천안이었다. 답답한 한숨이 나왔다.
문이 열리고 승무원이 음식을 실은 카트를 밀고 나타났다.
그제야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무언가 먹어야 한다는 건 알지만 식욕이 없었다.
생수 한 병을 사서 조금씩 마시며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남자를 생각했다.
안락하게 있기를 바라며 모든 걸 준비해놨는데 어째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손재주가 없는 정선우를 위해 간단하게 전자레인지만 돌리면 먹을 수 있는 음식과 좋아하는 것들로 냉장고를 채웠다.
누군가를 사귈 때면 그들이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음식들을 파악해서 집을 관리하는 이들에게 부탁해 준비해줬다. 그들은 설거지도 청소도 할 필요가 없었다.
그건 정선우도 마찬가지였다. 낯선 사람에게 예민한 정선우를 위해 집안일은 두 사람이 모두 집을 비웠을 때만 이뤄졌다.
그의 연인들은 그가 제공한 집에 머무르며 그의 돈을 쓰고, 그가 함께 시간을 보내길 원할 때 함께 있어 주면 될 뿐이었다.
합리적이고 공정한 관계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은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듯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멈췄던 열차가 천안역을 출발하자 다시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조금만 기다리면 서울이었다.
서도운은 침대 가에 가만히 앉아 있던 정선우의 모습을 떠올렸다.
정선우는 가리는 음식이 많았지만,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음식을 먹여보고 반응을 관찰해야 알 수 있었다.
날것이나 비린 음식은 못 먹지만, 입안에 상처가 없으면 매운 것도 곧잘 먹었다. 느끼한 것보다는 산뜻한 맛을, 과일이나 달달한 디저트를 아주 좋아했다.
셋이서 점심을 할 때면 백도경은 풍성하게 디저트를 주문해 정선우에게 이것저것 먹어보라고 권했다. 군말 없이 받아먹는 걸 보고 억지로 먹는 게 아닐까 걱정했는데, 그와 단둘이 식사를 할 때도 디저트는 말끔히 먹는 걸 보고 좋아한다는 걸 알았다.
그 후로는 디저트가 없는 음식점에 갈 때는 따로 디저트를 샀다. 식사를 마치고 상자에서 작은 케이크들을 꺼내면 정선우는 당황해 얼굴을 붉히면서도 웃음기 어린 입매를 감추지 못했다.
집을 비우며 정선우가 좋아하는 제과점의 케이크를 주문했다. 집을 관리하는 이들은 정선우가 오든, 오지 않든 디저트를 새로 사서 넣어 놨다.
그는 정선우가 케이크를 발견하고 기뻐하길 바랐지만, 설마 냉장고 문을 아예 열지도 않을지는 몰랐다.
손이 없는 듯, 정선우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마치 커다란 개처럼…….
일순간 모든 생각이 멈췄다.
“서울까지 가세요? 전 여기서 내려요.”
누군가의 목소리에 깨어났다. 부산역에서 열차에 타는 것을 도와준 중년 여성이 옆에 서 있었다.
“……네.”
“탈 때는 워낙 급해서 제대로 인사도 못 했네요. 도와줘서 고마워요.”
그는 멍하게 있다 그녀가 계단을 내려서자 다급하게 캐리어의 손잡이를 쥐었다.
“어머나, 괜찮아요!”
손을 내젓던 중년 여성은 한순간에 바닥에 내려진 캐리어를 쫓아 열차에서 내렸다.
“아유, 고맙다고 인사하려다가 또 폐를 끼쳤네요. 정말 고마워요.”
그녀는 머쓱하게 웃더니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사라졌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광명, 이제 15분 후면 서울이었다.
가슴이 술렁였다.
갑자기 숨이 막혀 와 심호흡을 하며 벽에 기댔다.
그는 정선우에게 기다리라고 했지, 찾으라고 하지 않았다.
찾으라고 말했다면, 당연히 찾아왔을 것 같았다. 마치 그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는 개처럼, 그를 찾아왔을 것 같았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의 집은 정선우의 집이 아니었다. 그곳은 서도운이 있을 때만 정선우에게 의미가 있는 공간이었다. 서도운이 없는 그의 집은 단지 기다림을 허락받은 공간일 뿐이었다.
그가 지금처럼 아무런 연락도 없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그의 집에서 느긋하게 먹고 마시고 푹 쉬면서 기다리라고 했다면, 지금처럼 먹지도 자지도 않고 그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그 말을 그대로 따랐을 것 같았다.
눈가를 문지르다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얼굴을 가렸다.
정선우는 개가 아니었다. 자신의 개가 되어주기를 바랐지만, 그건 단지 희망일 뿐이었다.
사람은 믿을 수 없으니 개를 원했다.
사람은 언젠가는 배신하니 개를 원했다.
정선우는 개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개’가 되기로 한 것 같았다.
* * *
서도운은 열차가 정차하고 문이 열리자 달려나갔다. 정류장에 늘어선 택시에 다급하게 올라탔다. 동물병원 위치를 말하고 창밖을 바라봤다.
차창에 자신의 얼굴이 사라졌다 나타나길 반복했다. 낯선 얼굴에 손을 들어 만졌다. 까칠한 피부와 돋아난 수염이 어색했다.
눈가를 문질러 굳은 얼굴을 폈다. 입가를 움직여 슬며시 웃었다. 차창에 비치는 흐릿한 그림자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정선우가 좋아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반짝반짝’해야 했다.
정선우를 묶어두려면 그래야 했다. 그걸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었다.
손에 든 목줄도 숨기고,
얼굴에 드러난 욕심을 지우고,
선량하고 다정한 미소만 지어야 했다.
그는 자신의 가슴에 있는 욕망의 형태가 그리 아름답지 않다는 걸 알았다. 음습한 꽃은 집착이라는 더러운 향기도 풍겼다.
정선우의 여린 영혼이 그것을 견뎌내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놔줄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정선우는 그의 것이었다.
정선우의 삶을 뒤흔들어 자신의 곁에 있어야만 안전하다고 속삭이고 싶었다.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었다.
간신히 서 있는 남자의 발밑을 없애 자신의 품 안에 떨어뜨리고 싶었다.
다정하게 안아줄 수 있었다.
그의 검고 깊은 틈 사이에 밀어 넣어 영원히 가둬버리고 싶었다.
영원히 사랑해줄 수 있었다.
정선우는 그를 원했고 그도 정선우를 원했다. 문제 될 건 아무것도 없었다.
꽃처럼 웃으며 꿀 같은 말을 속삭이고, 부끄러워할 만큼 귀여워해 주고,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키스를 해줄 수 있었다. 그럼 정선우가 붉어진 얼굴로 헐떡이며 그를 원한다고 말할 테고 그는 웃으며 나도 그렇다고 말하면 끝이었다.
웃음을, 기쁨을 참을 수 없었다.
동물병원 앞에 도착한 택시에서 내리며 말려 올라가는 입매를 감추려 입가를 가렸다.
그를 기다리다 지쳐 쓰러진 개였다. 토라져서 성을 낼지도 몰랐다. 무엇으로 달래야 원망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따뜻한 담요로 몸을 감싸 토닥여주고, 달콤하게 입을 맞추며 미안하다고 속삭이고, 맛있는 걸 먹여줘야 할 것 같았다.
그런 건 아주 쉬웠다. 얼마든지 해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