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 어항 속 물고기 (26/35)

26. 어항 속 물고기

눈을 뜬 서도운은 나이트 테이블 위에 올려둔 휴대폰을 들어 날짜와 시간을 확인했다.

곁에 누운 정선우는 깊이 잠든 듯 보였다. 정선우의 고른 숨소리를 듣고 있으니 다시 잠들 것 같아 얼른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샤워를 하며 무리한 곳을 더듬었다. 부어오르긴 했어도 찢어지지는 않아 며칠 불편하기는 해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입구를 확인하고 손가락을 넣어 안을 가득 채운 정액을 빼내는 내내 한숨이 흘러나왔다.

섹스 후 뒤처리도 하지 않고 잠들어버리다니, 그답지 않았다. 그렇게 따지면 콘돔을 쓰지 않은 섹스도 그답지 않았고, 아픔을 무릅쓰고 삽입을 한 것도 그답지 않았다. 온통 그답지 않은 것들로 넘쳐났다.

서도운은 다시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성기를 내려다봤다. 정선우의 성기를 넣을 때 느꼈던 통증이 떠오르며 지금까지 자신이 삽입한 남자들에게 괜히 미안해졌다.

정선우의 성기를 처음 보는 것도 아니고 눈을 감으면 그 형태나 크기를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익숙했다. 그러나 실제로 뒤에 넣는 건 다른 문제인 것 같았다. 피스트 퍽을 하는 인간들의 애널은 대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구경이라도 하고 싶었다. 분명 그와는 애널 구조가 다른 게 분명했다.

그는 자신에게 고통이나 위해를 가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섹스도 마찬가지였다. 아픔을 즐기지도 않았고 그런 것으로 쾌감을 느끼는 일도 없었다.

정선우와의 섹스는 지독하게 아팠다. 너무 아파서 발기했던 성기가 사그라들 정도였다. 그는 그런 고통을 스스로 택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더 신기한 건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다시 하려고 한다는 사실이었다.

서도운은 그런 자신이 우스워서 헛웃음을 지었다.

섹스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저 타인과 시간을 보내는 방법 중 하나였고, 부정적인 감정을 잊고 몰두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그러나 정선우와의 섹스는 달랐다. 기꺼이 고통과 불편을 감수할 만큼의 쾌감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욕실 밖에서 소리가 들린 것 같아 서도운은 물을 잠그고 유리문 밖을 쳐다봤다. 정선우가 일어나 자신을 찾는 게 아닐까 걱정스러워 마음이 급해졌다.

샤워를 끝내고 머리를 말리려다 드라이기 소리에 불쾌해하던 정선우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드라이기를 내려놓고 수건을 더 꺼내 머리카락을 문질렀다.

욕실을 나오며 습기가 남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정선우는 여전히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침대 가에 앉아 정선우를 내려다보고 있으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침대에서 잠든 연인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가 사귀는 이에게 집을 내주면, 그들은 그의 카드로 침대와 가구들을 채워 넣었다. 서도운은 그들의 침대에서 섹스를 하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들의 집은 그의 공간이 아니었고 그들의 침대는 그의 침대가 아니었다.

사귀는 사이라고 해도 늘 철저하게 분리되어있었다. 자신의 공간에 누군가를 들인 적도 없고 그들의 공간에 그가 들어간 적도 없었다.

이제 정선우는 그의 집에서 그를 기다리고, 그의 침대에서 그와 섹스를 하고 그와 함께 잠들 거라고 생각하니 이상한 기분이 들어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이불 속은 정선우의 온기로 가득했다. 서도운은 곁에 누운 자신의 연인을 끌어안았다.

벌거벗은 몸을 맞대고 할 수 있는 건 섹스뿐이었다. 그러나 섹스를 하지 않아도, 성적인 의미가 없어도, 드러난 피부를 통해 체온을 느끼는 행위는 충분히 기분이 좋았다.

그는 정선우의 등을 어루만지며 가만히 규칙적인 숨소리를 들었다.

그저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것뿐이었지만, 살아있다고 간절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외치는 것 같았다. 그 외침에 답을 해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어떤 답을 해줘야 할까 생각했다.

꼭 감은 눈꺼풀 끝에 매달린 가지런한 속눈썹을 보자 그것이 천천히 젖어 들어가던 모습이 떠올랐다.

눈동자가 눈물에 일렁이며 번지면 세상이 젖어 들고 모든 것이 반짝이는 물결 아래 가라앉았다. 정선우가 눈을 깜박이고 눈물이 흘러내릴 때까지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꼭 마법 같았다.

서도운은 정선우의 얼굴에 손을 가져가 조심스럽게 속눈썹을 쓰다듬었다.

손끝에 닿는 작은 털을 느끼기 위해 모든 감각을 집중했지만, 무딘 손끝은 그것이 정선우의 신체의 일부라는 것만 알려주었다.

다시 그 마법을 경험하고 싶었다.

그는 혀를 내밀어 정선우의 눈가를 핥았다. 신체 내부에 숨겨진 축축하고 예민한 혀는 속눈썹을 하나하나 모두 느낄 수 있었다. 혀끝에 남은 속눈썹의 감촉이 마른 눈물처럼 느껴져, 눈가와 볼을 핥다 입술에 이르러 가벼운 키스를 남기고 물러났다.

그 마법은 다시 느낄 수 없었지만, 입안을 가득 채운 속눈썹의 맛은 만족스러웠다.

눈물이 아니라 자신의 타액으로 젖은 정선우의 속눈썹을 보며 서도운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기이한 욕구들이 넘쳐났다.

그 욕구는 세상을 바꾸거나 누군가의 생명을 구하는 그런 원대한 것이 아니었다. 정선우의 눈물이나 속눈썹처럼 아주 개인적이고 사소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게 느껴졌다.

정선우는 그에게 사소하지 않았다.

정선우의 속눈썹처럼 아주 작은 물방울 수천 개가 그의 가슴 위로 떨어졌다. 처음에는 느끼지도 못한 그 작은 물방울들은 몸을 부풀려 커다란 파도로 변해 그를 감쌌다.

계속해서 밀려오는 파도는 그가 들을 수 없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건 정선우와 나눴던 섹스와 비슷했다.

그 섹스는 쾌감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감정을 전해 왔다.

그건 정선우가 전하는, 정선우가 속삭이는 감정이었다. 그건 귀로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스치듯 닿은 입술과 놓지 않을 듯 꼭 쥔 옷깃, 젖어 드는 속눈썹으로 전해지는 속삭임이었다.

그 속삭임에, 수천 개의 반짝이는 눈물에 답하듯 그의 가슴에서도 감정이 흘러넘쳤다.

주워 담거나 막을 새도 없이 그를 붉게 적신 파도에 그의 가슴에서 흘러나온 감정들이 뒤섞였다. 누구의 감정인지 구분할 수 없는 파도가 가슴께까지 차올라왔다.

붉고 따뜻한 파도가 밀려와 머리끝부터 모두 잠겨 들었다.

파도에서는 정선우의 눈물 맛이 났다.

이제 그것이 무엇인지 따로 고민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변덕스럽고 믿을 수 없는 감정으로 규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정선우가 수없이 말하는 고백을 믿었다. 정선우의 감정이 아닌 정선우를 믿었다. 그를 배신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에게 충성스러운 애정을 줄 거라는 것을 믿었다.

그러나 그 감정은 믿지 않았다.

믿지 않으니 입 밖으로 내서 말할 수 없었다.

파도가 그를 발이 닿을 수 없는 깊은 물속으로 끌고 가, 저 핏빛 바다에 빠져 죽는다 해도 그건 ‘사랑’이 아니었다.

그건 한없는 애정이며 병적인 집착이고, 광기와 같은 것이었다.

‘사랑’ 같은 역겹고 끔찍한 것이 아니었다.

* * *

서도운의 아버지는 정말 잘생긴 남자였다.

얼마나 잘생겼는지 아버지를 처음 본 사람들은 대부분 놀란 얼굴로 연예인이냐고 물었다. 그러면 아버지는 겸손한 얼굴로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젊은 시절 잠시 모델로 활동한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

아버지는 자신을 찬양하는 말에 부끄러워했지만, 그건 연기였다.

그의 아버지는 집을 자신의 제단처럼 꾸며 놓았다. 현관부터 모델로 활동할 때 찍은 신문과 잡지를 액자에 넣어 줄줄이 붙어있었고, 거실에는 유명 사진작가가 촬영한 거대한 사진을 걸어두었다. 방문하는 사람에게는 사진을 언제 찍었고 사진작가가 자신의 외모를 얼마나 칭찬했는지 설명했다.

그건 자식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틈만 나면 자신이 얼마나 잘생기고 매력적인 사람인지 말했다. 처음에는 그런 아버지가 굉장히 멋져 보였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아버지에게 그 멋진 외모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가 세상에 호기심을 보이며 이것저것 물어보자 아버지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얼버무리거나 “그런 건 엄마한테 물어”라고 답했다.

어머니가 그와 누나에게 세상을 알려주는 동안 아버지는 자신에 대한 찬사와 외모를 관리하는 법, 먹고 마시는 것들, 몸에 걸친 명품에 대해서 말했다.

아버지가 말을 걸어주는 일은 드물어서, 그와 누나는 아버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도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그런 그와 누나를 보고 만족하며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어주었다.

어머니는 무얼 물어도 답해주는 사람이었지만, 아버지는 아무것도 답해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답을 해주지 않는 건지, 못하는 건지 어릴 때는 구분할 수 없었다. 그저 아버지는 자기 자신에 대한 것 외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만 알았다.

아버지는 시간의 흐름이 자신을 비껴가기를 바랐지만 아무리 많은 돈을 쓰고 관리를 해도 시간은 어쩔 수 없었다. 아버지는 젊음이 빠져나간 자리를 값비싼 명품으로 채웠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치장하는 것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다.

다만 아버지가 명품을 두르고 있는 동안은 그와 누나가 가까이 오는 것도 질색했기에 집에서는 편하게 옷을 입고 그와 누나를 안아달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콧물과 침을 흘리고 손에는 끈적이는 과자를 든 그와 누나를 혐오스러운 눈으로 보며 “저건 사람이 아니라 짐승 같잖아”라고 답했다.

어머니가 인간의 발달과정에 대해 길고 자세하게 설명하자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향해 “네가 아무리 주둥이를 털어도 더러운 건 더러운 거야”라고 대꾸했다. 어머니는 더 이상 아버지에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한껏 자신을 꾸미고 있을 때면 어머니는 그와 누나에게 여러 가지 동물 이야기를 해줬다. 어머니의 이야기는 정말로 재미있어서 아버지가 어떤 차림새를 하고 있는지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남매는 아버지의 외모보다 어머니가 수의사란 사실이 더 자랑스러웠다.

가족 동반 모임에 아버지는 언제나 그렇듯 잔뜩 치장을 하고 함께했다.

주최 측의 누군가가 어머니와 이야기하는 동안 그와 누나는 아버지를 따라다녔다. 아버지는 남매를 귀찮아하다 곧 그걸 즐기게 되었다.

사람들은 남매의 인형 같은 외모에 놀라고 아버지의 외모와 나이에 다시 한번 놀랐다. 아버지는 다가온 사람들 앞에서 그와 누나를 다정한 손길로 쓰다듬으며 ‘사랑하는 아들, 딸’이라고 소개했다.

그와 누나는 그날 이후 아버지의 액세서리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아버지는 그들을 자신처럼 명품으로 단장시켜서 어디론가 데리고 나갔다.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간 자리에는 온통 어른들뿐이었다. 담배 연기가 가득한 곳에서 그들은 예쁜 옷을 입고 인형처럼 앉아 있었다. 힘들고 배고팠지만 내색하면 “병신같이 군다”고 혼이 났기 때문에 그는 누나의 손만 꼭 잡고 있었다.

아버지와 나가기 싫어서 어머니에게 매달려 울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지 말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내 새끼를 내가 데리고 다니겠다는데 뭐가 불만이야”라고 화를 냈다.

아버지는 그들이 어머니를 닮지 않고 자신을 닮아서 다행이라고 어머니가 한 일 중에 유일하게 잘한 일이라고 늘 말했다.

아버지처럼 멋진 남자와 결혼한 어머니는 ‘운이 아주 좋은 여자’였고, 어머니 같은 초라하고 평범한 사람은 절대 자신과 같은 남자와 결혼할 수 없었다.

그것이 아버지가 말하는 세상의 법칙이었다.

그 남자는 천박한 인간이었다.

머리는 텅 비고 속은 허영심으로 채운 속물이었다.

그 남자의 세상에는 멋지고 잘난 것만 존재했고, 그 남자가 가족이라고 부르는 건 자신을 닮은 아들과 딸뿐이었다. 가족 식사에는 아들과 딸, 그리고 그가 초대한 손님이 함께했다. 그 남자는 모든 자리에서 어머니를 배제했다.

누나가 그런 남자의 처사에 반발하자 그 남자는 누나를 “멍청한 년”이라며 어디론가 끌고 갔다. 남자가 손님과 사라지고 나서 방에서 나온 누나의 한쪽 뺨이 빨갛게 부어있었다.

그는 다음 날, 누나가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에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다. 어머니는 누나가 집에 오자 그와 누나에게 그날 일을 자세히 물었고 그들을 안고 한참을 울었다.

어머니는 남매를 데리고 어디론가 갔다. 명절에 잠시 보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댁은 아주 멀리 있었다. 어머니는 그곳에 남매를 두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어머니가 걱정스러웠지만 그곳은 정말 행복한 곳이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어머니와 같았다. 무얼 물어도 답해주고 무얼 해도 괜찮다고 했다.

그곳에서는 작은 소리로 소곤거리지 않아도 되고 큰 소리로 웃을 수도 있었다. 소매에 콧물을 닦아도 칠칠치 못하다고 하지 않았고, 밥을 먹다 흘려도 더럽다고 하지 않았고, 바닥에 흘린 과자를 주워 먹어도 ‘개새끼 같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개, 고양이, 동물들을 마음껏 안고 만지고 비 오는 날엔 밖에 나가 물구덩이를 첨벙거리고 손톱 아래에 새까맣게 흙이 끼도록 삽질을 했다.

누나에게 엄마와 셋이 이곳에서 영원히 살고 싶다고 말했다. 누나는 누나 외에 누구에게도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엄마는 지금도 힘들어. 우리가 엄마를 더 힘들게 하면 안 돼.”

훌쩍이는 누나를 보고 자신이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는 걸 알았다. 이유는 모르지만 그건 그들 모두를 슬프게 하는 바람이었다.

점점 외갓집으로 가는 횟수와 날들이 늘어났다.

집으로 돌아오면 여윈 어머니가 그들을 반겼다. 점점 작아지고 희미해지는 어머니는 그 남자의 그림자처럼 느껴졌다.

그 남자가 집에 있을 때는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커다란 집은 저녁 식사 때가 되어도 가사 일을 하는 이들의 발소리만 들릴 정도로 적막했다.

“내가 골프장에 나타나면 다들 골프용품 광고 촬영이냐고 우르르 모여서는…….”

남자는 언제나처럼 자신의 자랑을 늘어놓다 이제 고등학생이 된 누나를 힐긋 쳐다봤다.

“김 감독이 언제 널 봤는지 한번 데려오라고 하더라. 김 감독이 말이야, 일일드라마로는 잘 나가. 김 감독 드라마에서 뜨면 바로 스타야! 스타!”

남자는 흥분해서 말했지만 누나는 아무런 대꾸 없이 계속 밥만 먹었다.

“주말에 골프장 가자. 그날 김 감독도 나오니까 같이 보면 되겠네.”

“다음 주에 시험이에요.”

누나의 대답에 남자는 혀를 찼다.

“에이, 그놈의 시험! 뭐하러 공부를 해? 생긴 게 안 되는 애들은 죽도록 해야 되는데 너 정도면 공부 같은 거 안 해도 돼.”

남자의 말에 누나는 들고 있던 수저를 내려놨다. 밥맛이 없어진 건 그도,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누나는 정말 공부를 잘했다. 외할아버지나 외할머니, 어머니는 누나가 하고 싶은 건 뭐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누나는 외할아버지나 어머니처럼 수의사가 되고 싶어 했고 그 말을 듣고 모두 기뻐했다.

그의 누나는 모든 부모가 바라는 완벽한 딸이었지만, 그 남자에게는 누나의 외모만이 가치 있었다. 그 외의 것들은 예쁜 여자에게는 쓸모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넌 그냥 괜찮은 놈 하나 물어서 결혼만 잘하면 돼. 대학은 뭐하러 가. 아, 여대 가정과 같은 데 가. 그래야 좋은 혼처가 나오지. 지난번에 우리랑 같이 필드 뛴 장 원장이 네가 아주 맘에 들었는지 몇 살인지 묻더라.”

누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남자를 노려봤다. 그와 어머니만 그녀가 정말 화가 났다는 걸 알아챘다.

그 남자는 누나에게 항상 웃으라고 말했다.

“여자는 웃어야 예뻐. 그래야 남자들이 좋아해.”

누나는 남자의 장식품으로 끌려다니며 억지로 웃는 법을 배웠다. 예쁘게 웃을수록 누나의 얼굴에서는 점점 표정이 없어졌다. 그런 표정 없는 누나의 얼굴에서 감정을 읽을 수 있는 건 그와 어머니뿐이었다.

“근데 말이야, 네가 내 동생인 줄 알았다나? 둘이 있으니 남매인 줄 알았다는데, 장 원장도 풍이 심해. 아무래 그래도 딸인데, 하하하…….”

남자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 공부 잘한다며? 시험 같은 거 대충 쳐도 되니까 주말에 골프장 갈 준비해.”

“공부한다는데 그냥 내버려 둬요.”

어머니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들이 있는 곳에서 어머니가 그 남자에게 반발하는 건 처음이었다.

“네가 뭔데 끼어들어? 재수 없게…….”

“내 자식이고 내 딸이야.”

매섭게 노려보는 어머니의 눈에 남자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에이, 밥맛 떨어져!”

남자는 수저를 식탁 위로 집어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에 담지 못할 욕을 내뱉으며 안방으로 들어가더니 가방을 들고 집을 나가버렸다. 어머니는 “미안하다”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시체 같은 낯빛으로 서재로 들어갔다.

집은 다시 적막감에 휩싸였다.

먹었던 것을 모두 토하고 싶었다. 역겹고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언제나처럼 누나를 바라보자 그녀가 덜덜 떨고 있는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지지 마. 전부 기억해.”

그는 누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겨우 열일곱 살이지만 분노를 참는 법을 알고 있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내리누르면 차갑게 식어 증오가 되었다.

누나의 가슴에는 그 남자를 향한 얼음 같은 증오가 쌓여 갔고 그의 가슴에는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날들이 이어졌다. 진창에 빠진 것 같은 열두 살의 하루였다.

그 남자가 집을 나가고 어머니는 다시 일을 시작했다. 어머니는 동물들과 함께 지내며 점차 안정되었다. 직업적 자부심은 어머니에게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주었다. 화려한 빛을 발하는 남자의 그림자로 바스러질 것 같던 어머니는 자신의 존재와 그림자를 점차 되찾아갔다.

가끔 집에 들어오는 남자와 어머니가 마주치는 날이면 어김없이 악에 사무친 말과 함께 거친 욕설이 오갔다. 우습지만 고요하기만 하던 때보다 서로를 비난하는 소리가 듣기 편했다.

그는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헤드폰을 쓰고 이불 속에서 남자가 다시 사라질 때를 기다렸다.

느릿하게 귀를 울리는 드럼 소리와 욕설 사이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지금 그의 문을 두드릴 사람은 누나뿐이라 그는 얼른 헤드폰을 벗고 방문을 열었다.

문 앞에 선 누나는 검은 야구 모자를 눌러쓰고 그를 내려다봤다. 야구 모자의 챙이 만든 그늘 아래 누나의 얼어붙은 눈이 빛났다.

그 남자가 집에 있을 때면 누나의 얼굴에서는 표정이 사라지고 까만 눈동자 너머로 시린 한기가 일렁였다. 열아홉의 누나는 이미 어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날따라 누나의 온몸에서 한기가 나오는 것 같았다.

“옷 입고 나와.”

그는 두툼한 후드티를 꺼내 입고 누나처럼 검은색 야구 모자를 꺼내 썼다. 조심스럽게 방문을 닫고 누나를 뒤를 따라 뒷문으로 집을 나갔다. 대문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택시 한 대가 멈춰 서 있었다. 누나를 쫓아 그도 택시를 탔다.

“기사님, 설명한 대로 부탁드립니다.”

택시 기사는 누나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택시는 시동을 건 채 대기하다 집 밖으로 나온 남자가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자 그 뒤를 조심스럽게 따랐다.

그는 영문을 알 수 없어 누나를 쳐다봤다. 누나는 언제나처럼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누나 뒤에 꼭 붙어있어.”

고개를 끄덕이며 누나의 손을 꼭 쥐었다.

남자의 차는 서울 외곽의 아파트 단지로 들어갔다. 그들이 탄 택시도 남자의 차를 뒤쫓았다. 택시는 멈춰선 남자의 차를 지나 다른 동 앞에 멈췄다.

“학생, 위험할 것 같으면 경찰을 미리 불러요.”

택시 기사는 웃돈을 얻은 택시비를 받으며 걱정스럽게 남매를 쳐다봤다. 누나는 짧게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남자가 올라간 아파트로 향했다.

“누나, 경찰 부를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그가 불안한 목소리로 말하자 누나의 입 끝이 미세하게 올라갔다.

“엄마랑 서 변호사님께 연락해놨어. 곧 도착할 거야.”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누나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누나는 가방을 열어 비디오카메라를 꺼냈다. 빨간불이 반짝이며 화면이 녹화되고 있다는 표시가 뜨자 그에게 카메라를 내밀었다.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들고만 있어.”

조그만 화면에 아름답고 무표정한 누나의 얼굴이 비쳤다. 차가운 눈에 어린 새까만 분노가 불꽃처럼 일어나 있었다.

누나는 어느 아파트 문을 잠시 노려본 후 벨을 눌렀다. ‘누구세요’라고 묻는 여자의 목소리에 차가운 목소리로 답했다.

“당신 남편의 딸입니다.”

아파트 철문 너머로 날카로운 여자의 외침과 혼란스러운 발소리, 익숙한 욕설이 이어졌다. 단단하게 닫힌 철문이 열리고 그들이 알고 있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 남자였다.

“이게 미쳤나, 네가 어디라고 여길 와!”

격분한 남자의 외침과 역겨운 얼굴이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겼다.

“오빠, 뭐야? 진짜 딸이야?”

현관에 서 있던 여자의 목소리에 그 남자는 당황해 돌아봤다.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여자는 아기를 안고 있었다. 그는 그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녹화했다. 뒤늦게 카메라를 발견한 남자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누나의 몸이 그의 앞을 가리고 남자는 카메라 대신 누나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그 멍청한 년이 시켰어? 여기 가서 보고 오라고 그러든?”

남자가 누나의 멱살을 잡고 거세게 흔들자 누나의 몸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카메라 따위는 집어 던지고 누나를 구해야 할 것 같았다.

그가 잠시 고민하는 사이 누나는 자신의 멱살을 잡은 남자를 힘껏 걷어찼다. 딸이 발길질을 할 거라고 생각지 못했는지 남자는 힘없이 밀려나 아파트 철문에 커다란 소리를 내며 처박혔다. 남자는 제 머리를 움켜쥐고 바닥을 구르며 욕설과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누나는 그런 남자 옆을 지나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얼른 누나의 뒤를 따랐다.

그들의 집 못지않게 호화롭게 장식된 아파트 내부에는 역시나 남자의 사진이 잔뜩 걸려있었다. 누나는 입구에 있던 골프 가방에서 골프채를 꺼내 남자의 사진을 향해 휘둘렀다. 커다란 소리와 함께 액자 유리가 부서져 내렸다.

아기가 우는 소리에 그는 몸을 돌려 현관 옆에 서 있던 여자의 모습을 담았다. 누나보다 겨우 몇 살 더 많아 보이는, 어리고 예쁜 여자였다. 그런 여자가 아기를 안고 겁에 질려 울고 있었다.

“카메라 꺼!”

바닥에서 일어난 남자가 그에게 달려오자 누나는 그를 끌어당겨 자신의 뒤로 숨겼다. 액자들을 부수던 골프채가 남자를 향했다.

“야야, 그거 흉기야, 흉기! 빨리 내려놔.”

남자는 골프채에 가로막혀 더 이상 다가오지 못했다.

“너 이거 어디서 배워먹은 짓이야? 애비를 걷어차고 골프채를 휘두르는 년이 어디 있냐? 그거 패륜이야, 패륜!”

“……패륜이 뭔지 알아?”

남자의 격앙된 외침에 누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인간이 해야 할 도리를 거스르는 걸 패륜이라고 해. 당신이 부인과 자식을 속이고 어린 여자를 끼고 사는 그런 거 말이야.”

누나의 말에 남자의 얼굴은 추하게 일그러졌다. 남자가 자랑하던 외모는 이미 술과 담배로 망가져 있었다. 그들의 앞에 서 있는 건 늙어가는 남자일 뿐이었다.

누나의 손에 든 골프채는 마치 칼처럼 남자를 겨눴다. 날카로운 칼끝이 목젖에 닿은 듯 남자는 분노로 색색거리면서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열린 현관문으로 엘리베이터의 도착을 알리는 벨 소리가 들렸다. 다급한 발소리는 현관에서 멈췄다. 현관에 선 어머니는 아주 천천히 모든 것을 둘러봤다. 점점 하얗게 질려가는 어머니의 얼굴에서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알았다는 걸 느꼈다.

난장판이 된 집 안으로 걸음을 옮긴 어머니는 그 남자와 누나를 스쳐지나 거실로 향했다. 어머니는 TV장 위에 있는 붉은 모란이 화려하게 그려진 도자기를 쓰다듬었다.

“……없어졌던 물건이 여기 다 있네.”

서글픈 목소리였다.

어머니는 남자를 향해 붉은 도자기를 힘껏 내던졌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박살 난 도자기 파편이 꽃잎이 뿌려지듯 사방으로 날아갔다.

한 조각이 구석에 서 있던 여자의 발치에 떨어지고, 어린 여자는 아이와 함께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울고 있는 여자에게 잠시 시선을 주다가 남매를 돌아봤다.

“미안해, 내가 너희들을 볼 낯이 없어. 엄마가, 정말… 미안해.”

억누른 울음으로 어머니의 목소리는 잔뜩 쉬어 있었다.

“됐어, 이제 가자.”

어머니의 말에 누나는 골프채를 내렸다. 그제야 속박에서 벗어난 듯 남자가 갑자기 몸을 돌려 어머니의 손목을 낚아챘다.

“가긴 어딜 가!”

어머니의 몸이 힘없이 남자의 손에 끌려가자 현관에 멍청하게 서 있던 서 변호사가 어머니를 잡았다. 무슨 일인지 모르고 이곳에 왔던 서 변호사는 그제야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하고 격분해 소리쳤다.

“이 호로 새끼가!”

집안의 법적 자문을 맡고 있는 서 변호사는 작년에 쉰을 넘겼지만 곰처럼 커다란 덩치를 가진 사람이었다. 서 변호사는 어머니를 붙잡은 남자의 손을 움켜쥐고 힘으로 뜯어냈다. 남자는 비명을 질러댔지만 서 변호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팔을 비틀어 내동댕이쳤다.

“네놈이 계집질을 하는 것도 모자라 살림을 차려? 얼굴 팔고 몸 팔던 놈이 감히 꿈도 못 꿀 여자랑 결혼했으면 죽은 듯 살아야지!”

남자는 바닥을 짚으면서 깨진 유리와 도자기 파편에 베인 듯 피가 흐르는 손을 움켜쥐고 일어났다.

“시발, 내가 결혼하자고 그랬어? 좋다고 쫓아다닌 게 누군데! 결혼해 달라고 매달린 게 누군데!”

남자는 서 변호사를 향해 악을 썼다.

“이 못 배워 처먹은 쌍놈의 새끼가! 네놈이 무슨 염치로 주둥이를 놀려!”

분노로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서 변호사도 지지 않고 소리쳤다.

서 변호사의 커다란 몸 뒤에 숨어있던 어머니가 앞으로 나와 남자를 쳐다봤다. 어머니의 얼굴은 온통 눈물로 젖어 있었다.

“그래, 미안해. 내가 미쳐서……, 미쳐서 그랬어. 돈을 줘서라도 잡고 싶을 만큼 사랑했어. 부모님, 친구들 다 말렸는데…, 안 된다고 그렇게 말렸는데…. 내가 왜 그랬을까…, 내가 왜 당신 같은 인간을 사랑했을까…….”

남자도 그 순간만큼은 입을 다물었다.

“내가 바보천치라서 당신이랑 한집에서 산 줄 알아? 아직도 사랑해서 그렇게 매달린 줄 알아? 내가 선택했으니까 내가 책임지려고 그랬어! 이렇게 될 줄 알았다고! 결국은 이 꼴이 될 줄 알았다고! 그런 소리 안 듣고 싶어서! 그래서 참았어!”

울부짖는 어머니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남자는 작고 초라해 보였다.

“그깟 자존심이 뭐라고…. 이제 다 끝났어, 당신이랑은 끝이야.”

어머니의 말에 남자는 갑자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아직도 피가 흐르는 손을 삭삭 비볐다.

“여보, 내가 잘못했어!”

그런 남자를 향해 어머니의 시선이 잠시 멈추었다. 남자는 필사적으로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현정아, 너 아직 날 사랑하잖아. 나도 너 사랑해.”

어머니는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제 너 같은 거 사랑 안 해. 그때는 잠시 미쳐서 그랬어. 이번 주 내에 이혼서류 보낼 테니 순순히 도장 찍어. 그럼 위자료 청구는 안 할게.”

남자가 돌아서는 어머니를 잡으려 하자 서 변호사가 막아섰다.

“얘들아, 가자.”

서 변호사의 손짓에 누나는 들고 있던 골프채를 바닥으로 던지고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는 누나에게 기대 걸음을 옮기며 카메라의 녹화 버튼을 껐다. 빨간색 불빛이 꺼진 카메라의 화면에 유리와 도자기 파편이 어지럽게 흩어진 바닥이 비쳤다. 전원 버튼을 끄자 그마저도 사라지고 새까만 화면으로 바뀌었다. 현관을 나서며 서 변호사에게 카메라를 내밀었다. 서 변호사는 카메라를 받아들고 세 사람에게 먼저 내려가라고 손짓했다.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속에서 어머니는 그와 누나를 안고 계속 미안하다고 속삭였다.

원만한 이혼을 거부한 남자로 인해 부부의 삶은 법원에서 까발려졌다. 어머니가 입을 다물고 참아온 세월이 모두 드러났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지금까지 딸의 요청으로 모른 체했던 것을 후회했다.

후회는 분노와 보복으로 이어졌다.

어머니에게는 돈과 연줄이 넘쳐났고 한국 사회에서 그 두 가지는 권력을 의미했다. 어머니는 법의 테두리 내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남자를 파멸시켰다.

어머니가 제공한 안락하고 부유한 삶을 누리던 남자는 몰락을 견디지 못했다. 이혼 소송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자는 자신의 삶을 포기했다.

비참한 최후였다.

세 사람은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했다. 커다란 정원이 딸린 예쁜 집에는 사연을 가진 동물들이 하나둘 자리 잡았다. 집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청소를 해도 개와 고양이 털이 집안 곳곳에 쌓였다.

옷에 털이 묻는다며 집에 동물을 들이지 말라던 남자는 이제 없었다. 아무도 그 남자에 대해 거론하지 않았다. 그 남자의 자리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남자의 존재를 누구보다 선명하게 느꼈다.

나이를 먹고 자라감에 따라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때때로 불쾌해졌다. 거울 속에 보이는 그의 얼굴은 그 남자가 남긴 거대하고 추한 흉물처럼 보였다.

가끔 그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시선에서 회한이 묻어날 때면, 자신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어머니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까 두려웠다. 그 남자와 닮았지만 그 남자가 떠오르지 않는 누나의 얼굴이 부러웠다.

성형 얘기를 꺼내자 누나는 금세 그가 무얼 고민하는지 알아챘다. 누나는 그를 욕실로 끌고 갔다.

커다란 거울 속에 두 사람의 얼굴이 비쳤다.

“너랑 난 그 남자랑 닮았지만 엄마도 닮았어. 난 얼굴형이 엄마랑 같고, 넌 눈이 엄마랑 같아. 이것 봐, 그 남자는 눈 끝이 올라갔지만 넌 엄마처럼 약간 처졌잖아.”

누나의 손끝이 그의 눈가를 짚었다.

“키도 그래. 그 남자를 닮았으면 185cm도 넘었을 거야. 엄마를 닮아서 180cm도 안 되잖아.”

뒤꿈치를 세운 누나의 정수리가 그와 같은 높이에 있었다.

“넌 웃으면 외할아버지랑 꼭 닮았어. 눈가 주름이 외할아버지처럼 생겨. 어떤 주름인지 알지?”

평생 소만 연구한 외할아버지는 소처럼 선한 눈을 가진 분이었다. 웃음도 그렇게 선하고 온화했다.

누나의 말에 굳은 입가가 풀어지며 조금씩 미소로 바뀌었다.

거울 속 그의 얼굴은 누나의 말처럼 다정하고 선량해 보였다. 남자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외할아버지랑 엄마처럼 살자.”

“그럼 나도 누나처럼 외할아버지랑 엄마 동문이 되어야겠네.”

생긋 웃으며 말하는 그를 보며 누나는 밝게 웃었다. 그 남자와는 조금도 닮지 않은 웃음이었다.

그가 고등학교에 갔을 때 그들의 삶에서 그 남자의 그림자는 완전히 지워져 있었다.

어머니는 의욕적으로 동물병원을 확장하고 있었고, 누나는 온갖 전설을 만들며 대학을 휩쓸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여자에게는 관심이 없다는 걸 알았다.

처음에는 그 남자의 삶에 대한 반발이 아닐까 의심했다. 그 남자가 남긴 자취로 인해 자신의 삶이 바뀌는 게 싫어서 여자를 사귀려 노력했다.

다정한 미소와 정중하고 예의 바른 태도는 어떤 여자에게든 호감을 샀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누구에게도 마음을 줄 수 없었다. 오히려 쉽게 다가오는 여자들로 인해 그 남자가 떠올라 비참해졌다.

한층 따뜻해진 봄볕 아래에서 남매는 털갈이를 시작한 개들을 붙잡아 빗질을 시작했다.

그는 문득 누나에게 말하고 싶다고 느꼈다. 자신에 대해 숨김없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누나였고 이러한 자신의 사정을 가장 잘 이해할 줄 사람도 누나였다.

“누나, 나 게이 같아.”

누나는 쓰고 있던 얇은 마스크를 벗고 그를 쳐다봤다.

“단정하지 마. 오래 고민하고 경험해보고 결론 내려.”

그도 마스크를 벗고 마주 봤다. 누나의 얼굴에는 어떠한 혐오감이나 감정도 없었다. 그저 담담했다.

“그럼 나 게이 맞아. 여자랑은 안 될 것 같아.”

“여자와 섹스할 수 없다는 이유로 게이라고 할 수는 없어.”

“……남자를 보면 그 남자처럼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것 같고, 여자를 보면 그 남자가 된 것 같아.”

“남자, 여자 모두에게 성욕을 느끼는 거야?”

누나의 물음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남자가 좋아. 근데……, 평범하게 다른 사람처럼 살라고 하면 그렇게도 살 수 있을 것 같아.”

누나는 들고 있던 빗을 내려놓고 그를 끌어당겨 안았다. 두 사람 주위로 흩날리는 털들이 햇볕에 반짝였다. 누나는 그의 등을 토닥이며 나직하게 말했다.

“아무도 그렇게 살라고 안 해. 네가 살고 싶은 대로 살아. 네가 어떤 모습을 하든, 엄마나 난 네 곁을 떠나지 않아. 부끄러워하지도 말고 숨지도 마.”

“응, 알았어.”

털이 코끝을 간질이며 재채기가 나올 것 같아서 그는 필사적으로 참았다. 이런 상황에 재채기라니,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누나가 그의 귓가에 커다랗게 재채기를 하며 일어났다. 재채기를 멈추려 장갑 낀 손으로 코를 막았다 장갑에 달라붙은 털 때문에 숨이 넘어갈 듯 연이어 재채기를 해댔다. 장갑을 벗고 입을 틀어막았지만 한 번 터진 재채기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그런 누나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누나는 재채기를 하며 그의 등을 내리쳤다. 옷에 붙은 털이 사방으로 날리며 재채기는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결국 마당의 수돗가에서 얼굴과 손을 씻고 난 다음에야 누나의 재채기가 멈췄다. 대성통곡을 한 것처럼 코와 얼굴이 빨갛게 부은 누나의 얼굴에 그는 한참을 낄낄거렸다. 누나는 눈을 흘기며 다시 마스크를 썼다.

두 사람은 일광욕을 즐기던 진돗개 한 마리를 데려와 빗질을 시작했다. 남매의 빗질에 기분이 좋은지 진돗개는 꼬리를 파닥이며 이리저리 몸을 굴렸다. 도로 위를 떠돌다 교통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었지만 여전히 사람을 좋아하는 개였다.

“도운아, 우린 구걸하지 말자.”

“뭘?”

“사랑해달라고 하지 말자. 우린 그렇게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사랑받을 수 있어. 우릴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나서 행복해지자.”

“응.”

그는 누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달콤한 미래를 꿈꿨다.

그러나 그건 단지 바람일 뿐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에 실망하고 배신당하고 홀로 남겨졌을 때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도 어머니처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부서진 마음을 숨기고 웃었다.

운명처럼 서로를 발견하고 사랑에 빠지는 건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일이었다. 영원을 맹세할 상대는 존재하지 않았고, 아무리 노력해도 사랑은 한때의 감정일 뿐이었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주는 달콤함은 허상이었다.

거짓말하지 않고, 상처 주지 않고 사랑해주는 이는 없었다.

그에게 사랑은 그 남자가 입에 담았던 역겨운 것이거나, 어머니가 지난 세월을 후회하며 한탄하던 그런 것이었다.

계속되는 배신은 그의 가슴에 거대한 틈을 만들어, 사랑하는 것도 받는 것도 포기하고 그저 외로움을 벗어날 수 있는 관계만 찾게 했다.

그것으로 족했다.

정선우도 마찬가지였다. 오랜만에 만난 흥미 있는 상대일 뿐이었다. 그리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이전에 만났던 이들과 다를 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또다시 상처받고 분노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서도운은 잠든 정선우를 가만히 바라봤다.

등을 어루만지는 손끝에 배어 오는 온기가 환상처럼 느껴졌다. 그에게 사랑을 말하던 정선우의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사랑이란 마음속을 배회하다 시간이 지나 깨어나면 꿈처럼 사라져 버리는 그런 건지도 몰랐다. 아무리 노력해도 손에 남은 건 아무것도 없고 시간이 지나 서글픈 기억만이 그것이 사랑이었음을 속삭였다.

그래도 다시 듣고 싶었다.

그럼 다시 환상이 시작되고 꿈을 꿀 수 있으니, 깨어날 때마다 정선우가 사랑한다고 말해준다면 영원히 꿈을 꿀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가지런한 속눈썹이 툭 떠지더니 정선우의 까만 눈동자가 보였다.

그는 갑자기 잠에서 깨어난 연인의 모습에 당황해 숨을 죽이고 움직임을 멈췄다. 정선우는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더듬었다. 잠들기 전에 보았던 눈코입이 여전히 그 자리에 붙어있는지 확인이라도 하듯 만지고 나서는 배시시 웃었다.

“……형.”

조그맣게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가슴이 떨려와 그는 멈췄던 손을 움직여 정선우의 등을 쓸어내렸다.

“흐흣, 간지러워…….”

코끝을 울리는 여린 웃음소리가 그의 심장을 울렸다.

“아프지 마.”

“형도.”

“내가 없는 데서 아프면 안 돼.”

“응.”

“오피스텔 가서 짐 가져오자.”

“어디? 내 오피스텔?”

정선우는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응.”

“……여기로?”

망설이다 눈치를 보며 묻는 정선우가 사랑스러워 설핏 웃었다.

“이제 여기가 네 집이라고 했잖아.”

“형은? 형도 여기 같이 사는 거야?”

자꾸만 새어 나오는 웃음이 심장을 간지럽혔다.

“왜? 너 혼자 살고 싶어?”

“……형이랑 같이 있는 게 아니면 그냥, 오피스텔에 있을래.”

등을 어루만지던 손을 옮겨 귓가에 흘러내린 정선우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감겼다 빠져나갔다.

“나 혼자 여기 있는 거면 싫어. ……내가 이 근처로 이사 올게.”

정선우에게서 흘러나온 감정이 그의 곁에 고였다.

서도운은 자신이 젖어 들어가는 걸 느꼈다.

미약한 열기를 품은 감정은 그를 놀라게 하지 않으려는 듯 조심스럽게 수위를 높였다. 붉고 따뜻한, 눈물 맛이 나는 감정이 그의 입과 코를 막고 그의 몸을 채웠다.

모든 것이 깊은 물속에 잠긴 것 같았다. 그들은 어둡고 조용한 바닥에 몸을 눕히고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이 사랑이든, 사랑이 아니든 상관없었다.

사랑처럼 달콤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부드럽게 녹아내리지 않아도 괜찮았다. 뜨겁지 않아도, 따뜻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서러움에 삼킨 눈물로 혀는 이미 굳었고, 오랜 체념으로 가슴은 바스러졌다. 그는 누군가의 온기가 없어도 한겨울 시린 바람을 무던히 견딜 수 있는 어른이었다.

그저 더 이상은 아파하고 슬퍼하고 싶지 않았다.

간절히 바라던 이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을 무어라 부르든 상관없었다.

“우리 둘이……, 여기서 같이 사는 거야.”

그의 말에 정선우는 환하게 웃었다.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내려 볼을 만지자 정선우는 눈을 내리뜨고 얼굴을 붉혔다. 부끄러움에 달아오른 볼이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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