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 담 너머 (27/35)

27. 담 너머

서도운은 천천히 정선우의 성기 위로 몸을 내리다가 더 이상은 불쾌한 감각을 참을 수 없어 일어났다.

몸을 뒤로 물리고 젖어서 번들거리는 정선우의 성기를 잡고 문지르자, 그의 손길이 마음에 드는 듯 성기가 까닥이며 쿠퍼액을 잔뜩 쏟아냈다.

답답한 마음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정선우와 삽입 섹스를 할 때마다 그곳의 신축성을 시험하는 것 같았다. 차라리 귀두만 툭 하니 불거진 모양이라면 아픔을 각오하고 한 번에 밀어 넣겠지만, 정선우의 것은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매끈한 귀두 아래로 이어지는 두터운 기둥이 이미 한계에 이른 입구를 찢어 버릴 것 같아 무서웠다. 끝까지 넣으면 커다란 성기에서 전해지는 이물감과 통증을 참느라 쾌감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거기다 정선우는 조금만 자극해도 속옷은 물론 바지가 젖을 정도로 싸는 건 여전했지만, 두어 번 사정하고 나면 쿠퍼액만 찔끔대고 도무지 싸질 않았다. 너무 힘들어서 애원하듯 이름을 부르면, 커다란 것을 바짝 곧추세우고 “괜찮아, 참을 수 있어”라고 해대니 미칠 노릇이었다.

자신이 참는 걸 가르쳐 놓고 빨리 싸라고 다그칠 수는 없어서 서도운은 정선우가 쌀 때까지 뒤가 찢어질 것 같은 아픔을 견뎌야 했다.

그나마 한 번만 하면 일을 하는 데 지장이 없었지만 두세 번을 한 날은 섹스하는 내내 긴장한 탓에 몸살이 난 듯 온몸이 아파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는 정선우와의 삽입 섹스에서 즐거움이나 쾌감을 거의 느낄 수가 없었다. 이전의 그라면 섹스라고 여기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정선우가 쾌감에 취해 매달려오면 아픔이나 불쾌감 따위는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성기가 입구에 닿아 안으로 들어올 때에서야 잊었던 걸 떠올리며 몸을 굳히지만, 그땐 이미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다른 수가 없었다.

정선우는 삽입하다 말고 자신의 성기를 만지작거리는 서도운을 가만히 쳐다봤다.

뜬금없이 렌즈를 끼라는 서도운의 말에 무슨 일인가 했더니 곧장 섹스가 이어졌다. 섹스하는데 렌즈가 왜 필요할까 궁금했는데 지금은 렌즈를 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렌즈를 안 꼈다면 서도운이 저런 복잡한 얼굴로 그의 성기를 내려다보는 걸 몰랐을 거다.

섹스 경험이 없다고 해도 서도운이 쾌감을 느끼는지 아닌지는 알 수 있었다.

서로의 성기를 비비며 키스할 때면 서도운은 숨 쉬는 소리까지 음란해졌다.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헐떡이는 서도운의 모습에 몸이 달아올라 자기도 모르게 사정하곤 했다.

그러나 삽입을 하면 서도운은 억눌린 신음만 간간이 내뱉었다. 이를 악물고 허리를 움직이는 모습은 책임감에 가득 차 임무를 수행하는 군인 같았다.

서도운과 서로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관계가 되길 원했지만, 섹스까지 책임과 의무로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섹스만 하는 관계도, 어쩔 수 없이 섹스하는 관계도 싫었다. 서로를 원해서 하는 섹스를 하고 싶었다.

“……형 거 빨고 싶어.”

그의 말에 서도운의 시선이 성기에서 얼굴로 옮겨졌다.

선뜻 허락하지 않자 그는 자신의 허리께에 놓인 서도운의 무릎으로 손을 뻗었다. 둥근 무릎을 손 안에 가득 쥐고 천천히 쓰다듬자 서도운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몸을 옮겼다.

서도운은 그의 가슴에 앉아 자신의 성기를 쥐고 가볍게 흔들었다. 지금 기분을 보여주듯 서도운의 성기는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내가 해줄게, 응?”

손을 겹쳐 잡고 말하자 서도운은 여리게 웃었다.

“그래, 해봐.”

그는 서도운의 몸을 좀 더 끌어당겨 다리 사이로 들어갔다.

서도운은 자신의 성기 아래로 기어들어 간 정선우가 대체 뭘 하려는 건지 궁금했다.

정선우가 그의 성기를 쥐고 부드럽게 문지르다 고환을 빨기 시작했다. 처음엔 얇은 피부를 입술로 쪽쪽거리는 것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고환 하나를 통째로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정선우는 예민한 편이라 성기에 직접 자극을 가하면 곧장 사정하기 때문에, 고환을 만져주거나 빨 때가 많았다. 그러나 그의 것을 정선우가 입에 넣은 건 처음이었다.

언제나처럼 혀나 치아로 자극하는 기교 따위는 없었다. 그저 입안에 넣고 열심히 빠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정선우의 손 안에서 그의 성기가 부풀어갔다.

“반대쪽도 할 수 있어?”

그의 말에 정선우는 얼른 물고 있던 고환을 뱉고 옆에 있던 것을 입에 넣었다.

쾌감과 사랑스러움에 가슴이 간질거렸다.

정선우는 제대로 된 섹스 경험 자체가 없었다. 섹스와 관련된 모든 것이 그가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정선우는 그가 주는 것이라면 어떤 거부감도 없이 받아들였다. 경험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두려움이나 망설임이 없었다. 몸을 물릴 때는 생리적인 거부감으로 어쩔 수 없을 때뿐이었다. 그가 무얼 하든 정선우는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정선우의 믿음이 대체 어디서 나오는지 신기했다.

손을 내려 머리를 쓰다듬자 그걸 또 다른 신호로 알아들었는지 잔뜩 젖은 고환을 입에서 빼내고 커다랗게 부푼 성기를 입으로 가져갔다. 붉어진 입술 사이로 짙은 색의 성기가 사라졌다.

정선우는 정성껏 귀두를 핥고 빨았다. 혀 전체로 성기를 감싸고 입안에 고인 침을 삼킬 때면 그는 낮게 신음하며 헐떡였다.

정선우는 낮게 신음하는 서도운을 멍하니 올려다봤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살짝 찌푸린 미간이 보였다. 긴장으로 굳어진 서도운의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조그맣게 내밀어진 혀가 마른 입술을 천천히 핥고 사라졌다. 신음과 함께 깨물었던 아랫입술이 벌어지며 긴 숨이 흘러나왔다.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만들어낸 그림자 사이로 슬며시 드러난 서도운의 눈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도운이 입매를 비스듬히 끌어 올리며 속삭였다.

“더 삼켜 볼래?”

정선우는 입을 더 크게 벌려 서도운의 성기를 넣을 수 있는 데까지 넣었다. 목구멍을 찌를 듯 밀려 들어온 성기로 인해 이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본능인지 혀가 성기를 밀어내려 움찔거렸다. 무언가를 하고 싶어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입안에 고이는 침만 계속 삼켰다.

“형 좆을 빠는 게 좋아? 그래서 이렇게 싸는 거야?”

갑자기 성기를 아플 만큼 쥐어오는 손길에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신음을 지르고 싶어도 성기가 목구멍을 막아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서도운의 성기가 목구멍을 찔러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렌즈를 끼고 있어도 눈앞이 흐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갑자기 입안의 성기가 사라졌다.

“숨 쉬어.”

어디선가 들리는 목소리에 정선우는 입을 벌리고 필사적으로 공기를 들이마셨다. 호흡이 진정되고 나서야 그의 머리를 쓰다듬는 서도운의 손길이 느껴졌다.

부드럽고 다정한 손길에 뇌가 녹아내릴 것 같았다.

서도운은 베개를 가져와 그의 머리 아래에 밀어 넣었다.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넘겨주고는 그의 손을 잡아 자신의 허리에 올렸다.

“힘들면 밀어내.”

무엇이 힘들지는 모르겠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입 벌려.”

심호흡을 반복하다 서도운의 말에 따라 최대한 크게 입을 벌렸다. 커다란 성기가 입안으로 들어왔다 나가는 걸 반복했다.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점점 빨라지는 서도운의 허리짓에 머리가 멍해져서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허리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자 입을 가득 채운 성기가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머리를 쓰다듬는 서도운의 손길에 맞춰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또 할 수 있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 * *

정선우는 12월과 1월 세무 일정을 확인하고 달력에 기입했다.

김현승이 세무에 관련된 일은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혼자만 편의를 제공 받고 싶지 않았다. 백경 프로덕션도 ‘더 문’의 계열회사 중에 하나에 불과한 데다, 유일하게 전혀 수익을 내지 못하는 회사이기도 했다.

영상이나 광고는 대기업 계열사들이 업계 전반을 장악하고 있었다. 백경 프로덕션은 그런 계열사들에 비하면 덩치가 작았지만, 대기업의 입김이 닿지 않는 곳으로는 제법 규모가 있었다. 업계에서 평도 좋았고 실적도 괜찮은 편에 속했지만 희한하게도 수익은 전혀 없었다.

물론 백경 때문이었다.

백경 프로덕션은 느긋한 분위기와 업계 최고 연봉 덕분에 직원 모두 오래도록 일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백경이 한번 거하게 말아먹은 탓인지 모두 마음 한구석에 불안감이 있었다. 그렇게 말아먹었으면 정신 차릴 법도 한데 백경은 여전히 이것저것 사대며 돈을 써대고 있으니 당연했다.

거기다 백경이 사고를 칠 때마다 망한다는 소문이 끊이질 않으니 직원들은 엘리베이터나 계단에서 정선우를 만나면 조심스럽게 “우리 망하는 건 아니죠?”라고 묻곤 했다.

정선우는 백경 프로덕션의 재무 상태에 대해 모두에게 알려 이런 불안감을 잠재우기로 했다.

그는 기획팀과 제작팀장에게 연락해 전 직원을 회의실에 불러 모았다. 백경의 부인인 서도희가 가진 개인 자산과 모회사인 ‘더 문’의 규모를 설명하자, 모두 ‘저런 새끼가 어떻게 그런 여자를 만났냐’는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백경을 쳐다봤다.

이어서 이제는 백경이 결코 회사를 말아먹을 수 없으며 재무제표가 그 꼴인 이유는 백경이 흥청망청 써서 그렇다는 걸 알려주자 백경은 그 자리에서 맞아 죽을 뻔했다.

앞으로 그가 있는 한 백경이 그렇게 돈을 써댈 수는 없다고 단언하자 그날 이후 전 직원은 백경 때문에 망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해방되었다. 대신 백경에 대한 증오심은 더욱 깊어졌다.

백경 프로덕션에서 그가 맡은 일은 회계 업무와 계약, 계약에 따른 법적인 검토, 재무와 관련된 모든 것이었다. 제작에 관련된 일은 백경과 두 팀장의 몫이지만 그 외의 것은 모두 정선우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서도운은 그에게 특별한 일이 없으면 알아서 하라며 전권을 맡겼다. 사실상 프로덕션의 운영을 맡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공사를 혼동한 결정이 아닌가, 그에 대해 확인차 물었을 때 서도운은 빙긋 웃으면 답했다.

“거긴 백 감독이 사고만 안 치면 잘 굴러가는 곳이야. 백 감독이 함부로 대하지 못할 사람이 필요해. 넌 백 감독을 무서워하지도 않고 백 감독이 널 만만하게 볼 수도 없지.”

백경은 그와 서도운이 사귀는 걸 아는 몇 사람 중 하나였다. 이전에도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지만, 정선우가 서도운과 한집에서 살기 시작한 이후로는 뻣뻣할 정도로 예의 바르게 굴었다.

서도운의 말이 맞았다.

제작과 관련된 것 이외의 모든 결재 권한을 뺏긴 백경은 그제야 제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쓰기 시작했다.

가끔 백경은 그의 사무실을 찾아와 가족끼리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원망하며, 제작팀장인 오경식 감독이 무서워서 회사에 나오기 싫다고 울먹였다. 지금까지 백경이 쓴 돈의 액수를 알고 있는 정선우에게 그런 징징거림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가족끼리’라는 말에 묘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뿐이었다.

키보드 옆에 둔 휴대폰이 짧은 진동음과 함께 켜졌다.

데리러 간다는 서도운의 메시지에 시간을 확인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웠다. 그는 서둘러 하던 일을 정리하고 책상을 치웠다.

서도운의 가족과 동물병원 사람 중 몇몇은 그들이 사귄다는 걸 알았지만, 프로덕션 사람들은 아무도 몰랐다. 서도운이 게이라는 건 아는 사람은 모두 아는 사실이었지만, 정선우가 서도운과 사귄다는 건 비밀이었다.

출근할 때나 퇴근할 때, 정선우가 서도운과 만나는 곳은 회사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주택가였다. 배려라는 건 알지만 때때로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서도운에게 서운한 건 아니었다. 그래야만 하는 상황이 서운했다.

C그룹에서 일할 때는 그런 개인사가 약점이 되고 흉이 되기에 결코 알려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프로덕션의 누군가가 알아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자신의 연인이 얼마나 멋진지, 얼마나 다정한지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다. 자랑하고 싶어 안달하는 아이 같아 부끄러웠지만 말하고 싶었다.

서도운의 연인이 자신이라고.

사무실을 나온 정선우는 복도에 선 사람들의 모습에 영문을 몰라 두리번거렸다.

회의실을 겸한 기획팀 사무실의 커다란 유리문이 활짝 열려, 기획팀이고 제작팀이고 할 거 없이 모두 나와 굳은 얼굴로 그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 사이로 힐난조로 울리는 여자의 목소리가 복도까지 울렸다.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는데 어떻게 같이 일을 해요!”

“주 팀장, 그게 아니고…….”

“그렇게 통보하는 게 말이 돼요?”

“주 팀장, 내 말 좀…….”

“여기서 할 말이 뭐가 더 있어요?”

“나도 이거 첨 듣는 거예요! 방금 주 팀장이 말해서 알았단 말입니다.”

기획팀장의 말에 날카롭던 여자의 목소리가 뚝 끊어졌다.

멀찍이 서 있는 정선우를 본 박수경이 다가왔다. 그녀는 그동안 백경에게 치이다 본연의 업무만 할 수 있게 되자 정선우를 은인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퇴근해?”

“네, 무슨 일입니까?”

그의 물음에 박수경이 머리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백경이 백경 짓을 했나 봐.”

“백경 짓이요?”

“우리 파트너가 연 디자인이거든. 정선우 씨도 이쪽 사람이면 들어봤겠네, P그룹에 있던 김성연 실장님.”

“이름은 들어봤습니다.”

“연 디자인 김성연 실장님이 M그룹 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야. 지금 저기서 저러는 게 연 디자인 쪽 AE(광고기획자)인데…….”

박수경은 말끝을 흐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주위에 있던 이들이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감히 백경의 회사에서 어떻게 백경을 욕할 수 있냐는 그런 눈빛이 아니라 끼어들고 싶어서 기회를 노리고 있는 하이에나 같았다.

“주현영 팀장 성격이 장난 아냐. M그룹 본사 홍보실장이 주 팀장한테 하도 까여서 그림자도 안 밟는다는 소문이 있어.”

기획팀의 누군가가 말을 거들자 너나 할 것 없이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주 팀장이 갑자기 와서는 우리가 자기들이랑 상의도 없이 모델을 바꿨다고 저 난리를 부리는데, 우리도 모델이 바뀐 줄 몰랐다니까!”

“안 봐도 뻔하지, 백경 새끼가 삘 받았다고 혼자 가서 계약하고 다 했겠지.”

“아우, 이 정신 나간 백경 새끼! 김성연 실장님 성격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 밑에 주 팀장, 박 팀장도 얼마나 흉악한데!”

“히익…….”

누군가의 짧은 비명 소리가 울리고 웅성대던 복도가 일순간 조용해졌다.

출입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가 복도에 선 사람들을 훑어봤다. 프로덕션 사람들은 남자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듯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훌쩍하게 큰 키를 가진 남자는 놀랄 만큼 화려했다. 그리고 그 화려함이 당연한 듯 어울리는 미남자였다.

남자가 기획팀 사무실로 걸음을 옮기자 입구를 에워싼 사람들이 우수수 흩어지며 길을 내줬다. 모세의 기적을 헤치고 남자는 유유히 사무실로 들어갔다.

“와, 박 팀장은 볼 때마다 진짜 감탄스럽다니까.”

“나 전에 기획서 들고 갔다가 ‘싸인해 주세요’ 할 뻔했어.”

“나도.”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을 보며 박수경을 쳐다보자 전과는 달리 목소리를 낮춰 소근거렸다.

“박인서라고 요즘 제일 잘 나가는 디자이너야. 김성연 실장님 밑에 있는 아트 디렉터인데 옛날부터 잘생긴 걸로 유명했어. 근데 성격이 장난 아니게 까칠하다고 그러더라.”

‘잘생겼다’는 말에 정선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잘생긴 게 아니라 마치 런웨이 위를 걷는 모델 같았다. 타인의 시선을 받으면 움츠러드는 자신과 달리 그 남자는 그런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즐기지도 않지만 받아줄 생각도 없다는 그 모습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그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자 박수경은 당황한 얼굴로 몇 마디 덧붙였다.

“정선우 씨도 잘생겼어. 근데 박 팀장이랑 과가 좀 달라. 디자이너라서 그런지 우리 같은 일반인이랑 옷 입는 게 틀려. 상상을 초월해.”

박수경의 설명에 그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서도운도 옷을 잘 입기는 하지만 단정하고 편안한 스타일을 주로 입었다. 어딜 가도 부드럽게 섞여들 수 있는 그런 옷차림이었다.

그러나 방금 본 남자는 모든 사람의 시선을 끌어모았다. 어두운색의 슈트 위에 검붉은 타이와 와인색 코트만으로도 화려한데, 코트를 입지 않고 어깨에 걸치고 다니는 사람은 처음 봤다.

이곳이 런웨이라면 이해가 가겠지만 그렇지 않다는 게 중요했다.

코트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져 꺼내자 도착했다는 서도운의 메시지가 보였다.

그는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가 지금 간다는 말과 함께 백경이 무언가 사고를 친 것 같다고 전했다. 무슨 일이냐는 물음에 박수경과 주변 사람들에게 들었던 말을 정리해 화면을 두드렸다. 그리고 이어진 메시지에 답을 할 수가 없어 그는 다시 박수경에게 다가가 물었다.

“백 감독님은 어디 있어요?”

“……몰라.”

박수경의 대답에 주위 사람들을 돌아보자 다들 한숨을 내쉬었다.

“도망갔겠지.”

“그놈 사고 치면 원래 그래.”

“오늘도 우리 팀장님만 죽어나겠구나.”

그는 서도운에게 답을 보냈다.

[서도운 : 백 감독은 뭐래?]

[정선우 : 도망갔대]

[서도운 : 형이 그쪽으로 갈게]

백경이 친 사고를 수습하러 오는 거지만 서도운이 회사까지 그를 데리러 온다는 것 같아 정선우는 마음이 들떴다.

* * *

서도운은 정선우의 메시지를 확인하고 바로 서도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니나 다를까 백경이 그곳에 있다는 서도희의 대답에 그는 이런저런 사정을 설명했다. 휴대폰 너머로 깔깔거리는 누나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서도희는 자신의 사무실로 도망 온 백경에게 사정을 물어 그에게 전했다. 뒤처리를 부탁하는 누나의 말에 걱정 말라며 전화를 끊었다.

그는 주택가 골목에 세워둔 차를 몰아 프로덕션으로 향하며 지금 상황을 해결할 방법을 생각했다. 의외로 쉽게 풀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뭐든 빨리 해치우고 정선우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함께 살자는 말에 정선우는 짐을 챙겨 빌라로 오기로 했다. 짐이 많으면 사람을 부를까 했지만 이미 다 챙겼다는 말에 웃음이 나왔다.

정선우가 챙긴 짐은 단출했다. 옷 두 상자와 캐리어 하나가 다였다.

그는 정선우가 상자에 챙겨둔 옷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촉감부터 재질, 색상, 디자인까지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가 사서 드레스 룸에 넣어둔 정선우의 옷에 비하면 쓰레기 같았다. 이런 걸 정선우에게 입히고 싶지 않았다.

그가 불쾌한 얼굴로 자신의 옷을 살피자 정선우는 잔뜩 불안해하다 “버려”라는 한마디에 미련 없이 자신의 옷을 처분했다.

서도운은 자신의 그런 행동에 정선우가 서운해할까 걱정했지만, 옷에 관심이 없어서 인터넷으로 대충 샀다며 앞으로 그가 골라주는 옷만 입겠다는 말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전에 사귀었던 이들 중 누군가 약은 수를 내어 그에게 그런 말을 했다면, 카드를 던져주며 알아서 사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선우가 원하는 건 옷이나 물질적인 무언가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정선우는 조금이라도 더 그의 애정을 받기 위해 그가 원하는 옷을 입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는 부끄러워하는 자신의 연인을 끌어당겨 안았다.

매일 아침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자신의 손으로 꾸미고, 먹고 마시는 건 모두 제 손을 거치고, 잠드는 그 순간까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자신만을 바라보라고 하고 싶었다.

정선우는 아마도 기꺼이 그의 바람을 들어줄 것 같았다.

서도운은 완벽하게 자신의 것인 남자가 품 안에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두 사람은 빌라로 돌아와 캐리어에서 물건을 꺼내 정리했다. 정선우는 빌라 이곳저곳에 자신의 물건을 넣어두며 어색해하면서도 기뻐했다.

정리를 끝낸 정선우는 진지한 얼굴로 자신의 소중한 것을 보여주었다.

몇 개의 통장과 보험증서, 오피스텔 계약 서류였다. 그가 가진 것에 비하면 작고 초라했지만 스물아홉 살의 정선우가 필사적으로 이룬 것들이었다.

불운한 사고가 났을 땐 하나뿐인 가족인 어머니에게 모든 것이 돌아가도록 되어 있었다. 모든 것이 자신이 아닌 어머니의 노후를 위한 것으로 보였다. 꼭 죽음을 각오한 사람처럼 느껴져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정선우는 곤란한 듯 펼쳐놓은 서류를 정리하며 시선을 피했다. 말끔하게 파일 속에 삶의 흔적을 정리하고 나서야 수줍게 웃으며 대답했다.

“형 만나기 전까지는… 사는 게… 힘들고 재미없었어. 지금은 안 그래.”

지독하게 감미로운 고백이었다.

그와 비교해 자신이 가진 것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는 남자도 처음이었고, 그와 함께 하는 것에 대한 행복감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남자도 처음이었다.

사귀기 전 재무담당자로 정선우가 쓸만한지 알아보려 C그룹에서의 행적을 조사했었다.

서도운이 조사한 정선우의 삶은 말 그대로 힘들고 재미없었다.

입사 후 정선우는 투자분석 쪽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본사 재무팀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C그룹 본사는 내부 경쟁이 심해, 능력보다는 연줄이 우선이었다. 라인을 타지 못하면 그대로 밀려났다.

정선우는 라인을 잡지 못했다.

동기들이 진급할 때 정선우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본사에서 영상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가 아는 정선우라면 절대 하지 않을 불법적인 일을 저질렀다는 이유였다.

자리를 옮겨도 직장 내 왕따는 여전히 이어졌다.

졸업과 동시에 입사해 퇴사할 때까지 정선우는 그곳에서 4년을 견뎠다.

정선우는 4년 동안 이루어낸 걸 그에게 보여줬다.

통장에 찍힌 액수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힘들어도 열심히 살았다고 자랑하는 정선우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자신과 함께하는 한 정선우의 삶에 힘든 일은 없을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누구도 그를 괴롭힐 수 없다고, 다시는 자해를 해가며 참지 않아도 된다고 속삭이고 싶었다.

서도운은 자신의 연인에게 그렇게 해줄 수 있는 남자였다.

그는 프로덕션이 있는 빌딩 앞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입구에 선 남자를 스쳐 지나갔다가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도 입구에 선 남자도 놀란 얼굴로 서로를 쳐다봤다.

“네가 여긴 웬일이야?”

“형은 여기 웬일인데?”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정적이 찾아왔다.

서도운의 손짓에 그들은 주차장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앞에 선 남자를 위아래로 천천히 훑어봤다. 재활용도 못 할 쓰레기 같은 옷을 입고 다니던 남자의 과거를 떠올리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이야, 그렇게 입고 있으니까 멀쩡한 사람으로 보이네.”

“원래 멀쩡했어.”

“줘도 안 입을 쓰레기를 입고 다니던 놈이…….”

남자의 옷차림은 과하게 느껴지지 않으면서도 화려했다. 검은색 터틀넥 스웨터와 하얀 스키니 진, 짙은 갈색의 패딩 코트는 수수했지만, 무릎까지 늘어진 폭이 좁은 새빨간 목도리가 눈길을 끌었다.

“형은 언제 한국에 들어왔어? 이제 아예 들어온 거야?”

“응, 봄에 들어왔는데. 원구 형이 나 왔다고 안 해?”

“원구 형네에 안 간 지 꽤 됐어.”

“너 애인 생겨서 발 끊었다고 하던데, 진짜야?”

남자는 답을 피하며 목도리처럼 붉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착하고 조신하게 살고 있어.”

서도운도 게이 커뮤니티에서 유명했지만, 그보다 더한 유명 인사가 그의 앞에 선 남자였다.

맛집 발굴이 취미인 미식가는 키 크고 잘생긴 남자만 골라 앞뒤를 가리지 않고 먹어치우고 그 대가로 천국을 경험하게 해줬다.

“여긴 무슨 일이야?”

“일이 있어서.”

“이정원, 네가 여기 무슨 볼일이 있어?”

서른이 넘었음에도 한참 어려 보이는 남자는 대답하지 않고 목도리를 끌어당겨 그 끝을 잡아 뜯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양원구가 술집을 시작할 때부터 얼굴을 익힌 오랜 친구였다. 이정원은 전설적인 게이였지만 수더분한 성격에 순진한 구석이 있었다.

“내 매형이 백경 감독인 건 알지?”

그의 물음에 남자는 눈을 굴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백 감독 회사야. 네가 백 감독이랑 얽힐 일이 뭐가 있어?”

이정원은 곤란한 얼굴로 대답을 피했다.

“도운이 형, 우리 안 만난 걸로 하면 안 돼? 내가 사정이 좀 있어서…….”

어물거리는 남자의 말에 서도운은 한숨을 쉬었다.

이정원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은 그의 가족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 스스로 그런 것을 밝히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런 이정원이 무언가를 숨긴다면 새로 사귄 애인 때문일 게 뻔했다. 애인이 게이가 아닌 일반인이라더니 사귀는 걸 숨기는 모양이었다.

“모른 척하면 돼?”

“그래 주면 고맙지.”

금세 표정을 바꿔 생글거리는 얼굴에 그도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제 원구 형네서 같이 술 마시는 것도 안 되는 거야?”

“아니, 인…, 음……, 원구 형네는 내가 사고를 쳐서 안 가는 거야. 조용한 곳에서 만나 밥이나 먹자.”

“그래, 맛집 리스트나 보내줘.”

“응, 내가 연락할게. 담에 봐.”

서도운은 밝은 얼굴로 손을 흔드는 이정원을 뒤로하고 건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길지 않은 기다림 끝에 엘리베이터에 올라 5층 버튼을 눌렀다. 늘 오가던 익숙한 곳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그는 누가 뭐라고 하든 상관없었다. 어떤 말로 비꼬고 조롱하고 모욕해도 상처받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정선우는 아니었다. 단지 성적인 성향이 다르다고 해서 가해지는 비난을 정선우가 견딜 수 있을까 생각했다. 악의 없는 호기심에도 정선우는 말라 죽어갈 것이다.

그가 가진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것을 그 모습 그대로 지키려면 누구에게도 내보여선 안 될 것 같았다.

정선우를 모든 것으로부터 지켜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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