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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영역 싸움 (28/35)

28. 영역 싸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연인을 본 서도운은 부드럽게 웃었다. 볼을 토닥이며 아무 걱정 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그런 마음을 참는 게 그가 할 일이었다.

“아직도 난리야?”

바싹 다가서 작은 목소리로 묻자 정선우는 사무실 너머를 힐긋 쳐다보고는 대답했다.

“양쪽 다 아는 게 없어서…….”

“무슨 일인지 설명해줄 사람이 도망갔으니 어쩔 수 없지.”

정선우와 함께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잘 왔다”든가, “살려줘”라는 말이 들렸다. 서도운은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기획팀 사무실로 들어갔다. 커다란 테이블에는 기획팀장과 연 디자인 쪽 사람이 앉아 있었다.

백경이 영화로 말아먹고 난 후 돈 많은 부인이 프로덕션 운영을 맡았다는 건 아는 사람은 다 알았다. 연 디자인과 파트너가 되고 서도운은 백경의 처남이자 백경 프로덕션의 실질적인 운영자로 그들을 소개받았다.

서도운은 두 사람의 이름을 떠올리며 손을 내밀었다.

“좋지 못한 일로 뵙게 되네요, 주현영 팀장님.”

고양이 같은 인상의 여성은 그의 손을 잡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요, 서도운 씨.”

옆에 앉은 남자도 그에게 손을 내밀어 가볍게 악수를 나눴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박인서 팀장님은 여전히 미남이시고…….”

그는 자리에 앉아 기획팀장과 연 디자인의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대충 사정은 들었는데 어때요?”

기획팀장은 그의 말에 머리를 쥐어뜯으며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야 수습하지. 아는 놈은 도망갔으니……. 서 선생, 이놈을 어쩌지?”

“최근에 M그룹 관련자랑 백 감독이 미팅한 적 있어요? 연 디자인 쪽 사람 없이.”

그의 물음에 기획팀장이 의아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건 이 건이 아닌데. 지난번에 M의료 컨벤션 홍보영상제작을 맡았잖아, 그거야.”

“그때 백 감독 혼자 갔어요?”

“그럴 리가 있나, 우리가 그놈을 어떻게 믿고 혼자 보내. 이 대리!”

기획팀장이 누군가를 부르자 테가 굵은 안경을 쓴 수더분한 인상의 남자가 사람들 틈에서 튀어나왔다.

“이 대리, 그때 M의료 쪽 관계자만 만난 거 맞지?”

“네, M의료 홍보팀이랑 만나서 매체 설명 듣고, 컨셉 잡았어요. M그룹이나 M전자 쪽은 없었어요.”

서도운은 안경을 밀어 올리는 이 대리를 향해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그때 녹음했어요?”

그의 물음에 이 대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퍼 파일 속에 녹음기 넣어서 백 감독님 옆자리에 뒀어요.”

“안 지웠죠?”

“네.”

“들어봅시다.”

연 디자인의 두 사람은 당황한 얼굴로 그들을 쳐다봤다.

백경은 회의에서 자기가 한 말을 뒤집고 우기고 아니라고 떼를 쓰는 일이 허다했다. 견디다 못해 그들은 어느 순간부터 백경이 하는 말을 모두 녹음하기 시작했다.

외부 회의 때도 마찬가지였다. 클라이언트와 회의를 마치고 기획서를 만들어 세부적인 논의를 시작하면 백경은 누가 이따위 기획을 냈냐고 짜증을 냈다. 그들은 조용히 녹음한 것을 들려주며, 그따위 기획을 낸 건 네 놈이라고 알려줬다.

이곳에서는 녹음이 필수였다. 어쩔 수 없었다.

이 대리가 작은 녹음기를 가져와 회의실 테이블 위에 놓고 켰다.

녹음기에서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한참 오가다 조용해졌다. 갑자기 백경과 누군지 모를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지 모를 남자가 백경에게 M그룹 홍보 광고를 맡은 배우에 대해 말을 꺼냈다.

“이 대리, 이거 뭐야?”

기획팀장이 녹음기를 끄고 묻자 이 대리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MRI 기계를 보여준다고 해서 다들 같이 나갔는데 백 감독님이 없어서 담배 피우러 가신 줄 알았어요.”

“일단 계속 들어보죠.”

주현영 팀장의 말에 기획팀장은 다시 녹음기를 작동시켰다.

정체를 모를 남자는 M그룹 모델 교체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백경을 어르고 달랬다. 그러나 백경이 어물거리며 발을 빼자 위협적인 어조로 바뀌었다. 백경의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남자의 말만 이어지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제 뜻대로 안 되자 남자가 백경을 향해 소리를 지르며 모욕적인 언사를 퍼부었다. 남자는 백경에게 교체된 모델의 이름을 알려주고, “이거 백 감독도 동의한 거야”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얼마간의 정적 후 여러 사람이 이런저런 논의를 나누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컨벤션 장의 조감도와 부스 등을 설명하는 이야기가 이어지자 기획팀장은 녹음기를 껐다.

“이 대리, 이때 백 감독 상태 어땠어?”

“그게……, 안 계셨어요. 평소에도 담배 피우러 간다고 나가서 사라지니까….”

이 대리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이 대리한테 잘못했다고 하는 거 아냐. 이 새끼는, 그런 일이 있으면 있었다고 말을 해야지!”

기획팀장은 분통을 터뜨리며 담배를 꺼냈다가 혼자 있는 자리가 아니란 걸 깨닫고 내려놨다.

업계 사람들은 백경의 성격이 짜증 나는 애새끼 같다는 것만 알았지, 겁이 많고 낯가림이 심하다는 건 몰랐다.

백경이 폭력적인 상황에서는 입도 뻥긋 못한다는 사실은 가까운 사람만 아는 일이었다. 기획팀장이나 제작팀장은 그런 백경의 성격을 알고 있어 투덜거리긴 해도 면전에서 화를 내진 않았다.

미국에서 온갖 수상 경력을 줄줄이 단 백경이 한국에 들어오자 여기저기서 그를 불렀다. 사람을 만나는 일에 능숙하지 못한 백경은 자신의 약점을 숨기지 못했다.

업계 선배라는 이가 불러서 나간 술자리에는 폭력배들이 있었다. 그들은 백경을 끌고 가 주먹으로 두들겨 준 후 계약서를 내밀었다. 백경은 달달 떨며 무슨 서류인지 확인도 않고 사인을 했다. 선배라는 이는 그렇게 백경의 재능을 대가 없이 갈취했다.

뒤늦게 사실을 안 서도희의 보복이 이어졌다. 그녀는 백경을 혼자 둬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았다. 백경을 위해 회사를 만들고 백경을 돌봐줄 사람들로 채웠다.

백경 프로덕션은 백경을 보호하는 곳이었다.

회의실은 무거운 정적이 이어졌다.

“다시 들려주세요.”

주현영의 요구에 기획팀장은 스위치를 눌렀다. 회의실에 다시 고성과 욕이 울려 퍼졌다.

“박 팀장, 이거 그 사람 같지 않아?”

“누구?”

박인서는 주현영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M그룹 홍보 쪽에 안 이사랑 같이 나왔던 그 사람. 박 팀장한테 ‘입만 나불대는 얼굴 반반한 놈’이라고 한 그 사람 말이야.”

주현영의 말에 박인서가 느릿하게 웃었다.

“아, 주 팀장 보고 ‘지잡대 출신이 주제도 모르고 나댄다’고 했던 그 실장 새끼?”

“여기서도 ‘어린놈이 위아래도 모르고 설친다’고 하잖아. 딱 그 실장 새끼네.”

“안 이사 쪽을 찔러보면 알겠지.”

“팀장님, 이 부분만 파일로 복사해주세요.”

기획팀장은 주현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 대리, 제작팀장님한테 법원 제출용으로 떠달라 그래.”

이 대리는 녹음기를 들고 위층으로 달려갔다.

연 디자인을 이끄는 김성연 실장은 척추가 강철로 만들어졌다는 사람이었다. 마음에 안 들면 클라이언트고 뭐고 없었다. P그룹을 때려치울 때 낙하산으로 내려온 회장의 손자를 향해 면전에서 ‘개새끼’라고 욕을 한 위인이었다.

그 아래 두 팀장도 김성연 못지않게 뻣뻣한 걸로 유명했다. 두 사람은 회장 손자까지는 아니더라도 M그룹 본사 홍보 실장의 면전에 대고 ‘씹새끼’라고 욕을 할 만한 사람들이었다.

“주현영 팀장님, 그 사람이 누군지 확인되면 저도 알려주세요.”

서도운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네, 확인되는 대로 알려드릴게요. 소란을 피워서 죄송합니다.”

주현영은 기획팀장에게 고개를 숙였다. 기획팀장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연 디자인도 갑자기 그런 식으로 말을 들었으니 어쩔 수 없죠.”

회의실에 있는 네 사람은 서로를 보며 웃었다. 네 사람 모두 그 새끼가 어느 새끼인지 잡히기만 하면 죽여 버리겠다고 생각했다.

“팀장님, 부분 발췌도 가능한가요?”

“어디요? 제작팀한테 말만 하세요. 소음은 싹 지우고, 거기만 딱!”

기획팀장은 주현영에게 위층을 가리켰다. 그녀가 기획팀장과 일어나 제작팀이 있는 위층으로 가자 회의실에 남은 서도운과 박인서는 서로를 보며 멋쩍게 웃었다.

“아무튼 이 일은 잘 해결될 것 같네요. 앞으로도 백 감독을 잘 부탁드립니다.”

그의 말에 박인서가 웃으며 대답했다.

“백 감독이 다른 건 몰라도 자기 일은 잘하는 사람이라 그 점은 저희도 만족합니다. 다른 게 얽힐 일이 있나요?”

웃을 줄 모를 것 같은 석고상 남자의 미소는 놀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로 부드러워지는 인상에 놀라 그는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순간 서도운은 우연이라도 만날 일이 없는 곳에서 만난 누군가를 떠올렸다.

이정원.

박인서는 심각한 얼굴 밝힘증인 이정원이 홀딱 반할 만큼 잘생긴 남자였다.

문경운의 말이 떠올랐다.

“키 180cm 이상, 얼굴은 주먹만 하고, 팔다리 긴 모델 체형에 모델 얼굴이야.”

마포 돼지갈비집에서 우연히 봤다는 이정원의 애인에 대한 설명과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확인이 필요했다.

“다음에 식사나 같이 합시다. 조촐하게 모여서 백 감독 욕이나 하죠. 한잔하실 거면 돼지갈비는 어때요? 마포 인근에 돼지갈비 잘하는 곳이 있다던데…….”

“마포 돼지갈비집이요? 거기 맛있어요. 이번 일 끝나고 김 실장님이랑 다 같이 봅시다.”

“네, 날 잡아서 연락하겠습니다.”

서도운은 방긋 웃었다.

박인서가 이정원의 애인이었다.

* * *

제작팀이 있는 위층에서 내려온 이 대리는 복도에 있던 다른 직원들에게 잡혀, 돌아가는 상황을 모두 말하고 나서야 사무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사람들은 백경이 사고를 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쉽게 믿을 수 없는지 여전히 복도에 모여 웅성댔다.

주현영과 기획팀장이 잔뜩 굳은 얼굴로 위층으로 올라가자 그들은 다시 우르르 사무실 문 앞에 모였다. 유리문 너머 회의실에 나란히 앉아 있는 두 남자를 보며 이런저런 말을 하기 시작했다.

“서 선생이랑 박 팀장을 이렇게 보니까 꼭 촬영하는 것 같네.”

“박 팀장은 스타일이 화려하고, 서 선생은 마스크가 화려하잖아.”

“두 사람 분위기가 묘하게 어울려.”

“저기 정선우 씨도 넣어야 하는 거 아냐?”

“정선우 씨는 결이 좀 다르지. 저 두 사람이랑 안 어울려.”

정선우는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가지 않고 복도에 서서 회의실로 들어간 서도운을 기다렸다. 문 앞에 선 그들과 거리가 있었지만, 목소리는 충분히 들렸다.

“저 두 사람 이렇게 보니까 그림도 좋고 분위기도 좋네.”

“우리 서 선생이랑 박 팀장을 어떻게 좀…….”

대부분은 서도운이 동성애자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들이 몸담은 곳은 그런 것을 꺼려하는 분위기도 아니었고, 유일하게 백경에게 쌍욕을 하며 멱살을 잡을 수 있는 존재라 그들은 서도운이 한우를 사주는 회사 소유주라는 걸 떠나 매우 좋아했다.

그들은 서도운이 동성애자라는 사실로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그건 암묵적인 규칙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잘생긴 두 남자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에 지나치게 흥분했고 어느 순간 도를 넘기 시작했다.

“박 팀장 나이가 몇이야?”

“서른여덟인가 아홉인가?”

“서 선생이 서른셋이니까, 서른여덟이면 괜찮지 않나?”

“나이가 있어서 그런지 사람이 묵직해 보이고 안정감 있어.”

그제야 정선우는 그들이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는지 이해했다. 그들은 그의 앞에서 자신의 연인과 다른 남자를 엮고 있었다.

전 직장의 사람들은 그를 불러 그들의 대화를 듣게 했다. 상사 중 누군가가 그를 재수 없어 한다거나, 여직원 중 그를 좋아하는 멍청한 년이 있다든가, 같은 대학 출신인 누군가가 원래는 저렇게 생긴 놈이 아니라고 했다거나……. 자신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를 사물처럼 듣고 있어야 했다.

그런 건 언제나 당하던 일이라 익숙했다. 귀를 막고 소리를 흘려보내면 무어라 말해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건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귀에 박히듯 들렸다.

“박 팀장 솔로 맞지?”

“그거 유명하잖아. 엄청 오래 사귄 애인이 있었는데 다른 남자랑 결혼했다고.”

“이야, 보기 좋은 떡이 임자도 없는데 서 선생이 후루룩하면 되겠네.”

누군가의 말에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정선우는 갑작스럽게 치밀어 오르는 불쾌감과 분노에 두통을 느꼈다.

그건 서도운을 모욕하는 말이니 그만두라고 하고 싶지만, 어떤 점에서 모욕이고 어떤 점에서 모욕이 아닌지 구분할 수 없었다.

자신과 서도운이 잘 어울렸다면, 그들의 눈에 비친 박인서와 서도운처럼 잘 어울렸다면, 그들은 자신과 서도운을 두고 저런 말을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박인서’의 이름 대신 자신의 이름이 들어갔다면 싱글거리며 듣고 있었을 것 같았다.

“서 선생이 워낙 출중해서 누굴 데려와도 모자란데, 박 팀장 정도면 괜찮지. 김성연 실장님이 그렇게 아끼는 막내라잖아.”

“김성연 실장님이 키울만한 재목이지. 거기다 성격도 좋아.”

“사포라서 걸리면 멘탈을 갈아버린다던데?”

“우리 서 선생은 멘탈이 다이아몬드급일 걸.”

“하긴, 백경하고 한 해를 보낼 때마다 사리가 하나씩 쌓이니까, 서 선생은 한 사발이겠네.”

한탄 어린 말에 여기저기 큭큭대는 소리가 들렸다.

정선우는 저들 사이에 끼어들어 그와 서도운이 왜 어울리지 않느냐고 묻고 싶었다.

자신도 못생긴 건 아니었고 서른여덟보다는 스물아홉이 서른셋과 훨씬 더 잘 어울렸다. 그는 서도운밖에 없었고 서도운이 시키는 대로 다 할 수 있었다. 자신이 서도운과 훨씬 잘 어울린다고 말하고 싶었다.

“오, 둘이 쳐다보고 웃는데 분위기가…….”

“이야, 진짜 뭐 있는 거 아냐?”

“이렇게 썸 타나? 썸~썸~썸~썸~!”

누군가 박자를 맞춰 ‘썸’을 외치자 다들 웃으며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토할 것 같았다.

불쾌감이 피부 위로 올라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서도운과 사귀는 건 정선우였다.

그가 서도운과 사귀고 있으니 자신의 앞에서 그따위 말은 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위층에서 주현영과 기획팀장이 내려오자 서도운과 박인서를 놓고 온갖 말을 떠들어대던 이들이 우수수 흩어졌다. 위층으로 뛰어 올라가는 사람부터 기획팀 사무실로 달려가는 사람까지, 순식간에 모든 사람이 사라지고 정선우만 남았다.

영문을 모르는 두 사람은 어리둥절한 얼굴을 주위를 둘러보다 회의실로 향했다. 주현영은 박인서에게 녹음 파일을 들려주며 기획팀장과 이후 대응에 대해 이런저런 논의를 했다.

정선우는 두 사람을 따라 슬며시 회의실로 들어갔다. 서도운은 그가 들어온 줄도 모르고 박인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장 저곳에서 끌고 나와 집으로 가자고 하고 싶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기에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꾹꾹 눌렀다.

서도운의 시선이 그가 아닌 다른 남자에게 향하고 있다는 게 견디기 힘들어 뭐든 하고 싶었다. 할 말이 있다고 할까, 빨리 나오라고 전화를 할까, 기다리고 있다고 메시지를 보낼까……,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박인서와 시선이 마주치자 서도운이 부드럽게 웃었다. 예쁘게 휘어진 눈 끝에서 흘러내린 미소가 입술 끝에 걸려 환히 빛났다.

미칠 것 같았다.

그건 그가 처음 서도운을 만난 날, 서도운이 그에게 지어주던 미소였다.

그 환한 빛은 정선우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만 보여주는 빛이 아니었다.

혀끝에 느껴지는 피 맛에 놀라 급하게 입을 막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거울을 보며 아랫입술을 뒤집었다. 찢어진 여린 살 아래서 흘러나온 피가 세면대 위로 떨어졌다.

피가 멈추지 않았다.

실망하는 서도운의 모습을 떠올리자 가슴이 아려왔다. 입술이 아니라 가슴이 찢어진 것 같았다.

울 것 같아 안경을 벗어두고 얼굴을 씻고 계속, 계속 입안을 헹궜다.

피가 멈추자 얼굴을 닦고 다시 거울을 들여다봤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얼굴은 형편없었다. 부어오른 눈가와 새빨간 코끝이 바보스럽게 보였다.

당당하게 자신을 향하는 시선을 마주하던 박인서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는 그렇게 될 수 없었다.

그래도 서도운의 연인은 정선우였다.

지금 이 순간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정선우이길 바랐다. 무얼 어떻게 해야 서도운을 그의 것으로 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또 입안을 물어뜯을까 봐 손으로 입술을 눌렀다. 떨리는 손끝이 자신의 약함을 드러내는 것 같아 또 눈물이 나왔다.

화장실에 숨어서 우는 건 멍청이나 하는 짓이었다. 박인서 같은 남자가 될 수는 없어도 멍청이는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울지 않으려면 입안을 물어뜯어야 했다. 입안을 물어뜯지 않고 울음을 참는 법을 알고 싶었다.

화장실을 나오자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서도운과 박인서가 나란히 서 있는 게 보였다. 그렇게 두 사람이 영원히 그의 눈앞에서 사라져 버릴 것 같아 달려갔지만, 엘리베이터 문이 먼저 닫혔다.

놀라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텅 빈 계단을 울리는 자신의 발소리가 심장 소리 같았다.

다시는 서도운이 없는 집에서 서도운을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 * *

서도운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두 사람과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인사말을 나누던 주현영의 주머니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받은 주현영의 눈꼬리가 점점 올라가더니 박인서의 팔을 끌어당겼다.

“박 팀장, 그 모델 쪽에서 보도자료 뿌렸다는데 확인해봐.”

박인서는 주현영의 말에 가방에서 태블릿을 꺼내 뉴스를 검색해 보여줬다.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릴 만큼 주현영의 숨이 거칠어졌다.

“알았어, 난 여기서 바로 M그룹으로 간다고 전해줘.”

전화를 끊은 주현영은 태블릿으로 몇 가지 더 검색하고는 박인서에게 돌려줬다.

“김 실장님이 오 이사도 호출했대. 박 팀장, 난 바로 M그룹으로 가볼게.”

“일이 점점 꼬이네.”

“어휴, 애 아빠한테 뭐라고 말하지. 애 데리고 나올 준비 다 했을 건데…….”

“하는 수 없지, 복어 튀김은 다음에 먹으러 가자.”

“복어 튀김 먹으러 가자니까 애 아빠가 좋아서 춤까지 췄단 말이야. 그이가 복어 요리라면 환장하거든. 이정원 씨가 소개하는 맛집이면 얼마나 맛있을까……”

주현영은 주먹을 움켜쥐고 허공을 두들기며 욕을 해댔다. 그래도 분이 안 풀리는지 씩씩거리다 서도운을 보고는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서도운은 건물 입구에 서서 두 사람을 쳐다봤다. 이정원이 빨간색 소형차에서 내려 두 사람에게 다가가는 게 보였다. 세 사람이 무언가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주현영이 이정원이 내린 차에 타고 먼저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이정원은 당연한 듯 박인서와 함께 같은 차에 탔다. 건물 입구에 선 그를 봤는지 이정원이 작게 손을 흔들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오랜 친구의 숨겨둔 애인은 생각했던 것과 달라 보였다.

상대가 게이든 일반인이든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익숙한 듯했다. 이제 막 시작한 연인들 사이에서 오가는 간질거림이나 겨우 관계를 유지해가는 이들의 불안함은 없었다. 견고한 유대감이 느껴졌다.

이정원의 소식을 전하며 ‘아무리 지랄 같은 놈도 다 짝이 있다’던 양원구의 말이 떠올랐다. 그러니 그에게도 짝이 있을 거라고 했다.

아마도 그 짝을 찾은 것 같아 웃음이 새어 나왔다.

떠나가는 차를 보며 그도 자신의 연인과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려 건물로 들어서자 어디선가 튀어나온 손이 그를 끌어당겼다. 놀라 고개를 돌리자 어둑한 비상계단 끝에 선 그의 연인이 보였다.

“……보지 마.”

정선우가 덜덜 떨며 그의 팔을 움켜잡았다.

“무슨 일이야?”

그의 물음에 정선우는 대답 없이 시선을 떨궜다.

“왜 그래? 무슨 일인지 말해.”

시선을 회피하는 모습이 심상치 않아 턱을 잡아 그를 보게 했다. 얼굴을 잡은 손끝에 느껴지는 감각이 이상했다. 입술을 만지자 정선우는 턱을 잡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 뒤로 물러났다.

“물어뜯었어?”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걸 보니 그런 듯했다.

그가 배웅하러 내려온 그 잠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

누군가 C그룹 이야기를 꺼냈다든가 그때 돌았던 악의적인 소문이 전해졌을지도 모른다. 혹은 박인서와 정선우를 비교하며 외모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늘어놨을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든 자신이 지켜주지 못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리 와.”

손을 뻗어 끌어당기자 정선우는 순순히 끌려왔다. 뻣뻣한 몸을 품에 안고 천천히 등을 쓸어내렸다. 서로의 체온이 섞여갈 때쯤 정선우는 평소처럼 안겨 왔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소리에 그는 정선우의 손을 잡고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건물 밖에 설치된 조명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늘어졌다. 꼭 붙잡은 손으로 연결된 그림자를 보며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차에 타고 안전벨트를 매며 곁에 앉은 정선우의 얼굴을 살피자 슬며시 눈을 맞춰왔다. 조금은 나아진 것 같아 백도경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와 정선우가 처음 갔던 호텔에서 딸기 디저트 축제를 한다며 꼭 가보라고 했다.

“형이랑 처음 갔던 호텔 말이야, 오늘 거기 갈래? 거기서 자고, 내일…….”

서도운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흐릿한 어둠 사이로 정선우의 눈이 푸르게 보였다. 무표정한 가면이 아닌 표정이 지워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무언가를 삼키는 소리가 고요한 차량 내부에 울렸다.

그는 그것이 정선우가 입안을 물어뜯어 피를 삼키는 소리라는 걸 알았다.

재빨리 콘솔박스에서 티슈를 꺼내 닥치는 대로 뽑아내 정선우의 어깨를 잡고 끌어당겼다. 정선우는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밀어냈다. 몸싸움이 이어지자 서도운은 안전벨트를 풀고 정선우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도리질 치는 정선우의 입안에 움켜쥔 티슈 뭉치를 억지로 밀어 넣었다. 티슈가 금세 빨갛게 물들었다.

조그맣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정선우의 입에서 티슈 뭉치를 꺼내고 입술 안쪽을 살폈다. 부어오르고 찢어져 너덜거리는 살이 흘러나온 피로 감춰졌다. 다시 티슈를 잔뜩 뽑아 상처를 눌렀다. 글로브 박스 위에 정선우의 피에 젖은 티슈가 쌓여갔다.

“왜 그랬어?”

서도운은 비닐 봉투를 꺼내 피 묻은 티슈를 정리하며 물었다. 

돌아오지 않는 목소리에 옆자리를 쳐다봤다. 정선우는 마치 아이들이 가지고 놀다 던져둔 헝겊 인형처럼 보였다. 그를 밀어내느라 단정하던 머리나 옷깃이 흐트러져 엉망이었다. 손을 내밀어 천천히 정선우의 옷과 머리를 정리했다. 안경을 벗기고 젖은 눈가를 문지르자 다시 눈물이 새어 나왔다.

“……난, 호텔에 안 가…. 난… 집에 갈 거야…….”

잔뜩 쉰 목소리로 속삭이는 정선우의 말에 서도운은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다.

-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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