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흉터와 상처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두 사람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빌라 주차장에 차를 세운 서도운은 시동을 끄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차 안은 무겁고 답답한 공기만 가득했다.
차가 멈추면 정선우는 안달 난 아이처럼 차에서 내려 빌라 입구로 향하곤 했다. 그러면 그는 빌라 입구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정선우를 차창 너머로 보며 웃었다. 어둑한 주차장을 가로지르는 정선우의 뒷모습이 사라진 텅 빈 주차장과 입구에 켜진 노란 등이 스산하게 느껴졌다.
옆을 돌아보자 정선우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갸름하고 하얀 손가락 끝을 장식한 손톱은 전과 달리 깔끔하게 손질되어 있었다.
지난 주말, 정선우는 함께 아침을 먹고 다시 자려는 듯 침대에 누웠다. 그는 그런 정선우를 일으켜 내내 신경 쓰이던 손톱을 잘라줬다. 정선우는 자신의 손톱을 자르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보는지 묻자, 어릴 때 어머니가 잘라준 후 타인이 손톱을 자르는 것도 만지는 것도 처음이라 기분이 이상하다고 했다. 동그랗고 매끈한 손톱을 홀린 듯 쳐다보는 정선우의 모습에 그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내친김에 정선우의 발을 끌어당겨 발톱도 자르기 시작했다. 발을 만질 때마다 움찔거리기에 올려다보자 입을 꾹 다물고 간지러움을 참고 있었다. 새침한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는 게 우스워 발등에 입을 맞추고 복숭아뼈를 앞니로 긁자 정선우는 당황해 허둥거렸다.
눈을 맞추며 발목을 핥으니 정선우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옷자락을 끌어 내렸다. 부풀어 오르는 성기를 가리려 애쓰는 모습에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결국 진득하게 섹스를 하고 난 다음에야 남은 발톱을 자를 수 있었다.
정선우도 손톱을 보며 그와 마찬가지로 지난 주말을 떠올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는 정선우가 지나간 시간을 떠올리기보다는 자신을 바라봐주길 바랐다. 서로를 외면하며 각자의 공간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던 그의 부모처럼 자신과 정선우는 그러지 않기를, 정선우는 언제나 제 곁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기를 바랐다.
“형한테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다 들어줄게.”
서도운은 수많은 물음을 삼켰다. 정선우를 재촉하거나 다그치고 싶지 않았다. 상처받고 뒤로 물러난 연인이 스스로 그에게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집에, 갈 거지?”
그는 옆에서 들린 조그만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다른 데 가고 싶어?”
“다른 데는 싫어. 그냥, 집에 가.”
그가 차 시동을 끄자 정선우는 안전벨트를 풀고 문을 열었다. 문틈으로 스며들어온 찬바람에 차 안을 채운 온기는 금세 사라졌다. 정선우는 그를 보며 한참을 망설이다 덧붙였다.
“같이…… 집에 가.”
* * *
정선우는 서도운이 차려준 저녁 식사를 억지로 입에 밀어 넣었다. 입안의 상처를 신경 쓴 듯 식탁 위에는 부드럽고 무난한 맛의 음식만 가득했다. 언제나처럼 서도운은 어떤 게 맛있는지, 어떤 게 입에 맞는지 물었지만, 그는 누구를 향한 건지 알 수 없는 원망을 삼켜내는 데 바빠 입을 열 수 없었다.
식사가 끝나자 서도운은 달콤하고 부드러운 디저트를 권했다. 그가 고개를 젓자, 더 달콤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유혹했다.
“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는 대답을 않고 사용한 그릇을 정리해 식기 세척기에 넣었다. 서도운이 식사를 차리면 정선우는 그것을 치웠다. 그가 이 집에서 하는 일은 그 정도였다.
이곳에서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었다. 집은 언제나 깨끗했고 쌓인 세탁물도 없었으며, 냉장고에는 늘 신선한 음식이 채워져 있었다.
요정의 힘은 아니었다.
두 사람이 출근하고 난 다음, 업체에서 보낸 사람들이 와서 청소부터 빨래까지 모두 해치웠다. 서도운은 필요한 것이나 요구사항이 있으면 말하라고 했다. 메시지 한 통이면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그에게는 낯설고 어색했지만 서도운에게는 그러한 삶이 당연한 듯했다.
커다란 빌라 한 층을 통째로 쓰는 집도 아직 적응하지 못해 서도운 없이 혼자 있는 게 무서웠다.
어릴 때부터 그에게 주어진 공간은 그리 크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공간은 극단적으로 줄어들었다. 무언가를 소유하려면 금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여유가 필요했다. 작은 공간에서 살아간다는 건 꼭 필요한 것만 소유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에게 짐은 대학 기숙사 시절부터 캐리어 하나로 충분했다. 그건 서도운의 집으로 옮길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에게는 회계사 시험을 공부하던 책을 둘 곳과 서류, 몇 가지 물건을 넣어둘 곳만 있으면 충분했다. 그가 가져온 물건은 서랍 하나에 모두 들어갔다.
그는 그것으로 만족했지만 서도운은 그렇지 않은 듯했다.
이 집에서 유일하게 벽으로 분리된 공간인 드레스 룸에 들어가자 마치 백화점처럼 옷이 걸려있었다. 속옷부터 양말까지 없는 게 없었다. 과연 한 사람이 이 옷을 다 입을 수 있을까 감탄하고 있을 때, 서도운이 웃으며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네 옷이야.”
이런 건 부담스럽다고 말하려 했지만 서도운이 그의 표정을 읽은 듯 덧붙였다.
“네 옷장을 내가 처분했으니 내가 채워줘야지.”
서도운은 단정하게 걸린 옷들을 가리키며 언제 입고, 어떤 자리에 어울리며,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는지 하나하나 설명했다. 그는 서도운의 말에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에게는 어색하지만 서도운에게는 당연한 여유, 거기에는 그가 익숙해져야만 했다. 서도운의 옷과 나란히 걸린 자신의 옷처럼 함께 있으려면 그래야 했다.
서도운은 완벽한 남자였고 그와 달리 아무것도 모자란 게 없었다. 감정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서도운의 사랑을 필요로 하지만 서도운은 그의 사랑을 필요로 하지 않는 듯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불안해서 견딜 수 없었다.
때때로 혼자 퇴근해 집에 온 날은 드레스 룸에서 옷을 갈아입다 자신도 모르게 서도운의 옷 속에 파고들었다. 서도운의 옷에 여리게 남은 체취를 맡으며 한참 시간을 보내다 나오곤 했다.
꽃처럼 화려한 외모와 달리 서도운은 향수도 쓰지 않고 담배도 피우지 않아 체취가 연했다. 그런 체취가 섹스할 때면 흘러내리는 땀과 섞여 짙어졌다.
짙어진 체취는 달콤한 향기가 아닌 짐승의 체취 같아서 다정한 미소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섹스할 때 목이 메어올 정도로 음란해지는 남자를 떠올리면 당연하게 느껴졌다.
그는 그런 서도운의 향기만으로 두근거렸다. 서도운의 옷에 얼굴을 비비며, 그의 몸에도 서도운의 향기가 배어들기를 바랐다.
“형, 어디 가?”
정선우는 서도운의 모습에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씻으러 간 줄 알았던 서도운은 후드티에 청바지를 갈아입고 한 손에 파카를 들고 있었다.
“미안, 당직 스케줄이 바뀌어서.”
서도운이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는 주방을 나와 현관으로 나가는 서도운의 뒤를 따랐다.
집으로 돌아와 이어지는 시간은 평소와 다름없었지만, 어딘가 달랐다. 침묵은 전처럼 부드럽지 않았고 비껴간 시선 사이로 버석한 감정의 가루들이 떨어졌다. 그래도 서도운과 같은 공간과 시간 속에 있었다.
돌아올 것을 알지만,
겨우 몇백 미터 거리에 있다는 걸 알지만,
전화해달라고 하면 그가 잠들 때까지 속삭여 줄 것을 알지만,
그래도 오늘은 보내고 싶지 않았다.
잘 다녀오란 말 대신 멀찍이 서서 쳐다보는 그가 이상했는지 서도운이 파카를 입다 말고 그에게 다가왔다.
“선우야,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혼자 있기 싫었다.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칭얼대는 아이처럼 보일까 봐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함께 있고 싶었다.
자신을 이곳에 홀로 두지 않았으면 했다.
말 대신 눈물이 먼저 나올 것 같았다. 고개를 숙이고 수많은 감정처럼 눈물도 밀어 넣으려 했다.
볼을 쓰다듬는 서도운의 손길에 고개를 들었다.
“말해.”
계속 피했던 서도운의 시선을 마주하자 더는 견딜 수 없었다.
“……가지 마.”
“알았어.”
서도운은 생긋 웃고는 너무나 쉽게 그의 애원에 답했다. 파카를 벗으며 드레스 룸으로 향하는 서도운의 뒤를 그는 허둥거리며 쫓았다.
“그래도 돼?”
“안될 게 뭐야. 이 선생한테 대신해달라고 하면 돼.”
파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이명진에게 전화하는 서도운을 보면서도 그는 섣불리 기뻐할 수 없었다.
오도카니 선 그에게 다가온 서도운의 손끝이 입술을 스치고 볼을 쓰다듬었다. 서도운은 안도감 아래에 깔린,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탓하는 그의 감정을 읽은 듯했다.
“형이 네가 원하는 건 다 들어준다고 했잖아. 보기 싫은 사람이 있으면 말해. 죽이지는 못해도 죽고 싶게 만들어 줄 수 있어.”
평소와 다름없는 다정한 목소리였지만 그를 향한 시선이 달랐다. 길고 풍성한 속눈썹 아래 내리뜬 눈동자는 검은 꽃잎 사이로 보이는 어둠 같았다.
“아무것도 참지 마. 형한테 다 말해.”
볼을 만지던 손이 귓가를 쓰다듬고 목덜미를 끌어당겼다.
“혀 넣어도 돼?”
언제나 예고 없이 다가와 격렬하게 탐하던 입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입안의 상처를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아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이려다, 지금 키스한다면 키스만으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달았다.
그에게 키스에 대해 허락을 구하는 게 아니었다. 이어질 섹스에 대해 묻고 있었다.
격렬한 키스에 휩쓸려, 분위기에 취해 섹스를 하는 게 아니라 그가 선택하라고.
거절하면 서도운은 평소처럼 그가 잠들 때까지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가볍게 키스해줄 것 같았다. 그것도 좋지만 더 좋은 걸 하고 싶었다.
정선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도운의 허리를 감아 끌어안았다. 품에 안긴 남자의 존재가 커다랗게 느껴졌다.
“……섹스하고 싶어. 형이랑 섹스하고 싶어.”
“내일은 오후 진료니까 느긋하게 하자.”
서도운이 그의 귓가에 달콤하게 속삭였다.
* * *
계속 눈을 감고 있었지만, 다시 불면증이 시작된 것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어둠 속의 흐릿한 소리가 그에게는 너무나 선명하게 다가왔다.
베개 옆을 더듬어 안경을 썼다. 겨우 사물의 형태만 확인할 수 있는 여린 불빛에 서도운의 얼굴이 보였다. 굳게 감은 두 눈과 매끄러운 볼을 손끝으로 가만가만 훑으며 살폈다.
잠시 불안했던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타인과 함께 있으면 불안해져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군대에 있는 내내 한두 시간마다 자다 깨길 반복하다 제대할 때쯤, 수면유도제를 먹고 나서야 제대로 잠을 잘 수 있었다.
의사는 늘 스트레스를 받지 말고 긴장을 풀라고 말했지만 그건 그의 뜻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자려고 애쓸수록 잠은 오지 않았다. 무거운 머리와 귀를 울리는 이명 때문에 누울 수도 없었다. 때때로 치밀어 오르는 구토감에 멍하니 침대에 앉아 언제쯤 약을 먹지 않고 편하게 잠을 잘 수 있을까 생각했다.
서도운이 함께 살자고 했을 때 기쁨이 지나가고 이어진 것은 공포였다.
잠을 자지 못하는 고통스러운 날들이 이어지고, 또다시 약을 먹고, 약을 먹는 걸 서도운이 알게 되는 걸 떠올리자 모든 게 무섭고 끔찍했다.
그러나 서도운과 떨어져 홀로 있는 시간이 더 무섭고 끔찍했다.
그건 그가 견딜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렇게 가슴 가득 두려움을 품고 누운 침대는 예상과 달리 황홀했다.
섹스의 나른함은 달콤하고 서도운의 존재는 기적 같았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잘 자라고 속삭이는 목소리에 눈을 감고, 귓가를 맴도는 키스에 눈을 뜨면 밤이 지나가 있었다. 지금까지 어떻게 혼자 잠들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그런 날들이 이어졌다.
얼굴을 쓰다듬던 손은 목을 타고 어깨로 내려갔다. 단단한 어깨에서 팔로 손끝을 움직이며 매끈한 피부 위에 새겨진 흔적을 하나씩 되짚었다. 붉게 부어오르고 검붉게 변색된 그것은 키스 마크라 부를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인간이 인간을 물어뜯은 자국이었다.
상처를 되짚는 손끝에 흥분이 어리고, 온몸에 퍼져나갔다. “물어”라고 명령하던 서도운의 목소리가 다시 떠올랐다.
* * *
가벼운 입맞춤에 몸이 달아 끊임없이 키스를 해달라고 졸랐다. 그의 애달픈 부름에 서도운의 웃음소리가 귓가를 더듬었다.
몇 번의 짧은 키스와 몸을 어루만지는 부드러운 손길에 침대로 이끌려 가는 줄도 몰랐다. 옷이 벗겨지고, 서도운은 손 대신 입술로 그의 몸을 더듬었다.
“형, 더……, 더 해줘…….”
혼자만 옷을 벗은 게 부끄러워 서도운의 옷 안으로 손을 넣어 맨살을 더듬었다. 짧은 웃음소리와 함께 서도운이 그를 침대로 밀고 옷을 벗었다. 정선우도 남은 옷을 벗고 침대 위로 올라오는 서도운을 맞이했다.
성큼 다가온 남자는 언제나처럼 다정하게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웃는 거 보여줘.”
정선우는 서도운의 말에 자신이 웃고 있다는 걸 알았다.
기다려 준다는 말도, 원하는 대로 들어주겠다는 말도 기뻤다.
가지 말라는 말에 곁에 있어 주는 것도, 섹스에 대해 물어봐 주는 것도 기뻤다.
그 무엇보다 서도운과 함께 있다는 게 기뻤지만,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서도운의 앞에서 아이처럼 들뜬 게 부끄러웠다.
분명 얼빠진 표정을 하고 있을 것 같아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서도운은 가린 손을 치우고 그의 얼굴을 드러나게 했다. 나름 저항을 했지만 계속 “보여줘”, “보고 싶어”라고 속삭이는 목소리에 힘이 빠졌다.
그러나 부끄러운 건 여전해 눈을 마주할 수 없어 화끈거리는 얼굴을 베개 속에 파묻었다. 부드러운 웃음소리와 함께 서도운이 아릴 만큼 뜨거워진 귀를 핥았다.
“선우야.”
젖은 속삭임에 이끌려 고개를 돌렸다.
“뭐든 참지 말고 말해. 네가 원하는 건 다 들어줄게.”
“응…….”
조그맣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도 안 되고,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이 어떤 꼴을 하더라도 서도운이 사랑스럽게 여겨주기를 바라지만, 얼마나 모자란 인간인지는 절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건 자존심 같은 게 아니었다.
서도운의 애정과 신뢰를 받을 수 있다면 무릎을 꿇고 바닥을 구를 수도 있었다. 타인의 비웃음은 익숙했고 수치를 강요하는 놀림도 무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서도운의 눈에 한순간이라도 경멸이 어리면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서도운 앞에서는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이고 싶었다.
완벽한 존재는 아니더라도 누추한 그림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오늘처럼 자신보다 잘난 남자가 나타날 때마다 적대감을 드러내며 분노할 자신이 떠올랐다. 그건 질투였고, 자신이 얼마나 모자란 인간인지 여실히 드러내는 감정이었다.
그는 이미 충분히 작고 초라한 인간이었다. 더 작아지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서도운 앞에서만은 그랬다.
가장 멋지고 매력적인 자신의 모습을 서도운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이 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고 귀한 걸 서도운에게 주고 싶었다.
서도운은 그가 품을 수 있는 가장 밝고 따뜻한 것이었다. 그 밝고 따뜻한 것을 품에서 놓치지 않으려면 보여주지 못할 말이나 감정은 모두 삼켜야 했다.
삼키고 삼켜서 모두 지워야 했다.
서도운의 손이 한껏 달아올랐다가 식어버린 볼을 만졌다.
그 손에 볼을 부비며 웃으며 키스를 해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웃음도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괜찮아, 기다려 줄게. 천천히 말해.”
정선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뻗었다. 이제 말하지 않아도 키스를 해달라고 조르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가 서도운의 목덜미를 끌어당기자 귓가에 짧은 웃음이 들렸다.
입술에 내려앉은 키스는 공기처럼 가벼워 숨 쉴 때마다 날아가 버렸다. 그 장난 같은 입맞춤들로는 모자라 목덜미를 끌어안고 입을 내밀었다.
닿을 듯 말 듯한 입술 위에 서도운은 웃음을 흘리며 속삭였다.
“졸라봐.”
“……키스해줘.”
이어진 키스는 너무나 부드러워 몸이 녹아버릴 것 같았다. 입술로 입술을 쓰다듬고 부드러운 혀로 입안을 휘저었다. 구름을 삼킨 듯 뭉글거리는 키스였다.
정선우는 키스하는 내내 서도운의 등을 살금살금 어루만졌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서도운과 끌어안고 피부를 맞대고 있을 때면 둘이 섹스하고 있다는 실감이 나서 좋았다.
서도운은 운동을 좋아하기도 했고 잘했다. 시간이 날 때면 수영을 하거나 러닝머신을 달리는 남자는 옷을 벗으면 그저 아름답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섹스할 때면 서도운의 아름답고 탄탄한 육체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흥분해 숨을 헐떡이면 매끈한 피부 위로 잘 짜인 근육이 떠올랐다. 그 근육들 사이로 흘러내린 땀이 그의 몸으로 떨어질 때면 숨도 쉴 수 없었다.
서도운이 몸을 일으키자 정선우는 여린 한숨을 내쉬었다. 깃털 같은 흥분이 가슴에 내려앉아 심장을 간질였다. 이어질 행위에 대한 기대감을 담아 서도운을 바라봤다.
아랫입술을 뒤집어 상처를 확인하는 서도운의 손에 정선우는 입안에 감도는 비릿한 피 맛을 뒤늦게 느꼈다.
물어뜯은 상처에서 다시 피가 나고 있었다.
서도운은 아무 말 없이 티슈를 잔뜩 뽑아 상처에 대고 눌렀다. 무거운 한숨 소리에 가슴에 내려앉은 깃털이 커다란 돌로 변해 심장을 내리눌렀다.
정선우는 베개 옆을 더듬어 안경을 찾아 쓰고 서도운의 표정을 살폈다. 서도운은 무표정한 얼굴로 입안 상처를 살피고 피를 멈추게 하는 데만 신경 쓰고 있었다.
피는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피에 젖은 티슈 뭉치가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그도 조금씩 작아졌다.
피가 멈춰도 가슴속을 짓누르는 서도운의 한숨은 사라지지 않았다.
“형…….”
베개 옆에 가득 쌓인 티슈 뭉치를 치우던 서도운이 손을 멈추고 정선우를 쳐다봤다.
“잘못했어.”
서도운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고 재빨리 손을 움직여 남은 흔적들을 치우고 돌아왔다.
차라리 화를 내고 다그쳐 주길 바랐다. 서도운이 고개를 돌려 자신을 외면할까 너무나 무서웠다.
“형, 다시는 안 할게.”
화를 내고 다그치는 대신 서도운은 손을 내밀어 그의 입가를 매만졌다. 서늘한 손의 감촉에 저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또 피가 날 수 있으니까 그러면 바로 말해.”
“고칠게. 꼭 고칠게.”
서도운은 그를 외면하지는 않았지만 웃어주지도 않았다. 차가운 얼굴로 그의 입가만 만지작거렸다.
“아파?”
“아니, 안 아파. 하나도 안 아파.”
서도운의 물음에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선우야, 상처가 생기면 아픔을 느껴야 정상이야.”
“익숙해서 괜찮아.”
한 번도 본 적 없는 서도운의 낯선 얼굴에 정선우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쳐다봤다. 서도운은 그런 그를 어두운 시선 속에 가두고 고개를 돌리지 못하게 했다. 천천히 깜박이는 눈꺼풀 사이로 보이는 눈이 어두운 물처럼 일렁였다.
“나쁜 버릇이구나.”
“……나도 알아. 앞으로 다시는 안 할게.”
그의 말에 서도운의 한쪽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갔다. 그러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아서 무서웠다.
“형, 꼭 고칠게.”
입가를 만지던 서도운의 손가락이 입안으로 들어왔다.
“물어.”
정선우는 놀라 눈만 커다랗게 뜬 채 가만히 있었다. 서도운이 손가락에 힘을 줘 혀를 짓눌렀다. 손톱이 혀를 파고들었다.
“물어.”
고개를 저었다.
두려움에 호흡마저 덜덜 떨렸다.
“그럼 내가 물까?”
손가락이 그의 입안을 빠져나가 서도운의 입안으로 들어갔다.
이 사이로 짓눌리는 손가락이 보였다. 서도운은 살짝 깨무는 게 아니었다. 힘껏 자신의 손가락을 물어뜯고 있었다.
“형!”
정선우는 서도운의 손목을 낚아채 손가락을 입안에서 빼냈다. 잇자국이 남은 왼쪽 두 번째 손가락이 벌겋게 부어올라 있었다.
“형, 하지 마…….”
그는 서도운의 손목을 움켜쥔 채 덜덜 떨었다. 운다는 자각도 없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자신도 모르게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형, 내가 잘못했어. 다시는 안 그럴게.”
서도운은 그런 그의 앞에 오른쪽 팔을 내밀었다.
“물어.”
“안 할게, 다시는 안 할게…….”
“싫어? 네가 안 하면 내가 물 거야.”
입술을 말아 물고 고개를 저었다.
흘러넘치는 눈물 사이로 서도운이 입을 벌려 자신의 오른팔을 무는 게 보였다. 정선우는 서도운이 물어뜯기 전에 팔을 잡아당겼다.
“제발 그러지 마……. 내가, 다시는…… 안 할게.”
울먹이며 애원해도 소용없었다.
서도운이 자신의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입안에 퍼지는 피의 맛과 향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자신의 것과는 달랐다. 익숙한 불쾌함이 아니라 끔찍한 두려움이 입안에 고였다.
“잘못했어…….”
턱에 맺힌 눈물이 벌거벗은 몸 위로 떨어졌다.
“형……, 제발…….”
그를 향한 서도운의 시선은 무겁고 어두워서, 마주하고 받아내는 것만으로 숨이 막혔다.
“물어.”
잡고 있던 서도운의 오른팔을 끌어와 입술을 가져다 댔다. 지금이라도 그 명령이 거두어지기를 바랐다.
“물어.”
입을 벌려 서도운의 팔을 물었다.
가끔 서도운의 몸을 핥거나 물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것과는 달랐다. 섹스의 일부로 흔적을 남기고 싶다는 의미였을 뿐이었다.
“더 세게.”
덜덜 떨리는 턱에 간혹 그의 의도와 달리 힘이 들어갔지만, 그뿐이었다. 자신이 서도운을 물어뜯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더 세게.”
나직한 목소리에 서도운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만하고 싶다고, 잘못했다고, 용서해달라고 수십 번을 외쳤다. 그러나 서도운의 팔을 재갈처럼 물고 있어 어떤 말도 소리가 되지 못했다.
“제대로 안 물면 내가 할 거야.”
정선우는 아직도 잇자국이 선명한 서도운의 왼손을 쳐다보며 입안에 든 살을 짓씹었다.
입안에 들어찬 타인의 육체는 죽은 동물의 고기와 달랐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감각이 쌓였다.
한참을 씹어 입술이 아릴 정도가 된 후에야 서도운은 그의 입에서 팔을 빼내 흔적을 확인했다. 핏빛으로 부어오른 잇자국 주위의 살은 피가 배어 나온 것처럼 보였다.
“물어.”
이번에는 왼쪽 팔을 내밀고 말했다.
고개를 저었다.
“싫어……, 차라리 날 물어.”
“네가 안 하면 내가 해.”
내밀어진 왼쪽 팔 끝에는 서도운이 스스로 물어뜯은 손가락이 있었다. 두 번째 손가락은 잇자국을 따라 검붉게 변색되어 관절 전체가 퉁퉁 부어오르고 있었다. 부기와 멍이 빠질 때까지는 손가락을 못 쓸 것 같았다.
눈을 감자 이미 젖은 얼굴 위로 흐르는 눈물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입을 열어 내밀어진 왼팔을 물었다.
“내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계속해.”
이건 벌이었다.
끔찍한 벌이었다.
서도운이 내민 곳을 물어뜯는 동안 눈물은 멈췄다. 정선우는 버석하게 마른 얼굴로 서도운이 가리킨 곳에 입을 가져다 댔다. 입을 떼자 서도운은 또 하나 늘어난 상처를 살폈다. 양쪽 팔엔 손목부터 어깨 아래까지 벌써 대여섯 개의 잇자국이 만들어졌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입안은 얼얼하고 턱은 감각이 없었다. 가늘어진 눈매로 여려진 잇자국을 보던 서도운은 위로라도 하듯 그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물었다.
“힘들어?”
고개를 끄덕이자 서도운은 손을 내려 그의 턱을 문질렀다. 따뜻하고 커다란 손이 굳어버린 얼굴을 매만졌다.
“선우야.”
서도운은 키스할 듯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물어.”
고개를 옆으로 젖힌 서도운은 자신의 목을 그에게 내밀었다.
울고 싶었지만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입술 사이로 울음 대신 메마른 헐떡임이 새어 나왔다.
“형…….”
“아직 그만하라고 안 했어. 물어.”
눈앞에 내밀어진 남자의 목덜미는 그에게 익숙한 곳이었다.
꼭 끌어안고 그곳에 코를 묻으면 서도운의 체취를 느낄 수 있었다. 입술로 더듬으면 서도운은 부드럽게 웃으며 셔츠를 벗고 입을 맞출 수 있게 해줬다. 키스할 때면 버릇처럼 머리카락이 살짝 덮고 있는 목덜미를 매만졌고, 귀와 턱이 이어지는 부드러운 곳부터 단단한 어깨뼈까지 쓸어내리며 더 깊은 키스를 해달라고 졸랐다.
서도운의 목덜미가 입술에 닿는 감촉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 매끄러운 피부에 혀를 대면 어떤 맛이 나고, 그곳에서 나는 향기가 얼마나 달콤한지 알고 있었다.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어…….”
늘, 언제나, 매일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살아온 날만큼 더해진 후회는 대관식을 행하는 왕의 옷자락처럼 길게 늘어져 이제 걷기도 힘들었다.
어릴 때는 옥좌를 향해 홀로 걸어가는 왕처럼 그도 그렇게 걸어가면, 그의 삶도 언젠가는 왕관처럼 빛날 것이라 생각했다.
매시간, 매 순간 더해진 삶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지만, 삶의 끝에 이르면 그가 걸어왔던 그 길이 아름답게 반짝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살아온 날들은 아무런 의미나 가치가 없었다.
삶의 끝에 이르는 순간까지 고통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했다.
너무 힘들어서 일어날 힘도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작은 방에 웅크려 우는 것뿐이었다.
“안 하려고 했어…, 안 하고 싶은데…….”
지친 울음소리는 힘없이 내뱉는 한숨처럼 들렸다.
서도운은 정선우를 안고 등을 쓸어내렸다. 맨살을 어루만지는 서도운의 손길에 다시 눈물이 흘러나왔다.
정선우는 손을 뻗어 서도운의 몸을 더듬어 정말로 자신의 품 안에 있는지 확인했다. 꿈같이 사라져 버릴까 무서웠다.
“선우야, 아파야 해. 거기에 익숙해지면 안 돼.”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내가 어떻게 해야 해?”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
서도운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짜증 내고 화내도 돼.”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울어도 돼.”
작은 몸짓에 턱에 매달린 눈물이 떨어졌다.
“내가 다 받아줄게. 다 받아줄 테니까 계속 내 생각만 해.”
“……형만, 형만, 생각할게.”
서도운은 다시 자신의 목을 내밀었다.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젓는 그를 향해 서도운은 부드럽게 웃었다.
“내가 아픈 게 싫어?”
“싫어, 형이 아픈 건 안 해.”
그것만큼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었다.
서도운은 얼룩져 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정선우의 안경을 벗겼다. 안경 아래 붉게 짓무르고 부어오른 눈가를 따뜻한 손끝이 쓰다듬었다.
“그럼, 안 아프게 물어.”
“안 아프게?”
“그래.”
따뜻한 혀가 천천히 귓가를 핥다가 도톰한 귓불을 입에 넣었다. 서도운은 앞니로 물고 가만가만 씹다 아플 정도로 세차게 빨았다. 흠뻑 젖을 때까지 핥고 다시 씹고 빠는 걸 반복했다.
“아팠어?”
속삭이는 목소리가 타액으로 젖은 귓가에 울렸다.
정선우는 작게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저었다. 눈앞이 하얗게 변하고 어지러워서 제대로 생각을 할 수 없었지만 그건 물려서 아픈 것과는 다른 듯했다.
“물어.”
그는 서도운의 목으로 순순히 입술을 내렸다. 목을 물고 서도운이 알려준 것처럼 아프지 않게 물었다.
무엇이 아픈지, 아프지 않은지 구분할 수 없었다.
항상 아파서, 아픈 게 당연해서, 아프지 않게 되어버렸다.
알려줬으면 했다.
무엇이 아프고, 무엇이 아프지 않은지.
아프다고 말할 사람도 없고, 말한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었다.
혼자 살아간다는 건 그런 거였다.
모두 혼자 살아가고 있었고, 그도 그렇게 살아야 했다.
말하고 싶어도 말하는 법을 잊어버려 말할 수 없었다.
홀로 서야만 했다.
앉아 쉴 곳도, 기댈 사람도 없어 입을 다물고 버텨야 했다.
그 방법밖에는 몰랐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어떻게 기대야 하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모두 알려줬으면 했다.
서도운이 반대편 목을 내밀었을 때 그는 거부하지 않고 입을 가져갔다. 물라고 하는 곳은 모두 물어뜯고, 짓씹고, 멍이 들도록 빨았다.
뜨거워진 입술 위로 서도운이 “그만”이라고 속삭였다.
아쉬워서 속삭이는 입술을 물었다. 입안으로 들어온 혀를 빨고 씹자 웃음소리가 타액과 뒤섞여 목구멍을 간지럽혔다.
“흐응, 음……. 형…….”
부드러운 키스였지만 이상하리만치 달아올라 한순간 무너져 내렸다. 침대에 누운 그의 몸을 덮은 남자의 무게가 쾌감으로 다가왔다. 넘치는 흥분에 압도되어 서도운을 힘껏 끌어안았다.
서도운의 성기와 비벼지며 그곳에 모인 열기가 온몸으로 치달았다. 손끝까지 저릿한 희열에 숨을 헐떡이며 품에 안은 이를 애타게 찾았다.
전과 같으면서도 다른 섹스였다.
서도운의 손이 그의 성기를 훑어 내리며 끝을 비비면 엉엉 울면서 더 해달라고, 사랑해달라고 애원했다.
꼴불견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상하게도 부끄럽지 않았다.
성적인 쾌감보다 사랑을 받고 있다는 쾌감으로 머리가 이상해진 것 같았다.
그만큼이나 서도운도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는 생각에 기뻐서 사정 후에도 계속 울었다.
* * *
정선우는 낙인처럼 보이는 검은 얼룩 위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머리카락 끝부터 발끝까지 아름답고 소중한 존재였다. 곁에 누운 남자가 조금이라도 아프지 않기를 바랐다. 실수로라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사람의 몸에 자신이 상처를 만들었다.
서도운이 허락하고, 그가 남긴 자취였다.
손끝으로 선명한 잇자국을 따라 덧그리며 그것이 영원히 지워지지 않기를 바랐다. 지워지지 않을 흉터가 되어 서도운의 몸에 남겨지기를 바랐다.
그에게도 서도운이 그런 흔적을 남겨주기를 바랐다. 이를 박아 넣고 피가 나올 때까지 물어뜯어 줬으면 했다. 잠깐의 아픔으로 영원히 서도운이 남긴 자취를 가질 수 있다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상처는 아파도 흉터는 아프지 않았다.
상처는 나아도 흉터는 지워지지 않았다.
자신의 몸에 흉터처럼 서도운의 존재가 새겨졌으면 했다.
마음은 이미 담았는데, 눈에 보이지 않아서 불안했다. 그럴 때 지울 수 없는 깊은 흉터가 있다면 그것을 만지며 불안함을 지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손끝으로 서도운의 어깨에서부터 팔 위에 남겨진 상처를 더듬어 내려오며, 검붉은 색으로 퉁퉁 부어오른 두 번째 손가락까지 이르자 정선우는 잠이 오지 않는 이유를 깨달았다.
무서웠다.
서도운을 잃고 홀로되는 것이 잠들지 못할 만큼 무서웠다.
이제 그는 서도운이 없으면 살 수 없는데, 서도운은 언제든지 그를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 만날 때부터 서도운은 어른이었다.
어른의 여유.
그건 바보 같고 어리석은 그를 받아들여 주는 서도운의 품격이었다.
그 관대함에 반했고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자신만이 안달하는 것 같았다. 자신만 서도운을 간절하게 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숨을 쉬기 위해 들이마신 공기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목구멍을 헤집었다.
“형……, 형…….”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정선우는 아이처럼 훌쩍였다. 서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가 살아가는 데 가장 유용한 건 포기와 체념이었다.
삶이란 ‘적당히 타협’하는 게 아니라 ‘적당히 포기’해야 했다.
주어지지 않을 테니 탐내지 않는 것을 배워야 했고,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욕심내지 않는 법을 익혀야 했다.
욕심을 내면 그도 어머니도 상처받았다. 처음부터 욕심내지 않아야 고통받지 않을 수 있었다.
체념은 행복하지는 않아도 불행해지지 않을 수단이었다.
그렇게 살아야만 했다.
하지만 서도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처음부터 안 된다는 걸 알았지만, 포기할 수 없어서 여기까지 이르렀다. 나날이 더해가는 기대에 조금만 더 욕심내고 싶었다.
하나만, 꼭 하나만 가질 수 있다면, 모든 걸 버리고 서도운을 선택하고 싶었다. 모든 걸 주고 서도운을 붙잡아 영원히 떠나지 못하게 곁에 묶어두고 싶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서도운의 관대함에 기대어 애정을 구하는 게 아니라 사랑할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이고 싶은데, 언제나 초라한 아이였다.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 그도 남자이고 싶은데 키스조차도 어설픈 자신이 떠올라 서글펐다.
흐릿한 수면 등은 서도운의 몸 위로 보드라운 빛을 드리웠다.
정선우는 안경 아래로 손을 넣어 멍울진 눈물을 닦고 금빛의 윤곽선을 손으로 더듬었다. 밝은 빛 아래에 선 서도운은 누구도 손댈 수 없지만 지금 곁에 누운 남자는 그의 것이었다.
흉터도 상처도 없는 매끈한 어깨 위로 입술을 내리며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기를 바랐다.
* * *
서도운은 몸을 뒤덮은 압박감에 눈을 떴다. 자신의 등 위에 있는 사람이 정선우란 걸 몰랐다면 눈을 뜨기도 전에 욕을 내뱉으며 인상을 썼을 것 같았다.
주말에 야간 근무를 하고 낮에 잠들면 정선우가 잠든 그에게 키스하거나 몸을 만지는 건 알고 있었다. 잠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더듬는 손길이 귀여워 언제나 자는 척을 했다.
그러나 오늘은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키스나 더듬는 정도가 아니었다. 애널을 가득 채운 성기에서 오는 압박감은 상황을 깨닫는 것과 동시에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으응, 형……, 하아…….”
등 뒤에서 들리는 정선우의 신음은 당장 발기할 정도로 야했다. 그렇다고 이 상황을 계속 이어나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정선우가 자신의 입으로 직접적으로 섹스하고 싶다고 한 건 처음이었다. 그걸 생각하면 손으로 한 번 뺀 걸로는 부족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도 정선우도 감정적으로 무리했으니 욕구는 천천히 풀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잠도 안 자고 이러는 걸 보면 많이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서도운은 자신이 깼다는 것을 정선우가 놀라지 않게 내색할 방법을 고민했다. 일단 뒤를 가득 메운 커다란 성기부터 빼라고 하고 싶은데, 그렇게 말했다가는 두 번 다시 삽입하지 않을 것 같았다.
전 애인들이나 원나잇 상대와는 섹스한 후 함께 잠든 적이 거의 없어서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정선우가 아니었으면 자는 사람에게 뭘 하는 짓이냐고 욕을 하며 반쯤 죽였을 터였다. 정선우이기에 웬만하면 참고 받아주고 싶었지만, 너무 힘들었다.
“형…, 흐음, 형……, 아…….”
커다란 성기가 천천히 빠져나갔다가 천천히 들어오는 걸 반복하자 머리카락이 쭈뼛거리고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정선우의 신음을 듣다가 서도운은 이상한 걸 깨달았다.
아프지 않았다.
그곳이 감각이 없어질 만큼 찢어진 게 아닐까 걱정하다 정선우라면 결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피라도 났다면 새파랗게 질려서 자신을 깨웠을 것이다.
그의 목덜미에 남겨진, 키스 마크라고 하기엔 과한 멍 위를 정선우가 핥고 빨았다. 저릿한 통증에 신음이 나오는 걸 참으려 입술을 깨물었다.
다시 성기가 빠져나가며 뒤가 허전해졌다. 그 허전함을 채우듯 천천히 밀려 들어온 성기가 입구부터 안까지 내부를 긁었다. 넘칠 듯 채워졌지만, 정선우는 그것도 모자란지 허리를 꾹꾹 눌렀다. 부드러운 음모가 엉덩이에 닿아 비벼졌다.
압박감이 쾌감으로 변해 목구멍을 타고 넘어왔다.
“아, 읏, 형…. 형, 흐응, 음…….”
등 위로 떨어지는 땀과 가빠지는 호흡에 정선우가 얼마나 흥분했는지 느껴졌다. 그러나 성기는 여전히 느릿하게 빠져나갔다 다시 느릿하게 들어왔다.
“형……, 하아, 못 참겠어…….”
정선우가 그의 목덜미를 크게 베어 물고 힘껏 깨물었다.
“아악!”
고통스러운 외침에 정선우의 행동이 뚝 멈췄다. 그러나 안의 채운 성기는 저 혼자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흡, 윽…….”
서도운은 숨을 들이쉬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커다란 게 더 커져 안이 터질 것 같았다. 움직임과 함께 호흡까지 멈췄던 정선우가 그의 목덜미에 불규칙하게 뜨거운 숨을 뱉었다.
“하아…, 하아…, 형…….”
물어뜯긴 목덜미 위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달콤했다.
여전히 두툼한 성기가 천천히 내부에서 빠져나가자 온몸이 선득해졌다. 틀어막고 있던 커다란 성기가 사라지자 안을 가득 채웠던 무언가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서도운은 처음 겪는 일에 당황해 손을 뻗어 자신의 애널 위를 더듬었다. 입구는 뻥 뚫린 구멍처럼 닫히지 않았다. 놀라 힘을 주자 정선우가 안에 싼 정액이 울컥 흘러나왔다.
“형…….”
꺼질 것 같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하얗게 질린 정선우의 얼굴이 보였다. 팔을 뻗어 정선우를 끌어당겨 덥석 품에 안았다.
“괜찮아……, 자다 깨서 놀란 것뿐이야.”
“……응, 미안해.”
“안 잤어?”
“잠이 안 와서…….”
정선우는 안심한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가늘게 떨고 있던 하얀 몸이 토닥이는 손길에 천천히 가라앉았다.
“깨우지 그랬어? 난 네가 피곤할까 봐 더 안 했는데…….”
“형도…… 하고 싶었어?”
“응.”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선우는 바쁘게 오가던 눈동자 대신 고개를 들어 아직 창백함이 남은 얼굴을 보여주었다.
“넣으려고 한 건 아닌데…. 그게, 형 만지다가… 커져서……. 미안해.”
정선우는 그렇게 두서없는 변명을 시작했다.
어쩌다 보니 자신의 성기를 그의 엉덩이에 대고 비비게 되었고, 어쩌다 보니 주름진 그곳에 사정을 했다고 말할 즈음, 목덜미까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그걸 닦다가… 손가락이 들어가서…….”
정선우의 시원찮은 거짓말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샤워할 때 안까지 씻고 풀어두긴 했지만 누른다고 쑥 들어가는 곳은 아니었다.
“그건 어떻게 넣었어?”
주인처럼 풀이 죽은 성기를 내려다보며 묻자 정선우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형 깰까 봐 조금씩…, 넣었다 뺐어. 근데 넣다 보니 다 들어가서……. 형이… 넣을 때보다 더 천천히 했어. 안 아프게…….”
정선우의 말에 서도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안 아팠다.
완전히 발기하면 얼마나 큰지 그가 제일 잘 알았다. 입구가 완전히 이완될 때까지 저 큰 걸로 쑤셔댔다고 생각하니 기가 질렸다.
거기다 다 들어갈 때까지 넣는 줄도 모르고 자고 있었다니, 자신이 어지간히 무딘 사람이 아니라면 정선우가 지독할 만큼 천천히, 조금씩 넣었다는 뜻이었다. 정선우의 집요함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일단 자신의 몸이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일어나 불을 켰다. 침대로 돌아오며 무언가 다리 위로 흐르는 느낌에 놀라 고개를 내렸다. 정선우가 그의 안에 싼 정액이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섹스엔 나름 능숙했지만 이런 건 처음이었다.
과거의 그라면 콘돔 없이 안에 싸는 걸 허락할 리도 없었고, 불가피하게 쌌다고 해도 당장 욕실로 뛰어가 말끔하게 처리를 했을 것이다. 별다른 불쾌감이나 저항감도 없이 타인의 정액을 안에 담고 뒤가 열린 채 어슬렁거릴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서도운은 낯선 자신의 모습에 적응할 수 없었다.
나이트 테이블에 놓인 상자에서 마구잡이로 티슈를 뽑아 허벅지와 뒤를 닦아냈다. 벌어진 구멍에서는 조금만 힘을 줘도 주르륵 체액이 쏟아져 나왔다. 한숨을 쉬지 말아야지, 생각했지만 닦아도 닦아도 계속 나오는 정액에 참을 수가 없었다.
차마 정선우의 앞에서 뒤에 손을 넣어 남은 걸 꺼내고 싶지는 않아서 대충 처리하고 침대에 올라갔다.
정선우는 새하얗게 변한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는 대신 기다리기로 했다.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작고 나지막한 정선우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잘못했어.”
정색을 하며 따져 묻거나 화를 낼 생각은 없었다. 그랬다면, 잠에서 깨는 순간 명확하게 이별을 통보하고 자리를 떠났을 것이다.
서도운은 자신이 정선우의 성욕을 처리하는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다른 남자라면 돈을 던져주며 사람을 부르든 기구를 쓰든 알아서 해결하라고 했겠지만, 정선우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정선우의 유일한 욕망의 대상인 것을 알고 있었다. 정선우는 그에게만 성욕을 느끼고, 그에게만 반응했다. 서도운은 자신을 향한 정선우의 욕망을 원했다. 그에 더해서 자신에게 집착하도록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수면시간을 이런 식으로 방해받고 싶지는 않았다. 하려면 난잡할 만큼 확실히 하는 게 좋았다.
“아냐, 괜찮아. 잘……했어. 근데, 다음에는 혼자만 재미 보지 말고 깨워.”
그의 말에 정선우는 잠시 고개를 들었다가 맥없이 떨궜다.
“형, 나랑… 하는 거… 별로야?”
“뭐가?”
“……섹스.”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에 앞의 ‘섹’자로 뒤의 ‘스’자를 짐작했다.
“난… 좋은데… 형은…, 아닌 것 같아서…….”
섹스를 하고 난 다음, “어땠어?”라고 묻는 물음들에 그는 언제나 생긋 웃었다. 원나잇은 원나잇이라 답을 하는 게 의미 없었고, 사귀는 사이라면 내용이 어찌 되었든 좋다, 나쁘다 말하고 싶지 않았다.
전처럼 웃으며 답을 피할 수도 있었다. 너무 좋아서 미칠 것 같다고 칭찬해 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진실이 아니었다.
정선우의 성기는 너무 크고, 넣으면 아팠다.
아무리 정선우를 좋아한다고 해도 아픔을 참고 좋은 척, 쾌감을 느끼는 척 연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삽입 섹스를 안 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하고 싶은데 너무 아팠다.
사실대로 말해도 될까 망설이며 정선우를 살폈다.
안경 아래의 까만 눈동자가 불안함을 담고 그를 힐긋거렸다. 온몸에서 느껴지는 불안함에 다시 입술을 깨물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정선우가 얼마나 연약한지 그도 알고 있었다.
가슴 속에 고인 상처는 언제나 넘실거리며 조금만 흔들어도 눈물을 쏟아냈다. 그렇게 울면서 그의 발치에 옹송그리고 있었다.
입을 다물고 그가 주는 모든 것을 감내하고 곁에 있으려 했다.
정선우는 연약하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그건 또 다른 강함이었다.
그 강함이 그를 결코 배신하지 않을 거라고, 어떤 일이 있어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게 했다.
“난…… 섹스를 좋아하지 않아.”
정선우는 당황해 그를 빤히 쳐다봤다.
“가끔 사람이 그리워질 때가 있어. 같이 시간을 보내자고 하면 대부분 섹스하자는 뜻으로 받아들이니까…….”
“나도?”
불안함을 가득 담은 물음에 서도운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섹스를 하든 안 하든 너랑 있는 게 좋아.”
“응, 나도.”
“근데…, 삽입 섹스는 좀 힘들어. 너무 커서 넣으면 아파.”
“커서 아프다고?”
그의 말에 정선우는 멍한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있다가 다시 물었다.
“크면 좋은 거 아냐?”
“어지간히 커야지. 넣을 때마다 찢어지는 기분이야.”
커다랗게 벌어진 입과 창백하게 질리는 정선우의 얼굴에 그는 뒤를 닦으며 느꼈던 불쾌감이 모두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 그럼 넣지 말까?”
“또 그런 소리를 하면 두 번 다시 못 넣게 할 거야.”
정선우는 멍청하게 벌렸던 입을 꾹 다물고 눈만 말똥하게 떴다. 굳게 다물린 입을 보니 앞으로 삽입 섹스를 하지 않겠다고 할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뭐든 너랑 하는 거라서 좋은 거야. 너랑 하는 거니까 의미 있는 거야.”
안경 너머 불안함이 지워진 눈이 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형, 안아 줘.”
품을 파고든 남자의 손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의 몸을 더듬었다.
“형……, 형…….”
정선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계속 서도운만 불렀다.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모를 시린 감정은 가슴을 얼렸다. 온몸을 파고드는 차가움에 홀로 떨며 간곡하게 빌었다.
누군가 곁에 있어 주기를.
서도운은 그를 품을 안은 채 침대에 누웠다. 등 뒤에 닿은 이불이 얼음 같아서 몸이 떨렸다.
“추워?”
“……응.”
그는 서도운을 올려다보며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잔뜩 웅크린 몸 위를 서도운의 체온이 덮었다. 몸을 누르는 묵직한 무게에 심장을 감싼 얼음들이 부스러졌다.
“형…….”
온기를 바라며 서도운을 끌어안았다.
팔과 다리가 얽히고, 피부로 체온이 전해졌다. 마주한 가슴으로 전해지는 심장 울림이 그의 것을 대신해 뛰고 있는 것 같았다.
흐린 어둠 속에서 그 무게를 주체하지 못하고 가라앉던 감정이 떠올라 서도운에게 닿았다.
추락하던 감정의 골은 끝이 없어 언제나 그를 비참하게 했다. 스스로가 하찮고 쓸모없다는 결론에 이르러서야 바닥이 보였다.
서도운의 손이 그 깊고 더러운 구덩이에서 그를 잡아당겼다.
“선우야, 네가 원하는 걸 말해.”
입술 위를 흐르는 속삭임에 참아왔던 모든 것을 토해내고 싶었다. 단 한 마디만 꺼내면 지금까지 삼킨 수많은 말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모두 해서는 안 될 말이거나, 이루어질 수 없는 말이거나,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이기에 삼킨 것들이었다.
날카로운 가시가 목을 찌르고 겁먹은 심장에서 다시 한기가 스며 나왔다. 추위와 통증에 서도운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괜찮아, 천천히 해도 돼. 계속 옆에 있을게.”
서도운이 열지 않는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좁고 어두운 틈을 헤집어 나타난 손이 그의 볼을 쓸어내렸다. 사람의 체온을 담은 그 손은 그의 곁에 누군가 있음을 알려줬다. 눈물을 닦아주며 더 이상 홀로 견디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정선우는 그 손에 매달렸다.
“형……, 나만 봐.”
그의 말에 서도운의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어렸다.
서도운은 자신의 것이었다.
온전하게 서로를 바라보며 그 시선을 독점하는 것도,
품에 가득 안고 키스를 해달라고 조를 수 있는 것도,
모든 것을 벗고 온기를 나눠달라고 할 수 있는 것도,
모두 정선우만 할 수 있었다.
“나 말고 다른 남자는 보지 마. 나만 봐.”
그의 말에 한순간 피어나는 꽃처럼 서도운의 표정이 변했다.
부드럽게 휘어진 눈 끝에서 흘러내린 감정이 입술 양 끝에 고였다. 기쁨이라는 감정이 형태를 가지고 서도운의 주위에서 반짝였다.
“그래, 그렇게 욕심을 내. 날 붙잡아.”
손을 내밀어 환하게 웃는 남자의 얼굴을 만졌다. 꽃 같은 남자는 붉은 입술을 한껏 끌어올리며 그를 바라봤다.
“형, 난 특별하다고 해줘. 난 다르다고 해줘.”
“넌 특별해, 넌 달라.”
“형한테 나뿐이라고 해줘.”
“너뿐이야. 너밖에 없어.”
커다란 남자의 손이 안경을 벗기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말갛게 지웠다.
“그래, 너뿐이야. 내가 여기까지 마음을 내준 건 네가 처음이야. 나도 이게 처음이야.”
“나도 형이 처음이야.”
“알아, 너한테는 내가 처음이고 끝이야. 그렇지?”
서도운의 말에 정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는 서도운이 처음이고 끝이었다.
누구도 서도운처럼 그를 매혹시킬 수 없었다.
서도운뿐이었다.
“응, 형뿐이야. 형밖에 없어, 다른 사람은 없어. 다른 사람은 안 돼.”
서도운의 입술이 닿자 정선우는 입을 벌렸다. 더 깊은 접촉을, 더 뜨거운 체온을 원하며 입안에 들어온 혀를 받아들였다.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거친 키스였다.
정선우는 진짜 물어뜯기는 게 어떤 건지 그때야 알았다. 그는 이로 상처를 내고 아프게 한 것에 불과했다. 서도운은 상처를 내고 아프게 하지는 않았지만 잡아먹힌다는 공포를 느끼게 했다.
무자비한 키스 후에 서도운이 손을 내려 그의 성기를 난폭하게 쥐고 흔들자 덜컥 겁이 났다.
“흐읏, 형, 형!”
“시발, 빨리 좀 해봐.”
“형, 제발…, 제발 천천히…….”
정선우는 흥분한 서도운의 등을 쓸어내리며 진정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진정하기는커녕 서도운은 하얗게 이를 드러내고 방긋 웃었다.
“무서워?”
서도운은 몸을 일으켜 자신의 아래에 누운 남자를 내려다봤다.
그를 향한 정선우의 여린 욕심이 사랑스러웠다. 그 욕심이 집착이 되어 그의 목을 조르고 집어삼키기를 바랐다.
자제심을 찾으려 심호흡을 몇 번이나 반복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깊은 호흡은 깊이 숨겨둔 흥분까지 끌어냈다. 정선우의 독점욕은 그의 뇌에서 이성을 없애버렸다.
정선우는 감정을 희한하게 표현했다. 분노는 쓰러질 때까지 참다가 우는 것이고, 질투는 온 마음을 다해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감정의 바탕에는 사랑해달라고, 사랑한다고 외치는 작은 정선우가 있었다.
사랑하는 것도, 받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었다.
사랑은 모자라면 부스러지고 넘치면 썩었다. 한결같기 위해서는 서로를 믿는 수밖에 없었다.
서도운은 정선우를 가슴에 담았다.
얼마나, 어떻게 사랑하든 그것을 당연하다 여기고 나태해지지 않을 남자였다. 그가 뭐라고 말하든 기꺼이 따를 남자였다.
흘러넘치는 감정이 정선우를 적시고 스며들기를 바라며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살아서 두근거리는 심장의 박동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지금 그가 원하는 건 하나였다. 정선우가 흥분에 못 이겨 울면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걸 듣고 싶었다.
그는 정선우의 몸 위에서 내려와 성기 위에 엎드렸다. 이제 부풀기 시작한 성기를 보니 애가 달았다.
부드러운 음모 위에 늘어진 커다란 것을 쥐고 혀를 내밀어 귀두 아래 움푹 파인 곳부터 회음부까지 핥았다. 아직 흥분하지 않아 살짝 늘어진 고환을 입에 넣고 빨았다. 정선우가 신음을 내지르며 허벅지를 오므렸다. 어깨와 손으로 움츠러드는 다리를 벌리자 다급하게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정선우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반대편 고환에 입을 맞추며 앞니로 살짝 깨물자 허리가 들리며 정선우의 몸이 튀어 올랐다.
“형!”
그는 천천히 성기를 쓰다듬으며 일어났다. 이불을 움켜쥐고 벌벌 떨고 있는 정선우의 모습에 군침이 돌았다.
“선우야, 형이 급해. 빨리 안 세우면 물어버릴 거야.”
“어, 어딜?”
정선우의 물음에 그는 손을 가득 채우고 단단해지기 시작한 성기를 내려다봤다.
“어우, 형, 그건….”
서도운은 당황한 정선우의 말에 생긋 웃으며 성기를 입에 담았다. 요도를 혀끝으로 문지르자 조그만 구멍이 벌름거리며 쿠퍼액을 싸댔다. 쾌감을 끌어 올려 사정을 시킬 거라면 계속 귀두를 자극하고 성기를 빨아주면 되지만, 지금은 정선우의 쾌감이 아니라 단단하게 곧추선 좆이 필요했다.
그는 귀두에 가벼운 입맞춤을 남기고 다시 고환을 입에 넣었다. 줄줄 흘러내리는 쿠퍼액을 성기 전체에 펴 바르듯 부드럽게 문지르며 고환을 빨아주자 정선우는 여린 신음을 내뱉었다. 헐떡임 사이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신음 소리가 아찔할 만큼 음란했다.
손을 내려 자신의 엉덩이 사이를 더듬었다. 아직도 조금씩 무언가 새어 나와 축축하게 젖어 있는 주름 위를 문지르며 손가락을 넣었다. 하나도 겨우 들어가던 곳에 단번에 세 개가 들어갔다.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늘은 끝까지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았다.
몸을 일으켜 성기를 잡아 끝을 주름 위에 문질렀다. 전과 달리 부드럽게 주름이 벌어지며 귀두 끝을 물고 우물거렸다. 얼른 넣어 달라는 듯 좆을 빨아대는 그 움직임에 웃음이 나왔다. 신체의 일부가 욕망을 드러내며 재촉했다.
천천히 몸을 내리자 커다란 성기가 매끄럽게 안으로 들어왔다. 한계까지 벌어진 입구는 아픔 없이 익숙하게 정선우의 성기를 삼켰다.
내부로 완전히 들어온 성기는 배를 가득 채우고 가슴을 지나 목구멍까지 닿을 듯했다. 압박감에 속이 울렁거렸다.
“하아, 하아…….”
“형…….”
이명처럼 속삭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괜찮아?”
그를 올려다보는 정선우의 시선에 정복감을 느꼈다. 쾌감보다 더 큰 희열이 퍼져나갔다.
“넣었어.”
숨을 헐떡이며 답했다.
정선우가 손을 내려 한계까지 팽팽하게 당겨진 주름 위를 더듬었다. 자신의 성기가 그의 안에 모두 들어가 빈틈없이 맞물린 것을 손끝으로 확인했다.
“전부…… 들어갔어.”
서도운이 자세를 잡으며 허리를 숙이자 안을 채운 커다란 것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다시 들어왔다. 잔뜩 벌어진 입구가 움찔거리며 등을 따라 알 수 없는 쾌감이 내달렸다.
그는 밭은 숨을 내쉬며 정선우와 시선을 맞췄다.
“……안 아파?”
“하아, 끝내주게 좋아.”
두려움과 걱정을 가득 담은 정선우의 눈을 보며 서도운은 웃었다. 새어 나오는 바람 같은 웃음소리는 자신의 귀에도 기이하게 들렸다.
급할 건 없었다. 아픔이 사라진 자리를 채운 낯선 쾌감에 적응하기 위해서라도 긴 섹스가 필요했다. 서도운은 낮은 신음을 흘리며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서도운이 그의 배 위에 올라타 신음을 흘리며 나긋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정선우는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술을 병째 들이켠 기분이었다. 목구멍은 바싹 타고 위는 뜨겁고 아릿했다. 취기가 오르듯 현기증이 나 서도운의 허리를 붙잡았다.
“형……, 죽을 것 같아…….”
꺼질 듯한 속삭임에 밝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키스해줄까?”
“응….”
고개를 내린 서도운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입술을 비볐다. 말라버린 입술이 안타까워 혀를 내밀어 촉촉해질 때까지 핥았다. 다시 웃음소리가 들렸다.
땀으로 젖은 매끈한 등을 어루만지며 짧은 입맞춤을 반복했다. 키스와 나른한 흥분이 물결처럼 그의 몸을 감쌌다.
흘러내린 땀으로 서로의 몸이 젖어 들 때쯤, 서도운의 허리짓은 점점 빠르고 격렬해졌다. 목까지 차오른 흥분에 숨이 막혔지만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정선우는 손을 내려 서도운의 허리를 움켜잡았다.
있는 힘껏 성기를 밀어 넣자 부드럽게 감싸던 내부가 뿌리 끝까지 성기를 움켜쥐고 조였다. 견디기 힘든 쾌감이 밀려왔다.
“아……, 형…….”
성기를 깊숙이 쑤셔 넣을 때마다 서도운은 길고 낮은 신음을 흘렸다.
“흐윽…, 아…….”
입술 위를 스쳐 가는 음란한 소리에 서도운의 얼굴을 보고 싶다가도, 막상 보면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내뱉은 호흡 속에 신음을 섞어 그의 이름을 불러줄 때면 정선우는 치미는 사정감에 목이 막혀왔다.
자신으로 인해 쾌감을 느끼는 서도운의 모든 것이 견딜 수 없었다.
“흐음, 하아…. 선우야…….”
“아, 형, 못 참…….”
채 이어지지 않는 다급한 말에 서도운이 그의 귓가를 입술로 더듬으며 속삭였다.
“안에 싸, 형 안에 싸.”
“응, 응…….”
숨 막히는 쾌감과 끝을 모르는 나른함이 정선우의 온몸을 감쌌다. 발끝으로 설 수 있을 듯 가볍던 몸이 가라앉으며 갑자기 아래로 떨어졌다.
그는 익숙한 구덩이 앞에 엎드려 서도운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살아있는 게 힘들었다.
매일 조금씩, 좀 더 아래로 추락했다. 바닥이라고 생각한 곳은 바닥이 아니었다. 더 어둡고 추운 곳이 있었다.
죽는 것보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고 다시 하루가 반복되는 게 더 겁났다. 언제까지 살아있어야 하나, 언제까지 견뎌야 하나, 그렇게 생각하며 하루를 보냈다.
서도운을 만난 순간부터 모든 게 바뀌었다.
이제는 그렇게 살지 않아도 괜찮았다.
서도운은 끝을 모르는 깊고 어두운 곳에서 허우적대던 그를 붙잡아 자신의 곁으로 끌어당겼다.
그는 그제야 행복하게 사는 게 어떤 건지, 사람의 온기가 얼마나 따뜻한지 알았다.
홀로되는 두려움도 알았다.
두렵다고 해서 어떤 사람의 품이든 상관없는 건 아니었다.
그를 춥고 어두운 곳으로 내몬 것도 ‘사람’이었다.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칼날이 되어 박혔고, 그들의 시선은 공기 중에 섞인 가시처럼 숨 쉬는 것조차 힘들게 했다.
항상 무엇을 잘못했나 생각해야 했고, 모든 걸 반성해야 했다.
바닥에 이르러 태어난 게 잘못이란 걸 깨달았다.
매일매일 죽지 않은 것을, 살아있는 것을 반성해야 했다.
그래도 살아있어서 다행이었다.
죽지 않고 살아서 서도운을 만났다.
“형…….”
정선우는 참았던 숨을 내뱉으며 서도운의 목덜미에 땀에 젖은 이마를 비볐다. 서도운의 체취가 그를 감쌌다.
두껍고 커다란 꽃잎 속에 싸여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