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피어나는 심장
정선우는 입술에 남은 키스의 자취를 혀끝으로 더듬었다. 좀 더 길게 하고 싶었지만, 콧물을 훌쩍이자 서도운은 웃으며 입술을 거뒀다.
맥주를 마셔 아쉬움을 달래려 해도 입술에 남은 감촉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서도운을 보기만 해도 달아오를 것 같아 차마 바로 보지도 못하고 바 테이블 위에 올려진 손을 시선의 끝에 담았다.
보는 것만으로 애가 타서 결국은 손을 내밀어 서도운의 손을 잡았다. 커다란 손은 평소와 달리 차갑게 굳어있었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그의 볼을 감싸던 게 떠올라 서도운의 손이 따뜻해질 때까지 매만졌다.
슬쩍 고개를 들자 생글생글 웃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내가 옆에 있다고 해도 많이 마시지 마.”
“많이 안 마셨어. 겨우 두 잔인데…. 형이나 그만 마셔.”
“알았어, 이것만 마실게.”
그의 말에 서도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양원구가 새로운 맥주와 잔을 내밀자 서도운의 손이 그의 손을 빠져나갔다.
텅 빈 손이 안타까웠다.
서도운의 손을 다시 붙잡아 내내 쥐고 있고 싶었다.
서도운의 목덜미를 쓸어내리고 등을 감싸 안고 싶었다.
서도운과 닿고 싶었다.
바 체어를 옮겨 서도운의 곁에 바싹 붙어 앉았다. 두 사람 사이에 카멜색 코트 자락이 늘어졌다.
정선우는 손을 뻗어 서도운의 허벅지 위에 손을 올렸다. 양원구와 이야기를 하던 서도운은 자신의 허벅지에 올려진 손을 보더니 고개를 돌려 그에게 속삭였다.
“만지지 말고 가만히 있어.”
“왜?”
“설 것 같아.”
갑자기 목이 말라와 맥주잔을 들었다. 몇 모금 마신 후 가만가만 허벅지를 쓰다듬자 서도운이 다시 고개를 돌려 속삭였다.
“자꾸 그러면 집에 가기 전에 덮칠지도 몰라.”
“……해도 돼.”
“여기서?”
“응.”
슬며시 고개를 들어 자신을 보고 있는 서도운의 눈을 마주했다. 부드럽게 휘어진 눈 끝에서 달콤함이 흘러나왔다.
“알았어, 이 잔만 비우고 집에 가자.”
서도운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들었다. 두어 모금 남은 맥주는 마른 입안을 적시지도 못했다.
“형, 한 잔 더 마셔도 돼? 빨리 마실게.”
그의 말에 서도운은 웃음을 터뜨리며 맥주를 더 주문했다.
양원구는 서도운 앞에 맥주병과 잔을 놓으며 떫은 얼굴로 두 놈을 쳐다봤다. 솔직히 배알이 뒤틀려 꼴도 보기도 싫은데 워낙 잘생긴 두 놈이 시시덕거리니 저절로 눈이 갔다.
아주 좆같았다.
애인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남의 애정행각은 눈꼴이 시게 마련이었다. 솔로였으면 벌써 쌍욕을 한 바가지는 퍼부었을 것 같았다.
그 정도로 두 놈이 하는 짓이 정말 좆같았다.
정선우는 섹스는커녕 스킨십도 안 해서 전 애인에게 차인 남자였다. 그게 오래전 일도 아니고 올해 초에 그의 술집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섹스를 하지 않는다고 해도 사귀자는 남자가 줄을 설 정도라기에 대체 얼마나 잘생긴 놈인가 궁금했다. 얼굴을 보는 순간 그럴 만도 하구나 싶었다.
정선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타인의 시선을 철저하게 무시했다.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고고한 선비나 도도한 고양이 같다고 소곤거렸지만, 그의 눈에는 잘 만든 인형같이 보였다.
갸름한 아몬드형의 눈은 흐린 조명 속에서도 푸르스름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그건 사람의 눈이 아닌 유리로 만든 인형의 눈이었다.
양원구에게는 정선우의 외모에 홀려 달려드는 놈들이 어리석게 보였다. 그는 저런 눈을 가진 사람은 아무리 감정을 쏟아도 되돌려주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신의 감정이나 타인의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인간과 연애를 해봐야 흉내 내는 것에 불과했다.
정선우와 마찬가지로 잘생겼지만 연애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 또 있었다.
서도운은 몇 개의 제비를 내밀든 가장 낡고 더러운 것을 뽑는 이상한 인간이었다. 안 될 놈들만 골라 사귀니 연애에 실패하는 것도 당연했다.
처음에는 굿이라도 해야 하는 더러운 팔자인가 싶었지만, 좋은 남자를 소개시켜 주면 하룻밤 같이 지내는 걸로 끝냈다. 좋은 남자는 결코 사귀지 않았다.
겉은 멀쩡해도 쓰레기 같은 놈만 골라 사귀는 것, 그게 서도운의 취향이었다. 그렇다고 쓰레기 같은 놈들에게 자비로운 손을 내미는 구원자도 아니었다.
서도운과 사귀며 그에게 찾아와 하소연을 하던 놈이 있었다. 서도운이 자신을 돈을 주고 산 물건 취급한다고 말했다. 양원구는 코웃음 치며 서도운을 ATM으로 취급했으니 당연하지 않느냐고 대꾸했지만 그게 둘이 되고 셋이 되니, 서도운이 취향뿐만 아니라 다른 곳도 이상하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서도운이란 남자는 그런 비틀린 연애관 외에는 모든 것이 바르고 완벽한 남자였다. 그 비틀림이 안타까울 정도로 좋은 사람이라, 양원구는 서도운에게 딱 맞는 비틀어진 사람이 나타나길 바랐다.
그게 설마 정선우일 줄은 몰랐다.
양원구는 미친 듯 휴대폰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문경운을 흘깃 쳐다봤다.
두 사람이 옥상으로 사라지자 문경운은 정선우가 전 애인과 헤어진 그 날 둘이 눈이 맞은 것 같다는 황당한 말을 했다. 환승은 빠를수록 좋다지만 그건 대중교통 얘기였다. 헤어진 당일에 서도운으로 갈아탄 정선우나, 그 상황에서 정선우를 꼬신 서도운이나 아침 드라마 막장 전개의 끝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뭔가 속닥거리는 좆같은 두 놈을 보고 있으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가 보기엔 분명 둘 다 문제가 심각한 놈들이라 잘 사귈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런 걱정을 비웃듯 문경운은 끝내주게 잘생긴 남자 둘이 만나서 얼굴 뜯어먹고 사는데 얼마나 좋겠냐고, 서로 얼굴만 봐도 행복할 테니 죽을 때까지 안 헤어질 거라는 정신 나간 소리를 해댔다.
손바닥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 연애도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한쪽만 애를 쓴다고 해서 될 일은 아니었다. 양원구는 그저 둘이 잘 맞기를 바라며 좆같은 두 놈을 쳐다봤다.
두 놈은 마주 보며 뭐라고 속닥거리다 서로를 보며 샐샐거리고 웃었다. 순간, 좆같은 두 놈의 얼굴에서 빛이 나왔다. 천주교 신자인 양원구는 자신도 모르게 성호를 긋고 기도를 할 뻔했다.
어쩌면 문경운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서로의 얼굴에 익숙해지면 다른 놈은 눈에 안 들어올 테니 절대 못 헤어질 것 같았다.
“형…….”
서도운은 정선우의 작은 목소리에 몸을 기울였다. 귀를 가져가자 들릴 듯 말 듯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정선우가 타인이 있는 자리에서는 여전히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걸 알기에 그는 정선우의 맥주잔부터 확인했다. 텅 빈 잔을 보며 정선우가 술에 취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형이랑 키스하는 거……, 너무 좋아.”
술에 취한 게 확실했다.
“……또 하고 싶어.”
슬쩍 주위를 살폈다. 양원구는 빈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었고, 문경운은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계속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아무도 그들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지 않았다.
서도운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연인을 바라봤다. 여린 미소를 짓고 있는 정선우의 얼굴은 무척이나 기분 좋아 보였다.
“키스 말고 다른 건?”
그의 물음에 무얼 떠올렸는지 정선우는 배시시 웃었다.
“형이랑…… 출퇴근하는 거.”
야한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출퇴근이라니 조금 의외였다.
“그게 좋아?”
“응, 형이랑 같이 있잖아.”
그는 손을 내려 자신의 허벅지를 쓰다듬고 있는 정선우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정선우는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얽어 깍지를 꼈다. 얽힌 서로의 손을 내려다보는 정선우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깍지 낀 손만으로 기뻐하는 정선우가 예뻤다.
“섹스는? 그건 별로야?”
짓궂은 물음에 정선우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가 그가 놀리는 걸 알았는지 입을 비죽였다.
“사람들 있는 데서 그런 이야기하면 안 돼…. 집에 가서…, 둘만 있을 때 해야 돼.”
“네가 먼저 시작했잖아. 키스하고 싶다고.”
“아냐, 키스까지는 괜찮아.”
“그럼 여기서 키스해도 돼?”
“안 돼, 여기서 그런 거 하면…….”
굳어지는 정선우의 표정에 그는 놀리는 걸 멈췄다.
“네가 싫다면 안 해. 걱정 마.”
달래는 듯한 부드러운 속삭임에 정선우는 곤란한 표정으로 그의 곁에 바싹 다가왔다.
“형, 나 화장실 가고 싶은 거 참고 있단 말이야. 키스하면 쌀지도 몰라.”
생각지도 못한 이유에 서도운은 웃음이 터져 나오는 입을 틀어막았다. 최대한 빨리 집에 가야 될 것 같았다.
* * *
겨우 병맥주 세 병이었다.
서도운은 정선우가 화장실에 다녀오고 나면 술이 깰 거라고 생각했다. 볼일을 보고 세수 한 번 하고 나면 사라질 취기라고 여겼지만, 정선우에게는 그렇지 않은 듯했다.
정선우는 화장실 앞에서 기다리는 그를 보더니 활짝 웃으며 다가와 끌어안았다. 문제는 그렇게 끌어안고 떨어지질 않는 거였다.
그는 정선우를 매달고, 역겨워하는 양원구와 웃느라 정신없는 문경운에게 인사했다. 차라리 정신을 잃어주길 바랐지만 겉모습만은 희한하게도 멀쩡했다.
술집 앞에서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정선우는 그에게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커다란 남자를 등에 매달고 있는 그를 흘끔대며 지나갔다.
서도운은 지금까지 자신이 뻔뻔한 편이라고 생각했다. 객관적으로도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했기에 언제나 과할 정도로 자신감이 넘쳤다. 그러나 지금,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끄럽다고 생각했다.
“형, 여기서 키스해주는 거야?”
“집에 가서 해줄게.”
“언제?”
“곧 가.”
“응.”
같은 말을 벌써 세 번째 반복하고 있었다.
정선우는 그의 목덜미에 코를 부비며 취기 어린 한숨을 내쉬다 웃음을 흘렸다.
“형, 사랑해.”
겨우 병맥주 세 병이었다. 아니, 세 병이라 다행이지 더 마셨으면 정말로 곤란해졌을 것 같았다.
입을 꾹 다물고 정선우의 고백과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리다 아직 불이 켜진 꽃집에 눈길이 닿았다. 양원구의 술집을 찾을 때는 항상 늦은 시간이라 꽃집이 문을 연 걸 본 기억이 없었다. 늘 불 꺼진 온실 같은 곳을 보다 온갖 색으로 넘쳐나는 꽃을 보니 어색했다.
그가 꽃집을 보자 정선우도 그의 시선을 따라 꽃집을 쳐다봤다.
“……형 같아.”
“뭐가?”
“저기 있는 꽃.”
귓가에 속삭이는 정선우의 말에 궁금해졌다.
“어떤 꽃?”
“크고, 빨갛고, 화려하고, ……제일 예쁜 꽃.”
“내가 그래?”
“응.”
서도운은 작은 꽃집의 쇼윈도 너머에 줄지어 선 꽃들을 유심히 쳐다봤다. 개나 고양이는 귀나 꼬리만 봐도 종을 맞힐 수 있지만, 정선우가 말하는 꽃이 어떤 꽃인지 짐작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정선우에게 어떤 꽃이냐고 묻고 싶지 않았다.
술에 취한 정선우의 입에서 무슨 말이 더 나올지 모르겠지만, 그를 가리켜 ‘크고, 빨갛고, 화려하고, 제일 예쁜 꽃을 닮았다’라고 한 것만으로 충분했다. 곁에서 누군가 들었다면 평생 쫓아다니면서 놀릴 게 분명했다.
살면서 잘생겼다는 말은 쉼 없이 들었지만 ‘예쁘다’거나 ‘꽃 같다’는 말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꽃 같다’는 말은 정선우에게 어울리는 표현이지 자신에게 할 만한 말은 아니었다.
겉으로 티는 안 냈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부끄러웠다. 그렇게 부끄러워하는 자신이 부끄러워 한순간 얼굴이 달아올랐다.
서도운은 허리를 감은 정선우의 팔을 풀어 등에서 떼어냈다. 정선우가 품에서 빠져나가는 그를 쫓으려다 택시를 기다리라는 말에 멈췄다.
“안녕하세요, 지금 꽃다발을 만들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유리창 너머로 꽃을 쳐다보던 남자가 결국 들어와 주문을 하자 꽃집 주인은 기다렸다는 듯 그를 맞이했다.
“물론이죠, 어떤 꽃으로 만들어 드릴까요?”
“크고, 빨갛고, 화려한 꽃이요.”
“빨간 장미를 중심으로 다른 꽃을 섞어드릴까요?”
“빨간색 꽃으로만 만들어 주세요.”
“요즘 그런 스타일의 꽃다발도 인기예요. 꽃다발 크기는 어떻게 해드릴까요?”
“아주 크게 해주세요.”
그의 말에 꽃집 주인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레이트’라고 해서 사람 키만 한 꽃다발도 제작 가능한데 그건 미리 주문하셔야 해요. 일단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크게 만들어 볼게요.”
꽃집 주인은 그들이 유리창 너머로 보던 꽃들 중 붉은색의 꽃을 모조리 가져와 작업대에 펼쳤다. 정선우가 무얼 본 건지 모르지만 분명 저 중의 하나는 분명할 테니 집에 가서 슬쩍 물어보면 될 것 같았다.
기다리던 택시가 도착했지만 꽃의 양이 워낙 많아 다듬고 배열하는 것만 해도 한참 시간이 걸렸다. 미터기를 누르고 기다려달란 말에 택시 기사는 반색을 하며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사라졌다.
커다랗고 붉은 꽃다발을 든 서도운이 꽃집 주인의 배웅을 받으며 가게를 나왔다. 그는 택시 앞에 선 정선우에게 꽃다발을 내밀었다.
“나한테…… 주는 거야?”
“그럼 내가 누구한테 줘?”
화장실을 다녀온 택시 기사가 허겁지겁 뛰어와 덕분에 살았다고 너스레를 떨며 운전석에 올랐다. 정선우가 커다란 꽃다발을 받아들고 택시 뒷좌석에 타자 서도운도 뒤따라 타고 동물병원 이름을 말했다.
택시 안이 꽃향기로 가득 찼다. 택시 기사는 정선우를 향해 프러포즈라도 하러 가느냐고 물었다. 어떤 여성일지는 모르겠지만 잘생긴 애인이 그런 꽃다발을 안겨주면서 결혼하자고 하면 거절할 여자는 없을 거라고 넉살 좋게 떠들어댔다. 얼굴을 굳히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 정선우의 반응에 기사는 민망해하며 입을 다물었다.
집으로 가는 내내 정체 구간이 반복되며 도로 위에 있는 시간은 점점 길어졌다. 서도운은 곁에 앉은 정선우를 바라봤다. 정선우는 말없이 꽃다발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180cm가 넘는 남자에게도 크게 느껴지는 커다란 꽃다발은 오로지 붉은색의 꽃들만 가득했다.
꽃향기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적막함을 견디지 못했는지 택시 기사가 라디오를 틀었다. 도심 곳곳의 정체 구간 안내와 함께 크리스마스 캐럴이 흘러나왔다. 이맘때면 언제나 흘러나오는 익숙한 여자 가수의 노래였다.
서도운은 운전할 때 라디오든 노래든 무언가를 틀어둔 적이 없었다.
일과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와 달리 자기 자신에 관해 말할 때면 정선우의 목소리는 아주 작고 느려졌다. 정선우의 작은 목소리가 묻혀버릴까 봐 그는 다른 소리를 없앴다.
정선우는 그의 곁에 앉아 아주 사소한 것들을 말했다. 현재의 일상들, 과거의 일상들……. 부족한 말재간에 이야기는 두서도 없고 부드럽게 이어지지도 않았지만, 정선우는 그에게 뭐든 말하려고 했다.
때때로 그가 무언가를 물으면 “모르겠어”, “생각해 본 적 없어”라고 대답하고는 한참 시간이 흐른 후, 그가 물었다는 것도 잊을 무렵 다시 대답했다. 길고 명확하게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말했다.
정선우는 느렸다. 그러나 사소한 것도 그냥 넘어가지 않고, 잊지도 않았다. 최선을 다해서 그에게 자기 자신을 전하려고 노력했다.
품에 안은 꽃을 하나하나 살피는 정선우를 가만히 바라봤다. 정선우는 커다랗고 화려한 꽃 하나를 손끝으로 건들기도 하고 향을 맡기도 하더니 슬며시 웃었다. 그는 그 꽃이 정선우가 원했던 꽃이란 걸 알았다.
택시에서 내려 빌라로 걸어가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서는 꽃다발을 싼 포장지만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두 사람이 돌아온 걸 반기듯 빌라 입구의 노란색 등이 켜졌다. 불이 꺼진 빌라의 복도는 그들이 지나가자 환하게 변했다. 빛의 환영은 엘리베이터 앞에 세워둔 크리스마스트리의 꼬마전구로 이어졌다. 색색의 작은 전구가 이리저리 반짝이며 크리스마스 캐럴을 노래했다.
“형, 나…… 꽃 같은 거 처음 받아봐.”
서도운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다 캐럴 사이로 들리는 작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정선우의 시선에 버튼에서 손을 뗐다.
“형은?”
“몇 번 받아봤어.”
그의 대답에 정선우는 반짝이던 눈을 내리깔고 다시 꽃다발로 시선을 내렸다.
“근데 어머니나 누나를 빼고 꽃을 선물한 건 네가 처음이야.”
정선우의 눈이 다시 그를 향하더니 사르르 웃었다.
“나도 형한테 꽃을 줄 거야. ……내가 꽃을 줄 거라고 생각도 못 한 날, 그런 날 줄 거야.”
“기념일이 아니라?”
“형이 기뻐서 놀라는 게 보고 싶어.”
그들을 반기던 입구의 등이 꺼지고, 복도의 불도 하나씩 차례로 꺼졌다. 움직이지 않는 두 사람 주위로 밤이 다가와 감쌌다.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한 작은 전구만 남아 캐럴을 부르며 어둠 속에서 깜박였다.
“나도 형을 기쁘게 해주고 싶어.”
“……넌 충분히 날 기쁘게 해주고 있어.”
“더 기쁘게 해줄게.”
서도운은 뭐라고 대꾸를 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캐럴 사이에서 짤랑대는 작은 방울 소리가 커다랗게 들렸다. 그 소리에 정선우의 작은 목소리가 묻힐까 두려웠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열리는 문 안으로 정선우를 끌어당겼다. 그는 정선우의 품에서 꽃다발을 밀어내고 얼굴을 감싸 입을 맞췄다.
“그래, 더 기쁘게 해봐.”
그가 입술 위에서 속삭이자 정선우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환하게 웃었다.
“응, 그럴게.”
고개를 끄덕이는 정선우의 입술에 그는 다시 입을 맞췄다. 몇 번의 가벼운 입맞춤에 정선우는 작은 목소리로 “더”라고 졸랐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서로의 혀가 오가고 타액이 섞이고, 엘리베이터는 두 사람의 입술 사이에서 나는 소리와 정선우의 조그마한 신음으로 가득 찼다.
“하아, 하아……, 형.”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진 키스에 정선우가 숨을 헐떡이며 그의 어깨에 이마를 내렸다. 양손 가득 들고 있는 커다랗고 묵직한 꽃다발 때문에 그를 안지 못하자 조르듯 목덜미에 입술을 비볐다. 그는 그런 정선우를 토닥이듯 끌어당겨 안고 등허리를 쓸어내렸다.
“이제 이것도 못 하겠네…….”
“뭘?”
“엘리베이터에서 키스하는 거.”
그의 말에 정선우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왜?”
“1월에 스텝들 교육 시작하면 5, 6월까지 이 빌라를 숙소로 써. 이제 여기에 우리만 있는 게 아냐.”
“그럼 6월까지 엘리베이터에서 키스 못 해?”
“가볍게 하는 건 괜찮겠지만, 이런 건 못 하겠지.”
“엘리베이터 문 닫으면…….”
“우리만 있을 때는 엘리베이터도 우리만 쓰지만 다른 사람이 있으면 그게 아니잖아. 키스하다가 갑자기 문이 열리면 어떻게 할 거야?”
서도운의 물음에 정선우는 맥 빠진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엘리베이터에서 키스하는 게 그렇게 좋아?”
“응.”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정선우를 보며 서도운은 당황했다. 6개월간 엘리베이터에서 키스를 못 한다는 사실에 정선우가 이렇게까지 낙담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여기 말고 다른 엘리베이터에 탔을 때도 키스해줄까?”
“아니, 다른 데는 안 돼.”
“왜?”
“바로 집에 가서 섹스를 못 하잖아.”
너무나 솔직한 정선우의 대답에 서도운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럼…… 6월까지는 주차장에서 키스해줄까?”
“거기서도 누가 보면 어떡해?”
“차는?”
“안 돼.”
“왜?”
“형이 차에서 키스해주면 쌀 것 같아서 못 참겠어.”
서도운은 이제야 정선우의 말을 이해했다. 엘리베이터라는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차에서는 너무 빨리 달아오르고, 적당히 몸을 데우면서 집에 가서 바로 섹스할 수 있는 곳이 엘리베이터라서 좋은 거였다.
그리고 정선우가 아직도 술에 취한 상태란 걸 깨달았다. 평소의 정선우라면 저렇게 냉큼 대답할 리가 없었다.
“6월까지 어떻게 참아…….”
정선우는 서도운의 어깨에 이마를 부비며 울먹였다.
“형이 최대한 빨리 교육을 끝내볼게. 어떻게든 5월까지 다 끝낼게.”
서도운은 자신의 어깨에 기대 울고 있는 정선우의 등을 토닥였다.
내년 상반기 교육을 받을 스텝들의 원망 어린 목소리가 벌써부터 들리는 듯했지만, 정선우를 달래는 게 그에게는 더 중요했다.
“형, 키스해줘.”
그는 정선우의 눈가에 어린 눈물을 닦아내고 시무룩한 입술에 입을 맞췄다.
평소와 달리 정선우는 열정적으로 그의 혀를 찾았다. 언제나처럼 그의 혀를 쪽쪽 빨아대는 건 물론이고 혀를 감고 꼭꼭 씹어댔다. 마음껏 혀를 맛본 정선우는 입술을 내려 턱을 핥고 씹더니 목덜미를 물었다.
그는 흥분에 못 이겨 밀어붙이는 정선우를 안고 엘리베이터 벽에 기댔다.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저릿한 아픔에 정선우가 마신 병맥주 세 병에 누군가 약이라도 탄 게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겨우 병맥주 세 병이었다. 그걸로 이럴 리는 없었다.
“형……, 형……. 어쩌지, 너무 좋아.”
목덜미에 정선우의 탄식이 흘러내렸다.
한순간 눈앞이 아득해지며 정선우의 숨결이 닿은 곳부터 온몸으로 흥분이 퍼져나갔다. 엘리베이터 안을 가득 채운 꽃향기가 흥분제처럼 그의 안에 스며들었다. 호흡할 때마다 향기와 정선우의 신음이 그의 몸으로 들어와 퍼졌다. 달콤함에 심장이 저려왔다.
“선우야, 원하는 걸 말해봐. 형이 뭘 해줄까?”
헐떡이는 정선우를 등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전부 다. 형이랑 하는 건 다 좋아.”
그는 정선우의 대답에 슬며시 웃으며 허리를 바싹 끌어당겼다. 옷 위로 뚜렷하게 형체를 드러낸 정선우의 성기에 제 것을 꾹 누르며 뭉근하게 비비자 정선우는 여린 신음을 흘렸다.
“아, 형……. 흐응, 형도……, 섰어. 형도 좋아?”
정선우는 자신의 성기에 단단한 것이 문질러지자 기쁜 듯 웃었다.
“나도 너랑 하는 건 다 좋아.”
“형, 내가 빨아줄까?”
“그게 하고 싶어?”
정선우는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 이제 잘해.”
뽐내는 듯한 정선우의 모습에 서도운은 참으로 시답잖은 자신감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겨우 요도에 혀를 비비는 걸 기교라고 해야 할지도 의문이었다. 그러나 잔뜩 가슴을 부풀리고 꼬리를 바짝 세운 모습이 귀여워 굳이 현실을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 좆을 빨 것도 아니고 그의 좆만 빨 텐데 잘하건 못하건 상관없었다.
서도운은 웃음을 삼키며 정선우의 볼을 쓰다듬었다.
“또 말해봐. 네가 원하는 걸 말해.”
그는 정선우의 욕망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욕망을 품고 있는지 궁금했다. 어디까지가 술기운인지는 모르겠지만 평소와 달리 부끄러운 기색 없이 대답하니 뭐든 물어도 될 것 같았다.
“내가 어떻게 해줄까?”
서도운의 나긋한 목소리에 정선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순간 머릿속에서 자신의 손을 묶고 배 위에 올라타 움직이지 말라고 명령하는 서도운의 모습이 떠올랐다.
놀랄 만큼 섹시했다.
“형, 묶어줘.”
수줍게 눈을 내리깐 정선우의 얼굴은 성욕을 숨김없이 드러낸 말과 달리 여전히 정결했다.
* * *
서도운이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자 정선우는 꽃다발을 품에 안고 여기저기를 뒤졌다. 꽃다발을 꽂아둘 만한 용기를 찾았지만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태어나서 처음 받아보는 꽃이었다. 오랫동안 시들지 않았으면 했다.
졸업식 때면 가족들과 함께 꽃다발을 품에 안고 사진을 찍는 아이들이 부러웠다. 품에 안은 꽃다발이 부러운 게 아니라 누군가 찾아와 축하해준다는 게 부러웠다.
서도운을 더 일찍 만났다면, 자신의 졸업식에 서도운이 꽃다발을 가져와 축하한다고, 잘했다고 해줬을 것 같았다. 상상만으로도 어린 시절 가졌던 부러움이나 서러움이 사라졌다.
취할 것 같은 꽃향기가 그를 휘감았다.
고개를 내리자 서도운을 꼭 닮은 꽃이 보였다. 그 꽃은 꽃집의 쇼윈도 너머로 봤을 때보다 더 화려했다. 묵직한 와인색의 꽃은 겹겹의 꽃잎으로 이루어져 거대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그 향기는 다른 모든 꽃을 조화로 만들어버렸다.
강렬한 아름다움을 가진 꽃이었다.
서도운은 그런 남자였다. 화려하면서도 품위가 있고, 압도적이지만 위협적이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그에게 너밖에 없다고 속삭였다. 심장에서 퍼지는 달콤함에 손끝이 떨려왔다. 귓가에 원하는 걸 말하라는 서도운의 속삭임이 들렸다.
“……형.”
마음을 담은 소리가 온몸으로 퍼졌다.
꽃향기가 최음제라도 되는 듯 온몸이 달아올랐다.
전에는 발기도 하지 못해 성적인 접촉을 피했지만, 지금은 서도운을 떠올리기만 해도 발기하고 모든 생각이 섹스로만 흘러갔다. 사춘기 소년도 아니고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다.
서도운은 그런 그를 놀리듯 가볍게 입을 맞추거나 안고 있을 때 갑자기 손을 내려 옷 위로 그의 성기를 쓰다듬거나 만지는 경우가 있었다. 집이라면 서도운의 손길을 받아들여 더 깊은 키스나 섹스로 이어졌지만, 집이 아닐 때면 정선우는 벌게진 얼굴로 서도운의 손을 밀어내고 몸을 물렸다.
서도운은 그의 행동이 귀엽다며 웃었지만, 그는 같이 웃을 수 없었다. 장소가 어디든 약간의 접촉만으로 발기하고 몸이 달아 섹스를 졸라대는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막상 그런 상황이 되면 머리가 텅 비어서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때로는 이성을 잃고 서도운에게 매달렸다. 그럴 때면 오히려 서도운이 참으라고 그를 다독일 정도였다.
끓어오른 성욕이 가라앉으면 부끄러움과 수치심에 서도운을 볼 수 없어 집에 오는 내내 조수석에서 얼굴을 가리고 앉아 있었다.
집에 오는 내내 웃어대던 서도운은 그가 도망치듯 빌라로 뛰어가 엘리베이터 구석에 숨으면, 놀리듯 키스하고 바지 위를 짓궂게 매만졌다. 바지 위로 불뚝하니 성기가 형태를 드러내면, 서도운은 바지 안으로 손을 넣어 잔뜩 부풀어 오른 성기를 쓰다듬고 흔들댔다.
그가 맥없이 몸을 늘어뜨리고 조르면 서도운은 웃으며 계속 키스를 했다. 그들은 엉겨 붙은 채 간신히 현관문에 다다라 문안에 들어서자마자 허겁지겁 옷을 벗어 던지고 바닥을 뒹굴었다.
그때쯤이면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머릿속은 서도운으로 가득 차고 몸은 쾌감으로 피부 속까지 저릿했다. 그저 커다랗게 발기한 성기를 서도운에게 문지르며 더 해달라고 애원했다.
기억을 더듬는 것만으로 숨이 차올랐다.
천천히 꽃향기를 맡으며 흥분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자신의 성욕을 마주할 때면 아직도 어색했다. 지금은 발기를 하고 사정을 하는 게 당연하게 느껴지지만 몇 달 전만 해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서도운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 행복해서 온종일 함께 있는 것만을 바랐다.
함께 살기 전 서도운이 그를 오피스텔에 바래다줄 때면, 내일 다시 만나자는 말에도 헤어져 있는 시간이 안타까워 차에서 내리지 않고 버텼다. 서도운은 그런 그를 달래듯 오랫동안 키스해줬다.
함께 살게 되고부터는 더 이상 시간을 아쉬워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 서도운과 차에서 하는 입맞춤은 두 사람이 함께하는 시간을 의미했다.
출근할 때 차에서 내리기 전,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에서 성적인 욕망을 담은 키스보다 더 깊은 쾌감이 느껴졌다.
그 짧은 입맞춤은 더 이상 혼자 있지 않아도 된다는 말처럼 느껴졌다. 정선우는 가슴이 먹먹해져 사랑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서도운은 한껏 눈을 휘며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 좋아서 다시 사랑한다고 고백했다.
또 말하고 싶었다.
몇 번이고 그치지 않고 계속 말하고 싶었다.
서도운을 볼 때면 언제나 그랬다.
호흡할 때마다 꽃향기와 함께 서도운의 존재가 그의 몸에 들어와 퍼졌다. 자신의 모든 것을 지우고 서도운으로 채울 수 있기를 바랐다.
그의 심장 속에 꽃처럼 아름다운 남자를 품고 싶었다.
서도운은 드레스 룸 한쪽에 그와 정선우의 코트를 걸어두고 넥타이를 넣어둔 서랍을 열었다. 칸마다 얌전하게 말려있는 넥타이를 유심히 들여다보며 정선우에게 어울릴 만한 걸 찾았다.
의외였다. 그를 묶고 싶다는 것도 아니고 자신을 묶어달라고 할 줄은 몰랐다.
평소 정선우는 성적 상상력이 빈곤해 욕구를 구체화할 수 없어서 그 자신이 무얼 원하는지 몰랐다. 그런 정선우를 잘 알기에 익숙한 장소인 차나 사무실에서 하고 싶다고 대답할 줄 알았다.
정선우는 실제 성경험도 없었지만, 포르노 같은 간접적인 성경험도 없었다.
중·고등학교 때도 포르노를 보거나 자위를 한 적이 없다는 정선우의 말에 당황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되물었더니, 군대에 다녀와서 자취할 때까지 혼자서 방을 쓴 적이 없다고 더듬거리며 겨우 말했다.
성욕과 성적 호기심이 왕성한 십대라면 어디서든 시간과 기회를 엿봐 해결했겠지만, 잔뜩 겁에 질리고 사방으로 눈치를 보는 어린 정선우를 떠올리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스무 살 이후 성기능에 문제가 생긴 걸 알게 된 정선우는 성욕도 잃어버린 듯했다. 거세당한 것이나 다름없는 삶이었지만 그 자신은 불편하다고 여기지 않은 것 같았다.
성욕은 기본적인 욕구였지만 없어도 살아갈 수는 있었다. 삶의 질이 떨어지겠지만, 정선우가 살아온 날들을 떠올리면 삶의 질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정선우는 많은 것이 결핍된 채 살아왔고 죽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욕심내지 않고 불평하지 않는 삶. 정선우의 삶은 그랬다.
정선우는 여전히 욕심내지도 않고, 불평하지도 않았다.
하나만 제외하고.
정선우가 유일하게 욕심내고, 불평하는 것.
그는 그것이 자신이라는 사실이 기뻤다.
정선우가 더 욕심내고 불평해주길 바랐다.
끔찍할 정도로 집착하고, 질투로 미치길 바랐다.
그렇게 해준다면 삶의 모든 것을 자신이 채워줄 수 있었다.
돈도, 시간도, 여유도, 사랑까지 모두 흘러넘치도록 채워줄 수 있었다.
그는 정선우의 하얀 피부를 떠올리며 넥타이 하나를 꺼냈다. 핑크색 바탕에 갈색과 검은색 페이즐리 무늬가 들어가 있는 화려한 실크 넥타이에 묶여있는 정선우를 생각하자 슬그머니 미소가 지어졌다.
더없이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넥타이를 들고 드레스 룸을 나오자 정선우는 커다란 꽃다발을 품에 안고 종종거리며 집안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형, 이거 놔둘 데가 없어.”
그는 정선우의 말에 주방 개수대에 물을 받았다.
“내일 화병을 주문할 테니까 그때까지는 여기다 둬.”
정선우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개수대에 거대한 꽃다발의 끝을 조심스럽게 담갔다.
어차피 두 사람 다 요리와는 인연이 없어 주방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하루 이틀쯤 개수대를 쓰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선우야, 그럼 어디서 묶어줄까? 주방? 현관?”
정선우는 잠시 눈을 껌벅이다 그의 손에 든 넥타이를 뒤늦게 발견하고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침대.”
목소리는 작았지만 똑똑하게 들렸다.
술에 취한 사람의 말은 무시하고 진지하게 상대하지 않는 게 그의 술자리 신조였지만, 정선우는 예외로 하기로 했다. 술이 아니라 자백제를 먹은 듯 자신의 욕망을 술술 털어놓는 솔직함이 정말 좋았다.
침대 가에 앉은 정선우가 두 손을 모아 얌전히 내밀었다. 그는 넥타이가 얼마나 무서운 도구인지 알기에 조금만 힘을 주면 손을 뺄 수 있도록 헐겁게 묶었다. 핑크색의 화려한 넥타이는 예상대로 정선우와 아주 잘 어울렸다.
이상하게도 넥타이에 손이 묶인 채 침대 가에 앉아 있는 정선우의 모습이 익숙했다. 그는 곧 이 상황을 이전에 겪은 적이 있다는 게 떠올랐다.
사귀고 나서 술에 취했을 때의 일을 기억하는지 묻자, 정선우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무의식 어딘가에 그날의 일이 남아 있을지도 몰랐다.
“다른 데도 묶어줄까?”
“아니, 여기만 묶으면 돼.”
“왜?”
“원래 그런 거잖아.”
“묶고 나서 내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어?”
“음…, 형이 내 위에 올라타고… 음…….”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걸 보니 아마도 거기까지만 기억이 있는 듯했다.
정선우의 욕구가 어디서 생겨난 건지를 깨닫자 서도운은 재앙 같던 그 날의 일이 되풀이되는 게 아닌지 불안해졌다.
“선우야, 렌즈 뺄래?”
“렌즈 빼면 형이 안 보여서 싫어.”
“화장실은?”
“좀 전에 갔다 왔어.”
해맑게 답하는 정선우의 모습이 재앙의 전조처럼 느껴져 꺼림칙했다.
“형, 이제 뭐 하면 돼?
정선우는 기대감이 충만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여기서 그만두자고 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면 정선우는 존재하지 않는 귀와 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식탁 밑으로 기어들어 가 불러도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실제로 그렇게 하지는 않겠지만 왠지 그런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 정선우를 보느니 무슨 일이 일어나든 자신이 책임지는 게 나았다.
“침대에 바로 누워.”
그의 말에 정선우는 재빨리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검은 옷을 입고 손이 묶인 채 커다란 침대 한가운데 누워있는 남자의 모습은 놀랄 정도로 성욕을 자극했다. 그는 잠시 넋을 잃고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가만히 보고 있는 그에게 정선우의 시선이 닿았다. 시선이 얽히자 정선우는 숨소리도 죽이고 그를 기다렸다.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바라만 보자 정선우는 눈을 내리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붓으로 흐르듯 그려낸 섬세한 옆모습을 보며 그는 새삼 감탄했다. 가지런히 내려앉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볼에서부터 귓가로 홍조가 퍼져나갔다. 빨갛게 물든 귀 끝에 검은 스웨터 아래 붉게 변해 있을 하얀 목덜미를 떠올랐다.
“형…….”
정선우는 묶인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렇게 보지 마, 쌀 것 같아.”
시선을 주는 것만으로 사정할 것 같다는 정선우의 애원에 그는 작은 웃음을 흘렸다. 예민하고 음란한 연인은 허리를 뒤틀며 그를 보챘다.
“하아, 형…….”
바지 색이 밝았다면 젖어가는 걸 볼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까웠다.
“가만히 있어.”
“응, 가만히 있을게. 안 움직일게.”
그의 말에 정선우는 바로 누워 얼굴을 가린 손을 내렸다.
가슴 위에 올려둔 두 손은 기도하는 듯 보였지만, 정선우가 기다리는 건 신이 아닌 인간이었다. 정선우의 경배 대상은 서도운이었고, 가늘게 떨리는 두 손은 신에 대한 열망이 아닌 섹스의 기대감 때문이었다. 기도에 답하듯 그는 정선우의 바지 단추를 풀고 벌어진 틈으로 손을 넣어 커다랗게 부푼 성기의 형태를 덧그렸다.
“묶이는 게 좋아서 이렇게 싼 거야?”
그의 물음에 정선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형이, 형이… 야하게 보니까. 아, 형……, 제발.”
애타는 목소리에 바지와 속옷을 한 번에 벗겨냈다. 답답한 속옷에서 겨우 벗어난 정선우의 성기는 그것만으로도 좋은지 곧추서서 쿠퍼액을 줄줄 흘렸다.
“형, 거기!”
“여기?”
그는 종아리를 타고 올라가 무릎 뒤를 쓰다듬었다. 오목하게 파인 곳을 부드럽게 매만지자 정선우는 입술을 잘게 떨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아니, 거기가…….”
“여긴 싫어?”
정선우의 말에 그는 다리를 들어 올려 무릎 뒤의 여린 살을 핥았다. 흠뻑 젖을 때까지 핥아주자 정선우는 헐떡이며 고개를 저었다.
“하아, 좋아. 아냐, 거기 아냐…….”
어찌할 바를 모르는 정선우를 보며 서도운은 웃음을 터뜨렸다.
성큼 다가가 다리 사이에 파고들어, 정선우의 바람대로 발목을 잡고 복숭아뼈를 문질렀다. 기다렸다는 듯 고개가 젖혀지며 긴 신음이 흘러나왔다.
“형……, 물어줘.”
그는 애원에 답하듯 혀를 내밀어 발등을 길게 핥아 올렸다. 발목을 빨다 입을 벌려 물자 부드러운 신음이 침대 위에 내려앉았다.
키스는 미끄러지듯 이어져 허벅지까지 긴 자국을 남겼다. 다리 사이의 여린 살에 진득하게 키스하자 정선우가 애타게 그를 불렀다.
그는 연인의 부름에 답하듯 입술을 성기로 옮겼다.
“하아…….”
짧은 입맞춤만으로 작은 구멍에서 흘러나온 체액이 기둥을 적시고 고환과 회음부까지 이어졌다. 흘러내린 체액을 손끝으로 쓸어 올리며, 회음부부터 고환과 귀두까지 천천히 젖어 들도록 문지르자 정선우는 허리를 휘며 헐떡였다.
“형, 쌀 것 같아! 형, 나와!”
매끄러운 기둥을 흔들어대자 정선우는 발끝으로 시트를 밀어내며 벌벌 떨었다.
“싸게 해줘! 형, 형!”
쾌감에 가득 찬 연인의 애원을 그는 기꺼이 들어줬다.
귀두를 문지르며 기둥을 세차게 비벼주자 정액이 터지듯 쏟아져 배를 적시고 시트 위로 흘러내렸다. 긴 사정 후에도 조금씩 정액이 흘러나오는 성기를 천천히 만져주자 정선우는 희미한 신음과 함께 남은 정액을 내보냈다.
“형…, 물어줘…….”
사정의 여운을 가라앉히는 음란한 숨소리와 함께 흘러나온 말에 그는 소리 없이 웃었다. 정선우의 작은 목소리가 신음에 섞여 들리지 않을까 봐 그는 몸을 숙였다.
“어딜 물어줄까? 입술? 목?”
“어디든 좋아…. 물어줘, 형한테 물리고 싶어…….”
나지막한 목소리에 담긴 열망이 그에게도 느껴졌다.
“피가 나올 때까지…… 물어뜯어 줘…….”
“그건 안 돼. 아프잖아.”
“아파도 괜찮아. 참을게. 물어줘.”
정선우의 애원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흥분으로 가득 찼던 머리가 순식간에 식었다.
“네가 아무리 해달라고 해도 그건 안 돼.”
그의 단호한 말에 쾌감에 취해 있던 정선우의 얼굴이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변했다.
“원하는 건 다 해준다고 했잖아! 그건 왜 안 돼?”
“난 널 절대 아프게 안 해.”
“내가 괜찮다고 하잖아! 해줘!”
“안 돼.”
“싫어! 해줘! 물어줘!”
아이처럼 떼를 쓰던 정선우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흐으으……, 나도 물어줘…. 물어줘…….”
서도운은 얼빠진 얼굴로 정선우를 쳐다봤다.
몇 분 전만 해도 멀쩡하게 섹스를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인지 정리를 하려 해도 정선우의 이유 모를 통곡을 듣고 있으니 생각이란 걸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일단 서럽게 울고 있는 정선우를 토닥이며 어떻게든 이 상황을 수습하려 애썼다.
“선우야, 형이 피 안 나게 무는 건 해줄 수 있는데…….”
“안 돼! 피가 안 나면 흉터가 안 생긴단 말이야!”
정선우는 울어대는 중에도 물어준다는 말은 냉큼 알아듣고 대답했다.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정선우는 지금도 여전히 술에 취해 있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다시 과거의 재앙을 떠올리게 했다.
“형……, 눈 아파.”
“시발, 그럴 줄 알았다. 그놈의 망할 렌즈.”
서도운은 조그맣게 뇌까리며 일어나 앉았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선우야, 혹시 화장실은…….”
“안 가.”
눈이 아픈 탓인지 정선우는 서럽던 울음을 멈추고 조그맣게 훌쩍였다. 그는 다시 한숨을 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형이 손 씻고 와서 렌즈 빼줄 테니까 가만히 있어.”
고개를 끄덕이는 정선우를 보며 앞으로 술에 취한 사람은 상대하지 않는다는 술자리 신조는 예외 없이 지키기로 했다.
그는 손을 씻고 나와 정선우의 눈에서 망할 렌즈를 빼서 버렸다.
서도운은 한숨과 함께 울음을 그치고 얌전히 누워있는 제 연인을 내려다봤다. 눈물로 붉어진 눈가가 안타까웠다. 조심스럽게 쓰다듬자 정선우는 그를 향해 여리게 웃었다.
“겨우 맥주 세 병에 취해서 울다가 웃다가…….”
“아냐, 나 안 취했어.”
혼잣말 같은 핀잔도 냉큼 받아 대꾸하는 정선우의 모습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대체 병맥주 세 병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취할 수 있나 싶었다.
그는 주당이라 소문이 날 만큼 술을 잘 마셨다. 술을 입에 대고 지금까지, 취해서 몸을 못 가누거나 실수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을 정도라 자주 술자리의 뒤처리를 맡았다.
그에게 뒤처리란 건 술값을 계산하고 술에 취한 사람에게 택시비를 줘서 집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술집 바닥이나 화장실에 너부러진 인간은 건드리지도 않았다.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누군가에게 현금을 쥐여주고 알아서 처리하라고 했다. 그럼 그들은 그 돈으로 술을 더 퍼마시거나 어딘가로 기어들어 갔다.
양원구의 술집에서 정신을 잃은 정선우를 돌본 건 정말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그건 아주 친한 사람에게만 베푸는 친절이었다. 얼굴만 아는 남자를 호텔로 데려가 재우고 등을 두드려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게 따지면 사귀기 전부터 정선우와 관련해 그답지 않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공적으로 얽힌 사이라고 해도 유별나게 대했다.
정선우는 어설프고 모자란 부분은 잔뜩 있었지만 미운 구석이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울고 떼를 쓰는 정선우의 술주정은 난감했지만 불쾌하지는 않았다.
이런저런 말을 종알거리는 정선우가 귀여워 가끔 술을 먹여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술을 마실 때마다 재앙 같은 시간이 이어졌지만, 이 정도면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서도운은 혼자 히죽거리다 자신이 어지간히 정신이 나갔다는 걸 깨달았다. 제정신이라면 이런 미친 짓을 또 하고 싶다고 생각할 리 없었다.
그렇다고 이성을 잃고 미쳐 날뛰는 것도 아니었다. 자신은 여전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사고한다고 생각했다. 정선우와 관련된 부분을 제외하면…….
정선우와 관련된 부분이 문제였다.
고민 끝에 서도운은 자신이 정신이 나가서 재앙을 자초하는 게 아니라, 정선우가 워낙 귀여워서 어쩔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는 자신을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으로 만드는 연인을 바라봤다. 가만히 누워 눈을 감고 있는 정선우는 이제 잠든 듯 보였다. 여전히 묶여있는 두 손이 신경 쓰여 풀어주고 싶었다.
“선우야, 자?”
“아니.”
정선우가 동그랗게 눈을 뜨고 냉큼 대답했다.
그는 반사적으로 튀어나올 뻔한 욕을 삼키고 정선우를 지그시 내려다봤다. 아직 그와 정선우의 하루는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만큼 울고 진을 뺐으면 잠들만도 한데 정선우는 멀쩡했다. 그는 이제 맥주 세 병의 술기운이 어디까지 갈 수 있나 궁금해졌다.
“손목은 괜찮아?”
헐겁게 묶었다고 해도 상당히 긴 시간 동안 고정되어 있는 팔이 걱정이라 풀어주고 싶었지만, 함부로 풀었다가 또 떼를 쓰며 울까 봐 무서웠다.
“풀어줄까?”
“싫어, 이렇게 있을래.”
서도운은 계속 묶여있기를 원하는 정선우의 의지를 존중하기로 했다. 대신 그의 삶에서 ‘시발스럽다’고 생각하는 항목에 ‘백경’과 ‘정선우의 렌즈’에 이어 ‘병맥주 세 병’을 추가했다.
두 손이 묶인 채 얌전히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연인을 내려다보며 어쩌다 이런 좆같은 상황이 되었는지 고민했다. 수줍게 묶어달라고 하던 정선우와 신음하며 물어달라고 하던 정선우가 머릿속에 떠오르며 성적 취향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눌 때가 왔음을 알았다.
평소였다면 3박 4일은 걸릴 대화 주제지만 정선우가 여전히 술에 취해 있다면 3분 안에 끝날 것 같았다.
“선우야, 아직도 내가 물어줬으면 좋겠어?”
“응, 피가 날 때까지.”
정선우의 대답에 그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전에도 물어달라고 조르던 정선우가 떠올랐다. 흥분에 못 이겨 자신이 물어대듯이 그도 그렇게 물어주기를 원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정선우가 말하는 ‘무는 행위’는 그의 생각과 다른 듯했다.
“섹스할 때 내가 널 아프게 해주길 원해? 물거나 때려주는 걸 상상한 적 있어?”
“형이 그러고 싶으면 해도 돼. 괜찮아, 참을 수 있어.”
그는 다시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정선우를 거칠게 몰아붙여 무아지경에 이를 정도로 쾌감을 느끼는 걸 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아프게 하고 싶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는 고통이나 아픔을 대가로 쾌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아픔을 돌보는 일이 그의 직업이었다. 그는 아픔을 주는 것도, 아픔을 참고 견디는 걸 보는 것도 싫었다.
“선우야, 네가 그런 걸 원한다고 해도 난 못 들어줘. 난 널 아프게 못 해.”
그는 정선우의 볼을 쓸어내리며 속삭였다.
“그럼 안 아프게 물어서 상처를 만들어줘.”
“아픈 걸 원하는 게 아냐?”
그의 물음에 정선우는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픈 게 아니야, 흉터가 가지고 싶어. ……내가 형 거라고, 형이 새겨줬으면 좋겠어.”
한순간 머리가 텅 비고 심장이 아플 만큼 세차게 뛰었다. 요란한 박동 소리에 귀가 먹먹해졌다.
세상의 소리가 지워지자, 물어달라고 하는 정선우의 말이 똑바로 들렸다. 정선우는 자신의 몸에 서도운의 것이라는 흔적을 남겨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일렁이던 가슴은 정선우의 말에 커다란 파도로 변해 그를 휩쓸고 지나갔다.
소름 끼치도록 달콤한 말에 그는 모래처럼 무너졌다. 지금까지 단단하다고 생각했던 형체가 붉은 파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녹아내렸다.
시끄럽던 심장이 밀려온 포말에 감싸여 천천히 소리를 죽였다. 하얀 거품 위로 검붉은 욕망이 새어 나왔다.
그 역시도 그걸 원했다.
그도 정선우의 새하얀 피부에 자신의 것이란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그가 새긴 상처가 지워지지 않는 흉터가 되어 정선우의 육체에 남았으면 했다.
그러나 어떤 흉터든 상처가 필요했고, 상처는 아팠다.
정선우에게는 삶의 흔적처럼 상처가 있었다. 수많은 상처는 생존의 증거였다.
살아있어서 아픈, 그런 상처였다.
참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남자는 고통이 삶을 갉아먹어 무너져도 입을 다물었다. 그것밖에 다른 방법을 몰랐다고 그에게 말했다.
서도운은 그런 정선우에게 아주 작은 상처도 더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소유의 증거지만 고통의 흔적이기도 했다. 그것을 보며 기뻐하고 싶지 않았다. 욕망의 자취에 불과한 것을 쓰다듬으며 만족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건 원하지 않았다.
그는 정선우의 눈가에 멍울거리며 맺힌 눈물을 닦아냈다.
“선우야, 미안해. 난 아프지 않게 상처를 내고 흉터를 남기는 법을 몰라.”
“그럼 어떻게 해? 난 형 건데.”
애처로운 얼굴을 쓸어내리며 달랬다. 그의 욕망도, 정선우의 욕망도.
“형이… 안 아프게 매일 물어줄게. 네 몸에서 내 흔적이 절대 사라지지 않게 해줄게.”
“매일? 내일도 물어줄 거야?”
“내일도 물어주고 모레도 물어줄게. 네가 죽을 때까지 계속 물어줄게.”
“진짜 매일 물어줘야 해.”
정선우가 남기고 간 하얀 거품처럼 몽글몽글한 웃음이 피어났다. 그가 웃자 정선우도 어물거리며 따라 웃기 시작했다.
“이제 형이 너 여기 두고 어디 가지도 못하겠네.”
“어딜 가는데?”
“출장이나 세미나.”
“나 두고 가지 마. 혼자 있는 거 싫어.”
다시 울상이 된 정선우의 얼굴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럼 형이 출장 갈 때도 같이 갈래?”
“응, 같이 가.”
정선우는 냉큼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너 정말 형 출장 갈 때 같이 갈 거야?”
“조금 전에 같이 간다고 했잖아.”
다시 한번 묻자 팩하니 토라져 입을 삐죽이는 모습에 그는 웃음을 터트렸다. 술에 취해서 답지 않게 우겨대는 게 귀여웠다. 평소에는 볼 수 없는 어리광이라 더 그랬다.
“선우야, 너 술 깨면 어쩌려고 그래?”
“형, 나 술 안 취했어. 그거 마시고 안 취해.”
“형 출장 갈 때 진짜 데려갈 거야. 안 간다고 하면 안 돼.”
“응.”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정선우를 보며 그는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정선우가 술이 깨면 이 대화를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그는 자신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고 싶었다. 매일 정선우의 몸에 그의 것이란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그는 정선우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부드러운 음모 위에 늘어진 성기를 쥐었다.
“거기, 물 거야?”
잔뜩 긴장한 정선우가 몸을 굳히며 물었다. 그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걱정 마. 여긴 안 물어.”
말 대신 여전히 묵직하지만 말랑한 성기를 부드럽게 쥐고 한입에 들어오는 귀두를 입에 담았다. 혀를 감아 정성껏 빨고 키스를 퍼붓자 나른한 한숨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시트 위에 쾌감으로 늘어진 정선우의 몸과 달리 성기는 단단하게 곧추섰다.
그는 입에 든 성기를 꺼내고 잔뜩 고인 체액을 삼키고 혀를 내밀어 좌우 허벅지 안쪽을 정성껏 핥았다. 그저 핥아줬을 뿐인데도 정선우의 성기는 쿠퍼액을 줄줄 흘렸다.
서도운은 꼿꼿하게 선 성기를 천천히 문지르며 속삭였다.
“절대 아프지 않게 할게.”
그러나 이 속삭임은 정선우에게 거짓말이나 다름없었다.
성기를 만지는 서도운의 손길은 능숙했다. 뿌리부터 요도까지 아플 만큼 세게 문지를 때도 있었고 손끝으로 닿을 듯 말 듯 스쳐 가기도 했다.
정선우가 한껏 달아올라 제발 싸게 해달라고 애원하면 그는 손을 멈추고 고환이나 발목을 핥았다. 성기에서 느껴지던 쾌감이 멈추자 정선우는 겨우 숨을 가라앉히며 여린 신음을 내뱉었다.
한두 번 참는 걸로 끝났다면 평소와 다름없겠지만 그는 그렇게 쉽게 사정시켜줄 마음이 없었다. 계속 사정의 문턱에서 자극이 멈추자 정선우는 울음을 터뜨렸다. 제발 그만해 달라고, 아프다고 흐느끼며 애원했다.
“형…, 아파…, 아파…….”
정선우는 어느 순간부터 말하는 법도 잊어버린 듯 “형”, “아파”라고밖에 하지 않았다. 신음이나 애원 대신 그저 그 말만 반복했다.
서도운은 그런 정선우를 내려다보며 검붉게 변한 허벅지 안쪽에 다시 입을 가져갔다. 이를 세우거나 물어뜯은 게 아니라 집요하게 빨아서 생긴 자국이었다.
그는 그 위에 색을 더하며 정선우의 고환을 손에 쥐었다. 쌓아 올린 쾌감으로 민감해진 몸은 고환을 가볍게 주무르는 것만으로 벌벌 떨었다.
“형…, 형…….”
계속 허벅지를 빨며 고환을 손 안에서 부드럽게 굴리자 허리와 다리가 경련하듯 툭툭 튀어 올랐다. 정선우는 몸부림칠 기력마저 잃고 주어지는 자극에 기계적으로 반응했다.
애원하는 소리도 사라지고 짧은 헐떡임만 이어지자 그는 몸을 일으켜 정선우를 살폈다.
넘치는 감정과 함께 흐르던 눈물은 이성과 함께 사라져 하얀 자국만 남아 있었다. 쾌감의 흔적도 고통의 흔적도 없는 메마른 얼굴은 얼핏 백치처럼 보였다.
서도운은 아무런 감정 없이 그를 바라보는 정선우의 얼굴이 마음에 들었다.
얼굴을 감추는 것, 그것이 정선우가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유일한 무기였다. 정선우는 그 유일한 무기마저 버리고 그에게 자신을 내보였다.
정선우는 그에게 꽃 같다고 했지만, 그에겐 정선우가 그랬다. 아무것도 감추지 않는 정선우는 너무나 여려서 손끝으로 만지기만 해도 시들 것 같았다.
그런 정선우가 온전하고 아름답게 자신의 품에서 피어나기만을 바랐다.
그는 자신이 이기적인 인간이란 걸 알고 있었다. 욕심 많고 교만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얼마나 잔혹하고 집요한지도 잘 알고 있었다.
세상으로부터 정선우를 지키기 전에 자신의 욕망으로부터 지켜야 했다.
서로의 욕구가 닿았다고 해도 그것이 정선우를 상처 입히고 해친다면 참아야 했다.
정선우를 온전히 가지려면 그래야 했다.
자신에게 뿌리를 내리고 자신이 주는 애정에 취해 품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하려면 그래야 했다.
욕심은 그에게 인내를 요구했고, 교만은 할 수 있다고 속삭였다. 잔혹함은 거대한 새장을 만들고 집요함은 그것을 실행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는 정선우에게 죽을 때까지 알려줄 생각이었다.
그의 품을 벗어나면 고통스러울 거라고, 그의 곁에서만 행복할 수 있다고, 그를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다고.
손을 뻗어 옅은 홍조가 어린 볼을 어루만지자 정선우가 그의 손에 얼굴을 비볐다.
“키스해줄까?”
정선우는 대답 대신 희미하게 웃었다.
그는 바싹 마른 정선우의 입술을 핥으며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떨어졌다 다시 닿는 입술 사이로 울리는 정선우의 신음은 쾌감이 아니라 안도의 한숨에 가까웠다.
가슴에 모은 두 손을 감싸며 입술을 떼자 정선우는 그의 타액을 삼키며 천천히 눈을 떴다.
“형… 싸고 싶어…….”
계속된 신음으로 쉬어버린 남자의 목소리는 지독하게 야했다.
서도운은 웃으며 흠뻑 젖은 정선우의 성기 주변을 쓰다듬었다. 성기와 음모에는 새어 나온 정액과 쿠퍼액이 뒤엉켜 있었다.
“싸게 해줘. 너무 아파…….”
울먹이는 목소리에 손끝으로 요도를 비볐다. 그것만으로 정선우는 허리를 뒤틀며 억눌린 신음을 내뱉었다.
“제발……, 터질 것 같아…….”
그가 성기를 꼭 잡고 부드럽게 아래위로 흔들자 정선우는 허리를 들썩이며 신음을 질렀다.
“형! 형!”
성기 끝에서 솟구친 하얀 점액질의 액체가 입고 있던 검은 스웨터에 후두둑 쏟아졌다. 정액으로 옷을 더럽힌 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는지 사정은 계속 이어져 서도운의 손을 적시고 흘러내렸다. 오랫동안 참은 탓에 정선우는 사정하는 내내 그의 품에 안겨 덜덜 떨었다.
정선우는 몇 차례에 걸친 긴 사정 후 늘어져 숨을 헐떡였다. 그는 나른하게 깜박이는 정선우의 눈꺼풀에 입을 맞추며 아직도 정액을 찔끔대는 성기를 천천히 비볐다. 흘러내린 정액으로 잔뜩 젖은 성기 위를 매끄럽게 움직이는 손은 평소처럼 사정의 여운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아니었다.
“아아, 형!”
서도운은 정선우의 성기를 힘껏 움켜쥐고 뿌리부터 귀두까지 천천히 올라갔다가 미끄러지듯 손을 내렸다.
“그만! 아!”
점점 빨라지는 손놀림에 정선우는 몸을 비틀어 그의 품에서 빠져나가려 했다. 그는 정선우의 몸에 올라타 성기의 뿌리를 쥐고 귀두를 손바닥으로 비볐다.
“싫어! 그만, 하지 마!”
정선우는 온몸을 버둥거리며 비명을 질러댔지만, 서도운은 멈추지 않았다. 한껏 휘어진 허리가 매트리스 위로 떠올랐다 가라앉는 것을 반복했다.
발작 같은 몸부림이 멈추더니 정선우가 사정했다. 그러나 자신이 사정한 것도 모르는 듯 계속 몸을 떨었다. 소리도 내지 못하고 간신히 숨만 내쉬고 있었다.
서도운은 정선우의 허리를 쓸어내리며 진정시키려 했지만, 그마저도 자극이 심한 듯 움찔거리며 피했다. 두려움에 동그랗게 몸을 만 남자를 끌어안고 한참을 토닥이자 겨우 정신이 들었는지 울기 시작했다.
“……싫어.”
조그맣게 울먹이는 소리에 그는 정선우의 볼을 쓸어내리며 웃었다.
“이거… 하지 마…….”
“응, 미안해. 안 할게.”
그의 대답에 안심한 듯 정선우는 눈을 감았다. 그는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내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잘했어.”
* * *
정선우는 밥을 먹고 다시 자라는 서도운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일어나려고 했지만, 온몸을 두드려 맞은 듯 꼼짝할 수 없었다.
침대에 누워 끙끙거리자 서도운이 다가와 일으켜주며 안경을 내밀었다. 눈도 뻑뻑하고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 게 꼭 감기에 걸린 것 같았다.
“괜찮아?”
그는 안경을 쓰고 고개를 저었다.
서도운이 따뜻하게 우려낸 녹차를 가져와 내밀었다. 몇 모금 마시고 나서야 겨우 목소리가 나왔다.
“형, 나 감기 걸린 것 같아.”
“숙취가 아니고?”
그제야 자신이 어제 술을 마셨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양원구의 술집과 맥주잔, 부끄러움, 키스……. 어제 일이 하나씩 생각났다.
“다리는 어때? 씻고 와서 약 바를래?”
서도운은 덮고 있던 이불을 끌어당기며 물었다. 서도운의 시선을 따라 그도 이불 아래 드러난 자신의 몸을 살폈다.
오른쪽 허벅지 안쪽에 시커먼 피멍이 있었다. 서도운은 피멍 위를 조심스럽게 만지며 상태를 확인했다.
“미안해, 형이 흥분해서 어제는 좀 심하게 했어. 오늘은 조절해서 적당히 할게.”
머릿속에서 지나간 시간이 빠르게 재생되었다. 그는 곧 어제 자신이 행한 모든 추태를 떠올릴 수 있었다.
“속이 이상해? 토할 것 같아?”
하얗게 질린 그의 얼굴을 보며 서도운이 물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예 기억이 없으면 좋으련만 병맥주 세 병은 그에게 수치심만 빼앗았다.
“선우야, 앞으로 밖에서는 절대 술 마시지 마.”
그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안이고 밖이고 다시는 술을 마시고 싶지 않았다.
“속 안 좋으면 밥 먹지 말고 그냥 더 잘래?”
서도운에게 들고 있던 녹차 잔을 내밀고 누웠다.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을 감았다.
죽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