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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주인 있는 개 (32/35)

32. 주인 있는 개

연말 망년회에 나갔던 최영해는 말 그대로 ‘빡쳐서’ 술자리를 뛰쳐나왔다.

지하 바의 계단을 한달음에 올라와 담배 피울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다 비상계단의 작은 창문 앞에 누군가 가져다 놓은 재떨이를 보았다. 창문 앞에 서서 담배를 꺼내 물자 눈에 보이는 게 없을 정도로 끓어올랐던 분노가 겨우 잦아들었다.

다 피운 담배를 재떨이에 버리고 새 담배를 꺼내 물었다. 한 번 끊었다 다시 피우니 전보다 더 많이 피우는 것 같았다.

이게 다 정선우 때문이었다.

그 샌님 같은 얼굴로 담배를 안 피운다기에 그도 담배를 끊었다. 스킨십이 싫다기에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고 섹스를 하고 싶지 않다기에 사귀는 내내 손가락만 빨고 있었다. 이상형을 실제로 만나니 눈이 돌아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정선우가 원하는 대로 맞춰줬다.

그 결과가 이렇게 거하게 뒤통수를 맞는 것일 줄이야, 사람을 얼마나 만만하게 봤으면 이런 식으로 엿을 먹이나 싶었다.

정선우가 자신에게 과분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도 나름 잘 나가는 게이였다. 얼굴이나 몸매도 괜찮았고 잘 놀고 싹싹한 편이라 인기도 많았다. 물론 서도운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서도운은 이른바 ‘천상계’의 존재였다. 연예인만큼 잘생긴 얼굴에 돈이며 능력이며 성격까지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었다. 클럽이든 바든 어딘가 나타났다는 소식이 들리면 그 잘난 얼굴을 한 번 보려고 온갖 놈들이 나타났다. 말 그대로 손가락 하나로 남자들을 줄을 세워 ‘간택’하는 사람이었다.

최영해는 멀찍이서 서도운과 서도운에게 간택을 바라는 남자들을 구경했다.

서도운과 그는 물이 달랐다. 서도운이 돈지랄하는 유학생이나 어느 재벌 손자와 어울렸다면 그도 그 자리에 끼었을지도 몰랐다. 그가 어울리는 이들은 대부분 가볍게 섹스를 즐기는 속물들이었고 그 역시 그랬다.

끼리끼리 논다고, 서도운이나 서도운이 친하게 지내는 이들은 끝내주게 매너가 좋은 사람들이었다. 모두 하룻밤이든 뭐든 엮이고 싶은 남자들이었다. 인연이 되면 파트너로 삶을 함께하고 싶은 그런 괜찮은 남자들이었다.

그도 언제까지나 술이나 섹스에 취해 흥청망청 웃고 떠들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어릴 때나 할 수 있는 거지 나이가 들면 남는 게 없었다. 

해외 다큐에 나오는 노년의 게이 커플처럼 함께 늙어갈 수 있는 파트너를 원했지만, 아직은 한 사람에게 얽매이기에는 이른 나이라고 생각했다. 그럴 자신도 없었다. 가볍게 섹스를 하고 금방 헤어지고, 지금은 그게 좋았다.

최영해는 다시 새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정선우가 바에 들어왔을 때는 모두 얼이 빠졌다. 정말 잘생긴 남자였다.

무심한 얼굴로 내부를 둘러보고는 바 테이블로 와 그의 곁에 앉았다. 그 우연을 기회로 그는 정선우에게 말을 걸었다. 혼자 왔냐는 물음에, 일행이 있냐는 물음에, 사귀는 사람이 있냐는 물음에 정선우는 모두 단답형으로 답했다. 흥분한 그가 미친 듯 떠들어 댔기에 그런 과묵함도 마음에 들었다.

외모를 믿고 건들거리며 오만하게 굴었으면 그렇고 그런 놈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정선우는 기이할 정도로 말이 없고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었다. 그 신비로운 분위기에 홀딱 빠졌다.

처음 말을 튼 인연으로 번호를 주고받았고, 두 번째 만났을 때 사귀자고 말했다. 섹스도 스킨십도 하지 않는 조건이라도 괜찮았다. 평생 곁에 두고 얼굴만 봐도 행복할 것 같았다. 정선우에게는 삶을 구속당해도 기쁠 것 같았다.

최영해는 한숨을 섞은 담배 연기를 뱉어냈다.

무슨 말을 하든지 군말 없이 따라주는 정선우의 모습에 자신을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진짜 연인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심각한 착각이었다.

그에게 정선우는 ‘관상용 애인’이었다. 가까이서 아름다운 외모를 볼 수 있다는 것 외에는 남과 다를 바 없었다.

회사 일이 바빠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만날 수 있던 남자는, 이직을 준비하며 한 달에 한 번 만나기도 힘들어졌다. 얼굴을 볼 수 없는 관상용 애인과 사귀는 건 무의미했다.

그즈음 되자 처음 가졌던 기대감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고 정선우가 자신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정선우는 무뚝뚝한 데다 타인에게 관심이 없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애인이라고 해도 다를 게 없었다. 사귀는 내내 먼저 연락하는 일은 한 번도 없었고, 보고 싶다거나 좋아한다는 간지러운 말은 메시지로도 안 했다.

정선우에게는 자신 같은 평범한 사람이 어울리지 않았다. 그 환상적인 외모에 어울리는 잘난 남자나 여자가 나타나면 언제든 헤어져 줄 생각이었다.

최영해는 늘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미 감정 정리는 끝났지만, 정선우와 서도운이 그렇고 그런 사이 아니냐는 말을 들으니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다음 날 술이 깨고 나니, 자신이 왜 그렇게 화를 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정선우의 멱살까지 잡을 일은 아니었다.

그러다 자신이 느낀 배신감이 좋아하던 아이돌의 스캔들을 접한 기분과 비슷하다는 걸 알았다. 자신을 보고 연애가 아니라 팬질하는 거냐고 놀리던 사람들의 말이 떠올랐다.

정선우가 서도운과 사귄다는 말을 전해 들었을 때는 그럴 줄 알았다고 생각했다. 정선우에게 미련은 없었다.

최영해는 나름 정선우와 깔끔하게 잘 헤어졌다고 생각했다.

술에 취해 쌓인 걸 좀 퍼붓긴 했지만.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고 코트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확인했다.

갑자기 식식거리며 사라진 그를 찾는 메시지 수십 개가 쌓여있었다. 불면 날아갈 듯한 가벼운 인연의 친구들밖에 존재하지 않지만 그래도 없으면 아쉬웠다. 담배를 다 피우고 들어가겠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계단을 내려갔다.

바의 입구에 한 무리의 남자들이 서서 담배를 피우며 이런저런 소문을 떠들어대고 있었다.

“씹선비가 서도운이랑 사귄다던데 들었냐?”

“서도운이랑?”

“씹선비는 게이 아니라며.”

“게이 맞대.”

“그럼 헤테로란 건 뭐야?”

“전에 사귄 놈이 씹선비한테 채이고 헛소문 낸 거래.”

최영해는 자신과 정선우의 이야기가 나오자 멈춰 섰다. 술집을 박차고 나온 그 상황이 되풀이될 거란 걸 알았지만 무시하고 지나갈 수 없었다.

“인성 수준 알 만하네.”

“하여간 찌질이랑은 상대를 하면 안 돼.”

졸지에 채이고 헛소문이나 퍼뜨리는 찌질이가 되어버렸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심호흡을 하며 꾹 눌렀다.

“누가 씹선비 좆이 그렇게 크다던데.”

“그 와꾸에 좆까지 크다고? 시발, 조물주가 미친 거 아냐?”

“거기다 그 좆이 완전 신품이란다. 서도운이 처음 맛봤다던데.”

“찌질이는 그 좋은 걸 왜 안 먹었대? 병신이야?”

병신이라서 안 먹은 게 아니었다. 먹고 싶어도 먹을 수 없었다.

처음부터 정선우와는 섹스를 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만났고 사귀는 내내 손끝 한번 댄 적이 없었다. 그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줘야 먹지, 서도운한테는 주고 걔한테는 안 줬으면 뻔하지.”

“얼굴? 하긴 자기가 그만큼 생겼으니 그럴 만도 하네.”

“그럼 그 병신은 씹선비 좆도 구경 못 했다는 거야?”

“구경은 했겠지. 좆이 안 서서 그렇지.”

“시발, 얼굴이 얼마나 빻았으면 좆이 안 서냐?”

“씹선비는 그 병신이랑 왜 사귄 거래?”

“그 병신도 서도운처럼 돈 좀 있겠지.”

“이야, 씹선비도 얼굴값 좀 따지나 보네.”

“그 얼굴에 좆까지 크다는데, 얼굴값에 좆값까지 더해야지.”

낄낄거리는 웃음소리와 서로의 얼굴을 두고 농담하는 말이 이어졌다.

그는 지금까지 타인으로부터 인성이나 외모에 대해 지적받은 적이 없었다. 모난 성격이 아니라서 사람들과도 잘 어울렸고 외모도 귀엽다거나 곱상하다는 말을 들었다.

최영해는 자신이 이런 식으로 사람들의 공공연한 조롱거리가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정선우와 사귈 때도 뒤에서 수군거리는 사람이 있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왜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식이면 어딜 가든 병신 소리를 들을 게 뻔했다. 이 소문이 가라앉을 때까지는 누군가를 사귀는 것은 물론이고 친구를 만나 가볍게 술을 마시는 것도 못 할 것 같았다. 처음 이 소문을 만든 놈을 찾아내 죽여 버리고 싶었다.

최영해는 다시 비상계단을 올라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뻑뻑 연기를 내뿜으며 휴대폰을 꺼내 자판을 두드렸다. 욕과 함께 이 일에 대해 해명을 하라는 메시지를 보내자 만나서 이야기하자는 답이 왔다.

그는 정선우와 서도운이 자신의 뒤통수를 때리고 엿 먹이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 * *

이곳저곳 불려 다니며 술을 마시던 것도 끝나자, 한가해진 문경운은 초저녁부터 양원구의 술집으로 기어들어 갔다.

약속이 없으니 집에 일찍 들어가 쉰다는 생각은 그의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결혼 시즌이 시작되면 그가 일하는 웨딩드레스 샵은 지옥으로 변했다. 매일 철야에 밤샘 작업으로 술은커녕 집에도 못 들어갔다. 그는 지옥문이 열리기 전에 술이라도 마음껏 마셔둘 생각이었다.

“넌 오늘 같은 날 여기 왜 와?”

“형이 보고 싶어서 왔지. 원구 형은 내 마음의 안식처잖아.”

“좆같은 소리 하고 있네에.”

양원구는 하이네켄 병과 잔을 내려놓으며 혀를 찼다.

“그래서 이 좋은 날 아무 약속이 없다고오?”

“연말 모임은 다 끝났어. 이제 신년회로 달려야지.”

“술 마시는 거 말고, 누구 없냐고오.”

“원구 형도 참, 내가 형 말고 누가 있어.”

“징그러운 소리 하지 말고, 진짜 없어어?”

“……없어.”

양원구는 올해도 애인 없이 홀로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보내는 문경운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은 놈이지만 심각한 얼굴 밝힘증에 취향이 뭣 같아서 아무나 소개시켜줄 수도 없었다.

“넌 뭔 놈의 이상형이 그 따위야아?”

“내 이상형이 어때서?”

“야이, 변태 새끼야! 좆 달린 디즈니 공주를 어디서 구해?”

양원구의 타박에 문경운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맥주잔을 들었다.

그가 매우 괜찮은 남자라는 사실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여장을 좋아하는 남자도 아닌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공주들처럼 예쁘게 드레스가 어울리는 아름다운 남자를 원했다. 그 뭣 같은 취향 덕분에 그에게 사귀자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다리면 어디서 나타나겠지. 정원이 형이나 도운이 형도 잘만 사귀는데 나라고 계속 혼자겠어.”

“걔들이랑 너랑 같냐? 걔들은 정상이잖아!”

“그 둘이 어떻게 정상이야? 미쳐도 한참 미쳤는데.”

“걔들은 왕자랑 뭘 좀 해보려고 하지 공주한테 좆이 달렸는지 확인을 안 해. 너랑 다르게 정상적인 게이야.”

매서운 질책에 문경운은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술집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웬일이래.”

요즘 가장 뜨거운 소문의 주인공인 최영해가 들어오더니 술집 구석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최영해는 주로 클럽이나 바를 찾는 타입이라, 양원구의 술집에 올 때는 일행이 있을 때뿐이었다. 홀로 양원구의 술집을 찾은 적이 없기에 그는 최영해가 누굴 만나는지 궁금해졌다.

“형, 말린 과일 좀 줘.”

양원구는 문경운의 말에 툴툴거리며 말린 오렌지를 그릇에 담아 내려놨다. 그는 오렌지를 천천히 씹으며 맥주를 홀짝거렸다. 잔을 다 비우기 전, 늘씬한 키의 안경을 쓴 남자가 술집으로 들어왔다. 그는 안경과 어둑한 조명에 가려진 얼굴보다 카멜색 코트의 실루엣으로 그 남자가 누군지 알아챘다.

“이게 뭔 일이야…….”

정선우가 전 애인인 최영해를 발견하고는 곧장 그 테이블로 가더니 두 사람은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문경운은 서도운의 경고가 떠올랐다. 뭐가 어떻게 되었든 저건 좋지 않았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 메신저 창을 열었다가 전화를 걸었다. 문자로 오해를 만들기보다는 말로 설명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잠깐의 신호음이 울리고 서도운의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정선우와 최영해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짜냈다.

“형, 난데…….”

-웬일이야? 무슨 일로 네가 전화를 다 했어?

“저기, 여기 원구 형네인데…… 정선우 씨가 여기 있거든.”

-그래?

“음, 그게……. 정선우 씨가 최영해 씨를 만나는데… 형이 알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알아.

“어엉?”

-지금 그쪽으로 가고 있어.

“여기로 온다고?”

-좀 이따 도착할 거야. 운전 중이라 끊을게.

통화가 끊기는 소리가 들리고 문경운은 얼빠진 얼굴로 자신의 손에 든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 * *

서도운은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고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

문경운의 전화를 받기 전, 정선우에게서 양원구의 술집에 도착했다고 메시지가 왔다. 그의 연인은 정말로 귀엽게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다.

정선우는 업무를 집에 가져오는 일도 없고 사적으로 연락을 주고받는 사람도 없어, 퇴근 후에 휴대폰으로 연락하는 사람은 그와 백도경뿐이었다. 두 사람이 동거를 시작하고 백도경은 예의라며 8시 이후에는 일절 연락하지 않았고, 덕분에 8시 이후 정선우의 휴대폰을 울리는 사람은 서도운밖에 없었다.

낮이든 밤이든 가리지 않고 바쁘게 벨을 울려대는 서도운의 휴대폰에 비하면 정선우의 휴대폰은 지극히 조용했다. 정선우는 그 조용함을 기뻐했다.

퇴근 후에도 전화나 메시지로 업무 지시를 받거나 상사의 폭언을 듣는 일이 종종 있어서, 저녁에 벨이나 알람이 울리는 게 지금도 싫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전화는 다르다고, 정선우는 자신의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폰 화면에 형 이름이 뜨면 정말 기분이 좋아”라고 말했다. 수줍게 웃고 있는 얼굴에 그도 기분이 좋아졌다.

어젯밤 자정에 가까운 시간, 내내 조용하던 휴대폰의 알람이 울리자 정선우는 놀라 자신의 휴대폰을 확인했다.

잔뜩 긴장해 휴대폰을 내려다보던 얼굴은 몇 번의 심호흡과 함께 풀어졌다. 그리고는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다며, 그게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말과 함께 냉장고에서 조각 케이크를 꺼냈다.

정선우의 뜬금없는 행동에 그는 적잖게 당황해 괜찮은지 물을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도경이가 갑자기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는 단 걸 먹어야 된다고 그래서.”

정선우는 딸기 쇼트케이크를 열심히 먹으며 그에게 자신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서도운은 정선우에게 휴대폰을 받아 옛 애인이 보낸 메시지를 쭉 읽었다.

최영해는 욕설과 함께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전하며 해명과 사과를 요구했다. 언제나 그렇듯 사람들은 칭찬보다 비난하는 것을 좋아했고 서도운과 정선우가 사귀고 있다는 가십보다 정선우를 놓친 최영해를 조롱하는 것을 택했다.

“전에 받은 메시지도 읽어도 돼?”

그의 물음에 정선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도운은 천천히 화면을 위로 올리며 정선우와 최영해가 주고받은 메시지와 문자까지 모두 확인했다. 정선우의 휴대폰을 복사하며 이미 확인했지만, 연인의 허락을 받고 연인의 앞에서 그걸 읽는 건 다른 의미였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메시지는 별다른 내용이 없었다. 처음에는 흥분한 최영해가 온갖 메시지를 보냈다. 외모를 칭찬하고, 취향이나 일상을 묻고, 재미있는 기사나 사진을 보내고, 그 사이에 하트가 달린 이모티콘이 정신없을 정도로 이어졌다.

그러나 정선우는 그 모든 말에 한결같이 짧고 건조한 어투로 대꾸했다. 그런 반응에 지쳐가듯 최영해의 메시지는 점점 줄어들어 나중에는 사무적으로 보일 만큼 용건만 간단하게 전했다.

서도운은 정선우에게 휴대폰을 돌려주며 떠오른 생각을 물었다.

“선우야, 최영해 씨 번호나 메시지는 왜 안 지우는 거야?”

정선우가 옛 애인에게 어떤 미련도 없다는 건 자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체 무슨 생각으로 옛 애인의 메시지를 현재 애인에게 당당하게 보여주는지 궁금했다.

“꼭 지워야 해?”

“최영해 씨랑 주고받은 메시지에 어떤 의미가 있어?”

“……영해가 나한테 굉장히 잘해줬어.”

“어떻게 해줬는데?”

“뭘 시키지도 않고 말을 안 해도 괜찮다고 하고…. 그런 사람이 처음이라서…….”

최영해와 함께 보낸 시간을 설명하는 정선우의 모습은 백도경이 예전에 사립학교에서 공립학교로 옮기고 처음 사귄 친구라며 자신의 짝에 대해서 말할 때와 비슷했다.

“영해가 보낸 메시지를 가끔 다시 읽는데, 그때는 영해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이해를 못 했어. 근데 형이랑 사귀고 나서 다시 보니까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

머릿속에 같은 반 친구가 좋아한다며 보낸 쪽지를 몇십 년 후에 읽고 미안해하는 드라마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선우에게 최영해의 의미는 일반적인 의미의 ‘옛 애인’이 아닌 것 같았다.

“영해한테 내가 많이 잘못한 것 같아, 지금도 그렇고…. 난 사람들이 날 비웃을 거라고 생각했어. 이 나이까지 경험이 없으면 바보라잖아. 근데 왜 나한테 그러는 게 아니라 영해를 그러는지 모르겠어.”

“사람들은 약한 걸 괴롭히는 걸 좋아하니까.”

“영해는 아는 사람도 많고 친한 사람도 많았어. 그 사람들은 왜 영해 편을 안 들어 주는 거야? 거긴 원래 그래?”

안타까움을 담은 정선우의 말에 그는 생긋 웃었다.

“‘거기’뿐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있는 곳은 다 그래.”

“그럼 나도 곧 그렇게 되겠네. 다들 좋은 사람 같았는데…….”

서도운은 남자들이 친절하게 대했던 이유를 모르는 자신의 연인을 바라봤다.

정선우는 자신이 남자에게 성적대상이 된다는 걸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게이라고 확신하며 서도운을 사랑하고 있었다.

서도운은 성 정체성을 깨닫기도 전에 그에 대한 사랑을 먼저 깨달은 정선우가 신기했다. 혹은 그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으로 성별 따위는 상관하지 않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가 먼저든 이미 정선우는 그의 것이었고,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걱정 마, 너한테는 내가 있으니까.”

그의 말에 정선우는 빤히 그를 쳐다보다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응, 형이 있으니까.”

정선우는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남은 케이크를 먹는 데 열중했다.

포크가 케이크의 귀퉁이를 무너뜨리며 그 위를 장식한 커다란 딸기가 식탁 위로 떨어졌다. 서도운은 자신에게 굴러온 딸기를 집어 정선우의 입 앞에 내밀었다. 정선우는 망설임 없이 그의 손에서 딸기를 받아먹었다.

서도운은 정선우가 딸기를 씹어서 삼키는 걸 가만히 지켜봤다. 귓가에서 시작된 여린 홍조가 정선우의 볼을 물들였다.

“……형, 키스해도 돼?”

정선우의 입에서 흘러나온 딸기향이 그에게 닿았다.

“키스만 할 거야?”

“……다른 것도 해도 돼?”

“뭘 하고 싶은데?”

식탁 너머로 몸을 기울이며 묻자 정선우는 눈을 내리깔고 대답했다.

“뭐든…… 야한 거.”

딸기향이 감도는 키스는 달콤하고 부드러웠다. 입술에서 딸기 향을 모두 지워내고 “빨아봐”라고 속삭이자, 정선우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그의 성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서도운은 성기를 빨며 흥분에 못 이겨 자신의 성기를 비비면서 자위하는 정선우의 모습을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를 올려다보며 살며시 웃고 있는 정선우의 얼굴에 그러한 욕망은 곧 지워졌다.

정선우의 모든 것은 그의 것이었다.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았다.

다음 날 출근길 차 안에서 정선우는 최영해에게 직접 사과하고 싶다고 했다. 미안한 게 많아서 만나서 사과하고 싶다는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양원구의 술집에서 만나라고 권했다. 그곳이라면 무슨 일이 생기든 정선우가 난처해지지 않도록 양원구가 챙겨줄 터였다.

서도운은 차에서 내리기 위해 안전벨트를 푸는 정선우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형이 바래다줄까?”

“아니, 혼자 갈게.”

정선우는 짧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여전히 걷히질 않는 시선에 정선우는 차에서 내리지 않고 머뭇거렸다. 시선을 피하듯 살며시 내려앉은 고개가 다시 들리고 서도운을 향했다.

“……데리러 와, 기다릴게.”

“그래, 형이 데리러 갈게.”

정선우는 그의 말에 여린 미소로 화답했다.

양원구의 술집 앞에 차를 세우고 아직 환하게 불을 밝힌 꽃집으로 들어갔다. 꽃집 주인은 커다란 붉은 꽃다발을 사 갔던 잘생긴 남자를 기억하고 반겼다.

“어서 오세요, 이번에는 어떤 꽃다발을 만들어 드릴까요?”

서도운은 수많은 꽃들 사이로 정선우가 눈여겨보던 꽃을 찾아냈다.

“이 꽃이 제일 돋보이게 꽃다발을 만들어 주세요.”

꽃집 주인은 그가 가리키는 화려한 붉은색의 꽃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저걸 더 눈에 띄게 해달라고요?”

“네.”

“지난번 주문도 그렇고 특이한 걸 좋아하시네요. 꽃다발 크기는 어떻게 해드릴까요? 전처럼 커다랗게 할까요?”

“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정선우가 그를 닮았다고 했던 붉고 화려한 꽃을 다시 쳐다봤다.

“……근데 이건 무슨 꽃인가요?”

“장미예요, 고스펠이라고 수입종이요. 너무 화려해서 장미 안 같죠? 향기로운 걸로도 유명해요.”

꽃집 주인이 설명과 함께 그에게 꽃을 내밀었다.

그때 꽃다발에서 풍기던 향기가 다시 느껴졌다. 겹겹의 붉은 꽃잎으로 이뤄진 꽃은 꽃집 주인의 말처럼 너무 화려해서 장미로 보이지 않았다.

정선우는 그런 꽃이 자신을 닮았다고 했다.

붉고 화려한 꽃……, 서도운은 정선우가 원한다면 꽃이 되어줄 수 있었다.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이 되어 곁에 있어 줄 수 있었다.

“예쁘네요.”

서도운이 부드럽게 눈을 휘며 녹아내릴 것 같은 미소를 짓자 꽃집 주인은 얼굴을 붉혔다.

“네, 무척, 예쁜…… 꽃이에요.”

가게 앞에 잠시 주차를 해도 되겠냐는 물음에 꽃집 주인은 얼마든지 그렇게 하라며 붉어진 얼굴로 꽃을 작업대에 펼쳤다.

꽃집을 나와 양원구의 술집으로 올라가는 좁은 계단을 올랐다. 계단 끝에 서 있던 문경운이 그를 보고는 손짓했다.

“둘이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언성이 높아져서 원구 형이 옥상으로 보냈어. 아무도 옥상으로 못 가게 내가 지키고 있었어, 착하지?”

“고마워.”

서도운은 싱긋 웃어주며 옥상으로 향했다.

어두운 계단을 지나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옥상 문을 열자 환한 도시의 밤이 비쳤다.

열린 문틈으로 격분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 * *

“왜 또 입을 다물어? 그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계속해 보라잖아!”

최영해는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하얀 입김이 담배 연기처럼 사방으로 퍼졌다.

“미안해.”

“미안하다면서 그딴 소리를 해? 야, 그럼 내 얼굴이 뭣 같아서 네 몸에 손도 대지 말라고 했다는 말이잖아.”

“그런 뜻이 아냐.”

“아니긴 뭐가 아냐! 나랑 사귀는 동안 내 얼굴 보면서 힘들었겠네. 같이 밥 먹으면서 토할 것 같아서 어떻게 참았어? 집에 가서 토했어?”

최영해는 자학 같은 빈정거림을 내뱉으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한때 좋아했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면전에서 그와 서도운은 달라서 어쩔 수 없다고, 뻔뻔하게 지껄였다.

“안 토했어.”

“시발, 내가 지금 토했는지 안 토했는지 묻는 게 아니잖아! 처음부터 말하지 그랬어? 못생겨서 싫다고, 서도운 정도는 생겨야 상대해준다고! 그럼 사귀자고도 안 했을 거 아냐!”

“그때는… 내가 잘 몰랐어. 너랑 도운이 형이 어떻게 다른지 몰라서 그랬어.”

“나랑 서도운이 어떻게 다른지 모른다고?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그건 눈이 아니라 구멍이야?”

“지금은 알아.”

정선우의 말에 최영해는 숨이 턱턱 막혔다. 한마디, 한마디가 그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만나서 사과하고 싶다는 말에 순순히 나온 자신이 멍청이였다.

무표정하게 입을 다문 정선우를 보며 최영해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흥분으로 손이 떨려 담뱃불을 붙이는 데 한참 걸렸다. 폐 깊숙이 연기를 빨아대고 나자 겨우 진정되는 것 같았다.

“섹스하기 싫다면서 어쩌고저쩌고했던 거, 다 거짓말이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흘깃 쳐다본 정선우의 얼굴은 하얗게 김이 서린 안경으로 가려진 눈과 굳은 입매로 차갑게 느껴졌다.

처음 봤을 때는 저 고고한 분위기가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역겹게 보였다. 가진 놈, 잘생긴 놈에게는 웃어주고 그렇지 않은 놈에게는 웃어주지 않는, 가식적인 얼굴이었다.

“사람 하나 호구 병신 만들어서 이미지 한 번 제대로 만들었네……. 그래, 당한 내가 병신이지.”

“그런 거 아냐.”

“시발, 아니긴 뭘 아냐! 서도운한테 접근하려고 그런 거잖아. 동정이라고 서도운이 좆나 빨아주는 것 같은데, 단물 빠지면 서도운이 너도 버려. 서도운이 너랑 사귀기 전에 몇 명이랑 사귄 줄 알아? 너도 오래 못 가. 2, 3년? 그동안 열심히 서도운 발바닥 핥아. 개새끼처럼 꼬리도 좆나 흔들어. 그래야 서도운이 안 버리지.”

절대 바뀌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정선우의 무표정한 입매가 움직였다. 최영해는 정선우가 뭐라고 변명을 늘어놓을지 기다렸다.

굳게 다문 정선우의 입에 균열이 생겼다. 말보다 먼저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형이 발바닥을 핥으라면 핥을 거야. 개처럼 꼬리를 흔들라고 하면 그럴 거야. 그래야 형이 안 버린다고 그러면 그렇게 할 거야.”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기껏 한다는 말이 저따위라니, 최영해는 저런 놈에게 반했던 자신이 정말 병신처럼 느껴졌다. 차가운 바람에 담배를 든 손이 시려와 바닥에 버리고 발로 짓눌러 껐다.

“네가 이런 새끼란 거 서도운은 알아?”

“형은…… 다 알아.”

정선우의 대답에 최영해는 다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을 붙이려다 이어지는 정선우의 말에 라이터를 들고 멍청하게 쳐다봤다.

“난 널 이용하지도 않았고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도 아냐. 그때는 내가 사귄다는 게 뭔지 몰라서 그랬어. 난… 서도운만 되는 거였어. 그때는 몰랐어.”

최영해는 입에 문 담배를 다시 담배 케이스에 넣었다.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왔다.

“넌 서도운이 아니라서 안 돼.”

“……어떻게 대놓고 그런 소리를 해?”

“미안해. 어쩔 수 없어.”

조금도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미안해”라고 말하는 정선우를 보며 최영해는 토할 것 같았다. 끔찍한 인간이었다.

“시발 새끼야, 미안하면 미안한 척이라도 해야 할 거 아냐!”

“미안한 척하는 게 어떤 건지 모르겠어. 가르쳐주면 할게.”

최영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정선우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얼굴을 얻어맞은 정선우는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한 대로는 분이 풀리지 않아 식식거리던 최영해는 다시 주먹을 날렸다. 당연히 피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정선우는 가만히 서 있다가 맞고 쓰러졌다. 때린 최영해가 당황해 제 앞에 쓰러진 남자를 쳐다봤다.

“야, 왜 안 피해?”

맞은 곳을 손으로 누르고 떨어진 안경을 찾아 바닥을 더듬던 정선우는 불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때리는데 어떻게 피해…….”

최영해는 얼빠진 표정으로 정선우를 쳐다봤다. 여전히 놀랍도록 잘생긴 얼굴이었다. 저 정도로 잘생겼으면 액션 히어로처럼 날렵하게 움직여야 했다.

기척도 없이 나타난 누군가가 떨어진 안경을 집어 정선우에게 내밀었다. 정선우는 안경을 건네주는 손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챘다.

“형…….”

익숙한 손이 맞은 곳을 살피며 상처를 확인했다.

“괜찮아?”

“응.”

서도운은 고개를 끄덕이는 정선우를 일으키며 차 키를 내밀었다.

“내려가 있어.”

차 키를 받아든 정선우는 최영해를 쳐다봤다.

“형이 알아서 할 테니까 차에서 기다리고 있어.”

부드럽게 웃으며 속삭이는 서도운의 말에 정선우는 그대로 몸을 돌려 사라졌다. 정선우가 옥상에서 사라지자 서도운의 시선이 최영해를 향했다.

가까이서 본 서도운은 정선우와 타입은 달랐지만 끝내주게 미남이었다.

“선우가 말하는 게 서툴러요. 기분 나빴다면 내가 대신 사과할게요.”

미안하다고 하면서 너무나 환하게 웃고 있는 서도운의 얼굴에 최영해는 자신을 놀리는 거라고 생각했다. 울컥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서도운을 향해 뭐라고 입을 떼려다 멈췄다. 웃는 얼굴이지만 온몸에서 풍기는 위압감이 화를 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 때문에 곤란한 일을 당했다던데, 보상을 해드리죠.”

“보, 보상이요?”

“속물들을 위한 위로법은 따로 있죠.”

서도운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명함을 내밀었다. 최영해는 개와 고양이가 그러진 명함을 받아들고 멍하니 서도운을 쳐다봤다.

“거기 있는 이메일로 원하는 만큼 액수를 적어서 보내요.”

“네?”

“내가 돈 많은 거 알잖아요.”

최영해는 뭐라 대꾸를 하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난 최영해 씨에게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뭐, 뭐가요?”

“슈퍼카는 평범한 차랑 시동 거는 법부터 달라요. 누구든지 운전석에 앉을 수는 있지만 아무나 운전을 못 해요. 그 차를 아는 사람만 시동을 걸고 도로 위를 달릴 수 있어요. 정선우는 그런 존재예요.”

그리 크지 않은 서도운의 나지막한 목소리는 이상하리만치 잘 들려 악마가 속삭이는 듯했다.

“운전석에 앉아 본 걸로 만족하세요.”

“네?”

“곱게 보관하다 넘겨줘서 고마워요. 이번에 폐 끼친 거에 보관료도 더해서 줄 테니 이 기회에 한몫 잡아요.”

“……어, 얼마나?”

“그런 고민을 하지 마세요. 얼마든지 줄 테니까.”

최영해는 손에 든 명함을 내려다봤다. 명함을 쥔 손이 추위에 덜덜 떨려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다. ‘억’ 뒤에 동그라미가 몇 개인지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억이라니, 추위에 현실 감각이 마비된 것 같았다.

고개를 들어 쳐다본 서도운은 매서운 겨울바람 속에서도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덜덜 떨고 있는 자신과 그런 서도운의 모습은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 * *

정선우는 최영해에게 맞은 턱을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맞은 곳은 그리 아프지 않았지만 맞았다는 충격이 컸다. 누군가와 이렇게 감정적으로 부딪히는 일은 처음이었다.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서도운이나 백도경과 대화하는 것에 익숙해져서 이제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자신은 여전히 서투른 인간이었다.

다시 한숨이 흘러나왔다.

서도운은 그가 옥상에서 최영해와 대화하는 걸 지켜본 것 같았다. 아마 그가 맞지 않았다면 끝까지 나서지 않고 지켜보기만 했을 것이다.

잘 해냈다면 좋았을 텐데, 서도운이 나설 일이 없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갑자기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커다란 꽃다발이 보였다. 꽃다발이 다시 문을 두드렸다.

멍한 얼굴로 문을 열자 꽃다발 너머 서도운의 얼굴이 보였다.

“나, 나…… 주는 거야?”

“내가 너 말고 누구한테 주겠어?”

꽃다발을 주는 이유를 몰라 정선우는 선뜻 손을 내밀 수 없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에 서도운의 머리카락이 흩날리며 꽃향기가 전해졌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손을 내밀자 서도운은 그의 품에 커다란 꽃다발을 안겨줬다. 심장에서 퍼지는 달콤함에 손끝이 떨려왔다.

서도운은 히터를 켜고 언제나 그렇듯 춥지 않은지 답답하지 않은지 물었다. 그는 그저 괜찮다고만 대답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차 안을 가득 채운 꽃향기는 청초하거나 여린 구석이라고는 없었다. 강렬하고 향기는 서도운의 품에 안겨있는 것 같았다.

전과는 다르게 다양한 색의 꽃들로 만들어진 꽃다발 속에서 그가 서도운을 닮았다고 생각한 그 꽃이 눈에 띄었다. 붉고 화려한 꽃은 독보적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누구든 감탄할 수밖에 없는 그런 아름다움이었다.

그 꽃은 그가 말하지 않아도 자신은 알고 있다고, 네가 원하는 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고개를 들어 운전을 하고 있는 서도운을 바라봤다.

“……화 안 났어?”

그의 물음에 서도운은 싱긋 웃었다.

“내가 왜 화가 나?”

“괜한 일을 했잖아. 바보같이…….”

“이게 왜 괜한 일이야?”

“……옛날부터 내가 잘못했다고 사과해서 일이 제대로 풀린 적이 한 번도 없었어.”

“사과를 한다고 상대방이 받아줘야 할 이유는 없어. 잘못을 해서 용서를 비는 거라면 다른 의미겠지만, 이건 네가 사과를 할 필요가 없는 문제야. 네가 사과하고 싶어서 한 거라면, 그걸로 된 거야.”

“응, 영해한테 미안하다고 하고 싶었어.”

“잘했어.”

서도운의 말에 천천히 한숨이 흘러나왔다.

정선우는 그제야 자신이 계속 긴장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최영해에게 맞은 곳은 얼굴이지만 아픈 곳은 가슴이었다. 멍이 생기고 부어오른 것처럼 아리고 답답했다.

자신을 편드는 것도 최영해를 비난하는 것도 아닌, 하고 싶은 걸 했으니 괜찮다는 서도운의 말이 맞은 곳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뭉쳐 있던 감정들이 천천히 풀어져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가 무작정 감싸주지 않았다고 해서 서운하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아이 취급하는 것 같아 오히려 실망했을지도 몰랐다.

이런 사소한 일이 아니라 자신이 큰 잘못을 하거나, 피치 못할 사건에 휘말린다면 서도운은 누구도 그를 상처 입히지 못하도록 보호해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서도운을 믿었다.

하나밖에 없는 가족인 어머니보다 더.

알게 된 지 채 1년이 지나지 않은 타인이지만, 누구보다도 믿고 있었다.

손끝이 저려와 꽃다발을 만지작거리자 조용한 차 안에 포장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한참 동안 말이 이어지지 않았지만 어색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때때로 얘깃거리가 없으면 두 사람 사이에는 긴 침묵이 이어졌다. 침묵을 끝내는 법은 간단했다. 그가 서도운에게 말을 걸면 언제든 이 침묵은 끝났다.

서도운은 말을 아주 재미있게 하는 편이라서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면 진료한 동물에 대한 것부터 학교 다닐 때 있었던 일이나 백경이 친 사고까지 끝없이 말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원하지 않으면 서도운은 조용히 침묵했다. 공백 사이로 들리는 말은 필요한 말, 원하는 말뿐이었다. 서도운은 그 외의 시간은 모두 그에게 주었다. 그가 어떤 작은 소리를 내든 모두 들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서도운은 그의 침묵에도 귀를 기울여주었다.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말을 하고 싶게 만들었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어.”

“좀 전에?”

“응……,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게 아닌데, 말을 하다 보면 항상 다른 말을 하고 있어. 결국 다들 화를 내. 영해한테도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닌데…….”

“괜찮아, 난 다 알아들었어.”

“그럼 됐어.”

“그래, 잘했어.”

“응.”

혼자여도 괜찮았던 시간은 어릴 때뿐이었다. 어른이 되고 나서는 원하든 원치 않든 누군가와 어울려야 했다. 익숙하지 않은 인간관계는 너무나 힘들었다.

그도 남들처럼 잘할 수 있다고 노력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말을 하면 할수록 모두 그를 비난했다. 그가 그런 말을 할 줄 몰랐다고 원망했다. 몇 번이나 단절을 겪고 나서야 누군가와 어울리기 위해서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 아닌, 타인이 듣고 싶은 말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업무적인 말은 숙달되니 어느 정도 할 수 있었지만, 사적인 대화는 점점 더 힘들어졌다. 언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말을 할 때마다 망설였고, 망설임은 또 다른 오해를 만들었다.

오늘도 어리석은 짓을 반복했을 뿐이었다. 바보 같은 말을 하고, 원망을 듣고, 얻어맞기까지 했다. 나아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아주 심각하게 나쁜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괜찮은 것 같기도 했다.

바뀐 건 없었지만 서도운처럼 하나하나 물어보고 천천히 기다려 주는 사람이 있다면, 온전하게 자신의 말을 전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다음에는 더 잘할게.”

자신이 모자란 건 알았다. 아직은 서도운의 곁에 똑바로 설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도 계속 노력하면 언젠가는 서도운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고 싶었다.

“형, 사랑해. 정말…… 사랑해.”

이제 이 말은 울지 않고, 더듬거리지 않고 말할 수 있었다.

“선우야…….”

“응?”

“바로 넣을 수 있게 미리 빼놔.”

“뭘?”

“정액.”

너무나 뜬금없는 말에 정선우는 자신이 잘못 들은 거라고 생각했다.

“방금 뭐라고 했어?”

“자위하라고 했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한 정선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여, 여기서? 여기서 자위를 하라고?”

“집에 도착하면 바로 넣을 수 있게 두어 번 빼놔.”

서도운의 제안은 싫다고 하기에는 너무 유혹적이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섹스를 한다니, 한순간 훅 몸이 달았다. 슬며시 주위를 둘러보자 어딜 봐도 다 차였다. 서울 도심 한복판, 길 위에서 자위를 한다고 생각하자 잠시 붉어졌던 얼굴이 다시 하얗게 변했다.

“형, 여기서 어떻게 해? 옆에 차 있어!”

정지 신호에 줄줄이 차가 멈추자 서도운은 고개를 돌려 정선우를 보며 생긋 웃었다.

“선팅 진해서 안 보여. 신경 쓰이면 창문은 꽃다발로 가려.”

“……진짜, 자…위해?”

서도운이 핸들을 잡은 손을 내려 자신의 바지 앞섶을 쓰다듬었다.

“선우야, 형이 지금 꼴려서 운전도 겨우 하는 거야.”

조용한 차 안에 정선우가 마른 침을 삼키는 소리가 커다랗게 울렸다.

* * *

술집 옥상에서 정선우는 서도운뿐이라고, 서도운밖에 없다고 계속 말했다. 자신의 주인은 서도운이라고 큰 소리로 짖었다.

전 애인에게 그를 사랑하고 있다고 자랑하는 정선우의 모습에 웃음을 참느라 힘들었다. 그에게는 아주 사랑스러운 고백이었지만 최영해에게는 사과가 아니었다.

몇 번이고 달려나가 키스로 입을 막고 싶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혀를 넣고 입안을 더듬어 정선우가 얼마나 귀엽게 신음하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쾌감에 덜덜 떨며 그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걸 들려주고 싶었다.

서도운은 손을 내려 자신의 바지 위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달아오른 성기를 쓰다듬자 가벼운 신음이 새어 나왔다. 신호가 바뀌고 늘어선 차들이 출발하기 전 고개를 돌려 정선우를 쳐다봤다. 창백하던 얼굴이 어느새 붉게 변해 가쁜 호흡을 흘리고 있었다.

“꺼내.”

그의 말에 정선우가 홀린 듯 손을 움직여 바지 지퍼를 열었다.

서도운은 앞차의 꽁무니를 쫓아 차를 움직였다. 시야 끝에 정선우가 속옷을 내려서 성기를 꺼내는 게 보였다. 짙은 꽃향기 사이로 흐트러진 숨소리가 퍼지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형”이라고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이어졌다.

“못 하겠어……. 형, 안 돼.”

정선우의 애원에 목이 탔다.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자신의 귀에 커다랗게 울렸다.

신호대기에 걸린 차들이 줄줄이 붉은 등을 밝히며 멈추자 그도 서서히 브레이크를 밟으며 멈췄다. 핸들에서 손을 떼고 정선우를 낚아채듯 끌어당겼다. 놀란 정선우가 꽃다발을 끌어안으며 포장지가 구겨지는 소리가 커다랗게 울렸다.

입술이 닿자 서도운은 정선우의 입안으로 거침없이 혀를 넣어 달아나는 혀를 붙잡아 비볐다. 정선우의 코끝에서 가느다란 신음 소리가 울리는 걸 들으며 곁눈질로 늘어선 차들을 살폈다. 붉은 등이 꺼지자 그는 정선우의 옷자락을 놓고 다시 핸들을 잡았다. 정선우의 밭은 숨소리만 들어도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상상할 수 있었다.

연말 귀가 시간의 도로는 정체되지 않는 구간이 없었다. 차는 계속 서다 가다를 반복했다. 차가 멈춰 설 때마다 길고 짧은 키스가 반복되자, 정선우는 안고 있던 꽃다발을 창가에 기대놓고 붉은 등의 행렬이 이어지면 기다렸다는 듯 그의 목을 끌어안고 키스에 응했다.

“흐으응…, 응…….”

여린 신음에 천천히 차를 멈추며 옆을 돌아보자 정선우는 보조석에 몸을 늘어뜨리고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커다란 꽃다발 아래 드러난 성기는 정선우의 두 손 안에서 커다랗게 발기해 있었다. 흘러내린 쿠퍼액에 젖은 귀두가 차창 밖에서 들어온 불빛에 번들거렸다.

“하아, 형…….”

꽃다발에서 흘러나온 농염한 향이 정선우의 신음과 섞여 그의 몸에 파고들었다. 가슴 깊이 스며드는 향기에 숨을 쉬는 것도 쾌감으로 느껴졌다. 손끝까지 저릿한 쾌감에 핸들을 붙잡고 있을 수가 없었다.

“형……, 형…….”

곁에서 들리는 애타는 신음에 귀가 먹먹해졌다.

정말로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당황한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러나 정선우는 그의 말에 충직하게 복종했다. 피막처럼 정선우를 감싼 수치심은 약간의 부추김만으로 찢어져 그를 향한 욕망을 드러냈다. 그를 향한 정선우의 욕망은 그를 향한 사랑처럼 망설임이 없었다. 정선우는 순수하게 그를 원하고 사랑하고 있었다.

서도운은 당장이라도 정선우의 위에 올라타 혀를 목구멍까지 쑤셔 넣고 서로의 성기를 비비며 사정하고 싶은 충동으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흐물흐물하게 변한 이성은 그를 제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으응……, 하아, 하아…….”

점점 가빠지는 정선우의 숨소리에 미칠 것 같았다.

고개를 돌려 눈에 익은 주위 풍경을 다시 살폈다. 이제 겨우 절반쯤 온 것 같았다. 얼마나 더 길에서 시간을 보내야 집에 도착할지 알 수 없었다.

자신보다 더 급하고 미칠 것 같은 누군가가 이 상황을 견딜 수 없었는지 경적을 울렸다. 멀리서 들리던 경적소리는 도미노처럼 이어져 커다란 소음을 만들어냈다.

바로 고개를 돌려 정선우의 상태를 확인했다.

놀란 정선우가 한순간 꿈에서 깨어난 듯 성기를 만지던 손길도 신음도 멈추고 굳어졌다. 붉어진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천천히 그를 돌아봤다.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속삭였다.

“괜찮아, 계속해.”

그러나 소심한 그의 연인은 커다랗게 부푼 성기를 두 손으로 가리고 숨겼다. 꾹 입을 다문 얼굴은 다른 의미로 새빨갛게 변했다.

서도운은 아주 조용하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어느 놈인지는 모르지만, 그놈 덕분에 집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안전운전을 권하는 그 좆같은 새끼에게 서울 도심에서는 경적을 울리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고 알려주고 벌금을 물리고 싶었다.

차들이 주르륵 멈춰 서자 그는 다시 정선우를 바라봤다. 윗옷을 끌어당겨 아직도 커다란 성기를 가린 정선우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입을 삐죽였다.

“……잘못했어.”

“뭘 잘못했다는 거야?”

“나, 엄청… 변태 같아서…….”

“내가 자위하라고 했는데, 그럼 난 어떡해?”

“그래도…….”

“정말 잘못한 것만 잘못했다고 해.”

“응.”

“앞으로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러면 혼낼 거야.”

정선우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기에 그는 앞차를 따라 천천히 브레이크를 밟으며 고개를 돌렸다. 입술을 오물거리며 눈치를 보고 있는 정선우의 얼굴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퇴근길에 차 안에서 자위시킬까?”

“응?”

“혼낼 때 말이야.”

“어우, 싫어!”

질색하는 정선우의 목소리에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 정도로 싫어하면 효과가 있겠네.”

“형, 그게 어떻게 벌이야? 그런 이상한 벌이 어디 있어? 차라리 생굴이나 닭발을 먹여.”

“너 그거 먹으면 토하고 두드러기 나잖아.”

“그러니까 먹여.”

“선우야, 난 널 절대 아프게 안 해. 그건 꼭 기억해.”

정선우는 서도운의 옆모습을 흘깃 쳐다보고는 고개를 내렸다.

오늘 그의 심장은 정말 쉴 새가 없는 것 같았다. 이렇게 많은 감정을 한꺼번에 느껴본 적이 없었다.

정선우는 자신이 이렇게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서도운을 만나기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신기하고 놀라웠지만 불안하거나 두렵지는 않았다. 혼자였다면 흘러나온 피를 계속 삼키다 역겨움에 화장실에 숨어 토했을지도 몰랐다.

그를 아프게 할 수 없다는 서도운의 말에 술에 취해 별 해괴한 짓을 저지른 날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죽고 싶을 정도로 수치스러워 아예 기억이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날 일이 모두 떠오르자 아무것도 잊고 싶지 않았다.

서도운은 술에 취해 떼를 쓰는 그를 보며 난감해하기도 하고 당황해 한숨을 내쉬기도 했지만, 줄곧 웃고 있었다. 물어달라고 고집을 부리는 그에게 아프게 할 수 없다고 반복해서 말했다.

그 말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저릿하게 울렸다. 그 울림은 그가 가지고 싶었던 흉터보다 더 커서 죽을 때까지 이어질 것 같았다.

아프게 하지 않겠다는 말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러나 그 당연한 말이 서도운의 입에서 나왔을 때는 마치 깊은 사랑 고백처럼 들렸다.

너무나 소중해서 절대 아프게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갑자기 가슴속에 공기를 가득 채워 넣은 듯 웃음이 새어 나왔다. 참으려 했지만 볼이며 입가가 실룩거려 창가에 세워둔 꽃다발 속에 고개를 처박았다. 그는 부드러운 꽃잎에 얼굴을 비비며 혼자서 킥킥거렸다.

미친 사람은 자신의 세계에 틀어박혀 혼자서도 즐겁고 행복하다더니 지금 자신의 모습이 그와 다름없었다. 미친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걱정되거나 무섭지 않았다. 뭐가 어찌 되든 서도운은 자신의 곁에 있어 줄 테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차선을 바꾼 서도운이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며 그를 불렀다. 꽃다발에서 얼굴을 떼고 쳐다보자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슬금슬금 다가가 몸을 기울이자 서도운이 그의 턱을 잡고 가볍게 입을 맞췄다.

마치 “괜찮아?”라고 묻는 것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대답을 말로 해야 할까, 입맞춤으로 해야 할까 잠시 고민했다. 뭐든 신호 대기가 끝나기 전에 하려고 고개를 숙이는데 서도운이 속삭였다.

“형이 좆 보여줄까?”

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너만 변태로 만들 수 없잖아. 형도 보여줄게.”

“……뭐, 뭘?”

“자위.”

정선우는 서도운의 말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난감했다. 금붕어처럼 뻐끔대는 입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당황해 무어라 대꾸하지 못하고 쳐다보자 서도운은 슬며시 웃었다. 그 웃음은 평소와 다르게 장난기가 잔뜩 어려 반짝반짝 빛났다. 어쩐지 놀림 받은 것 같은 기분이라 그는 입을 삐죽이며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도로 위에서 멈춘 듯 보여도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차는 어떻게든 집으로 가고 있었다. 다시 차가 멈춰 서자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쉬었다. 조용히 진동하는 엔진음 사이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서도운이 바지 지퍼를 열고 자신의 성기를 꺼내고 있었다.

“혀, 형!”

정선우는 자위를 하라고 했을 때보다 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도운의 성기를 쳐다봤다. 서도운은 당혹한 그의 외침에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내려 자신의 성기를 쥐고 슬슬 문질렀다.

“형, 형, 운전!”

운전을 하면서도 서도운이 계속 성기를 만지작거리자 정선우의 얼굴은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려갔다.

“형, 그러다 사고 나!”

“형이 운전 잘하는 거 알잖아.”

창백한 얼굴로 울먹이는 그와 달리 서도운은 여유로웠다. 슬쩍 눈이 마주치자 빙그레 웃어주기까지 했다. 심장이 떨려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시선을 차창밖에 고정한 채 제발 빨리 집에 도착하기만을 빌었다.

“하아, 뻑뻑하네.”

뭐가 뻑뻑하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서도운이 자위를 멈추지 않은 것만은 분명했다.

“형은 너처럼 줄줄 안 나와서…….”

자신의 쿠퍼액이나 정액 양이 많다는 건 알고 있었다.

키스만으로도 속옷이 축축하게 젖고 가끔은 바지까지 적셨다. 서도운은 가끔 그렇게 젖은 속옷 위에서 성기를 주물러대곤 했다. 그러면 축축하게 젖은 속옷이 성기에 들러붙는 감촉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숨을 헐떡이며 제발 벗겨달라고 조르면, 서도운은 그제야 속옷을 벗기고 성기를 꺼내줬다.

그러나 때때로 그의 애원을 무시하고 속옷을 입은 채 사정을 시키기도 했다. 그럼 정말 속옷을 입은 채 오줌을 싼 것 같아 눈물이 났다. 수치심에 온몸을 붉히며 원망스러운 눈길로 노려보는 건 아주 잠시였다. 서도운은 눈물을 닦아주고는 환하게 웃으며 그의 성기를 빨았다. 사정 후 말랑해진 성기는 다시 서도운의 입안에서 단단해져 정선우는 싸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원하는 건 다 들어준다고 해놓고서는 아무리 조르고 애원해도 들어주지 않을 때가 있었다. 대체로 섹스를 할 때 그랬고, 섹스가 끝나고 나면 머리가 하얗게 비어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어 뭐라고 따지지 못했다.

새삼 잊었던 원망이 떠올라 정선우는 고개를 돌려 서도운을 쳐다봤다.

서도운이 발기한 자신의 성기를 쥐고 느릿하게 비비고 있었다.

“하아…….”

쾌감으로 무거워진 한숨이 서도운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정선우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을 알았는지 서도운은 살짝 고개를 돌려 웃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운전을 하며 자위를 하는 서도운의 모습에 순간 화가 치밀었다.

“이, 이런 거, 전에도 했어?”

“자위하는 거?”

“다른, 사람……, 앞에서도 했어?”

차 안에 서도운의 웃음소리가 커다랗게 울렸다. 한참을 웃은 서도운은 서서히 차를 멈추며 돌아봤다.

“이런 미친 짓을 누구한테 보여줘? 너니까 이러는 거지.”

터질 것 같은 화가 가라앉으며 얼굴이 뜨거워졌다. 무엇에 대한 부끄러움인지는 모르지만, 온통 부끄러운 것뿐이라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화끈거리는 얼굴의 열기가 손바닥에 그대로 느껴졌다.

“선우야, 형이 너 보라고 하는 건데 왜 안 봐?”

나직한 서도운의 목소리가 유혹하듯 그를 끌어당겼다.

자신만 볼 수 있는 모습이라고 생각하자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얼굴을 가린 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손가락 사이로 눈만 내밀어 서도운을 봤다.

정선우가 고개를 들고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확인하자 서도운은 운전을 하며 자위를 이어나갔다.

꽃향기 사이로 묵직한 한숨과 낮은 신음이 퍼질 때마다 정선우는 숨을 멈췄다. 숨을 쉬면 서도운이 내뱉은 쾌감을 들이마시고 취할 것 같았다.

옷자락으로 가렸던 성기가 삐죽하니 고개를 내밀었다. 멈췄던 쿠퍼액이 다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손을 내려 질금질금 새어 나오는 구멍을 막자 머리끝까지 쾌감이 퍼졌다. 갑자기 가빠지는 호흡에 입을 틀어막았다.

순간, 입을 막고 혼났던 일이 떠올라 정선우는 천천히 서도운을 쳐다봤다. 곁눈질로 그를 보고 있는 서도운의 시선에 슬며시 손을 내렸다.

“……잘했어.”

갈 곳 없는 손은 자신도 모르게 성기로 향했다.

성기를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가고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렇게 서도운을 바라보며 그는 다시 자위를 시작했다.

이곳이 차 안이고, 사방이 차로 둘러싸여 도로 위를 달리고 있다는 생각은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는 이미 서도운에게 취해 있었다.

동물병원 간판이 보일 때쯤 서도운은 남은 이성을 짜내 겨우 운전을 하고 있었다. 흥분한 정선우의 신음이 계속 이어지자 자신의 성기를 만질 여유도 없었다. 그저 참는 데 급급했다.

“아, 형……, 도와줘…….”

흥분해서 자신의 성기를 만지긴 해도 혼자서는 절정에 이른 적이 없는 정선우는 어느 순간부터 울먹이며 그를 불렀다.

“형, 제발……, 싸고 싶어…….”

서도운은 앞으로 운전 중에는 키스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사고 없이 이곳까지 온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빌라의 텅 빈 주차장에 도착해 시동도 끄지 않고 조수석 좌석의 버튼부터 눌렀다. 좌석이 완전히 뒤로 젖혀지자 몸을 말고 신음하는 정선우의 위에 올라탔다. 안경은 어디로 갔는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정선우가 다급하게 그를 끌어당겨 입술을 찾았다.

“형, 키스, 키스해줘…….”

끝을 모르고 쌓아 올린 정선우의 쾌감은 입술이 닿고 서로의 혀를 비비는 것만으로 무너져 내렸다. 손을 내려 성기를 쥐고 흔들자 지나친 쾌감에 경련하듯 몸을 들썩이며 줄줄 싸댔다. 사정하는 내내 정선우는 신음도 지르지 못하고 그저 가쁜 숨만 들이켰다.

서도운은 쾌감의 잔재로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정선우의 볼을 쓰다듬었다. 입가에 흘러내린 타액을 닦자 정선우는 본능처럼 입을 벌려 손가락을 물었다.

정신없이 손가락을 빨아대던 정선우는 그가 손가락을 빼자 길게 숨을 뱉어내며 몸을 늘어뜨렸다.

“형…….”

겨우 흥분을 가라앉힌 정선우가 자신의 위에 올라탄 남자를 향해 팔을 뻗었다. 그는 기꺼이 연인의 품에 안겨주었다. 목덜미를 감싸고 등을 쓸어내리는 정선우의 몸짓은 간지러울 만큼 여렸다. 그저 제 품에 있다는 것을 느끼고 그것만으로 만족하는 듯했다.

“키스해줄까?”

그의 물음에 가지런한 속눈썹이 느릿하게 깜박이며 웃음을 흘렸다.

입술이 닿자 정선우의 팔이 단단하게 그를 감쌌다. 가벼운 키스가 짙어질수록 그를 죄어오는 정선우의 팔에 서도운은 웃었다.

“집에 가자.”

“응.”

그들은 정액으로 더럽혀진 옷을 대충 정리하고 차에서 내렸다. 빌라로 걸어가는 동안 불어온 겨울바람에 외투가 펄럭였다. 손을 내밀자 정선우가 그의 손을 잡아 왔다. 멈춰선 두 사람 사이로 시린 바람이 빠져나가자 그들은 다시 빌라를 향해 걸어갔다.

입구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누르는 동안 정선우는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얽어 꼭 쥐어왔다. 단단하게 맞물린 손은 절대로 풀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어두운 복도는 그들이 앞으로 걸어 나갈 때마다 붉을 밝혔다.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그들이 걸어온 곳이 다시 어둠에 잠겨 드는 것이 보였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동안 정선우는 그의 손을 잡고 수없이 했던 말을 다시 반복했다.

“형, 사랑해.”

서도운은 정선우에게 고백을 되돌려주는 대신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그의 어머니를 끝끝내 비참한 게 만든 것도 사랑한다는 말이었다. 아버지였던 남자는 마지막 순간 어머니에게 사랑한다고 매달렸다. 과거에 사귀었던 남자들은 대가처럼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그들처럼 될 것 같아 두려웠다. 그렇게 되느니 평생 말하지 않는 게 나았다.

그는 맞닿은 입술 위로 정선우에게 속삭였다.

“형이 아프지 않게 해줄게.”

“응.”

고개를 끄덕이는 정선우의 입술 위에 다시 속삭였다.

“누구도 널 못 건드리게 할 거야. 형이 지켜줄게.”

“응.”

“내 옆에 있어. 죽을 때까지 떠나지 마.”

정선우는 대답 대신 가늘게 떨리는 입술로 입을 맞췄다. 그가 손을 들어 볼을 쓰다듬자 얼굴을 비비며 조그맣게 “응”하고 대답했다.

* * *

최악의 연말을 보낸 최영해는 2주나 지난 후에 겨우 서도운에게 메일을 보냈다. 처음에는 크게 한탕 뜯어내겠다는 마음이었지만 서도운을 생각하면 이상하게 무서워져 점점 금액이 줄어들었다. 결국 메일에 쓴 금액은 정선우와 사귈 때 썼던 돈과 약간의 위자료를 더한 액수였다.

서도운은 최영해에게서 온 메일을 확인하고 웃었다. 그는 최영해에게 ‘속물’이라고 말했지만, 자신의 아버지였던 남자에 비하면 겁 많은 소시민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정선우가 얼마나 술에 약한지 알기에, 차마 다가가지 못하고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던 최영해에게 감사했다. 억지로 술이라도 마시게 했다면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을 터였다.

정신을 잃고 강간 같은 폭력적인 일을 당했다면 정선우는 그대로 부서져, 자신이 한국으로 왔을 땐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그는 최영해에게 자신의 슈퍼카를 잘 보관해준 감사의 표시를 하기로 했다.

1월이 가기 전, 최영해는 서도운이 보낸 설 선물을 받았다.

나이가 지긋한 변호사는 최영해의 앞에 여러 장의 서류를 내밀고는 조목조목 설명했다. 그 내용은 서도운이 그에게 경기도에 있는 아파트를 조건 없이 양도한다는 것이었다. 세금 등 제반 비용도 서도운이 모두 처리했으니 양도 서류에 도장만 찍으라고 했다.

최영해는 떨리는 목소리로 어디에 있는 어느 아파트냐고 물었다. 변호사는 휴대폰을 꺼내 서류에 나와 있는 주소를 검색해서 보여줬다.

화면에 얼핏 보인 아파트의 시세는 최소 3억 이상이었다. 변호사는 요즘 매물이 많아 가격이 떨어져서 그렇지 유명 건설사의 대단지 브랜드 아파트라 원래는 4, 5억대라고 말했다.

최영해는 군말 없이 도장을 찍었다.

그 후 최영해를 ‘얼굴 빻은 찌질이 병신 새끼’라고 놀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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