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 해피 엔딩과 네버 엔딩 (34/35)

34. 해피 엔딩과 네버 엔딩

백경 프로덕션은 M그룹과 관련한 프로젝트를 끝내고 전 직원에게 일주일간 휴가를 주었다. 보너스까지 달린 유급휴가라 모두 기뻐했다.

작년 백경 프로덕션의 유명세는 남달랐다. A그룹의 그룹 홍보실을 공중분해시키고 M그룹 본사 홍보실장의 목을 날린 일에 백경이 관련되어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업계 전반이 쑥덕거렸다. 파트너인 연 디자인에서 P그룹을 대차게 물 먹인 적이 있기에 그들의 악명은 더불어 높아졌다.

소문을 들은 백경은 낄낄거리며 모두의 기대감을 채워주겠다고 미쳐 날뛰었다.

미친 백경은 감동스러운 작품을 만들어냈다. 영상을 본 기획팀장과 연 디자인 측은 세계 3대 광고제 중 하나이자 광고계의 오스카라 불리는 ‘클리오 광고제’의 수상을 자신했다. 그러한 결과의 이면에는 정선우와 박수경을 제외한 전 직원의 백경에 대한 증오가 있었다.

그 증오를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휴가가 꼭 필요했다.

휴가 이튿날, 서도운은 저녁 식사 후 딸기와 오렌지를 수북하게 깎아 식탁에 내려놨다. 서도운은 정선우의 입에 과일을 넣어주며 망설였던 말을 꺼냈다.

“선우야, 비뇨기과 가서 검사받아봐.”

“뭘?”

“성기능”

정선우는 눈을 내리뜨고 서도운의 시선을 피했다.

“……이제 괜찮아.”

“정상이니까 받아보라는 거야.”

“그럼 안 할래.”

“이상이 없다는 걸 자기 눈으로 확인하는 과정도 필요해.”

서도운의 의도는 이해했지만 선뜻 그러겠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정선우는 서도운과 함께하는 자신의 성생활에 충분히 만족했다. 검사 결과가 좋지 않으면 지금 느끼는 만족감을 잃어버릴 것 같았다. 그럴 거라면 하고 싶지 않았다.

“형이 잘 아는 비뇨기과가 있는데 가볼래?”

그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젓자 서도운은 오렌지 조각을 포크에 찍어 입 앞에 내밀었다. 습관적으로 입이 벌어졌다.

“난 네가 이상이 없을 거라고 확신하지만,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오렌지를 꾹꾹 씹자 상쾌한 향이 입안을 채웠다.

“형이 너무 궁금한 게 있어서 그랬어.”

눈을 들어 슬쩍 살펴본 서도운의 얼굴은 음모를 꾸미고 있는 악당 같았다.

“네가 한 번 사정할 때 정자 수.”

“그게 왜…… 궁금해?”

“그렇게 먹는데도 살이 안 쪄서 어디 아픈 게 아닐까 걱정했거든.”

“건강검진 결과는 좋았잖아.”

스르륵 말려 올라간 입꼬리가 꼭 그를 놀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형이 안심했어. 근데 먹는 게 다 어디로 갈까 계속 생각해 보니까…, 넌 먹는 걸 다 정액으로 소비하는 것 같아.”

서도운은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 듯했지만 자신을 놀리고 있는 게 맞았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얼굴이 달아오를 리가 없었다.

“그럼, 먹지…… 말까?”

“형이 네가 줄줄 싸는 걸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잖아.”

서도운은 빙글빙글 웃으며 새빨갛게 잘 익은 딸기를 포크에 찍어 그의 앞에 내밀었다.

“딸기가 꼭 네 귀두같이 생겼어.”

얼굴이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그가 입을 열지 않고 꾹 다물고 있자 서도운은 딸기를 자신의 입에 넣었다. 그리고는 딸기를 씹지 않고 사탕처럼 입안에서 굴려댔다. 볼이 볼록하게 튀어나오자 더 이상 볼 수가 없어 고개를 돌렸다.

“형 귀두 같이 생긴 걸로 줄까?”

“……그만해.”

“병원에 가면 정액에서 당도 측정도 되는지 물어봐.”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놀라 서도운을 쳐다봤다. 여전히 웃고 있는 얼굴에 아직도 놀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의사한테 애인이 정액이 달달하다고 그런다고, 진짜 달달한지 검사해 달라고 해.”

그는 손을 들어 뜨거워서 녹아내릴 것 같은 얼굴을 가렸다.

“다음에 섹스할 때 네가 얼마나 많이 싸는지 재볼까? 싸는 거 다 모으면 한 컵은 넘을 것 같은데…….”

“모아서 뭘, 어쩌려고…….”

“한 컵 가득한 걸 보면 내가 우리 선우를 이렇게 잘 먹였구나 하고 뿌듯해질 것 같아.”

“무슨, 아니, 왜…….”

부끄러움에 혀가 꼬인 듯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선우야, 많이 먹어. 그래야 많이 싸지.”

정선우는 얼굴을 가리는 게 아니라 귀를 막았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계속 이어지는 서도운의 음란한 놀림에 결국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보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정선우는 병원 예약시간에 맞춰 옷을 챙겨 입고 나왔다.

서도운이 소개해준다는 비뇨기과 의사를 거절하고 이전에 그가 방문한 적이 있는 병원을 택했다. 그에게는 그 병원에 꼭 다시 가봐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때가 지금이라고 생각하자 마음에 편해졌다.

* * *

C그룹 본사에 근무할 당시 정선우가 약물을 복용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그는 자신이 먹던 약이 수면제라고만 알고 있었다. 그 약이 우울증이나 불안장애 환자들에게도 처방되는 향정신성의약품이라는 사실은 그때 처음 알았다.

감사팀에서 내놓은 문책 사유가 그것이라 C영상 쪽으로 자리를 옮기며 수면제를 끊었다.

수면제를 끊자 지독한 불면증에 죽고 싶은 날이 이어졌다.

퇴근할 때면 오늘은 잠들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었다가 아침이 되면 또다시 하루가 시작되는 것을 원망했다.

그날도 꾸역꾸역 출근을 해 비상구 계단에 숨어 졸고 있었다. 휴게실이나 의무실처럼 쉴 수 있는 공간이 있었지만, 사람들이 오가면 잠깐씩 조는 것도 불가능해 아무도 없는 곳을 찾아 선잠이 들었다.

잠결에 들린 사람들의 말소리에 그의 이름이 섞여 있어 눈이 뜨였다.

사람들은 그가 듣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에 대해 이야기했다.

증권가 찌라시에 C그룹 계열사들의 재무 상태에 대한 문서가 돌았다. 공시라면 전혀 상관할 바가 아니지만, 지배구조개선을 위한 계열사 간 주가 조정에 대한 항목이 있었다. 이는 후계자 승계와 관련된 문제라 모두 쉬쉬하는 내용이었다. 감사팀은 그 문서에 접촉할 수 있는 직원을 모두 조사했다.

우습게도 범인으로 지목된 건 그였다.

정선우는 범인이 아니기에 당당하게 조사를 받았다. 감사팀은 그가 수면제를 먹고 있는 것을 거론하며, 약물중독으로 인해 불안정한 정신 상태로 저지른 우발적인 실수라고 결론을 내렸다.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고 항의했지만 아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감사팀은 계열사 중 한 곳으로 발령해주겠으니 입을 다물라고 했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법적으로 문제 삼는다면 내규에 따라 처리하겠다고 했다.

진짜 범인이 아니라 범인으로 만들 누군가가 필요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그가 정말 내부문건을 유출했다면 해직통보를 받았을 터였다. 감사팀의 제안은 그가 결백하다는 반증이었다.

그러나 정선우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입을 다무는 걸 택했다.

그에게는 직장이 필요했고,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감사팀에 있는 누가 그러는데”로 시작된 이야기에는 그가 그러한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사실만 빼고 모든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가 영상 쪽으로 자리를 옮긴 건 문책성 발령이긴 했지만, 감사팀과 거래한 결과였다. 입을 다문다는 건 감사팀도 그 일을 묻어 버리겠다는 의미였다. 그걸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내일쯤 투자분석팀의 모두가 이 일에 대해 알고 있을 것 같았다.

본사 재무팀에서 당한 일이 다시 반복되리란 걸 알았다.

정선우는 죽는 대신 다시 수면제를 먹기로 했다.

근처 내과를 찾아가 수면제를 처방해 달라고 말했다. 의사는 수면제를 먹어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고 그는 지금까지 먹었던 수면제의 종류와 그 부작용에 대해 모두 말했다.

의사는 그가 지금까지 먹지 않은 수면제를 추천했다. 나긋한 말투로 설명을 이어나가던 의사는 잠시 머뭇거리다 성기능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며 말을 흐렸다.

어차피 쓰지도 않고 제구실을 하지 못하는 곳이었다. 더 큰 문제가 생길 리도 없었다.

그가 상관없다고 대답하자 의사는 온화한 얼굴로 불면증으로 발기가 안 되는 경우도 많다며, 수면장애는 병이고 치료하면 나아질 거라고 위로했다.

그 말은 그날 들은 말 중 가장 상냥하고 친절한 말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스무 살 때부터 그랬으니 괜찮다고 대꾸했다.

의사는 멍하니 그를 보다가 같은 건물 6층에 비뇨기과가 있는데 기능적인 문제 외에 정신적인 상담도 해준다며 무조건 가라고 했다. 비뇨기과에 다녀와야만 수면제를 처방해 주겠다며 일단 가라고 했다.

내과를 나와 엘리베이터를 탔다. 벽에 붙은 숫자를 보며 정선우는 잠시 망설였다.

치료를 원했다면 예전에 병원에 갔을 것이다. 발기가 안 된다고 해서 그의 삶은 더 나빠질 것도 없었고 발기가 된다고 좋아질 것도 없었다. 그에게 섹스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잠은 자지 않으면 죽고 싶어졌다.

수면제가 필요했다.

정선우는 수면제를 처방받기 위해 6층 버튼을 눌렀다.

6층의 비뇨기과는 3층의 내과와 닮은 듯 달랐다. 병원이라는 건 알 수 있었지만, 내과의 밝은 파스텔 톤 인테리어와 달리 부드러운 회색 톤으로 인테리어가 되어있었다.

접수하는 곳으로 가자 직원이 종이 한 장을 건네며 그가 채워 넣어야 하는 곳을 느릿한 말투로 알려주었다. 서류를 작성하고 기다리는 동안 앉아 있는 1인용 소파가 무척이나 편하다고 생각했다.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었는지 접수실 직원이 그를 깨우며 진료받을 순서가 되었다고 알려줬다.

정선우는 대기실에 있던 1인용 소파와 같은 소파에 앉아 진료실을 둘러봤다. 그가 알고 있는 병원은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가 커다란 책상 뒤에서 진료 기록지를 작성하고, 의사의 등 뒤로는 상패와 난 화분과 줄줄이 늘어선 그런 곳이었었다.

그러나 반백의 머리를 한 의사는 하얀 가운을 입고 있지 않았고 커다란 책상도 없었다. 아이보리색의 벽에는 액자 하나 걸려 있지 않았다. 퍽 신기한 곳이었다.

의사가 부드럽게 웃으며 불편한 곳이 있냐고 물었지만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내과에서 일어난 일은 순전히 실수였고, 성적으로 문제가 있어도 자신은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대답이 없는 그에게 의사는 질문을 더 하거나 나가라고 하지 않았다.

멀찍이 떨어져 앉은 의사는 묘하게 기척이 없어서 침묵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다시 졸음이 몰려왔다. 그는 늘어지는 몸을 일으키며 이 상황을 가장 빨리 끝낼 방법을 생각했다.

“발기가 안 됩니다.”

짧게 사실을 고하자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고 있던 노트에 뭔가를 적었다.

“그렇다는 걸 언제부터 알았습니까?”

“스무 살이요.”

놀라던 내과 의사와는 달리 비뇨기과 의사는 고개만 끄덕였다.

“섹스에 대한 경험은 있습니까?”

“……한 번이요.”

“그때도 발기가 안 되었나요?”

“기억이… 잘…….”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는 기억납니까?”

“네.”

“아는 사람이었나요?”

“네.”

“어떤 관계였습니까?”

“……사귀는… 사람이요.”

“어떤 사람이었는지 설명할 수 있습니까?”

“저보다 네 살 많은 여자 선배였어요. 굉장히 좋은 사람이었는데…….”

담임은 SKY로 가라며 권했지만, 그에게는 타이틀보다 4년 내내 학비를 면제받는 것이 더 중요했다. 전액 장학금을 제시한 대학 중 가장 좋은 타이틀을 가진 곳으로 선택했다.

빨리 졸업을 하고 돈을 벌겠다는 생각밖에 없어서 전공도 가장 취업이 잘 된다는 걸로 골랐다.

좋은 곳에 취업을 하기 위해서는 높은 학점, 토익, 토플, 자격증……, 많은 것이 필요했다. 더 열심히 공부해야 했다.

언제나처럼 구석 자리에서 교재를 들여다보고 필기만 했다. 그렇게 하면 중, 고등학교 때처럼 없는 사람 취급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대학은 그의 생각과 달랐다.

과대표라는 선배가 그를 불러내 왜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느냐고 물었다. 거기다 밀린 회비를 내라고 혼냈다. 가지도 않은 행사에 왜 돈을 내야 하냐고 물었더니 단체 생활은 그런 거라며, 돈이 아까우면 와서 술도 마시고 친구도 사귀라고 했다. 그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어 솔직하게 말했다. 돈도 아깝고 시간도 없다고.

과대 선배는 좋은 곳에 취직하고 싶으면 선배들 말을 잘 들어야 한다며, 모든 것은 인맥과 연줄이라고 말했다. 그게 없으면 취업이나 성공하기도 힘들다고 말했다.

그에게는 취업이 정말 중요했기 때문에 과 행사에 나갔다. 늘 하던 대로 구석에 앉아 사람들이 웃고 떠들며 술을 마시는 걸 쳐다봤다. 그것뿐이었다. 중, 고등학교 때 작은 교실에서도 못했던 일을 대학에 왔다고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때 그 선배가 그에게 다가와 아픈 곳이 있냐고 물었다.

평범한 사람이었다. 동그란 얼굴에 동그란 안경을 쓴 선배는 그보다 네 살이나 많았고 올해 복학해서 한 학기만 더 다니면 졸업을 한다고 했다.

그는 취업에 대해 물었고 선배는 자신이 아는 걸 이야기해줬다. 그가 술을 마셔 본 적이 없다고 말하자 선배는 맥주를 들고 왔다. 그때 처음으로 술을 마셨다. 맛이 없다는 말에 선배는 커다란 새우깡을 안겨주었다. 그는 음료수와 새우깡을 먹으며 대기업이 요구하는 스펙이나 면접 요령을 들었다.

다음 날 선배는 그가 잠들었을 때 안경을 벗겼는데 너무 잘생겨서 놀랐다며, 왜 안경을 쓰냐고 물었다. 취업할 때 잘생기면 이득이라며 안경점에 끌고 가 렌즈를 사줬다.

선배는 모르는 게 없었다. 교수님들 수업 방식이나 학점을 잘 받는 요령, 학교 내 시설 사용법, 주변 맛집까지 그를 끌고 다니며 모두 알려줬다.

그에게 친절한 타인은 처음이라 보답하고 싶었다. 선배가 시키는 일이나 해달라는 일은 모두 해줬다. 선배가 그에게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 그도 좋아한다고 답했다. 선배는 행복하다고 말했고 그는 은혜를 갚은 것 같아서 뿌듯했다.

얼마 후 두 사람이 사귄다고 소문이 났다. 사람들이 진짜냐고 묻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는 무척 좋은 사람이라 사귀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사람들은 선배에게 잘생긴 영계를 물었다며 놀려댔다.

학기가 끝나고 선배는 함께 여행을 가자고 했다. 앞으로 취업 준비를 시작하면 놀러 다닐 시간이 없다며 마지막 여유라는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계곡 옆에 있는 펜션에는 그와 선배뿐이었지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선배는 자신의 인생 설계를 이야기했다. 진지하게 말하는 선배를 보며 굉장하다고 생각했다.

저녁을 먹으며 부전공을 선택하는 문제를 선배에게 상담했고 언제나처럼 선배는 상냥하게 조언해줬다. 함께 마신 술은 정말로 달콤해서 계속 마실 수 있었다.

그는 선배를 만나서 다행이라고, 고맙다고 말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그와 선배는 벌거벗고 침대에 누워있었다.

선배는 그에게 정말 사랑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계속 사귀다 때가 되면 결혼을 하고 예쁜 아이도 낳자고 속삭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 말은 분명히 들렸다.

아이.

그의 아이.

선배와 그의 자식.

끔찍했다.

아이는, 자식은 짐 덩어리였다.

그가 없었다면 어머니는 그렇게 고통스럽고 불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식이라는 이유로 사람 구실을 할 때까지 어머니의 삶을 희생시키고 있었다.

자식이란 그가 어머니의 삶을 그렇게 만든 것처럼 선배의 삶도, 그의 삶도 잡아먹고 불행하게 만들 족쇄였다.

그를 쳐다보는 선배의 얼굴 위로 한순간 시들어버린 아름다웠던 어머니가 보였다. 어머니처럼 선배도 죽지 못해 하루하루 살아갈 걸 생각하니 견딜 수 없었다. 

선배는 좋은 사람이었고, 그에게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의 인생을 그가 또 불행하게 만들었다. 이제 선배는 서늘한 눈으로 그를 보며 매일 울고 원망할 게 뻔했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챙겨 입고 그대로 뛰어나갔다. 그를 부르는 선배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계곡을 따라 만들어진 길은 가로등도 없었다. 깜깜한 어둠 속을 걸으며 집에 가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집에 가서 무얼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어떻게 집에 가야 할지도 몰랐다.

모든 게 다 엉망진창이었다.

정신이 반쯤 나간 채 집에 돌아와 습관처럼 가방을 챙겨 도서관에 갔다.

선배는 그에게 메시지 한 통을 보냈다.

[넌 쓰레기야]

선배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싶었지만 모든 연락처가 바뀌어 있었다.

선배가 떠나고 이전처럼 구석 자리에서 책만 들여다보는 인간이 되고 싶었지만, 다들 그의 주위에 모여들어 안경을 벗어보라거나, 그 선배와 어디까지 가봤냐, 누가 널 좋아한다더라, 어느 선배가 술을 산다는데 널 꼭 데리고 오라고 했다거나 제멋대로 떠들어댔다.

그는 계곡 옆 펜션에서 보낸 그 날 밤 이후, 자신의 삶에서 두 가지를 지웠다.

늘 섹스에 대해 떠들어대던 중, 고등학교 때 같은 반 아이들을 생각해 보면, 그는 자신의 성욕이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낮다는 자각은 있었다. 자위를 할 시간이나 장소가 없어서 그게 편했다.

그러나 이제 자신의 성기를 보는 것도 싫었다. 더러운 것을 만지듯 역겨움을 참고 하는 자위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생리적인 발기 외에는 그의 성기는 반응하지 않았다.

섹스를 못 한다고 죽는 건 아니었다. 어차피 그의 삶에서 꼭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그건 없어도 상관없었다.

술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다들 술을 마실 줄 알아야 사회생활이 편하다고 했다. 그래서 술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술을 한 방울도 입에 대고 싶지 않았다.

문뜩 떠오르는 불안감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그날 밤 사라진 기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건 그를 미치게 했다.

술을 마시면 어떤 끔찍한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기억을 잃어버린 채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 두려웠다.

술을 못 마신다고 죽는 건 아니었다. 술자리에서 욕을 듣는 게 술에 취하는 것보다 나았다.

그는 두려움보다 불편함을 택했다.

의사는 ‘좋은 사람’이라는 설명 이후 그의 말이 이어지지 않자 다시 노트에 무언가 적었다.

“어떤 타입의 여자를 좋아하십니까?”

그는 그 선배 이후 여자에 대해서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여자는 피해야 하고 여자와의 관계는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가 대답을 하지 못하자 의사는 그를 보고 부드럽게 웃었다.

“예쁜 여자? 아니면 몸매가 좋은 여자? 착한 여자는 어떤 가요?”

무어라 답을 할 수 없었다.

“그럼 질문을 바꿔보죠. 외모가 멋진 사람, 아름다운 몸매를 가진 사람, 성격이 좋은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을 좋아합니까?”

“성격이 좋은 사람이요.”

의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가 두려운가요? 여자와 관계를 가지는 것이 두려운가요?”

“……관계를 가지는 거요.”

“두려움은 무섭다는 쪽에 가까운가요? 혐오스러운 쪽에 가까운가요?”

“……무서워요.”

“섹스는 육체라는 도구를 통해 이뤄지는 행위입니다. 도구의 기능도 중요하지만 그 도구를 사용하는 사람의 심리가 더 중요합니다. 대부분의 남성은 심리적인 부분을 무시해 정상적인 성생활을 할 수 없으면 육체의 문제라고만 생각합니다. 저는 환자분의 육체적인 기능을 확인하기 이전에 심리적인 문제가 확인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의사는 더 말을 잇지 않고 빤히 그를 쳐다봤다. 그는 의사가 그에게 무얼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자신에 대해서 고민해 보세요. 뭐가 문제인지 알아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남자나 여자를 떠나 어떤 존재에게 성욕을 느끼는지, 어떤 사물이나 상황, 뭐든 좋습니다. 자신이 어떤 것을 좋아하고 이끌리는지 알아보세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으면 그렇다고 말하면 됩니다. 그럴 수도 있으니까요. 다양한 경험을 해보셨으면 합니다.”

그걸로 끝이었다.

의사는 약을 처방하지도 않았고 어떤 검사를 해보자고 하지도 않았다.

그는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내과에 가서 수면제를 처방받았다. 그날 밤은 오랜만에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에 잠에서 깨어났을 때 좀 더 살아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샤워를 하며 전날 비뇨기과 의사가 한 말을 떠올렸다.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섹스도 괜찮을 것 같았다. 옷을 갈아입으며 아이가 생기지 않는 관계를 생각했다. 거울 속에 넥타이를 매는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같은 남자라면, 아이가 생길 리 없었다.

머릿속에 동성애자라든지, 게이라는 말이 떠올랐지만 거부감이나 혐오감은 들지 않았다. 동성애자나 게이가 된다고 해도 뭔가 크게 바뀔 것 같지도 않았다. 어차피 그의 삶은 엉망진창이었다. 더 나빠질 것도 없었다.

정선우는 그날 퇴근 후 게이들이 모이는 장소를 검색했다. 누군가 유명한 게이바라며 사진과 약도를 올려둔 것이 보였다. 그는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갔다.

* * *

택시가 C그룹 본사 건물 앞을 지나자 그는 다급하게 세워달라고 했다. 택시에서 내리고 난 다음에야 병원은 한참을 더 가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본사 건물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택시에서 내려버렸다. 습관이었다. 다시 택시를 탈 수도 없어 한숨을 내쉬며 병원으로 걸어갔다.

그는 4년 동안 쉬는 날을 제외하고 지하철에서 내려 지금 걷고 있는 길을 걸었다. 그만둔 지 겨우 1년여가 지났지만 먼 옛날 일처럼 느껴졌다.

모든 풍경이 낯설었다. 

C그룹 직원은 C그룹에서 월급을 받아 C그룹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밥을 먹고, C그룹이 만든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고, C그룹이 지은 아파트에서 살다가 C그룹이 소유한 수목원에 묻힐 거라고 말했다.

그도 그렇게 살 줄 알았다. 평생 C그룹에서 일하다가 때가 되면 퇴직을 하고 때가 되면 죽는, 그런 삶을 살아갈 거라고 생각했다.

지독한 불면증으로 수면제를 먹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고, 매일 아침 죽고 싶다고 생각하고, 출근해서는 이렇게 살아야 하는 이유를 고민하고, 퇴근해서는 내일도 출근해야 한다는 것에 괴로워할 줄은 몰랐다.

사는 건 생각보다 더 힘들었다.

그래도 그는 죽지 않았다. 죽지 않아서 서도운을 만날 수 있었다.

서도운을 만나고 나서는 사는 게 재미있었다.

매일 새로운 하루를 살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게 기뻤다.

살아있어서 행복했다.

갑자기 인근 상가들이 번잡해졌다. 주머니에 든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니 점심시간이었다.

사내 식당을 이용하지 않는 직원들은 이 시간이 되면 일제히 건물 밖으로 나와 인근 식당으로 무리를 지어 들어갔다. 그러다 아는 사람끼리 마주치게 되면 서로 명함을 주고받기 바빴다.

자신도 상사의 명령에 상사의 지인이 주는 작은 종이를 공손하게 두 손으로 받고, 자신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공손하게 건넸었다.

정말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종이 쪼가리였다.

그가 가진 명함의 누구도 그에게 연락하지 않았고, 그 역시 그들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그 작은 종이는 그 위에 새겨진 이름이 중요했다. 그는 너무나 하찮은 존재라 그의 명함도 가치가 없었다.

따끈한 햇살을 피해 바람이 불어왔다. 근처 국밥집에서 쏟아져 나온 수증기가 바람에 섞여 그에게까지 이르렀다. 바람에 섞인 비릿한 냄새에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싫은 기억이 떠올랐다.

한국 사람은 뜨거운 국을 먹어야 개운해진다며 부하직원을 끌고 가던 옛 상사가 떠올랐다. 그 상사는 인근 국밥집을 순회라도 하듯이 매주 다른 곳으로 끌고 갔다.

입안의 상처 때문에 뜨거운 것을 못 먹고 맨밥만 조금씩 먹고 있으면 사내새끼가 재수 없게 먹는다며 타박했다.

국밥집 앞을 지나며 이러다 그 상사를 만나기라도 하면 우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그럴까 싶었다. 인근에 국밥집에 몇 개인데 기다렸다는 듯 이곳에서 마주친다면 정말 재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재수가 없었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옛 상사와 그 무리들이 그를 알아보고 다가왔다.

“야, 너 관뒀다며.”

“네.”

“그럼 요즘 백수야?”

“이직해서 잘 다니고 있습니다.”

옛 상사는 대놓고 아래위로 그를 훑어봤다.

겨울이 끝나갈 때쯤 서도운은 그를 끌고 지난번에 갔던 테일러 샵에 데려갔다. 그가 치수를 재는 동안 서도운은 테일러와 디자인과 옷감을 의논했다.

슈트 외에도 일상적으로 입을 옷과 구두를 비롯한 신발까지 모두 새로 샀다. 점점 늘어나는 옷에 그는 한숨을 쉬었지만 서도운은 “봄에 겨울옷 입을 거야?”라고 물었다.

출근할 때는 물론 어딘가 나갈 때마다 무슨 옷을 입어야 할지 물으면, 서도운은 방문한 장소나 만나는 사람들의 성격에 따라 수많은 옷 중에서 한 벌을 골라냈다.

오늘 아침에도 점심때 병원에 간다는 말을 하자 그가 입고 갈 옷을 골라줬다. 검은색 바지에 짙은 와인색 가디건과 회색 줄무늬 셔츠를 꺼내놓고 낄낄거리기에 왜 웃느냐고 물었더니 좀 젖어도 티가 안 나는 색으로 골랐다며 바지 위로 그의 성기를 슬쩍 만졌다.

그만 놀리라는 그의 투덜거림에 서도운은 웃으며 긴장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긴장했다는 걸 알았다.

“신수는 훤하네. 괜찮은가 봐?”

“좋은 곳입니다. 제 사무실도 따로 있고, 연봉은 억이 넘어요.”

“어딘데? 명함 줘봐.”

그도 백경 프로덕션의 일원이라 당연히 명함 같은 건 없었다.

“없는데요. 여긴 명함을 안 뽑습니다.”

“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명함도 없는 걸 보니까 순 거짓말 하는 것 같은데.”

“더 하실 말이 없으면 가보겠습니다. 약속이 있어서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은 넉넉했지만 입술이 간질거려 더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이 새끼가 건방지게……. 야, 너 혹시 호스트바 같은 데서 일하는 거 아냐? 옷 입은 것도 그렇고 반질반질한 게 제비 새끼마냥, 명함도 달래니까 못 주고, 맞지?”

느물거리는 옛 상사의 웃음에 위가 조여 왔다.

“……왜 욕을 하십니까?”

“야, 내가 못할 말 했냐? 아니면 어디서 일하는지 말해. 연봉 1억? 웃기고 있네! 네가 몸 파는 게 아니면 어딜 가서 억을 벌어?”

“몸을 안 팔아도 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전 그럴 능력이 됩니다. 그리고 전 지금 당신 부하직원이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

“네가 거짓말을 하니까 그러잖아. 네가 뭐하다 쫓겨났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어딜 가서 억을 벌어?”

“전 거짓말 안 했습니다. 제가 어디서 일하는지 그렇게 궁금하시면 예전처럼 제 개인정보 뒤지세요.”

그의 말에 옛 상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허허, 이 새끼 말하는 것 좀 봐. 얼굴 좀 반반하다고 스폰서 하나 좋은 거 물었나 봐? 아주 기고만장하네.”

“더 이상 대화하고 싶지 않습니다.”

“야, 넌 예의도 모르냐?”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습니다.”

“뭐?”

정선우는 주머니 속에 있던 휴대폰을 꺼내 내보였다. 녹음 중이라는 표시가 화면에 떠 있었다.

“야, 너, 이 새끼!”

“욕을 하실수록 저한테 유리합니다.”

백경 프로덕션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은 녹음이 생활화되어 있었다. 그들은 꺼림칙하다 싶으면 무조건 녹음을 했다.

“평소 언어폭력이 잦으신 분이니 저 이외에 다른 피해자도 찾아내 최대한 일을 크게 만들 겁니다. 꼭 인사고과에 반영되도록 하겠습니다.”

누군가 백경을 가리켜 ‘나쁜 놈은 아닌데 절대 같이 일하고 싶지 않은 놈’이라고 말했다. 그 말처럼 백경을 잘 나타내는 말이 없었다.

백경은 같이 일하기 싫은 상사의 특징을 모두 모아둔 인간이었다. 백경을 대하는 백경 프로덕션의 직원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백경에게 보복했다. 그 속에는 백경이 주둥아리를 잘못 놀렸을 때의 대처법도 있었다.

“야, 야, 너 무슨……. 야, 반가워서 그런 거지. 안부 좀 물은 거 가지고…….”

“보셔서 알겠지만 제 신수는 훤합니다. 그 이상 하신 말은 모두 절 모욕하는 말이었습니다.”

“야, 정선우! 이, 이 건방진 새끼!”

그가 걸음을 옮기자 옛 상사는 다급하게 그의 팔을 잡았다. 파르스름하게 보이는 눈이 옛 상사를 내려다봤다. 언제나처럼 표정 없는 얼굴에 불쾌감이 어렸다. 녹음을 멈추고 동영상 촬영을 했다. 자신을 붙잡은 손과 그 손의 주인까지.

“폭행죄 추가.”

옛 상사는 놀라 잡았던 팔을 놨다.

“최대한 노력해서 꼭 법원에 가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정선우는 백경 프로덕션에서 1년여를 보내며 아주 많은 것을 배웠다.

모두 좋은 것들이었다.

허옇게 질린 옛 상사와 그 일행을 두고 그는 가던 길을 계속 갔다.

다짜고짜 욕을 하고 그를 얕잡아 보는 옛 상사의 주둥이를 닥치게 했다고 해서 치밀어 오른 화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말을 했다.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예전처럼 입안을 깨물고 상처를 숨기기 위해 입을 꾹 다물지 않아도 되니까 말을 할 수 있었다.

얼른 집에 가 서도운에게 방금 있었던 일을 모두 이야기하고 싶었다.

녹음한 것을 들려주고, 동영상을 찍은 것도 보여주면 서도운은 잘했다고, 흐뭇한 얼굴로 그를 칭찬할 것 같았다.

갑자기 침이 흘러나와 손을 들어 닦았다. 아까부터 뭔가 이상했다. 입술이 간지럽더니 뜬금없이 침이 나오고 혀도 부은 것 같았다.

입안을 물고 싶은데 참아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하다 얼굴 가득 열기가 퍼졌다.

키스가 너무 하고 싶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생각이 멈추질 않았다.

서도운과 키스가 너무 하고 싶었다. 이러다 길바닥에서 섹스까지 하고 싶다고 할까 겁났다. 아니나 다를까 서도운과 섹스도 하고 싶었다.

그는 달아오르는 얼굴이 부끄러워 눈가를 가리고 걸음을 서둘렀다. 발기할지도 모른다고 생각에 미칠 것 같았다.

길에서 발기하기 전에 겨우 병원에 도착해 민망한 꼴을 면할 수 있었다.

접수를 하고 대기실 소파에 앉아 심호흡을 하자 흥분했던 것이 차츰 가라앉았다. 숨을 고르고 있을 때 접수실의 직원이 간호사를 따라가라고 했다.

인상이 좋아 보이는 나이가 지긋한 간호사가 작은 방으로 그를 안내해주며 뚜껑이 달린 투명한 플라스틱 컵을 내밀었다.

“여기에 정액을 담아서 주세요. 다른 건 섞으시면 안 됩니다.”

간호사는 나가기 전 웃으며 말했다.

“이 방은 방음 처리되어 있으니까 크게 소리 내셔도 밖에는 하나도 안 들립니다.”

정선우는 세면대와 작은 침대, 대기실에 있는 것과 같은 소파가 있는 방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괜히 벽을 눌러보기도 하고 한참 그렇게 서 있다 소파에 앉았다.

옆에 있는 테이블에 간호사가 주고 간 플라스틱 컵을 올려놓고 휴대폰을 꺼냈다. 동물병원은 아직 점심시간이라 두어 번 신호가 가기도 전에 서도운의 목소리가 들렸다.

-병원에 도착했어?

“지금 병원이야. 형, 나 명함 만들어줘.”

-명함?

“응.”

-알았어, 저녁에 샘플 보고 정하자.

“난 백 감독 이름 넣을 거야.”

-왜?

“재수 없는 사람한테만 줄 거라서.”

휴대폰 너머에서 작게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서도운이 어떤 얼굴로 웃고 있을지 떠올랐다.

-그럼 백 감독 이름 크게 넣어야겠네.

“앞면은 다 백 감독 이름 넣어줘.”

-알았어.

“형, ……나 싸야 돼.”

커다란 웃음소리에 그는 휴대폰을 잠깐 귀에서 뗐다.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서도운이 웃음을 멈췄다.

-야한 말이라도 해줄까?

서도운의 목소리에는 즐거운 기색이 물씬 묻어났다.

“아니, 안 그래도 돼.”

-정말? 형이 안 도와줘도 돼?

“요즘은 혼자서도 잘하잖아. 지금 형 많이 보고 싶으니까 할 수 있어.”

-……언제 진료 끝나?

은근한 목소리가 귓가에 달라붙었다. 귀가 녹아내릴 것 같았다.

“……모르겠어.”

-형이 데리러 갈까?

“오후 진료 있잖아.”

-예약한 건 끝났어.

“진료 마치고 와.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그래.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통화하는 동안 잔뜩 부풀어 오른 성기로 바지 앞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조금 더 서도운의 목소리를 들었다면 휴대폰에 대고 헐떡거릴 뻔했다.

테이블 구석에 있는 물티슈와 티슈 상자를 끌어당겨 옆에 준비해 두고 플라스틱 컵의 뚜껑을 열어 내려놨다.

심호흡을 하고 바지 단추를 풀었다.

정선우는 플라스틱 컵을 손에 복도를 두리번거렸다. ‘검사실’이라는 팻말이 붙은 방문을 두드리자 그를 안내해준 간호사가 문을 열었다. 컵을 내밀자 간호사는 건네받아 이리저리 보더니 한마디 했다.

“뭐 섞은 거 아니죠?”

“네, 다…… 그거예요.”

붉어지는 얼굴에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간호사의 뒤를 쫓아 진료실로 들어갔다.

소파에 앉아 몇 번의 심호흡을 반복하고 난 다음에야 간신히 고개를 들 수 있었다. 그때 만났던 반백의 의사가 맞은편 소파에 앉아 온화한 얼굴로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의사는 그가 고개를 들자 기다렸다는 듯 정액을 가지고 하는 검사에 관해 설명했다. 검사하는 데 시간이 걸리니 이틀 후 검사 결과를 가지고 다시 이야기를 나누자는 말에 엉거주춤 일어났다.

정선우는 진료실을 나가려다 다시 들어와 소파에 앉았다.

“감사합니다. 이 말을 하려고 다시 왔어요.”

“제게 감사할 일이 있나요?”

“그때 남자나 여자를 떠나서 생각해 보라고 하셨는데….”

말을 계속하라는 듯 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좋아요. 지금 사랑하는 사람은 남자예요.”

의사는 살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부드럽게 웃었다.

“섹스는 어떻습니까?”

“좋아요. 형하고는 뭐든 할 수 있어요. 뭘 하든… 정말, 좋아요.”

“축하할 일이군요. 결과가 나와 봐야 알겠지만, 아마도 이상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랬으면 좋겠어요.”

“안심하세요.”

그는 일어나려다 다시 자리에 앉아 한참을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저……, 형이 아닌 다른 남자랑은 안 되는데 그것도 정상인가요?”

“섹스를 말하는 겁니까?”

“네, 키스를 하거나 제 몸을 만지는 것도 싫어요. ……제가 다른 남자랑 섹스를 하는 상상을 하는 것도 끔찍해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섹스는 육체와 정신이 모두 필요한 행위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육체가 정신을 지배하기도 하고,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기도 합니다. 둘 중 하나만 정상이고, 나머지는 비정상인 그런 것이 아닙니다. 둘 다 정상입니다. 환자분의 경우, 정신적인 것이 충족되어야만 육체가 반응하는 겁니다.”

“……제가 정상이란 건가요?”

“네.”

의사의 단호한 대답에 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환자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이전과 비교해서 말이죠.”

그는 의사의 물음에 항상 느끼는 걸 말했다.

“굉장히…… 행복해요.”

“앞으로도 계속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그는 소파에서 일어나 의사에게 인사를 건네고 진료실을 나왔다.

무겁고 가벼운 한숨이 교차되어 나왔다.

정선우는 병원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 버튼을 눌렀다. 계속 행복하기를 바란다는 의사의 말이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 말은 마치 동화의 엔딩처럼 들렸다.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의 삶은 동화가 아니었다. 왕자님도 공주님도 없었었다. 하지만 자신과 서도운의 엔딩도 그렇게 끝나기를 바랐다.

엘리베이터에 기대 〈신데렐라〉나 〈백설공주〉처럼 〈정선우〉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정선우라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정선우는 할 줄 아는 건 아무것도 없고 친구도 없는 우울하고 칙칙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죽고 싶었습니다. 어느 날 정선우의 앞에 서도운이 나타났습니다.〉

서도운을 떠올리는 순간 웃음이 나왔다.

〈서도운은 꽃처럼 아름답고 빛나는 사람이었습니다. 서도운은 정선우에게 마법을 걸었습니다. 서도운은 정선우의 모든 것을 바꿨습니다. 서도운은 정선우에게 다른 세상을 보여줬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건물 밖으로 나갔다. 초여름의 햇살에 눈이 부셨다.

자신이 떠올린 이야기처럼 그가 볼 수 있는 건 자기 자신의 작고 초라한 모습뿐이었다. 결말은 어차피 정해져 있었고 그가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힘들고 지쳐서 삶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다. 그의 삶은 서도운을 만나고 시작되었다. 이전의 삶은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었다.

택시를 탈 수 있지만 걷고 싶었다. 한낮에 거리를 걷는 건 이전에는 누리지 못한 여유였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이어질 이야기를 생각했지만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가 해본 유일한 작문은 형식에 맞춰 베껴 쓴 자기소개서뿐이었다.

그래도 한 가지는 떠올릴 수 있었다.

〈정선우는 서도운을 너무너무 사랑했습니다.〉

다음 문장을 떠올리니 슬며시 웃음이 흘러나왔다.

〈서도운은 정선우를 아주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저절로 다음 문장이 이어졌다.

〈정선우는 서도운이 곁에 있어서 너무너무 행복했습니다.〉

서도운은 그에게 그런 존재였다. 떠올리는 것만으로 그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서도운을 만나기 전에는 행복하다거나 즐겁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사랑이나 행복, 즐거움, 기쁨 같은 단어가 어떤 의미인지 모두 서도운이 가르쳐줬다.

자신이 서도운으로 인해 행복해졌듯이 서도운도 그로 인해 행복해지기를 바랐다.

〈그들은 서로 사랑했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이야기는 그렇게 끝나야만 했다. 앞의 이야기가 어떤 것이든 두 사람은 만났고 연인이 되었다. 사랑하는 연인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끝나는 이야기, 정선우는 그와 서도운의 이야기가 그렇게 마무리되기를 바랐다.

점심시간이 끝나 근처 상가는 다시 한적해졌다. 거리를 걷는 동안 예전에는 보지 못한 것들을 볼 수 있었다.

수많은 커피점과 디저트 가게, 아이스크림 전문점, 옷가게, 문구점, 심지어 서점까지 있었다. 회사 주위에 이렇게 다양한 가게들이 있는 줄은 몰랐다. 4년 동안 그가 본 것은 상사가 좋아하는 식당, 접대 약속을 잡은 음식점, 회식을 했던 술집뿐이었다.

정선우에게는 한가롭게 걸어 다닐 시간이 없었다. 시간이 있다고 해도 그런 불필요하고 목적 없는 일에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일을 하며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동안 그는 집과 사무실밖에 몰랐다. 그게 그의 세상이었다.

서도운 외의 모든 것을 지우고 나니 세상에는 서도운만 남았다. 그에게 중요한 건 서도운뿐이었다. 서도운만 존재하는 세상은 놀라울 정도 평온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걸음을 뗄 수 없던 세상이 서도운의 손을 잡고 나서야 바로 보였다.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곳이 이제 다른 세상처럼 보였다. 천천히 걸어가며 서도운이 보여주는 세상을 즐겼다.

핸드폰 가게, 도시락 전문점, 컵케이크 가게, 꽃집, 약국, 액세서리 전문점, 생과일주스 가게……. 뒤를 돌아 지나친 가게로 다시 갔다.

문이 활짝 열린 가게 안에는 수많은 꽃들이 있었다.

“찾으시는 꽃이나 나무가 있으세요?”

문 앞에 선 그를 보고 점원이 활짝 웃으며 물었다.

서도운이 그에게 줬던 그런 커다란 꽃다발을 서도운에게 주고 싶었다. 아름다운 꽃들 너머로 꽃과 같은 남자가 행복하게 웃는 것을 보고 싶었다.

“아주 큰 꽃다발을 만들어 주실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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