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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나는, 여기 있어요 - 에필로그 (35/35)

35. 나는, 여기 있어요 - 에필로그

정선우와 백도경은 동물병원의 잔디공원 벤치에 앉아 서도운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세상을 녹일 듯 내리쬐던 한여름의 태양은 갑자기 흐려진 날씨에 기세가 꺾여 선선했다.

“내일부터 장마가 시작된대요.”

“그래? 그럼 쟤들은 어디서 볼일을 보는 거야?”

백도경의 말에 정선우는 높다란 펜스를 따라 열심히 영역표시를 하고 있는 말라뮤트를 가리켰다.

“비가 오면 저기 뒤뜰에 차양을 전부 펼쳐요. 그럼 애들이 비를 안 맞고 볼일 볼 수 있어요.”

그녀의 설명에 정선우는 고개를 돌려 병원 뒤뜰을 쳐다봤다. 건물 벽을 따라 설치된 차양이 모두 펼쳐지면 비가 들이치지 않는 넓은 공간이 생길 것 같았다.

“근데 쟤는 어디가 아파?”

말라뮤트는 영역표시를 마치고 펜스에 몸을 문지르며 사방으로 털을 날리고 있었다. 수액을 달고 안절부절못하는 보호자와 함께 짧은 산책을 하는 다른 개들과 달리 아픈 곳이라고는 없어 보였다.

“오늘 오후에 중성화 수술해요.”

“아…….”

백도경의 대답에 그는 애잔한 눈으로 말라뮤트를 바라봤다.

정선우도 이제 중성화 수술이 어떤 수술인지 잘 알고 있었다. 수술 후 사라지게 될 곳을 떠올리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곳은 그가 매우 좋아하는 신체 부위였다. 곧 장기의 일부분을 잃게 될 커다란 개를 보며 자신이 개가 아니라는 사실을 정말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백도경은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고 집어넣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점심시간이었다. 가족이 모두 모여 점심을 먹기로 하고 유명한 한식 전문점을 예약했다. 셋이서 먹다가 할머니와 엄마, 아빠까지 함께 밥을 먹는다고 생각하자 별일도 아닌데 두근거렸다.

그녀는 옆에 앉은 정선우를 뿌듯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누군가는 외모에, 누군가는 인품에, 누군가는 서도운이 선택했다는 사실 때문에 정선우를 반겼다. 그녀는 정선우가 서도운을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병원 스태프가 리드 줄을 가지고 잔디공원으로 나와 말라뮤트를 불렀다. 

앞으로 당할 일을 전혀 모르는 말라뮤트는 발랄한 걸음으로 스태프에게 다가가 애교를 부렸다. 스태프는 말라뮤트와 함께 백도경에게 다가와 지켜봐 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건넸다. 

그러다 옆에 앉은 정선우를 보며 묘한 얼굴로 웃더니 인사를 하고는 사라졌다.

정선우는 스태프의 뒷모습을 보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찝찝했다.

동물병원 사람들은 그가 서도운의 연인이라고 하면 놀란 얼굴로 쳐다보다 입가를 실룩거리며 고개를 끄덕이거나 뒤돌아서서 웃음을 터뜨렸다. 한두 명도 아니고 하나같이 그렇게 반응했다.

처음에는 자신이 남자라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서도운이 게이라는 사실을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이면 모두 안다는 백도경의 설명에 대체 왜 저러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도경아, 조금 전에 그 사람… 나 보고 웃은 거 맞지?”

시무룩한 얼굴로 묻는 정선우를 보며 백도경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사람 말고도 병원 사람들이 날 보면 웃어. …내가 이상해?”

백도경은 그제야 정선우가 무얼 묻는지 알아챘다.

“그냥 웃겨서 그래요.”

“내가 웃기게 생겼어?”

“선우 삼촌이 웃긴 게 아니라 우리 삼촌 때문에 웃는 거예요.”

“형이 왜?”

“삼촌 이상형이 선우 삼촌이랑 엄청 닮았거든요.”

“이상형?”

백도경은 조그맣게 낄낄거리며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두드렸다.

“다들 선우 삼촌을 보고는 어디서 저렇게 닮은 사람을 데려왔냐고 난리예요.”

그녀는 정선우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화면 속에는 하얀 털을 가진 개가 있었다.

“이게…… 뭐야?”

“아프간하운드라고 삼촌이 제일 좋아하는 개예요.”

그는 백도경에게 휴대폰을 받아 찬찬히 들여다봤다. 귀족적이라느니, 고혹적이라느니 여러 가지 수식어가 있었지만, 그의 눈에는 실내화에 눈과 코가 붙은 이상하게 생긴 개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게…… 정말, 나랑 닮았어?”

정선우는 실망감을 곱게 숨기고 물었다.

“판박이에요! 진짜 똑같아요!”

충격적인 말이었다.

점심 식사 내내 실내화 같은 아프간하운드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아서 자신이 뭘 하는지도 몰랐다.

그는 다른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평소처럼 서도운이 먹여주는 음식을 날름날름 받아먹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처음 보는 가족들은 넋을 잃고 쳐다봤다.

정신을 차린 건 식사를 거의 끝나갈 때 즈음이었다. 자신이 무슨 꼴을 보였는지 깨닫자 너무나 부끄러워 위가 경련을 일으킬 정도였다.

결국 심각하게 체했다.

두통으로 끙끙거리며 침대를 뒹굴자 서도운이 수건으로 감싼 아이스팩을 가져와 그의 머리 위에 올려놨다.

“속은?”

“소화제를 먹고 나서는 좀 나아진 것 같아.”

곁에서 서도운이 돌봐주지 않았다면 예전처럼 먹었던 걸 모두 토해내고 화장실에서 기절해 있었을 것 같았다.

“……형이 있어서 다행이야.”

그는 차가워진 자신의 손을 주물러주는 서도운의 손을 꼭 잡았다.

한참을 졸다 깨어나자 서도운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선우야, 오늘 형이 당직인데 어쩌지?”

“……괜찮아, 다녀와.”

“베개 옆에 폰 둘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해.”

“응…….”

정선우는 졸음 섞인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서도운이 조심스럽게 나갈 준비를 끝냈을 때는 그는 이미 깊이 잠들어, 서도운이 “갔다 올게”라고 속삭이며 아이스팩을 치우고 차가운 이마에 키스를 하는 것도 몰랐다.

* * *

불편했던 속은 자고 일어나니 깨끗하게 나아있었다. 

그는 가뿐한 몸을 일으켜 베란다로 향했다. 뿌옇게 변한 창을 향해 코를 킁킁거렸다. 창밖에서 느껴지는 비 냄새에 코를 울려 실망감에 가득 찬 소리를 냈다.

서도운의 자취를 찾아 이리저리 집 안을 둘러봤다. 해가 떴는데 아직도 돌아오지 않아 걱정스러웠다. 

현관문 앞을 서성이다 신발장에 붙어 있는 거울을 흘깃 쳐다봤다. 실내화 같은 긴 얼굴에 붙은 새까만 두 눈과 코가 보였다.

믿을 수가 없었다.

감탄스러울 만큼 잘생긴 얼굴이었다. 서도운이 그를 자랑스러워할 만했다. 

끝내주게 잘생긴 얼굴에 하얗고 부드러운 긴 털과 우아한 몸매, 똑똑하고 점잖은 성격을 가진 서도운의 반려견이 바로 그였다.

현관문에서 전자음이 나고 기다렸던 이가 나타났다. 그는 힘차게 꼬리를 흔들며 발을 굴렀다.

“형 기다렸어?”

서도운이 환하게 웃으며 무릎을 꿇고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익숙한 체취를 맡자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

“잠깐만 기다려.”

그는 서도운이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간 드레스 룸 앞에서 얌전히 서도운을 기다렸다. 집에서 유일하게 그가 들어가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나온 서도운이 그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씻고 나와서 밥 줄게.”

욕실로 가는 서도운을 따라가 다시 욕실 앞에 엎드렸다. 욕실 벽은 유리로 되어있어서 옷을 벗고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리는 서도운의 모습을 모두 볼 수 있었다.

밖에서 서도운과 달릴 때가 제일 행복했지만, 이렇게 서도운이 움직이는 걸 지켜보는 것도 좋았다. 혼자서 집에 덩그러니 남겨져 서도운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싫을 뿐, 서도운과 함께하는 시간은 뭘 해도 재미있고 즐거웠다.

서도운이 욕실에서 나오자 그는 주위를 돌며 코를 킁킁거렸다. 서도운이 체취를 지우고 나오면 불쾌해졌다. 서도운의 체취도 좋아하고 서도운에게서 그의 냄새가 나는 것도 좋았다. 그는 서도운의 주위를 돌며 몸을 문질러 체취를 발라뒀다. 이렇게 해야 다른 개가 자신의 것을 넘보지 않았다.

“우리 선우가 기다리느라 심심했구나.”

서도운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간부터 코까지 미끈하게 이어지는 긴 콧잔등에 키스를 했다. 애정을 가득 담은 입맞춤에 그는 꼬리를 맹렬하게 흔들었다. 

볼을 서도운의 얼굴에 비비며 더 해달라고 조르자 서도운은 금세 알아듣고 갸름한 볼부터 털이 길게 늘어진 귀 아래까지 부드럽게 문질렀다. 긴 목덜미를 쓸어내리는 손길에 눈을 내리감고 서도운이 주는 애정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한참이나 그렇게 만져준 서도운이 일어나 주방으로 향하자 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뒤를 따랐다.

서도운은 냉장고를 열어 이리저리 살피더니 용기 몇 개를 꺼내 식탁에 쌓았다.

“오늘은 뭐 먹을래?”

그는 서도운의 물음에 당연한 듯 두 발로 일어나 식탁 위를 살폈다. 대형견인 그는 뒷다리로 서면 사람만큼 키가 컸다. 덕분에 식탁에 맛있는 냄새가 나는 음식이 있으면 알아서 집어먹기도 하고 싱크대를 뒤질 수도 있었다.

식탁에 늘어선 용기를 코로 밀자 서도운은 뚜껑을 열어 안에 든 고기의 냄새를 맡게 해줬다. 닭, 오리, 칠면조, 토끼, 사슴, 소……. 냄새로 고기의 맛을 떠올리자 입에 침이 고였다. 그러고 보니 어제 속이 좋지 않았던 것이 생각났다.

서도운 몰래 서랍을 열어 말린 오리 목뼈를 훔쳐 먹어서 그런 건지도 몰랐다. 세 개나 그냥 삼킨 걸 떠올리니 다시 속이 아려왔다. 한동안 오리는 먹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는 오리와 닭을 밀어내고 이리저리 다시 냄새를 맡다가 소고기가 든 통을 선택했다. 서도운은 소고기만 두고 다른 통의 뚜껑을 닫았다. 생각해 보니 소랑 토끼를 함께 먹는 것도 맛있을 것 같았다. 오리 외에는 다 괜찮을 것 같아 냉장고 앞에 선 서도운의 허리를 코로 툭툭 건드렸다.

“안 돼. 넌 많이 먹으면 토하잖아. 급하게 먹는 버릇도 고쳐야 하는데…….”

토한다는 말에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소화기관이 약해 한꺼번에 많이 먹거나 삼키면 토해내는 일이 잦았다. 토하는 건 힘든 일이라, 그러고 나면 서도운이 한참 토닥여줘야 진정할 수 있었다.

식탁에서 맛있는 냄새가 풍기자 그는 방석이 깔려 있는 커다란 받침대에 올라가 앉았다. 함께 식사를 하기 위해 서도운이 만든 그의 의자였다. 기대감에 부풀어 얼른 먹여달라고 재촉하자 서도운은 환하게 웃으며 네모나게 썰어진 고기를 내밀었다.

“삼키지 말고 씹어 먹어.”

소고기는 부드러워 삼켜도 괜찮지만 눈치를 보며 몇 번 씹어 삼켰다. 그다음에 입에 들어 온건 고기가 아니라 삶은 당근이었다. 당근까지는 괜찮았다. 얼른 당근을 삼키고 소고기를 달라고 입을 벌렸다. 기다리던 소고기가 입안에 들어왔지만, 기분 나쁜 것도 함께 있었다. 그는 바로 입에 든 걸 뱉어내 확인했다.

세상에, 브로콜리였다!

그는 배신감에 부들부들 떨며 서도운을 바라봤다.

“이 편식쟁이가…….”

서도운은 한숨을 쉬며 그를 쳐다봤다. 그도 한숨을 쉬고 싶었다. 싫어하는 걸 알면서 계속 먹이려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식탁 위에 떨어진 소고기만 날름 집어 먹고 코로 고기가 있는 접시를 밀었다. 마음 같아서는 야채가 있는 접시를 엎어버리고 싶지만 그렇게 하면 서도운이 슬퍼할 테니 참았다.

그는 서도운의 계속된 시도에도 꿋꿋하게 싫어하는 야채는 다 뱉어냈다. 식사가 끝나자 서도운은 그가 뱉어둔 야채를 치우며 다시 한숨을 쉬었다. 그를 쳐다보는 시선이 곱지 않아 휙 하니 고개를 돌렸다.

세상에 맛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브로콜리나 양배추를 먹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고기가 아니라도 고구마나 단호박, 당근 같은 건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외에는 먹고 싶지 않았다.

“싫어하는 건 알아. 그래도 몸에 좋은 거라서 형이 먹이는 거야. 안 그래도 소화기가 약해서 걱정인데 편식까지 심하니 어쩌면 좋니…….”

목소리에 걱정스러운 울림이 가득해 그는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어 서도운을 바라보며 코를 울렸다. 서도운은 그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브로콜리도 먹어.”

그건 싫었다.

그는 서도운을 바라보는 눈빛에 자신의 의사를 담았다.

브. 로. 콜. 리. 싫. 어!

“알았어, 과일 먹자.”

과일이 아니라 브로콜리가 싫었다. 그는 식탁을 앞발로 두드리며 싫다고 외쳤다. 그의 울음에 서도운은 냉장고를 열고 커다란 배를 꺼냈다.

“그래, 빨리 줄게.”

그는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서도운이 원망스러웠다. 어떨 때는 기가 막히게 알아듣지만 어떨 때는 바보스러울 만큼 알아듣지 못했다. 대체로 먹는 것에 관련해서 그랬다. 고기랑 과일만 먹고 살았으면 좋겠는데 항상 야채도 먹였다. 어쩌면 서도운은 자신의 말을 알아듣고도 아닌 척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속상한 마음에 싱크대에서 배를 깎고 있는 서도운에게 다가가 코로 허리를 툭툭 쳤다. 그러자 입 앞에 방금 깎은 배가 나타났다.

일단 받아먹었다.

왜 자신의 말을 못 들은 척하는지 궁금했다. 다시 허리를 치자 배가 나타났다.

그것도 일단 받아먹었다.

배는 맛있었지만 브로콜리는 싫었다. 다시는 브로콜리를 먹고 싶지 않다고 허리를 쳤다.

“형이 지금 깎고 있잖아. 조금만 참아.”

배를 먹고 싶다고 허리를 친 건 아니지만 배가 맛있으니까 참았다.

그는 배 두 개를 먹어치우고 화장실로 가 볼일을 보고 난 뒤 침대로 향했다. 침대에 엎드려 서도운이 주방과 화장실을 오가며 청소를 하는 걸 구경했다.

정리를 끝낸 서도운이 그의 옆에 누웠다. 그는 꼬리를 살랑이며 서도운에게 다가가 얼굴을 핥았다. 기분 좋은 웃음소리에 얼굴을 비비자 그를 품에 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정한 손길에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는 서도운의 어깨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갑자기 몸을 울리는 요란한 소리에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봤다. 세상이 흔들리는 것 같은 커다란 소리가 연이어 울렸다. 놀라 서도운의 얼굴을 핥으며 앞발로 가슴을 긁자 금세 일어나 그를 안고 주위를 둘러봤다.

다시 세상이 울렸다.

“괜찮아, 천둥소리야. 금방 그칠 거야.”

서도운은 이불을 끌어당겨 머리끝까지 덮고 그를 꼭 끌어안았다.

어둡고 포근한 이불 속은 둘만 있는 동굴 같았다. “괜찮아”라고 속삭이는 목소리와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에 놀란 마음이 점점 가라앉았다.

머리를 기댄 서도운의 가슴 속에서 그와는 달리 느리게 움직이는 심장 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계속 들리는 커다란 소리 대신 서도운의 심장 소리에 집중하자 두려움이 사라졌다.

그는 가물거리는 눈을 감으며 내일 아침에는 비가 그치길 바랐다. 비가 온 후 깨끗한 거리를 서도운과 함께 산책을 하고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 * *

낯선 소리에 놀라 이불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잠들어 있는 서도운을 피해 침대에서 내려와 베란다 쪽으로 걸어갔다.

세찬 바람이 베란다 창을 후려치자 커다란 유리 벽이 울어댔다. 바람은 그들의 집을 노리고 계속 베란다 창을 두들겼다. 그는 그들의 집을 침입하려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서도운에게 알려야 할까 고민했다. 베란다 창을 지켜보다 위험한 순간에 서도운을 깨우기로 했다. 그는 크고 날쌘 개였다. 그 자신도 서도운도 지킬 수 있었다.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베란다 창을 노려봤다. 그가 지키고 있는 걸 알았는지 바람은 누그러들며 발을 돌렸다. 대신 거센 빗방울이 창을 두드려댔다. 

후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빗방울이 유리에 닿아 부서지자 작은 물방울이 사방으로 터져나가며 반짝였다. 마치 그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하는 듯했다. 문은 서도운만 열 수 있었다. 그는 문을 열 수도 없고 열어서도 안 되는 게 규칙이었다. 

시선을 유혹하는 빗방울을 거절하고 반짝거리는 창만 구경했다.

“선우야.”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그는 얼른 일어나 침대로 달려갔다.

“비 오는 거 구경하고 있었어?”

잠에서 깬 서도운은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그의 목덜미를 긁었다.

그런 건 어떻게 알았을까 궁금했다. 대답해 보라며 코로 입을 툭툭 치자 서도운은 웃으며 그의 코에 입을 맞췄다. 대답을 피하는 서도운의 행동에 심술이 나 침대로 뛰어올라 서도운의 몸을 꾹꾹 눌렀다.

“알았어, 일어날게.”

서도운의 웃음소리가 사방으로 울렸다. 그가 좋아하는 소리 중의 하나였다. 더 웃어보라며 발을 구르자 서도운은 그를 당겨 답삭 안았다. 목덜미부터 엉덩이까지 천천히 쓸어내리는 손길에 절로 꼬리가 살랑거렸다.

“간단하게 먹고 빗질하자.”

먹는 것도 좋고 빗질도 좋았다. 둘 다 서도운과 함께하는 것이었다. 얼굴을 서도운의 목덜미에 파묻고 문지르자 좋은 냄새가 났다. 서도운의 체취였다. 그의 체취와 섞인 향기로운 냄새가 서도운의 몸에서 흘러나왔다.

그는 서도운이 간단하게 볶음밥을 데워 먹는 걸 구경하고, 칠면조 고기와 수박을 먹었다. 이번에는 브로콜리나 다른 야채를 억지로 먹이려 하지 않아서 서도운이 그의 말을 알아들으면서도 무시하는 게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서도운은 베란다 창 앞에 서서 한참 동안 밖을 바라봤다.

어젯밤부터 시작된 빗소리는 그치지 않고 이어졌다. 어둑한 하늘은 아침 같기도 하고 저녁 같기도 했다. 

그에게 하루는 해가 뜨고 해가 지는 것이 아니라 서도운과 함께 자고 함께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의 삶은 서도운과 모든 것을 함께 했다. 

때론 함께하는 인간과 너무나 밀착되어 같은 종이라고 착각하는 개들이 있었지만, 그는 결코 자신이 인간이라고 착각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과 함께 살아도 자신이 인간이 아니란 것은 명확하게 이해했다. 그와 서도운은 다른 개체였다. 그러나 서도운은 그의 감정과 의사를 이해했고, 그도 서도운의 감정과 말을 이해했다. 

그에게 서도운은 세상에서 하나뿐인 존재였다. 누구도 그에게 서도운과 같은 의미를 가질 수 없었다.

“선우야, 중국 쪽으로 가던 태풍이 진로를 바꿨대. 비가 사나흘은 더 올 거야.”

서도운의 말에 그는 닫힌 문틈으로 새어 들어온 비와 바람의 냄새를 깊이 들이마셨다. 불어닥치던 바람은 잦아들었지만 굵은 빗방울이 창에 흩뿌려졌다 멀어져가는 것을 반복했다.

창밖을 바라보던 서도운이 거실 한쪽에 있는 커다란 테이블 아래에 있는 계단을 꺼내자 그는 계단을 올라가 테이블에 엎드렸다. 그가 테이블 위에 자리를 잡자 서도운은 옆에 있는 트레이를 끌어당겨 여러 개의 빗과 브러싱 액을 꺼내 빗질을 시작했다.

“이 근처에 있는 애들은 괜찮겠지만 다른 곳은 모르겠어.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겠는데…….”

동물병원 인근에는 고양이가 냄새가 진동하는 낡고 오래된 집이 있었다. 그 집에 사는 나이든 여자는 그와 서도운을 보면 항상 밝게 웃으며 반겼다. 두 사람이 수술이나 치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는 얌전히 서도운 곁에 앉아 기다렸다.

가끔 칠이 벗겨진 담벼락에 자리를 잡은 커다란 고양이가 얼른 꺼지라는 듯 그를 노려볼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점잖게 고양이의 시선을 무시했다. 그의 본성은 사냥개였고 사냥할 필요가 없어서 하지 않을 뿐이지 작은 고양이쯤은 얼마든지 물어뜯어 죽일 수 있었다.

“비가 빨리 그쳐야 너도 산책을 할 텐데…….”

능숙한 손놀림의 빗질과 함께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집 주위를 산책하는 일은 재미있으면서도 성가셨다. 그에게 인사를 건네거나 감탄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비명을 지르거나 멀리서부터 도망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상관하지 않았다. 서도운이 자신의 이마를 쓰다듬는 손길에만 집중했다. 

산책을 마치고 나면 동물병원에 있는 잔디공원에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다 집으로 돌아왔다. 비가 오거나 너무 덥거나 춥지 않으면 늘 그렇게 하루를 보냈다.

날씨가 좋은 주말에는 서도운과 차를 타고 말이 있는 곳으로 가서 마음껏 뛰었다. 그는 좁은 도로와 차와 사람이 오가는 곳은 달리기에 적당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얼 하든 서도운은 그의 곁에 있었고 언제나 그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떨어져 있을 때는 서도운이 병원에 있을 때뿐이었다. 침대에서 지칠 때까지 자다가 서도운이 돌아올 때쯤이면 문 앞을 서성이며 기다렸다. 문이 열리고 언제나처럼 기다렸던 사람이 나타나면 행복감에 울음이 나왔다.

그에게 돌아와 줘서 기뻤다.

몇 시간에 걸친 빗질이 끝나자 그는 계단을 내려와 찌뿌둥한 몸을 흔들었다. 새하얀 털이 물결치듯 그의 몸 주위를 휘감았다.

사용한 빗을 씻고 떨어진 털 뭉치를 치우는 서도운을 따라 걸으며 꼬리를 흔들었다. 서도운은 졸졸 따라다니는 그의 콧잔등에 입을 맞추며 환하게 웃었다.

“맞아, 네가 세상에서 제일 멋져. 네가 제일 예뻐. 형은 너보다 예쁜 개를 본 적이 없어.”

칭찬에 눈을 내리감고 목을 길게 뻗었다. 서도운이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꼭 끌어안아 주자 서도운의 체취가 깊이 다가왔다. 그가 사랑하는 존재의 향기였다.

서도운의 체취, 서도운의 온기, 서도운의 목소리, 서도운의 그림자……. 그는 서도운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그는 행복감에 코를 울리며 사랑한다고 말했다.

* * *

출근 준비를 끝낸 서도운이 그를 쓰다듬으면 물었다.

“혼자 있을 수 있겠어? 형이랑 같이 출근할래?”

그는 꼬리를 흔들며 서도운의 곁에 섰다. 병원은 사람도 동물도 많아서 좋아하지 않지만 이런 날씨에는 혼자 있기 싫었다. 

서도운은 얇은 담요를 꺼내 들고 그와 함께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로비에 서서 밖을 쳐다봤다. 갑자기 몰아친 돌풍에 빌라 입구의 자동문이 부서질 듯 흔들렸다. 놀라 서도운의 뒤에 숨자 서도운은 불안해하는 그를 담요로 꼼꼼하게 감싼 후 안아 들었다. 그는 서도운의 품에 맞춰 최대한 몸을 웅크렸다.

자동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수많은 냄새가 느껴졌다. 무겁게 내려앉은 비의 냄새는 물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작게 코를 울리자 서도운은 단단하게 그를 끌어안았다.

“괜찮아, 몇 걸음만 더 가면 돼.”

다정한 목소리에 그도 서도운의 목덜미에 코를 부비며 괜찮다고 말했다.

병원에 들어서자 서도운은 접수실 앞이 아닌 뒤뜰과 연결되는 대기실에 그를 내려놨다. 몸을 감싼 담요가 치워지자 그는 바닥에 내려와 몸을 흔들었다. 털에 들러붙은 습기가 떨어져 나가길 바라며 머리끝부터 꼬리 끝까지 털어냈다.

갑자기 들려온 탄성에 고개를 들자 접수실장인 박희선과 처음 보는 사람이 있었다.

“어머, 얘가 서 선생님이 기르신다는 아프간하운드예요? 세상에, 어쩜 이렇게 예뻐요!”

낯선 여자는 호들갑스럽게 떠들며 그에게 다가왔다. 그는 서도운의 다리 뒤로 몸을 숨겼다.

“선우는 낯가림도 심하고 예민하니까 이름도 부르지 말고 건드리지도 마세요. 그냥 가만히 두세요.”

서도운의 말에 낯선 여자는 그 자리에 서서 울먹이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네에, 성격도 생긴 거 그대로인가 봐요! 실장님, 속눈썹까지 흰색이에요! 어쩜 좋아, 이렇게 예쁜 애는 첨 봤어요!”

“선우야, 형은 회의 들어갔다 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좀 있다가 도경이가 온다니까 도경이랑 놀고 있어.”

그는 백도경이 온다는 말에 꼬리를 흔들었다. 그가 서도운 다음으로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반응에 서도운은 웃으며 콧잔등을 쓰다듬으며 입을 맞췄다.

“그래, 조금만 기다려.”

서도운이 박희선과 취소된 진료 예약에 대해 이야기하며 사라지자 접수실에 남은 낯선 여자가 흘끔거리며 그를 쳐다봤다. 그는 고개를 돌려 여자의 시선을 무시했다.

전화벨 소리가 연이어 울리고 통화를 하는 박희선의 목소리와 여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는 소파 위로 올라가 엎드렸다. 뒤뜰이 보이는 커다란 유리 벽 너머로 비가 내리는 걸 지켜봤다. 

이곳은 유리 벽이 아닌 차양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맑은소리가 아닌 둔탁한 소리가 리듬감 있게 들리다가 바람이 불어오면 커다란 북이 울리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그럴 때면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펴보고 다시 엎드렸다.

병원 입구에서 느껴지는 다급한 움직임에 몸을 일으켰다. 열린 문으로 비와 고통의 향기가 느껴졌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뛰어 들어온 여자는 담요로 감싼 무언가를 안고 있었다.

“우리 애 좀 살려주세요!”

박희선이 접수실에서 나와 담요 안을 확인하고 외쳤다.

“응급실! 청색증이야!”

전화벨이 연이어 울리고 사람들이 계단을 달려서 내려오는 소리와 커다란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잠시 후 여자는 텅 빈 담요만 끌어안고 다시 대기실로 돌아왔다. 박희선은 넋이 나간 여자를 달래 인적사항을 받아 적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언제부터 저런 상태였어요?”

“모르겠어요……. 아침에 일어나니까 저랬어요. 음식물 쓰레기통을 뒤져서 먹은 것 같은데, 주방이 난장판이었어요.”

“쓰레기통에 어떤 게 있었어요?”

“어제 친구들이 와서 족발이랑 치킨도 먹고……, 뭐가 많았어요.”

오래 지나지 않아 여자는 박희선과 늘어선 방 중 한 곳에 들어갔고 그는 작게 새어 나오는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박희선의 부축을 받으며 나온 여자는 울먹이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응급수술, 뼈, 기도폐색, 음식물 쓰레기……. 통화를 마친 여자는 휴대폰과 담요를 끌어안고 흐느꼈다. 박희선은 접수실에서 나와 울고 있는 여자를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대기실이 조용해지자 그는 다시 소파 위에 엎드렸다.

졸음으로 눈앞이 가물거릴 때 병원 입구에서 조심스러운 발소리가 들렸다. 종이상자를 든 작은 여자가 대기실 소파 위에 상자를 내려놓고 접수대로 다가갔다.

“엄마랑 새끼 고양인데 길고양이예요. 지금 저희 동네가 침수돼서 난리거든요. 오늘 아침에 보일러실에서 고양이 우는 소리가 나서 봤는데 새끼 둘은 이미 죽었고, 나머지도 움직이지를 않더라고요. 어미 고양이도 상태가 안 좋은지 잡아도 가만히 있었어요.”

길게 이어지는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던 박희선은 접수실에서 나와 상자 안을 살폈다. 그리고는 상자를 들고 작은 여자와 함께 어느 방으로 들어갔다. 방을 나온 작은 여자는 불안한 얼굴로 위층으로 올라갔다.

몸을 말고 꾸벅꾸벅 졸고 있을 즈음 분노로 가득 찬 발걸음 소리와 욕설에 그는 눈을 떴다.

“에라이, 시발놈들!”

“당신은 욕 좀 그만해!”

“내가 욕을 안 하게 생겼어!”

여자는 온몸이 젖은 남자에게 화를 내며 접수대 위로 방석과 옷에 싸인 무언가를 내보였다. 박희선은 짧은 비명과 함께 외과 과장을 불렀다. 그녀의 호출에 접수실로 내려온 남자는 방석을 벌려 상태를 확인하더니 굳은 얼굴로 방석과 옷 뭉치를 안고 걸음을 바삐 옮겼다.

“여기에 보호자 분 인적사항을 작성해 주시고, 어떻게 된 상황인지 설명을 해주시겠어요?”

박희선의 말에 남자는 다시 욕설을 내뱉었다.

“가평에 볼일이 있어서 경춘고속도로를 가는데, 뭐가 이상해서 내가 차를 세웠거든요. 어떤 시발 새끼가 이렇게 비가 억수 같이 쏟아지는데 길에 개를 갖다 버린 거야! 지금 앞이 안 보일 만큼 비가 오는데 그런 쪼깨난 개가 눈에 보이냐고!”

“그래서 저 개를 차로 치신 분이…….”

“아유, 아니에요! 이 양반이 ‘어어’ 하면서 차를 세우더니만 이렇게 비가 오는데 나가선 개가 죽어있다는 거예요. 우리도 진돗개를 키우거든요. 이 양반이 길에 저렇게 두면 안 된다고 어디 묻어주자고 해서 봤는데 애가 숨이 붙어 있더라고요. 그래서 부랴부랴 여기로 왔죠.”

“그래서, 수술하면 살아요?”

남자의 물음에 박희선은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일단 상태를 확인하고 알려드리겠습니다.”

“에라이, 시발놈들!”

박희선의 대답에 남자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또 욕을 내뱉었다. 흠뻑 젖은 남자에게 박희선이 수건을 건네자 남자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여자와 소파에 앉아 간간이 욕설을 섞어가며 이야기를 나눴다.

전화벨이 울리고 박희선은 한참 통화를 하고는 두 사람을 불렀다.

“다행스럽게 주요 장기는 피해서 수술은 가능하다고 합니다. 말씀하신 바에 의하면 저 개는 유기견이고, 사고를 당한 유기견을 저희 병원으로 데려오신 건데…….”

“잠깐만, 지금 그래서 수술을 안 해주겠다는 거요?”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아니긴 뭘 아냐! 지금 유기견이니까 수술 못 하겠다는 거잖아!”

남자가 소리를 지르며 들고 있던 수건을 내던졌다.

“에라이, 시발! 병원비가 문제야? 그 돈 내가 낸다! 내가 주인이다!”

“아유, 여보! 좀 참아라!”

여자가 고함을 지르는 남자의 앞을 가로막았다. 박희선은 난감한 얼굴로 식식거리는 남자를 향해 말을 이었다.

“저는 감사하다고 하려고 했는데……, 그러시면 보호자로 수술 동의서에 사인을 해주시겠어요?”

박희선의 말에 남자는 벌게진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말리던 여자가 커다란 목소리로 남자를 타박했다.

“거봐라, 내가 좀 참으라고 했잖아! 하여간 성격하고는.”

여자는 박희선이 내민 수술 동의서를 쭉 읽다가 남자를 노려보며 물었다.

“이름은 뭐로 할 건데?”

“뭔 이름?”

“개 이름!”

“……태풍 이름이 ‘나비’라니까 나비라고 하면 되겠네.”

“고양이도 아니고 개 이름이 나비가 뭔데!”

옥신각신하던 두 사람은 결국 ‘나비’라고 하기로 했는지 수술 동의서를 작성해 박희선에게 건넸다. 박희선은 남자가 바닥에 던진 수건을 주워들고 두 사람을 보며 웃었다.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이고, 제가 성격이 급해가지고……. 정말 죄송합니다.”

남자는 박희선에게 허리를 굽히며 머리를 긁적였다. 박희선은 수술이 오래 걸릴 거라며 새 수건과 쿠키가 든 봉투를 내밀며 커피머신을 가리켰다.

두 사람은 따뜻한 커피를 손에 들고 다시 소파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당신은 눈도 좋아. 어떻게 봤데?”

“걔가 살라고 내 눈에 띈 거라니까. 이게 인연이야.”

“진돌이 데려올 때도 인연이라고 하더니만, 그놈의 인연은 개하고만 꼬이나 보네.”

“사람은 당신 하나면 된 건지, 더 꼬여서 뭐 할라고.”

여자의 웃음소리가 대기실을 채웠다.

태풍 속에서도 병원을 찾은 동물들은 대부분 긴급하고 위중한 상태였다. 사람들이 올 때마다 박희선은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기를 들었고, 대기실에서는 간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병원 입구가 아닌 뒤뜰로 가는 문이 열리고 여자아이가 밝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선우야!”

그는 고개를 들고 문을 쳐다봤다. 백도경은 쓰고 있던 우산을 접어 우산꽂이에 넣고 그에게 달려와 목을 끌어안았다.

“선우야, 보고 싶었어!”

백도경은 그의 볼에 자신의 얼굴을 비비며 콧잔등에 뽀뽀를 해댔다.

“우리 선우도 내가 보고 싶었지?”

그도 이 여자아이가 좋았다. 서도운 다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눈을 감고 고개를 들자 백도경은 웃으며 볼부터 목덜미까지 정성스럽게 쓰다듬었다. 다정한 손길에 사람들의 울음소리로 움츠러들었던 기분이 부드럽게 펼쳐졌다. 꼬리를 살랑이며 코를 울리자 백도경이 밝게 웃었다. 그녀는 긴 귀털을 쓸어내리며 조그맣게 속삭였다.

“내가 맛있는 거 가져왔어. 나중에 삼촌 몰래 줄게.”

맛있는 게 무얼까 궁금했다. 백도경은 가끔 서도운이 주지 않는 아주 맛있는 걸 주곤 했다. 기대감에 꼬리가 팔랑거리자 그녀는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고는 배시시 웃었다.

“점심시간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조금만 참아.”

그녀는 그의 옆에 앉아 가방에서 빗을 꺼내더니 긴 귀털과 목덜미 털을 빗었다. 그는 그녀가 빗질을 하기 편하도록 소파에 기댔다. 서도운이었다면 품에 파고들었겠지만 백도경은 아주 작아서 늘 조심했다.

그는 아이라고 불리는 작은 사람들이 싫었다. 작은 사람 중 유일하게 좋아하는 건 백도경뿐이었다.

아이들은 그를 보고 큰소리를 지르며 이리저리 뛰어다니거나 비명을 지르고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러면 아이 곁에 있는 사람은 그와 서도운을 향해서 욕을 하고 화를 냈다.

그는 한 번도 사람을 위협한 적이 없었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가 존재하는 것만으로 위협이 된다고 말했다.

위험해 보이는 짐승을 왜 사람이 다니는 길에 데리고 나왔느냐 소리치는 사람, 개새끼에게 입마개도 하지 않고 데리고 다닌다고 욕을 하는 사람, 개에게 처바를 돈이 있으면 불쌍한 사람을 도와줄 생각을 하라며 혀를 차는 사람까지……, 서도운은 그들에게 맞서 화를 내거나 대꾸하지 않았다. 가만히 그의 머리를 쓰다듬기만 했다.

그런 말을 들은 날이면 서도운은 그의 발을 씻기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선우야, 넌 내가 하는 말만 기억하면 돼.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은 신경 쓰지 마.”

그의 세계에 존재하는 사람은 서도운뿐이었다.

그의 세계는 그와 서도운만 존재했다.

그의 유일한 사람이 그에게 오고 있었다. 그는 소파에서 내려가 굳은 몸을 펴고 털을 정리했다. 서도운은 환하게 웃으며 무릎을 꿇고 그를 끌어안았다. 그는 서도운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며 코를 울렸다. 곁에 없는 매 순간 그리웠다.

“언제 왔어?”

“얼마 안 됐어.”

“점심은 여기서 먹고 갈래?”

“아니, 선우랑 삼촌 집에서 먹을래.”

서도운의 물음에 백도경이 들고 있던 빗을 가방에 넣으면서 대답했다. 그녀의 말에 서도운은 아침에 그를 감쌌던 담요를 가지고 왔다. 비에 젖었던 담요는 뽀송하게 말라 있었다.

“선우야, 집에 가서 도경이랑 놀고 있어.”

서도운은 병원에 올 때처럼 담요로 그의 몸을 꼼꼼하게 감쌌다. 서도운이 그를 품에 안고 일어나자 백도경은 문을 열어주고 우산을 펼쳐 그들의 머리 위에 씌웠다. 커다란 차양을 벗어나자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커다랗게 울렸다.

“내일까지 비가 계속 온다던데 보호소는 괜찮아?”

“우리야 걱정이 없지만 사설이나 시설이 열악한 곳은 문제가 생기겠지.”

“삼촌, 우리가 좀 맡으면 안 돼?”

“도경아, 우린 나이 많고 아픈 애들만 골라서 받고 있어. 24시간 사람이 돌봐줘야 하는 애들이라 지금도 손이 모자라.”

“재입양만 전문적으로 하는 보호소를 따로 만들면…….”

“또 개랑 고양이 버려도 되는 곳으로 소문날걸.”

서도운의 말에 백도경은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이 걸을 때마다 찰박거리는 발소리가 울렸다.

“그 애들이 버려지는 걸 막으려면 법을 바꿔야 해. 그건 어머니나 누나가 노력을 하고 있으니까 기다려보자.”

길가와 하수구를 따라 흘러내리는 물은 계곡에서 쏟아지는 세찬 물줄기처럼 커다란 소리를 냈다. 세상은 온통 물에 잠긴 듯했다.

습기로 가득 찬 공기만큼이나 무거운 두 사람의 마음이 느껴져 담요 틈으로 코를 내밀어 서도운의 목덜미에 비볐다. 서도운은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 듯 꼭 끌어안았다.

집에 도착해 다시 병원으로 가는 서도운을 배웅하고 백도경과 주방으로 가 점심을 먹었다.

식사 후 백도경이 냉장고에서 상자를 꺼내자 그는 기대감에 부풀어 그 뒤를 쫓았다. 백도경은 서도운과 그가 낮잠을 자는 카우치에 자리를 잡고는 상자를 열어 보여줬다. 마카롱의 달콤한 냄새에 그는 정신없이 꼬리를 흔들었다.

그러나 백도경은 냄새만 맡게 하고는 혼자서 홀랑 다 먹어치웠다. 그는 황당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선우는 이거 먹으면 안 돼. 그럼 삼촌한테 내가 또 혼난단 말이야.”

그는 병원에서 백도경이 약속한 것을 떠올리며 원망스러운 눈으로 백도경을 봤다. 백도경은 그런 그를 보며 낄낄거리더니 가방을 가져와 봉투를 잔뜩 꺼내 늘어놨다.

“이건 네가 먹어도 괜찮은 거야. 삼촌이 잔소리를 좀 하겠지만 혼은 안 낼 거야.”

백도경이 화려한 색의 포장 비닐을 뜯자 안에서 달콤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늘 먹는 과일 향기지만 훨씬 달았다. 지난번에 백도경이 그에게 몰래 준 말린 과일이었다.

그는 기뻐서 엉덩이를 들썩이며 빨리 달라고 재촉했다.

“내가 마트에서 동결건조 과일은 종류별로 다 사 왔어. 몰래 주는 거니까 너도 안 먹은 척해야 해. 들키면 삼촌이 가방 검사도 할 거야.”

입을 벌리자 백도경이 동결 건조된 딸기를 넣어줬다. 딸기는 입안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다시 입을 벌렸다. 백도경은 바쁘게 손을 움직여 계속 그의 입에 과일을 집어넣었다.

“박스로 주문하고 싶은데 삼촌한테 들켰다가는 다시는 널 못 만나게 할지도 몰라.”

그는 눈 깜박할 사이에 여섯 봉지를 먹어치우고 손을 씻으러 가거나 청소기를 가지러 가는 백도경의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그녀는 그가 먹어치운 동결건조 과일의 포장지를 꼼꼼하게 봉투에 싸서 가방에 넣고 카우치 주변을 진공청소기로 말끔하게 밀었다.

백도경은 아무런 흔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카우치에 앉아 그에게 올라오라고 손짓했다. 그가 곁에 누워 머리를 기대자 백도경은 그런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내가 최고지?”

의기양양한 그녀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걸 먹게 해주는 건 백도경뿐이었다. 케이크를 처음 맛보게 해준 것도 백도경이었고, 때때로 갓 구운 식빵 덩어리나 통조림도 먹여줬다. 모두 서도운은 절대 주지 않는 것들이었다.

“내가 제일 좋지?”

그녀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서도운이 더 좋았다. 입을 다물고 눈치를 보자 백도경은 밝게 웃으며 그의 콧잔등에 뽀뽀를 했다.

백도경은 휴대폰을 꺼내 여러 동물의 동영상을 그에게 보여줬다. 가끔 휴대폰에서 관심이 가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지만 재잘거리는 백도경의 목소리가 훨씬 듣기 좋았다.

그치지 않을 것 같은 비가 그치고 한순간 하늘이 밝아지며 그들이 뒹굴고 있는 카우치로 볕이 들었다.

그가 베란다 밖을 바라보자 백도경은 카우치에서 일어나 베란다 창을 열었다. 길게 목을 빼고 창밖에서 불어오는 공기를 들이마셨다. 바람이 남은 구름을 거둬가는 게 느껴졌다. 새롭게 불어오는 바람에서는 비 냄새가 나지 않았다.

백도경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더니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선우야, 태풍이 지나갔대. 이제 밖에 나갈 수 있어.”

기분이 좋아져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작은 손이 그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환한 태양 아래에서 커다랗게 입을 벌려 공기를 들이마시며 달리고 싶었다.

등 뒤에서 울리는 웃음소리와 커다랗게 “선우야”하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심장 가득 기쁨을 채워서 그를 기다리는 서도운에게 돌아가고 싶었다.

헝클어진 털을 쓸어내리며 “재미있었어?”라고 다정하게 묻는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즐거운 상상 사이로 백도경이 들고 있던 휴대폰이 진동했다. 그녀는 화면을 두드려 무언가 확인하고는 카우치에서 일어나 가방을 멨다.

“삼촌이 주차장이라고 내려 오래. 오늘 수술이 많아서 교대를 일찍 했나 봐.”

그는 현관으로 향하는 백도경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또 올게, 선우야.”

그녀는 그의 콧잔등에 몇 번이고 입을 맞추고 문밖으로 사라졌다.

* * *

그는 문 앞을 서성이다 집을 한 바퀴 돌며 모든 것을 점검했다. 아무도 없이 홀로 집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거실 입구에 엎드렸다.

현관문 앞에 서도운이 서 있을지도 몰라서 현관문 틈에 코를 박고 서도운의 냄새가 나는지 확인했다. 문 너머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거실 입구에 엎드렸다.

때때로 홀로 있는 시간을 견딜 수 없었다. 잠도 오지 않고 텅 빈 집을 견딜 수 없어 그저 서도운이 빨리 돌아오기만을 바랐다.

점점 불안해졌다. 서도운이 빨리 돌아왔으면 했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그는 꼬리를 흔들며 일어났다. 문이 열리고 기다리는 사람이 나타났다.

“기다렸어?”

환하게 웃으며 묻는 서도운에게 목을 길게 빼고 안아달라고 대답했다. 서도운은 현관 앞에서 무릎을 꿇고 그를 끌어안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 안겨 천천히 체취를 들이마시자 가슴 속에 남아 있던 불안함이 사라졌다. 서도운이 그의 곁에 돌아왔다.

변함없는 일상이 이어졌다. 그는 평소처럼 서도운의 곁을 맴돌며 서도운의 목소리를 듣고 서도운의 손길을 즐겼다.

평소와 다름없었지만 서도운의 체취에서 피곤함이 묻어났다. 양치질을 끝내자 침대로 뛰어가 이불과 베개를 파서 서도운이 편하게 누울 자리를 만들어 빨리 오라고 소리쳤다. 그의 재촉에도 서도운은 느긋하게 집을 치웠다. 침대로 온 서도운은 그가 만든 보금자리가 마음에 안 드는지 베개와 이불을 다시 정리해 누웠다.

그는 그제야 긴장을 풀고 서도운의 옆에 엎드렸다.

“네 눈에도 형이 피곤해 보여? 그래서 빨리 자라고 하는 거야?”

서도운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의 머리를 끌어안는 서도운의 몸짓에 가만히 몸을 숙여 품에 안겼다.

“선우야……, 아프지 마.”

나직한 목소리에는 서글픔이 배어 있었다. 서도운은 그의 머리부터 목덜미까지 천천히 쓰다듬었다.

“오늘 온 애들 중에 운이 좋은 애들도 있었고 운이 나쁜 애들도 있었어……. 운이 나쁜 애들은 떠났고, 운이 좋은 애들은 살았지. ……며칠 지켜봐야 되는 애들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

서도운의 몸에 밴 피곤함은 죽음의 자취였다. 오랫동안 지켜봐 온 동물이 떠나면 서도운이 몸에는 그 흔적이 길게 남아 힘들어했다. 그럴 때면 그는 서도운의 마음이 진정될 때까지 가만히 품에 안겨있었다.

“선우야, 네가 떠나면 형은 어쩌지…….”

가늘게 떨리는 숨소리에서 눈물의 냄새를 맡았다. 일어나 눈물을 핥아주고 싶었지만 그를 쓰다듬는 서도운의 손길이 너무나 여려, 그는 자신의 체온이, 존재가 서도운을 위로해주기를 바랐다.

서도운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서도운의 곁을 지키다 함께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와 서도운의 심장은 울림이 달랐다.

그의 심장은 언제나 서도운의 심장보다 빨리 뛰고 있었다.

그의 심장은 그와 서도운의 시간이 다르다고 말하고 있었다.

지나간 시간이, 살고 있는 시간이, 남겨진 시간이 달랐다.

서도운의 곁에 있어 주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언제나 함께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서 사랑했다.

하루하루, 그의 모든 것을 다해 사랑하고 있었다.

그의 모든 시간을 서도운과 함께 보내고, 그의 모든 것을 서도운에게 주고 싶었다.

서도운의 느리게 뛰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심장이 조금이라도 천천히 뛰기를 바랐다.

하루라도 더 함께 있고 싶었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지만, 서도운과 함께 하는 모든 시간을 행복하고 즐겁게 보내고 싶었다.

그가 그렇게 만들고 싶었다.

행복하기를.

나로 인해 행복하기를.

* * *

“선우야……, 선우야…….”

귓가를 스쳐 가는 바람 사이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달리던 발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내리쬐는 한여름의 태양으로 산산이 형태가 부서져 있었지만, 그는 알아볼 수 있었다.

눈부시게 환한 존재가 심장에 들어와 박혔다.

눈이 아리듯 심장이 아려왔다.

“형…….”

익숙한 남자의 손이 그의 볼을 쓰다듬었다.

“괜찮아?”

정선우는 손을 뻗어 서도운을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끌어당겼다. 익숙한 무게에 안도감이 들었다. 온몸으로 서도운이 느껴졌다.

“형……. 형…….”

품에 안은 서도운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그의 심장으로 전해졌다.

같은 속도로 뛰고 있는 심장의 울림에 눈물이 나왔다.

“나쁜 꿈이라도 꿨어?”

귓가에 속삭이는 서도운의 목소리에 울음이 터졌다.

“……모르겠어. 기억이 안 나.”

아무것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단지 다행이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서도운을 슬프게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기뻤다.

“형 옆에…… 계속 있을게……. 죽을 때까지…… 옆에 있을게.”

서도운은 몸을 일으켜 부드럽게 웃으며 그를 내려다봤다.

“절대 나보다 일찍 죽지 마.”

“응.”

다시 눈물이 쏟아졌다. 울면서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서도운 같은 존재는 처음이었다. 그의 삶에서 두 번 다시 존재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서도운을 잃으면 어머니처럼 고통 속에 죽지 못해 살아가리라는 걸 알았다. 그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나았다.

그러나 서도운도 그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서도운은 강한 사람이라, 그가 곁에 없어도 의연하게 살아갈 거라고 생각했다.

기억나지 않는 꿈은 서도운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보여줬다.

서도운은 소리 없이 슬퍼하는 사람이라 사람들은 그가 울고 있는 줄 몰랐다. 모든 눈물을 쏟아낸 서도운은 모래가 허물어지듯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슬퍼하는 서도운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심장이 부서질 것 같았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 고통만큼 기뻤다.

기뻐서 견딜 수 없었다.

울음에 웃음이 섞여 기묘한 소리가 났다.

서도운이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서도운의 사랑이 그의 목을 조이고 심장을 움켜쥐고 쥐어짰다. 숨이 막힐수록, 심장이 찢겨나갈수록 기쁨으로 미칠 것 같았다. 쾌감으로 숨을 쉴 수가 없어 헐떡였다.

“형, 형…… 사랑해.”

울먹이는 입술 위로 서도운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놀라지 말라는 듯 입술로 입술을 문지르고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기를 몇 번이고 반복하고 나서야 입안으로 혀가 들어왔다.

깊고 부드러운 키스였다.

작은 탄식과 함께 키스가 끝나자 서도운은 손끝으로 그의 눈가를 닦아냈다.

“형……, 형이 죽고 난 다음에 나도 죽어도 돼?”

서도운은 대답 없이 온화하게 웃었다.

“형 없이 살 자신이 없어. 죽지 못해서 사는 건 싫어.”

“그래, 같이 가자.”

기다리던 말이었다.

그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언제나 서도운과 함께 있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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