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16)

2.

“아… 왜 이렇게 피곤하지.”

다음 날도 해가 뜨거웠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무더위를 뚫고 두 사람은 출근을 위해 차에 올랐다.

“많이 힘들어?”

“응. 사실 어떻게 씻고 잤는지도 잘 기억이 안 나. 분명 샤워를 한 것 같긴 한데….”

조수석에 탄 하진이 하품을 하며 툴툴거렸다. 오피스텔을 나온 직후부터 최면에서 벗어난 그는 주차장으로 내려오는 내내 계속 그런 상태였다. 다른 사람들처럼 아침이 힘든 평범한 직장인으로 돌아온 하진에게, 차선오는 말했다.

“환경이 달라져서 그렇지 뭐.”

오래된 동창이자, 같이 사는 좋은 친구답게.

“회사에서도 긴장 많이 할 테니 더 피곤할 거 아냐.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해.”

“그렇긴 하지….”

또다시 나오는 하품을 참던 하진은 어른스러운 차선오의 말에 민망해져서 얼른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래도 선오 네 덕분에 훨씬 편하게 간다. 이렇게 차도 얻어 타고.”

“뭘. 처음부터 그러기로 했잖아.”

“아아, 생각해 보니까 너 아니었으면 지금쯤 한창 지하철에서 죽어갔을 텐데…. 회사랑 거리도 훨씬 가까워져서 진짜 좋아.”

하진은 문득 기름값이라도 자신이 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지난밤에 방값과 생활비를 주기로 한 부분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도저히 생각나지 않아 일단 말을 아끼기로 했다.

나중에 다시 얘기해야지. 대신 그는 아직 잠이 덜 깬 것처럼 비몽사몽한 와중에도 일부러 차선오를 추켜세웠다. 혹시라도 불만을 가진 것처럼 보일까 봐 묻지 않은 얘기까지 덧붙였다.

“참, 침대 있잖아. 엄청 푹신하고 좋던데? 덕분에 한 번도 안 깨고 잤어.”

“씻은 건 모르면서 그건 기억해?”

운전석의 차선오가 눈으로만 웃었다. 언뜻 놀리는 것처럼 미묘한 말투여서, 하진은 슬쩍 옆자리를 흘겨보았다. 사실 침대가 푹신하단 것도 갑자기 떠오른 얘기일 뿐, 실제로 어땠는지 구체적으로 기억나는 건 없었다.

조금 이상하긴 했다. 이렇게까지 곯아떨어질 줄이야. 그러나 하진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체력 약하다고 놀리냐…. 나 심각해. 진짜 무슨 필름이라도 끊긴 것 같단 말이야.”

차선오는 대답이 없었다. 다행히도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이런 이른 아침부터 아주 잘 자고 일어난 것처럼 말짱하다 못해 피부에 보기 좋은 윤기가 흘렀다. 하진은 그걸 멍하니 보다가 중얼거렸다.

“선오 넌 대단하다.”

“뭐가?”

“컨디션 엄청 좋아 보여서. 솔직히 너 다시 봤을 때도 놀랐거든. 원래도 이렇게 잘생겼었나 하고…. 어째 넌 아침에 붓지도 않고 쌩쌩하네. 운동 많이 해? 헬스?”

“그냥 남들 하는 만큼만. 수영도 다니고 가끔 농구나 헬스도 하고.”

“에이. 말만 그러는 거지? 엄청 노력했을 거 아냐. 팀장까지 올라갈 정도니까…. 넌 일하느라 결혼 생각도 없겠다?”

하진이 너스레를 떨면서 부어오른 눈꺼풀을 꾹꾹 눌렀다. 기분 탓인지 몰라도 가뜩이나 마른 몸에 비해 볼살이 있는 편인데, 얼굴까지 퉁퉁 부은 것 같아 창피했다. 게다가 무슨 격렬한 운동이라도 한 것처럼 몸 이곳저곳에 근육통까지 있었다. 차선오처럼 수영도 헬스도 하지 않고 오로지 잠만 잤는데.

“…왜 없을 거라고 생각해?”

그런데 별생각 없이 물었던 질문에 차선오가 되물어왔다. 목소리가 지금까지와 미묘하게 달랐다.

“어? 그야… 그 좋은 집에 혼자 사니까.”

“…….”

“요즘은 결혼 전에 동거도 많이 한다는데, 애인이 있었으면 진작 데려다 놨을 거 아냐.”

하진은 말하고서 아차 싶었다. 혹시 결혼할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헤어진 지 얼마 안 됐을 수도 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너무 격의 없이 대했나 싶어 그가 말을 고치려던 때였다.

“너랑 하잖아. 동거.”

차선오는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을 내놓았다.

“뭐?”

농담이라기엔 말투가 지나치게 진지했다. 이걸 뭐라고 받아쳐야 하지. 하진은 기분이 좀 이상해졌다. 왠지 낯간지러운 기분이 들어 볼을 긁으면서 딴청을 피웠다. 억지로 웃어넘기니 집요한 시선이 느껴졌다.

“하진이 넌, 결혼 생각 있고?”

“나? 나는 꿈도 못 꾸지. 아직 능력이 없잖아.”

“…하고 싶긴 한가 보네.”

아직 이런 대화까지 할 만큼 친한 사이는 아닌데. 하진은 의외로 자신의 사생활에 관심을 보이는 차선오의 반응이 신기했다. 괜히 결혼 얘기 같은 걸 꺼냈나 싶었지만 사실 숨길 이유도 없었다.

“음, 그게 그렇게 되나? 잘 모르겠어. 어차피 애인도 없거든. 당장은 인턴 끝나고 정규직 전환부터 돼야 뭘 생각해 볼 것 같아. 빚도 좀 남았고…. 사실 좀이라기엔 꽤 많긴 한데 뭐, 열심히 하다 보면 언젠가는 다 갚겠지.”

하진은 저도 모르게 꼭 필요하지 않은 개인 사정까지 줄줄이 읊었다. 그 말에 차선오는 뭔가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가볍게 미소 지으며 어깨를 매만졌다.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마.”

“걱정이라기보다는…. 너한테 많이 배워서 성공해야지.”

“그래. 내가 전부 도와줄 테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얘기하고.”

“고마워. 이제 갈까? 아침부터 이런 얘기하니까 잠이 확 깬다.”

다정한 응원에 내심 안심한 하진은 얼른 대화를 끝냈다. 도와준다고는 하지만 괜히 부담을 주고 싶진 않았다. 차선오도 룸미러를 조절하면서 출발하려 했다. 그러다 삐, 삐 하는 경고음이 들려오자 하진에게 말했다.

“하진아. 안전벨트.”

“아… 깜빡했다.”

미안, 미안. 습관처럼 사과하면서 하진이 벨트를 쭉 뽑았다. 몸에 잘 맞게 당겨서 고정한 뒤 상체를 움직이는 순간, 무언가 생소한 느낌이 일었다.

“…흐앗.”

팽팽하게 압박되는 안전벨트에 닿은 오른쪽 가슴이 찌릿하고 당겨왔다. 따끔한 동시에 간질간질한, 낯선 감각이었다.

왜 이러지…?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순간적으로 새어 나간 소리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상해서 하진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급한 대로 손을 넣어 안전벨트를 살짝 떼어냈다. 흐, 아흣…. 그러나 벨트가 다시 스치는 순간 더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얼굴이 확 뜨거워졌다.

“왜 그래?”

운전대를 잡은 차선오가 물었다.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뭐에 물렸는지 따끔거려서….”

“음. 사실 아까부터 말할까 말까 했는데.”

열심히 변명하는 하진을 바라보던 차선오가 넌지시 턱짓했다.

“거기 좀 부어 보이더라.”

“…그, 그래?”

“응. 아픈 거 아니야? 진짜 괜찮아?”

“어어…! 진짜 괜찮아. 이, 이러다 늦겠다. 얼른 가자.”

차가 움직였다. 읏…! 하진이 얼른 아랫입술을 깨물어 신음을 참았다. 괜찮다고는 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신경 쓰였다. 그의 말대로 정말 가슴이, 아니 정확히는 젖꼭지가 부어오른 것처럼 보여서 그랬다. 평소처럼 와이셔츠 안에 티셔츠를 받쳐 입었는데도 눈에 띄는 듯했다.

뭐 때문이지. 차선오의 눈에 보일 정도라니…. 하진은 회사에 도착할 때까지 내내 다른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얼굴엔 근심 걱정이 가득했다.

*

“하진 씨, 여기에요.”

점심시간이었다. 구내식당은 꽤 붐볐다. 하진은 식판을 들고 팀원들이 모인 자리로 가서 앉았다.

출근하고부터 쭉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일도 일이지만 그보다 한번 의식한 부위가 계속 신경 쓰여서 무엇 하나 제대로 집중할 수 없었다. 결국 가벼운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음에도 다행히 유야무야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어제 팀 회식 때 다들 진탕 술을 마신 게 큰 도움이 됐다.

얼른 밥 먹고 먼저 일어나야지. 하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허겁지겁 숟가락을 들었다.

“안 더워요, 하진 씨?”

“네?”

그때 옆자리에 앉은 표 차장이 넌지시 말을 걸었다.

“출근하고부터 쭉 봤는데 하루 종일 겉옷을 안 벗길래. 밥도 그러고 먹으려고요?”

그 말에 한창 숙취 얘기에 열을 올리던 이들이 전부 하진의 옷차림을 보며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러고 보니 더워 보인다는 둥, 옷이 커서 묻을 것 같다는 둥, 밥 먹을 땐 좀 편하게 먹으라는 둥.

“아, 괜찮습니다…! 제가 추위를 좀 타서요.”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지만 하진은 대충 둘러댔다. 그리고 빌려 입은 정장 재킷을 더 꼼꼼하게 여몄다. 벗을 수 없는 이유가 있었으나 그 이유를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가슴이 꼭 뭐에 물린 것처럼 부어서 그렇다고 하면, 즉시 모두가 나서서 한번 보자고 할 게 뻔하니까. 상상만 해도 부끄러웠다. 큰일 날 일이었다.

“저 신경 쓰지 마시고 얼른 식사 맛있게들 하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벗지 말아야지. 하진은 다시 강조하면서 대각선 자리에 앉은 차선오를 흘끗 쳐다보았다. 재킷을 빌려준 당사자는 별말 없이 조용히 밥을 먹었다. 그러나 차선오를 제외한 모두가 추위를 탄다는 하진의 말에 또 저들끼리 왁자지껄해졌다.

“하진 씨 진짜 나랑 운동 다녀야겠다.”

“그 얘기 또 시작이야?”

“이 초여름에 혼자 추위 타는 것도 다 몸이 허해서라니까요. 내가 생각해 봤는데 하진 씨는 딱 그거야. 학교에서 체육 시간만 되면 보건실로 도망가거나 그늘에 조용히 앉아 있는 스타일.”

“어, 그런 애들 꼭 하나씩 있었어.”

“그죠? 남잔데 피부도 새하얗잖아요. 속눈썹도 길고.”

하진은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였다. 사실 끼어들 만한 타이밍도 없었다.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동조하기 바빠 보였다.

“진짜 눈앞에 그려진다. 하진 씨 지금도 어려 보여서 교복만 입으면 딱 그건데요? 병약한 미소년.”

“솔직히 하진 씨 처음 왔을 때 기껏 해봐야 20대 초중반인 줄 알았잖아요. 수염 자국도 하나 없고…. 이 험한 세상에 어떻게 살아가려나.”

“운동 말고 호신술 같은 걸 배워야 하는 거 아니에요?”

반쯤은 놀리는 분위기가 되어버리자 하진도 결국 어색하게 웃어버렸다. 어차피 아니라고 말해봤자 제대로 듣는 이 하나 없을 듯했다.

그는 아예 변명을 포기하곤 장단을 맞췄다. 이 와중에도 은근히 간질거리는 유두 때문에 뻣뻣하게 숟가락을 든 채로, 운동을 권유하는 동료 팀원에게 웃으며 이것저것 얘기했다. 이래 봬도 체육 시간에 인기 많았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하고, 그래도 근육량이나 체력은 타고나는 것 같다고 툴툴거리기도 했다.

숙취로 가라앉았던 게 언제냐는 듯 분위기가 더 들떴다. 기분이 좋아진 하진이 아예 대놓고 앓는 척을 했더니 곧 반찬으로 나온 떡갈비가 그의 식판에 산처럼 쌓이기에 이르렀다.

“헉, 아무리 그래도 이 많은 걸 제가 어떻게 다 먹어요.”

“어허. 박하진 인턴. 상사가 주면 감사합니다, 하고 먹는 거 몰라요?”

“앗, 그럼…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하진이 얼른 고개를 숙이자 또 난리들이었다. 역시 다들 재밌고 좋으신 분들이라고, 하진은 재차 생각했다. 사실 제대로 된 회사에 다니는 게 처음이라 이렇게 동료들과 농담 따먹기나 하는 평범한 점심시간이 즐겁기만 했다.

하진은 지난 20대의 대부분을 빚을 갚는 데에 허비했다. 평생 갈 친구라고 생각했던 이에게 보증을 섰다가 바보같이 속아 억울하게 불어난 빚이 한두 푼이 아니었다. 손 벌릴 부모도 없고 형제나 가까운 친인척조차 없는 그는 제 실수를 온전히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온갖 잡일을 하며 돈을 갚았다. 실은 몸이 급격히 약해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건강을 버려가며 겨우 숨통이 트이나 싶었을 땐 몇 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단 1%의 가능성을 믿고 지원한 이 회사에서 차선오를 만나 합격의 기회를 얻은 건, 그야말로 일생일대의 행운이었다. 비록 3개월짜리 계약직 인턴이긴 해도, 하진은 그게 그간 고생해온 시간에 대한 보상 같았다.

어쩌면 차선오를 다시 만난 것도 그 행운의 하나겠지.

“아! 그러고 보니까 차 팀장님이 잘 아시겠네. 두 분 동창이었다면서요.”

“맞다. 자꾸 까먹네.”

대화 주제가 바뀌자 이번엔 차선오에게 온 시선이 쏠렸다. 내내 무심하게 밥만 먹던 차선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진짜 적응이 안 돼요. 어떻게 두 분이 친구 사이지? 아무리 봐도 팀장님이 훨씬….”

“어어, 거기까지만 해요. 오늘은 당사자가 듣고 계시잖아.”

“뭐가요. 훨씬 남자답게 잘생겼다, 그 말인데.”

“팀장님. 어땠어요? 하진 씨 학창 시절.”

하진도 그를 보았다. 차선오가 먼저 자신을 살펴주는 것과는 별개로 괜히 동창이라는 이유로 일개 인턴인 저와 엮이게 하는 게 좀 민망하고 미안했다. 그래도 분위기에 휩쓸려 어쩔 수 없었다. 사실 하진도 좀 궁금하긴 했다. 그가 자신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기에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는 것인지.

“제가 기억하는 박하진 씨는.”

부풀어 오른 기대 속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차선오는 여전히 반쯤 웃고 있는 하진을 보면서 느릿하게 말했다.

“그때도 인기 많았습니다. 지금처럼.”

그의 시선이 하진의 식판에 가득 쌓인 떡갈비로 향했다. 팀원들이 전부 장난처럼 양보한 마음이었으나 어쩐지 차선오는 그걸 불쾌하게 여기는 듯했다. 하진만이 그걸 눈치채고 천천히 미소를 거두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차선오의 발언에 또 소란을 떨었다.

“와, 진짜요? 하진 씨 인기 많았구나?”

“근데 전 그럴 것 같았어요. 원래 하진 씨처럼 좀 귀엽고 순한 스타일이 남녀불문 사랑받거든.”

“다른 팀에도 소문내야겠다. 귀염둥이 인턴 들어왔다고 자랑해야지.”

“안 그래도 아까 누가 물어보던데요. 거기 신입, 애인 있냐고.”

흐름이 점점 이상해졌다. 아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왁자지껄한 분위기였지만, 정작 당사자인 하진은 왠지 모르게 차선오의 눈치를 보게 됐다. 어쩐지 그의 말이 신경 쓰였다.

인기가 많았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건가? 그러는 차선오는 어땠지….

아무리 생각해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사실 그 시절의 두 사람은 친구라고 하기도 모호한, 그저 같은 공간을 나눠 썼던 사이에 불과했다. 사계절을 한 교실에서 같이 보내면서도 대화 몇 번 해본 적 없는, 데면데면한 사이.

하진이 생각에 잠긴 사이, 옆에서는 소개팅 생각 없냐는 말부터 하진 씨랑 닮은 여자 형제 있으면 정말 미인이겠다는 말까지 별별 소리가 다 나오고 있었다.

“참.”

뒤늦게 정신 차린 그가 손사래를 치려는데, 어느새 수저를 내려놓은 차선오가 나직이 말했다.

“하진아. 너 나한테 할 말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갑자기 바뀐 말투에 순간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점심에 따로 얘기하자고 했잖아. 둘이서만.”

차선오는 나른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턱을 괴고 있었다. 하진이 인기 많았다 어쨌다 하는 소리가 다 민망할 정도로, 깎아 놓은 조각처럼 잘생긴 그의 이목구비가 훨씬 눈에 띄었다.

…꿰뚫리는 느낌. 하진은 당황해서 말을 더듬고 말았다.

“어? 아, 아니…. 네?”

“박하진 씨랑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천천히들 먹고 올라오세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차선오가 먹다 만 식판을 들고 일어났다. 하진은 눈치를 살폈다.

일어나지 않고 뭐하냐는 듯한 무언의 눈빛에 더 망설일 수 없었다. 식판에 쌓인 떡갈비 탑이 툭, 무너졌다. 그는 의아해하는 팀원들에게 더듬더듬 변명을 늘어놓다가 서둘러 차선오를 따라나섰다.

*

“들어와.”

그대로 팀장실로 직행한 차선오가 말했다. 모두 구내식당에 있으니 당연하게도 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하진은 아직도 그가 왜 갑자기 저를 불러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언뜻 탄탄한 뒷모습이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 저게 있지.”

하진이 쭈뼛대며 팀장실에 들어서자 차선오가 귀찮다는 듯 중얼거렸다. 안에 설치된 CCTV를 손쉽게 꺼버리고 밖에서 보이지 않도록 블라인드까지 전부 내리는 동안, 하진은 그새 눈치 보던 것도 잊고 팀장실 내부를 구경하기 바빴다. 꼭 드라마에 나오는 사무실 같아 신기했다.

“와. 여기 너 혼자 쓰는 거야? 생각보다 넓다.”

“팔자 좋게 구경이나 하고. 상황 파악이 안 되지, 지금?”

“…어…?”

“가까이 와.”

차선오는 어느새 자리에 앉아 있었다. 부르는 목소리가 확실히 아침과 달랐다. 아니, 아침까지 갈 것도 없이 식사할 때와도 딴판이었다. 어디로 봐도 명령조였다.

널찍한 업무 테이블과 나란히 붙어 있는 큼직한 모니터 두 대, 복잡해 보이는 온갖 서류들까지. 그 모든 풍경이 차선오와 한 몸처럼 잘 어우러졌다. 하진은 새삼 그와 자신의 차이를 깨달을 수 있었다.

회사에서의 차선오는 분명 하늘 높은 상사였다. 그걸 알지만, 갑자기 거리감이 느껴지니 조금은 서운하기도 했다. 익히 봐왔던 다정하고 친근한 모습이 온데간데없어 더 그런 지도 몰랐다.

“뭐 때문에 그래?”

“돌아서 내 앞까지 와. 옷 벗고.”

“…옷?”

영문을 모르는 하진이 멍하니 물었다. 겁에 질린 다리가 멋대로 움직였다. 우선은 들은 대로 테이블 앞이 아니라 그 안쪽, 차선오가 앉은 의자 바로 옆까지 갔다. 그러고 나니 비로소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아, 옷을 벗으라는 게….

아무래도 빌려준 정장 재킷을 벗으란 의미 같았다. 출근하자마자 부은 유두 때문에 난처해하는 하진에게 차선오가 선뜻 건넨 그 재킷은, 갑작스러운 미팅이나 출장을 대비해 가져다 놓은 여벌 옷이라고 했다.

“이거 돌려줘야 해서 그렇구나.”

“…….”

“미안. 혹시… 다른 분들이 옷 가지고 계속 얘기해서 기분 나빴어?”

차선오는 대답이 없었다. 하진은 가슴을 보이는 게 부끄러워 조금 망설였다. 하지만 이미 들킨 상대이니 괜찮겠거니 싶었다. 다른 회사 사람들도 아니고 친절하게 옷까지 빌려준 선오니까.

“읏….”

그가 천천히 재킷을 벗었다. 다시 와이셔츠 차림이 되자 확실히 툭 불거진 유두의 모양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 뭐라도 걸쳐 감추지 않았으면 누구라도 이상하게 볼 법한 모양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편의점에서 밴드라도 사서 붙일걸. 원래는 점심을 얼른 먹고 다녀올 생각이었지만, 어쩌면 아예 식사를 포기하는 게 나았을지도 몰랐다. 하진은 뒤늦게 후회했다.

“아침보다 더 커졌네.”

“…그래 보여? 어, 어떡하지.”

무덤덤하게 말한 차선오가 아직 하진이 쥐고 있는 자신의 옷을 빼앗듯 당겼다. 얼떨결에 방심한 하진의 몸도 그쪽으로 덩달아 끌려갔다.

“아….”

정신을 차리고 보니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다시 물러나려는 순간 단단한 손이 허리 뒤를 받치더니, 이내 엉덩이로 내려갔다. 하체가 불쑥 끌려갔다. 선 채로 반쯤 안긴 듯한 자세가 당황스러웠지만 하진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저, 저기 선오야.”

길게 뻗은 손가락이 하진의 엉덩이 사이를 스치듯 훑었다. 하진은 그 느낌에 몸을 움츠렸다. 간지러워….

“하진아.”

“으, 응?”

“내일부턴 나랑 여기서 도시락 먹을까. 아니면 집 가까우니까 그냥 집에 가서 먹고 오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어때?”

부푼 유두가 옷에 쓸리면서 얼얼했다. 갑자기 그걸 손으로 만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직접 손가락으로 꼬집고 비틀어 상태가 어떤지 확인하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아니면, 무언가 다른 이유 때문에라도 당장 거기에 손을 대고 싶었다.

“흐, 응… 아….”

“니가 계속 오늘처럼 굴면 나도 못 참을까 봐 그래.”

“서, 선오야. 나 잠깐만… 어디 좀, 가야 할 것 같은데….”

“왜. 뒤 쑤시고 오려고?”

뭐…? 하진의 눈이 까맣게 흐려졌다.

“혼자 하려면 뻑뻑하지 않겠어?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안에다 싸고 마개라도 꽂아줄걸.”

“…….”

“하긴. 어제 몇 번 안 박았는데도 금방 느끼긴 하더라. 아무래도 너 좆 받는 데 타고난 것 같아. 그래서 내가 더 화가 나.”

“…….”

점점 현실의 모든 것이 지워졌다. 하진은 곧 무의식 속의 목소리에만 사로잡혔다.

“그게 아니라 가슴… 만지려고.”

젖꼭지를 만지고 꼬집어 키워야 한다. 틈이 날 때마다. 선오가 준 선물을 하루라도 빨리 받기 위해서.

“선오야, 나 좀 풀어줘. 그, 금방 다녀올게. 얼른 그것만 만지고….”

겁에 질린 하진이 울먹이며 벗어나려 했으나 그는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사실 차선오는 별로 힘을 주고 있지도 않았다. 그저 형식상 가두듯 둔부를 붙잡고 있을 뿐. 하지만 그 가벼운 속박에도 하진의 몸은 좀처럼 빠져나갈 방도를 찾지 못했다. 그게 이상하다는 자각도 못 했다.

“여기서 해.”

“그, 그건….”

“괜찮아. 어차피 나한테 보여주려고 젖으로 자위하는 거잖아. 뭐 문제 있어?”

“…….”

문제는… 없었다. 전부 맞는 말이었다. 마음이 바뀐 하진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빠져나가려던 걸 멈추고 허겁지겁 셔츠 단추를 끌렀다. 마음이 급해 손이 떨렸다. 몇 번인가 헛손질하자 차선오가 직접 두어 개쯤 풀어주기도 했다. 하진은 그게 고마워 울먹이기까지 했다.

셔츠가 헤프게 벌어지고 안에 입은 티셔츠가 나타났다. 그건 이제 하진에게도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이나 다름없었다.

“흣….”

하진은 조금의 고민도 없이 티셔츠를 가슴 위까지 끌어 올렸다. 차선오가 조금 웃었다.

“우리 하진이, 하루 만에 걸레 다 됐네.”

“미, 미안… 얼른 하고 싶어서….”

“계속 만지고 싶었어?”

“응. 자위하고 싶어서 못 참겠어, 흐으, 응….”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진은 아예 티셔츠 끝을 둘둘 말아 올려 입에 물었다. 응당 그래야 한다는 듯, 망설임은 없었다.

그 아래로 터질 것처럼 탱탱해진, 음란하기 짝이 없는 유두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연분홍색이었던 어제에 비해 색도 약간 진해져 있었다.

“혼자 젖보지를 왜 이렇게 빳빳하게 세웠을까. 만져주지도 않았는데.”

차선오는 허락 대신 혼잣말을 했다.

“좆 달린 것들이 돌아가면서 귀여워해 주는 게 그렇게 좋았어, 하진아?”

질문은 들리지 않았다. 하진은 멋대로 간지럽고 기분 좋은 부위를 만지려고 했다.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일단은 몸이 급했다. 허리가 멋대로 튕겨 올랐다. 재갈처럼 문 티셔츠 사이로 애타는 신음이 샜다.

“흐웁… 으, 응….”

“하진아.”

참지 못한 그가 손을 올리려는 순간, 차선오가 부드럽게 제안했다.

“그러지 말고 우리 몸 검사부터 할까.”

그는 넌지시 중얼거리며 넥타이를 풀었다. 그러고는 팔을 뒤로 모으라고 명령했다. 하진은 연신 움찔거리면서도 순순히 그렇게 했다. 생각을 거치기도 전에 몸이 절로 움직였다.

“흐으… 으….”

맞붙인 손목이 가볍게 묶이는 동안에도 하진은 계속해서 자신의 티셔츠 자락을 물고 있었다. 다 드러난 상체에는 얼룩덜룩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발긋한 유두는 팽팽하게 서 있었다. 입가에서 삼키지 못한 침이 넘쳐 턱과 그 아래까지 뚝뚝 흘러내렸다.

“아까운 걸 다 흘리네.”

차선오가 결박을 마치기 무섭게 하진은 스스로 손대지 못하는 유두를 어디에라도 비비려 안달이었다. 불가능해지니 오히려 더 간절해진 모양이었다.

“서 있기 힘들지. 앉아서 할까?”

차선오는 그런 하진의 허리를 뒤에서부터 껴안듯 감싸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살갗의 부드러운 감촉만으로도 아래에 열이 올랐다. 사실 하진에게서 풍겨오는 체향만으로도 충분히 발기했으나, 지금은 욕구를 해결하는 게 우선이 아니었다.

“회사에선 그냥 놔두려고 했어, 하진아. 난 이럴 마음 없었다고.”

“응, 아흐, 읏….”

아무한테나 헤프게 웃고 사랑받는 것에 익숙한 하진의 모습이, 오래전 과거의 한순간을 자극했다. 그걸 참을 수가 없었다.

“벌받는다고 생각해.”

차선오는 자신의 위에 하진을 앉혔다. 널찍한 사무용 의자 위에 같은 방향으로 겹쳐 앉게 된 하진은, 양다리가 공중으로 붕 뜨자 놀라 헐떡거리며 발버둥 치려고 했다. 그러나 뒤에서 나온 손이 그의 몸을 눌러 완전히 기대도록 하고 바지춤까지 빠르게 풀자,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뻣뻣하게 몸을 굳혔다.

“팀원들이 지금 모습 보면 뭐라고 하려나. 좀 궁금하긴 하네.”

“아흐… 읏.”

“쯧, 이런 속옷은 다 버려야겠다.”

평범한 회색 브리프를 발견한 차선오가 혀를 찼다. 어쩔 수 없이 전부 벗기는 게 나을 듯했다.

그는 느긋하게 하진의 바지와 속옷을 끌어 내리고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이어 구두까지 자연스레 바닥으로 떨어지자 하진은 고작 티셔츠에 흰 양말만 걸친 부끄러운 차림이 되었다. 최면에 걸렸어도 회사에서 맨살을 드러내는 데 거부감이 드는지 자꾸만 몸을 움츠렸다.

“가만히 있어야지.”

그는 몸을 비비적거리는 하진을 통제하기 위해 아예 양 허벅지를 팔걸이에 걸쳐 스스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M자 형태로 넓게 벌어진 다리 사이에 드러난 하진의 성기는 이미 반쯤 부푼 채였다.

불과 10분 전까지만 해도 스스럼없이 웃고 떠들던 평범한 직장인이, 순식간에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동성의 친구이자 상사의 허벅지 위에 올라탄 것으로도 모자라, 다리를 활짝 벌린 채 딱딱하게 솟아오른 젖꼭지와 성기를 다 드러낸 모습이 무척 음탕해 보였다. 신체 여기저기에 손자국이 나 있어 한층 자극적으로 비칠 터였다.

그러나 차선오는 그것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말 잘 듣고 순종적인 박하진은 좋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 데서나 질질 흘리고 다니길 바란 건 아니었으니까. 누군가 말만 걸었다 하면 곧잘 웃고 친근하게 대화하는 모습이 불쾌했다. 불쾌하다 못해, 과거의 괴로운 부분을 자극했다.

너는 예전에도 그랬는데 하나도 바뀐 게 없어.

하지만 모든 게 미숙했던 학생 때와 지금은 달랐다. 지금의 차선오에게는 불만스러운 부분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바꿀 만한 능력이 있었다. 옷은 옷장에, 책은 책꽂이에 두는 게 지극히 정상인 것처럼. 차선오의 손아귀 안에 있는 박하진은 당연히 차선오에게만 헤프게 굴어야 하니까.

“밥 먹을 때부터 이렇게 세우고 있었어?”

부푼 성기를 내려다보던 그가 한 손으로 하진의 목을 콱 움켜쥐면서 낮게 중얼거렸다.

“발정 난 티 내는 게 습관이 되면 곤란한데. 말로 해야 알아? 다 보는 데서 박히고 싶은 건 아니잖아.”

손아귀에 별로 힘을 주지도 않았는데, 하진은 즉시 숨이 막혀 캑캑대면서 물고 있던 티셔츠를 놓쳐버렸다. 끝이 젖은 흰 티셔츠 자락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나 뒤에서 껴안듯 상체를 고정하고 있는 두 손 때문에 여전히 하진은 허리와 배를 그대로 다 드러낸 채였다.

“모, 몰라… 읏, 제발, 흐아, 앗….”

“모르긴. 직접 말해줘?”

차선오는 불긋해진 그의 귀를 혀로 빨면서 말했다. 질척한 소리가 머릿속을 울리자 하진이 허리를 발발 떨었다. 묶인 채로 몸 사이에 갇힌 두 손은 꼭 맞잡은 상태였다.

“너 아까 누가 좆 넣어준다고 하면 감사합니다, 하고 다리 벌릴 것처럼 굴었어. 알아? 여기만 살짝 빨아주면….”

그때, 차선오의 손끝이 도톰한 가슴을 무자비하게 튕겼다.

“으으응…!”

“그대로 정신 못 차리고 자지까지 받을 것 같았다고.”

한 번의 손길에도 하진은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좋아했다. 내내 참고 있던 게 터진 듯한 모양새였다. 여기로 이렇게까지 금방 쾌감을 느낄 줄은 몰랐는데. 약이 잘 받는 몸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차선오는 지난밤 하진의 방에서 봤던 그의 소지품 중에 꽤 여러 종류의 영양제가 있던 걸 떠올렸다.

기특하다고 해야 하나. 잠시 생각하던 그가 하진의 살집 없는 양 가슴을 세게 쥐고, 손자국이 날 정도로 거칠게 주무르기 시작했다.

“아흐으, 응… 조, 좋아…. 거기 키워야 하는… 으, 응!”

“혼나는 와중에도 이렇게 느끼고. 나중엔 일하다가 갑자기 뒤 쑤시고 그러면 어떡하지.”

하진은 자신을 겁주는 말도 알아듣지 못했다. 밋밋한 가슴을 꽉 쥐고 문지르는 감각이, 암시와 약에 굴복된 하진에게는 참을 수 없는 자극이었다. 한층 꼿꼿해진 유두는 직접 무언가 닿지 않고 그저 좌우로 움직여지는 것만으로도 쾌감을 주었다.

“난 너 나눠 먹을 생각 없는데.”

침까지 흘리며 느끼는 하진을 붙잡아 놓은 차선오는 화풀이하듯 통통한 젖꼭지를 세게 짓이겼다.

“평생 내 좆만 받아야 해, 하진아. 알아들어?”

그러자 하진은 감전된 사람처럼 몸을 떨며 허리를 비벼댔다.

“하아, 아… 아으으응….”

“얘기만 들어도 구멍이 간지러운가 봐.”

차선오가 작게 웃었다. 그는 언제 거칠게 대했냐는 듯, 한 차례 짧은 절정에 올라 축 늘어진 하진의 몸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여기저기가 뜨거워서 손바닥에 쫀득하게 달라붙었다. 손은 팽팽하게 발기한 성기를 건드리지도 않고, 그 아래에 굳게 닫힌 구멍으로 자연스럽게 미끄러졌다.

“빡빡하네.”

물기 없이 꽉 다물린 겉 주름을 살살 만져 보던 차선오가 다시 그 손을 올렸다. 그리고 헤벌어진 하진의 입술 사이로 밀어 넣었다.

“빨아봐.”

“…웁….”

“응. 끝까지 다 젖게. 제대로 적셔야 하진이 너도 기분 좋지.”

손가락 세 개를 무는 것이 버거운지 하진은 헛구역질을 참으면서도 입술을 오므리고 열심히 빨아댔다. 츕, 츄웃, 으움…. 이미 침이 흥건했던 턱이 다시 젖을 만큼 정성스레 핥는 모습에, 차선오는 상을 내리듯 유두를 튕겨주었다.

계속 자극당한 부위가 먹음직스러운 열매처럼 선홍색을 띠었다. 조금만 더 건드리면 연약한 살갗이 벗겨질 듯 보였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진 역시 계속해달라는 듯 허리를 꺾고 가슴을 잔뜩 내밀었다.

금방 충분히 젖은 손가락을 떼자 혀가 딸려 나왔다. 차선오는 소리 없이 웃으면서 그대로 축축해진 끝부분을 구멍에 짓이기듯 비볐다.

“검사할 거야. 어젯밤 이후로 뭐 넣은 적 있는지.”

“하으, 아… 안 넣었, 는데에….”

건조한 주름 사이사이가 젖어 들었다. 하진은 잠깐 닿았는데도 배 속이 꽉 조여드는 것처럼 간지러워서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온몸을 늘어뜨렸다. 견고한 의자가 삐걱거렸다. 차선오는 젖은 검지를 구멍에 손톱이 박힐 만큼 아주 살짝만 넣은 채로, 겉면을 둥글게 훑었다. 문지르는 자리마다 물기가 발렸다.

“그럼. 하지 말까?”

“…흐…!”

검사는 사실 말도 안 되는 핑계였지만 무리 없이 먹혀들었다. 겁주듯이 긁으며 빼내자 하진이 참았던 숨을 터뜨렸다. 움찔거리며 조여드는 입구의 반응에 대답을 예상할 수 있었다. 의자 팔걸이에 고정된 허벅지가 잘게 떨렸다.

“아니, 야… 흐으으….”

“검사는 하기 싫은데 쑤셔줬으면 좋겠어?”

“으응. 쑤, 쑤셔줘… 읏.”

고분고분하게 원하는 대로 대답하는 하진을 지켜보고 있으려니 기분이 서서히 풀렸다. 차선오는 하진에 한해서만 자꾸 너그러워지는 자신이 조금 걱정스러웠다. 그는 뺐던 손가락 하나를 다시 입구에 대고 한 번에 끝까지 박아 넣었다.

“하, 읏… 아앙…!”

속살이 오물거리면서 손가락을 빠르게 조였다. 그 틈을 비집고 나머지 둘을 더 쑤셔 박자, 하진의 숨소리가 한층 가빠졌다. 무너질 듯 온몸의 힘을 완전히 푼 채로 그는 차선오가 아래를 찔러주는 대로 들썩거리며 자극을 느끼기 바빴다.

흐릿한 눈이 감기고 달뜬 얼굴에 땀이 맺혔다. 간질거린다는 말로는 모자랐다. 마치 배 속을 헤집는 듯한 느낌이 어딘가 부족했다. 하진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앞뒤로 흔들었다. 더 크고, 굵고, 뜨거운 것이 강하게 흔들어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자꾸 머릿속에 떠올랐다. 분명… 이것보다 더 좋은 게 있는데.

아래에선 금세 찌꺽거리는 소리가 났다. 하진은 스스로 다리를 더 벌렸다. 발가락 끝이 움츠러든 채로 공중에서 흔들거렸다.

“아흐, 으…. 아, 아앙, 흐…!”

어느새 이곳이 회사라는 것도, 지금이 잠깐의 점심시간이라는 것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세 개의 손가락이 안으로 찔러 박힐 때 유독 기분 좋은 부위가 있어 그저 거기에 더 닿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허리가 절로 움직이고 입에선 가쁜 신음이 자꾸만 새어 나갔다.

“좁은 건 그대론데 왜 이렇게 잘 씹을까.”

“더 잘 씹을, 수 있어… 여기도, 읏, 만져줘, 응? 읏, 흐으.”

끼익, 끼익. 의자가 점점 격렬하게 흔들렸다. 하진은 가슴을 만져달라고 우는소리를 내며 빌었다. 거울이라도 있으면 좋았을 텐데. 차선오는 흥분으로 뜨거워진 하진의 몸을 제대로 보지 못해 약간 아쉬웠다.

이제 손바닥이 엉덩이에 닿을 정도로 손가락이 깊게 들어가 있었다. 헤집으려고 작정한 것처럼 손끝에 힘을 주어 휘저으니 하진은 아파하기는커녕 더 좋아했다. 따끈하게 적셔진 채로 쫀득하게 달라붙는 내벽이 그 증거였다. 차선오는 계속해서 손을 털 듯이 하진의 구멍을 쑤시고 자극했다.

질투로 시작한 행위는 어느샌가 그의 몸이 얼마나 예민하고 쉽게 무너지는지 확인하는 계기로 변해가고 있었다. 깊은 만족감이 차올랐다. 차선오는 손을 빼지 않은 그대로 하진의 다리를 하나씩 내리고 몸을 돌려 앉혔다.

“우읏… 으, 응! 아…!”

삽입된 채 몸이 돌아가는 건 또 다른 느낌인지, 약간 벌름거리며 풀어졌던 구멍이 크게 움찔하더니 꽉 조여들었다. 뜨거운 숨이 뱉어졌다. 이 상태로 키스할까. 막상 시작하고 나면 입술이 엉망으로 부을지도 모르지만 당장 혀를 빨아주고 싶으니까. 전부 적셔서 범해버리고 싶으니까. 차선오가 헐떡이는 하진의 입술을 보면서 생각할 때였다.

똑똑. 갑자기 누군가 팀장실의 문을 두드렸다.

“차 팀장님.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건 최 대리의 목소리였다.

“…….”

그새 점심시간이 끝난 모양이었다. 순간 하진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여전히 정신은 성욕에 지배된 채였지만, 무의식이 최 대리의 목소리를 감지한 탓이었다. 최 대리는 하진의 옆자리여서 업무 도중에 자주 대화를 나눴고 그새 꽤 친해진 상사이기도 했다.

똑똑똑. 다시 재촉하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겁먹은 하진이 참지 못하고 어깨를 확 움츠렸다.

“팀장님. 저 최 대리입니다. 안에 안 계십니까?”

“…….”

차선오는 자신의 품에 더 깊이 안겨든 하진을 어렵지 않게 지탱하면서 잠깐 고민했다.

블라인드를 내리고 CCTV를 꺼둔 것까지는 확실했다. 그러나 문을 잠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워낙 하진을 벌주고 싶어 마음이 급했던 게 이유였다. 잠시 어쩔까 하다가 곧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무슨 일입니까.”

그가 아무렇지 않게 목소리를 냈다.

“아, 계셨네요! 팀장님 이름으로 퀵이 왔는데 올라오는 길에 제가 대신 받았습니다. 서류가 아니고 박스라서… 괜찮으시면 지금 드리겠습니다.”

아아, 그게 벌써 온 건가. 퀵이라는 말에 차선오는 짧게 웃었다. 계획을 시행해도 되겠다는 판단이 섰다.

“최 대리 지금 혼자 있습니까?”

“예? 예. 다른 분들은 카페 들렀다 오신답니다. 팀장님이랑 하진 씨 것도 같이 사 온다고 했고요.”

우연일 뿐이지만 모든 상황이 잘 맞아떨어졌다. 여유를 되찾은 그가 잔뜩 긴장해 움츠러든 하진의 구멍을 다시금 깊게 쑤셔주면서 조용히 말했다.

“들어와요.”

“흣, 서, 선오야…?”

하진이 급히 그를 불렀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달칵. 지체없이 문이 열리고, 문틈으로 기다란 인영이 나타났다.

“대답이 없으시길래 외출하신 줄 알았습니다. 하진 씨도 없길래 혹시 같이 나가셨나 생각… 아.”

활기차게 얘기하며 들어오려던 최 대리는 순간 자신 앞에 펼쳐진 광경에 놀라 굳어버렸다.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그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바닥에 난잡하게 떨어진 하진의 속옷과 바지, 셔츠가 가장 먼저 보였다. 그 흔적을 따라가니 의자에 앉은 차선오 팀장의 태연한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위에 올라타 있는 사람은… 분명 옆자리의 인턴이었다. 박하진 인턴. 남자치고 무척이나 예쁘장하게 생긴, 차선오 팀장의 오랜 동창.

뒤로 묶인 손목과 거의 발가벗은 차림을 차치하고서라도 가히 놀라운 광경이었다. 흰 엉덩이 사이로 무언가 삽입된 게 보였다. 각도로 보아선 차 팀장의 손가락이었고, 그건 정체 모를 액체로 번들거리기까지 했다.

“팀장님…? 바, 박하진 씨?”

익숙한 팀장실의 모습이 다르게 보였다. 눈으로 보면서도 도무지 믿기 힘든 상황이었다. 자그마한 박스를 들고 있던 최 대리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두, 두 분 지금 뭐 하시는….”

“최 대리.”

차선오가 사색이 된 그를 낮게 불렀다. 순간 최 대리의 혼란스러운 표정이 지워지고 멀어지던 발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박하진 씨랑 면담 중이었는데 잠깐은 괜찮습니다.”

“아…. 면담을….”

“들어와요. 문은 잠그고.”

“…네. 알겠습니다.”

과정은 짧았다. 최 대리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최 대리의 몸이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순순히 팀장실 안으로 들어와 문까지 잠근 최 대리는 박스를 든 채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얼핏 보면 몸이 겹쳐져 하나의 덩어리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최면에 걸린 최 대리에게는 저 앞에 보이는 의자에 앉은 이가 한 명인지 두 명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대낮에 회사에서 두 남자가 유사 성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도, 뒷구멍에 손가락이 세 개나 쑤셔 박힌 채 헐떡이고 있는 이가 며칠 전부터 제 옆자리에서 근무하는 귀여운 신입 인턴 박하진이라는 것도, 상관없었다. 그는 이제 누군가의 일방적인 목소리에만 움직이는 무의식의 상태로 빠져들었다.

“그건 내려놔요. 여기.”

차선오가 사무적인 목소리로 지시했다. 다가온 최 대리는 테이블 위에 박스를 내려놓았다. 라벨이 붙어 있지 않은 평범한 갈색의 택배 박스였다.

안에 담긴 게 뭔지 알았다면 최 대리가 이걸 직접 가져다주려 했을까. 굳이 블라인드까지 다 내린 팀장실에. 차선오는 약간 웃었다. 그는 마치 전원이 나간 기계처럼 멍하니 선 최 대리를 흘끗 쳐다보면서, 하진의 뒷구멍에 박아 넣었던 손가락을 느릿하게 빼냈다.

“으… 흐으응.”

구멍이 움직임을 따라 서서히 조여졌다. 꼭 계속 박아달라는 것처럼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이물감이 사라지는 선명한 느낌에 하진은 몸을 떨며 끙끙거렸다.

“뺄 때 더 느끼는 거야? 아님 보는 사람이 있어서 그런가.”

“…….”

말을 알아듣지 못한 하진은 그저 가쁜 숨을 몰아쉴 뿐이었다. 그런 작은 반응조차 즐겁다는 듯 웃어넘긴 차선오가 흥건하게 젖은 손가락으로 그의 유두를 살살 굴려주었다.

“아, 앙….”

“조금만 더 하면 껍질 벗겨지겠다.”

직접 만지고 있을래? 이거 꺼내 볼 동안. 차선오의 속삭임에 하진은 주춤거리다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도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듯 몸 전체를 비벼대면서 칭얼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최 대리가 보는 앞에서도 성욕을 주체하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그가 손목의 넥타이를 손쉽게 풀어주었다. 그러자 하진은 자유로워진 손으로 허겁지겁 오른쪽 유두를 비틀고 꼬집으면서, 다른 손으로는 엉덩이 사이를 만지작거렸다.

“거긴 허락한 적 없는데.”

“…그치만… 가, 간지러워서… 흐응.”

“그럼 넣지는 말고 만지기만 하자. 알았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아직 스스로 손가락을 넣어본 적은 없었다. 하진이 할 수 있는 건 고작 물기가 배어난 입구를 비벼대는 것뿐이었다.

차선오는 서툰 압박 자위만으로도 홍조가 일어난 그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면서 서랍에서 작은 칼을 꺼냈다. 그리고 밀봉된 택배 박스를 뜯기 시작했다. 벌어지는 입구 사이로 예상한 물건들이 보였다.

“깜짝 선물이라 집에 가서 주려고 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어쩔 수 없네.”

“흐아, 아, 앗….”

바스락. 상자에서 비닐 포장된 천 조각들이 하나둘씩 꺼내어졌다. 그건 다름 아닌 여러 종류의 란제리와 스타킹들이었다. 순간 더없이 사무적이었던 공간에 아주 이질적일 만큼 야한 디자인의 속옷들이 전시되듯 펼쳐졌다. 그때까지 가만히 서 있던 최 대리도 무의식중에 그걸 응시하는 듯했다.

“하진아. 이거 뭔지 알겠어?”

한창 손끝을 세워가며 열심히 젖꼭지를 짓이기던 하진이 뒤늦게 테이블 위를 보았다.

“오늘부터 새 잠옷 필요하니까, 어울릴 만한 걸로 좀 골라봤어.”

차선오가 더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설명해주었다. 끈과 끈으로만 연결되어 엉덩이가 훤히 드러나는 작스트랩 속옷부터, 여성용 티 팬티, 얇은 레이스와 리본 장식이 가미된 디자인도 여럿이었다.

개중에 하늘하늘한 슬립이나 가운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잠옷이라고 하기엔 몸을 가리고 보호하는 기능이 없는, 손바닥보다 작은 천 조각에 불과했다. 하나둘 들춰보면서 살피던 차선오는 유독 눈에 띄는 흰 브래지어를 들어 올리면서 덧붙였다.

“아. 이건 하진이 외출용.”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순백색의 캡이 공중에서 달랑거렸다. 마치 사춘기 여학생이 할 법한, 면으로 된 브래지어였다. 성인 남성이 입으리라고는 도저히 상상 못 할 물건이었지만 그의 낯은 태연했다.

“젖이 앞으로도 계속 도톰해질 텐데, 아무 데서나 선 거 보여주면 곤란하잖아. 필요할 땐 하고 다니라고 같이 샀어.”

실제로 약 기운이 스민 하진의 유두는 비정상적으로 커지고 있었다. 감도도 무척 좋아진 게 분명했다. 뭐가 살짝만 스쳐도 따가울 듯 보이는 자태가 무척 만족스러웠다.

브래지어를 다시 내려놓은 차선오는 하진의 몸을 뒤로 기울이면서 그의 가슴을 유심히 살폈다. 좀 전까지 집요하게 괴롭힘당한 유두가 붉게 번들거렸다. 탐스러웠다. 그가 고개를 숙여 입술을 맞붙이고는 혀로 겉면을 살짝 핥아 보았다.

“히윽…!”

“음.”

부드러운 살덩이에 스쳤을 뿐인데도 하진은 신음을 크게 터뜨리며 자지러졌다. 그러나 차선오에게는 그것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그가 입맛을 다셨다.

“벌써 살짝 비릿한 맛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으흑… 서, 선오야….”

“이렇게까지 빠를 줄은 몰랐는데 정말 약이 잘 받나 봐. 예쁘기도 하지.”

그는 침이 묻어 더욱 번들거리는 겉면을 살피며 홀린 듯 중얼거렸다. 계획을 앞당기는 것도 진지하게 고려해볼 만했다. 좀 더 욕심을 내는 편이 하진에게도 자신에게도 좋은 방향일 지도 몰랐다.

앞으로가 무척 기대됐다. 이토록 비릿하고 달콤한 맛이라니. 차선오는 소중한 무언가를 대하듯 같은 부위를 몇 번이나 더 입술로 가두고 살살 빨아주었다. 쵹, 쵸옥. 닿을 때마다 소리가 적나라했다. 고개를 드니 문득 시선이 느껴졌다.

“이런….”

꼭 쇼윈도의 마네킹처럼 선 최 대리는 아까부터 여태 테이블 위의 속옷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최 대리가 눈을 못 떼네.”

차선오는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기 바쁜 하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툭 말했다.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들어서 쳐다보고 있어요?”

“아, 팀장님.”

최 대리는 갑자기 정신을 차린 듯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러나 이내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잠옷이라고 하니… 상상이 되어 그렇습니다.”

부끄러워야 하는 대답임에도 최 대리는 거침없이 속마음을 뱉었다. 모든 질문에 솔직할 수밖에 없는 상태여서 그랬다. 그때까지도 멍한 시선은 여전히 란제리와 스타킹들에 고정되어 있었다.

“상상?”

차선오의 낯에서 웃음기가 천천히 사라졌다. 그는 어느새 싸늘해진 얼굴로 물었다.

“그래요? 뭐가 제일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예. 저는 이게….”

최 대리는 기다렸단 듯 얼른 하나를 골라 내밀었다. 그건 붉은색의 망사 팬티였다. 그러면서 묻지도 않은 설명을 덧붙였다.

“하진 씨는 피부가 희니까,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호칭은 똑바로 하고.”

차가운 지적에 최 대리가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아… 예, 바, 박하진 씨가….”

“괜한 걸 물었네.”

기분만 더럽게. 차선오가 짧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얼핏 보기엔 재미있는 얘기를 들은 듯 즐거워 보였으나 눈매가 무섭도록 사나워져 있었다. 하진을 끌어안은 손끝에도 힘이 들어갔다. 그때 품 안에서 생각도 못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오야, 난 이거….”

몽롱한 눈으로 테이블 위를 보고 있던 하진이 무언가를 가리켰다. 최 대리의 손은 완전히 무시당했다.

“이거… 기분 좋을 것 같아.”

하진이 고른 건 속옷이 아니라 흔히 볼 수 있는 스타킹이었다. 얇고 검은 스타킹의 포장지 위에는 30데니어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이거 입고 싶어?”

“으응. 괜찮아? 지금 바로….”

“아니, 지금은 안 돼.”

차선오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거절하면서 시계를 흘끗 확인했다. 어느새 점심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한 그가 불청객처럼 서 있는 최 대리를 다시 불렀다.

“최 대리.”

“예, 예.”

“가지고 온 거 전부 다시 포장하세요. 박스는 나가서 하진이 가방에 넣는 겁니다. 실수로 들키거나 하면 곤란해지는 건 본인일 테니 알아서 조심하고.”

“…알겠습니다.”

그는 기계처럼 대답했다. 실망하거나 민망해하는 최소한의 감정도 무의식 아래에 감추어진 모습이었다. 차선오는 앞으로 하진이 입게 될 잠옷들을 다시 박스에 넣어 포장하는 최 대리를 지켜보면서 덧붙였다.

“아. 최 대리가 고른 건 빼요. 그건 따로 들고 나가서 알아서 처리하든지.”

차선오의 차가운 명령에 최 대리는 시키는 대로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박스는 처음 그가 가지고 온 그대로 깔끔하게 재포장되었다. 붉은색 망사 팬티 하나만이 덩그러니 옆에 놓였다. 최 대리는 그걸 따로 손에 쥔 채 박스를 들었다.

“이제 나가봐요. 여기서 나가면 지금까지 본 건 전부 잊는 겁니다.”

“네, 팀장님.”

최 대리는 복종하듯 깊이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잠가둔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의 등 뒤로 부드럽게 바뀐 차선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진아, 스타킹은 오늘 집에 가서 입어 보자. 분명 예쁠 거야. 기분도 좋을 거고.”

“응. 좋아….”

기대에 젖은 하진의 유순한 목소리도.

달칵. 최 대리가 문을 열고 팀장실 밖으로 나갔다. 닫히는 문틈으로 키스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멀리서도 혀가 질척하게 얽히는 것이 적나라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

현실로 돌아온 최 대리의 눈이 서서히 초점을 되찾았다.

지금… 무슨 일이 있었지? 그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머릿속에 입력된 뚜렷한 목표가 최면에서 깬 그를 움직이게 했다.

최 대리는 박스를 들고 서둘러 하진의 자리로 향했다. 이걸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인턴의 가방에 넣어둬야 했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뚜렷한 의무감이 그의 온 정신을 지배했다.

바깥 복도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카페에 다녀온다던 동료들이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최 대리가 무사히 하진의 가방에 박스를 숨겼을 때, 저마다 손에 테이크아웃 잔을 든 동료들이 한꺼번에 사무실로 들이닥쳤다.

“최 대리님. 안에 팀장님 계세요? 이거 드리려고요.”

무리 중 한 명이 반갑게 최 대리를 부르며 따로 들고 온 캐리어를 흔들었다. 하진의 것까지, 얼음이 가득 든 커피 두 잔이 투명한 플라스틱 컵 안에서 찰랑찰랑 흔들렸다.

“팀장님이… 어… 글쎄요.”

최 대리는 대답하지 못했다. 방금 분명 팀장실에서 나왔는데, 안에 차선오 팀장이 있는지 없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가 어리둥절해서 이마를 긁적이는데, 누군가 최 대리의 손에 들린 이상한 물체를 발견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어머, 대리님. 손에 그거 뭐예요?”

“네?”

“여자 속옷… 같은데요?”

경악 어린 시선이 한꺼번에 최 대리에게로 쏠렸다. 누가 봐도 여성용 속옷이 맞았다. 그것도 아무나 쉽게 입지 못할 만큼 색과 디자인이 파격적인, 망사 팬티.

“이, 이게 왜….”

뒤늦게 제 손에 들린 속옷을 확인한 최 대리는 깜짝 놀라 그걸 떨어뜨렸다. 짧은 정적 뒤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아닙니다. 아니, 오해에요…!”

최 대리는 제대로 된 해명을 하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처음 보는 물건이었으니까. 어느새 그는 파렴치한 이가 되어 있었다.

뜻밖의 해프닝으로 사무실 분위기가 싱숭생숭했다. 한발 늦게 팀장실에서 나온 하진은 그 틈을 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었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무사히.

*

“오늘 어땠어? 지쳐 보이는데, 적응하기 힘들지?”

퇴근길이었다. 점심시간의 일을 까맣게 잊어버린 하진은 어김없이 조수석에 앉아 어깨를 두드렸다.

“아니야. 몸이 좀 뻐근해서.”

“그래?”

적응하기 힘드냐고…. 솔직히 너무 적응해서 문제였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정도로 완전히 일에 푹 빠져 있다가 깨어난 기분이었다. 어서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그러나 팀장의 앞에서 그런 얘길 할 수는 없기에 몸 핑계를 댔다.

실제로 아침에 출근하며 느꼈던 근육통이 저녁이 되니 더 심해진 것 같았다. 회사에선 그저 앉아서 일하는 게 다인데, 아직 초반이라 알게 모르게 업무 시간 내내 몸이 경직되어 있었던 모양이라고, 하진은 생각했다.

반면 차선오는 여전히 쌩쌩했다. 얄미울 만큼. 어둑한 주차장에 반사된 불빛이 유려한 그의 이목구비를 더 돋보이게 했다.

“집에 가서 마사지라도 해줄까?”

“너 그런 것도 할 줄 알아?”

“응. 나 잘해.”

“아, 운동 많이 한댔지.”

하진은 아침에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이상하게 그 기억은 또렷했다. 그의 눈이 핸들을 잡은 차선오의 손 쪽으로 향했다.

크고 굵직한 손이었다. 뼈대가 툭툭 불거져 나왔는데도 전체적으로 잘 빠져서 예쁘게 생겼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런 손으로 마사지를 받으면 분명 시원하겠지…. 그러나 또 그런 부탁까지 하기엔 지나치게 염치가 없는 것 같았다.

“괜찮아. 피곤할 텐데….”

차선오가 고개를 돌렸다. 입으로는 거절하면서도 하진은 여전히 그의 손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속이 훤히 들여다보여서, 차선오는 기꺼이 수락할 수밖에 없는 방법을 제시해 주기로 했다.

“그럼 너도 나 해줘.”

“내가…?”

“응. 난 니가 해주는 마사지 받고 싶은데. 서로 해주면 공평하잖아. 어때?”

반박할 여지라곤 없는 말이었다. 하진이 괜스레 머리를 긁적였다.

“어… 난 잘 못 하는데. 괜찮겠어?”

“왜. 잘할 것 같은데.”

차선오가 하진의 손을 끌어왔다. 보들보들한 촉감. 하얗고 매끄러운 손이었다. 그리고 아직 가르칠 게 많은 손이기도 했다. 그걸 살펴보는 척하다가 이내 양손으로 만지기 시작했다.

“그냥 이걸로 나 기분 좋게 해준다고 생각하면 되지. 마사지가 별건가.”

“으응….”

마치 애무라도 하듯이 노골적으로 주무르고 쓸어대는데도, 하진은 조금 간지럽다는 생각만 할 뿐 빼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기분이 싫지 않았다. 단단한 손끝이 손바닥에 약간 고인 땀을 살살 훑어줄 때는… 어딘가 나른해질 만큼 꽤 좋기까지 했다.

“그럼… 한번 해보지 뭐.”

한참이나 눈과 손으로 희롱당하던 하진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수락했다. 원하는 대답을 얻어낸 차선오가 그제야 손을 놓아주었다. 떨어져 나갈 땐 못내 아쉬운 기분까지 들었다. 하진은 여기저기 감촉이 남은 자신의 손을 괜스레 쥐었다 폈다 했다.

“나도 이따가 잘 봐줄게. 몸 구석구석 어디가 약한지, 만져 보면 아니까.”

“으응. 고마워.”

계획은 성사되었다. 두 사람을 태운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하진은 은근히 차오르는 기대를 숨기며 말을 돌렸다.

“참, 아까 최 대리님 무슨 일 있는 것 같더라. 사무실 분위기가 영 이상하던데…. 왜 그런지 알아?”

“글쎄. 나도 잘 모르겠네.”

차선오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뒷좌석에 놓인 하진의 가방 안에는 주인만 모르는 택배 상자가 담겨 있었다.

*

“저녁 포장해갈 테니까 들어가서 쉬고 있어.”

오피스텔 앞에 차를 세운 차선오가 말했다. 집에 먹을 게 없어서 당분간은 사서 먹을 생각이라고 했다. 예상 못 한 상황이었다. 당연히 같이 들어갈 줄 알았던 하진은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내가 사 올까?”

“뭐?”

아무래도 미안했다. 계속 여러 가지 배려를 받고 있긴 하지만 혼자 쏙 집에 들어가 버리는 건 너무 염치없는 행동 같았다. 요리라도 할 줄 알면 좋으련만. 하진은 그쪽으로는 전혀 재능이 없었다.

“괜히 너한테 심부름시키는 것 같아서. 내가 사 올게. 선오 너는 뭐 좋아해?”

“뭐 좋아한다고 하면, 어디서 파는지는 알고?”

“…….”

듣고 보니 그랬다. 얹혀사는 처지인 하진은 이 동네에 뭐가 있는지 잘 몰랐다. 오늘로 이 집에 온 지 고작 이틀째. 제대로 밖을 돌아다닌 적도 없어서 자칫하면 길을 잃을 가능성이 있었다.

“어, 음…. 그럼 같이 갈까? 아니면 내가 밥값이라도 줄게. 응?”

“하진아, 무리하지 마.”

“…….”

얼른 뒷좌석에 둔 가방을 가져와 지갑을 꺼내던 하진이 손을 멈추었다.

“그냥 밥 맛있게 먹고 마사지나 열심히 해줘. 난 그게 더 좋아.”

“그래도….”

“말했잖아. 사실 나, 그동안 혼자 있어서 되게 외로웠거든. 네가 같이 있어 주는 걸로 충분해.”

몇 장 없는 지폐가 도로 제자리를 찾았다. 이런 상황에 고집스럽게 쥐여 주는 게 오히려 미련한 걸지도 몰랐다. 자존심 상하긴 해도 사실 차선오의 말대로 하진은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다. 첫 월급 전까지는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하는 게 사실이었다.

“그러면… 난 아무거나 잘 먹으니까 선오 네가 먹고 싶은 거 사와. 꼭이야.”

“응. 그리고 이거.”

풀 죽은 하진에게 차선오가 주머니에서 꺼낸 쪽지를 건네주었다. 오피스텔 이름과 호수, 비밀번호가 적힌 종이였다.

“어? 이거….”

“집에 흘려놨더라.”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익숙하다 했더니, 어제 받았던 쪽지였다. 분명 이걸 손에 쥐고 오피스텔에 들어갔는데, 그러고 보니 그 이후에 어디다 놨는지 전혀 기억에 없었다.

“아직 못 외웠지? 갖고 들어가서 쉬고 있어.”

하진은 종이에 남은 접힌 자국을 만지작거리면서 그걸 빤히 보았다. 이상하게 뭔가 기억이 날 듯 말 듯 했다. 그리고 어제처럼 다시 이 쪽지를 잃어버리게 될 것 같은 기묘한 예감이 들었다.

“응. 다녀와.”

하진은 내색하지 않고 쪽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가방도 챙겨 메고 차에서 내렸다. 괜스레 찝찝한 기분이 들었지만, 차선오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는 그저 평소처럼 다정하고 어른스러운 얼굴로 눈인사를 하곤 사라졌다.

괜한 생각이겠지. 애써 의심을 떨쳐낸 하진이 발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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