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소란스럽지 않은 오후 (4/9)

소란스럽지 않은 오후

지극히 객관적으로 보면 채연재는 긍정적인 편에 속했다. 가난한 집, 폭력에 익숙한 일상, 오메가이기까지 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노력으로 모든 것을 바꿀 수 있으리라 믿었다.

실제로 연재는 학원 한 번 가지 않고, 과외 한 번 받지 않았음에도 꾸준히 좋은 성적을 얻어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들어갔다. 졸업 후에는 대기업에 들어가기도 했다. 물론 얼마 가지 못해 부모님의 성화에 본가로 돌아가야 했다.

회사를 더 다니고 싶었지만, 부모님은 식모를 필요로 했다. 연재는 결국 집 근처 중소기업에 들어가 늙은 상사들의 커피나 탔다. 그래도 연재는 긍정적이었다. 아무리 중소기업이더라도 꾸준히, 열심히 다니면 더 좋은 곳을 갈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퇴근 후 집에 와 청소하고 밥을 차리고, 술에 꼴은 아버지의 욕설을 들으면서도 괜찮았다. 요즘은 100세까지 산다고, 연재는 제 나이가 한참 어리니 언제든지 새 도전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연재를 지켜보던 친구들은 ‘좀 미친 것 같다’라고 하긴 했지만 그럴 때에도 매번 웃으며 왜? 하고 되물었다.

결국 돈에 팔려 결혼할 때에도 그랬다. 아직 20대니까, 살다 보면 이런저런 경험을 겪는 거라고. 해외여행 2년 정도 다녀온다고 생각하자고.

물론 그 생각에는 상대가 선일이었던 탓도 있다. 좋아했던 선배니까, 다정했던 분이니 나쁘지 않은 생활일 거라고 믿었다. 결혼을 한다 해서 취직을 못 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좋은 곳에서 살 수 있으니 다시 한번 대기업으로의 취직을 노렸다.

그마저도 할 수 없었지만, 뭐 이게 어디냐 싶다. 감지덕지다. 쇼핑몰에서 전화 업무를 했다는 경력은 제게 크게 도움 될 것 같지는 않지만, 적당히 돌려 말해 서비스업 정신이 충실하며 원만한 인간관계를 지녔다고 하면 그만이다.

연재는 깔끔한 셔츠와 바지를 입었다. 며칠 전 선일이 하도 짓이겨 유두가 따끔거렸지만 그 위에 뭘 붙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대로 바깥을 나오자 거친 옷가지에 스칠 때마다 젖꼭지가 욱신거렸다.

“으으…….”

찝찝함에 팔짱을 끼고 걸음을 빨리했다. 면접만 보고 집에 오면, 약도 발라야지. 며칠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이런 건 심하지 않은가! 상처가 난 건 아닐까. 좀 더 살펴볼 걸 그랬다.

주변을 살피다 보니 익숙한 횡단보도가 보였다. 이전에 규서가 제 지갑을 가져다 달라고 했던 그 길목이었다. 그러고 보니 선배가 규서를 데리고 가라고 했었다.

차마 제게 그런 짓을 한 녀석을 데리고 면접을 보러 가고 싶진 않아서, 연재는 말없이 집을 빠져나왔다.

면접이야 한두 번 본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아르바이트 면접’에 아들을 데리고 다니는 건 좀 부끄러운 일이기도 했다.

집 앞에 서서 주소를 검색하는데, 새까만 차가 천천히 움직여 집 앞에 대는 것이 보였다. 힐끔거렸지만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선일은 나갔으니 규서의 친구인 걸까?

그렇다면 스무 살일 텐데, 외제 차의 겉면이 제법 윤기가 났다. 꽤 좋은 차인 듯싶다. 저와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눈앞에서 확인하니 좀 부러웠다.

열심히 살아도 저런 차는 못 타겠지? 잠깐 꿈에 젖었던 연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걸음을 옮겼다. 면접을 보는 곳은 30분 정도 버스를 타야 했다.

버스를 탄 것이 하도 오랜만이라, 연재는 주머니에서 지폐를 꼬물꼬물 꺼냈다. 후두둑 떨어지는 거스름돈을 받다가 버스가 출발하는 바람에 몸이 살짝 휘청였다. 몇 푼 안 되는 것을 소중히 주머니에 넣고, 텅 빈 좌석에 엉덩이를 붙였다.

한참을 가다 보니 금방 도착했다. 연재는 버스에서 내려, 지도를 보며 건물을 찾았다. 도착한 곳은 생각보다 작은 건물이었다. 그리고 지하 1층. 사무실이란 게 보통 지하에 있던가? 쇼핑몰은 좀 다른 걸까.

“음, 으음…….”

지하에서 올라오는 찬 기운이 어쩐지 수상쩍다. 사기꾼의 냄새가 폴폴 났지만, 어차피 오늘 하루만 면접을 보면 되었다. 집에서 하는 일이니까, 괜찮겠지?

* * *

“저, 정말 이거 해야 해요?”

“네. 다 하고 가셨어요.”

“아…… 음, 어…….”

“모집 요강 제대로 보셨어요? 전화 업무 ‘외’라고 적혀 있는데.”

연재는 난감한 얼굴로 속옷을 들어 올렸다. 면접을 보는 곳은 ‘스텔라 쇼핑몰’로 속옷을 파는 곳이었다. 주로 오메가들의.

왜 오메가인지 묻는가 했더니, 이것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이건 여성용인데…….

“저, 근데 재택근무라고 쓰여 있었는데…….”

“아, 그니까. 이번만이라고 말했잖아요. 프로필 사진으로 찍고, 집에서는 전화 업무 하신다고요. 안 하실 거예요? 채연재 씨 말고도 하려는 사람 많거든요?”

압박하듯 뱉는 말에 저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눈앞의 베타 남성은 무서울 만큼 덩치가 컸다. 근육질의 팔뚝은 아마 제 허벅지만 하지 않을까?

“하, 할게요.”

“안에 탈의실 가서 입고 나오세요. 시간 없으니까 빨리.”

“네에…….”

연재는 속옷을 쥐고 주변을 살피며 조심조심 탈의실로 향했다. 이리저리 쌓인 박스들, 쇼핑몰 작업을 하는 사람 두엇과 면접을 진행하는 남자. 널브러진 촬영 용품들이 보였다. 전화 업무를 하는데 왜 프로필 사진이 필요한 건지, 그것도 이런 속옷을 입어야 하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

하지만 시간도 적당하고, 재택근무까지 가능한 곳이었다. 어차피 한 번이니까, 딱 한 번만 찍으면 되니까.

후다닥 옷을 벗고 여성용 속옷을 입었다. 당연하게도 앞섶이 툭 튀어나와 모양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게다가 속이 비치는 연한 핑크색인 바람에, 희미하게 음모가 보였다. 연재의 얼굴이 곧 울 듯이 일그러졌다.

“이게 뭐야…….”

마지막으로 브래지어를 들어 올렸다. 진짜 울 것 같았다. 한 번도 입어 본 적이 없어 이리저리 살피는데, 바깥의 남자가 어서 나오라고 호통을 쳤다. 연재는 급히 맞지도 않은 것을 팔에 끼우고, 손을 뒤로 돌려 후크를 어설피 채웠다.

하지만 거울 속 제 모습을 보니 도저히 나갈 용기가 나질 않았다. 이런 모습을 하고 사진을 찍는다고? ……그 사진을 어디로 내돌릴 줄 알고?

일순 든 생각에 가슴이 서늘하게 식었다. 연재는 황급히 브래지어를 잡아당겼다. 후크가 걸려 벗겨지지 않자, 결국 그 위에 옷을 엉망으로 걸쳐 입었다. 사내가 짜증을 내는 목소리가 선명했다. 정신 차려, 미쳤지, 미쳤어! 아무리 급하다 해도 이런 짓을 저지르려 했던 자신이 믿기질 않았다.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울컥 새어 나오는 눈물을 꾹꾹 참았다. 그러나 그때, 탈의실 안쪽으로 커다란 팔뚝이 들어와 연재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뭐야, 아직 다 안 입었어?”

짜증 섞인 목소리에 더듬더듬 면접을 보지 않겠다고, 그리 말하려던 참이었다. 사내는 굵은 손바닥으로 연재의 셔츠를 잡아 단번에 찢듯이 벗겼다.

“안에 입었네.”

바로 수그러든 목소리에 연재는 마른 입술을 훑었다. 두 손으로 몸을 가리자 멀찍이 앉아 있던 남자가 빨리 오라고 짜증을 냈다. 그러자 덩치가 큰 사내가 말없이 연재의 옷을 바닥에 내던지고 카메라 앞으로 밀었다.

“저, 저…… 면접, 안 할…….”

“빨리 찍고 끝내자고.”

힘겹게 뱉은 말은 무시당했다. 연재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싶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도망칠 곳도, 도망칠 자신도 없었다. 그래, 해봤자 쇼핑몰에 올리는 정도겠지. 제 생각이 너무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해야 했다. 연재는 붉어진 눈가를 마구 비비며 카메라 앞에 서서 몸을 가렸다.

그러자 커다란 덩치의 남자는 카메라를 잡고 이리저리 살피다가, 손을 치우라는 듯 팔을 휘적였다.

연재는 아랫입술을 물고 팔을 내렸다. 희멀건 몸에 딱 맞는 연핑크색 속옷이 드러났다. 레이스는 물론 군데군데 망사로 되어 있어 살갗이 보였다. 남자는 연재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이번 지원자는 꽤 괜찮았다.

“앞에 봐요, 앞. 카메라 여기, 렌즈 똑바로 보고.”

“네, 네…….”

한껏 경직된 채로 렌즈를 노려봤다. 모델 일을 해본 것도 아니고, 사진 찍는 게 익숙하지도 않아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 연재는 발갛게 물든 뺨으로 입술을 꾹 다물었다.

셔터가 몇 번 터졌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남자 둘이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촬영을 지켜보고 있었다. 몹시 민망했다.

곧바로 컴퓨터에 업로드 되는 제 사진을 보니 반쯤 마음이 놓였다. 진짜로 쇼핑몰 용 사진을 찍는 것 같아서. 이상한 일에 휘말려 든 게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에 쿵쿵 뛰어대던 가슴이 조용해졌다.

덩치는 자세를 바꾸지도 않았는데 계속해서 사진을 찍었다. 연재는 눈을 빙글 돌리며 역력히 긴장한 얼굴로 손을 쥐었다 폈다.

“저기 뒤에 소파 가서 앉아 봐요.”

“아, 네…….”

생각보다 많이 찍네.

그러고 보니 모델들의 화보를 보면 예쁜 B컷도 여러 장이 있었다. 그중 하나를 골라 A컷을 픽하는 거니까 여러 장을 찍는 듯했다. 연재는 두 다리를 모으고 소파를 세게 쥐었다.

렌즈를 보라곤 했지만 눈은 계속해서 굴러갔다. 이리저리, 요리조리 방황하던 눈동자는 한 남자가 다가오자마자 동그래졌다.

“왜, 왜요?”

“아, 자세가 별로라서. 잡아 드리려고.”

무감각하게 뱉은 남자의 말에 연재는 안심하듯 한숨을 쉬었다. 순간 너무 긴장했을까, 심장이 쿵쿵 뛰었다. 거칠고 투박한 손이 연재의 다리를 들어 올렸다. 양쪽에서 벌리는 바람에 아래가 훤히 드러났다. 볼록하니 튀어나온 게 민망해 목덜미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남자들은 연재의 다리를 소파 위에 올리고, M자 모양으로 벌리게 했다. 그리곤 손을 뒤로 뻗어 어설프게 채운 후크를 풀고, 속옷 한쪽을 아래로 끌어 내렸다. 덕분에 살짝 부은 유두가 드러났다.

“이, 이렇게 찍… 어요?”

“다 그렇게 했는데, 싫어요? 다들 절박하신 분들뿐이라, 할 사람은 많아요. 채연재 씨. 전화 업무가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나름 전문적인 업무라서, 태도를 보는 거예요. 그리고 프로필 사진은 자세할수록 좋구요. 고객들의 상담 만족도가 올라가거든요.”

“그. 아…… 네.”

“뭐 가끔, 철없는 오메가들은 왔다가 도망가곤 하는데…… 뭐라고 하는 건 아니고. 그런 태도로 무슨 일을 하겠어요. 안 그래요?”

눈을 맞춘 남자가 싱긋 웃었다. 아무래도 이런 자세는 좀, 많이 민망해서 하고 싶지 않았는데 거절하면 안 될 분위기였다.

정말, 정말 이상한데. 진짜 많이 이상한데. 아무리 봐도 이건 아닌 것 같은데…….

“앗!”

“아, 죄송해요. 여기가 부었길래.”

“……으, 네에. 부, 부었어요.”

갈팡질팡하는 찰나 남자가 젖꼭지를 꾹, 눌러왔다. 그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으며 브래지어 안쪽을 힐끔거렸다.

“누가 많이 빨아 줬나 봐요?”

“…….”

“부끄러우면 말 안 해도 괜찮아요. 뭐, 여기 오는 오메가들 보면 별의별 것을 다 보거든. 저번엔 SM 플레이를 하는 애였는데 온몸에 멍이 들었더라고.”

무, 무섭다. 멍이 들 정도로 하는구나.

남자는 조잘조잘 떠들며 연재의 긴장감을 낮춰 주었다. 카메라를 잡은 덩치는 그걸 방해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자, 좀 더 벌리고.”

한껏 벌어진 허벅지를 남자가 더 당겼다. 소파에 기댄 등이 스르륵 아래로 흘러내리며 둔부 아래쪽이 카메라를 향했다. 연재는 다시 몸을 추스르려는데, 그 순간 셔터가 터졌다.

“어…….”

“계속해.”

덩치가 딱딱한 말투로 말을 뱉었다. 연재는 또다시 긴장한 얼굴로 눈꺼풀을 세차게 깜빡였다. 옆의 남자가 손을 뒤로 돌려 등을 살살 매만지다 반대편으로 꺾어 허리를 끌어안았다.

“피부가 좋네요? 로션 뭐 써?”

“아, 안 써요.”

“정말?”

“네…….”

“우리 지금 화장품도 할 생각인데, 이따 갈 때 샘플 줄게요. 하나 챙겨 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의 손이 반대편 유두로 살살 기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움찔거리자 그는 퉁퉁 부어오른 젖꼭지를 툭, 건드리곤 작게 웃었다.

“남편이 예뻐해 주나 보네.”

“…….”

“남친? 아니면 그쪽 일 해요?”

무슨 말인지 몰라 눈만 깜빡였다. 그 와중에도 셔터는 계속해서 터졌다.

“여기도 그런가?”

그 순간 남자의 손이 아래로 향했다. 얇은 속옷 안쪽으로 재빠르게 들어간 투박한 손이 연재의 성기를 지나쳤다. 단번에 굵은 검지가 내벽으로 들어갔다.

“아, 무, 무슨!”

“허, 뭐야. 투홀이네?”

놀란 마음에 남자의 손을 재빨리 뿌리쳤다. 그러나 남자가 더 빨랐다. 그는 연재를 소파 위로 짓누르고 집어넣은 검지를 더욱 깊게 밀어 넣어 내벽을 빙글 훑었다.

“존나 젖었네, 미친년.”

갑작스러운 욕설에 심장이 쿵 떨어졌다. 연재는 최대한 놀라지 않은 척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그를 밀어냈다.

“왜, 왜 이러세요.”

시야가 새하얗게 물들었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마른침을 삼키며 어설피 웃었다. 장난이겠지, 그냥, 장난이겠지. 차라리 아까 도망치는 게 나았다는, 그런 우스운 후회를 해야 할 때는 아니겠지.

“자, 장난치지 마세요. 그만 하세요.”

“장난?”

연재의 말에 남자가 덩치에게 턱짓을 했다. 짝다리를 하고 지켜보던 그가 성큼 다가왔다. 연재는 급히 몸을 일으켜 남자를 밀어내고 뛰었다. 그러나 세 발자국도 가지 못해 덩치에게 붙잡혀 소파로 내팽개쳐졌다. 어깻죽지가 아파 악 소리를 내자 덩치가 두 팔을 뒤로 당겨 한 손으로 억세게 쥐었다. 숨이 꼴깍꼴깍 넘어갔다.

“순진한 아가씨, 이거 지금 장난 아니거든.”

“……왜, 왜요. 그, 그냥 면접, 이라고…… 끅!”

“전화상담 면접을 누가 이렇게 해? 아르바이트 안 해봤어?”

아르바이트라곤 편의점밖에 해보지 않았다. 손님이 없는 틈틈이 필기 노트를 펼쳐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까 나갈걸,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때…… 제 사진이 이상한 곳에 나돌아 다닐까 싶어 긴장했을 때, 나갈걸. 주변 물건을 마구 던지면서 어떻게든 나갈걸. 제 발로 기어 들어왔다는 생각에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과 분노가 머리를 가득 채웠다.

지금 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없어, 간절한 마음에 들어온 것이 잘못이었다. 설마설마했지만 이렇게까지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이, 이거 범, 범죄예요.”

“그래, 범죄지. 누가 그걸 모르고 해?”

“……시, 신고. 할, 거-.”

“다 벗은 채로 사진도 찍어 놓고, 그런 말을 경찰이 믿어 줄까?”

울컥 눈시울이 홧홧해졌다. 연재는 입술을 꾹 다물고 정신 사납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들을 치고 도망갈 수단, 도망갈 곳을 살폈지만 덩치의 힘은 지나치게 억셌고 남자는 연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잘하면 돈도 두둑하게 챙겨 줄게. 몸도 가늘고 예쁘니까, 꽤 팔릴 거야.”

“……뭐, 뭐가요……?”

“뭐긴. 카메라 안 보여?”

온갖 혈관이 날뛰는 듯 숨통이 조여왔다. 저번에도, 저저번에도. 연재는 윤간을 당할 때마다 이러했다. 그들은 늘 카메라를 들었고, 후에 협박이라도 할 것처럼 영상을 찍었다.

동그란 렌즈가 또렷하게 저를 응시하는 것이 보였다. 연재는 눈을 세차게 깜빡이며 발작적으로 어깨를 흔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만, 그만 해요. 도, 돈이 필요하신 거면 제가 어떻게든 할, 할게요.”

“거기 잡고 있어 봐.”

남자가 턱짓을 하자 덩치는 손을 뻗어 연재의 무릎 안쪽으로 손을 넣어 몸을 고정시켰다. 덕분에 팔이 비교적 자유로워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밀어낼 수는 없었다. 남자는 무작정 손가락을 밀어 넣어 풀지도 않은 내벽을 우악스럽게 뒤적였다.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움츠리자 손가락은 더욱 깊게 들어와 연분홍빛으로 젖은 질구를 벌렸다. 외모처럼 말캉한 안쪽이 꿈틀거리며 들러붙어 왔고, 긴장으로 인해 성기가 축 늘어졌다. 남자는 연재의 반응에 상관하지 않은 채로, 손가락을 빼냈다.

“와 나, 얼마 전에 생방에서 투홀 새끼 따먹는 거 봤는데.”

“…….”

“존나 신기하네.”

덩치는 말이 없었다. 조금 전까지 연재에게 험한 말을 뱉었던 그는 단호하게 입을 다물고 남자가 하는 짓을 지켜보았다. 좀 더 호리호리한 남자는 입맛을 다시며 허리춤을 급히 풀었다. 욕망에 찬 눈동자가 섬뜩하게 온몸을 훑어 내렸다.

“내가 이런 거 좋아하거든,”

“……흡.”

“순진한 새끼 이런 거 입혀 놓고, 따먹는 거 좋아한다고.”

브래지어 끈을 쭈욱 잡아당긴 남자가 동그란 유실을 툭, 튕겼다. 알싸한 감각에 눈을 질끈 감자 묵직한 것이 속옷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입구를 두들겼다.

“이런 일 하러 오는 애들 보면, 대부분 좀…… 멍청한 새끼들이더라.”

“흑, 아!”

“시급도 괜찮고 사대보험까지 챙겨 주면서 네다섯 시간 일하는 일이 있을 거 같았어?”

남자는 연재의 체향을 맡듯 고개를 숙여 목덜미를 훑었다. 핏줄이 불거진 성기는 언제든지 들어갈 수 있다는 듯, 입구를 열었다 닫으며 들락거렸다.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 파르르 떨고만 있자, 그가 작은 여성용 속옷을 찢듯이 벗기곤 보지를 양쪽으로 벌렸다.

투명한 액체로 번들거리는 것이 제법 맛 좋게 익은 과실과 같았다. 혀를 내밀어 그 부근을 꾹, 누르자 자그마한 음핵이 놀라 안쪽으로 말려 들어갔다. 놈은 입 안에서 뜨거운 살덩어리를 세워 내벽에 입을 맞추곤 흘러나오는 액체를 강하게 빨아들였다.

“흐, 흐으, 흑, 읍, 시, 싫…… 끅, 흐……!”

아래를 게걸스럽게 빨아들이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렸다. 덩치는 움츠러든 연재의 발끝을 보다 자세를 고쳐 잡았다. 투박한 손이 무릎 아래를 억세게 잡아 양쪽으로 더 넓게 벌리고는 허벅지를 더듬었다.

“아, 하으, 흑, 흐…….”

숨이 꼴딱꼴딱 넘어갔다.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돌려서, 이곳에 들어서기 직전 발걸음을 돌리고 싶었다. 이상하다고, 뭔가 잘못된 것 같다고 느꼈을 때…….

“아, 아읏, 흑, 아!”

덩치는 연재의 몸이 눌려 터지도록 끌어안고는 팔을 안쪽으로 굽혀 작은 유두를 억세게 쥐었다. 엄지와 검지로 짓누르며 이리저리 비틀자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아래의 남자는 연재의 것을 문지르며 굵은 혓바닥으로 내벽을 유린했고, 카메라는 여전히 빨간 불이 들어온 채로 모든 것을 담고 있었다.

“그, 그만, 흐, 하윽, 흐…… 아, 그만, 제발, 제발요…… 자, 잘못했, 어요, 제발…….”

애처롭게 빌어 봤으나 돌아오는 것은 흥분에 가득 찬 검은 눈동자뿐이었다. 남자는 입을 떼어내고, 한참을 빨아대던 보지구멍에 제 귀두를 들이밀었다. 넣지도 않았는데 벌써 범해진 것처럼 아랫배가 욱신욱신 아려 왔다. 눈물이 잔뜩 고이자 남자가 숨죽여 웃었다.

“그렇게 무서워?”

“……네, 자, 잘못했어요. 제가, 제가 다, 다 잘못, 했어요.”

“뭘 잘못했어. 응? 연재 씨, 연재 씨는 잘못 안 했어. 그냥 순진하게 걸려든 거지. 나쁜 건 우리야.”

“아니, 아니에요. 끅, 제, 제가, 제가 온 게 잘, 못이니까, 그니까, 그, 그만, 흑, 아!”

“귀엽게 구네.”

남자는 이 순간이 몹시 즐겁다는 듯, 거친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그리곤 느긋하게 아래를 쿡쿡 찌르며 연재의 아랫배를 살살 어루만졌다.

“임신한 적 있어?”

“어, 없어, 없어요.”

“노팅은?”

“없어요, 없, 없어.”

연재는 최대한 고분고분 대답했다. 그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바꿔, 카메라만이라도 꺼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다, 다 할게요. 카, 카메라만, 흑, 카메라만…… 치, 치워 주시면, 아, 안 돼요?”

“저게 제일 중요한 건데.”

“…그, 그래도오…… 흐, 끄읍, 흑, 끅!”

남자는 짐짓 아쉬운 얼굴로 혀를 찼다. 정말 어쩔 수 없다는 듯, 안타깝다는 듯이 연재의 뺨을 살살 쓸어내렸다. 덩치는 먹음직스럽게 벌어진 아래만 내려다보며 어서 쑤시질 않는 남자를 속으로 욕했다.

“왜? 남친이 볼까 봐? 아니면, 남편? 누구야?”

“나, 남편…….”

“아, 결혼했구나. 내가 본 영상에서도 그러던데. 그 투홀 오메가, 유부남이라고.”

연재는 꺽꺽 넘어갈 듯이 숨을 쉬며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맞아요, 나 결혼했어요. 남편이 보면 큰일 나요, 제발요. 한 번만, 한 번만 봐주세요. 생각은 말이 되지 못했지만 남자는 이해한다는 듯한 숨을 폭, 내쉬었다.

“그래, 그래. 속상하겠네.”

“끅, 끄윽, 흡…….”

아직도 아래에 닿는 것이 치워지질 않았다. 귀두는 쿵쿵, 박동에 맞춰 울리며 연재의 속살을 탐하고 싶다는 듯 끈적한 액체를 흘렸다. 좁은 틈새로 요도구만 들어서서, 쿠퍼액이 내벽으로 천천히 흘러내렸다. 그 감각이 소름 끼칠 만큼 느긋하고 미적지근했다

결국 참다못한 덩치가 짐승처럼 낮은 목소리로 남자를 향해 말을 뱉었다.

“야, 안 해?”

“재촉하는 거야?”

“……빨리 안 하면 내가 먼저 하게.”

“너 먼저 하면 난 어디에 박으라고? 다 늘어진 거에 박는 취미 없어.”

그러나 덩치는 남자의 한 마디에 찍소리도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남자는 덩치를 슬쩍 노려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제 기둥을 붙잡았다.

“미안, 연재 씨. 쟤가 자꾸 재촉해서 안 되겠다.”

“흐, 제발…… 제발…….”

“미안, 미안.”

가볍게 사과를 뱉은 남자는 연재의 골반을 붙잡고 단번에 밀어 넣었다. 퍽, 내벽을 찧는 소리가 억셌다. 연재는 숨을 크게 들이켜며 허리를 푹 숙였다. 등 뒤의 덩치가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그가 다시 자세를 잡자, 징그러울 만큼 커다란 물건이 연재의 등 뒤에 와 닿았다.

남자가 말했던 ‘다 늘어진 거’란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고개를 숙이자 남자의 것이 더욱 눈에 들어왔다. 불그스름한 성기는 안쪽을 무작정 후볐음에도 껄떡이며 세차게 내벽을 치받았다.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무자비했다.

“흐, 헉! 흐윽, 끅, 헉!”

배 안쪽까지 틀어박힌 물건에 눈앞이 흐릿해졌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그는 쐐기를 박듯 위에서 아래로 억세게 찧어댔다. 카메라는 지잉, 소리를 내며 그 모든 것을 찍고 있었고 덩치는 다음을 기약하듯 거친 숨소리와 함께 침묵을 고수했다.

다행히도 남자는 몇 번 박다가 윽, 소리를 내고는 고꾸라졌다. 좁은 속살이 꽉꽉 물어 당기는 감각이 지금까지의 오메가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몇 번이고 이곳에서 놈들을 범했지만 이 정도의 구멍은 맛보지 못했던 탓이다.

“아, 아으…….”

“씨발, 미친…….”

두 개의 구멍을 가진 오메가는 다른 오메가들에 비해 내벽이 좀 더 비좁고, 비틀려 있다곤 들었으나 이리도 맛있게 씹어댈 줄은 몰랐다. 남자는 급하게 싸지른 것이 부끄러운지 입매 한쪽을 올리고는 머리를 쓸어 올렸다.

“와, 이거 장난 없네? 내가 이렇게 빨리 싸는 사람이 아닌데.”

허술하게 붙인 변명에 덩치가 목 안쪽으로 소리를 내 웃었다. 그러자 남자는 그를 노려보고는, 허연 정액으로 질퍽해진 내벽에서 제 것을 꺼내 들었다. 아직 흉흉하게 발기된 것으로 연재의 질구와 음낭을 건드렸다.

“이제 시작이야, 연재 씨.”

연재는 그저 눈만 꼭 감은 채로 숨을 죽였다. 어떠한 소리도 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덩치가 우악스럽게 머리채를 잡아당겼을 때, 숨죽인 비명이 튀어 나갔다.

“하윽……!”

동시에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금방이라도 혼절할 듯한 시야 속에 익숙한 남자가 보였다. 연재는 눈을 흐릿하게 뜨고는 할딱이며 고개를 들었다. 남자의 것이 다시 내벽을 후비고 들어와 결합부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오, 면접이란 게 이런 거였나. 너무 늦는다 싶더니…… 부인, 이걸 회장님이 허락해 줬어요?”

“뭐야, 저건?”

뭉개진 시야 사이로 드러난 것은 백이언이었다. 연재는 그임을 확인하고는 입술을 물었다. 도와줄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덩치는 연재를 희롱하던 손을 치우고 몸을 일으켰다. 후들거리는 다리와 온몸을 남자가 거세게 짓누르자 물건이 더욱 안쪽으로 꾸역꾸역 밀고 들어섰다.

“으, 흐윽!”

백이언이 나타났음에도 남자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세게 푹, 푹 소리가 나도록 박아대는 통에 신음이 마구잡이로 흘러나왔다. 연재가 그에게 다가가는 덩치를 보고 있자, 남자가 연재의 머리채를 잡아 제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왕자님이라도 나타난 건가 보지?”

“흐윽, 끅, 윽!”

“꽤 이쁘장한 남편이네. 둘이 같이 엎어 놓고 박아도 될 정도로 말이야.”

콧등을 찡그린 남자는 농담을 하듯 피식 웃고는 허리를 거칠게 움직여 내벽을 쿵쿵 찧었다. 사정없이 들어와 안쪽을 후벼대는 움직임에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누군가의 앞에서 범해지는 것이 한두 번은 아니었다. 그리고 매번 수치스러웠으나, 지금처럼 제가 함정에 뛰어든 적은 없었다.

얼마나 멍청하고, 바보같이 보일까. 연재는 빳빳하게 얼은 채로 남자의 성기를 받아들였다. 배 안쪽까지 쑤셔 박을 때마다 내벽이 움찔거리며 흉흉하게 발기한 것을 오물오물 씹어댔다. 남자는 혀를 내밀어 입술을 훑었다.

입구에서 우당탕,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맞아 구르고 뼈와 주먹이 부딪쳐 소름 끼치는 소리를 냈다. 엎어진 누군가가 신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키는 듯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싸움은 끝이 났다.

아마도 백이언, 그 남자가 쓰러졌을 것이다. 그는 덩치에 비해서는 다소 작은 편이었으니까.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주먹에 얻어맞았겠지. 어째서 이곳까지 온 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저 때문에 두들겨 맞았을 것이다.

연재는 무력함에 눈꺼풀을 질끈 감았다. 제 위에서 더운 숨을 내뱉는 남자의 침음만이 적적한 허공에 깔렸다. 추잡스럽고 더러웠다. 가장 불쾌한 건, 그 더러운 행위의 중심에 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남자는 정액이 왈칵 새어 나오는 내벽에 미친 듯이 좆을 쑤셔 박으며 행위에 집중했다. 아래가 너덜너덜해져도 상관없다는 듯, 허리를 짓쳐 올리며 성기의 밑단이 닿을 만큼 깊게 쑤셔 넣고는 게슴츠레 눈을 떴다.

“씨, 씨발. 또 싸겠네…….”

열기로 붉어진 남자의 낯이 역겨웠다. 남자는 가까이 다가와 연재의 볼을 슥, 핥아 올렸다. 그리고 남자가 절정에 이르는 순간, 소리를 참을 수 없을 만큼 커다란 고통이 엄습했다.

“아윽, 흑, 악!”

“아악, 씨발! 뭐야! 야, 윽!”

백이언은 한숨을 쉬고는 남자를 멀리 던져버렸다. 그의 머리를 내리찍은 카메라가 삐그덕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남자는 무기력하게 곤두박질을 쳤고, 연재는 갑작스레 뽑혀 욱신거리는 아래를 가리고자 무릎을 모았다.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덜덜 경련했다.

“부인.”

“흐, 흡…….”

“일단 나갈까요?”

백이언은 해사하게 웃으며 흰 뺨에 묻은 핏자국을 닦아냈다. 연재는 경직된 몸으로 헐떡이며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연재를 가볍게 안아 들고는 삼각대 위에 고정된 카메라를 쥐어뜯었다. 단단한 삼각대가 으득,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백이언은 연재의 품에 카메라를 얹어 주고는 유유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 * *

차 안은 따뜻했다. 연재는 시트 구석에 몸을 구기고, 그가 던져 준 담요로 몸을 가렸다. 아래에서 계속해서 정액이 흘러나오자 백이언은 노골적으로 혀를 찼다.

“시트에 좆물 안 묻게 해요. 더러우니까.”

“…….”

담요로 그 아래를 받친 뒤 몸에 한껏 힘을 주었다. 덜덜 경련하는 몸을 훑던 백이언은 차를 움직여 어딘가로 향했다.

“어, 어디, 어디 가요?”

“부인 집에요.”

“아…….”

그가 왜 여기에 있는지, 어째서 제가 그곳에 있음을 알았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다만 그의 까만 차가 익숙하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연재는 몸을 끌어안고 눈을 질끈 감았다.

“왜 연락 안 했어요? 며칠 기다렸는데.”

“…….”

“번호를 잊은 건 아니겠고…… 회장님이 밤일을 생각보다 잘하시나?”

농담을 뱉은 백이언은 저 홀로 웃으며 노래를 틀었다. 가사 없는 잔잔한 클래식이 흘러나왔다. 지금 상황에는 전혀 맞지 않은, 밝고 희망찬 가락이 차 안을 맴돌았다.

“난 전화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부인, 그렇게 사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 거 같길래.”

“…….”

“이 회장님한테 버려지면 사창가로 가는 건 알아요?”

몸이 움찔거렸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으나 연재는 대꾸하지 않았다. 두어 번 얼굴을 본 남자를 믿을 정도로 순진하게 굴어서는 안 됐다. 조금 전에 겪지 않았는가. 아무나 믿고 들어선 제 과오의 결과를.

“진짠데? 그냥 안 보내요. 생각해 봐요, 부인. 이름 좀 있는 대기업 회장이, 몇 년간 굴려 먹던 걸레를 그냥 보내주겠어요?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

“기업은 이미지가 생명이거든. 특히 요즘은 까딱하면 인터넷에 다 퍼져서 골로 간다니까.”

연재는 듣고 싶지 않아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그런다고 안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가 아무 이유 없이 제게 이러는 까닭을 알 수 없어서였다. 그냥 불쌍해서 도와준다고 생각하기엔 그 또한 선배처럼 큰 기업의 회장이었고, 오메가를 이용한 사업에 동의하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제 꼴이 불쌍하게 느껴질 리가 없다. 그런 사람이 집에서 그렇게 행동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클럽을 이용하는 것도, 그리고 이렇게 저를 찾아온 것도.

“이래도 이 회장님이 좋아요? 현모양처네, 완전.”

“……저.”

“응? 이제 입을 열라고?”

백이언이 비죽이며 백미러를 통해 연재를 힐끔거렸다. 작은 거울 안쪽의 연재는 새파랗게 질려선 불쌍하게 떨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강간당한 사람치고는 괜찮은 상태긴 했다. 한두 번 당한 게 아니라 익숙해졌나. 백이언은 큭큭, 하고 웃음을 흘렸다.

“……저한테, 뭘 바라시는 거예요.”

“아아, 이거 서운하네. 방금 그놈들한테는 그런 속옷을 입고 보지구멍을 대 주시더니, 저는 경계하시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

“알죠, 알죠. 부인 보지는 이미 먹긴 했지. 그것도 스스로 대 주셨었지, 참.”

노골적으로 희롱하는 언사에 연재가 고개를 숙였다. 그는 모두 사실만을 말하고 있어서, 따질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대차게 물어본 것이 무색하게 눈썹을 축 내리자 백이언이 빨간불이 들어온 것을 보고 차를 서서히 멈췄다.

파란 핏줄이 솟은 손등이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연재는 그를 힐끔거리며 침을 삼켰다.

“내가, 이 회장님한테 당한 게 좀 있거든요.”

“…….”

“그래서 부인을 좀 이용해 보고 싶어. 부인은 안전하게 이별하고, 나는 복수하고. 그러고 싶어서 연락해 달라고 한 건데…… 이렇게나 현모양처일 줄은 몰랐지.”

여전히 서글서글 웃는 얼굴에 가슴 안쪽에서 무언가 치밀어 올랐다. 가볍게 다가와 동정을 던져 주더니, 지금도 저를 얕잡아 보고 있었다.

“……그, 그거. 제가 선일 씨한테 말할 수 있… 어요.”

“협박하는 건가요?”

“……으.”

“내가 부인을 망가트리는 건 일도 아니에요. 하지만 굳이, 정말 굳이 내가 제안해 주는 거라고.”

초록 불이 켜졌다. 차는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출발했다. 누가 보더라도 비싼 차임이 분명했기에, 다른 차선에서 가까이 다가오지 않으려는 게 보였다. 연재는 담요로 어깨를 감싸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억지로 데려갈 마음은 없거든요. 순순히 와 줬으면 좋겠는데 내가 너무 바라는 걸까?”

“…….”

그대로 대화가 끊겼다. 연재는 계속해서 백미러로 백이언을 훔쳐보았지만 그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앞만 보았다. 그가 가볍게 내뱉었던 선배에 대한 이야기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래, 그냥 놔줄 리가 없다. 또 제가 순진하게 이혼만을 기다렸구나.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연재는 담요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한참을 가 집에 도착했다. 집으로 느껴지지 않는 집. 연재는 알몸에 담요만 두른 채로 머뭇거렸다.

“부인.”

“……네?”

“카메라는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들어가요. 내가 말한 거 다시 생각해 보고.”

“…….”

삼각대 아래가 부러진 카메라를 힐끔거리자 가슴이 스산해졌다. 그의 경고가 아까처럼 가볍게 들리지 않았다. 연재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차 문을 열었다. 누가 제 꼴을 볼까 두려워 급히 문을 닫고 나가는데, 창문을 연 백이언이 손을 뻗어 연재의 팔목을 잡아당겼다.

“아! 왜요……?”

“잠깐만.”

그는 뭔가 잊었다는 듯 품에서 지갑을 꺼냈다. 연재는 주변을 둘러보며 발을 동동거렸다. 차 너머로 사람 두엇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가 하는 양을 힐끔거리며 불안함에 떠는데 백이언이 지갑에서 수표 몇 장을 꺼내 연재의 손에 억지로 쥐여 주었다.

“……뭐예요?”

“일 구할 정도로 돈이 없나 싶어서? 그리고, 이 영상 값이에요. 처리한다는 게 내가 소장한다는 뜻이라.”

순간 얼음장 같은 찬물이 끼얹어진 듯 심장이 쿵, 하고 멎었다. 연재는 입을 크게 벌렸다가, 급히 차 안으로 팔을 집어넣었다.

“……내놔요! 카메라, 카메라 줘요!”

“아이쿠, 안 되지. 미리 챙기지 그랬어요? 화대나 가지고 들어가요, 부인.”

카메라까지 손이 닿질 않았다. 뒷좌석을 다시 열고자 했으나 이미 닫힌 상태였다. 어쩌지, 또 바보같이! 눈두덩이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실수에 실수에 실수. 모두 제 탓이었다. 이렇게까지 된 건 모두, 자신이 잘못해서였다. 연재는 금방이라도 울 듯한 얼굴로 백이언의 차를 붙들었다.

“제발요, 잘못했어요. 주세요.”

“주면 내가 말한 거 할 거예요?”

“그, 그건……!”

어찌 감히 제가 선배를 배반할 수 있을까. 연재는 저를 쏘아보는 눈빛에 어깨를 경직시켰다. 그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창문을 올려 닫았다. 손가락이 끼기 전에 황급히 빼내자, 그가 손을 가볍게 흔들고는 차를 돌렸다.

멍하니 서 있던 연재는 제 손에 들린 수표 몇 장을 보다 걸음을 빨리해 집으로 들어섰다.

현관을 열고 들어가자 다행히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텅 빈 신발장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래도 고용인들이 있는 터라, 연재는 주변을 둘러보며 절뚝절뚝 욕실로 들어섰다.

남색의 담요로 간신히 몸을 가린 제 모습은 누가 보아도 창부에 가까웠다. 마르고 하얀 몸에 사내들의 손자국이 남아 있었고, 눈동자는 바람결에 마모된 돌덩이처럼 빛을 잃었다. 담요를 쥔 손에 힘이 빠지자 맨몸이 훤히 드러났다.

이전보다 더 부은 유두와 꽉 죄어오던 덩치의 손 모양이 온몸에 가득했다. 연재는 말없이 서 있다가, 욕조에 물을 담았다.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라 거울을 가릴 때까지 거울 속 자신을 보는 얼굴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보였다.

왜 자꾸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왜?

골목의 남자들은 왜, 제게 그런 짓을 했을까. 규서와 규서의 친구는 왜…….

간신히 알아낸 면접처는 왜 하필 그런 곳이었을까. 사진을 찍는다는 말에 왜 저는 바보 같이 고개를 끄덕였을까, 왜, 왜? 이상함을 느꼈을 때도 왜, 제대로 저항 한 번 하지 못하고 질질 끌려 다녔을까, 왜!

지독히도 불행한 삶이란 생각이 들었다. 괜찮을 거라고, 조금만 버텨서 이곳에서 벗어나면 될 거라 생각했는데. 다시 처음부터 쌓아 올리면 평범한 인생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저도 모르게 억세게 쥐고 있던 주먹을 풀자 구겨진 수표가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그는 정확히 화대라고 표현했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괜찮아.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괜찮았다. 아직 죽지 않았으니까, 살아 있으니까 뭐든 할 수 있었다. 버티고 또 버텨서, 어떻게든…… 살면.

“흑…….”

투명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뺨을 흐르고 바닥으로 낙하했다. 연재는 주저앉아 수표를 주웠다. 그가 동정으로, 또 화대로 내민 이 돈조차 버릴 수 없는 제 현실이 너무 비참했다.

그간 제게 닥친 환경을 탓한 적은 없었다. 슬프지도 않았다. 더 열심히 살면, 노력하면 괜찮을 거라고. 더 나아질 거라고 그리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재의 하늘은 이미 무너지고 있었고, 솟아날 구멍은 보이지 않았다. 다 제 마음이 약해서였다. 바보같이 속고, 매번 허술하게 행동하고, 노력하지 않는 멍청한 저라서, 그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힘들게 발견한 구멍 너머가 과연 천국일까. 화사한 꽃으로 둘러싸인 달콤하고 행복한 천국일까. 아니면, 또다시 저를 짓누르는 무거운 하늘일까.

ㅈㅊ@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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