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 (완결)-저녁이에요, 어둑한 밤이 왔어요 (6/9)

달콤한 하루 3권 (완결)

저녁이에요, 어둑한 밤이 왔어요

조금 일찍 서울로 돌아온 선일은 연재에게 붙여 놓았던 놈에게 전화를 걸었다. 출장을 갔던 곳과의 시차 때문인지 연락이 되지 않아 화가 난 참이었다. 하루 이틀은 너그러이 봐주려 했으나 삼 일째가 되자 급히 일을 처리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물론 업체에도 서른 통은 넘게 전화를 했었다. 그러나 업체도 연락이 되질 않는다며, 우선 오시면 설명하겠다는 둥 횡설수설 변명만 늘어놓았다.

공항에서 바로 기다리던 차를 타고 집으로 이동했다. 이동하는 내내 불안감에 가슴이 술렁거렸다. 당분간 출장을 가지 말까, 아니, 가더라도 채연재를 데리고 다녀야 하나?

잠깐만 눈을 떼면 자꾸만 일이 터졌다.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금붕어 똥처럼 회사까지 데리고 다녀야 하나 고민하던 선일은 다시 업체에 전화를 걸었다.

“아직도 연락이 안 됩니까.”

- 그, 회장님.

“일을 이따위로 처리하는지 몰랐습니다. 자리 비웠다고 아주 제멋대로십니다?”

이가 바득바득 갈렸다. 통화 상대는 조금 주춤, 하더니 낮게 깔린 목소리로 조용히 답했다.

- 죄송합니다. 예기치 못한 일이 생겨서…….

“뭡니까, 그게?”

- 그때 사모님께 붙여 두신 녀석이 하루 만에 연락이 되질 않아 바로 다른 녀석들을 보냈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그들도 연락이 끊겼습니다만…… 어제저녁에 뭉텅이로 발견했습니다. 대부분 중상입니다. 사모님께서도, 아드님께서도 집을 비우신 상태라 수소문을 했는데 가는 족족 다른 업체와 부딪쳤구요.

“다른 업체?”

- 예, 그…… 다진그룹의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곳의 사유지라 들어갈 수 없다고도 했습니다.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다진그룹. 백이언이 회장을 맡은 곳이었다.

현재 한국의 대부분 기업들은 30대의 젊은 회장들이 자리를 꿰차고 있다. 수십 년간 이어 오던 기성세대의 지배를 무너트린 것은 선일을 포함한 백이언 등 30대의 회장들이었다.

나이 든 이들은 속수무책으로 물러나야 했다. 건강한 우성 알파의 피. 그 피의 우월함은 증명되었고, 그들은 자신의 힘을 증명하듯 온갖 사업에서 탁월한 성적을 보여주었다.

해외 수입으로 인해 부진했던 농산물 산업부터 시작해, 화장품 사업과 반도체 사업, 의류 사업과 자동차 사업 등 젊은 우성 알파들은 차례차례 일을 정리해 나갔다. 이로 인해 지금의 임원진들이 대부분 바뀌었다.

다진그룹 또한 그중 하나였다. 선일이 막 아버지에게 사업을 이어받을 때쯤, 임원들 사이에서 불만이 튀어나오기 시작할 때 백이언 또한 사업을 받아 회장으로서의 업무를 완벽하게 해낸 것이다.

물론 아직은 불안감이 어느 정도 존재했다. 그들이 회장직을 맡은 지 몇 년이 지났으나, 10년 뒤, 그리고 20년 뒤의 일은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못 찾았다는 건가?”

- 아, 아닙니다. 바로 주소를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은 해결된 상태이며, 두 분이 어디에 계신지 확인했습니다. 숲 깊은 곳에 위치한 펜션이고, 이곳은 다진그룹 백이언 회장의 소유입니다. 우선 두 분 외에는 아무도 없는지라, 따로 조치는 취하지 않았습니다. 직접 오시겠습니까? 아니면 저희 쪽에서-.

“바로 주소 보내. 너는 내비 찍고.”

즉 연락이 되지 않던 이삼 일간, 두 업체가 다툼이라도 벌였단 뜻이다. 돈이 오갔는지, 어떻게 해결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시일이 그만큼 걸렸다는 건 좋은 뜻은 아닐 것이다. 선일은 집에 돌아가 즉시 업체를 갈아치울 생각을 하며 핸드폰을 내던졌다.

쿵, 하는 소리에 운전사가 침을 삼켰다. 곧 그의 핸드폰으로 주소가 전송되었고, 그는 잽싸게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찍어 그곳으로 이동했다. 집에서 1시간 넘게 걸리는 서해 방향이었다.

* * *

노팅은 빠른 시간 내에 오메가의 히트를 막아 주지만 고통스럽다는 부작용이 따랐다. 특히 연재처럼 작은 몸을 한 오메가들은 몇 날 며칠이고 아랫배를 움켜쥐며 끙끙 앓았다.

규서는 기절한 연재를 침대에 누이고, 그 옆에 누워 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작은 얼굴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단아하게 내려가는 눈썹 탓인지 자는데도 묘하게 억울해 보였다. 동글동글한 눈매는 눈을 뜨면 조금은 사나운 아기고양이처럼 보이게도 했다.

새 부리처럼 작은 입술은 꽤나 붉었다. 며칠간 하도 물어뜯은 탓에 껍질이 죄다 까진 탓이었다. 엄지 끝으로 그것을 살살 쓸자, 고운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올 때가 됐는데.”

백진혁이 보낸 문자를 생각해 보면, 사유지라고 막고 있던 것을 풀었으니 아버지든 경호든 뭐든 올 것이 뻔했다. 이 시간이 조금만 더 길었으면 좋겠다만, 아버지가 서울에 왔으니 일은 일사천리로 돌아갈 것이다.

그때까지 잠시 이 시간을 즐기기로 했다. 규서는 연재의 이마부터 눈두덩이, 코, 뺨, 입술을 살살 훑었다. 히트 싸이클 기간에 노팅까지 했으니 임신은 뻔했다. 아마 여태껏 임신하지 않았던 그로서는 당황할 일이겠지만.

“채연재…….”

세 글자로 된 이름을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채연재, 채연재. 앞과 뒤의 모음이 같아 부르기 재밌었다. 이름까지 꼭 본인을 닮은 것 같다. 사람은 이름 따라간다더니, 채연재는 꼭 채연재 같았다. 무슨 뜻이냐 물으면 저도 할 말은 없었다.

물수건으로 닦고 새 옷을 입힌 몸은 여전히 가늘고 상처가 많았다. 흙바닥에서 그 짓을 했으니 멀쩡할 거란 생각은 안 했지만 등의 상처가 심했다. 며칠 간 얻어맞은 뺨도 붉게 부어있었고. 아마 아버지가 본다면 미친 듯이 날뛰겠지. 그건 상상만 해도 좋았다. 그에게 피떡이 되도록 맞아도 좋을 것이다.

게다가 이 몸이 제 아이를 가졌다는 걸 알게 된다면. 더욱더.

“엄마, 채연재, 엄마.”

이번엔 호칭과 이름을 번갈아 불렀다. 기절하듯 자던 연재가 잠시 우응, 하고 칭얼거리더니 규서의 품으로 파고들고 나서야 한숨을 폭 내뱉었다. 추웠던 모양이라 규서는 작은 몸을 꽉 끌어안아 주었다.

아무도 없는 산속 펜션에서 단둘이 있는 기분은 생각보다 더 좋았다. 진작에 이럴 것을 그랬다. 이게 좋아하는 감정인지, 사랑한다는 것인지 알았더라면 후회할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규서는 연재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살짝 웃었다. 이제부터라도 잘해 주면 되지 않을까. 제 아비가 평소와 다르긴 했으나 그는 제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질리는 순간 이 오메가를 사창가로 팔아 버릴 것이다.

그때 다시 데리고 오면 되었다. 그리고 제 것으로 만들어, 이렇게 고요하고 작은 곳에서 단둘이 사는 것이다. 따뜻한 음식을 해주고, 아이를 낳으면 둘이서 오순도순 사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규서는 기분 좋은 상상에 몇 번 더 연재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입술의 껍질이 죄다 뜯겨지고 까져 거칠었다. 혀끝으로 살살 문지르자 따가운지 눈꺼풀이 찡그려진다. 그것조차 귀여웠다.

“참 신기하죠, 엄마.”

사랑한다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세상이 달라 보인다는 게요.

싸구려 네임택처럼 아무나 지껄이는 그 단어에 그런 힘이 있다는 것도요.

직선 몇 개가 그어진 그 단어에, 그 말에 심장이 뛴다는 것도요.

방 안에 따스한 정적이 감돌았다. 그리고 잠시 뒤, 차가 급하게 정차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가 왔구나. 직접 온 모양인지 문을 거칠게 두들기는 소리가 귀를 내리쳤다. 그는 성질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다 문을 박살 내 버렸다.

“이규서!”

제 이름에 담긴 분노를 읽은 규서는 슬며시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연재를 제 허벅지 위에 앉히고,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댄 채로 아버지를 기다렸다.

쿵쿵 이곳저곳을 뒤지던 아버지는 금세 방을 발견했다. 잠긴 문에 또 화를 내다가, 무언가를 가져와 그 틈을 마구 부수었다. 콰직, 커다란 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선일은 붉은 눈으로 식칼을 바닥에 내던졌다.

“너,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구나.”

“쉿, 어머니 자잖아요. 지금 피곤해서, 깨면 안 돼요.”

선일의 시선이 잠시 연재에게로 닿았다. 아이보리색 얇은 옷을 입은 연재는 지친 얼굴로 곯아떨어져 있었다.

“잠깐 놀러 온 건데 뭐 그렇게 화내세요?”

그리고 헐렁한 옷이 흘러내려 드러난 어깨에 수없이 많은 울혈이 보였다. 생채기, 사내들의 흔적. 규서의 허벅지에 올라온 작은 손은 한껏 움츠려져 있었다.

“이리 내.”

“뭘요? 엄마요?”

“…….”

더 이상 아버지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규서는 이미 세성그룹의 차기 회장으로 교육을 받고 있었고, 새 아들을 얻으려면 시간이 많이 소요될 터였다. 아, 뭣하면 저와 채연재의 아이가 그 다음을 이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성큼 다가온 선일이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사정없이 규서의 뺨을 갈겼다. 고개가 돌아가 벽에 부딪힐 만큼 거센 주먹질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연재는 잠에 빠져 있었다. 기절한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선일은 벌겋게 부은 뺨을 만지는 규서를 보다, 연재를 안아 들었다.

며칠 새 가벼워졌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놈이 늘 그랬듯, 오메가 하나에 알파 여럿을 불러 더럽게 놀았을 터다. 연재의 의사는 상관없이.

선일은 연재를 품에 안고 급히 방을 나갔다. 나가며 함께 온 경호원에게 방 안에 있는 놈도 끌고 나오라 명했다.

그는 결코 제 것에 다른 사람이 멋대로 손대도록 두지 않았다. 제가 허락한 것이 아니라면. 규서 또한 선일의 아들이었고, 선일의 것이었다. 제게 반항해서는 안 되는 ‘것’. 그간 싫은 소리 없이 지내더니 이제 와 무슨 난리인지 모르겠다.

당장 두들겨 패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연재가 걱정되었다. 선일은 차에 오르고, 곧 운전사의 옆자리에 앉는 규서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차가 빠르게 출발했다.

* * *

“연재야, 연재야?”

“아, 선배. 왜, 왜요?”

“집중 안 하길래.”

“아…… 죄송해요.”

연재는 어설피 웃으며 목덜미를 살살 긁었다. 눈앞의 선배는 다정하게 웃으며 피곤했냐고 물었고, 연재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고 몇 번이나 말했음에도 그는 노트북을 접고 짐을 챙겼다.

“밥이라도 먹을래?”

“괜찮아요. 그, 뭐…… 학식 먹으면 되니까.”

“맛없잖아. 피곤한 것 같은데 든든하게 고기 먹고 가. 알바 하지?”

“네…….”

선배는 좋은 사람이었다. 소심하게 구는 저에게도 잘해 줬다. 우성 오메가라 하여 제게 알파들이 추근댈 때면 신기하게 나타나 과제를 하러 가자고 말을 걸어 주곤 했다.

별것 아닌데, 정말 별것 아닌데도 연재는 그에게 홀딱 반해버리고 말았다. 연재는 짐을 챙겨 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

도서관은 조용했고, 사람은 몇 없었다. 구석에 앉아 만화책을 읽는 몇 명만이 눈에 띄었다. 학생증을 찍고 도서관 밖으로 나가는데, 갑자기 선일이 사라졌다. 연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변을 살폈다.

그때 어깨에 멘 가방이 쿵, 하고 무거워졌다. 다시 한번 쿵, 쿵, 쿵. 놀란 마음에 가방을 내던지려 했으나 그것은 떨어지질 않았다. 그리고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그때야 멀리 선일이 보였다. 그를 부르려 했으나 건물은 삽시간에 무너졌다.

연재는 놀라 뒷걸음질을 치다가 제 다리를 감싸고 올라오는 검은 뱀을 보며 소리를 질렀다. 뱀뿐만이 아니었다. 지네와 개미, 알 수 없는 벌레들이 온몸을 기어올랐다. 몸을 일으켜 도망가려 했으나 가방이 무거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결국 천장에서 내려오는 돌벼락에 머리를 크게 얻어맞았다. 바닥으로 쓰러지자 뱀과 벌레들은 신이 난 듯 연재의 몸 안으로 파고들었다. 살갗을 찢고, 혈관으로 들어섰다. 구역질이 났다. 손으로 입을 가리자 숨이 턱 막혔다.

그때 누군가 돌덩어리를 치우며 연재의 머리채를 휘어잡아 올렸다.

“엄마?”

해맑게 웃는 얼굴은 규서였다. 연재는 멍하니 올려다보다가, 아랫배에 치닫는 고통에 숨을 들이켰다. 배 안에 든 무언가가 커다랗게 부풀기 시작하더니 내벽을 마구 내리쳤다.

연재는 발버둥을 치며 뱀과 지네들을 밀어내고, 소리를 질렀다. 규서는 그런 연재의 머리를 쓰다듬고 끌어안았다. 다급히 규서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나 다시 한번 심장이 쿵, 하고 멎었다. 규서의 팔이 뱀처럼 저를 휘감아 오고 있었다.

그는 볼록하게 튀어나온 아랫배를 꾹, 짓누르며 연재의 귓바퀴를 핥았다.

“엄마, 내 아이를 낳아 줘요. 네?”

끔찍한 꿈이구나. 그제야 꿈임을 깨달은 연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도망칠 곳은 없었다.

연재는 눈을 뜨자마자 벌벌 떨었다. 갓 태어난 새끼 새처럼, 눈에 띄게 떨며 이불을 마구 더듬었다. 그러다 익숙한 천장이 보이자 이불 안으로 쏙 들어가 숨었다. 온몸을 동그랗게 말고 미친 듯이 떨었다. 선배의 집인가. 선배의 집이면, 여기는 규서가 없을까? 그 남자들도 없나?

그때 또 지네가 발끝에서부터 천천히 올라왔다. 이번에는 목덜미까지 빠르게 올라와 칭칭 감았다. 연재는 숨이 조여드는 감각에 놀라 두 손으로 목을 마구 긁었다. 그러나 벌레는 떨어지질 않았다. 검은 뱀도 나타났다. 발목이 쓰라리도록 강하게 다리를 만 뱀이 아래를 건드렸다.

급히 이불 밖으로 나갔다. 집이 맞았다. 익숙한 안방, 익숙한 냄새가 났다. 그러나 선배는 보이지 않았다. 연재는 비틀거리며 욕실로 뛰어갔다. 그때 거실에서 나오던 선일이 연재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채연재?”

“서, 서, 서, 선일, 씨…….”

“뭐해? 왜 그래?”

“몸에, 몸에…… 벌레가, 너무 많아서. 흑, 흐, 숨이, 막혀서, 아, 흐으…… 막, 들어와요, 어, 어떡…… 흑!”

선배를 보자 안심이 되었는지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러나 벌레와 뱀들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연재를 괴롭혔다. 급기야 뱀은 연재의 음부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안쪽까지 꾸물꾸물 들어오는 감각에 연재는 엉엉 울며 몸부림을 쳤다.

“아파, 아파요. 너무 아파, 흐, 흐아, 흑, 아!”

“채연재!”

선일이 손에 든 것을 내던지고 뛰어왔다. 와장창, 유리가 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연재는 두 손으로 제 목을 벅벅 긁다가, 손을 아래로 내려 무언가를 잡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손에 잡히는 건 없었다.

맨바닥에 쓰러져 허공을 보고 울고 있었다. 연재의 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뱀도, 벌레도 무엇도. 그를 괴롭히는 건 스스로였다. 선일은 급히 연재를 안아 침대 위에 올렸다.

“벌레 없어. 뱀도 없어. 정신 차려, 채연재.”

“흐으, 끅, 아파, 아파요…… 너무, 너무 싫어어, 흐, 흐윽, 아…… 제발, 흑, 제발요, 자, 잘못했-.”

“연재야, 채연재. 아무것도 없어. 아프지 않아. 숨 쉬어.”

숨을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선일은 급히 입을 맞추고 숨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연재가 흐윽, 하고 숨을 삼켰다가 뱉었다. 눈물이 질질 흘렀다. 어찌나 울었는지 눈가가 발갛게 물들어 쓰라릴 듯했다.

선일은 손수건이라도 가져올 생각으로 몸을 일으키다, 제 팔을 잡아끄는 연재에 의해 상체가 앞으로 쏠렸다.

“가지, 가지 마세요. 잘못했어요. 서, 선배. 선배 제가, 잘못…… 흑, 흐으, 아파, 아파아…….”

상태가 심각했다. 선일은 입술을 질끈 물고 연재를 품에 안았다. 계속해서 숨을 불어넣어 주고, 괜찮다고 속삭여 주었다. 선배라고 부른 것에 혼을 낼 생각도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다독여 주자 연재는 울다 지쳐 스르륵 잠이 들었다.

선일은 이불을 덮어 주고, 뜨거운 이마에 손을 올렸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는 당장 비서에게 연락해 오늘 일정을 모두 취소했다. 그리고 기업과 협약을 맺었던 병원으로 전화해 정신과 의사를 불렀다. 몸의 상처는 이미 다른 의사가 보고 난 후였으니까.

연재는 자면서도 벌벌 떨고 있었다. 가슴 한쪽이 지끈지끈 아파 왔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도저히 가늠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단추를 잘못 꿰었던 것일까? 이 아이와 결혼한 것도 잘못이고, 그저 오메가로 대한 것도 잘못이었을까.

몸을 일으켜 안방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계단 옆, 지하실 문을 벌컥 열었다.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한쪽 벽면에 아주 작은 문이 있었다. 선일은 성큼 걸어가 문을 발로 걷어찼다.

“이규서!”

건너편은 조용했다. 쪼그려 앉아 꼼짝도 할 수 없을 만큼 좁은 곳에서, 하루를 보낸 녀석은 대답도 하지 않았다. 죽었을 리는 없다. 예전부터 죄를 지으면 집어넣었던 곳이니 익숙할 터다.

“너 무슨 짓 했어. 이규서, 일어나. 당장!”

소리를 크게 지르며 문을 마구 내리쳤다. 단단한 철로 이뤄진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선일은 자물쇠를 노려보다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어젖혔다.

이전보다 몸이 커져 더욱 좁아진 곳에 웅크린 규서가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대답해. 무슨 짓 했어?”

“아무 짓도.”

“애가 미쳐서 환각을 보는데 아무 짓도 안 했다?”

“평소처럼, 오메가를 가지고 놀았을 뿐이에요.”

결국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다. 선일은 좁은 곳에 구겨져 있는 규서를 향해 발길질을 했다. 몇 번이고 내리쳐도 화는 풀리지 않았다. 멍이 들고, 머리에 피가 나는 놈을 봐도 불난 집에 부채질이라도 한 듯 열기가 솟았다.

“자세히 말해.”

“커, 커헉…….”

“말해.”

“……히트, 채연재가 히트가 온 게 다야.”

선일은 세차게 문을 닫았다. 다시 자물쇠를 걸고, 지하실 위로 올라갔다. 올라가는 내내 분노가 온몸을 감싸 도저히 제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지하실 문까지 닫고 나와서야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뱉었다. 그리고 눈 하나 깜빡이지 않으며 안방 문을 쳐다보았다.

색색 고른 숨을 내쉬며 잠이 든 소리가 들렸다. 애초에 이 집에 들여선 안 됐다. 저렇게까지 망가트릴 생각도 없었고, 계약서에 적힌 대로, 적당히 일이 끝나면 다른 오메가들과 달리 조용히 보내주려 했다.

물론 그것은 처음의 생각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선일은 연재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귀한 투홀 오메가라서? 이전에 알던 후배여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채연재가 괴로워하는 꼴이 보고 싶지 않았다. 다른 놈이 건드리는 것도 허락하고 싶지 않았다. 선일은 거실 중앙에 가만히 서서 눈을 깜빡였다.

결혼에 설레하던 채연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와는 다르게 완전히 망가져 울부짖던 방금의 모습도.

날이 갈수록 지쳐 가는 모습과 더불어 저에 대한 마음을 놓지 못한 듯 계속해서 기대하는 것도.

곧 있으면 제 러트 주기가 왔다. 약을 먹을 생각이었지만, 우성 오메가를 바로 옆에 두고서 멀쩡할 리는 없다. 잠시 떨어져야 했다. 하지만, 이규서도 그렇고 백이언도 그렇고 걸리는 것이 너무 많았다.

만약 채연재를 밖으로 굴리지 않았더라면, 백이언이 꼬일 일도 없었을 터다. 또 저 병신 새끼가 일을 치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전의 오메가와는 다르다는 걸 보여줬다면.

손끝이 저려 왔다. 때마침 누군가 초인종을 눌렀다. 불렀던 의사였다.

* * *

의사는 즉시 입원할 것을 권했으나 선일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제 눈앞에서 잠시라도 떨어지면 불안했다. 그간 눈을 뗄 때마다 일이 벌어지지 않았던가.

진정제를 맞고 새근새근 잠이 든 연재를 보니 속이 답답했다.

‘선배, 혹시… 혹시 내일 시간 있으세요?’

졸업 학기 말, 선일은 채연재가 저를 좋아하는 걸 알고 있었다. 더 이상 같이 과제를 하지 않아도 붙어 오는 시선, 눈이 마주치면 화들짝 놀라 짐을 챙겨 도망가는 꼴 등. 주변의 녀석들조차 알아챌 정도로 채연재는 티를 냈다.

오죽하면 채연재의 페로몬 향이 무엇인지에 대해 과에 소문이 퍼질 정도였으니.

‘왜?’

‘아, 그…… 전에, 과제 도와주신 거. 감사해서…… 밥, 사 드리고 싶어서.’

고민을 하던 선일은 거절했다. 졸업 학기라 바쁘다고 부드럽게 밀어낼 수도 있었지만, 채연재가 아예 희망을 버리길 바랐다.

‘그게 언제 적인데 이제 와서? 딴맘 있는 건 아니고?’

‘……네?’

‘미안한데 나 사귀는 사람 있어. 다른 오메가랑 밥 먹는 거 보이면 소문날 거야.’

작은 얼굴이 딸기처럼 새빨개졌었다.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어설픈 거절보다는 확실한 게 나았다. 어차피 저는 곧 아버지 밑으로 들어가 차기 회장의 업무를 행할 터고, 그에 맞는 오메가가 배정될 것이다. 이름뿐인 결혼으로 그 오메가는 사업에 유용하게 쓰여야 했다. 채연재처럼 맘 약한, 그런 오메가 말고.

‘죄, 죄송해요.’

‘아니야.’

‘……먼저 가볼게요.’

의사는 연재를 보고는 환각, 환청에 심각한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이라 말했다. 항시 사람이 붙어 있어야 할 정도로 좋지 않은 상황이라고, 반드시 병원에 입원해야 한다고.

수북하게 쌓인 2주 치 약을 보자 속이 답답해졌다. 제가 어떻게 해야 했을까?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 예언이라도 했어야 한단 말인가. 결혼 직후 채연재는 혼란스러운 듯 보였으나 꽤 잘 적응했다. 아픈 몸으로도 봉사하고자 굴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라도 말렸어야 했을까. 아니, 결혼할 때부터 채연재는 예외로 두었어야 했나?

하지만 제 입장에서는 다른 때와 다름없는 결혼이었다. 앞의 세 결혼처럼. 안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차별을 두어선 안 됐다.

게다가 과한 것을 요구한 것도 아니었다. 나름대로 알파클럽의 첫날은 다른 이들이 손대지 못하게 일렀고, 집에 오는 손님만을 대접하게끔 했다. 그들에게도 채연재가 구르긴 했어도 이렇게 몸을 파는 것은 처음일 테니 심한 짓은 하지 말라 일러두질 않았던가.

지하실에 감금된 이규서, 그리고 정신이 나간 채연재. 이렇게 되길 바란 적은 없었다. 선일은 답답함에 넥타이를 풀어 헤치며 거실로 나가 앉았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들려다, 갑작스러운 불안감에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결국 다시 담뱃갑을 집어넣고 방으로 향했다. 얌전히 잠든 얼굴을 보고 나서야 불안함이 해소되었다. 선일은 한숨을 내쉬며 침대 옆에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커다란 손에 얼굴을 묻고 한숨을 내뱉었다.

진정제를 맞았기에 깨어나지 않을 걸 알면서도 초조함에 입술을 물어뜯었다. 그러다 잠시 후, 전화가 왔다.

“말해.”

- 회장님, 문중열 부장입니다. 며칠간 있었던 일은 정말,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

- 다진그룹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우선 그 펜션에서 다진그룹의 백진혁과, 회장님의 아드님인 이규서 님께서 다니시는 대학 축구부의 모임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모님은 아무래도 이규서 님께서, 직접…… 옮기신 것으로 보입니다.

“알아. 그리고 어차피 거기 사유지라서 알아볼 것도 더 없지 않나?”

- ……죄송합니다.

“집 부근으로 경비 열댓 명은 더 붙여. 알겠나? 이번에도 일을 그르치면 이 업계에 발도 못 들이게 할 생각이니까 철저히 해. 그리고 다진그룹, 백이언 감시 붙여.”

- 네, 죄송-

선일은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즉시 비서에게 연락을 취했다.

- 네, 회장님. 김 비서입니다.

“지금 당장 다진그룹 쪽 흐름 알아봐. 걔네 새 사업 시작하는 거. 해외 쪽으로 오메가 관련 사업을 준비하는 걸로 알고 있으니까.”

- 네, 그러도록 할게요. 내일 아침까지 브리핑해 드리면 될까요? 내일 출근하시나요?

“아니. 오전 중으로 전화하도록 해.”

- 알겠습니다.

사유지를 이용한다는 걸 백이언이 몰랐을 리가 없다. 그리고 제 아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알고 있을 터다. 아니, 아들을 이용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새끼 아들과 이규서가 센터에서부터 아는 사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친분이 두텁다 생각하여 크게 신경 쓰지 않았건만.

선일은 입술을 마구잡이로 물어뜯었다. 그때 테이블 위 연재의 핸드폰이 잘게 진동했다. 메시지인 듯싶었으나 비밀번호가 걸려 있었다. 제 번호 외에는 등록한 것이 없는데.

“하…….”

화가 치솟으니 러트 기운이 재빠르게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내일이면 주기가 딱 들어맞기도 했다. 선일은 우선 테이블 아래에서 약을 꺼내 마른 목구멍으로 밀어 삼켰다.

다시 시선을 내려 채연재를 쳐다봤다. 양팔이 엉망이었다. 목 부근도 그랬다. 제 손으로 미친 듯이 할퀸 자국이다. 생채기에는 벌써 피딱지가 진 곳도 있었다. 조심스레 상의 단추를 벗기자, 안쪽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흔적들이 가득했다. 피멍과 돌부리에 찍힌 자국들, 발버둥을 치며 얻어맞았을 부위들까지.

* * *

다음 날도, 다다음 날도. 선일은 자리를 비우지 못했다. 하물며 식사까지 침대 옆에 앉아 했으니 연재는 눈을 뜰 때마다 선일을 볼 수 있었다.

그가 옆에 있다고 안정이 되는 건 아니었다. 연재는 깨어날 때마다 발작을 일으켰고, 선일이 겨우 진정시키고 나서야 죽을 먹었다. 죽을 먹는 와중에도 온몸이 간지러워 참을 수 없었다.

선일이 러트 기간임을 알았다. 연재는 그가 떠날 때, 다시 돌아온다면 제가 있는 힘껏 도와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연재는 제정신이 아니었고, 선일은 약을 평소보다 배로 먹으며 연재의 곁을 지켰다.

하지만 그것도 삼 일째가 되는 날에는 도저히 버틸 수 없었다. 연재에게까지 러트로 인한 기운이 닿아, 강제로 히트가 발동된 탓이다. 의사는 같은 방을 쓰지 않을 것을 권고했고 선일은 결국 옆방으로 옮겨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하여 몇 번이나 방을 오갔다.

다행인 것은 그때마다 연재는 자고 있었다.

한시름 놓자, 그제야 졸음이 몰려왔다. 지하실에 갇힌 제 아들도 떠올랐다. 이쯤이면 되었다 싶어 선일은 지하실로 내려갔다. 약을 먹었음에도 러트의 기운이 가시지 않아 머리가 뜨끈뜨끈했다.

“이규서.”

너무 오래 가뒀나 싶어 곧바로 자물쇠를 풀어 문을 열어 주었다. 성인 한 명 들어가기도 좁은 곳에서 녀석은 여전히 같은 자세로 쪼그려 앉아 눈을 형형하게 빛내고 있었다.

“나와.”

“…….”

“나오라고.”

설마 이 새끼도 미쳐서 말귀를 못 알아먹나. 억지로 머리채를 잡아끌었다. 툭, 하고 몸이 굴러떨어졌다. 규서는 주저앉은 채로 선일을 노려보았다.

“왜, 더 있고 싶어? 계속 있으니 집처럼 편안한가?”

“……넌, 사람 가지고 노는 게 재밌지?”

악에 찬 목소리에 선일은 한숨을 내뱉었다. 모든 게 피곤했다.

“있고 싶으면 있던가. 말리지 않아.”

물 한 방울 먹지 않아 버석하게 마른 입술이 가늘게 떨리며 열렸다.

“……아직인가 봐.”

“뭐?”

“당신이 알았으면 이 정도로 풀어 줄 리가 없는데 말야.”

규서가 순간 스산하게 웃었다. 몇 년간 함께 지냈던 제 아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규서는 퀭한 눈을 휘었다. 이를 드러내 입꼬리를 올리고, 이채가 스민 눈빛을 번뜩이며 큭큭, 하고 숨을 죽여 웃었다.

“멍청한 새끼…….”

손을 놓자 규서는 두 다리를 길게 펴고 앉아 고개를 뒤로 젖혔다. 우득, 몸 이곳저곳에서 굳은 뼈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

“또 뭔 짓을 했나? 백진혁, 그 자식이랑 같이?”

“하하…… 하, 하하…… 올라가 봐. 지금 알기는 힘들겠어.”

그간의 이규서는 선일의 말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해 왔다. 처음에는 아버지에게 가지는 선망 때문에, 그다음엔 두려움, 그리고 마지막엔 길들여짐.

가학적인 폭력과 벌을 내려도 고분고분 굴었다. 착한 아들까지는 아니었으나, 선일에게는 나쁘지 않은 녀석이었다. 그러나 지금 제 앞에 있는 이놈은 누구란 말인가.

피는 못 속인다고, 이규서의 모습이 제 어린 시절처럼 보였다. 선일은 입술을 삐뚜름하게 구기고는 놈의 머리채를 잡아 다시 작은 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규서는 조금도 반항하지 못하고 그 안으로 구르듯 들어서면서도 계속해서 웃었다.

“하하, 하하하! 흐, 흐흐, 하하…… 하, 당신은 졌어. 아버지, 당신은 나한테 졌다고.”

마지막 말을 끝으로 다시 문을 닫아 자물쇠를 걸었다. 보통 하루 이틀 이 안에 가둬 두면 얌전해졌었는데. 선일은 발끝에 힘을 주어 급히 지하실을 나왔다.

그리고 다시 제 방으로 들어가려다, 연재가 누워 있는 안방 문을 열어젖혔다. 침대 위 이불이 도톰하니 올라와 있었다. 숨소리도 내지 않고 기절하듯 자는 것에 안심하고 문을 닫았다.

* * *

선배가 의사를 부르러 갔을 때, 연재는 무의식중에 제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어차피 흔적은 남고, 선배가 조사한다면 충분히 알 수 있을 테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리고 머릿속에 깊게 남겨진 번호를 입력했다. 전화를 받은 남자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때가 되면 즉시 문자를 보내라 하였다.

하지만 며칠이고 선일이 제 곁에서 떠나질 않았다. 연재는 잠에서 깰 때마다 저를 보는 선일을 보았다.

아직도 그가 좋았다. 우습게도, 정말 바보 같게도. 누군가 제게 왜 미련을 버리지 못하냐 물으면 저도 할 말이 없었다. 좋아하는 것에 이유가 있을까. 과거의 기억이 다시 살아나 그 추억에, 혹은 그 기억에 의존하여 다시 사랑이 되살아나는 것이 잘못일까?

그러나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었다. 선일의 집에는 벌레가 너무 많았고, 그를 볼 때마다 규서의 얼굴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게다가 이 집에서 일어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잠시 화장실을 가려 거실을 지날 때면, 그곳에서 손님들을 대접한 것이 떠올랐다.

그곳을 지나쳐 현관으로 걸어갔다. 이곳에서는 묶인 채로 규서의 친구들에게 범해졌다. 그리고 규서의 방으로 가는 2층을 올려다보면 영상을 찍히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제 아래를 보인 것이 떠올랐다.

모든 일이 삽시간에 제 머리를 채웠다. 연재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선배를 좋아하고, 그와 함께 있고 싶었지만 이토록 고통스러운 것을 참아 가면서 함께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러트를 위해 이것저것 준비했던 게 떠올랐다. 미리 집에서 일하는 고용인들에게 그의 주기를 물어보고, 부끄러운 물건을 부탁해 구입하기도 했다. 러트가 온 알파와 성관계를 할 때 도움이 된다는 최음제도 구했다. 그리고 부끄럽지만 결혼 첫날 그에게 주고자 사 왔던 결혼반지도 넣어 두었었다.

옷장 안쪽에 꽁꽁 숨겨 두었으나 그것은 아마, 평생 쓸 일이 없을 것이다.

연재는 멍한 얼굴로 선일이 제게서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선일의 러트가 시작되었다. 알파 페로몬의 영향으로 저까지 괴로워지자 선일은 제게서 거리를 두게 되었다. 자꾸만 방을 확인하러 오는 것 때문에 타이밍을 잡기 힘들었다.

졸음도 참아 가며 눈을 부릅뜨고 기다렸다. 그러다가 몸을 기어오르는 더러운 벌레들을 내치고, 긁으며 한참을 참았다. 의사가 준 약을 먹으면 벌레는 잠시 사라졌지만 약 기운이 떨어지면 다시 뱀이 목을 졸랐다. 그래서 힘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선일이 방을 나서고, 지하실로 향하는 것이 들렸다. 연재는 늘어진 팔을 뻗어 즉시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지금,]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꽁꽁 잠가 두었던 창문이 벌컥 열렸다. 놀라기도 전에 커다란 손이 연재의 팔 아래로 뻗어 가슴을 감싸 안았다.

“아…!”

“쉿.”

그는 꼭 장난꾸러기처럼 웃었다. 이런 것도 나름 재밌죠, 하고 속삭이기까지 했다. 백이언의 얼굴을 보자 왠지 모르게 기운이 빠졌다. 이 집에서 빠져나왔기 때문일까. 더 이상 선일에게서 규서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 때문일까.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했다.

하지만 과연 잘한 선택일지는 모르겠다. 그 또한 믿을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백이언의 등에 몸을 기대자 그가 잘게 웃었다.

“그렇게 내가 그리웠어요?”

“…….”

정확히는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이 지옥에서 저를 빠져나가게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다. 당장, 아주 당장.

백이언은 아래에서 큰 곰 인형을 들어 이불 속에 집어넣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누군가 자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끔.

그는 연재를 안은 채로 뒤뜰을 지나 담을 넘었다. 먼저 연재를 위로 올리고, 건너편에서 기다리던 그의 수족이 연재를 받아냈다. 그 손길도 끔찍하기 짝이 없어 연재는 내려서자마자 그에게서 물러섰다.

주변을 둘러보니 세 명 정도의 남자가 피떡이 된 채로 쓰러져 있었다. 가만히 두면 죽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연재는 시선을 돌려 백이언의 차에 올라탔다. 곧 그도 담을 넘어왔다.

* * *

“여기가 부인 집이에요.”

“……제 집이요?”

“당장 잘 곳 없지 않아요?”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작게 웃었다. 집은 적당히 크고 아늑했다. 아니, 이전에 부모님과 살던 집을 떠올리면 아주 호화로웠다. 가구는 필요한 것들이 모두 채워져 있었고 누군가 꾸며 놓은 것처럼 벽지나 소파 위 쿠션, 러그 등이 깔려 있었다.

“……제게 원하시는 게 뭐예요?”

그제야 연재는 힐끔 물었다. 두 손을 맞잡고 제 손바닥 안쪽을 불안하게 긁었다. 하도 물어뜯어 피가 새어 나오는 손끝은 꾹 누를 때마다 욱신거렸다. 손톱이 안쪽으로 파고드는 것처럼.

“그냥, 여기 있으면 돼요. 딱히 바라는 건 없고…… 나중에 부탁 하나 있긴 한데.”

“……무슨, 부탁이요?”

“큰 건 아니고요. 싫어하시는 거 억지로 시킬 일은 없어요. 우선 푹 쉬어요, 부인.”

눈을 가만히 깜빡이자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편히 있으라고 나가 주었다. 선일의 집에서 10분가량 달려서 도착한 오피스텔에 연재 혼자 남게 되었다.

연재는 백이언이 나가자마자 참고 있던 숨을 터트렸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벽을 짚은 채로 눈을 질끈 감았다. 온몸이 미친 듯이 경련했다. 백이언, 그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의 얼굴이 괴물처럼 보이기도 했다.

제 상태가 평범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다. 선일 선배가 정신과 의사를 바로 불러 주었으니까. 의사는 안정될 때까지 집에서 나가지 않는 것을 추천했다. 괜찮아지면 마당까지 둘러보고, 더 괜찮아지면 집 근처만 조금 걷다 오라고.

지속적으로 올 테니 약도 꼬박꼬박 먹으라고 했는데.

“아, 약을…… 두고 왔는데.”

백이언에게 말해야 할까? 연재는 도리질을 쳤다. 좋지도 않은 것을 이리저리 퍼트리고 싶지 않았다.

과연 그가 원하는 것이 뭘까. 아무 이유 없이 제게 집을 주었으리라곤 생각되지 않는다. 하물며 함께 협업했던 회장의 집에서, 그의 오메가를 납치했으니 무언가 중요한 것이 달렸음이 분명했다.

……선배에겐 피해를 줄까? 그건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저를 가지고 백이언이 협박할 일은 없을 것이다. 연재는 선일의 아내가 아니라, 그 집의 오메가였을 뿐이니까. 성 욕구를 배출할, 오메가. 규서가 말했던 대로 제 의미는 그것에서 그친다. 필요하다면 새 오메가를 들일 터다.

작은 도둑키스도 한순간의 착각, 그리고 장난이었을 지도 모른다.

연재는 손등으로 입술을 훔쳤다. 이대로 선배와는 끝인 걸까. 다시 볼 수 있을까.

우습게도 선배가 보고 싶었다. 제 옆에서 밤을 지새우며 지키던 것이 진심이 아니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왜 저 같은 것에게 그리 해주었는지 모르겠다. 당장 죽고 싶었다. 차마 스스로 할 용기는 없어서, 누군가 절 죽여 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선배도 저에 대한 호감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사라졌으면 좋겠다. 첫날처럼 더럽고 추한 오메가라고 생각하기를. 그래서, 제가 죽어도 아무렇지 않기를.

연재는 현관 앞에 쪼그려 앉아 울었다.

* * *

연재는 결혼 후 처음으로 안정적인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피로와 아픔에 지쳐 잠드는 것이 아니라 잘 시간이 되어 침대에 스스로 누웠다.

결혼생활이 길지도 않았는데 많은 일이 있었던 탓일까.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새로운 집은 깔끔하고 좋은 향기가 났다. 현관으로부터 바로 거실이 보였고, 커다란 유리 창문이 있어 바깥바람을 쐬기에 좋았다. 하얀 창틀을 만지작거리다 소파에 앉아 TV도 볼 수 있었고, 졸리면 거실을 등진 오른쪽 방에 들어가 푹신한 갈색 침대에 드러누울 수 있었다.

그러나 연재는 편하게 쉬지는 못했다. 자꾸만 고용인들이 드나드는 것만 같았고, 깜빡 잠에 들면 이전처럼 어딘지 모를 곳에서 눈을 뜰까 두려워서였다. 피로를 풀기 위해 누웠다가도 선일이나 규서가 생각나 깜짝 놀라며 일어나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러다 보니 집을 옮겼다고 상태가 나아지진 못했다. 언제까지 이 집에서 머물기만 해야 하는지, 선배와 이혼은 할 수 있는지, 부모님께는 무어라 해야 할지. 이런저런 고민에 휩싸이다 보면 모든 걸 관두고 싶었다. 자신만 사라지면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종종 발작을 일으키기도 했다. 선배의 앞에서 울어댔던 것처럼 욕실로 뛰어가 찬물로 몸을 씻고, 손톱을 세워 살갗을 벅벅 긁었다. 피가 나도록 긁다가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곤 했다.

마지막으로 선배의 집에서 누워 있던 날도 그러했다. 몸에 닿는 모든 것이 저를 끔찍하게 짓이길 것만 같았고 선배의 얼굴 너머로 규서가 다가와 목을 졸랐다. 더럽고 흉악한 뱀이 아가리를 벌리며 제 속으로 파고들었고, 생살을 모조리 찢어 놓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또 문득 정신이 들었다. 그것은 생존본능에 가까웠다. 머릿속에서 새빨갛게 불이 들어온 사이렌이 경고음처럼 울렸고, 저절로 어깨가 뒤틀렸다. 방을 나가야 했고, 집에서 벗어나야 했다. 다행인 것은 행동하기 전에 백이언의 번호가 떠올랐다는 점이다.

이전에는 뭘 하고 살았더라, 취미는 뭐였고 무얼 좋아했더라. 이 공허함에서 빠져나가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연재는 다음 날 아침, 냉장고에 들어차 있는 반찬을 꺼내 밥을 먹었다. 다만 평소보다 많은 양을 꾸역꾸역 먹어야 했다. 제 몸에 들러붙어 사는 벌레들이 밥을 빼앗아 먹었기 때문이었다.

뱀은 주로 목 부근을 돌아다녔다. 특별히 선배와 규서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으면 그들은 몸 위를 유유히 기었다.

식사를 끝내면 소파에 앉아 TV를 봤다. 그나마 무언가가 보이고, 소리가 들리니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연재는 특히 공포영화나 스릴러 같이 집중하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을 골라 보았다.

스토리는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주인공들이 소리 지르고 도망치는 장면에 빠져 있노라면 시간이 금세 흘렀다. 그렇게 영화 몇 편을 보다가 온종일 채널을 돌려 가며 화면만 쳐다보았다.

텔레비전 옆에는 액자가 하나 있었다.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성경의 문구인 듯싶었다. 찾아보니 구세주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사람들을 대신해 죽은 이후에 나온 구절이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연재는 텔레비전을 보다가, 그 옆의 문구를 보기를 반복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것이 되었다. 새것. 이전 것. 이전 것은 무엇이고 새것은 무엇일까? 몇 번 고민해 보았으나 연재에게는 크게 와닿지 않았다.

죄를 짓기 전이 이전 것, 죄가 사해진 후가 새것이라면 지금의 자신은 어느 쪽에 속할까. 하지만 사람은 늘 죄를 짓지 않던가. 잘못했다고, 용서해 달라고 빌어도 시간이 지나면 똑같았다. 부메랑처럼 돌아오곤 했다.

그 한 구절이 자꾸만 머리에 맴돌았다.

그렇게 삼 일째가 되었을 때, 연재는 먹던 것을 모조리 토했다.

속이 좋지 않아 소화제를 먹었으나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올라왔다. 자꾸만 소변이 마려워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기분도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의사가 준 약을 먹지 않아서인 듯싶었다. 연재는 주저하다 백이언에게 문자를 보냈다.

[병원을 좀 다녀와도 될까요?]

정중한 문자였으나 백이언은 답이 없었다. 그리고 한참 뒤,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혹여 선배가 왔을까 두려워 숨을 죽였더니 그가 작은 목소리로 자신을 의사라 소개했다.

* * *

채연재가 사라졌다. 고용인들에게 식사를 전해 주라는 말도 하기 싫어서 제가 직접 갔더니, 이불 속 녀석이 꼼짝도 하질 않았다. 선일은 쟁반을 내려놓고 연재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렸다. 그러나 단단하고 마른 어깨가 느껴지지 않았다. 손이 푹 들어갔다.

이불을 걷자 그 안에는 우는 얼굴의 곰 인형이 누워 있었다. 온기 하나 없는 찬 매트와 이불, 저를 놀리기라도 하듯 울고 있는 곰은 새하얀 털에 앙증맞은 빨간 리본을 달고 있었다.

선일은 눈을 깜빡이다 이불을 놓았다. 몇 번을 들춰도 채연재는 없었다. 혹시 장난치는가 싶어 집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그의 머리털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그저 안방 구석, 채연재의 작은 가방만이 눈에 보였다. 그 안에는 노트북 하나가 달랑 들어있었다. 이전에 이것으로 채용정보를 뒤적이고, 콜라 따위를 시켰었다. 다른 주머니까지 찾아보자 칫솔이 들어 있었다. 선일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괴상한 기분에 욕실에 가보니 그곳엔 제 물건밖에 없었다. 채연재는 매번 가방에서 칫솔을 꺼내서 쓰고, 다시 그 안에 넣으며 생활하고 있었다.

옷장도 열어 보았다. 집안에서만 입는 짧고 얇은 옷가지 여러 개가 고스란히 걸려 있었다. 흔한 겉옷도, 속옷도 없었다. 그제야 선일은 제 집에 채연재의 흔적이 단 하나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어떠한 짐도 들이지 못하게 한 것은 저였다는 것도.

머릿속이 새하얗게 점멸했다. 신체가 마모되듯 손끝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돋았다. 불과 몇 시간 전 제 탓은 없다고, 자신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 외던 것이 머리를 스치다 커다란 소용돌이에 빠진 것처럼 뇌 안에서 빙빙 돌았다.

저만 믿고 온 채연재에게 해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다른 이들의 손에 내던지고, 구렁텅이에 밀어 넣으며 버티라고 한 것이 저였다. 애초부터 그래 왔다고, 돈에 팔려 왔으니 상관없다며 싫단 소리 하나 하지 않는 아이를 그리 두었다.

제 손 안에 채연재가 없었다. 아니, 시야 안에. 그는 본래부터 제 것이 아니었다. 결혼을 했을 때에도 채연재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 마른 몸뚱이 하나만 가졌을 뿐, 어린 날 수줍게 웃던 연재는 갖지 못했다.

심장이 두근, 두근, 두근 뛰었다. 하얗게 지워졌던 머릿속으로 여러 이미지가 나뒹굴었다. 시작부터 끝까지 오롯하게 저만 보던 채연재의 까만 두 눈동자가 선명하게 가슴에 박혔다.

결혼식 날, 다른 사내와 관계를 가진 듯한 나신에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었던가. 그래도 아는 사이니 적당히 해야지, 그래도 나쁜 관계는 아니었으니까 시일이 조금 지나면 바로 이혼해 줘야지. 그리 생각하다가 그것을 보고는 병신처럼 작은 아이를 내돌렸다.

이름을 불렀다고 벌을 주고, 멋대로 집 밖을 나갔다고 혼을 냈다. 겁을 먹고 도와달라는 표정을 한 것에도 시선을 돌렸다.

원래 저런 애였으니까, 애초에 이러기 위해 데려온 것이니까, 정당하게 돈을 주고 사 온 몸이니까 괜찮다고.

채연재도 제법 잘 버텼다. 못하겠다고 손을 들 줄 알았더니 적응하고자 노력했다. 이규서로 인해 몇 번의 사고가 있었음에도 꽤나 긍정적으로 굴었다. 그럴 때 그만했어야 했다.

그를 멋대로 가지고 논 사내들은 모두 다리 사이의 것을 자르고, 다리 한쪽을 평생 절게 만들었다. 그럴 때에도 선일은 자신의 행동을 어떤 감정이라 정의할 수 없었다. 이전의 오메가들은 비슷한 일이 있어도 모르쇠 했었는데도.

그저 아는 사이였어서, 이전에 좋은 후배로 봤기 때문에, 착한 아이니까…… 그래서 화가 났을 뿐이라고 그리 생각했는데.

펜션에서 돌아온 연재는 당장 죽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아슬아슬해 보였다. 푹신한 침대에 누워 있는데도, 녀석이 절벽 끝에 서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차라리 환각을 보고 제게 달라붙을 때가 나았다. 약을 먹고 상태가 진정된 후의 채연재는, 멍하니 벽을 바라보았다.

아주 멀리,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듯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한 얼굴로.

“…아, 아.”

아, 그래선 안 됐다. 그리 가만 두어서는 안 되었다.

매번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소처럼 구는 녀석은 안쪽부터 곪아 들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 아주 옛날부터 썩어들어간 것일지 모른다. 달콤할 거라 여겼던 복숭아 안쪽이 썩어 문드러져, 검게 물든 것처럼 스스로를 다독이며 버티고 버텼던 것이리라.

무차별적인 욕설과 폭력을 감내하고, 노력 끝에 도망칠 수 있었음에도 강하게 옥죄는 부모의 음성에 끌려 다니면서 아주 어릴 적부터 그렇게 죽어갔을 것이다. 어쩌면 채연재라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냥, 매번 열심히 하고 일을 하고 남의 말을 듣는 껍데기만이 존재했을 것이다.

숨통이 콱 조여 왔다. 텅 빈 침대와 낡은 검은색 가방. 연재의 흔적은 그것뿐이었다. 그것이 못내 선일의 가슴을 내리쳤다. 배 안쪽 내장까지 뒤틀린 것처럼, 신체의 모든 부위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사라진 것처럼 아팠다.

그냥, 그 아이 하나가 사라졌을 뿐인데.

당장 집 주변의 CCTV부터 뒤져야 했다. 연재가 어떻게 빠져나갔는지는 안 봐도 뻔했다. 창문이 훤히 열려 있었으니까. 그리고 메시지가 왔던 핸드폰도 사라져 있었다. 그러나 선일은 무릎을 꿇고 앉은 채 멍하니 주먹을 쥐었다. 몇 벌 없는 텅 빈 옷장 앞에 앉아서, 아직 연하게 남아 있는 러트 기운에 눈을 깜빡이면서.

그러다 구석에 놓인 검은 봉투가 보였다. 콜라라도 사서 숨겨 두었던 것일까. 선일은 초점을 잃은 눈으로 손을 뻗었다. 바스락 소리에 제풀에 놀라 움찔, 어깨를 들썩이다 그것을 끌어냈다.

봉투 안으로 손을 넣어 잡히는 것을 꺼냈다. 하나둘 꺼낼 때마다 선일의 얼굴에 금이 갔다.

알파의 흥분을 잠재우는 작은 향수, 러트가 온 알파와 관계할 때에 쓰이는 미약, 오메가가 사용하는 젤.

누가 보아도 러트가 올 알파를 위해 오메가가 준비한 물품이었다. 환청처럼 제가 연재에게 한 말이 떠올랐다. 곧 주기가 다가오니 집에서 기다리라고. 저는 약을 먹을 생각이었고, 채연재의 몸에 성욕을 풀고자 하지 않았다. 다만 러트가 온 알파는 신경이 예민하니 경고의 의미로 주의를 준 것이었다.

채연재는 제 말을 들은 직후 이규서의 품에 안겨 차로 옮겨졌었다. 그렇다면 이건, 그 이전에 준비했다는 뜻이다.

정적을 뚫고 숨이 뱉어졌다. 그때까지 숨을 참고 있던 선일의 손이 잘게 경련했다.

어째서 더 일찍 돌아오지 못했을까, 어떻게 이규서가 이전에 한 일을 알았음에도 연재를 두고 갈 생각을 했을까. 왜 경호를 고작 한 명 붙였을까.

……연재는 이것들을 준비하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손만 뻗으면 닿았던 사람이 모래처럼 사라져 버렸다. 믿을 수 없는, 아니 제대로 알지도 않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할 정도로 급하게 도망치고 말았다. 제가 오가는 동안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집안에 싸움 흔적 하나 없었으니 제 발로 나갔음은 분명했다.

허망함에 목소리도 나가질 않았다. 성대를 잃은 사람처럼, 제 숨처럼 곁에 있던 사람이 한순간에 사라지니 가슴이 텅 빈 듯 쓰렸다.

채연재가 벼랑까지 내몰린 것은 제 탓이다. 미쳐버린 것도 제 탓이었다. 비록 속이 문드러졌더라도 모두 외면하고 열심히 살아가던 아이를 멋대로 갈취해 아프게 한 것도 제 탓이다. 이규서를 통제하지 못하고 위험에 빠트린 것 모두, 제 잘못이었다.

이래서야 그를 다시 본다 하더라도 사죄할 수 있을까. 감히 용서를 구할 수 있나. 제 주제에 감히, 저 때문에 고통받으면서도 제 생각만 하던 이에게 그리 말할 수 있나.

연재를 제 아내로 들인 것이 아니었다. 채연재가 제 목줄을 쥐었던 것도 모르고, 선일은 제 주인을 박대하였다. 내 것이라 생각했으나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게 아니라면 이리도 속이 쓰릴 리가 없었다.

봉투를 질끈 쥐었다. 가당치도 않다. 이미 지난 일에 이런 생각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소용없는 것이다. 후회를 할 시간에 움직여야 했다. 이것은 선일이 그간 삶을 살아온 방식이기도 했다.

실수, 잘못을 깨달으면 곧장 실행에 옮겼다. 엎지른 물을 일일이 떠 어떻게든 담아냈다. 물 얼룩이 진하게 남으면 그 위에 잉크를 퍼부었다. 모두 해결되면,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주의했다.

그러나 선일은 움직일 수 없었다. 누군가 제 몸을 꽁꽁 묶어 둔 것처럼 숨이 막혔다.

그때 봉투 안에서 아주 작은 것이 손에 걸렸다. 급히 봉투를 뒤집으니 싸구려 케이스 하나가 툭, 떨어졌다. 손끝이 잘게 떨렸다. 과연 제가 열어도 되는 것이 맞는지,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발견한 것처럼 아득해졌다.

선일은 조심스레 케이스를 열었다. 뻑뻑한 남색 케이스 안에 한 쌍의 은색 반지가 놓여 있었다. 하나는 작았고, 하나는 컸다. 큐빅조차 박혀 있지 않았으며 무척 가늘었다.

우습게도 눈가에 물기가 맺혔다. 선일은 무감각한 낯으로 반지를 손에 쥐었다. 아무리 계약 결혼이었다 해도, 결혼반지 하나 주지 않았던 것이 떠올랐다.

제게 눈물을 흘릴 권리는 없었다. 가슴 아파해서도 안 되었고, 후회해서도 안 됐다. 이미 채연재는 망가졌으며 백이언과 함께 이곳을 떠났다.

백이언.

그 이름을 떠올리자 선일은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들었다. 초점이 또렷하게 맞춰진 눈동자가 천천히 무언가를 생각하듯 깜빡였다.

선일은 두 개의 반지를 주머니에 밀어 넣고, 이전에 쓰던 경호업체가 아닌 다른 곳으로 전화를 걸었다. 옛날에 저지른 실수의 원인 중 하나였던 곳이었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지하실로 내려갔다. 퀴퀴한 냄새가 났으나 그는 결심한 듯 지하실로 들어서 이규서를 처넣었던 작은 문을 열어젖혔다.

제 아들이 힘없이 굴러떨어졌다. 선일은 그의 속내를 꿰뚫어 보듯 발끝으로 고꾸라진 몸을 뒤집었다. 퀭한 얼굴과 흐리멍덩한 눈동자가 천장을 보고 있었다.

“채연재가 사라졌다.”

“…….”

이규서는 가둬 키운 놈이었다. 제 어릴 적처럼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어 눈을 굴렸었다. 아버지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이를 악물고 대학을 간 것도 같았다. 돈이 철철 넘쳤음에도 꼬박꼬박 장학금을 타 오는 것도 예전의 제 모습과 닮은 명백한 핏줄이었다.

“백이언이야. 백진혁도 관련돼 있고.”

“…….”

며칠간 물도 못 마신 녀석은 버석하게 마른 입술을 들썩였다. 아까처럼 할 얘기가 있나 싶어 내려다보는데,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이전에 혁도가 생각나냐.”

“……흐, 으그, 끅…….”

“그 녀석을 불렀어.”

선일은 서늘한 눈으로 간신히 숨을 꼴깍꼴깍 삼키며 몸을 일으키는 규서를 쳐다보았다.

“넌?”

규서는 서러운 낯으로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장난하지 마요,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짧은 새에 온갖 생각이 들어찬 모양인지 아직 혼란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천장에서 채도가 낮은 노란 불빛이 어른거렸다. 연신 울음을 삼키던 녀석은 엄마, 하고 불렀다.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듯하여 선일은 걸음을 옮겼다. 저와 닮았으나 이 부분에서는 아니었구나, 하고.

그러나 곧 양 입술을 질끈 말아 문 규서가 선일의 바지춤을 붙들었다. 그의 경련이 여기까지 느껴졌다. 다시 뒤를 돌자 규서는 팔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 벽에 몸을 부딪치고, 마른기침을 뱉었다.

“가요, 흐, 가, 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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