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친 하루가 끝나고 이제는 코 할 시간
백이언. 35세, 우성 알파. 188cm에 적당한 체격과 유난히 요사스럽게 생긴 가느다란 눈. 유난히 높고 곧은 코와 호선을 그리는 다정한 입술. 23세부터 다진그룹에 들어가 사업에 뛰어들었으며 25세에 아버지에게 회장을 물려받음.
크고 짙은 소파 위에 앉아 핸드폰을 켜자 소파에 앉아 있는 채연재의 모습이 드러났다. 멍하니 앉아 화면을 보고 있는 걸 보니 입꼬리가 자연스레 올라갔다. 이언은 의자에 몸을 기대며 목을 이리저리 꺾었다.
두둑, 뚝. 뻐근한 목덜미를 제 손으로 주무르던 이언은 다시 허리를 펴 책상에 몸을 기댔다. 사업은 순탄하게 진행 중이다. 건물도 한 달이면 지어질 터고, 채연재도 구해 왔다.
굳이 이 오메가로 할 필요는 없었다. 투홀인 것도 마음에 들었고, 예쁘장한 얼굴이나 낭창한 몸이나 끌리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딱 그 정도. 그럼에도 도움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데려온 것엔 과거의 기억이 그를 건드렸던 탓이다.
말하자면 채연재는 운이 좋지 않았다. 하필 이 타이밍에, 이선일의 아내가 된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일 테지.
게다가 그가 꽤 아끼는 듯 보였으니 이언의 눈에는 채연재만큼 적합한 이가 없었다. 그래서 굳이 그를 데리고 와 괜찮은 집을 구해 주고, 다정하게 대하는 중이었다.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지만.
한 회사를 부도나게 하는 것은 꽤나 어렵다. 그것도 이선일의 세성이라면 대기업이다 보니 무얼 망가트려도 다시 일어날 것이 뻔했다. 그러니 차근차근, 아주 작은 곳부터 시작해야 했다. 처음에는 그가 아끼는 것부터, 그리고 그의 바닥까지.
처음부터 이선일을 증오한 것은 아니다. 그가 그리 밉지는 않았다. 제가 그 일을 겪은 것은 순전히 아버지라는 가해자가 있었기 때문이므로.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직접적인 가해자보다 그 일을 일어나게 만든 원인에게 화가 치솟는 법이다. 게다가 이선일은 저와 비슷한 때에 회장으로 위임되어 경쟁 아닌 경쟁을 겨루지 않았던가. 몇 번은 다진그룹이 앞서나갔으나 대부분은 이선일의 세성이 먼저 치고 나갔다.
그러니 이제는 현실이 얼마나 혹독한지, 그에게 알려줄 때가 되었다. 실패란 무엇이고 후회가 뭔지 말이다.
올라간 입가를 살살 매만지던 이언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몇 년이 지났으나 아직도 머릿속에는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스물셋, 막 사회에 뛰어든 이언은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언에게는 세 명의 형제가 더 있었고, 아버지는 이언이 아니더라도 쓸 만한 카드가 세 장이나 더 있다는 뜻이다.
그랬기에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야 했다. 아버지가 기회를 줄 때면 빠르게 낚아채 성과를 이뤄야 했고, 남의 것이라고 하여도 커다란 기업이라는 이름으로 더러운 짓도 서슴지 않아야 했다.
시작은 드라마 사업이었다.
예술 쪽을 좋아하던 이언은 드라마 쪽 투자 건에 대해 아버지께 위임받았고, 여러 대본과 배우들 그리고 작가진까지 살펴보며 꼼꼼히 골라내야 했다.
난생처음으로 이끄는 제 사업은 실로 떨렸었다.
그리고 이언은, 눈에 띄는 한 대본을 찾아냈다. 심의에 걸리지 않는 적당한 선의 자극, 그리고 상업성과 예술성까지 고루 갖춘 작품이었다.
굵직한 스토리는 매력적이고 치밀했다. 촘촘하게 짜여 있는 데다 적당한 클리셰와 독특함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사건을 이끌어 나가며 묘한 분위기 속에서 로맨스가 진행되는 대본이었다.
즉시 연락해 결정한 대본을 말했고 상황은 빠르게 돌아갔다. 처음 듣는 작가의 이름이었으나 혜성처럼 등장한 신인인가 싶어 즐거워졌다. 천재적인 신인, 처음으로 쓴 대본으로 대박 드라마를 낸. 그야말로 드라마와 같은 이야기였다. 한국 사람들은 그러한 것에 더욱 흥미를 느꼈으니 좋은 홍보 거리가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계약일 당시 나온 작가는 이언이 익히 알던 이였다. 특히 인터뷰 등 화면 속에서 자주 본 이어서, 혹시 필명을 바꾸었냐 물으니 작가는 작게 웃었다. 그리곤 제목이 다른 대본을 내밀었다.
같은 내용이었다. 주인공들의 성격이 조금씩 달랐고, 사건도 달랐다. 조금 더 대중적인 MSG가 가미된 맛. 그러나 원본과 크게 다른 것이 없었다. 후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대본은 공모전을 통해 입수한 것이었고 작가는 이를 자신의 각본으로 속여 드라마로 만든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백이언은 몹시 통탄했다. 예술계가 더럽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대놓고 빼 갈 것이란 생각은 못 했다. 게다가 작가는 자신의 것을 훔쳐 갔다고 하는 대본의 원작가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드라마는 무척 흥행했다. 온갖 커뮤니티에 말이 나올 정도로. 표절에 대한 이야기는 인터넷에서만 떠돌았다. 아버지는 잘했다고 칭찬해 주셨다. 그때부터 무언가 달라졌다.
백이언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표절 건에 대하여 신경을 끄기 시작했다. 하나하나 따지고 들면 이 판에서 남는 대본이 없었다. 아버지의 인정을 받아야 했고, 마음은 조급했다. 원작가들의 원성은 들리지도 않았다.
그때, 세성이 원작가와 함께 책을 발간했다. 막 시작되던 세성의 도서 사업은 순식간에 비대해졌다.
유명 드라마의 원작가. 표절당한 작품의 내용을 기반으로 더욱 새롭게, 그리고 한층 재미를 더한 소설은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전 플랫폼이 그랬다.
가장 무서운 것은 여론이다. 대중은 시청률 20% 이상을 찍었던 드라마와 원작가의 소설을 비교하고, 드라마 작가의 이전 표절 논란에 대해 세세하게 앞다투어 떠들었다. 원작가가 공모전에 응모한 사실도, 원고를 쓴 날짜나 주변인들의 증언도 한몫했다.
드라마의 스탭과 감독, 작가를 비롯해 투자한 다진그룹 등은 대중의 거친 질타를 받아야 했다. 한동안 투자한 회사의 보이콧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대중은 늘 그랬듯 금세 잊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아버지의 분노를 사기는 충분했다.
백이언은 전치 6주가 나오도록 커다란 골프채에 얻어맞았다. 속수무책으로 내리찍는 폭력에 따질 새도 없었다. 참아야 했고, 또다시 일어나야 했다. 다른 형제들에게 빼앗길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도서 사업을 시작한 이의 이름이 이선일이라는 걸 입수했을 때, 백이언의 분노는 그곳으로 향하게 되었다.
* * *
의사가 떠난 뒤, 연재는 망연히 앉아 몇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손을 아래로 내려 제 배를 더듬었다. 아랫배는 여전히 판판하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학병원의 원장이라 소개한 그는 연재의 상태를 듣고, 가지고 온 기기로 테스트를 해보더니 하얀색 막대 하나를 건넸다. 익숙한 모양에 당황하자 그는 의례 차 하는 것이라며 연재를 달랬다.
그러나 결과는 의사의 생각대로 임신이었다. 빨간 두 줄이 선명하게 뜬 테스트기를 든 의사를 다른 기기로 몇 번 더 테스트를 해보더니 확실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축하한다는 말도 덧붙였으나 연재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대답하지 못했다.
하긴 그간 임신하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로 많은 사내들이 제 안에 씨를 뿌렸다. 정액을 빼내고 씻는다 해서 임신이 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임신이 된 적은 없었다. 짧은 기간이라 하여도 수많은 정액을 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이상하다 느끼지도 못했다. 아이를 갖는다는 건 제 인생과 너무 먼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어째서 지금일까. 그간 단 한 번도 이러질 않다가 왜, 지금? 하필 그곳을 떠나온 지금 재앙과도 같은 씨앗이 배에 머문 이유는 무엇일까.
문득 뱀이 몸을 타고 올라와 목을 조였다. 숨통이 틀어막히자 귀신 같은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였다.
‘더러운 아이를 가졌구나. 그 많은 남자들 중, 한 놈의 것이겠지. 강간을 당하면서도 그리 좋아 울더니 아이까지 가지게 되었구나!’
요란하고 섬뜩한 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연재는 더듬더듬, 다시 제 배를 만졌다. 여전히 평소와 같았으나 어쩐지 무언가가 들어 있는 기분에 속이 메스꺼워졌다. 주먹을 쥔 연재는 제 아랫배를 퍽, 내리쳤다.
“으…… 우윽.”
순식간에 토기가 올라와 목구멍으로 치솟았다.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뛰어가 모두 게워내는 내내, 속이 쓰렸다. 먹은 것도 없어 마지막엔 누런 위액이 컥컥대며 변기 물 위로 떨어졌다.
아랫배를 쥔 채로 몇 번을 더 토악질을 하고 나서야 그쳤다. 연재는 파르르 떨며 입을 물로 헹궜다. 거울 속 하얗게 질린 낯이 보였다. 쓰러질 것만 같았다.
* * *
CCTV는 모두 먹통이었다. 선일은 집안에서 담배를 태우며 비서의 전화를 받았다. 몹시 초조해 손끝이 떨렸다. 건너편에 앉은 규서는 퀭한 얼굴로 바닥을 노려보고 있었다.
“브리핑해 봐.”
- 네, 근데 이거…… 그냥 오메가 사업이 아니더라고요. 자세한 부분은 알아볼 수 없게 비밀유지가 되어 있어서, 우선은 사람을 붙였습니다.
“그래.”
- 제가 알아본 바로는 말씀하신 것처럼 오메가 매매와 관련된 일이긴 합니다만, 다소 매니악한 부분이 있더라고요. 최근 다진그룹에서 중남미 지역 쪽 땅을 크게 샀고요. 현재 공사 중인데, 부근은 사유지라 하여 들어서는 것이 불가능하고, 사진은 메일로 지금 보내드렸어요.
때마침 핸드폰이 진동했다. 화면을 보니 비서의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선일은 통화를 스피커 연결로 바꾸고, 메일을 확인했다. 넓고 칙칙한 땅 위에 거대한 무언가가 지어지고 있었다. 평범한 건물 같기도 했고, 거대한 궁궐 같기도 한 생김새였다. 멀찍이서 인공위성으로 찍었는지 사진은 많지 않았다.
- 그리고 국내 사업을 좀 정리하는 기미가 보입니다. 이건…… 좀 된 것 같아요. 의류, 화장품 등 매장을 최소화하기 시작한 게 작년입니다. 아직 건재한 것은 예술사업 쪽 투자고요. 백이언 회장이 예술사업에 공을 들이는 편인 만큼 국내에서도 그건 남겨 두는 것 같고, 대신 해외 쪽으로 시선을 돌려 투자를 쏟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 백이언 회장이 미팅을 가졌던 이들의 목록도 메일 아래로 내려 보시면 포함돼 있습니다. 50%가 중국인이고, 나머지는 다양합니다.
중국. 그 단어에 선일의 눈이 가늘어졌다. 늘어져 있던 규서도 마찬가지였다.
- 대규모 사업을 준비하려는 것은 확실합니다. 다른 정보를 알게 되면 다시 연락드릴까요?
“그러도록 해. 그리고, 혁도에게 연락을 취해 놓았다.”
- 혁도요? 다신 안 하신다고…….
“그럴 일이 있어.”
- 알겠습니다. 그것에 관련해서도 최대한 조심해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알아내면 바로 연락 주고. 당분간 출근은 힘들 것 같으니 일이 생기면 연락해.”
- 네. 좋은 하루 되세요, 회장님.
전화가 끊기자마자 두 부자의 시선이 맞붙었다. 선일은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내려놓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연재를 데려간 이유가 이 사업과 관련이 있는가.
백이언이 묘하게 연재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다른 사내들보다 그가 연재에게 시선을 던질 때마다 불쾌하고, 화가 났다. 선일이 싫어하는데도 불구하고 연재의 펠라를 받거나, 저를 보며 채연재의 몸을 범할 때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백이언이 중국인들과 함께 거대한 자본으로 무언가를 꾸민다는 사실은 꽤 좋은 소식이다. 이것을 기반으로 시작해 놈이 벌여 놓은 사업을 하나하나 무너트릴 수 있다. 오메가 매매 사업. 그것은 여전히 전 세계의 이목을 사로잡는 문제다. 즉, 아직까지도 피해자가 존재하는 지금의 문제.
그런 일에 뛰어든 백이언의 사업은 초창기 그가 드라마 사업을 시작하던 때처럼 뒤가 구린 것들이 많았다. 무너트릴 수만 있다면, 혁도의 일이 무난히 끝이 나 채연재가 다시 제 품으로 돌아올 수 있다면.
모든 것은 깨끗하게 해결된다.
“……아버지.”
생각에 잠겨 있던 선일에게 규서가 말을 걸었다. 추하게 울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꽤나 예리한 눈으로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왜.”
“백진혁에게 들은 게 있습니다.”
낯이 좋지 않았다. 선일은 백이언, 그리고 다진을 무너트릴 생각을 하며 규서를 쳐다보았다. 녀석은 한참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뱉었다.
“오메가가 필요하다고 했어요. 자세히는 말해 주지 않았지만…… 대규모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고 떠벌리고 다녔고요. 사업과 어머니가 관련이 있는 건 확실해요. 그리고…….”
그리고?
눈썹 한쪽을 들어 올리자 규서가 눈을 질끈 감았다. 후회가 가득한 표정이다.
“어머니를 빨리 데려와야 해요. 그 오메가를, 강, 아니… 거의 고문을 할 거라고, 그랬어요. 그리고, 그리고…….”
백진혁은 입이 가벼웠다. 몇 개월 전부터 다진이 커질 것이라며, 해외로 진출해 대규모의 사업을 할 것이라 일렀다. 그리고 거기엔 오메가가 가득할 것이고, 필요하다면 껴 주겠다며 알파놈들에게 속닥거리곤 했다. 축구부 때처럼 소소하게 돈을 뜯어먹을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는 온갖 가학적인 행위를 언급하며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걸 경험할 수 있다고 떵떵거렸다.
그 오메가가 제 어미가 될 수 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규서는 머뭇거리던 입술을 열어 힘겹게 말을 뱉었다.
“어머니 지금, 임신하셨을 거예요.”
* * *
살갗에 소름이 돋아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개미와 뱀들은 연재의 몸을 기어 다녔다. 어디서 들은 것 같다. 아이를 가지면 몸을 따뜻하게 해야 한다고.
연재는 무의식중에 주변을 둘러보다 담요를 발견했다. 누군가 살던 것처럼 모든 게 갖춰진 집이었다. 실제로 사람이 살던 곳은 아닐까 싶었지만 생활의 흔적은 없었다. 연재는 담요를 돌돌 말아 몸을 감싼 뒤, 침실로 향했다.
이불 속으로 들어가 온수 매트의 전원을 켰다. 손발이 시려웠다. 와중에 머리는 지끈지끈 아프고 토기가 올라오고, 배는 고팠다. 먹은 것을 다 토한 후로 아무것도 입에 대질 못했다. 심지어 물만 마셔도 토악질이 났다.
벌이다, 벌. 피가 흐르지 않아도 양아들과 그런 짓을 벌인 벌. 바보같이 속아 이리저리 휘둘리며 부자에게 몸을 넘긴 벌.
손바닥으로 살갗을 슥슥 훑었다. 오들오들 떨던 연재는 결국 이불 속으로 머리까지 집어넣고 몸을 둥글게 말았다. 콜라 먹고 싶다, 콜라. 목젖까지 시원해지는 달콤한 음료가 고팠다. 그거 한 잔이면 속이 다 시원해질 것 같은데, 냉장고엔 없었는데.
왠지 서러웠다. 연재는 손바닥을 폈다가 접기를 반복하며 이불 시트를 박박 긁었다. 그러자 다시 개미들이 스멀스멀 올라와 손끝을 간질였다.
“저리 가…….”
휘휘, 손을 흔들어도 떨어지질 않았다. 결국 주먹을 손바닥으로 마구 문지르며 닦아냈다. 그때였다. 띵동, 하고 초인종이 울렸다. 또 의사 선생님일까? 그가 가기 전에 낙태를 할 수 있냐고 물어봤었다. 그는 잠시 곤란한 듯 고개를 기울이더니 다시 오겠다고 했다.
낙태라, 낙태. 연재는 제 아랫배를 슬쩍 봤다가 고개를 마구 저었다. 이걸 어찌 제 아이라 할 수 있단 말인가. 옳지 않은 행위로 생긴 아이였다. 아이에게 불행을 넘겨주고 싶지도 않았고, 그 아이를 사랑할 자신도 없었다. 연재는 계속해서 손등을 긁었다.
나가질 않으니 또 한 번 띵동, 초인종이 울렸다. 연재는 결국 이불을 어깨에 걸치고 몸에 돌돌 말았다. 이불 끝이 바닥에 질질 끌렸으나 그것까지 추스를 틈은 없었다.
“의사 선생님?”
조심스레 현관문으로 다가가자 건너편이 조용했다. 연재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문을 열었다. 철컥, 문과 벽 사이 틈이 활짝 벌어졌다. 지독한 술 냄새가 났다.
“아…!”
누군가는 연재를 와락 끌어안고는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문을 잠갔다. 이불로 폭신폭신해진 연재를 번쩍 안아 들어 올리더니 살이 쪘네, 하고 중얼거렸다.
연재는 눈꺼풀을 마구 깜빡이다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백진혁이었다.
“너, 너…….”
“형, 안녀엉.”
소름이 확 끼쳤다. 급히 주변을 둘러봤으나 다른 이는 없었다. 규서도, 그가 늘 데려오던 친구들도. 연재는 힘껏 몸부림을 쳤다. 술에 취한 터라 힘이 몹시 셌지만 이불 밖으로 쏙 빠져나오는 것은 성공했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자 백진혁이 이불을 꽉 끌어안고는 뽀뽀를 하다가 어? 하고 고개를 돌렸다.
“언제 거기 떨어졌어?”
“너, 너 나가. 너, 여기에 왜… 왜, 왜 온 거야.”
“아버지가…… 형 좀 돌보래서 왔지. 여기에 애기 생겼다며?”
슬그머니 다가온 녀석이 연재의 아랫배에 손을 올렸다. 아랫배를 전부 감싼 큰 손이 토닥토닥 티셔츠 위를 두들겼다.
“누구 애길까.”
“놔, 놔!”
“시간상으로 그때 생긴 애 같은데.”
벌건 얼굴로 입가를 찢은 녀석이 큭큭, 하고 웃었다. 그러자 뱀이 빠르게 올라와 연재의 목을 콱 조였다. 숨통이 틀어막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두 손으로 목을 부여잡자 백진혁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어슬렁어슬렁 부엌으로 걸어가 냉장고를 열었다.
그리고 생수 하나를 꺼내 입에 대고 벌컥벌컥 마시더니, 크으, 하는 추임새까지 뱉으며 식탁에 걸터앉았다. 여전히 빨간 뺨과 나른한 눈매가 연재를 위아래로 훑었다. 며칠 안 봤다고 간만에 보니 좀 끌렸다.
“나 떡치고 싶은데.”
“도, 돌보라고 했다면서.”
“이것도 돌보는 거지. 임신했을 때 떡치는 거 나쁘지 않대. 오히려 운동도 되고 좋댔는데?”
병나발을 불듯 한 손으로 커다란 페트병을 왈칵 들이켠 녀석은 페트병을 아무 데나 내던지고는 비척비척 걸어왔다. 식탁에 놓인 페트병이 엎어지며 물이 줄줄 흘렀다. 그는 제 발바닥을 적시는 찬물을 보고 씨익 웃었다.
“이거 봐. 형도 좋아서 질질 싸네.”
“……나가. 그냥 나가.”
“왜. 아버지가 돌보라고 그랬다니까?”
“내가, 내가 다시 연락할 거야. 나가. 네 도움 필요 없, 흐으! 악!”
순식간에 머리채가 잡혀 질질 끌려갔다. 두피가 욱신거릴 만큼 억세게 당기며 베란다에 내던져졌다. 저도 모르게 아랫배를 손으로 쥐자, 백진혁이 피식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 존나 꼴리네.”
“나가, 나가…….”
“저번엔 가만히 있더니, 이번엔 나 혼자라서 좀 용기가 나시나?”
“그땐, 그땐 나도… 어쩔 수 없었잖아. 도, 도망가도 잡는데 뭐, 뭘 해.”
목구멍이 따끔따끔 아파 왔다. 갈증이 일었다. 연재는 버석버석하게 마른 제 입술을 손등으로 훔치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뒷걸음질을 치며 베란다 끄트머리까지 도망갔다. 백진혁은 작은 새끼토끼라도 잡는 것처럼 어슬렁어슬렁 다가와 덥석, 연재의 뺨을 쥐었다.
“이번에도 어쩔 수 없다고 쳐. 여러 번 대 줬는데 한 번 더 대 주는 게 대수야? 어차피 존나 헐었으면서 비싼 척하네.”
“말, 그런 식으로 하지- 악!”
규서가 없는 백진혁은 말 그대로 종마와 같았다. 그는 묵직한 성기를 바지춤 사이에서 꺼내 들고는 손을 크게 벌려 연재의 뺨을 쳤다. 바닥으로 쓰러질 만큼 강한 타격에 몸이 벌벌 떨렸다.
가는 팔을 들어 뺨을 훑자, 들러붙어 있던 개미들이 우글우글 손가락 사이에 몰려들었다. 뺨은 누군가 베어 문 것처럼 욱신거리기 시작했고, 실제로도 살이 패인 것처럼 느껴졌다. 연재는 제 팔을 와락 끌어안으며 초점을 잃은 눈으로 몸을 움츠렸다.
“아, 아으, 흐…… 저리, 저리 가…….”
“뭘 그렇게 무서워해. 몇 번이나 먹어 본 자지잖아, 응?”
새까맣게 변한 백진혁이 다가와 커다란 귀두로 뺨을 문질렀다. 안 본 새에 살이 좀 더 빠져 이전처럼 말랑말랑하지는 않았다. 동그란 뺨을 내려다보던 진혁은 혀를 한 번 훑더니 입술 사이로 성기를 밀어 넣었다.
천천히, 미끄러지듯 들어간 것은 목구멍까지 쑤시고는 설렁설렁 움직였다. 단순히 적시는 게 목적인지, 그는 연재를 발로 툭툭 찼다.
“옷 벗어.”
“우, 흐으, 욱…….”
입 안을 잔뜩 채운 성기가 들쑥날쑥 움직이며 연재의 혀를 꾹꾹 짓이겼다. 입 안까지 바싹 말라 바를 침도 없었다. 백진혁은 주머니에서 담배 하나를 꺼내 입에 물더니, 불을 켜고서 그것을 깊게 빨아들였다. 때마침 찬 바람이 불어 담배 연기가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벗으라니까? 귀찮게 할 거야?”
“욱, 우윽, 웅……!”
힘껏 고개를 저었다. 아이를 지우는 것까지 생각한 주제에, 그의 흉기와도 같은 것이 들어서면 안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연재는 구석에 틀어박힌 채로 콧김으로 숨을 쉬었다. 눈가에 눈물이 가득 고이자 백진혁은 한숨을 푹 내뱉더니 성기를 빼냈다.
“헉, 허억, 우욱, 흡…!”
“토하면 뒤진다, 진짜. 토한 거 다 보지에 처넣을 거야.”
“우욱…… 흐윽, 욱, 우으…….”
다행히 구역질은 났으나 먹은 것이 없어 뱉을 것도 없었다. 연재는 벽을 붙잡고 끙끙 앓다가, 제 바지를 벗기는 것에 놀라 몸을 확 움츠렸다. 백진혁은 신경도 쓰지 않고 한 손으로 바지를 던져버리고, 하얀 속옷을 보고 낄낄 웃었다.
“애새끼도 아니고 흰색이 뭐냐, 어? 형. 이럴 거면 아예 레이스 달리고 귀여운 걸로 입지. 그편이 더 꼴릴 거 같은데?”
“하지, 하지 마!”
“미안, 미안. 몸 안 좋은 건 알겠는데 내가 술 마시면 씹질을 좀 해야 하거든.”
연재는 조금 긴 티셔츠를 아래로 내리며 후들거리는 다리로 몸을 일으켰다. 백진혁은 여유롭게 앉아서 담배를 깊게 빨았다. 지독하고 매캐한 연기에 가슴께가 울렁거렸다.
“원래 이렇게 까칠해? 귀엽네.”
술을 취한 사람을 상대로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연재는 있는 힘껏 주먹을 휘둘렀다. 뺨을 향해 주먹을 내지르는 순간, 녀석이 다리를 걸었다. 삽시간에 몸이 균형을 잃으며 상체가 앞으로 쏠렸다. 바닥에 우당탕 구르며 넘어지자 근육 이곳저곳이 다 아려 왔다.
“쉽게 쉽게 하자, 형. 저번처럼 그냥 조용히 벌리고, 다 끝나고 혼자 울면 돼.”
“아, 아윽…… 흐, 싫, 다고 했잖아…….”
“어차피 형 앞으로도 계속 이럴 거야. 포기하는 게 나을걸? 나 정도면 신사다운 손님인데.”
뜻을 알 수 없는 말에 눈썹을 찌푸리던 연재는 이럴 때가 아니란 생각이 들어 벌떡 일어나 베란다 밖으로 나갔다. 동시에 찬바람이 서늘하게 몸을 감싸 왔다. 어디로 가야 하나 싶어 고개를 마구 돌리다가, 급히 현관문으로 뛰어갔다.
“뭐야, 술래잡기하고 싶어?”
녀석은 여전히 자유로웠다. 속옷만 입은 채로 갈 수 있는 곳은 없었다. 문을 열고 나가자, 서늘한 공기가 뺨을 긁으며 지나갔다. 연재는 맨발로 비상구를 향해 뛰었다. 티셔츠가 길어 다행이라고, 아래가 보이지 않아 너무 다행이라고 몇 번을 생각했다.
그러나 움직일 때마다 개미와 뱀들이 자꾸만 방해를 했다. 백진혁이 복도로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연재는 비상문을 닫아 잠갔다. 문 아래로 비집고 들어온 까만 벌레들이 삽시간에 다가와 몸을 갉아 먹기 시작했다. 간지럽고, 불쾌했다. 몇 번을 거쳐도 익숙해지지 않는, 알파에 대한 공포심에 심장이 욱신거렸다.
덜덜 떨리는 무릎을 세워 위로 올라갔다. 백진혁이 다른 층을 통해 올지도 몰랐다. 그러니, 그러니 조금이라도 움직여 도망쳐야 했다.
층수를 확인할 새도 없었다. 미친 듯이 오르고, 또 올랐다. 금세 숨이 턱 아래까지 올라와 벅찼다. 다리는 후들후들 떨렸다. 오돌토돌한 하얀 벽을 붙잡고, 무릎에 힘을 주었다. 온몸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가느다란 실로만 간신히 엮여 있는 것처럼, 툭툭.
온종일 먹은 것도 없어 눈앞이 하얗게 점멸하기를 반복했다.
어지럼증이 일기도 했다. 연재는 기다시피 계단을 올랐다. 하얀 무릎에 시퍼런 멍이 들고, 기어가다 몇 번을 부딪치고 긁혀 다리에 생채기 여러 개가 났다.
계단 아래서부터 수많은 벌레가 달려들었다. 목을 조르던 뱀이 발목을 잡아 아래로 끌어내렸다. 새까만 개미가 몸을 타고 올라오고, 살을 파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리도 지를 수 없었다. 너무, 너무 아팠지만 그랬다간 제 위치를 알리는 꼴이었으니까.
그러다 겨우, 계단 끝에 도착해서야 쓰러지듯 고꾸라졌다. 이명이 윙윙 울리고 목이 탔다.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을 만큼 힘겨웠다. 연재는 할딱이며 고개를 푹 숙였다. 눈에 띄게 허리와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내뱉었다. 그러면서도 손을 뻗어 옥상 문을 열어젖혔다.
“하아, 하, 흐으…… 흡.”
숨을 내뱉는 소리가 계단 전체에 울렸다. 급히 문밖으로 몸을 밀고, 문을 잠그고 나서야 쉴 수 있었다. 문 앞에 쓰러져 숨을 고르기를 몇 분, 조금 진정이 되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고개를 번뜩 들자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이 보였다. 꼭 제 심정 같았다. 메스꺼움에 입을 틀어막았다가 숨을 푹 놓았다. 연재는 잘게 떨리는 팔뚝으로 벽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비틀비틀 걸어 중앙 환풍기가 놓인 커다란 사각지대로 들어섰다.
“…….”
옥상의 난간이 제법 낮았다. 제 허리만큼 올 법했다. 연재는 난간을 두 손으로 붙잡고 몸을 한껏 웅크렸다. 벌레들이 문틈으로 기어들어 오는 소리가 요란했다.
사사삭, 스사사-. 바람과도 같았다. 연재는 계속해서 그들을 뿌리쳤다. 쇠진한 기색에 벌레들은 더 신이 난 듯 다가와 연재의 몸 안으로 들어섰다.
팔과 다리가 잡히고,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일순 하얀 시야 앞에 검은 인영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연재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비명이 나올 뻔했다. 다시 보니 누구도 없었다.
모든 일이 반복되고, 또 번복되고 다시 반복된다. 빠져나갈 수 없는 늪에 묻힌 듯하다. 늪은 이제 연재를 모두 삼켜 숨통을 틀어막았다. 도망갈 길은 없었다. 죽음이 코앞에 있었다. 난간을 잡은 손끝이 잘게 떨렸다.
그간 왜 그리 살고자 했더라. 생각나질 않았다.
근데 난 왜 지금 죽고 싶은 거지? 그것 또한 생각나질 않았다. 지금 눈앞에 놓인 정답은 하나뿐이라는 건 알았다. 난간을 넘어 높은 건물 아래로 뛰어내리면, 더 깊은 구렁텅이로 빠지면 그제야 자유가 저를 맞이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지구의 외핵을 뚫고, 더 깊은 내핵을 뚫어 뜨겁게 달아오르는 토양에 몸을 묻는다면, 그때야 제가 원했던 자유와 행복이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까.
무거운 삶을 하루하루 살아갔었다. 섬뜩한 소리와, 살과 살이 부딪쳐 제게 가해지는 모든 폭력을 맞이하면서도 버텼다. 동이 트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두운 법이라고. 제 인생에도 동이 틀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저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며 저를 유희 삼아 괴롭힐 수 있었지만, 연재는 양손과 온몸으로 부딪쳐도 헤어 나올 수 없었다.
무엇부터 잘못되었을까. 어디서부터 잘못했을까? 태어나질 말았어야 했을까? 부모님이 늘 말씀하시던 것처럼 제 존재는 쓸모없는 휴지 조각이었을지도 모른다.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제가 아니더라도 선일은 누군가와 결혼을 했을 것이고 다른 이들도 또 누군가를 괴롭혔을 터다.
제가 걸린 것은 그저 운이 없어서였다. 그런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돈이 없고 약한 존재였기 때문에. 저주스러운 몸뚱어리와 알파에게 순종할 수밖에 없는 형질을 지녔기 때문에…….
“아냐, 아냐……. 아니야, 아니야.”
연재는 힘껏 도리질을 쳤다. 돈 없는 오메가라고 모두 이렇게 살지 않는다. 물론 우성의 경우 알파들에게 비싼 값에 팔려 가곤 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많았다.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가고, 취직하고.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그렇지 않으면 이 사회가 유지될 리가 없었다.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란 말인가. 제 배경도, 형질도 무엇도 문제가 아니라면.
부모와의 연을 일찍이 끊었어야 했다.
저를 팔겠다는 부모의 이야기에, 이선일이라는 이름을 듣고도 거절했어야 했다.
선배를 좋아하지 말걸.
울음이 터져 나왔다. 연재는 복잡한 심정을 눈물로 모두 쏟아내듯, 주룩주룩 흘려보냈다. 그때 하늘에서 한두 방울씩 차가운 빗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콧잔등을 툭, 하고 스치더니 점차 늘어나 정수리와 어깨를 세차게 두들기며 내렸다.
시린 다리를 끌어 모아 안았다. 돌아갈 수만 있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를 사랑하지도 않고, 취직한 후에 부모님과의 연을 끊고, 선일과 결혼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전까지는 그래도 잘 살지 않았던가. 돈이 없었을 뿐, 가끔 속이 상했을 뿐 미래엔 행복할 거라는 희망을 갖지 않았던가.
판도라의 상자에서 불행이 퍼지듯, 연재의 가슴에서 모든 희망이 빠져나갔다. 상자와는 정반대로 가슴에 고인 것은 슬픔과 괴로움, 고통이었다.
사람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더라면. 좀 더 마음을 굳게 먹고 행동했더라면, 조금만 더 이기적으로 살았더라면…….
그간 쌓인 후회가 밀려 들어오는 듯했다. 그러는 사이 빗줄기는 점차 거세져 어깨를 축축하게 적셨다. 시린 바람이 불어와 하얀 피부가 새파랗게 질렸다. 욱신거리는 무릎을 끌어안은 채로 숨을 내쉬었다.
“으…….”
조금 전 백진혁이 쳤던 뺨이 쓰라렸다. 빗물이 흐르며 그곳을 건드린 탓이다. 연재는 비를 피할 곳을 찾으려 몸을 일으켰지만 옥상에 그런 게 있을 리는 만무했다.
그때 누군가 옥상을 두들겼다.
“채연재?”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연재는 즉시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져서, 심장도 빠르게 뛰었다.
“채연재, 여기 있어?”
거칠고 낮은 음성이었다. 몸집이 크고 무서운 사람일 것 같았다. 그는 문고리를 몇 번 만지작거리더니 욕을 뱉었다. 그에 놀란 연재가 급히 난간을 붙잡았다.
“연재야! 나야. 이선일. 너 여기 있어?”
거짓말. 거짓말일 것이 뻔했다. 선배가 저를 찾으러 여기까지 왔을 리도 없고, 하필 이 타이밍에 올 리도 없었다. 백진혁이 사람을 푼 것이다.
연재는 벌벌 떨면서도 제 몸 위로 기어오르는 벌레들을 빠르게 내쳤다. 비가 오는데도 끈질기게 붙어왔다. 아랫배가 쓰라리고, 온몸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감기라도 걸린 것처럼 덥고 추웠다.
“여기 있는 거 맞지? 대답해, 연재야.”
사내는 답답한 듯 문 위로 발을 굴렀다. 연재는 주변을 둘러보다 급히 문이 보이지 않는 반대편으로 기듯이 뛰었다. 비가 와 옥상 바닥이 몹시 미끄러웠다. 맨발이 바닥을 짚고, 벌레들이 그 위를 올라오면 상체가 앞으로 휘청이며 몸이 곤두박질을 쳤다. 그럼에도 연재는 다급히 가장 구석으로 도망쳤다.
“연재야, 채연재……!”
이내 목소리가 사라졌다. 연재는 가장 끝자락, 난간의 건너편으로 넘어갔다. 그러자 거센 비바람이 몰아쳐 다리가 파르르 떨렸다. 주저앉아 난간을 두 팔로 꽉 끌어안았다. 이렇게 있으면, 못 볼 수도 있다. 남자가 문을 열고 나왔을 때, 그리고 반대편으로 돌아왔을 때 샅샅이 뒤지지 않으면 구석에 있는 저 하나쯤은 못 볼지도 몰랐다.
연재는 죽고 싶다고 생각했으면서도, 끝끝내 살기 위해 버텼다. 곧 따라온 벌레들도 난간에 들러붙었다. 그래, 죽으면 다 같이 죽고 살면 다 같이 살자. 연재는 여전히 제 몸을 타고 오르는 뱀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철컥, 하고 멀리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비가 바닥에 부딪혀 거친 소음을 내었음에도 또렷하게 들릴 만큼, 남자는 고인 물을 철퍽철퍽 밟으며 걸었다.
“채연재!”
버럭 부르는 소리가 무서웠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낚아채지 않을까? 연재는 고집스럽게 난간에 매달려 벌벌 떨었다. 조금만 손이 미끄러지면 바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새까맣게 먼 곳에 손톱보다 작은 사람들이 오갔다. 너무, 너무 높았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제발…….”
제발 걸리지 않았으면. 제발, 제발…….
그때 또 하나의 소리가 들렸다.
“여기 있나아? 아이고, 힘드네. 뭐 이렇게 열심히 도망가, 형? 형!”
백진혁이다. 연재는 두 남자가 동시에 덮쳐올 경우를 생각해, 아예 뛰어내리는 선택지도 고려하기로 했다. 백진혁에게 붙잡혀 또 그 짓을 당하는 것보단 나았다. 마음속에서는 어차피 여러 번 대 준 몸인데, 한 번 대 주고 끝내자는 소리도 들렸다. 하지만, 하지만 너무 무서웠다.
빗물이 머리 위로 흘러 눈물처럼 뚝뚝 떨어졌다. 연재는 눈을 꼭 감았다 뜨며 처마 위에서 떨어지듯 흐르는 물을 털어냈다. 긴 속눈썹 끝에는 계속해서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것이 고였다. 철퍽, 철퍽. 사내가 이리저리 둘러보다 이쪽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규서네 아버님 아니야? 우리 떡치는 거 구경하러 왔어요?”
“너…….”
술 내음이 물씬 풍기는 음성과, 사내의 목소리가 얽혔다. 예상외로 둘은 서로를 모르는 것처럼 굴었다. 하지만 연재는 난간에서 나오질 못했다. 저것이 거짓부렁일 수도 있다. 진실이라고 어떻게 장담할까.
그때 사내가 건너편으로 걸어왔다. 그 뒤로 백진혁이 실실 웃으며 따라왔다. 두 남자는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흐릿한 회색 걸음을 걸었다. 멀찍이 사내가 둘러보다 연재를 발견했다. 연재는 아, 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연재야!”
급히 다가오는 소리에 움찔 놀라 한 손을 놓고 말았다. 그러자 남자가 걸음을 멈췄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연재는 자꾸 눈앞을 가리는 빗물을 걷어내며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다시 두 손으로 난간을 끌어안자, 그가 가만히 서서 머뭇거렸다.
“혀엉, 여기서 뭐 해요. 술래잡기 끝났는데.”
“…….”
“형?”
시야가 시커멓게 물들었다. 연재는 고개를 숙이고 난간에 매달려 바들바들 떨었다. 철퍽, 철퍽. 사내와 달리 거리낌 없이 다가오던 백진혁의 발소리가 어느 순간 끊겼다. 대신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그가 쓰러졌다.
“흐, 흐으, 흐…… 가, 가…… 제발.”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손끝이 시뻘겋게 물들었고, 두 다리는 힘이 풀려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철봉을 끌어안은 맨다리가 미끄러져 살갗이 아프게 쓸렸다. 연재는 서러운 낯으로 눈을 꽉 감았다.
툭, 퍼억, 와직, 쿵! 알 수 없는 소리가 자꾸만 들렸다. 그때 뱀이 온몸을 감싸 돌았다.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익숙했다. 제 위에서 얻어맞던 남자가 떠올랐다. 그런 와중에도 아래에 성기를 욱여넣은 채로 흔들리고, 저는 그것에 자극받아 성기를 세웠었다.
그때 일이 떠오르자 바보처럼 몸이 경련하기 시작했다. 빗줄기는 연재가 떨어지길 바라듯 계속해서 몸을 내리쳤고, 손은 점점 힘을 잃었다.
고개를 들자 흐리멍덩한 두 형체가 엉망으로 뒤엉켜 있었다. 연재는 창백한 뺨으로 계속해서 버텼다. 무슨 상황인지, 어떻게 된 일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다만 그저 무기력했다. 그냥 손을 놓고, 이 끝자락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지친 얼굴로 비를 맞으며 그들을 쳐다보았다.
얼마 안 가, 백진혁이 아닌 사내가 저벅저벅 걸어왔다. 백진혁은 멀리 술에 취해 늘어져 있었다. 초점이 흩어졌다. 엣치, 하고 재채기를 뱉자 사내는 조금 더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무의식중에 고개를 젓자 그가 또 걸음을 멈췄다.
그때, 아주 작게 제 이름을 부르는 것이 들렸다. 연재는 미끄러지는 손을 보면서 어쩐지 반쯤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하얀 팔 너머로 사내가 급히 뛰어오는 것도 보였다. 커다란 손이다, 커다란. 그리고 묘하게 익숙한 반지가 그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었다.
ㅈ@ㅊ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