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자요, 내 사랑. 오늘 하루도 고생했어요
혁도에서 연락이 왔다. 연재가 있는 곳을 찾았다며, 함께 가겠냐고 물었고 선일은 그러겠다고 답했다.
백이언의 뒤를 은밀히 밟고, 놈의 수족을 족친 결과 그는 평소와 다름없는 삶을 보내고 있었다. 늦은 밤에 특별히 다른 곳을 들른다거나, 아침에 집이 아닌 곳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의 주변인 몇몇을 더 끌어오다 아들 백진혁에게까지 손을 뻗으려는 찰나, 정보 하나가 들어왔다. 백이언이 오후에 대학병원으로 전화를 했고, 의사는 그의 저택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갔다는.
혁도 놈들은 즉시 병원 사람들을 쥐고 흔들다 의사를 발견했다. 난장을 피우면 경찰을 부르겠다는 그에게서 정보를 얻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들이 보내준 주소로 가자, 신축 오피스텔이 서 있었다. 새 건물이나 마찬가지인데 입주자를 받지 않는지 사람이 없었다. 오피스텔 주변을 지키던 몇몇은 이미 선일이 오기 전에 혁도 파 놈들이 치워 놓은 상태였다.
건물은 꽤 높았다. 선일은 받은 층과 호수를 보며 연재를 데리러 갔다.
그러나 문은 열려 있었고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단지 다툼의 흔적처럼 이불자락이 바닥에 늘어져 있었고, 열린 베란다 문에서 찬 바람이 들어왔다. 아침 일기예보가 그랬듯 어둑한 하늘과 비바람이 안쪽까지 몰아쳐 바닥이 축축해진 것이 보였다.
미리 따돌렸을 거란 생각이 먼저 들었다. 선일은 우선 혁도 파를 다른 곳으로 보내고, 건물을 샅샅이 뒤졌다. 오피스텔 1층에서부터 한 층 한 층 살펴보며 올라갔지만 어디에도 채연재는 없었다.
그러다 마지막에 도착한 것이 옥상이었다. 혹시나 하고 들어섰고, 예상대로 연재는 그곳에 있었다. 굳게 잠긴 문 안쪽이 습했다. 누군가 안에서 잠근 것처럼 고리가 반 정도 돌아가 있었다.
“보호자님, 식사 안 하셨죠? 그때까지 잠시 봐 드릴게요.”
“아닙니다.”
“계속 그러고 계시면 깨어날 사람도 못 일어나요.”
“…….”
선일은 병원 침대에 잠든 연재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다행히 그의 몸에 누군가 손댄 흔적은 없었다. 뺨 한쪽을 얻어맞은 듯 붉은 손자국 하나뿐이었다. 약을 바르고 반창고를 붙여 한쪽 볼이 좀 더 둥글고 통통해 보였다. 작은 얼굴의 반을 차지할 만큼 커 보였다.
일어서지 않고 앉아 있으니 간호사는 결국 한숨을 쉬고 방을 나갔다.
‘연재야, 채연재!’
아찔했던 상황이 삽시간이 눈앞으로 뛰어왔다가 사라졌다. 선일은 두 손에 얼굴을 묻고 마른세수를 했다. 정말 그대로, 그대로 연재가 떨어졌다면.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이 지나갔다. 온몸을 던져 그의 팔을 낚아채지 못했더라면 채연재는 분명 죽었으리라. 그 높은 곳에서 떨어져 살아날 가능성은 없었다. 그러나 연재는 난간에서 떨어지면서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살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죽고자 했다. 반쯤 후련하고 반쯤 행복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손에 힘이 풀려 어쩔 수 없이 떨어지는 것에 기뻐하며.
약간의 희열마저 느껴지던 얼굴에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 건물이, 아니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진부한 표현이 진실로 느껴졌다. 하늘이 땅 아래로 가라앉아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이, 그저 추락했다. 제 마음은 커다란 해일에 쓸려가 무너졌는데, 세찬 빗줄기 너머 흐릿한 얼굴은 그토록 기뻐 보였다.
결혼 후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간신히 그를 붙잡아 끌어 올렸을 때, 연재는 차갑게 식은 몸으로 기절했다. 선일은 얻어맞다 그대로 기절한 백진혁을 지나쳐 급히 밖으로 나갔다. 병원으로 전화할 생각도 못 하고 택시를 잡아 가까운 곳으로 가 달라 부탁했다.
심장이 울렁거렸다. 양 입술을 말아 물자 떫은 담뱃재라도 삼킨 것처럼 가슴이 쓰라렸다. 발작적으로 뛰어대는 것을 가라앉혔을 땐 이미 병원이었다. 어떤 정신으로 도착했는지 알 수 없었다. 혁도 파와 함께 다른 곳으로 갔던 규서가 왔을 때도, 선일은 멍하니 연재를 내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제가, 감히 자유롭고자 한 이를 다시 지옥으로 끌고 올 권리가 있던가.
세상을 떠나려던 천사의 날개를 찢어 다시 지상에 매어 놓을 자격이 있나.
눈앞의 죽음에 그리도 행복해하던 연재를 왜 자신은 붙잡았을까. 왜 붙잡아서 그를 더 힘들게, 만들게 되었을까.
처음부터 잘못되었다. 시작부터,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채연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하는 가정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다시 그를 처음 만났던 때로 돌아간다면. 제게 다가오는 연재의 손을 맞잡았더라면. 그렇게 헤어지지 않았더라면.
다시 만났더라도, 더럽혀진 몸을 보았더라도 먼저 그에게 상황을 물었더라면. 아니, 그가 원해서 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리 했어선 안 됐다.
지하실에서 엉엉 울며 저는 이런 것 따위 몰랐다고, 선배 때문이라며 안겨 오던 팔을 그때라도 안아 줬더라면 좋았을 터다.
그럼 이런 얼굴은 보지 않았겠지. 그때라도 마음을 다잡았으면 이에게 기나긴 고통을 주지 않았으리라.
이불 속에 묻힌 작은 체구가 안쓰러워 또 속이 메스꺼웠다. 울렁울렁, 검고 푸른색의 더러운 감정이 한데 얽혔다. 선일은 연재의 작은 손을 두 손으로 꽉 붙잡고 고개를 숙였다. 반복된 실수는 실수가 아니라 고의였다. 바닥을 긁어모아 엎질러진 물을 담아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제가 한 짓은 커다란 바다, 그 위에 서서 실수라는 이름의 물컵을 떨어뜨린 것이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계속해서. 부모의 학대, 열악한 환경, 계속해서 들이닥치는 불운에 절은 이에게 괜찮을 거라고, 넌 어차피 불행했으니 괜찮다고 물을 엎질렀다.
그것이 아슬아슬한 선인 것도 모르고.
결국 바다는 범람해 거친 파도에 휘말려 모든 것을 쏟아냈다. 연재의 해일은 그가 눈을 떠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비가 되어 다시 바다로 돌아갈 때까지, 해일에 덮쳐진 제가 그의 속으로 빨려 들어갈 때까지.
선일이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였다.
작은 화병에 바닷물을 담고, 바싹 말라비틀어진 꽃 하나를 꽂아 집으로 돌아오는 것. 그것이 다시 살아날 수 있게 매일 지켜보며 사랑하는 것. 그러나 짜디짠 바닷물에도 꽃은 시들 것이다. 계속해서 죽음의 길을 걸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낮이 가도록 그 옆에서 지켜 주는 것.
그 외에 선일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아버지, 이제 제가 보고 있을게요. 잠시만 쉬고 오세요.”
“……이규서, 규서야.”
어느새 다가온 규서가 잠시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선일이 ‘규서야’하고 부른 것이 처음이어서, 손끝이 바싹 저려 왔다.
“네, 아버지.”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무심코 말을 뱉은 선일은 곧바로 입을 닫았다.
방금 제가 무슨 말을 하려 한 거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저 어린 녀석에게 묻고자 했던가?
“하…….”
선일은 숨을 내뱉고 얼굴을 몇 번 더 쓸었다. 며칠 새 유난히 까칠해진 피부가 손바닥을 잘게 긁었다. 궁지에 내몰린 것만 같았다.
제가 있는 곳이 병원인지, 집인지, 아니면 절벽인지. 선일은 아직 차가운 연재의 손을 다시 맞잡았다. 숨이 턱턱 막혔다. 그러자 말없이 서 있던 규서가 건너편에 조심스레 앉았다. 가서 쉬라는 말은 더 이상 하지 않고, 저도 연재의 손을 잡았다.
작은 손이 몹시 차다. 침대 안쪽 매트는 따뜻하게 달궈져 있는데도, 낯빛은 여전히 좋지 않다. 손등에 링거가 꽂혀 있었다. 규서는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가 또 울컥했다.
어머니, 채연재가 사라졌다는 말에 말문이 턱 막혔었다. 단번에 무엇 때문에 그가 사라졌는지 알 수 있었다. 펜션에 갔다 온 후였으니까, 그 스스로가 나갔든 누가 데리고 갔든 그것이 시초일 것이다.
그리고 다진그룹과 관련이 있다는 걸 들은 날에는 숨죽여 울었다. 그를 몰아가고 내친 것은 저였다. 아버지 또한 죄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행동에 옮긴 건 이규서, 자신이었다.
잠시 후회하고 그를 제 것으로 만들겠다는 우스운 포부까지 가졌다. 진정으로 사과하고 빌지는 못할망정 그를 위해서라며, 제가 채연재를 지키고 가지겠다고 생각했다. 집에 돌아와 선일에게 얻어맞고 작은방에 갇힐 때에도 그랬다.
어차피 채연재는 제 아이를 가졌으니까, 당신께서 오메가들을 제게 얽혀 놓기 싫어 먹였던, 피임약을 그날만 먹이지 않았으니까. 아버지 당신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를 손에 넣을 수 없을 거라고. 그래서 이겼다고, 유치한 속내를 드러내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부재에 모든 것이 무너졌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는 건 저도 마찬가지다.
규서는 연재의 손을 꽉 붙들었다.
* * *
세*그룹 회장의 아이를 가진 투홀 오메가. 그의 네 번째 아내라는 소식에 고객들은 관심을 보였다. 임신한 오메가에게 삽입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매니악한 이들을 끌어모으는 데에 한몫했고, 세*그룹 회장의 아내라는 이름 또한 사람들은 귀를 바싹 세웠다.
백이언이 준비하고 있는 것은 나쁘게 표현하자면 노예시장에 가까웠다. 돈 좀 있는 놈들이 모여서 오메가들을 세워 놓고 원하는 이를 살 수 있는.
들키지만 않는다면 큰돈을 벌 수 있다. 사실 지금도 암암리에 오메가들이 돈을 주고 팔려 가고 있으니까. 이 나라에서도 그러한데 다른 곳은 어떠하겠는가. 물론 위험한 사업이었기에 어느 정도 크기를 키운 뒤, 팔아치울 생각이었다. 이름 없는 기업도 아닌 대기업의 이름을 걸고 할 만한 사업은 아니었으니까.
다양한 인종, 취향에 맞는 오메가를 구할 수 있는 ‘국제 알파오메가 결혼 지원사업’은 예상대로 꽤 거물들을 끌어모았다. 평범한 성행위에 질린 이들은 더 자극적인 것을 원했다. 사람들은 으레 그러했다. 한 자극에 익숙해지면, 더 큰 것을 바라기 마련이다.
사랑했던 사람이든, 돈을 주고 사 온 오메가든 계속 보면 질리는 건 어쩔 수 없지 않을까.
채연재가 임신을 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을 때, 백이언은 좀 의외라고 생각했다. 이선일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오메가에게 임신을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그는 매일 같이 오메가에게 피임약을 먹였다. 부작용으로 속이 안 좋든, 예민하게 굴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의 오메가를 ‘사용’하는 이들도 맘 놓고 쓰곤 했다. 아이를 가지면 곤란한 일이 일어날 게 뻔하니까.
그와 달리 백이언은 아내를 들이지 않았다. 대놓고 클럽에서 제 아내를 굴리고, 집으로 손님을 초대해 대접하게 하는 추잡한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뒤로 하면 몰라도.
의사는 채연재가 아이를 지우길 원한다고 했지만, 백이언의 생각은 달랐다. 그 몸 그대로, 몇 개월 뒤 살짝 볼록해진 배를 보며 삽입을 하길 원하는 이들은 분명 있을 터다. 평소 금욕적으로 살았던 알파라 하더라도 그런 것을 지나칠 수는 없을 테니까. 뭣보다 저도 그편이 좋았고.
가장 첫 타자가 될 오메가의 상태가 아주 매력적이었다. 홍보용으로도 좋고, 제가 사용해 본 결과 감도도 괜찮다. 아예 처음이었다면 더욱 좋았겠다만 이미 한 달을 넘게 이선일이 굴려댔으니 어쩔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돌아가고 있었다. 때마침 기다리던 전화가 왔다. 백이언은 의자에 느긋하게 등을 기대고 앉아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네, 백이언입니다.”
- …….
“이선일 회장님? 무슨 일이세요?”
CCTV는 모두 망가트렸고, 은밀히 데려왔다. 그러나 가장 의심되는 건 저일 것이 뻔하다. 최근 제 아들이 그의 부인과 한바탕 즐기지 않았던가. 백이언은 입매를 끌어 올리며 다리를 꼬았다.
- 내 아내가 말이야.
“예? 아, 채연재 씨 말입니까?”
- 그래, 내 안사람이…… 사라졌었어.
“저런,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태연하게 되묻자 상대편에서 한숨을 고른다. 백이언은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들었다.
“걱정되시겠네요.”
- 괜찮아, 찾았어. 갇혀 있더군.
하얀 담뱃대를 꺼내 들던 손이 멈췄다. 백이언은 검지의 굵은 마디를 살살 긁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정말요? 다행이네요.”
- 그래, 다행이지.
조용히 몸을 돌려 프로그램을 켰다. CCTV는 여전히 소파 위의 연재를 비추고 있었다. 멍하니 앉아 TV를 보는 꼴이 퍽 귀엽다. 그냥 떠본 건가. ……쥐고 있는 게 없는데 떠볼 사람이 아닐 텐데.
“제가 뭐라도 도와드리려 했는데. 다음부턴 미리 말씀해 주세요. 한 번 몸을 맞춘 사이인걸요.”
제 다리 사이로 기어와 성기를 힘겹게 빨던 얼굴이 떠올랐다. 제 아들과 아들의 친구들에게 유린당한 후의 낯빛이 좋지 않았지. 그러고도 좆을 빨겠다며 기어 오는 게 정액에 미친 오메가 같았고.
“좋은 소식 들려주셔서 감사해요. 다음에 부인을 뵈면 괜찮았냐고 여쭈어야겠네요.”
- 백 회장……은 참, 속이 좋아.
“아뇨, 당연한 거죠. 그때 저도 꽤 좋았으니까, 보답이라면 보답이겠고.”
거슬리는 게 하나 있다면 이선일이 말을 놓고 있다는 점이다. 칼같이 존댓말을 써 가며 대화해 왔는데.
화면 속 연재는 이내 몸을 뒤척이다 소파에 길게 누웠다. 밤마다 퍼지게 자 놓고도 졸린 모양이었다. 백이언은 흰 막대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치이익, 그 끝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선명하다.
- 그래. 아, 저번에 말한 오메가 사업 말인데, 백 회장.
“음, 네에.”
- 다른 쪽으로 투자할 게 생겨서, 같이는 못 할 것 같아. 먼저 제안해 줬는데 안 됐어.
“아, 뭐. 그럴 수도 있죠. 저도 제안만 드린 거지, 강요한 건 아니니까요.”
좀 아쉽게 됐다. 세성 몰래 발을 빼고 고발이라도 할까 싶었는데.
뭐, 여러 루트가 있으니 크게 상관은 없었다.
- 근데 백 회장.
“네?”
- 내가 신기한 걸 들어서 말이야. 백 회장이 이번에…… 중국계 회사들이랑 같이, 중남미 쪽에 땅을 샀더라고.
“……네?”
- 그게 오메가 사업인가 했더니 중국계는 처음 들어서. 다른 쪽으로 추진 중인 건가?
순간 머리에 번뜩하고 지나가는 게 있었다. 이전, 도서 사업 때의 일이었다. 백이언은 어느덧 잘게 떨리기 시작하는 꽁초의 끝을 보다 급히 재떨이에 비벼 껐다. …놀라지 말자. 이 정도는 충분히 알아낼 수 있는 선이다.
- 리어우, 즈쉬앤이라고 했던가.
그러나 다음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리어우 즈쉬앤, 류자헌. 그는 투자자도, 고객도 아니다. 이언이 은밀히 구한, 출생신고조차 되지 않은 이였다. 그곳에서 번 거대하고 더러운 돈을 세탁할. ……아주 중요한 사람.
* * *
보안업체와 회사에서 알아볼 수 있는 정보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혁도의 경우는 이야기가 달랐다.
그들의 세상에서 불법이라는 단어는 없다. 미끄러지듯 경찰의 시야에서 벗어나고, 더 큰 놈들과 놀아나는 녀석들. 언뜻 보기에는 일개 조폭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이들의 영향력은 생각보다 꽤 컸다.
돈만 주면 뭐든 하기도 했고.
연재는 내리 이틀을 잤다. 병원에서 이제 퇴원해도 괜찮다고 하니, 선일은 연재를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몇 년이고 머물렀던 이전 집은 처분 중이고, 새로 온 곳은 보안업체를 고용한 커다란 아파트였다. 대체로 연예인들이 많이 사는 곳이라, 부러 이곳으로 택했다.
선일은 아직 새것의 냄새가 나는 침대 위에 연재를 눕히고 자신은 의자에 앉아 그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다. 연재가 준비했던 작은 실반지도 그의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왼쪽 약지에 딱 맞을 줄 알았는데 살이 빠진 탓인지 헐렁거려 가운뎃손가락에 끼웠다.
학생인 규서는 선일이 말한 대로 다시 학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간 빠진 출석 일자를 채우기 위해서는 시험이나 과제에 평소보다 배로 신경 써야 했기에 느지막한 저녁에 돌아왔다.
퀭한 얼굴로 집에 도착했을 때, 규서는 곧바로 연재가 잠든 방으로 들어섰다. 여전히 눈을 뜨지 않는 얼굴은 하얗고 창백했다. 단지 충격을 받았을 뿐이라던데 상당히 오래 잠을 잤다.
“백진혁, 학교 안 나왔더라고요.”
“못 나와.”
“……아무도 걔 안 찾는데 기분이 이상해서요.”
반대편에 털썩 앉았다. 규서는 새액새액 숨을 내쉬는 연재를 내려다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몸을 장난감처럼 내리누르고 괴롭혔다. 지금도 온전히 지켜 주고 싶은, 그런 마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나치게 순진하고 긍정적인 채연재는 교묘하게 괴롭히고 싶어지는 맛이 있었다. 볼살을 잡아 살짝 늘리자 선일이 손등을 쳤다.
“아니, 예전엔 걔가 뭐 한다고, 애들 초대하고… 먹을 거 사 주고 그랬는데. 아무도 안 찾으니까 이상하잖아요.”
“원래 그래. 사람을 돈 주고 사면 그렇게 돼.”
“……엄마도 그럴까요?”
규서의 질문에 선일은 허가 찔린 듯 혀를 쯧 찼다. 하여간 말 한 마디 지지 않는 놈이다. 맞는 말이기도 한지라 할 말은 없었다. 돈 주고 사 온 채연재는 제가 가까이 다가갈 때마다 뒤로 떨어지는 흉내를 냈다. 난간에서 손을 떼어내기도 했고, 성큼 걸어가자 아예 두 손을 놓아버리지 않았던가.
다시 눈을 뜨면, 그때는 무어라 해야 할까. 아니, 연재가 저를 보고 뭐라 할지가 가장 중요했다. 사과도 할 거고, 다시 시작하자고 빌 각오도 했다. 하지만 연재는 그 각오를 비웃듯 이틀째 깨어나질 못했다.
“내일도 안 일어나면…… 병원 가요. 금방 일어날 거라고 했잖아요.”
“그래.”
규서는 말없이 손을 뻗어 연재의 배를 토닥였다. 전체적으로 검사를 해본 결과, 채연재는 투홀 오메가로 다른 오메가들에 비해 수정과 임신이 빠르게 이루어졌으나, 충격을 크게 받아 아이가 유산되었다고 했다. 아마 그가 바랐을 결말일 테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했지만 규서는 아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 그건 잘돼 가요?”
“뭐?”
두 부자가 서로를 빤히 쳐다보았다. 사적인 이야기를 하는 건 처음이라 분위기가 이질적으로 갈라졌다. 규서는 선일에게서 시선을 피하고 뒤통수를 긁적였다.
“다진그룹…….”
“아.”
선일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백이언과 통화한 직후, 곧바로 그 중국인을 잡아들였다. 자세한 기록은 남지 않았으나 백이언이 중간 업체를 통해 돈세탁을 하려 했다는 증거는 또렷했다. 게다가 사전에 살펴보고자 했는지 두 달 전부터 꾸준히 이용하고 있었다.
하나를 잡자 나머지는 줄줄이 올라왔다. 꼭 그물에 걸린 물고기들처럼, 놈의 사업과 관련된 업체, 준비를 돕던 거물들도.
물론 그들 중 몇몇은 급히 거래를 제안했고, 선일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국내 회사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까지 건드린 백이언 탓이다. 대체로 세성이 갑, 그쪽이 을로 계약서가 작성되었다.
그리고 대중에게 천천히 뿌리기 시작했다. 각종 커뮤니티, 찌라시 기사, 동영상 스트리밍 사이트 등을 통해 등 거짓 정보 같지만 의심이 될 만하도록 몇몇 증거를 조작하고 유포했다. 특히나 백이언이 ‘임신한 오메가에게 마음껏 할 수 있다’며 고객들에게 뿌린 메일은 제법 이슈가 됐다.
사실이냐, 거짓 정보다, 이상한 소문 퍼트리지 마라…부터 시작해서 근데 좀 의심스럽다, 저 건물은 뭐냐, 왜 저런 데에 짓지? 근데 쟤네 드라마 표절도 있지 않았냐? 등, 여러 의견이 달렸다.
그에 생각지도 못한 도움이 여럿 있었다. 하나는 최근 오메가 배우가 폭로한 성추행 사건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백진혁이 학교에서 퍼트리고 다니던 이야기였다.
여론전은 이제 막 시작일 뿐이다. 이것이 천천히 자리를 잡고, 더욱더 상세한 정보가 뿌려지면서 이름 있는 기자에게 맡기거나 뉴스에 내보내는 순간 다진은 그대로 끝이 난다. 적어도 국내에서는.
해외를 포함해 전 세계적으로 오메가의 인권은 그리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편이었다. 물론 겉으로만 보이는 사실이 그랬고, 안쪽 사정은 다르다. 사람을 돈 주고 살 수 있는 것부터 제정신은 아니었으니까.
인권 문제까지 건드릴 생각은 없었지만, 여론은 생각 외로 흐른다. 특히 국내를 떠들썩하게 했던 성추행 사건이 하루아침에 다시 언급되기 시작했다. 재판까지 기나긴 여정이 있음에도 계속해서 응원하겠다는 말도 보였다.
하루 만에 큰 성과를 얻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성 문제가 관련된 탓일까. 네티즌들은 생각보다 발 빠르게 말을 옮겼다. 그래도 아직은 부족했다.
“가서 자라. 보아하니 안 일어날 것 같으니.”
“과제 좀 하다가 잘 거라서…… 필요하시면 불러 주세요.”
“그래.”
미련이 남은 듯 몇 번 뒤를 돌던 규서가 터덜터덜 방을 나왔다. 아파트다 보니 규서의 방은 바로 건너편이었다. 위층에 살 때도 괜찮았지만, 연재가 걱정되는 만큼 규서는 같은 층에 있기를 원했다. 저번처럼 무슨 일이라도 생길 경우를 대비해, 가까이 있는 게 좋지 않겠냐고 사족을 덧붙였다.
선일은 연재에게서 손을 떼고 얇은 잠옷을 들고 욕실로 향했다. 그 또한 이틀 내내 붙어 있었음에도 시선을 떼는 것이 어려웠다.
급히 씻고 나왔으나 연재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선일은 착잡한 마음에 한숨을 쉬고 불을 껐다. 느지막한 저녁, 멀리 새 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 * *
누군가에게 사랑에 빠졌던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대체로 사랑은 이유가 없고, 어느 순간 온몸이 젖어버리듯 깊게 빠지니까.
연재는 기억나지 않는 얼굴이 그리웠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참 다정했던 것 같다. 단둘이 도서관에서 공부도 했고, 끝나면 맛있는 것도 먹었다.
저는 살짝살짝 스치는 손가락이나, 어깨의 온기에 기뻐했던 것 같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조용히 웃어 주는 것도 좋았고 그가 작은 것이라도 주면 집까지 가져가 책상 중앙에 놓고 귀히 여겼다. 심지어는 그가 마카롱을 받았는데 너무 달다며, 한 박스를 연재에게 주었는데 먹지 않고 두다가 유통기한이 끝나버리기도 했다.
누군지 몰라도 좋은 사람이었나 보다.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지만, 이토록 따뜻한 기억이라면 분명 그럴 것이다.
다만 그 기억의 끝이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남자는 연재의 고백을 매몰차게 거절했었다. 큰 용기를 냈었는데 차가운 태도에 가슴이 따끔거렸던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할 때쯤, 눈을 떴다. 파리한 새벽 기운에 저도 모르게 어깨를 끌어안자 알고 있던 것보다 작고 마른 팔이 만져졌다. 연재는 주변을 둘러보며 이불을 걷어냈다. 처음 보는 집이었다. 냄새도 익숙하지 않았고 입은 옷도 어색하기만 했다.
일어나도 될까? 우물쭈물하던 연재가 몸을 일으켰다. 그때, 있는지도 몰랐던 옆의 사내가 손을 뻗어 팔을 쥐어 잡았다.
“아!”
“……연재야.”
해가 뜨질 않아 시야가 컴컴했다. 연재는 눈을 몇 번 깜빡이며 몸을 움츠렸다. 그러자 남자가 손을 놓았다.
“여기, 어디…….”
“새집이야. 이전 집은 처분했어.”
“……어…….”
이름을 부르는 것도 그렇고, 이전 집이라 표현하는 걸 보니 아는 사이 같은데, 도통 감이 잡히질 않았다. 연재는 떨떠름한 얼굴로 다시 침대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마지막 기억은 옥상에서 떨어지던 것이었다. 저보다 한참 어린 녀석이 달려들어서, 도망치다가 모르는 남자가 저를 찾아왔었다. 그가 손을 뻗는 순간 아래로 떨어졌던 것 같은데…….
기억이 뒤죽박죽 했다. 어쩌다가 거기에 있었는지, 왜 제게 달려들었는지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지방에 살던 자신이 어쩌다 서울에 올라왔고, 어쩌다 그 건물에서 살았는데?
“불 켜도 돼?”
“네, 네?”
“불… 켜도 돼? 싫으면 말고. 얼굴 보고 싶어서 그래.”
꽤 다정한 목소리였다. 연재는 네에,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몸을 뒤척이더니 어디선가 작은 리모컨을 꺼내 버튼을 눌렀다. 전등이 천천히 밝아지며 시야가 환해졌다.
연재는 침대에 누워 있는 남자를 보곤 깜짝 놀랐다. 눈알이 튀어 나갔을지도 모른다. 흐릿하게 그려지던 꿈속의 ‘누군가’의 얼굴이었다! 정작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제가 사랑하고 좋아했던 사람이 분명했다. 그 감정이 온전히 느껴지는 건 아니지만, 연재는 영화 속 주인공이라도 만난 듯 어어, 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왜, 여기…….”
“미안. 네가 나갔는데, 내가…… 내가 다시 데려올 자격 없는 거 아는데.”
“저, 저기.”
“그래도 거기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서.”
자다 일어나도 반짝이는 미남이 곤란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더듬더듬 사과를 뱉는 모습이 영 어색했다. 연재는 입술을 한 번 물었다 놓으며 조심스레 침대 위에 앉아 그를 올려다봤다.
“혹시…….”
“응?”
이번엔 남자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연재를 쳐다보았다. 연재는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며 남자를 똑똑히 보았다.
“저희, 사귀어요?”
꿈에선 차였는데, 꿈이라서 차인 거였을까? 근데 왜 기억이 안 나지. 사귄 기억도, 대학교를 졸업한 이후 이 사람을 만난 기억도 없었다. 꼭 소설 속 주인공처럼 모르는 곳에서 눈을 뜬 것만 같았다. 평행세계라든가.
“……뭐?”
“저 차이지 않았어요?”
연재는 여전히 순진하게 물었다. 선일은 돌처럼 단단하게 굳었다가, 서서히 녹아내렸다. 그리곤 숨을 들이켰다. 낯빛이 눈에 띄게 파리해져서 연재는 제가 잘못 물었나 싶어 몸을 뒤로 물렸다.
“아, 아니면 섹… 스 파트너?”
뱉고도 이건 아닌가 싶었는지 연재가 입을 뚝 다물었다. 선일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소리를 지를 뻔했다. 이건, 이건 아닌데. 제가 지은 것들을 모두 잊어서 용서조차 받지 못할, 이런 상황은 원치 않았다. 그에게 어떻게 용서를 빌어야 하는가 싶었지만, 이건 아니다.
선일은 급히 방을 벗어났다. 연재는 눈을 깜빡이다 실수했구나 싶어 눈썹을 축 늘어트렸다.
남자가 나간 뒤로 연재는 눕지도 앉지도 못하다가 침대 아래에 쪼그려 앉았다. 문을 살짝 열어 바깥을 훔쳐보니, 남자는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같이 침대에서 자고 있었는데 애인도, 섹파도 아니면 뭘까? 뭘 실수했기에 저런 반응인지 알 수 없었다. 연재는 발을 동동거리다 슬그머니 침대 위로 올라와 누웠다. 어차피 안 들어올 것 같은데 누워도 되지 않을까. 어차피 누워 있었고…….
며칠간 아무것도 못 먹은 사람처럼 배도 고프고 몸도 이곳저곳이 쑤셨다. 손가락을 확 펼쳤다가 쥐니 두둑, 하고 뼈 소리도 났다. 연재는 모로 누워 몸을 둥글게 말고 진지한 얼굴로 침대 시트를 박박 긁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에 없다. 저 남자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두어 달 전쯤에 서울로 올라온 건 알겠는데, 중간이 텅텅 비어 있었다. 아래로 떨어지고 난 후의 후유증일까? 근데 왜 그 기억만 없을까. 연재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인상을 썼다.
그러다 다시 몸을 뒤집었다. 천장도 어색하고 이불도 낯설다. 기억을 잃어도 익숙한 건 찾아낸다는데 여기는 그렇지 않았다. 이사 왔다고는 하는데… 사실일까? 남자가 거짓말을 했을까? 혹시, 정말 혹시 갑자기 납치된 건 아닐까?
보통 드라마를 보면 기억을 잃은 캐릭터가 특정 사람이나 물건, 장소를 보면 머리를 쥐고 몹시 괴로워했다. 하지만 연재는 남자를 보고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고, 떠오르는 것도 없었다.
좋아했던 남자가 저를 납치할 확률을 생각해 봤다. ……딱히 없다. 드라마도 그 정도로 막장은 아닐 거다.
침대에서 일어나 문을 살짝 열었다. 틈새로 남자를 힐끔거리자 그는 여전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 차라리 뭘 묻고 대화라도 하면 나을 텐데. 이 상태로는 답답함만 지속될 것이 뻔했다. 하지만 물어볼 용기는 없는지라, 문을 닫았다.
새벽인데 잠도 오지 않았다. 해도 뜨지 않아 어두컴컴한 바깥을 힐끔거리다 한숨을 폭 내뱉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야아. 심심한 마음에 속으로 노래까지 불렀지만 적막은 해소되지 않았다. 주먹으로 가슴을 퍽퍽 치는데, 발바닥이 간지러웠다.
“음.”
손을 아래로 내려 발바닥을 살살 긁었다. 잡히는 건 없는데 자꾸 뭔가 피부를 긁어댔다. 발바닥에서 발등으로, 그리고 무릎까지 자글자글한 무언가가 기어올랐다.
“아, 뭐야…….”
벌떡 일어나 바지를 확 걷자, 새카만 개미들이 와글와글 모여 제 다리를 감싸드는 것이 보였다. 게다가 팔뚝만 한 구렁이가 허벅지 안쪽으로 들어와 혀를 날름거리는 게 아닌가. 소름이 확 돋았다. 음악의 정지버튼을 누른 것처럼 머리가 새하얗게 굳었다. 뱀과 눈이 마주쳤다.
“아, 아…… 으, 이게, 무슨…… 하, 흐으, 흡…….”
손등으로 입을 막았다. 두 팔을 엑스 자로 교차하며 몸을 뒤로 물렸으나 벌레와 뱀들은 재빠르게 달라붙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했다.
“하, 흐으, 시, 싫어, 아, 아! 저리 가, 저리 가! 뭐야, 저리 가라고!”
두 손으로 힘껏 제 다리를 때렸다.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손톱을 세워 박박 긁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 행동이 이상하다는 걸 알았지만, 참을 수 없었다.
손은 익숙한 듯 팔과 다리를 긁었다. 그리고 다가올 무언가를 두려워하듯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뱀이 빠르게 올라와 목을 틀어막았다. 두꺼운 뱀이 목을 칭칭 감싸고 힘을 줘 목구멍을 조여댔다. 숨통이 막히고 사지가 벌벌 떨렸다.
“허, 흐으, 끅, 흐, 으윽…….”
이런 집에 왜 뱀이 있는지, 무슨 상황이 벌어진 건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연재는 끅끅거리며 두 발로 침대 시트를 마구 내리쳤다. 그때서야 남자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잠시 당황한 듯 몸을 굳혔다가 연재를 와락 끌어안았다. 저도 모르게 그의 팔에 손톱을 박았다.
“벌레, 끄, 벌레가…… 뱀이, 아, 흐윽, 흑…….”
“채연, 채연재. 채연재. 정신 차려, 아무것도 없어.”
선일은 온갖 잡생각에 빠져 현실인지, 꿈인지 혹은 영화인지. 혼란스러워하던 참이었다. 침실 문을 열었다 닫으며 힐끔거리는 연재는 꼭 옛날처럼 조금은 소심하고 밝은 아이처럼 보였다.
좋아해야 하나, 모든 걸 잊었으니 이제 새로 시작해도 된다고? 제 잘못은 모두 사라졌으니 괜찮다고? 발에 족쇄라도 찬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다시 침대로 돌아가 아무런 일도 없던 것처럼 굴 자신이 없었다.
죄는 사라지지 않는다. 채연재가 멀쩡해져도, 제가 한 짓은 영원할 것이다. 손끝에 여실히 남아 있다. 연재를 다른 알파들에게 떠넘기던 감각, 그를 벌하고 학대하던 모든 상황이 머릿속에 필름처럼 새겨져 있었다.
그래도, 그래도. 다 잊었으니까…… 모르는 척하고 잘 지내면 괜찮지 않을까? 그간 잘못했던 것을 사죄하듯 그에게 잘하면, 그러면.
때마침 침실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끅끅, 목이 졸린 소리에 급히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연재는 여전히 과거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고 펄떡이고 있었다.
기억은 잃었어도 상처는 여전했다. 그는 발작을 일으키며 제 목을 쥐고 버둥거렸다. 팔과 다리엔 생채기가 가득했다. 조금 전까지 상처 하나 없는 아이처럼 해맑았던 그가 고통스러운 얼굴로 매달려 왔다.
“흐, 흐윽, 이거, 이거어…… 이거, 뭐예, 요, 싫어, 싫어요…… 여기, 여기 싫어, 나 집… 집 갈래…….”
“연재야, 채연재.”
“아파, 싫어, 싫어…… 무서워, 싫어.”
화상자국처럼 상흔이 선명하다. 살이 떨리도록 두려웠다. 연재는 어쩌면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나. 기억을 잃었는데도, 예전처럼 해맑게 굴면서도 이렇게… 이렇게.
발버둥 치던 연재를 꽉 끌어안고 놓아주질 않았다. 그대로 한참을 긁히고 얻어맞던 선일은 무감각한 얼굴로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 비가 오는 듯했다. 느지막한 새벽, 이슬이 맺히듯 차가운 공기 가운데 습한 기운이 어렸다.
조금 전 자신의 생각들이 조롱처럼 머리를 맴돌았다. 혼란스러운 마음과 함께, 잘됐다고 이제 다시 행복하게 해주면 되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말이다.
연재는 잔뜩 서러운 낯으로 울다가 지쳐 선일의 어깨에 이마를 묻고 색색거렸다. 마르고 작은 체구가 안타까워 심장이 콕콕 쑤셨다. 할 수만 있다면 그의 고통은 제가 다 가져가고 싶었다. 연재가 느끼는 모든 것을 제가 느낄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여기, 흑, 여기…… 어디, 예요.”
조그마한 목소리가 귓전을 간질였다. 선일은 여전히 연재를 안은 채로 답했다.
“우리 집.”
“당신은 누구, 예요?”
“……나쁜 사람.”
“왜 나쁘게 했어요?”
음성이 일렁거린다. 탓을 하는 것도 아니고, 화를 내는 것도 아니다. 순수한 질문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선일은 천천히 온기를 되찾는 몸에 고개를 박았다. 그러게, 내가 왜 널 나쁘게 대했을까. 왜 널 아프게 했을까.
순수했던 음성에 길고 긴,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느껴졌다. 연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괴로워하고 있었다. 꼭 선일에게 선전포고하듯이, 나도 당신도 행복해질 수 없다고 소리치듯이.
“…미안해.”
“…뭐가, 뭐가요…….”
“내가, 내가 잘못했어.”
차마 제 입으로 어떤 짓을 했는지, 네가 무슨 상처를 받았는지 또 이렇게 괴로워하는 이유를 설명할 용기가 나질 않았다. 선일은 두 심장이 빠듯하게 맞물려 조금의 틈도 남지 않도록 연재를 꽉 끌어안았다.
만약 누군가 총을 쏜다면 두 심장이 한 번에 관통될 것이다. 죽고 싶어 했던 그를, 그 날개를 찢은 죄로 총알이 박힌 심장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선일은 비수가 꽂힌 듯 아려 오는 통증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무슨 잘못을, 했는데요…….”
작은 물음에도 답하지 못했다. 비겁하고 비열하게도, 선일은 연재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모든 걸 사죄하고 그를 보내주는 것이 맞는다는 걸 알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기억을 잃었음에 마음을 놓았다. 다행이다, 잊어서. 아파해도 잊어서 다행이다…… 하고.
“그냥, 미안해. 연재야, 미안해.”
연재는 멍한 눈으로 천장을 쳐다보았다. 남자의 품도 어색하고 낯설었다. 그러나 둘은 암묵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 같았지만 알고 싶어 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이 없음에도 이렇게 아픈데, 모든 걸 떠올리게 되면 얼마나 아플까.
조용히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어설프게 뺨만 붙이고 있다가 서서히 해가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창밖에서 어스름한 햇빛이 집안 바닥에 쌓이고 두 남자의 온기가 그 위로 가라앉았다.
새까만 그림자는 꼭 하나처럼 겹쳐져 있었고 작은 흔들림조차 없었다. 푸르고 노란 빛이 허공을 채운다.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한 구절이 머릿속을 스쳤다. 연재는 눈을 빙글 돌리며 제가 사랑했었을, 그리고 저에게 죄를 지은 남자를 힐끔거렸다. 무엇이 새로워졌는가. 이 사내가, 아니면 자신이, 혹은 모든 상황이?
* * *
가장 중요했던 세탁업체가 사라졌다. 그와 더불어 금융거래를 맡아 주기로 했던 곳도, 진행의 원만함을 위해 오메가를 구해 올 놈들도 하나둘 연락이 끊겼다. 처음에는 얼씨구나 좋다고, 돈이 될 사업이라며 참여하던 놈들이 말도 없이.
백이언은 초조하게 입술을 물어뜯었다. 한 가지 더, 채연재를 감시하라고 보낸 백진혁은 술에 취해 놀다가 오메가를 놓치고 말았다. 이선일의 말은 사실이었다. CCTV도 해킹을 한 모양이지. 채연재가 이틀 내내 앉아만 있던 터라 조금도 눈치채질 못했다.
이미 쥐어터진 놈을 골프채로 미친 듯이 내리쳤다. 그러다 분을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얼굴을 완전히 작살내 놓았다.
그래, 채연재가 중요한 게 아니다. 홍보용으로 쓰일 오메가 하나가 필요했고, 이선일의 심기를 거스를 수 있으니 가장 좋은 수단이었을 뿐이다. 업체도 다시 구하면 된다. 이전처럼 꽤 괜찮은 놈들을 구하기는 힘들겠지만 급한 대로 자리를 채워 넣어야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백이언은 밤새도록 잠을 못 잤다. 사라진 업체를 찾고, 다시 채울 놈들을 뒤져야 했다. 회사에는 기밀로 진행하던 일이었기에 모두 저 혼자 해야 했다. 최대한 이야기가 새어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다진그룹에서 이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저와 백진혁, 단둘이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일을 하던 때였다. 다진그룹 임원 중 한 명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는 다진그룹 주식의 큰 파이를 차지하는 이였다.
“무슨 일입니까.”
- 아, 회장님. 아직 안 주무셨습니까?
“바쁘니 용건만 부탁드립니다.”
새벽 3시였다. 전화할 시간은 아니다. 백이언은 벌게진 눈으로 화면을 노려보다 입술을 물어뜯었다. 몹시 피로하고 기분도 불쾌했다. 별것 아닌 일로 전화한 것이라면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를지도 몰랐다. 그간 이미지 관리를 했으니 최대한 참아야 했기에, 백이언은 황급한 손짓으로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들었다.
- 별것 아닙니다만, 자꾸 마음에 걸려서…….
“무엇 때문입니까?”
- 인터넷 커뮤니티에 떠도는 것이긴 한데, 얼마 전부터 돌던 것이기도 하고요.
커뮤니티? 백이언은 불을 붙이며 신경질적으로 라이터를 내던졌다. 담배 끝을 잘근잘근 씹으며 미간을 문지르자 골이 땅겼다. 고작 인터넷 커뮤니티 하나로 이 새벽에 전화를 해? 아무리 지분이 많은 주주라 하더라도 화가 치밀었다.
기업에 대한 소문은 이것저것, 더러운 것이 많은 법이다. 괜한 놈들이 이상한 소문을 퍼트리기도 했고 경쟁 기업에서 쓰잘데기 없는 것을 가지고 물고 늘어지기도 했다. 그래 봤자 얼마 가지 못하고 사그라들었으니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돈 좀 쓰면 사라질 게시판 가지고 이 지랄을 해? 나이만 처먹고 노망이 났나?
“사람 시켜서 지우면 됩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 아니, 그것이…… 최근 회장님이 다른 일로 바쁘시지 않았습니까? 계속 은밀히 움직이시기도 하고, 스케줄 관련으로도 공개를 하지 않으셨고요.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아직 시험 단계이니, 후에 말씀드리겠다고.”
- 그게 오메가 노예시장과 관련이 있습니까?
아. 백이언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차분히 담배를 빨아들이고 뱉었다.
“그게 무엇입니까? 요즘도 그런 게 있어요?”
- 아…… 아니라면 다행입니다. 하도 이야기도 많고, 논란이 불거질 조짐이 보여서 걱정이 됐습니다. 하긴 백 회장이 그런 사람이 아닌데.
“아시지 않습니까. 전 아내를 사업 도구로 쓰는 것도 싫어서 들이지 않고 있는걸요. 그런 구시대적인 일을 할 리가 없죠.”
- 예, 이 시간에 이런 일로 연락드려 죄송하군요.
“제가 사람을 시켜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말고 주무세요.”
몇 마디를 더 나누다 전화를 끊었다.
꽤 오래, 시간을 들여 준비한 사업이다. 겉으로는 한두 달 만에 시작한 것과 같았지만 장소를 색출하는 것부터 은밀히 돈을 빼내 사람을 구하고, 땅을 사는 것까지. 그리고 이선일을 무너트리기 위해 하나하나 공을 들였다.
이선일이 이제 와 움직인다고 달라질 건 없다. 고작 여론이 무엇을 하겠는가. 사람들은 당장의 자극적인 사건에 주목하는 법이다. 내일이라도 연예 기사를 하나 터트리면 곧장 그곳으로 쏠릴 것이다.
늘 그렇듯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위험이 되지 않으면 신경 쓰지 않는다. 정치, 경제, 다양한 사건, 사고까지. 잔혹한 살인이라 할지라도 길어야 6개월이면 잊는다. 재판 결과가 나오고 잠시 떠들썩해지다가 말고.
다시 의자를 돌려 화면을 노려보았다. 이선일, 이선일, 이선일.
또다시 무력감이 몸을 둘러쌌다. 그때처럼 아무 말도 못 하고 쓰러질 순 없었다. 하지만 그쪽이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저 또한 도망갈 길은 만들어 둬야 했다.
* * *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새벽이 지나고 해가 완전히 뜰 때까지, 선일은 연재를 안고 있었다. 그러다 색색, 잠든 소리를 듣고 나서야 한숨을 쉬었다. 연재가 잠을 이루지 못했다면 그때까지 숨을 참다 호흡곤란으로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우스운 생각을 했다.
오전 10시쯤, 규서가 학교에 가고자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지나치게 일상적이고 평범한 소음은 익숙지 않았다. 샤워하고, 짐을 챙겨 나가려던 녀석이 잠시 안방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선일은 벌건 눈으로 제 가슴 위에서 잠든 연재를 토닥였다. 규서가 입 모양으로 ‘엄마 일어났어?’라고 묻자 가만히 고개만 끄덕여 주었다.
그리고 그가 나간 뒤, 저녁에는 처음 만난 것처럼 인사를 해야 한다고 보냈다. 규서는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설명은 나중이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났다. 오후 12시가 되자 연재가 느지막이 눈을 떴다. 잠에서 덜 깬 녀석은 몸을 뒤척이다 선일의 품에 파고들었다. 꼭 강아지처럼 숨을 크게 마셨다가 푸우욱 뱉었다. 강아지는 편안할 때 한숨을 쉰다던데. 별 의미 없는 생각을 하며 연재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었다.
그간 그리 고생했는데도 여전히 부드럽고 매끄러운 머리칼이었다. 새까맣고, 관리라도 한 것처럼 손가락에 걸리는 것 하나 없었다.
“으음…… 응…….”
품 안으로 파고들 때마다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이제는 따뜻해진 살갗이, 그의 몸이 제게 온전히 기대어 잠든 모습에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싶었다.
더 이상 문제도 없고, 힘든 일도 없고, 연재가 고통스러워할 일도 없는 이대로.
잔잔한 바람이 불었다. 따뜻한 태양이 방 안으로 들어서며 그림자를 드리운다. 선일은 문득 작은 머리를 쓰다듬던 제 손을 봤다. 핏줄이 불거진 커다란 손은 거칠고 투박했다. 연재에 비해 낯부끄러운 손.
그리고 네 번째 손가락에 낀 반지가 무색으로 번들거렸다. 엄지로 그것을 살살 밀어내며 매만졌다. 너는 이걸 가져오면서, 내게 줄 생각을 했던 걸까. 없는 돈으로 마련한 볼품없는 반지를 왜 내게 주지 못했을까.
그랬더라면 조금은, 조금은 달랐을지도 모르는데…….
자꾸만 연재를 탓하고 싶어졌다. 다 제 죄임을 알면서도, 이 작고 연약한 것에게 네 탓이라고 밀어붙이고 싶었다. 그간 그렇게 살았으니까. 제 잘못은 재빨리 뒤엎고, 이것을 일으킨 건 다른 이유 때문이라며 저를 보호해 왔으니까.
그러나 입을 열지는 못할 것이다. 다른 것도 아닌 채연재였으니까. 과거에 제가 놓쳤고, 또다시 만났음에도 돌이키지 못했다.
며칠간 닿지 못했던 살결을 쓰다듬고, 품에 안고 있으니 자연스레 그와 했던 행위들이 떠올랐다. 선일은 난감함이 역력한 표정으로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사이 연재가 칭얼거리며 선일의 다리 사이로 제 가는 허벅지를 밀어 넣었다. 좀 더 긴밀해진 접촉에 마른기침을 뱉자 녀석이 고개를 푹 숙였다.
“더…… 으음, 응, 더 잘래…….”
벌써 12시인데.
선일로서는 이 시간까지 침대에 누워 본 것이 처음이라 영 어색하기만 했다. 그는 연재가 깨지 않도록 몸을 경직시키고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자꾸만 성기가 그의 허벅지에 걸려 점차 크기를 키우는 게 느껴졌지만 배에 힘을 주고선 참았다.
나쁘게 굴고 싶은 마음은 없는데, 이대로 연재의 아래에 제 성기를 꽂아 넣고 싫다고 칭얼거리는 게 보고 싶었다. 몇 번을 더 가게 만들어 그만하자는 울음에도 달래고 달래어 밤새도록 허리를 흔들고 싶었다.
그러나 선일은 그저 참았다. 알파와 오메가, 짝이 된 두 사람이 붙어 있는 한 욕망이 줄어들 일은 없겠지만.
오후 1시, 결국 연재가 하품을 뱉으며 눈을 번쩍 떴다. 여전히 몽롱한 얼굴로 입맛을 다시더니 무릎을 꿇고는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웠다. 선일은 조심스레 연재의 어깨를 툭, 쳤다.
“배 안 고파?”
“으응…….”
“먹고 싶은 건 있어? 아, 아니다. 며칠 못 먹었으니까 죽으로 하자. 좋아하는 죽 있어?”
졸린데…… 더 자고 싶은데.
그렇게 말하고 싶은 얼굴이다. 선일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연재의 몸을 일으켜 등을 토닥여 주었다. 며칠 만에 일어났으니 배도 고플 거고, 몸에 힘도 없을 터다. 끔뻑끔뻑 고개를 끄덕이는 연재를 이끌어 방을 나왔다.
아직 고용인을 구하지 않아 누군가 차려 놓은 것은 없었지만, 선일은 처음으로 죽을 끓여 보기로 했다. 주문을 해도 좋지만 아무래도 시간이 걸리지 않겠는가.
연재를 식탁에 앉혀 놓고 핸드폰을 뒤적여 계란죽 레시피를 찾았다. 그런데 들어가는 재료가 꽤 많았다. 계란, 버섯, 양파, 호박, 당근, 멸치…… 등등. 기본적인 식재료만 넣어 뒀으니 냉장고에 그런 게 있을 리는 만무했다.
결국 계란과 양파만 찾아낸 선일은 어설프게 레시피를 따라 죽을 끓였다. 육수를 만들라는데 버섯도 멸치도 없어서 돼지고기를 넣고 육수를 끓였다. 그랬더니 묘한 비린내가 났다. 그리고 난 후, 얼기설기 대충 썬 양파를 볶았다. 이상하게 화면과 달리 진한 갈색이 되었다.
탄 건 아니니 괜찮지 않을까. 그 위에 밥을 넣고 돼지고기 육수를 넣으니 기름이 둥둥 떴다. 뭔가 이상하긴 했지만 순서는 잘 따라 하고 있었다.
계란 두 개를 풀고 죽이 퍼졌을 때쯤 계란 물도 넣었다. 단 양파 향이 진하게 나고, 돼지고기 특유의 비린내가 났다. 소고기를 넣었어야 했을까? 보통 돼지로 육수를 냈던 것 같은데…….
그리고 국간장 한 스푼, 소금도 조금 넣으니 그럴싸한 죽이 완성됐다. 비록 사진과 다르게 색이 지나치게 짙고 비린내도 나지만 잘 따라 했으니까, 뭐.
난생처음 만든 것치고는 괜찮지 않은가.
선일은 조심스레 그릇에 죽을 따라 연재의 앞에 수저와 함께 두었다. 의자를 빼 그 옆에 앉으며 연재의 손에 수저를 쥐여 주었다.
“어…….”
이제야 잠이 다 깬 모양이다. 녀석은 아까와 다르게 어색한 표정으로 선일을 힐끔거렸다.
“우선 먹어. 며칠째 굶었어.”
대학 시절의 채연재처럼, 제 눈치를 힐끔 보고는 죽을 한 입 떠먹는다. 선일은 ‘맛있다’라는 말이 나오길 기대하며 쳐다보았지만 안타깝게도 연재는 오물이라도 먹은 것처럼 구겨진 낯으로 숟가락을 내려놨다.
“왜?”
“…….”
그렇게 한 10초, 씹지도 삼키지도 않던 연재가 급히 싱크대로 달려가 죽을 모조리 뱉었다. 선일은 조금 충격 먹은 얼굴로 제 수저를 가져와 죽을 떠먹었다.
비리고, 살짝 탄 맛이 나 쓰고, 양파 향이 너무 진해 메스껍기까지 했다. 맛을 볼 생각은 전혀 못 했다. 선일은 제 실수에 얼굴이 새파래져서는 급히 죽 그릇과 냄비를 들어 설거지통에 처박았다. 그리고 저보다 한참 작은 연재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입술을 말아 물었다.
고의로 그런 건 아닌데, 지금 저를 완전히 잊은 연재가 그걸 믿어 줄까? 안 그래도 기억을 모두 잃어 저를 의심하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어제는 제 입으로 미안하다고 사과하지 않았던가. 일부러 맛없게 만들었다고 생각할 것 같아 손끝이 잘게 떨렸다.
싱크대를 주먹으로 쥐고 입을 게워내는 연재 옆에서 서성거렸다. 연재는 휘적휘적 다시 식탁에 앉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선일은 미안해서 어쩔 줄 몰랐다. 레시피를 보고 그대로, 아니 그대로는 아니지만 여튼 최대한 비슷하게 따라 했는데…….
“저, 연재야.”
“……요리 처음 해요?”
“…….”
“나 진짜 이런 죽 처음인데.”
그래도 독이나 약은 넣지 않았다고 해명해야 하나, 그리 생각할 무렵 연재가 눈을 휘어 웃었다.
“제가 끓일게요, 죽.”
“아니, 아니야. 주문할게. 조금만 기다리면 오니까.”
“돈 아깝게 뭐 하러요. 계란죽 금방 해요. 그냥 밥이랑 계란만 있으면 되는걸.”
그리고 연재는 정말 순식간에 죽을 끓였다. 심지어 냄새도 좋았다. 육수도 안 만들고 그냥 끓였는데 제가 한 것보다 몇 배는 멀쩡해 보였다.
식탁에 앉아 자신이 끓인 죽을 떠먹는 모습에 선일은 괜히 죄인이라도 된 기분으로 시선을 피했다. 이제 어쩌지. 뭐라고 말을 해야 하지? 결혼했다고… 남편이라고? 그래서 집으론 못 보내주겠다고…… 아니다, 이건 너무 악덕 남편 같았다.
“저기요.”
“……어.”
“그쪽, 저랑 대학교 같이 다녔어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재는 다 먹은 죽그릇에 수저를 올려놓고는 물까지 벌컥 들이켰다. 대학생 때랑 비슷한 줄 알았는데, 조금 달랐다. 좀 더 당차다고 해야 할까.
회사를 다니면서 좀, 달라졌나? 그러다 결혼 후에는…… 제가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 했던 걸까.
“기억이 좀 이상한 거 같아요. 서울에 올라온 건 알겠는데, 그리고 어, 난간에서 떨어진 것도 알겠는데 왜 그쪽이랑 같은 침대를 쓰는지도 모르겠고…… 근데 제가, 그쪽을 좋아했던 거 같아서. 아, 또 그쪽은 나쁜 사람이라고 하니까, 내가 이해가 안 가요.”
조목조목 말을 뱉는 걸 보니, 현재 선일은 연재에게 ‘다정했던 과거’의 모습으로 느껴지는 듯했다. 어제의 일이 있었음에도 곧바로 괜찮다는 듯,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눈을 맞춰 왔다. 이전의 연재였다면 상상도 못 할 태도였다.
“나쁜 짓이 뭔지는 안 물을게요…… 미안해하시는 거 같으니까, 언젠간 말씀하실 거 같기도 하고.”
순간 뜨끔, 했다. 선일은 고개를 돌렸다. 나중에는 말할 수 있을까. 그걸? 아내로 들여서는 성 도구처럼 널 사용했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돌리게 내버려 두고, 위험한 걸 알면서도 널 두고 출장을 다녀왔다고. 이름을 불렀다고 벌을 주고, 작은 선물 하나 주질 않았다고.
선일은 순하게 웃는 연재의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지금도 이 상황이 너무나 어색하고 낯설다.
채연재가 제게 욕하고, 밉고 싫다고 화를 냈다면 속이 조금 나았을까?
난 당신을 사랑해서 러트를 준비했고, 결혼식 때 줄 반지도 샀다고. 그렇게 소리치면 나았을까. 마냥 해맑은 얼굴에 양심이 찔렸다. 연재가 칼을 들고 절 죽이고 싶다고 해도 저는 할 말이 없는 사람인데, 저런 얼굴을 봐도 괜찮을까.
이미 과거의 일로 트라우마가 남은 사람에게…….
“그냥, 내가 왜 여기 있는지만 말해 주면 안 돼요?”
“아…….”
“당신이랑 나랑 무슨 사이인지, 나는 뭘 하고 살았는지 같은 거…… 그리고, 음. 혀, 형 이름도 알려주세요.”
형이란 말에 또 심장이 콕콕 찔렸다. 이 와중에 순간 기쁨을 느꼈던 탓이다. 늘 선배, 혹은 선일 씨라고 부르게 했던 게 후회될 만큼 친근한 호칭에 온몸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이렇게 착하고 예쁜 아이가, 어떻게 지금까지 누구도 만나지 않았을까. 어떻게 제게 올 수 있었을까. 하필이면 이토록 못된 저에게.
“이… 선일, 이선일이야.”
“아, 선일. 선일 형. 음, 익숙하진 않네요.”
“…….”
연재는 재촉하듯 선일을 빤히 쳐다보았다. 시선이 느껴졌으나 고개를 들 순 없어서, 그럴 자격이 없어서 선일은 계속해서 따끔거리는 속을 느끼며 입가를 쓸었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이렇게, 처음 만난 것처럼 시작해도 되는 건지. 정말 사실을 숨겨도 되는 건지. ……그를 보내주지 않아도 되는지.
“네가, 서울로 올라온 건…….”
“네.”
“나랑 결… 혼하려고, 올라온 거고. 지금은 부부야.”
힘들게 말을 이었다. 연재는 눈을 끔뻑이다가 아, 그래요? 하고 답했다. 확실히 이해한 것 같지는 않았다. 혹여 거짓이라 생각할까 봐, 혼인신고서라도 가져오려는데 연재가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그럼, 여보…… 라고 하면 돼요?”
아.
“……응.”
눈가가 축축했다. 선일은 고개를 더 숙여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 했다. 연재는 그릇을 싱크대에 두고 다시 돌아오더니 작게 웃었다.
“결혼할 생각 없었는데, 신기하네요. 살다 보니 기억도 잃고… 옛날에 좋아한 사람이랑 결혼도 하고. 드라마 같다, 꼭.”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가는 제 팔을 쓸어내린다. 선일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살짝 일그러진 눈썹이나, 제 팔과 다리를 훑는 낯빛이 마냥 좋지 않았다. 연재는 아픔을 참는 것처럼 입술을 안쪽으로 밀어 넣고는 어설프게 웃었다.
“생각보다 나쁜 사람은 아닐지도 모르겠어요.”
그리고 이내 손톱을 세워 살을 긁었다. 하얀 팔뚝에 긴 붉은 자국이 남았다. 선일은 위축된 얼굴로 또 중얼거렸다.
“미안.”
“아니에요, 이건…… 잠깐 아픈 거 같으니까. 괜찮겠죠.”
괜찮지 않았다, 제가. 연재가 저렇게 굴 때마다 숨통이 막혔다. 누군가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것처럼 아팠고, 답지 않게 자꾸만 울컥였다.
연재의 인생은 너무나 기구했다. 하필 저를 만난 것까지.
“있죠, 자꾸 뭐가 생각날 것 같아요. 벽에…… 성경 구절이 붙어 있었거든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연재를 선일은 그저 조용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 *
시간은 무심히 흘렀다. 선일은 종종 비서나 혁도 파에게 연락을 받아 진행 상황에 대해 들었고,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집 밖으론 나갈 수 없다는 말에 조금 의심하는 듯 보였으나 연재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옥상에서의 일을 떠올리는지 자신이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구나, 하고 이해한 듯싶었다.
이전 집의 짐이 하나둘 도착해 집을 채워 나갔다. 연재는 짐을 나르는 이들에게 하나하나 인사하며 냉장고에서 비타민 음료를 꺼내 건넸다. 그리고 그들이 다 간 후에는 서재에 정리된 책을 읽었다.
기억을 잃기 전에도, 잃은 후에도 어색한 건 매한가지다. 선일은 초조하게 다리를 떨며 연재가 하는 것을 마냥 지켜보았다.
연재는 처음엔 시집이나 문학 서적을 위주로 꺼내서 읽다가, 영 재미가 없었는지 전공 서적을 읽었다. 뇌 과학이나 뭐, 그런 딱딱하고 어려운 책들 말이다.
상황은 순조롭게 흐르고 있었다. 다만 백이언 측에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래 봤자 소수로 일하는 백이언과 선일은 차이가 있었다. 이미 불법적인, 아니 인종과 기질, 그리고 성별을 차별하는 사업을 진행 중인 백이언은 걸리는 순간 매장당할 것이다.
겉으로는 알파와 오메가의 결혼 사업이라 하였으나, 만들어진 건물에는 커다란 홀과 무대, 그리고 무대 뒤편 공동 샤워실과 작은 칸막이가 쳐진 방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처음에는 오메가만 잡아들이는 줄 알았으나 백이언은 멀리 인권 의식이 낮은 나라에서 브로커를 구해 마약과 여성들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주로 흑인과 동양인에 치중돼 있었다. 백인은 값이 비싸단 이유였다. 그리고 이런 시장에서는 대부분 동양인이 잘 팔리기 마련이다. 고객은 백인, 판매되는 것은 몸집이 작은 동양인.
가학적인 행위를 할 것이 뻔한 이들은 평소와 다른 재미를 찾을 테니까. 증거는 하나둘 모였다. 그가 시범적으로, 이미 한 차례 작은 모임을 가졌다는 사실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연재는 무사했다.
선일은 내내 불안함에 연재의 발소리, 뒤척이는 소리, 책을 넘기는 소리에 귀를 곤두세웠다. 누군가 집에 들어올까 겁이 났고, 연재가 어디론가 사라질까 봐 두려웠다. 조금이라도 눈을 떼는 순간 사라질 것만 같아서 그가 자리를 옮길 때마다 저도 따라다녔다.
서재가 잘 보이는 식탁 앞에 앉아 있다가, 그가 안방으로 들어가 뒹굴거리면 안방과 이어진 베란다로 갔다. 담배를 피우려다 그것도 모두 꺾어 버렸다. 안 그래도 몸이 좋지 않은 이에게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없었다.
언제 발작이 일어날지, 또 언제 기억이 돌아올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선일은 온종일 마음을 졸였다.
창밖의 서늘한 바람 소리와, 연재가 사락사락 책을 넘기는 소리뿐. 선일이 할 수 있는 것은 연재를 위해 오렌지 주스를 한 컵 따르는 것. 책과 책 사이 어떠한 의미도 존재하지 않는 적막 가운데 선일은 그를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다 오후 9시 즈음, 규서가 집에 도착했다. 뒹굴거리던 연재가 조금 놀란 눈으로 선일을 쳐다보자, 그는 급히 아들, 하고 설명했다. 연재의 얼굴이 더욱 구겨졌다. 두어 달 전에 결혼하고 벌써 집을 오가는 아들이 있다고?
“저, 왔어요.”
아주 조금, 급한 듯한 목소리였다. 연재는 저도 모르게 옷매무새를 가지런히 하며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현관에서 걸어오는 녀석은 고작해야 스무 살 남짓의 어린 녀석이었다. 저 ‘선일’ 형은 재혼이었구나. 그렇다 치더라도 아들의 나이가 꽤 많아 의심스러웠다. 어릴 적에 사고를 쳤던 걸까?
“어, 엄마. 엄마!”
눈치를 보는데, 현관에서 신발을 벗던 놈이 연재의 시선을 느끼곤 금방이라도 울 듯한 얼굴로 급히 달려왔다. 그리고 좁은 문틈을 열어젖히고 들어와 작은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어찌나 세게 끌어안는지, 목이 졸리는 듯했다.
“엄마, 일어, 일어났어요? 몸은 괜찮아요? 밥은 먹었구요? 제가 죽 사 왔는데. 저녁, 저녁 아직이죠. 아, 그리고… 엄마가 좋아하는 것도 사 왔고, 어, 또…….”
“이규서.”
혼란스럽게 말을 잇던 녀석이 선일의 음성에 몸을 딱, 하고 굳혔다. 그제야 아차 하는 얼굴로 슬그머니 제 몸을 떼어냈다.
“죄송해요, 그…… 어머니.”
“아, 아니야.”
연재는 얼떨떨한 얼굴로 규서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선일의 등 뒤로 숨었다. 선일과 다르게 이규서라고 불린 녀석에게선 불쾌한 것이 느껴졌다.
선일은 아예 처음 보는 사람 같았다. 꿈속의 까만 남자가 선일이라는 기억만 얼핏 날 뿐, 그 외에는 이방인처럼 낯설었다.
그러나 이규서는 볼 때마다 속이 메스꺼웠다. 금방이라도 구토할 것처럼 뭔가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왔고, 더불어 녀석이 저를 안았을 때는 소름이 쫙 끼쳤다. 온몸에 벌레가 달라붙어 살과 피, 내장까지 갉아 먹는 것처럼.
파리해진 낯에 선일이 둘을 갈라놓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기절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연재는 선일의 소매를 붙잡고 그 뒤에 쏙 들어가 숨었다.
“규서는, ……내 아들이야. 그니까, 유전자 조합으로 태어났어.”
“……네.”
“다른 뭐, 얽히는 사람은 없어. 너한테 피해가 갈 일도 없고…… 아, 지금은 나가는 게 위험하지만, 나중에 일이 정리되면 괜찮을 거야.”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규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한 걸음 앞서 걸었다. 그러자 연재가 뒷걸음질을 쳤다. 아버지에게는 딱 달라붙어 있으면서, 왜 저에게는, 아니, 그리고 왜… 아버지는 완전히 처음 보는 사람처럼 설명하는가.
그리 인사하라고 했었지만 형식적인 것이라 생각했다. 규서는 선일의 등 뒤에 숨어 떠는 하얀 손을 빤히 쳐다보았다.
“……엄마, 저 보기 싫어요?”
“……아, 아니. 그…… 아, 안 친하니까.”
“그렇게 낯가리는 사람 아니잖아요. 처음부터 되게 빠르게 적응도 하고, 했으면서…….”
자세한 말은 숨긴 채로 규서는 퍽 섭섭하다는 듯 입꼬리를 내렸다. 그제야 연재가 고개를 뻗어 동그란 눈을 보였다. 그러나 눈이 마주치자마자 욱, 하고는 제 입을 틀어막았다.
“우욱, 으… 욱!”
“연재야!”
“으, 흐으, 우욱!”
선일의 손도 내친 연재는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토악질을 했다. 온종일 먹은 것이라곤 죽뿐인데, 얼마 되지도 않는 것을 모두 게워내는 소리가 들렸다. 규서는 멍하니 화장실 문을 보며 들고 있던 가방을 떨어트렸다.
“뭐예요, 방금…….”
숨을 크게 들이쉬고, 뱉었다. 선일은 소파에 앉아 마른세수를 하며 연재를 기다렸다. 토하고, 진정된 듯하다 다시 꺽꺽대며 힘겨워했다. 규서는 멍하니 허공으로 시야를 흐트러트렸다.
“기억이 없대.”
“…….”
“결혼한 것부터, 전 집에 살던 것들 다. 드문드문 기억은 있는 모양이지만…… 나에 대한 것도 확실하지 않더군. 대학교에 다닐 적의 이야기도 확실하게 묻질 않았어.”
습관적으로 소매 안쪽을 뒤적이다 참았다. 속이 답답했다. 곧 연재가 입을 헹구고 화장실을 나왔다. 그 앞에 서 있던 규서와 마주치더니, 흠칫 놀라 선일의 옆으로 뛰듯이 걸어갔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왜, 왜. 그, 아니… 미안해요. 그쪽 보면, 속이…….”
“……아니에요, 엄마.”
“목소리도…… 듣기 싫어.”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시선을 베란다로 돌린다. 연재는 창밖을 노려보며 눈가에 고인 눈물을 꾹꾹 닦았다.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자꾸만 소용돌이처럼 저를 몰아세웠다. 기억은 하나도 없는데, 몸은 반응했다. 차라리 기억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유도 모르고 남을 미워하려니 속이 쓰렸다.
선일의 등 뒤에서 보는 규서의 얼굴이 몹시 창백했다. 허공을 떠돌던 손이 아래로 툭 떨어지고 입술을 질끈 물었다. 저 아이와 나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대놓고 피했음에도 규서는 연재를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죄책감 가득한 낯으로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제가 그렇게… 싫어요?”
“…….”
연재는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평범한 사람의 목소리인데, 이상하게 귀에 파고들 때마다 헛구역질이 나고 역겹다. 매몰찬 태도라는 걸 알지만, 아침의 일처럼 그의 목소리가 귀 안쪽으로 파고들어 온몸을 범하는 것처럼, 괴로웠다.
소음에 가까운 음성이었다. 일렬로 줄을 선 벌레들이 사각사각 피부를 파고들었다.
“엄마, 내가 잘못했어요. 내가, 잘못했어요…….”
“가, 가까이 오지 마.”
공포에 질린 눈동자가 바닥으로 꺼졌다. 규서는 눈썹을 찌푸리고, 두 손을 펼치며 연재에게 다가갔다. 큼지막한 손이 파르르 떨렸다. 직전까지 공부하고 온 흔적이 남아 손가락 사이사이에 볼펜 자국이 묻어 있었다.
“진짜로, 정말로 나 생각 안 나요? 나 기억 안 나요? 내가 한 것도 생각 안 나요?”
결국 연재는 딱딱하게 얼은 채로 무릎을 꿇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서 있을 수 없었고, 시야가 일렁거렸다. 삽시간에 벌레들이 달려들었다. 발바닥부터, 발톱 사이사이로 기어오른다. 연재는 눈을 꼭 감았다.
“왜, 왜 그래요? 엄마, 왜 그-.”
“이규서, 뒤로 물러나.”
“아버지? 엄, 아니, 그, 왜 저러는 거예요? 네?”
선일은 황급히 연재를 안아 올렸다. 안방으로 가는 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연재는 끅끅대며 숨을 쉬지 못했다. 공황에 빠진 듯 검은 눈동자가 초점을 잃었다.
“아, 그…… 흑, 아파, 아파요. 어, 어떡해요, 이거…… 으, 흐윽, 너무, 아픈데…… 하, 저, 저요. 계속, 계속 이래요? 맨날… 이래야, 아, 아으, 흑, 흐으…….”
쿵! 벽에 머리를 찧었다. 쿵, 쿵, 쿵. 두 손으로 팔을 마구 긁으면서 연재가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 삽시간에 벌어진 일이라 선일은 어찌할 줄 몰라 제 머리카락만 쓸어 넘겼다. 저를 볼 때는 괜찮았기에, 규서에게도 그럴 줄 알았는데.
벽에 박는 이마에 손을 덮었다. 그리고 애처롭게 떠는 어깨를 쓰다듬고, 괜찮다고 속삭여 주었다. 다른 이도 아닌 제가 그를 위로한다는 것이 우스워, 흐느끼는 소리가 콕콕 심장께를 찔러 왔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게 더 괴로웠다. 잘못한 것은 저인데, 벌을 받는 건 채연재라는 사실에 미안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안방 문을 들고 규서가 들어섰다. 연재는 반쯤 광기 어린 눈으로 펄떡이다가 끅끅대며 울었다. 규서가 들어온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시트를 마구 긁었다.
“죽을래, 죽을래…… 나, 나 죽을래요. 죽고 싶어, 내가, 내가 죽으려고 했는데…… 엄청, 높은 곳에서어…… 흐, 흐윽, 그랬는데 왜애, 흑…… 아, 왜, 왜 죽고 싶은 거야…….”
혼란이라는 단어가 격정적으로 흔들리며 안방을 가득 채웠다. 소용돌이치는 감정이 세 사람을 뒤엉켜 놓았다. 연재는 무참하게도 침대에 늘어져 끅끅대며 울었다. 조금 전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정말 갑자기. 너무나 갑자기 일어난 일이었다.
이런 연재를 어떻게 세상 밖으로 보낼 수 있을까. 부모도 그를 사랑하지 않는데.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어 스스로 돌탑을 쌓은 녀석이었다. 그 탑을 무너트린 것은 저들이었고.
규서는 발작하는 연재를 보며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늘어진 눈썹, 희미해진 시야 너머로 엉망으로 구겨진 침대가 보였다. 죄는 돌고 돌았다.
뼛속 깊은 곳까지 굵직한 창이 꽂힌 것처럼 가슴이 쓰라렸다. 천천히 심호흡을 뱉었으나 산소가 부족해 어지럽기까지 했다.
왜, 영화 속 악당이 주인공의 자식이나 배우자에게 복수하는지 알 것 같았다. 티끌 하나 묻지 않은 순수한 피해자가, 저들 때문에 고통스러워했다. 연재는 꺽꺽대다 선일의 품에 안겨 한참을 발버둥 쳤다. 머리가 찢어질 듯이 아팠다. 바늘이 가득한 바닷속에 흠뻑 빠진 것처럼, 그의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왜 그랬을까, 왜. 왜 저는…… 그리 바보 같았을까.
어린 치기로 했다기엔 용서할 수 없는 짓이었다. 어머니는 기억을 잃고도 괴로워했다. 한때는 저 작은 몸에 씨앗을 심고 임신을 시키겠다며, 강압적으로 굴던 것이 부끄러웠다. 수치스럽고, 모든 것이 후회됐다.
쓰레기, 개자식, 병신…….
채연재 또한 사람이었다. 이 집의 오메가가 아니라,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어머니라는 이름이든, 채연재라는 이름이든 간에.
* * *
선일은 이전에 처방받았던 약을 연재에게 꼬박꼬박 먹였다.
그는 잔말하지 않고, 자신이 아픈 상태라는 걸 받아들였다. 벌레와 뱀이 ‘진짜로’ 있다고 믿었던 전보다는 훨씬 나은 상태였다.
그러나 기억을 잃었다는 소식에 의사는 한숨을 쉬었고, 최대한 곁에서 떨어지지 않기를 권고했다.
사건은 차근차근 정리되고 있었다.
다진그룹에 대한 소문은 점차 퍼져나가 ‘미스터리한 사건’을 취재하는 인터넷 방송에서도 단독 프로그램을 만들 정도였다.
백이언은 새로운 이들을 구하는 듯싶었지만 고위층 사이에서 소문이 다 퍼진지라 뜻대로는 되지 못했다.
커뮤니티를 포함한 인터넷의 각종 글들은 빠르게 지워졌다.
그러나 네티즌들은 그것을 더욱 의심하고, 꼬투리를 잡으며 빠르게 소문을 퍼트렸다.
바로 직전에 있던 오메가 성추행 사건 덕인지 오메가 인권단체에서도 말 한두 마디를 얹기도 했다.
뭣보다 성추행 피해자였던 오메가가 SNS를 통해 선일이 구했던 증거자료를 올리면서 작은 사이트에서 기사도 여러 차례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연재는 최근 정신과 관련된 서적을 구입해 읽었다.
며칠 전 마음대로 써도 좋다고 카드를 줬었다.
최대 1000만 원의 한도가 있는 적당한 카드였는데, 녀석은 한참 우물쭈물했었다.
“이런 걸 제가 써도 돼요? 아니, 그…… 우리가 결혼한 건 맞지만. 음, 그게…… 제 수익은 없나요? 저, 저도 나름 회사에 다니고 있었는데…… 없어요? 저, 그럼 거지인가요?”
첫 결제는 편의점에서 콜라 한 캔. 그것도 가장 작은 사이즈였다.
선일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연재는 좀 더 용기를 냈는지 그다음 날에는 플라스틱병으로 된 콜라를 사 왔다.
연재는 파란 캔보다는 빨간 캔 콜라를 더 좋아했고, 제로 칼로리가 아닌 오리지널만 사와 마셨다.
커다란 머그컵에 얼음을 가득 담고 그 위에 콜라를 부어 마시는 걸 좋아했다. 머그컵은 항상 무늬가 없는 것으로 골랐다.
과자나 다른 군것질거리는 필요 없는지, 약 사흘간 주구장창 콜라만 샀다.
선일은 제 핸드폰으로 날아오는 내역을 보며 한도가 1000만 원이라는 걸 알려줘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했다.
“저, 혹시 책도 사도 돼요? 여기 있는 책… 은 다 읽어서, 다른 게 보고 싶어요. 아, 그리고… 음, 언제부터 혼자 나갈 수 있어요? ……아직이에요? 뭐가 해결이 안 된 건가요? 저번에 저, 따라오던 애? 아, 음…… 근데 걘 왜 그래요? 제가, 제가 뭘 또 잘못했나요? 아, 아니…… 제 잘못이라고 막, 그러는 게 아니라 보통… 그렇잖아요. 제가 걸레같이 굴었나 해서……. ……뭘 그렇게 놀라세요?”
책 읽는 속도가 제법 빨랐다. 보통 사람이면 5시간을 걸려 읽을 것을, 채연재는 2~3시간이면 읽었다. 속독이라고 보기엔 조금 애매했고, 집중력과 이해력이 상당한 모양이었다.
예전에도 책을 좋아했던가? 기억을 잃기 전에는 소파에 온종일 앉아 있었다고 들었는데.
채연재는 한두 권씩 결제하더니 ‘무료배송’을 위해서라며 5만 원어치의 책을 샀다. 그래 봤자 얼마 안 되는 돈인데 선일의 눈치를 봤다.
밥은 선일이 했다. 처음 만든 죽처럼 엉망은 아니었고, 하다 보니 밥을 짓는 것 자체는 쉬웠다. 반찬은 사 왔고, 종종 규서가 외식하자며 음식을 포장해 왔다.
물론 연재는 규서와 겸상을 할 수 없어서 따로 먹어야 했다.
규서를 보기만 해도 토하고 발작하던 연재는 나날이 나아져 이제 속이 울렁거리는 정도가 되었다. 물론 그것은 규서에 한해서였고, 발작은 하루에 한두 번씩 일어났다.
“그럼 저 결혼하고… 집에만 있었던 거예요? 일도 안 하고, 그니까 집에서 뒹굴거리고……? 정말, 요? 진짜 제가 그랬어요? 아, 아니.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했어도 그렇지. 그건 좀…… 한심한 거 아닌가 싶어서요. 집에서만 있고, 딴 남자들한테 벌리고 다니고 그랬나요? 구, 구멍도 두 개니까 두 명씩 그랬나요? 아니라구요? ……이런 말 하지 말라뇨. 물어볼 수 있잖아요.”
잠은 따로 잤다. 결혼했다곤 하지만 자기는 모르는 일 같아서 별로란다.
그러다 하루는 연재가 입을 꾹 다물고 말도 걸지 않았다. 뭔가 화가 난 게 있나 싶어, 혹은 기억이 떠올랐나 싶어 선일은 온종일 그의 눈치를 보느라 바빴다. 연재가 좋아하는 콜라도 사 오고, 디저트도 주문했지만 서재에 틀어박혀 나오질 않았다.
“사실 저 궁금한 게 있어요. ……아, 오늘 왜 그랬냐면… 자꾸 생각나서. 그니까, ……저랑 형이랑 잤어요? 그, 보통 첫날밤을 보내잖아요. 아, 아이는 아직 안 생긴 거……죠? 저 애 싫어하는데, 지금 있는 건 아니겠죠? 밥은 잘 먹으니까…… 근데 형은 저랑 왜 결혼했어요? 구멍이 두 개인 게 좋았던 거예요? 보통 그러더라구요…… 전 나이도 많고, 그렇게 예쁘지도 않고, 돈도 없잖아요. 게다가 능력도 없고, 멍청하고. 왜 또 그런 얼굴로 보고 그래요.”
발작을 일으키며 죽여 달라고 소리 지르는 채연재와, 평소의 그는 괴리감이 심했다. 어느 쪽에 장단을 맞춰야 할지 몰라 선일은 매일 그를 끌어안고 심호흡만 뱉었다. 가슴이 너덜너덜해 남아나질 못했다.
연재를 달래며 저를 저주하다가, 다시 해맑아진 연재를 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자꾸만 몰아치는 질문에 이전의 행동이 떠오르는 건 당연했고, 지나치게 친근히 구는 연재 때문에 미칠 것만 같았다.
그에겐 아무래도 규서보다 제가 편했던 탓이리라. 그러나 괴이한 해사함은 오래 가지 못했다. 연재가 ‘우울증도 치료할 수 있나요?’라는 책을 읽은 날이었다.
때마침 캐나다의 국회의원이 한 영상을 업로드했다. 백이언을 포함한 이들이 한데 모여 회의를 하는 것이었다. 의원은 묵묵히 입을 닫고 있었고, 그사이 나머지 사람들은 평소 해보지 못했던 잔혹한 행위를 내뱉으며 떠들어댔다.
회의라고 하기엔 더럽고 추악한 이야기만 오갔다. 그리고 백이언은 자신이 모든 걸 준비하고 있으며, 꿈을 현실로 이루어 주겠다고 하였다. 어차피 오메가가 실종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냐고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는 한국의 ‘세성그룹’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무역에 활발한 세성그룹을 모르는 사람은 그 자리에 없었고, 그들은 백이언의 말에 집중했다.
그는 세성그룹의 아내가 현재 임신해 있으며, 투홀 오메가라는 사실을 밝혔다. 게다가 곧 그를 데려올 수 있을 거라며, 모인 이들의 환호를 샀다.
마지막으로 캐나다 위원이 직접 얼굴을 보였다.
그는 사실 자신은 오메가이며, 위원의 자리에 오기 위해 알파라 속였다고 고백했다. 꽤 고위직인 데다 우성 알파라는 소문 탓인지 이러한 일이 자주 있었다고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번처럼 커다란 규모로 진행되는 것은 처음이라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며 심정을 토해냈다. 그는 몇몇 이들의 목소리를 변조한 것은 고의가 아니라는 말과 함께 자국민의 뜻에 따라 사퇴할 의지가 있다고 전했다.
영상은 단번에 인기 영상으로 올랐다. 신상이 드러난 이들에 대한 욕설이 우후죽순으로 쏟아졌다. 백이언, 다진그룹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다. 특히 다진그룹은 한국이라는 작은 국가의 기업이라는 이유로 더 모진 욕을 얻어먹었고, 주식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주주들이 다진그룹에 찾아가 난동을 피우는 뉴스도 났다. 이제 백이언은 선일이 손쓰지 않아도 거대한 빚을 진 채로 숨어 살아야 하는 신세가 될 터였다.
선일은 댓글 중 ‘임신한 투홀 오메가’라는 단어에 신이 나 성희롱을 하는 이들에게 곧바로 고소장을 접수하게끔 했고, 그렇게 모든 일이 일단락이 나는 듯했다.
“저 오늘 잠깐 나갔다 와도 될까요? 코앞에요. 아, 아니아니. 혼자 갈래요. 괜찮죠? 걸레 새끼처럼 굴러 가는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백이언은 움직일 틈이 없으니 괜찮을 터다. 선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을 잃은 후 묘하게 거칠어진 언행이 아직도 익숙하지 않았지만, 그만두라 할 때마다 묘한 얼굴을 하는 바람에 그도 말리지 못했다.
그리고 약 10분 뒤 연재는 무사히 돌아왔다. 사실 그가 나감과 동시에 사람을 다섯이나 붙여 두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선일은 나갔을 때와 똑같은 차림으로 서재에 들어서는 연재를 힐끔거렸다.
저녁도 먹었으니 곧 규서가 올 테고, 오늘이 마지막 시험이라 하였으니 어디 좋은 곳에라도 여행을 갈 생각을 했다.
그리고 비서에게서 백이언이 쓰잘데기 없이 저를 끌어들이고자 통화녹음을 뿌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비서는 깔끔하게 ‘오메가 사업이 그런 사업인 줄 몰랐다. 이상함을 느끼고 바로 취소했으며, 그들의 회의에는 한 번도 참가하지 않았다’고 발표하겠다고 전했다.
더불어 백이언이 자신에 대한 헛소문을 퍼트렸다며,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것이라는 문자가 왔다. 비서는 어떻게 처리할까요, 하고 물었고 선일은 어차피 그가 받을 재판과 정리해야 할 수많은 일들이 지난 후에는 땡전 한 푼도 없어 고소할 생각은 죽어도 못할 거라며 무시하라 전했다.
마지막 발악조차 꿈틀거리는 벌레와 같았다. 선일은 후에 일이 어느 정도 정리되면 백이언을 잡아다 놓겠다는 혁도 파의 연락도 받았다.
저녁 8시, 규서가 집에 도착했다. 규서는 오늘이 마지막 시험이었다며, 연재가 좋아하는 연어 초밥을 사 왔다. 선일은 연재가 서재에 있다는 것을 알렸고, 규서는 문을 두들겼다.
“엄마, 저 왔어요. 오늘 연어 초밥이에요.”
그러나 오늘은 평소와 달랐다. 연재는 대답이 없었고, 이상함을 느낀 규서가 문을 열고자 했으나 서재는 굳게 잠겨 있었다.
잠이라도 자나 싶어 좀 더 크게 불렀으나 끝끝내 답은 없었다. 그제야 혹여 발작이라도 일어났나 싶어 선일이 급히 열쇠를 찾았다.
열쇠 꾸러미에서 ‘서재’라 적힌 것을 찾는 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선일은 황급히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벽에 붙어 있던 가족사진, 아직 연재와는 찍지 못한 선일과 규서의 사진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그 아래 연재가 앉아 있는 것 또한.
“……연재야?”
선일의 심장이 쿵, 이 아니라 쾅! 하고 굉음을 내며 추락했다. 옥상에서 떨어지는 그를 보았을 때와 비슷한 감정이었다. 그보다 더 깊고, 무거운. 그리고 두려웠다.
드문드문 붉은 흔적이 보였다. 피와 흡사했다.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겨 다가가자 작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사진은 이미 너덜너덜해져 알아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고, 선일이 연재의 손가락에 끼웠던 은반지가 바닥에 굴러다녔다.
“연, 연재야.”
가까이 다가갈수록 비릿한 혈향이 났다. 선일의 얼굴이 잘게 구겨지고, 기다리던 규서가 재빠르게 뛰어 연재를 붙들었다.
“엄마, 엄…… 채연재!”
양 팔뚝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연재는 아픔도 못 느끼는 사람처럼, 그 팔로 사진을 마구잡이로 쥐어뜯었다. 팔로 제 얼굴을 비비기라도 했는지 뺨에도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연재는 피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중얼거렸다.
“죽, 죽고 싶어, 죽고 싶어, 죽을래, 나 죽여 줘, 죽고 싶어…… 이거 놔, 놔, 놔… 미워, 미워, 미워…….”
“채연재, 채연재! 정신 차려! 아, 아버지! 아버지 뭐 하고 계시는 거예요! 빨리 병원에 연락하세요!”
“…….”
선일은 우두커니 서서 움직이지 못했다. 그 자리에 박힌 고목나무처럼, 뻣뻣한 얼굴로 굳어있었다. 결국 규서가 연재에게서 문구용 칼을 뺏고, 밖으로 달려가 전화를 걸었다.
피가 낭자하다. 양팔에서 흐른 피가 선일과 규서의 사진을 적셨다. 이리저리 찢기고 눅눅해진 것을 연재가 몇 번 더 찢고, 찢었다. 의식은 없는 채였다. 까만 동공에 어떠한 빛도 없었고, 중얼거리는 입술은 주어를 뱉지 못했다.
“그만, 그만해, 죽고 싶어, 아, 아아…… 흑, 아! 아악! 싫어, 싫다고, 아파…… 아파아아…….”
왈칵 붉은 것이 이리저리 튀었다. 연재는 두 팔을 휘적여 제 다리를 내리쳤고, 몸부림치며 벽에 이마를 박았다. 그리고 두 손으로 사진 찌꺼기를 붙잡고는 엉엉 울었다. 그만해, 아파, 제발, 미안해, 잘못했어요…….
그러다 일순 행동을 멈췄다. 전화를 하던 규서가 그걸 보다 급히 커다란 담요와 티셔츠 몇 개를 들고 왔다. 핸드폰 너머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몇 번 났다. 연재는 바닥을 짚은 채로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규서는 연재의 양쪽 팔을 티셔츠로 감아 세게 묶었고, 커다란 담요로 어깨를 둘렀다. 다행히 상처는 깊지 않고, 양 팔뚝을 한 번씩 그었다며, 규서는 조금 있으면 피가 그칠 거라고 중얼거렸다. 그때까지 가만히 있던 연재가 비틀거리며 고개를 돌리더니 선일을 올려다보았다.
“……선일 씨.”
그리고 천천히 기어 온다. 연재는 마치 뱀처럼, 느리게 선일의 바짓단을 붙잡았다. 무릎을 꿇고 쓰라릴 팔목을 들더니, 다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제가 잘못했어요…… 이제 그만해 주세요…… 말 잘 들을게요. 규서야, 선일 씨, 내가 미안해…… 잘못했어, 미안해…… 하, 하라는 대로 할 테니까…… 나, 나 걸레 맞아. 나, 남자 정액에 미친, 미친 새끼 맞아, 그니까아, 제발, 제발…… 나 좀…… 죽여 줘.”
후드득 떨어지는 것이 비인지 눈물인지 모를 만치 흐른다. 연재는 헤헤, 하고 어설피 웃으며 선일의 허벅지에 뺨을 비볐다. 그리고 혀를 내밀어 다리 사이를 핥는 흉내를 냈다. 조급히 허리띠를 풀어내며 몸을 들썩이더니 엉덩이를 위로 치켜올리기도 했다. 명백히 그들이 가르친 것이었다.
“울지 마세요, 내가,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응? 제가 나쁜 사람이에요, 내가, 나빠서… 힘드셨죠… 제가, 잘 안 해서… 자꾸 싫다고 해서, 바보같이…….”
두 부자 사이, 한 오메가가 무릎을 꿇은 채로 비굴하게 빌었다. 피로 물든 작은 손은 꼭 동백처럼 활짝 펴서는 알파의 몸을 애무했다. 선일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비는 오지 않았으나 눈앞이 흐렸다. 홧홧한 열기가 온몸을 감싼다. 슬픔인지, 후회인지, 분노인지. 감정에 붙일 이름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