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뷔를 피하는 방법-5화 (5/130)

#5

세트장에 도착하자마자 준이 멈춰선 채로 입을 벌렸다. 천장에서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나는 조명이 예술이었다. 생각보다 더 화려하게 꾸며져 있어서 괜히 부담스러웠다.

“촬영 시작 5분 전입니다.”

커다란 세트장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관계자들을 보자 허리가 더 빳빳하게 세워졌다. 힘이 바짝 들어간 온몸이 쑤셔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도저히 편하게 있을 수가 없었다.

유명한 아이돌이었던 MC가 긴장 풀라며 앞에서 웃어 보였지만, 그 얼굴을 보니 긴장이 배로 밀려왔다. TV로나 보던 얼굴이 코앞에 있어서 현실감이 점점 희미해졌다. 무슨 정신으로 여기 앉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자리가 이미 정해져 있어서 지구와 준과는 잠시 헤어졌다. 두 사람은 자리가 제법 붙어있는지 저쪽 끝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준이 일방적으로 이것저것 물어보고 지구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을 하는 모습은 썩 도란도란해 보이지는 않았다.

중앙에는 수많은 카메라가 포진하고 있는 커다란 무대가 있고, 그 바로 앞에는 참가자들이 쭉 앉는 좌석이 있었다. 한 줄에 11개씩, 총 33개의 의자가 꽤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보기만 해도 푹신푹신할 것 같더니 정말 그랬다. 곧 촬영이 시작된다는 사실만 아니었으면 한숨 잘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아아, 네. 저도요.”

멍때리고 정면만 보고 앉아있었는데, 앞자리에 앉아있던 참가자가 뒤돌아보며 건네는 인사에 정신을 차렸다. 손을 살짝 맞잡고 꾸벅 인사를 하고 보니 주변 사람들도 다들 인사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사방에서 갑자기 날아오는 인사에 정신없이 이리저리 악수했고 결국 긴장할 기운까지 다 소진해버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사이에 껴있는 게 오랜만이라서 괜히 몸을 몇 번 들썩였는데, 옆자리에 앉아계신 분이 내가 불편해서 그러는 줄 알고 의자를 살짝 옆으로 옮겨주셨다. 아, 안 그러셔도 되는데.

“생방송 아니니까 다들 긴장 풀어요! 실수하면 끊고 다시 가면 되니까.”

가운데 자리 잡은 메인 PD님이 긴장 풀라면서 스탠바이를 외쳤다. 메마른 목구멍으로 침이 넘어갔다. 긴장 풀라고 하고 바로 스탠바이 외치면 긴장이 안 될 수가 없는데.

“카운트다운 갑니다.”

데뷔가 간절한 것도 아닌 나도 이렇게 떨리는데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긴장될까. 몇 초라도 카메라를 더 받기 위해서 조금이라도 관심을 받기 위해서 치열하게 경쟁을 해나가겠지. 나는 죽어도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촬영 시작 소리가 들렸다.

MC가 준비된 멘트를 치며 첫 시작을 끌어나갔고 커다란 카메라가 공중에 매달려 이쪽을 정확하게 비추고 있었다. 이거 생각보다 엄청 긴장되는구나.

“첫 번째 무대 갈게요.”

신호와 동시에 첫 번째 참가자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뭘 하든 첫 번째는 주목을 받았기 때문에 중요한 자리였다. 당연히 잘하는 사람이 올라오겠거니 했는데 손을 들고 무대 중앙으로 걸어가는 머리색이 화려했다. 그 사람이다, 김성원.

“연습생이셨으니까 잘하시겠지.”

“한두 번 해보신 분이 아니라…….”

조금 전 잠깐의 인사로 그새 친해졌는지, 오른쪽에 있는 사람 둘이서 대화하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눈앞에서 카메라가 왔다 갔다 하며 성원에 대해서 이것저것 얘기하는 두 사람을 클로즈업했다.

“노래 주세요.”

당당하게 반주를 요청한 성원이 유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난한 팝송을 골랐고 실력도 무난했다. 춤도 센스 있게 잘 짜온 데다가 노래도 안정적이었다.

춤추면서 노래까지 다 하네. 둘 중에 하나만 해도 된다고 분명 들었을 텐데도 양쪽을 다 준비해온 건 그만큼 여유가 있다는 게 분명했다. 실제로 실력도 그랬고.

“진짜 잘하신다.”

“확실히 연륜이 있는 분이 달라.”

이곳저곳에서 방금 무대에 대한 말들이 오고 갔다. 굳이 귀 기울여 듣지 않아도 다 좋은 얘기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MC 또한 환한 표정으로 칭찬을 늘어놨다.

삼촌에게 들은 바로, 오늘 MC의 입에서는 잘하든 못하든 욕이 나오지 않을 예정이었다. 그래도 누가 봐도 부족한 무대에 대놓고 입바른 소리는 하지 않을 테니, 조금 전 무대가 완성도가 높았음은 분명했다.

“감사합니다!”

……그게 열다섯 번인지, 열일곱 번인지 세지도 못할 지경이 됐을 때는 더는 주변 사람들 이야기도 들리지 않았다. 졸음은 졸음대로 밀려왔고 당장 세트장을 뛰쳐나가고 싶을 정도로 피곤했다. 잠을 좀 잘 걸 그랬다.

처음에는 오랜만에 보는 춤과 음악에 한참 빠져서 즐겁게 무대를 감상하고 있었는데, 그게 끊임없이 반복되니까 결국 지쳐버렸다. 다른 참가자들도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은 듯 확실히 처음보다는 말이 확 줄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 누구도 졸거나 풀어진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고, 끊임없이 머리를 매만지고 옆 사람에게 괜찮냐며 얼굴 상태를 물었다.

내 차례는 스물일곱 번째였다. 삼촌이 심혈을 기울여 고른 순서라고 했다. 정말 완벽하게 지칠 무렵, 기억에도 안 남을 정도로 몽롱하게 졸릴 때다.

‘아직도 열몇 사람은 더 남았을 텐데.’

한 사람이 무대를 하고 내려와서 그다음 사람이 올라갈 때까지는 약 6~7분가량이 소요됐다. 결론적으로 거의 두 시간 동안 이러고 있었다는 말이 됐다. 다행히 실수하는 사람이 없어서 끊고 간다거나 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지만.

“안녕하세요.”

무대 위로 주황색 머리를 한 남자가 끙끙대며 의자를 끌고 올라왔다. 의자를 사용하는 무대인 모양이었다.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넘기며 마이크를 다잡는 올라오는 모습이 잠시 눈앞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졸고 있어서였다.

“……왜 그랬던……”

꽤 잘 부른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점점 노랫소리가 희미해졌다. 망했다. 자면 안 되는데.

눈에 힘을 주고 쏟아지는 잠을 참아보려고 했지만, 열 개가 넘는 무대를 버틸 정도로 내 정신력은 대단하지 못했다.

결국, 눈을 떴을 때는.

“27번 왜 안 올라와?”

PD님의 목소리를 듣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곤히 잠든 나를 발견한 착한 옆자리 사람이 툭툭 쳐서 깨워줬을 때였다.

“저기 혹시 27번이세요……?”

“……아, 네. 네.”

겨우 눈을 뜨자 눈이 멀 정도로 밝은 조명들이 아침을…… 아침은 무슨, 이런 데서 왜 아침을 맞이해.

시발.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욕이 튀어나왔다. 물론 속으로만. 겉으로는 침착하게 몸을 일으켰다. 내 무대 전에 깨기라도 했으면 모르겠는데. 참가자들이 모두 PD님 눈치를 보며 이쪽을 흘깃거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저예요.”

“빨리 내려와서 준비해요.”

다른 참가자였으면 촬영 중에 잠이 오냐며 불호령이 떨어질 만한 상황이었지만, 바로 옆에 서 있는 삼촌에게 말을 전해 들은 듯 PD님의 반응은 유했다. 생방송도 아니고 대타니까 봐주시는 건가 싶어 후다닥 무대로 내려갔다. 촬영하다 말고 딥슬립한 주제에 행동까지 굼뜰 수는 없었다.

“…….”

앞에 앉은 32명의 참가자와 마주 보자마자 다 죽었던 긴장들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심사위원도 아닌데 왜 이렇게 눈치가 보이냐. 자다가 올라와서 그렇겠지. 눈 화장이 되어있는 상태라서 눈을 비비지도 못하고 대충 머리만 몇 번 정리하고 올라왔는데 상태가 어떨지 하는 걱정에 조금 무섭기까지 했다. 침 자국 같은 건 없겠지, 설마. 그랬으면 삼촌이 대충 사인이라도 줬겠지.

“준비되면 말해요.”

PD님은 친절하게도 준비할 시간까지 마련해주셨지만 쓸 수는 없었다. 저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 시간을 들여 심신 안정을 취하기에는 굉장히 눈치 보이는 상황에 놓여있으니까. 그래서 결국 딱 한 번만 천천히 호흡하고 바로 긍정의 답을 냈다.

“준비됐어요.”

무표정한 얼굴로 바로 앞에 있는 카메라에 시선을 맞추자, 정확히 5초 뒤에 삼촌에게 전달했던 mp3 파일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잠은 다 깬 지 오래였고, 걱정과 다르게 몸은 자유자재로 잘 움직였다. 긴장 때문에 안무를 까먹진 않을까 싶었는데 괜한 기우였다. 한번 시작하니 순식간에 시간이 지나갔다. 시간이 약이라지만 생각보다 약효가 뛰어났다.

무대 앞뒤로 하나씩 놓여있는 카메라가 노래가 끝날 때까지 이곳저곳을 꾸준히 따라왔고, 음악이 멈췄을 때야 함께 정지했다. 예의상의 박수들이 쏟아지고 카메라를 향해 인사를 하고 나니 해야 할 일이 완전히 끝났다. 떨리기는 했다. 긴장보다는 전율 때문에.

“와, 춤추는 게 진짜…… 동작이 살아 숨 쉰다는 게 무슨 뜻인지 좀 알겠네요.”

연차가 거의 10년, 연륜이 가득 담긴 손으로 박수를 치며 칭찬을 하는 MC에게 인사하고 재빠르게 내 자리로 달려갔다.

푹신한 의자에 몸을 눕히며 이제부터는 절대 졸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며 옆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삼촌이 보였다.

‘잘했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입 모양으로 열렬히 소리치고 있었다. 삼촌, 그렇게 손 위로 들면 배 보이는데. 긴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거리였기 때문에 대충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같이 엄지를 들어줬다. 혹시 옆 참가자가 볼까 봐 뒤로 고개를 빼서 슬쩍.

“28번 나와요.”

“29번?”

“30번 준비하세요.”

한 번 싸늘한 분위기에 베여봐서 그런지 더는 잠이 오지 않았다. 누가 억지로 재우려고 해도 잠들지 않을 만큼 눈앞이 또렷했고, 덕분에 남은 무대들은 진지하게 잘 관람할 수 있었다. 한마디 말도 없이 박수만 연속해서 치는 무대들이 끝나고 어느덧 31번이었다.

“31번 내려와요.”

“네.”

31번을 찾는 PD님께 대답하며 손을 들어 올린 사람은 지구였다. 잠깐 넋을 놓고 있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반주가 나오고 있었다. 오른손에 마이크를 쥐고 의자에 걸터앉아 있는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처음 듣는 잔잔한 발라드곡이었다. 목소리만 듣고 유추했던 사실이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잘 어울리는 분위기의 노래는 부드러운 미성과 딱 맞아떨어졌다. 취향을 저격한 노래에 살짝 넋을 놓고 들었다. 열아홉 살이 내는 감성이라기에는 무거운 감이 있었다.

“감사합니다.”

아련한 눈으로 카메라와 눈을 맞추며 노래를 이어나가던 지구는 반주가 끊기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살짝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곧게 걸어서 원래 있던 자리에 앉는 그 순간까지 살짝 들뜬 것처럼 보였다.

준은 노래에 감동했는지, 지구의 어깨를 툭툭 건들며 감상을 쏟아내는 것 같았다. 지구는 누가 봐도 어색한 얼굴로 웃으면서 무의식중에 검지로 볼을 툭툭 쳤다. 칭찬받는 게 어색한 걸까, 긴장한 걸까.

“수고했어요.”

“수고하셨습니다!”

마지막 무대까지 끝나자 촬영이 종료됐다. PD님의 목소리가 도화선이 되어 이곳저곳 수고했다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제 돌아가도 좋다는 지령이 떨어지자마자 사람들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들 집에 가는구나 싶어 몸을 일으키려는데 저쪽 끝자리에 앉아있던 사람 둘이 나에게 다가왔다.

“춤 진짜 잘 추시더라고요.”

“네?”

“보고 깜짝 놀라서 끝날 때까지 계속 생각났어요.”

“아, 감사합니다.”

바로 일어나서 자리를 뜰 줄 알았던 사람들은 감명 깊게 봤던 무대의 주인공들에게 다가가 말을 거는 시간을 가지는 듯했다.

처음 두 사람을 시발점으로 세 명이 더 다가와 칭찬을 했고 그 후로도 몇 명이 더 와서 감상평을 말해줬다. 춤으로 칭찬 들은 게 얼마 만이지. 나도 사람인데 칭찬이 싫을 리 없었고, 결국 나중에는 입꼬리가 올라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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