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뷔를 피하는 방법-11화 (11/130)

#11

“조장님, 나 이것 좀 알려줘요!”

한참 열심히 하던 가온이 답답한지 손을 번쩍 들어 올려 나를 호출했다. 피곤한 몸을 일으켜 아까 지겹게 알려줬던 안무를 다시 한번 설명해줬다.

우리 조는 그대로 연습을 진행했고, 대충 하고 가겠다 다짐했던 몸은 연습실에 착 붙어서 끝까지 조원들에게 춤을 알려주는 데 쓰였다.

결국, 피곤에 잔뜩 절어서 연습실을 나왔을 때는 이미 어두컴컴한 새벽이었다. 달빛조차 없는 어두운 하늘을 본 후 집에 가기 위해 콜택시를 부를 준비했다.

“택시 부르세요?”

한참 전화번호를 찾고 있는데 지구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땀을 잔뜩 흘려서 열이 오른 얼굴이었다.

“네 것도 불러줄까?”

“아뇨, 저도 불렀어요.”

“빠르네, 방금 나왔는데. 내일도 나와야 하는데 안 피곤하겠어?”

예의상 안부를 물어줬더니 묵묵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내일모레는 학교도 가잖아.”

“연습 늦어지면 학교 하루 정도 빼면 돼요. 선배 조심히 잘 들어가세요. 오늘 수고하셨어요.”

여기서 택시를 기다려야 할 테니 계속 서 있을 줄 알았던 지구는 인사를 끝내자마자 몸을 돌렸다.

택시를 다른 건물 앞으로 불렀나. 얼마 지나지 않아 눈앞에 택시가 섰고, 몸을 구겨 넣어 목적지를 부르고 쓰러지듯 뒤로 누워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그럼 형은 다시 나와도 괜찮은 거예요?'

무슨 일이 있었을까. 궁금증이 생겼다. 둘이 같은 소속사에서 무슨 일 있었는지만 찾아볼까. 안 나오면 개인적인 일이라고 생각하고 깔끔하게 잊어야지 싶었다.

그렇게 한참 인터넷에 검색을 해보고 나온 결과, 정확하게 둘 사이에 관하여 나온 이야기는 없었다.

싸웠네, 갈라졌네 하는 소리를 몇 개 보긴 했지만 대부분 루머 양산하지 말라는 일침들로 거짓이라고 못 박혀 있는 상태였다.

오히려 내 얘기는 왕창 봤다. 잔뜩 쏟아지는 글들에 얼마나 경악을 했는지 모르겠다. 30초갑부터 피디한테 커피 쏟은 애라는 별명까지 발견하고 그대로 인터넷을 종료했다.

“추워요? 히터 틀까요?”

“아뇨.”

얼굴에 이렇게 열이 확확 오르는데 굳이 히터가 필요할까. 한참 휴대폰을 만져서 이미 뜨끈해진 손으로 얼굴을 감싸다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이거 정말 위험한 거 아닌가.

“하아…….”

“……정말 안 추워요?”

한참 운전을 하고 계시던 기사님이 본인이 추우신 건지 자꾸 안 춥냐고 물었다. 히터를 틀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아서 틀어달라고 대답한 뒤 다시 시트에 파묻혀서 깊은 고민에 빠졌다.

* * *

감고 대충 빗기만 한 머리를 마구 헝클며 집을 나섰다. 앞으로 3일간은 연습만 주구장창 할 테지만 팀 미션인 만큼 적은 인원이 카메라에 담긴다.

그런 의미에서 어제의 행동은 조금 경솔했다. 그렇게 애들 옆에 붙어 다니면서 참견을 했는데 눈에 얼마나 띄었겠어. 버스를 타고 내릴 때까지 수없는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떨어지고 싶었으면 더 성의 없이 막 행동했어야 했는데. 이대로 데뷔 길에 오르는 것보다는 태도 불량으로 떨어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왔어요?”

이른 시간이라 도착한 사람이 나뿐이었다. 다들 어제 연습하느라 새벽에나 나갔을 테니 피곤할 만도 했다. 어제 질리게 봤던 노란색 문으로 들어가려다가 걸음을 돌려 바로 앞 촬영팀을 바라봤다. 피디님 안색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편집팀도 내 얼굴을 싹 다 자르느라 엄청 애를 먹었겠지만, 피디님은 애 대신 욕을 먹고 있었다.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서 잠시 세트장 밖으로 나와 복도에 있는 자판기를 찾았다. 피곤을 달래줄 만한 음료로는 제티와 커피가 보이길래 망설임 없이 제티를 선택했다. 피곤할 때는 카페인보다 달달한 게 좋았다.

“피디님 이거 드시고 하세요.”

“어?”

혹시 타 참가자가 들어오다가 보면 뇌물이라도 바친다고 오해할까 봐 문 쪽을 힐끔대며 피디님에게 제티를 건넸다. 차가운 캔이 눈앞에서 몇 번 흔들리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피디님이 놀란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까칠한 수염이 자란 턱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아, 고마워요.”

다크서클이 광대까지 내려온 얼굴. 캔을 받아든 피디님의 얼굴이 음료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굳었다.

“…… 잘 먹을게요.”

역시 피디님 나이대에는 커피인가. 커피로 살 걸 싶어 약간의 후회를 하며 고개를 돌렸다. 삼촌도 아직 오지 않은 것 같았다.

“피디님 고생이 많으세요.”

“프로그램이 잘되고 있는 증거니까요. 홈페이지 게시판은 없앨까 싶지만, 대타 뛰어주는 것만 해도 충분히 고마우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요.”

천사 같은 소리를 늘어놓는 피디님의 얼굴은 전혀 천사 같지 않았다. 처음부터 삼촌한테 안 한다고 박박 우겼어야 했는데 너무 멀리 와버렸다.

“제가 이번 무대 끝으로 떨어지면 딱 좋을 텐데요.”

“그랬다가는 제 귀갓길이 상당히 위험……, 석호 왔냐?”

피디님이 넋을 반쯤 빼놓은 듯한 목소리로 말하더니 갑자기 고개를 확 꺾으며 삼촌의 이름을 불렀다. 지금 막 출근한 건지 삼촌 역시 별다르지 않은 안색으로 스벅 커피를 한 잔 쥐고 걸어오고 있었다. 우리 삼촌 저런 비싼 거 먹는 사람 아닌데. 삼촌은 인스턴트커피를 사랑하는 서민이 되자는 본인의 신조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피디님 일찍 오셨네요. 오늘은 카페모카인데.”

아, 피디님 거구나. 삼촌이 익숙한 듯 자연스럽게 피디님에게 막 사온 커피를 넘기려고 손을 뻗었다. 그러다가 아직 피디님 손에 들려있는 제티를 발견했는지 허공에서 멈춰 섰다.

“오늘은 그거 드시려고요? 그럼 이건 제가 마실게요.”

“너 주겠다고 조카님이 제티 사 왔다.”

정성을 다해 자판기에서 뽑아온 제티 캔이 애꿎은 삼촌의 손으로 넘어갔다. 졸지에 아침부터 제티를 마실 기회를 얻게 된 삼촌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캔을 받아들며 나를 바라봤다.

“웬…… 근데 갑자기 이런 건 왜 샀냐.”

“삼촌 드리려고 산 건 아닌데 그냥 드세요.”

“의도하지 않았는데 주게 돼서 께름칙한 표정이네. 하하. 얼른 들어가라.”

삼촌이 제티 뚜껑을 따며 손을 훠이훠이 저었다. 나는 나머지 참가자들 도착 예정 시간이 약 한 시간 반쯤 남은 시계를 바라보며 슬쩍 바닥에 앉았다.

“삼촌. 저 카메라 앞에 자꾸 얼쩡대는 것 같아요?”

“글쎄다. 더 구석에 박혀 줄 수 있으면 좋고. 아, 맞다. 피디님 어제 올라온 스포 보셨어요?”

삼촌이 목구멍으로 시원하게 제티를 넘기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프로그램에 자주 등장하는 관계자 스포가 어제도 터진 모양이었다. 삼촌이 정말 인생이 환멸 난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가를 손등으로 훔쳤는데 그 행동이 마치 소주 한 잔을 원샷 한 사람처럼 보였다.

“봤지. 입막음해도 소용이 없다니까.”

“그러니까요. 스포 금지 계약서 써놓고 안 걸릴 거 아니까. 조까지 스포 안 해서 다행이죠.”

“네 조카님 얘기만 잔뜩이더라. 팬인가 봐.”

피디님이 껄껄 웃으며 무릎을 탁, 쳤다.

“그놈의 뚝배기, 귀갓길, 정성 없는 정성…… 이름이 정성인 게 죄냐?”

“하하, 힘내세요.”

“이게 다 너무 완벽한 대타를 데려온 너 때문이지. 차라리 너한테 수트를 입혀서 올려보내는 건데.”

“그랬으면 난리 났을걸요. 아저씨 사진 잘못 올라왔다고.”

“네 조카님이 덕분에 화제성 얻고 평생 살 수 있는 영생력도 같이 얻었지 뭐냐. 이 정도 욕이면 오백 년은 거뜬히 살고도 남겠더라.”

처음에는 빨대로 쭉쭉 빨아당기던 피디님은 감질나는지 어느 순간 컵을 들고 원샷 하고 있었다. 얼마나 속이 타시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결국, 눈치가 보여서 자리에서 일어나 노란 문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일찍 도착한 보람도 없이 벽에 기대앉아 눈을 감았다. 이제부터 게으른 조장 컨셉을 잡아볼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 마음가짐은 오래가지 못했다. 조원들이 이 부분 잠깐만 알려달라고 부탁하는 걸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카메라에 잘 잡히지 않는 사각지대에 자리 잡고 앉아 멀리서 시범을 보여주다가 결국 답답해서 사각지대를 벗어났다.

아, 삼촌이 열심히 하지 말라고 했는데. 결국, 다 포기하고 빡세게 춤을 추다가 허탈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뒤쪽에 빨빨거리면서 돌아다니는 게 잡히면 왜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도 안 잡아주냐고 또 욕먹지 않을까?

“……조장, 왜 거기 누워 있어요.”

차라리 악편이나 당하자 싶어 연습실 중앙에 길게 들이 누웠더니 단체로 갑자기 왜 그러냐는 소리가 쏟아졌다. 결국, 조용히 일어나 카메라를 등지고 앉아 뒷모습을 한참 앵글에 보이고 있는데 한참 연습하던 지구가 이쪽으로 걸어오더니 두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워줬다.

“힘드시면 나가서 쉬고 오세요. 바닥 차요.”

“어, 그래…… 고마운데 괜찮아.”

악편을 당하는 것도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열심히 하는 조원 애들한테 뜬금없이 시비를 걸면서 화를 낼 수도 없고 잘하다가 연습하기 싫다며 난리를 칠 수도 없고.

결국, 타이밍을 놓친 채로 평범하게 연습을 이어나갔다. 그러다 몇 시간 지나지 않아서 전체적인 안무 틀이 다 짜였다. 상위권 애들이 많기도 했고 다들 춤을 안 춰본 사람들은 아니라 유독 진도가 빠른 것 같았다. 아까 쉬는 시간에 옆방에 들렀을 때 준은 절반을 겨우 끝냈다고 했다.

“저희 이제 춤은 어느 정도 됐으니까 노래도 들어가야 하잖아요. 노래 파트로 동선도 정해야 하는데…….”

어쩐지 1번이 중앙에 많이 선다고 생각했는데 메인보컬이었다. 노래 파트 얘기가 나오자 다들 목소리도 그렇고 조심스러워지는 게 느껴졌다. 다들 욕심이 있으니까 긴 파트 맡고 싶겠지.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오른쪽 손을 슬쩍 들었다.

“저 하고 싶은 파트 있는데요.”

“아. 어디요?”

성원이 미소를 띠며 물어왔다. 다들 긴장한 눈치길래 어서 긴장 풀라는 뜻으로 3번을 손가락으로 찍었다.

“이거요. 서브보컬 2.”

“예? 이거요? 이 동그라미 친 여기?”

당연히 1번을 부를 줄 알았는지 다들 눈이 동그래져서는 되물었다.

“네, 3번이요.”

“여기 파트 제일 적어요, 선배.”

눈이 이렇게 버젓이 달려있는데 그것도 모를까 봐 지구가 친절하게 설명까지 해줬다.

“제가 노래를 잘 못해서. 파트 적은 쪽이 편하네요.”

“그래도 여긴 춤으로 임팩트 보여줄 수 있는 부분도 별로 없는데요. 바꾸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전 3번이 꼭 하고 싶어요.”

계속해서 변경을 추천하던 착한 조원들은 고집을 못 이겨 결국 3번 옆에 내 이름을 끄적여주었다.

그 뒤로는 모든 게 완벽했다. 성원과 지구는 생각보다 파트 욕심이 없는지 둘 다 쿨하게 서브보컬 1과 3을 하겠다고 나섰다. 그렇게 정해놓고 메인보컬을 뽑으려니 음이 올라가는 사람이 없어서 결국 반강제로 지구가 메인보컬을 맡게 됐다.

가성과 진성을 오고 가며 자연스럽게 올리는 지구의 노래 실력은 확실히 메인보컬로 추천할만했다. 데뷔만 하면 노래 잘한다며 여기저기서 칭찬받을 실력이었다. 가온은 계속 쉴 새 없이 1차 때부터 알아봤다며 지구의 노래 실력을 칭찬했고, 조용히 가사를 읊어가는 지구의 목소리가 분위기를 절로 달달하게 만들었다.

“크, 가사 좋네요. 노래 연습 바로 들어가면 되나요?”

다들 의욕이 불타올랐다. 춤에 비해 노래에는 별 관심 없었기에 이번에야말로 없는 사람처럼 조용히 연습하기로 마음먹고 구석으로 갔다.

서브보컬 2는 파트라고는 달랑 세 문장이 끝이었기 때문에 노래를 못해도 어려움 없이 소화할 수 있는 좋은 역할이었다. 게다가 그 조금 있는 파트도 딱히 큰 굴곡이 없어서 대충 음정만 맞춰 부르면 됐다.

가이드 녹음본 한 번, MR 한 번, 무반주 한 번. 쉴 새 없이 노랫소리가 이어지고 귀가 먹먹해질 무렵에 해산 지시가 떨어졌다.

“오늘은 이만 가셔도 됩니다.”

의지가 불타오르던 어제와 달리 오늘은 다들 빠르게 집에 갈 준비를 했다. 새벽 늦게 가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옆방들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형형색색 문들이 열리며 거의 동시에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어제는 깍듯이 인사를 하고 갔던 지구가 오늘은 보이질 않아서 나 먼저 나왔다. 거의 맨날 타는 것 같은 택시에 몸을 싣고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미션곡을 감상했다. 이틀 뒤에 촬영한다고 했었지.

근데 파트가 들을수록 마음에 들었다. 진짜 임팩트라고는 전혀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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