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뷔를 피하는 방법-12화 (12/130)

#12

-이번이 마지막이야. 여기서 못 떨어지면 삼촌은 포기하기로 했어.

삼촌이 다 지친 목소리로 포기를 선언했다. 세트장으로 출발하는 택시 안에서 전화를 받은 참이었다.

갑작스러웠지만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봤던 글들을 떠올려보니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실감하기 힘들 정도의 반응이었다. 춤으로 관심을 받아본 적은 많아도 저런 식으로 내가 누군가의 덕질 대상이 됐다는 걸 아직도 믿을 수가 없었다.

-하현아, 듣고 있니?

“아. 네.”

-정말 미안한데 삼촌이 이렇게 살다가 네 미니 편의점 만들어주기 전에 죽을 것 같아서 그래. 통장 잔고도 자릿수가 바뀌어버렸지 뭐냐.

삼촌이 쿨한 척 인터넷에서 본 웃긴 유머를 말하듯 호탕하게 웃었지만 자연스럽게 묻어 나오는 슬픔은 쉽게 숨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확실히 삼촌은 지금까지 모든 노력을 다했다. 그런데도 아직 남아 있는 건 순전히 100% 내 탓이었다.

-솔직히 이번 통편집으로도 순위나 떨어뜨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서 하현아.

“말씀하세요. 듣고 있어요.”

-그냥 데뷔해보는 건 어떨까? 춤은 이미 잘 추니까 노래 연습만 조금만 더 하면 될 텐데. 너 글 쓰는 것도 스트레스받는다며, 본업으로 삼기는 안 맞는 것 같다고 적당히 하다가 그만둘 거라고 했잖아.

틀림없이 그런 말을 하긴 했었다. 아마 대충 석 달 전쯤에 삼촌과 집에서 제육볶음을 안주로 술을 마셨을 때였을 거다. 솔직히 무작정 시작해서 겨우 용돈 벌이나 하는 일이었고, 그리 대단한 글을 쓰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조만간 그만두려고 생각은 했지만.

“제가 글 쓰는 거 그만둔다고 했지, 아이돌 한다는 소리는 한 적 없는데요.”

-이왕 직업 바꿀 거면 이쪽도 괜찮겠다 싶은 거지.

“전 편의점 알바생 하고 싶어요.”

-무슨 그런 언제 잘릴지 모르는 일을 해. 은퇴하기 전까지 팬들 사랑 잔뜩 받는 아이돌, 나쁘지 않잖아.

게다가 우리 프로그램 지금 화제성 정도면 데뷔하면 대박은 쳐도 쪽박은 절대 못 쳐. 삼촌은 누가 들어도 솔깃할 만한 이야기를 꺼냈지만, 알겠다며 덥석 물 수 없는 입장이었다.

아이돌을 좋아했던 입장에서 그 일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었고, 쉽게 그만둘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알았다. 받는 사랑과 먹는 욕은 비례한다는 것도.

“제 멘탈로 그런 일을 어떻게 해요.”

-네 멘탈이 뭐 어때서. 너 정도면 튼튼하지.

“저 3일 동안 식음을 전폐했던 거 기억 안 나세요?”

-그땐 그때고. 부은 발목 끌고 학교 가서 연습하고, 새벽까지 학원에서 사는 놈이 어디 흔하냐? 내가 널 하루 이틀 보냐, 핏덩이 때도 봤는데. 아, 나왔다. 끊어봐.

삼촌은 세상 누구보다 잘 아는 척을 하며 전화를 끊었다. 삼촌의 말은 정말이었다. 내 인생의 절반쯤을 해외에서 보낸 아버지나 그 어떤 것보다 본인의 연구가 우선이었던 어머니보다는 삼촌이 더 잘 알 거다.

손부채질을 몇 번 하니 기사님이 더운 줄 아셨는지 창문을 내려주셨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이상하게 발목이 욱신거리는 것 같아 손으로 살짝 매만졌더니 갑자기 정말로 더워졌다.

* * *

휴대폰 시계를 확인해보니 아직 7시를 겨우 넘긴 아침이었다. 이 정도면 거의 새벽인데. 왜 이렇게 자꾸 일찍 오게 되는지 모를 일이라 생각하며 복도 자판기에 잠깐 들렀다.

제티는 불호하시는 것 같아서 원두커피 하나를 뽑았다. 삼촌이 요즘 이곳저곳에 스벅을 돌리는 바람에 관계자분들 입맛이 전체적으로 높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안녕하세요.”

벌써 삼 일째 똑같은 인사를 하고, 어제와 다른 캔을 피디님에게 건넸다.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어제 스벅 카페라떼를 꿀꺽꿀꺽 마시던 피디님은 자판기 원두커피도 만족스럽게 섭취했다.

오늘도 삼촌은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작은 자리이긴 해도 피디라는 사람이 메인 피디님보다 맨날 늦어. 아까 전화할 때 시끄러운 걸 보니 집은 아니던데.

“삼촌 원래 이렇게 항상 늦게 오나요?”

“석호가 요즘 이리저리 바빠요. 골머리 썩고 있겠죠. 근데 조카 군은 오늘도 일찍 왔네요.”

피디님이 바닥에 조금 남은 원두커피를 입에 탈탈 털어 넣으며 말했고, 조카 군이라는 이상한 호칭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냥 눈이 일찍 떠져서요.”

대충 재미없는 대답을 하고 바로 노란색 문으로 도망쳤다.

혼자서 하는 연습은 잠시 목을 풀고 가사를 몇 줄 불러 내려가다가 물을 마시고, 다시 악보를 집어 드는 식이었다.

확실히 노래는 힘들었다. 춤처럼 뻗기만 하면 착착 나가는 게 아니라 안에 있는 공기를 내뱉어야 한다는 것부터 어려웠다. 굳이 잘할 필요는 없었지만 이건 단독 무대가 아니다. 다른 애들에게는 처음으로 곡을 받아서 하는 소중한 무대일 텐데 망칠 수는 없었다.

“일찍 오셨네요.”

호흡부터 해볼까 싶어 최대한 깊게 숨을 들이켜자마자 문이 벌컥 열렸다. 나만 찍고 있던 카메라 앵글 안으로 지구가 성큼성큼 들어왔다. 꽤 무거워 보이는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은 지구가 악보를 꺼내 이쪽으로 걸어왔다.

“연습하세요?”

“호흡 연습부터 하려고 했지.”

“악보 잠깐만 보여주세요.”

지구가 손에 들려있던 악보를 살짝 빼서 유심히 살피더니 손가락으로 이곳저곳을 짚어줬다.

“여기서, 여기서 숨 쉬시면 돼요. 바로 맞추시긴 힘드실 테니까 천천히 한마디씩 하시면 될 것 같아요.”

악보를 거의 뒤지다시피 하며 이것저것 팁을 알려주는 지구의 말을 조용히 경청했다. 지구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복식호흡 하는 법도 알려준다며 나섰다.

“이쪽에 공기 저장한다고 생각하시고.”

바로 뒤에 서서 1대 1로 열심히 알려준 덕분에 이론은 빠삭해졌다. 아직 제대로 못 해서 그렇지. 어떤 느낌이 들어야 하는지는 알겠는데 그렇게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원래 처음에는 다 그래요, 저도 호흡하는 데 한참 걸렸어요.“

우스운 꼴로 숨을 들이켜고 있는 나를 힐끔 본 지구가 바닥에 누워 악보로 얼굴을 덮었다.

“연습하려고 일찍 온 거 아니야?”

“네. 그런데 좀 피곤해서요.”

“알려줘서 고마워. 하다 보면 될 것 같아.”

“도움이 됐으면 다행이에요.”

상냥한 목소리로 대꾸를 마친 지구는 또 한참 말이 없었다. 바닥에 누워 미동도 없는 몸을 내려다보다 문득 생각이 나서 말을 던졌다.

“춤 좋아해?”

“제 춤은 별로 안 좋아해요.”

기다렸다는 듯 대답이 들려왔다. 춤 좋아하냐고 물어봤더니 비관적인 대답이 돌아오네.

“아니, 그냥 춤 좋아하냐고.”

다시 물으니 누워 있던 몸을 일으킨다. 그러자 얼굴을 가리고 있던 악보가 떨어졌다.

“음악은 다 좋아해요. 노래든, 춤이든.”

“둘 다 잘하던데.”

“춤은 많이 모자라요. 한참 더 배워야 해요.”

진지해 보이는 눈을 보니 할 말이 없어졌다. 얘는 정말 진심으로 하는구나.

“춤 잘 추는 사람들 보면 부러워요.”

“나도 그래.”

노블을 좋아하기 시작했던 것도 동경으로부터였다. 큰 무대 위에서도 그 어떤 그룹보다 화려한 실력을 마음껏 보여주는 것도, 예능보다 음악 활동에 중심을 맞춰서 활동하는 것도 다 멋졌다. 혼자 공연도 보러 가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래서 선배 춤을 좋아해요.”

“몇 번이나 봤다고 그래, 쑥스럽게.”

“선배처럼 추는 사람 17년 만에 처음 본 거였거든요.”

두 살 때는 본 적 있다는 거야? 태클을 걸기에는 말하는 표정이 또 진지해서 참기로 했다. 무대 위에서 음악 하겠다고 저렇게 열정을 가지고 하는 애가 내 춤이 좋다고 말해주니 기분이 묘했다.

“그렇게 말해주니까 고맙네.”

“그러니까 춤 그만두지 마시고 계속하셨으면 좋겠어요. 뭐로 간에.”

전부터 말할 때마다 느꼈던 이상함을 조금 전 그 말로 확신했다. 그래서 바로 직구로 물었다.

“나 어디서 봤어?”

“학교에서요. 학교 축제 때도 봤고 조회 때도 봤고.”

“아, 동아리 공연.”

어쩐지 말하는 게 계속 날 아는 것처럼 얘기하는가 싶더니. 생각해보면 같은 학교인데 한 번쯤은 봤을 게 당연했다. 왠지 머쓱해져서 바로 악보로 시선을 돌렸다.

“내가 처음일 줄 알았는데 둘이나 있네.”

얼마 지나지 않아 가온이 문을 열고 들어왔고, 그 뒤로 성원을 제외한 나머지 조원들이 속속들이 입장했다.

어색했던 연습실 안에 사람이 차고 분위기가 밝게 풀리는 걸 보고 바로 밖으로 나왔다.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 들어가서 세수를 한 번 하고 소매로 대충 얼굴을 닦았다.

고등학교 때 생각을 하니 오랜만에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사는 가족 생각이 나서 휴대폰 주소록을 열었다. 생각난 김에 통화 한 번 하고 들어가야겠다.

주소록에 ‘형’ 한 글자를 검색하고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9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지만 형은 아직 출근 전일 게 뻔했다.

-뭐야. 웬일로 먼저 전화를 해?

지금 막 출발하려는지 시동 거는 소리와 형의 목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형은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회사에 다니면서도 차를 타고 출근하는 사람이었다. 오랜만에 걸은 전화임에도 전혀 놀랍지 않은지 태연했다.

“그냥 형 생각나서.”

-벌써 돈 떨어졌냐?

“무슨 말을 그렇게 시원섭섭하게.”

-아, 맞아. 너 요즘 TV 나오냐? 동기 휴대폰 바탕화면 너 사진이더라. 물어봤더니 요즘 이 프로그램 누가 모르냐고 그러던데. 어디 나오는데? 춤 다시 하기로 한 거야?

그럼 그렇지 싶었다. 형은 전형적인 스포츠광이었다. 형의 오피스텔에는 엄청 커다란 TV가 한 대 있는데 소파에 앉아 항상 그 TV로 축구를 보며 맥주를 마셨다.

전형적인 집돌이라 회사와 집, 회식 자리를 제외하면 딱히 가는 곳도 없다. 그 끝없는 스포츠와 맥주 사랑으로 여자친구한테 차인 경력도 꽤 있었다. 그런 형이 아이돌 서바이벌 프로그램 같은 걸 알 리가 당연히 없다.

“보통 동생의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면 바로 전화를 걸지 않아?”

-귀찮아. 그래서 지금 물어보잖아.

“춤도 추긴 하는데 열심히 하면 아이돌로 데뷔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야.”

-아이돌에 관심 있는 줄은 몰랐네. 데뷔하면 앨범 몇 장 사줄까?

“나온다고 했지 데뷔한다고는 안 했어.”

-그래. 그럼 데뷔하고 다시 전화해. 나 노래 들으면서 가게.

하나뿐인 동생과 오랜만에 하는 전화인데 형은 팝송을 들으며 출근하는 게 더 중요한 것처럼 굴었다. 어차피 틀자마자 도착할 텐데. 사람 말도 듣는 둥 마는 둥 하길래 오해만 풀어주고 끊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삼촌이 부탁해서 나온 거야.”

-나온 김에 열심히 해서 데뷔하면 되겠네. 너 춤추는 거 좋아하잖아.

“아이돌이 춤만 춰서 되는 줄 알아?”

-그럼 노래 연습도 하던가. 아이돌도 춤추는 직업이잖아. 너 춤 좋아하고. 안 그래도 글 쓰는 거 힘들어했잖아. 형은 네가 좋아하는 일하는 건 찬성이야. 퇴근하면 재방송 찾아서 볼게.

형은 제 할 말만 빠르게 마치고 정말로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끊고 싶었나. 몇 분 찍히지 않은 통화시간을 뒤로 가기를 눌러 지우며 세면대 앞 거울에 머리를 박았다.

웬 아이돌 데뷔 프로그램이냐고 핀잔이나 줄 줄 알았더니. 좋아하는 일하는 건 찬성이야, 이런 소리만 늘어놓고.

“아, 박상현 진짜.”

동생한테 관심 하나 없더니 갑자기 저러고 끊어. 형이 했던 말을 떠올리자 얼굴이 갑자기 또 홧홧해졌다.

너 춤 좋아하고. 형의 목소리가 다시 떠올려봐도 확고했다. 그러다 문득 걸리는 게 있었다.

‘재방송 봐도 나 안 나올 텐데.’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