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뷔를 피하는 방법-13화 (13/130)

#13

형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서 알려줄까 하다가 포기하고 화장실을 나왔다. 굳이 내가 안 나와도 시간 때울 겸 볼 수도 있는 거고, 3화에 단독 컷 있으니까 나오는 줄은 알겠지.

연습실로 돌아가 악보를 들고 세 줄밖에 없는 가사를 다시 몇 번 외우다가 다시 동선 수정에 들어갔다. 최대한 내 자리를 뒤로 빼고 있는데 한참 고음 연습을 하던 휘영이 이쪽으로 슬그머니 다가왔다. 낯을 어찌나 가리던지 춤을 가르쳐주면서 이름도 겨우 알게 된 조원이었다.

“조장님 파트 너무 없는 거 아니에요?”

“제가 편해서 뒤로 가는 건데요, 뭐.”

“그래도, 다 간절한 사람들인데…… 조장님이 굳이 이렇게 안 하셔도 돼요. 동등하게 가져가야죠.”

휘영이 고개를 저으며 다시금 수정하기를 권했다.

뭐가 그렇게 안타까운지 울상이었다.

이번 미션을 마지막으로 삼촌은 통편집을 포기하겠다고 했다. 통편집 유지비로 들어가는 커피값이 장난이 아니라서.

그 말인즉슨 2차 미션이 지나면 정상 분량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혼을 갈아 넣은 통편집을 선보였음에도 돌아온 순위가 4위라면 정상 분량으로 돌아오는 순간 정말 데뷔가 눈앞에 나타날지도 모른다. 간절한 나머지 참가자들이 들으면 재수 없다고 멱살을 움켜쥘 수도 있겠지만 나도 나름대로 심각했다.

“조장님 단독 파트도 좀 있어야죠.”

안절부절못하며 자꾸 어깨 근처에서 손을 움직이던 휘영이 2절 하이라이트 동선을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러더니 두 배로 충격받은 표정을 지으며 구석에 떨어져 있던 연필을 주워왔다.

“여기 원래 3번 단독 파트잖아요. 제 파트 아닌데!”

“눈썰미 좋네요. 바로 알아보고.”

“당연하죠, 전 이미 1절 하라 부분에 단독 파트 있어요. 안 그래도 이거 몇 초 되지도 않는데 이걸 저 주시면 어떡해요.”

진심으로 미안한 목소리와 함께 연필 뒤꽁무니에 달린 지우개가 내가 그린 화살표를 지워나갔다. 여느 연필 지우개들이 다 그렇듯 지워지는 폼이 지저분했다.

얼마나 급하게 지우는지 차마 말리지도 못하고 화살표가 사라져버렸다. 지우는 손동작이 얼마나 컸는지 연습하던 다른 조원들이 이쪽으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종이 찢어지겠다.”

“아니, 이거 제 파트 아닌데 조장님이 잘못 표시하셔서요.”

휘영이 어색하게 웃으며 끝까지 지우개질을 끝마쳤다. 이 정도로 거절하면 은근슬쩍 고맙다고 하면서 받을 만도 한데 호의에 익숙하지 않은 듯했다.

솔직하게 4번은 3번 다음으로 파트가 적었다. 첫 시작부터 뒤돌아있는 것부터 말 다 했지. 파트 정할 때도 소극적이더니 자기 밥그릇을 잘 못 챙기는 모양이다.

“휘영 씨도 파트 되게 적은데요.”

“전 이 정도면 만족해요. 게다가 전 어차피 이번 미션으로 떨어질 것 같거든요.”

별거 아닌 것처럼 말하는데 표정은 가루약을 삼킨 것처럼 썼다. 왠지 모를 부모 마음이 생겨서 없는 파트를 더 쪼개서 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종이가 또 지저분해질 것 같았다. 아까 그 반응을 봐서 감사합니다, 하고 받을 것 같지도 않고.

계속해서 이리저리 동선을 수정해서 최대한 공평하게 만들어보고 싶었지만 이미 만들어져 있는 틀을 과하게 뜯어고칠 수는 없어서 대충 내 자리만 크게 티 나지 않게 뒤로 끄집어냈다.

“동선 수정 끝냈는데 확인 좀 해주세요.”

공평하게 짰든 그렇지 않든, 어쨌든 중요한 것은 조원들 의사였다. 열심히 개인 연습을 하고 있던 조원들이 꿀을 발견한 벌들처럼 몰려들어 동선을 살폈다.

맨 처음으로 가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잘 짜셨다고 엄지를 들어 올렸다. 그 뒤로 지구도 수고했다며 별말 없이 다시 연습하러 돌아갔고 나머지 조원들도 오케이를 했다. 중요한 건 눈에 확 띄는 금발 머리가 없다.

“성원 씨 어디 갔어요?”

“어…… 안 오신 것 같은데요.”

가온이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잠시 찾았지만 없는 사람이 보일 리가 없었다. 해맑게 웃으며 없다는 소리를 하는 걸 보니 황당했다.

지금이 몇 시지. 늦어도 9시까지는 도착해야 했는데 곧 11시였다. 바로 앞 촬영팀에게 물었지만 못 온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며 고개를 좌우로 젓는다. 뜻밖의 부재에 신경이 쓰여서 문을 계속 힐끔힐끔 훔쳐봤지만 들어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그렇게 성원 없이 연습이 이루어졌고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다들 우르르 밖으로 몰려나갔다. 아까 가온과 랩 파트를 맡는 조원이 떡볶이를 먹으러 가자며 제안했지만 나는 올곧게 편의점으로 갈 계획이었다. 이번에 새로 들어왔다는 초밥 도시락을 먹어봐야 했다.

“밥 먹으러 안 가?”

“아. 저 연락 한 통만 하고 가려고요.”

“그래, 그럼.”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내는지 자판 치는 속도가 굉장히 빠르다. 이미지만 봐서는 자판 봐가면서 띄엄띄엄 칠 것 같은데 확실히 고등학생이라 그런지 타이핑 솜씨가 굉장히 훌륭했다. 먼저 몸을 돌려서 연습실을 나왔는데 그 잠깐 사이에 연락을 끝낸 건지 어느새 지구가 옆에 서 있었다.

“선배. 파트 왜 그렇게 짜신 거예요?”

“어? 뭐가? 마음에 안 들어?”

“선배 파트가 적어도 너무 적어서요. 앞으로 나오는 게 하나도 없던데.”

아까 아무 말도 없길래 만족한 줄 알았더니, 많이 불공평한 파트에 대해 의문이 있는 모양이었다.

“혹시 다른 조원들 파트까지 수정하시다가 그렇게 된 거면 제 파트 드릴게요. 메인보컬이라고 해도 너무 많고.”

“아니, 안 그래도 되는데.”

“아무리 봐도 너무 불공평해서요. 선배가 다 짜셨는데 이렇게 되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요.”

똑 부러지는 말로 사람을 당황하게 한 지구가 이쪽을 똑바로 바라봤다. 변명을 좀 해보려고 했는데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 같았다.

“알았어, 고칠게.”

결국 알겠다고 대답을 했다. 그제야 지구가 표정을 좀 풀고 다른 얘기를 꺼냈다.

“식사하실 거면 저도 갈래요.”

“어, 그래. 편의점 가서 먹을 건데 괜찮아?”

“저도 편의점 가려고 했어요. 삼각 김밥 먹고 싶어서요.”

어, 웃네.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걸 순위 발표할 때 이후로 처음 본 것 같아서 조금 놀랐다. 웃으니까 진짜 순하게 보인다. 나란히 바로 밑 편의점으로 내려가려는데 다른 사람 어깨에 매달려서 내려가고 있는 준과 마주쳤다. 벌써 친해졌나 싶어 인사를 하려는데 매달린 사람이 심각하게 장신이다.

“안녕하세요, 4조 조장님. 오랜만에 뵙네요.”

길게 찢어진 눈이 가느다랗게 휘었다. 익숙한 눈웃음에 거울을 보고 혼자 수상소감 연습했던 날이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표정이 조금 언짢아졌는지 예준이 표정 풀라며 손을 휙휙 흔들었다. 이 안 어울리는 조합은 뭘까.

“혹시 준이랑 같은 조……?”

“네. 힙한 조라고 합니다.”

저쪽은 조 이름까지 지었구나. 우리 조도 이름을 만들어야 하나 싶어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데 준이 어깨를 툭툭 쳤다.

“형도 같이 밥 먹으러 갈래요?”

“어디 가는데.”

“이 앞에 엄마 밥상이요. 거기 반찬 완전 맛있대요. 게다가 점심에는 랜덤으로 찌개도 나온다는데!”

준이 신난 듯 외쳤지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옛날부터 입이 짧았다. 집밥이 익숙하지 않아서 식사는 항상 조리 식품으로만 해결했다. 찬이 나오는 정갈한 밥상 같은 걸 먹으러 가고 싶을 리 없었다.

“잘생긴 형이랑 둘이 가. 지구 너도 저쪽 가서 먹을래? 맛있을 것 같은데.”

“아니요, 저 저런 음식점 잘 안 가요.”

너도 편의점 단골이니? 급 솟아오르는 친밀감에 맛있는 도시락 추천을 해주려다가 별로 들떠 보이지 않는 표정이라 관뒀다.

편의점에 도착하자마자 새로 나왔다는 초밥 도시락을 집어 들어 계산대에 올렸다. 나왔다는 말만 들었는데 확실히 번화가에 있는 편의점이라 신메뉴 들어오는 속도가 빨랐다. 도시락을 여는 동안 지구가 계산을 끝낸 컵라면 뚜껑을 따서 온수기에 가져갔다.

“삼각김밥 먹는다며, 컵라면으로 바꿨어?”

“네. 이게 더 맛있을 것 같아서요.”

진짜, 그게? 라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지구가 집어 든 컵라면은 맛없기로 유명한 제품이었다. 저번 달에 새로 출시됐을 때 맵고 짜다고 했었는데, 라고 말해주기에는 라면을 든 얼굴이 너무 아무 생각 없어 보였다. 그래, 입맛에 맞을 수도 있는데 괜히 말하지 말자.

그렇게 나란히 마주 보고 앉아서 먹는데 생각보다 잘 먹는다. 정말 짜지 않은가 싶어 계속 힐끔거리게 되는데 멀쩡해 보여서 뭐라 할 말이 없었다.

평소에도 많이 짜게 먹나. 본인 식습관도 나쁜 주제에 남의 잘못된 식습관을 걱정하며 일어났다. 그리고 생수를 찾으러 안쪽으로 들어갔다. 한 병을 계산해서 건네자 뭐냐는 듯 빤히 올려다보는 눈이 살짝 빨갰다.

“마시면서 먹어. 체하겠다.”

최대한 관대한 사람 같은 멘트를 치며 물을 밀어주자 곧장 뚜껑을 따서 마셨다. 내심 짰니? 그 급한 행동이 조금 웃겨서 물어보려다가 관두고 혼자 머리를 식탁에 박고 속으로만 좀 웃었다. 평소에 잘 웃는 편은 아닌데 스스로도 웃음 장벽이 허물어지는 기준이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초밥 하나를 집어서 입안에 골인시켰다.

성원은 정말 안 올 심산인지 스태프 측에서 제공한 저녁 식사를 마친 후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빨리 동선 안 고치고 뭐 하냐는 듯이 지구가 계속 쳐다봐서 뒤로 밀어놨던 내 자리도 다시 원상복구 시켰다.

설마 프로그램을 때려치운 건가 싶어 파트 배분을 다시 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는데 삼촌이 그냥 일이 생겨서 못 오는 거라며 걱정 말라고 했다.

벌써 10시를 향해 가는 시계를 보며 시간 참 빠르다는 생각을 했다. 조 짠 거 며칠 안 된 거 같은데 내일모레 벌써 촬영이라니. 성원이 안 와서 전체적으로 맞춰보지는 못했지만, 이 정도면 연습 시간이 적었던 것치고는 괜찮았다.

“조장님, 옆방에서 클레오파트라 게임하는 것 같은데 저희도 할래요?”

“그거 하다가 목 상해요.”

“그 정도로 노래 못 부를 정도로 맛이 가진 않아요!”

“그렇게 소리가 지르고 싶어요?”

“네!”

“그럼 고음 연습하세요. 안 올라간다고 소리 지른 지 몇 분 안 됐어요.”

실망한 표정을 여실히 드러내며 가온이 연습실 바닥을 굴렀다.

“클레오파트라! 아니다, 이거 목에 안 좋으니까 얼굴 몰아주기 해요!”

대학 다닌다더니 엠티에서 갈고 닦은 게임 실력을 뽐내고 싶은지 가온이 계속 놀자고 주장했다. 나는 가온의 어깨를 툭툭 치며 저쪽 구석에서 쉬고 있는 나머지 조원들을 가리켰다.

“저쪽 가서 하자고 해요.”

“하기 싫어할 것 같은데.”

결국, 설득을 하기로 마음먹었는지 어슬렁어슬렁 연습실 구석으로 기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문이 열렸다.

누가 들어왔나 싶어 고개를 돌렸는데 보인 것은 종일 일이 있다며 코빼기도 비치지 않던 성원이었다.

“안 오시는 줄 알았더니?”

“죄송해요. 만날 사람이 생기는 바람에. 그래도 한 번이라도 더 맞춰봐야 할 것 같아서 왔어요.”

성원이 푹 눌러썼던 모자를 벗으며 고개를 숙였다.

“귀찮으셨을 텐데.”

“당연히 와야죠. 진짜 죄송해요. 오늘 아니면 만나기 힘든 애들이라서요.”

“멀리서 오신 분들이랑 만나셨나 봐요.”

“그건 아니고 바쁜 애들이에요. 스페이스 아시죠? 걔네들이요.”

“헐, 스페이스요? 저 완전 좋아하는데.”

뒤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가온이 불쑥 일어나 감탄사를 터뜨렸다. 스페이스가 누구더라. 곰곰이 생각해보니 기억이 날 것도 같았다. 어떻게 생겼는지, 몇 인조 그룹인지는 모르지만 망한 그룹은 아니었던 것 같다.

현직 아이돌이랑 따로 만날 만큼 친한 사이인가? 잠깐 생각을 하다가 문득 성원이 연습생이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스페이스가 TN이던가? 알지도 못하는 걸 생각해봤자 떠오를 리 없었기에 몸을 슬쩍 뒤로 빼고 휴대폰으로 검색을 했다. 맞네, TN엔터테인먼트.

“대박. 친하세요?”

“같이 연습했으니까 친하죠. 아, 지구 씨도 보고 싶다던데 한 번 연락해줘요. 동고동락한 사이에 서운하게.”

빙글빙글 웃으며 의외의 친목 상대를 자랑하는 성원의 말에 지구가 살짝 움찔했다. 다시금 머릿속에 댓글들이 스쳐 지나갔다. 싸워서 나갔대. 스페이스 데뷔조 애들이랑 불화 있었다던데? 찌라시를 믿는 건 좋지 않았지만, 자꾸 싸늘해지는 이 분위기를 봐서는 완벽하게 거짓말이라고도 못하겠다.

하지만 그 꺼림칙한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자, 그럼 성원 씨 왔으니까 다시 연습해요!”

가온이 이제 연습을 시작하자며 발랄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시끄러워진 연습실은 곧 노랫소리로 가득 찼다.

성원까지 합쳐져 완벽한 대형을 만들 수 있게 되자마자 2시간 정도 동선을 맞춰 춤추는 연습을 했다. 연습할 날이 당장 내일 밖에 안 남아서 대충 무대처럼 보이게는 해야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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