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성원은 가장 먼 자리에서 키득거리며 누군가와 문자를 하고 있었다. 즐거워 보이는 얼굴에 언짢은 시선을 보내며 자리에 앉았다.
일단 둘이 친형제인 건 확실했다. 좋아하던 아이돌과 나름 예뻐하던 조원 동생이 형제라는 걸 받아들이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생기고 저런 일도 생기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중요한 건, 이 사실을 밝히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던 지구의 태도였다. 처음 만났을 때도 성을 빼고 이름을 얘기했었고 방송에서도 이름 두 글자만 사용했다.
지구가 숨겨오던 형의 존재를, 굳이 대기실 복도에서 언급한 것은 계산된 행동이 분명했다. 너무 유치해서 민망할 정도다.
왜 자꾸 나서서 불화를 조장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저번 일도 그렇고, 하는 짓을 봐서는 지구를 데뷔 조에서 떨어뜨리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내가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었다면 가서 너부터 하차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쏘아붙여 줬을 것이다. 물론 네가 왜 나서서 난리냐는 소리나 들을 게 뻔했기 때문에 그냥 가만히 있었다.
“아, 존나 웃기네.”
문자가 그렇게 웃긴지, 속으로 해야 할 말을 입 밖으로까지 꺼낸 성원은 갑자기 열리는 문에 입을 딱 다물었다. 열린 문 사이로 대기실을 촬영할 모양인지 몇 대의 카메라와 스태프들이 들어왔다.
동시에 성원이 휴대폰을 내려놨고 지구 또한 꽂았던 이어폰을 뺐다. 카메라 앞에서까지 싸한 분위기를 보여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성원은 자연스럽게 조원들 근처로 자리를 옮겨왔다.
슬슬 다른 조들도 대기실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리 넓지 않았던 대기실은 공기마저 빡빡할 정도로 가득 찼다. 출근 시간대의 지하철과 같은 상태가 됐을 때, 스태프들이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인터뷰를 시작했다.
이런 답답한 공간에서 지금 기분이 어때요? 따위를 물어봤자 답답해요, 소리밖에 안 나올 것 같았지만.
“4조, 지금 기분이 어때요? 떨려요?”
이번에는 우리 조 인터뷰 차례가 다가왔다. 둥글게 모인 조원들에게 스태프가 대충 물었고 여전히 풀리지 못한 분위기에 급히 가온이 총대를 메고 입을 열었다.
“진짜 떨려요. 심장 소리 한 번 들어보실래요?”
누가 봐도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가온이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쿡쿡 찍었다. 카메라가 잠시 가온을 클로즈업하다가 멀어졌고 스태프가 다른 사람들도 어서 한마디씩 하라는 듯 눈치를 줬다.
왜 하필 음방 직전에 그런 헛소리를 한 건지, 타이밍도 존나 악질이네. 절로 튀어나오는 욕을 참지 못하고 속으로만 열심히 내뱉은 뒤 어쩔 수 없이 가온에게 총대를 넘겨받았다.
“시청자분들 앞에 처음 서는 무대잖아요. 열심히 준비했으니까 잘 봐주세요. 네, 파이팅.”
마지막에 뻘쭘하게 파이팅까지 붙이고는 슬쩍 양 주먹을 들어 보였다. 진심으로 힘없어 보이는 파이팅에 스태프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고, 왠지 재를 뿌린 것 같은 기분에 옆에 있는 착한 조원들을 툭툭 건드렸다.
졸지에 내 손가락에 찔린 휘영과 래퍼 조원이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팔을 들어 올려 함께 파이팅을 외쳤다.
스태프는 조원들이 모두 한마디씩 하기를 바라는 것 같았는데 지구와 성원은 표정 관리만 할 뿐 입은 열지 않았다.
“열심히 준비했고, 잘할 자신도 있어요. 보러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결국, 지구가 먼저 표정을 살짝 풀고 카메라를 향해 조용히 한마디 했다. 이쯤 되면 성원도 뺀질거리면서 가볍게 한 마디 던질 줄 알았더니 끝까지 입을 다물길래 조금 놀랐다. 어차피 적당히 편집해서 내보내면 되는 인터뷰 부분이니 스태프는 이 이상 말을 요구하지 않고 멀어져 갔다.
“조장님, 저희 괜찮…… 겠죠?”
가장 심하게 눈치를 보던 휘영이 나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작게 물었고, 장담할 수는 없었지만 일단 안심을 시켜주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전혀 괜찮지 않은 분위기로 1조부터 녹화를 위해 무대 위로 향했다. 두 번씩 무대를 마친 조들은 다들 흥분과 땀에 젖은 얼굴로 대기실에 돌아와 서로 기분을 공유하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찾아왔는지에 대해 토론을 했다.
그 사이에서 우리 조만 소외된 것처럼 앉아있었는데, 준이 옆으로 다가와 앉더니 눈동자를 동서남북으로 굴렸다. 아마 분위기가 왜 이러냐고 묻는 것 같았다.
“어떤 눈치 없는 인간이 대기실 복도에서 헛소리를 해서….”
“복도요? 아, 어쩐지 들어올 때 시끌시끌하더니.”
“시끄러웠어?”
“네. 어수선하던데요. 막 사람들 모여서 얘기하고, 찌라시 하나 물은 사람들도 아니고.”
찌라시 하나 물은 사람들 맞는데. 준이 생각보다 눈치가 빨랐다. 노블 태양의 동생이 요즘 핫한 프로그램 참가자라는 사실은 충분히 흥밋거리가 될 만했으니까.
스태프들이 전부 들은 상황이면 분명 인터넷에 올라갈 텐데, 어떤 식으로 왜곡될지 심하게 걱정이 됐다. 하지만 멀리 떨어져 앉은 지구의 무덤덤한 표정에서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곧 형네 조 올라가잖아요. 심장마비로 죽으면 안 돼요. 아, 맞다. 무대에 서봤다고 했으니까 형은 안 떨 수도 있겠네요.”
“심장마비로 죽을 정도였어?”
“사람 진짜 많아요. 함성도 장난 없고요. 두 번 촬영하는데, 중간에 한 타임 쉴 때 누가 제 이름 부르는 것도 들었어요!”
무대의 참맛을 깨우친 듯, 준이 빛나는 눈으로 상황을 재현하기 시작했다.
“제가 이렇게 무대 앞쪽으로 걸어가니까 저기, 저- 거의 맨 뒤쪽에서 여기까지 들렸다니까요?”
아이돌 콘서트장을 가본 적 없어 보이는 준은 이보다 더 큰 소리는 없을 거라며 아낌없이 자신의 기분을 털어놓았다. 콘서트장 한 번 가보면 네가 들은 환호의 100배를 들을 수 있을 텐데.
“4조 스탠바이!”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조가 불렸고, 한 번에 딱 일어나던 다른 조들과 다르게 우리 조는 일어나는 모습도 오합지졸이었다. 마치 눈치 게임을 하듯, 도미노가 무너지듯 순서대로 엉거주춤 일어난 조원들이 뻣뻣한 걸음으로 대기실을 나섰다. 준은 어느새 3조 조원들 사이에 끼여서 손을 크게 흔들고 있었다.
무대 밑에서는 최종 점검 작업이 이루어졌다. 마이크가 제대로 달려있는지 확인한 뒤에는 급하게 다시 메이크업을 손봤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진 작업을 끝내고 나니 이미 무대 위에 서 있었다.
“…….”
심장마비로 죽지 말라던 준의 말이 이제야 깊게 와닿았다. 200명이 많은 숫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무대 위에서 바라보는 느낌은 또 달랐다.
“꺄아아악!”
경연 대회나, 학교 축제 무대보다 관객이 적은데도 더 떨렸다. 응원봉도, 흔한 슬로건도 보이지 않았지만, 큰 목소리들이 그대로 귓속으로 꽂혀 들어왔다. 작은 규모였는데도 커다란 함성 때문에 눈앞에서 파도가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나도 저렇게 응원하던 입장이었는데, 무대 위로 올라오니 기분이 완전히 달랐다.
“아, 숨, 찬다.”
무대를 한 번 마치자마자 가온이 바닥에 주저앉았고, 동시에 관객 쪽에서 커다란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가온아!”
“잘생겼다!”
한 번 더 녹화하기 위해, 주어진 시간 동안 땀을 닦고 옷매무새를 점검한 뒤 망부석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그동안 열렬한 환호 소리는 끊이지 않고 계속 들렸다.
아이돌들은 이럴 때 시답잖은 농담이나 소통을 하곤 했지만, 막상 내가 그 상황이 되니 뭐라 할 말을 찾기 힘들었다. 성원은 그나마 이런 관심이 버겁지 않은지, 무대 앞쪽으로 나가 뭔가 말을 하고 있었다.
조원들의 이름이 돌림노래처럼 울리는 동안, 내 이름도 심심찮게 들을 수 있었다.
“하현아! 데뷔해! 꼭 데뷔해! 사랑해!”
꼭 데뷔하라며 혼자 일당백의 목소리 크기를 소화하시는 맨 앞줄 여자분이 손을 흔들었고, 그 열렬한 목소리를 또렷하게 기억 속에 박아두고 두 번째 무대를 시작했다.
첫 번째 녹화보다 더 빡세게 두 번째 녹화를 마치고, 무대를 내려올 때까지 목소리들은 끊이지 않았다. 대기실로 돌아와서 한참을 멍청하게 앉아있고 나서야 사람들이 왜 아이돌을 하고 싶어 하는지 깨달았다. 이런 기분이구나. 호감만 받을 수 있는 무대 위는.
“진짜 잘 나왔을 것 같아요.”
“저희 조 마지막 무대였는데, 마지막으로 파이팅 한 번…… 할까요?”
가온이 슬쩍 지구와 성원을 번갈아 보며 제안했고 두 사람 모두 흥분에 젖은 상태여서인지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 같이 손을 모으고 파이팅을 외치고 나서 뒤늦게 이런 건 무대 전에 하는 거 아닌가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태클을 걸지는 않았다. 처음 느끼는 색다른 희열에 나도 충분히 들떠 있었으니까.
완벽하게 네 조 모두 녹화를 마치고 대기실을 벗어나면서 아까 일이 신경 쓰여 노블 대기실 문을 한 번 바라봤지만 안에서 멤버들이 나오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우리 조의 마지막 무대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성원이 복도에서 헛소리만 하지 않았으면 정말 성공적이었을 텐데.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건 그날 저녁이었다. 깨끗하게 씻은 뒤에 편안히 자기 위해 침대에 누웠을 때, 삼촌이 전화를 걸어왔다.
-야, 지구 그 친구가 노블 태양 동생이야? 인터넷 난리야. 실검 찍고. 대체 어디서 시작한 건지 모르겠는데 빽부터 투표수 조작 소리까지 나와. 대기실 복도에서 무슨 일 있었다는 것 같은데 뭐야? 형제끼리 아는 척이라도 했어? 너 같이 있었을 거 아니야.
사건의 진상을 물어오는 삼촌 때문에 잠이 확 깨버렸다. 인터넷의 악질적인 특성상 이런 뜬금없는 소문들은 왜곡이 쉬웠다. 어떻게 퍼지고, 살을 붙여서 번져나갔을지 뻔히 그려지는 상황에 침대에 눕혔던 몸을 일으켰다. 아, 김성원.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까지 일이 크게 벌어질 줄은 몰랐는데 생각보다 상황이 더 심각했다. 아무리 찌라시라는 게 끝도 없다지만 투표수 조작 얘기는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삼촌은 한동안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다며 우울한 목소리를 했다. 그 의견에는 나도 동의했다. 벌써 시청자 게시판에 민원이 밀려들고 있다고 하니까.
-조작 같은 거 없었던 건 내가 제일 잘 알잖아. 억울해서 토할 것 같네.
“삼촌은 형제였던 것도 몰랐다면서요.”
-당연히 몰랐지. 성 없이 이름만 제출한 것도 개념인 줄 알았고. 진짜 피곤해 죽겠네. 김성원 그놈이 꺼낸 얘기라고? 왜 그런 쓸데없는 얘기를 갑자기 해?
삼촌은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물었고, 나 또한 만만치 않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몰라, 미쳤나 보지.”
-집안에 돈도 많다던데. “결국 빽은 본인한테 있는 거네.”
-집안에서 내놓은 양아치라고는 들었는데, 아들놈이 사고 친 거 덮는데 돈을 아끼지를 않는다더라. 어쨌든, 내일 전에 폼 제출했던 거 몇 개 뽑아서 촬영할 거거든. 프로필 사진 B컷 곧 풀 거고, 애들끼리 게임을 하는 거 비하인드 영상이랑 몰래카메라 하는 거랑. 내일모레부터는 또 3차 미션 들어가야 하고. 근데 분위기가 이래서 지구 그 친구가 올지 모르겠네. 연락은 해봤는데 전화를 안 받아서. 한 번 더 해봐야겠다.
삼촌은 지구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통화를 끊었다. 낯을 많이 가린다며 쑥스럽게 웃던 지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순수하게 무대를 즐기는 아이에게 이런 사실도 확인되지 않은 루머 때문에 비난이 쏟아진다는 게 답답하고 속상했다. 한번 전화를 걸어볼까 했지만, 괜한 오지랖으로 여길까 봐 그만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