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다음날 촬영장에 김성원은 오지 않았다. 하차는 이미 확정이 되어서 기사까지 나갔고, 참가자들이 수군대는 것도 전부 그 얘기였다. 다른 참가자들과는 대화를 나눌 정도로 친하지 않아서 일부러 구석에 혼자 쭈그리고 앉아 있었는데 옆자리에 누군가 주저앉았다.
“왜 이런 구석에 앉아 계세요.”
“예준 씨는 이 구석까지 왜 오셨는데요?”
“너무 시끄러워서요.”
나랑 같은 이유인지 예준이 턱 끝으로 신나게 떠들고 있는 참가자 무리를 가리켰다. 괜히 머리를 마구 헤집기 시작한 내 손은 몇 초 가지 못해 붙잡혔다.
“곧 촬영인데 머리를 개판으로 만들면 안 되죠.”
“세팅한 것도 아닌데요.”
“그래도 헝클어지면 보기 조금 그렇잖아요. 하현 씨 팬분들은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신경 쓰고 계실 텐데.”
예준이 어깨를 으쓱이며 엉망이 된 내 머리를 손으로 살짝 눌렀다. 붕 떠 있던 머리카락이 꾹 눌리며 차분해지기는커녕 정전기만 더 일어났지만, 굳이 입 밖으로 불만을 꺼내지는 않았다.
머리만 깨끗하게 감고 온 나와 달리 예준의 머리는 평소보다 조금 더 자연스러우면서도 모양이 잘 잡힌 게 꽤 신경을 쓴 것처럼 보였다.
“한바탕 폭풍이 쓸고 간 거 같네요.”
“아.”
“비유가 조금 그런가. 걔는 폭풍보다는 약간 허리케인? 토네이도가 나으려나요?”
평소에도 말이 적은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오늘따라 입술이 더 바삐 움직이는 것 같았다. 목소리 톤도 약간 올라갔다. 주변의 변화를 알아차리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내가 느낄 정도면 조금 심하게 신났다는 뜻이었다.
“됐으니까 가서 준이랑 놀아주세요. ……쟤 휘영 씨랑은 언제 친해졌대요?”
“휘영 씨가 착해서 잘 받아주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더 필요가 없답니다.”
예준이 싱글싱글 웃으며 바닥을 손바닥으로 탁탁 내리쳤다. 준은 정말 예준에서 휘영으로 갈아탄 건지 웃고 떠들고 있었다. 이제 곧 저쪽 어깨에 매달리겠구나. 180cm가 넘는 장신의 준이 대롱대롱 매달리는 모습을 상상하자 갑자기 휘영이 측은하게 느껴졌다.
“김성원 아마도 집에 갇혀 있을 거예요.”
“네?”
“어제 통화하는 거 들었는데 풀린 고삐를 이제라도 잡아야겠다나. 원래 바깥 시선 중요시하는 분들이거든요.”
내가 궁금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예준은 묻지도 않은 말을 술술 꺼내 들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뭘 이렇게 잘 알고 있지. 내 의아한 눈빛을 찰떡같이 알아들은 예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집안끼리 아는 사이에요.”
“아, 네.”
성원의 집안과 아는 사이라니. 미묘한 눈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용케 눈치챘는지 예준이 시원하게 웃으며 어깨를 아프지 않게 내리쳤다.
“어딘지 알려드리기는 좀.”
“궁금하지는 않은데요.”
“안 궁금하실 것 같았어요. 제 말은 김성원이랑 그만큼 오래 알고 지냈다고요.”
하긴 부모님끼리 아는 사이면 그만큼 친밀했겠지 싶어 고개를 끄덕이니 예준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말을 이었다.
“뻔한 놈이라서 하는 말이지만 하차 때문에 너무 깊게 생각하실 필요 없어요. 본인 인생에 엄청난 타격을 입을 정도로 큰일도 아니고. 지금 좌절된 게 미래를 생각했을 때 훨씬 나으니까요. 얼마 있다가 외국으로 보내버릴 거라고도 하는 것 같고.”
말 안 해도 아는 이야기였다. 사람들은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 했지만, 김성원은 부모를 내세워 외국으로 훌훌 떠나버리면 그만이었다. 마지막까지 악에 받쳐있던 목소리를 생각하니 피해자들을 찾아가 일일이 사과하는 일은 죽었다 깨어나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분위기가.”
“데뷔하고 터졌으면 몇 배는 더 심각했겠죠. 걔는…… 자업자득이에요.”
예준이 무언가 끔찍한 장면을 생각한 듯 미간을 찡그리며 말을 끊었다. 아무래도 자업자득이라는 김성원의 과거를 회상하는 듯싶었다. 다림질을 해주고 싶을 정도로 인상을 구기고 있던 예준은 순식간에 표정을 풀고는 눈이 가늘어지도록 웃었다. 이 사람은 진짜 랩이랑 연기랑 병행해도 되겠다.
“근데 저는 몰카 재미있었어요. 의도야 어찌 됐든 그렇게 화나서 분노 주체 못 하고 날뛰는 거 오랜만에 봤거든요. 어떤 미친놈이 보는 눈 있는 곳에서 대놓고 멱살잡이를 해요. 본인 무덤 직접 삽질해서 판 거밖에 더 됩니까.”
하하.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드라마 같은 웃음소리까지 덧붙인 예준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같이 가자는 소리 없이 혼자 큰 보폭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입이 살짝 벌어졌다. 연기할 때 묘하게 즐거워 보이더니 진짜였구나. 순간 몸에 오한이 들어서 팔을 한 번 살짝 쓸어내렸다. 차가운 옷감의 감촉 외에 느껴지는 건 딱히 없었다.
* * *
“여기까지 살아남으신 분들 정말 축하드려요.”
MC의 발랄한 목소리가 촬영장의 분위기를 깨웠다. 3차 미션을 발표하는 자리였다. 살아남은 18명의 참가자가 힘찬 박수를 쳤다. 엄숙하게 울려 퍼지는 박수 소리 중에서 유독 톡톡 튀는 것은 요란스러운 준의 박수였다. 혼자만 엇박자다.
다들 곧 닥칠 3차 미션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혼잡할 때, 혼자 이 상황까지 오게 된 경로를 곱씹었다. 1차 미션을 끝내고 깔끔하게 떨어질 예정이었는데 어찌어찌해서 벌써 여기까지 왔구나. 애써 무시하던 것들이 갑자기 치고 들어오면 더욱 파고든다는 걸 누가 처음부터 알려줬더라면 시작조차 안 했을 텐데.
“생존의 기쁨은 충분히 누리셨으니 이제 다시 경쟁을 시작해야겠죠?”
생글생글 웃는 얼굴에서 왠지 모르게 예준이 떠올랐다. 웃으면서 말하는 사람들이 은근히 살벌하구나. 내가 자신의 웃음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었는지 따위는 조금도 알지 못하는 MC가 손에 들고 있던 진행 카드를 한 장 넘겼다.
“이번 3차 미션은 바로.”
MC의 목소리는 바로 말을 하지 않고 중간에 끊어졌다. 옆 사람의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뚜렷하게 들릴 정도의 정적이 몇 초간 이어지고, 뒤에서 무언가 튀어나왔다. 덜덜거리는 소리를 내며 들어온 것은 2차 미션에서 조를 정할 때 썼던 상자였다. 바퀴 달린 수레에 태워진, 붉은 공이 담긴 상자가 MC 바로 옆에서 멈춰 섰다.
또 조 추첨인가? 참가자들 분위기가 어수선해지며 여러 가지 추측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팀 미션이라면 열심히 하기는 하겠지만 불편할 것 같은데. 음악방송 녹화 이후로 마음을 잡은 내게 삼촌은 더는 미션 관련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예전에 스쳐 지나가며 들었던 유일한 정보는 대인원이 진행하기 애매해서 2차 미션과 순서가 바뀌었다는 것뿐이었다.
“19명의, 아니, 18명의 참가자.”
이제 미션이 소개될 차례였는데 MC가 말실수했다. 김성원이 하차했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하신 듯 자연스럽게 19명이라는 숫자가 튀어나왔고, 급히 말을 정정했지만, 녹화는 중단됐다. MC가 머쓱하게 웃으며 사과를 했고 피디님은 별거 아니라는 듯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아, 김 팍 샌다.”
“김성원 빠졌으니까 7명 말고 6명만 떨어지는 건가?”
촬영이 중단된 틈을 타 바로 분위기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온갖 연예인의 소식이 올라오는 연예 뉴스 쪽에서도 BEST 3 안에 들어갈 정도로 핫한 김성원 하차 얘기가 가라앉으려면 시간이 꽤 오래 걸릴 듯싶었다.
재정비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몇 번 헛기침을 한 MC는 촬영이 시작되자마자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유연하게 말을 이었다.
“18명의 참가자가 진행하게 될 이번 미션은 티저 촬영입니다.”
“…….”
MC의 입에서 미션의 정체가 떨어지자마자 사방이 고요함에 휩싸였다. 무대도 아니고 티저를 찍으라니, 기껏해야 춤과 노래 좀 하는 일반인인 참가자들에게 상당히 어려웠다. 왜 많은 인원으로는 진행하기 벅찼는지 바로 납득이 갔다.
“여기 있는 공에는 여러분들이 찍어야 하는 티저의 곡들이 적혀 있는데요. 어떤 곡이 있는지 알 수 없으니 선택은 당연히 불가능합니다. 운에 맡기면 됩니다.”
싱글싱글 웃는 얼굴이 악마 같았다. MC는 그 뒤로도 참가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을 덧붙였다. 15초에서 20초짜리의 짧은 개인 티저를 촬영하는데, 전체적인 화면 구성을 본인이 해야 하는 고난도 미션이라고 했다. 그리고 공에 적힌 노래의 종류는 총 6곡으로, 다른 참가자 두 명과 겹쳐 비교당하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설명을 다 듣고 난 뒤에 드는 생각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뇌 속이 텅 비어서 MC의 얼굴만 가득 들어찼다.
왜 하필 이런 미션을 넣은 거지. 18명의 인원이 각자 진행하려면 엄청나게 버거울 것이 분명했다. 아마 수정이나 재촬영 요청에도 한계가 있을 거고. 적은 예산으로 진행하려면 참가자들이 알아서 퀄리티를 조정해야 할 테고, 아무래도 창의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은 아주 힘들 것 같았다.
예를 들어, 나 같은.
“……진정하세요.”
나도 모르게 머리를 움켜쥐고 있었는지, 바로 앞에 조용히 서 있던 지구가 뒤돌아 어색하게 웃으며 말렸다. 상냥한 손길로 손의 위치를 원상복구 시켜준 뒤 미련 없이 앞을 보는 뒤통수를 나도 모르게 한참 쳐다봤다.
“1위부터 나와서 추첨 시작할게요.”
MC는 저번 미션과 동일하게 순위별로 자신의 운명을 정할 기회를 줬다. 가만히 상자 속에 얌전히 쌓여있는 공들을 멍하게 쳐다보고 있는데 지구가 내 다리를 살짝 건드렸다. 갑작스러운 터치에 깜짝 놀라서 고개를 번쩍 들었는데 MC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웃고 있었다.
“어떤 공 고를지 고민하는 거예요? 의미 없을 텐데.”
MC가 말꼬리를 쭉 늘리며 얄밉게 말했고, 그제야 1위가 하차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부동의 1위였던 김성원이 하차를 해버렸으니 자동으로 다들 순위가 하나씩 올랐을 테고,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긴장 풀고 나와요. 하하.”
오늘따라 MC가 말이 참 많았다. 1과 2는 고작 한 계단 차이인데 왜 이렇게 위압감이 갑자기 커지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자연스럽게 삐걱대는 걸음걸이로 앞으로 나가 공을 집어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다른 참가자들도 차례로 앞으로 나갔다.
하이라이트 부분 조금만 촬영하면 된다지만 노래 분위기에 따라 티저 분위기도 바뀔 수밖에 없었다. 신나는 노래를 의자에 앉아서 멍하니 분위기를 잡거나, 어둡고 우울한 노래를 놀이터를 뛰어다니면서 찍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다들 본인이 뽑은 노래를 확인하고 비밀스러운 표정을 짓기 바쁜데 나만 열지 않고 손안에서 한참을 굴렸다.
그렇게 모두가 공을 추첨하자마자 촬영이 종료됐다. 바로 서로가 뽑은 노래를 공유하는 참가자들을 보며 매끄러운 공의 표면을 매만졌다. 물론 이쪽도 예외는 아니었다.
“세상에, 제목만 들어도 참 묘하네요.”
예준이 바람 빠지는 웃음을 지으며 공을 달랑달랑 흔들었다. Party night라니, 묘하기는 했다.
“대박. 아, 저는 노블 노래 뽑았어요.”
준이 예준의 얼굴과 공을 번갈아 보며 박장대소를 하다가 공을 들이밀었다. 단면에는 정말로 노블의 데뷔곡이 또박또박 적힌 종이가 붙어 있었다. 준의 고백에 휘영이 아무 말 없이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같은 곡이라는 뜻이었다.
나처럼 아직 공을 확인하지 않은 지구가 눈을 불안하게 굴리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준과 휘영이 저 곡을 가져갔다면 아직 하나가 남았을 터였다. 아직 루머가 완전히 가라앉은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노블 곡을 뽑을까 노심초사하는 것처럼 보이던 얼굴은, 공을 열어보고 곧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되게 정적인 노래네요.”
커피 한 잔의 오후. 몽환적인 느낌의 발라드로 음원이 나올 때마다 차트를 점령하는 솔로 가수의 노래였다. 의자에 앉아 조용히 커피잔을 집어 드는 지구의 모습을 잠시 상상하다가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급하게 내 공도 열어봤다.
[FLY - 제인]
간결한 제목은 굉장히 흔한 것이라서 누구 노래인지 알기 힘들었기 때문에 밑에 적혀 있는 가수 명을 바로 확인해야 했다. 처음 보는 노래와 가수라서 조금 혼란이 왔다. 제목을 보니까 희망찬 분위기일 것 같기는 한데.
“무슨 노래야, 이게.”
“꿈 얘기하는 노래인데 시원시원하고 듣기 좋아요.”
아무도 내 노래에는 관심을 주지 않길래 다들 모르는구나 싶었는데 지구가 툭 던졌다. 꿈 얘기라니 예상대로 희망찬 노래가 맞았다.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상황이 빙글빙글 맴돌았다. 일단은 들어봐야 알겠지만 15초 안에 어떻게 담지.
“다들 생각나는 이미지는 있어요?”
“전혀요.”
예준의 질문에 준이 가장 먼저 고개를 격하게 저으며 부정을 표현했다. 심각한 얼굴로 인상을 찌푸리던 준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박수를 치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우리 같이 아이디어 회의하러 갈래요?”
“아니, 굳이.”
들뜬 준의 목소리에 예준이 쿨하게 모래를 뿌렸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예준이 해줘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준은 그 정도 모래에 기가 죽지 않았다.
“다 다른 노래긴 해도 서로 아이디어 나눠주고 하면 좋잖아요.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도 있고요.”
마치 그 속담을 어제 알아낸 아이처럼 뿌듯하게 사용한 준이 설득을 시작했지만, 사람들은 모두 심드렁했다. 찬성하는 사람은 가온 혼자였다. 웬만하면 거절하지 않는 휘영마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묵비권을 행사하는 걸 보니 회의는 무산될 가능성이 매우 커 보였다.
그리고 잠시 뒤 우리는 아이디어 회의를 명목으로 다 같이 카페에 앉아 있었다. 준의 앞에는 예준의 지갑에서 나온 허니 브레드가 예쁘게 놓여있었고, 고요함 속에서 입안에서 바삭거리는 소리만이 널리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