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수고하셨습니다.”
마지막 촬영까지 끝나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드러눕기까지 했다.
한눈에 봐도 맑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전까지 저 밑에서 뛰고 있었다. 숨이 차서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이 뛰었다.
“안 추워요?”
죽은 사람처럼 미동도 없이 숨만 쉬고 있는데 이쪽으로 담요가 날아왔다. 정확한 포물선을 그리며 던져진 담요가 얼굴을 덮었다. 갑작스럽게 주어진 답답함에 담요를 살짝 내리고 그제야 밀려오는 추위를 실감했다. 전체적인 분위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꺼내 입었는데 11월에 여름용 셔츠는 너무 간 모양이다.
“감사합니다.”
“잘 나올 것 같아요. 딱 청춘이구나 싶은.”
카메라를 매만지며 해주시는 말씀에 절로 웃음이 터졌다. 몸에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지만 상쾌했다. 추웠지만 기분이 좋았다. 옷이 더러워지는 것도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평소에는 아무리 날이 맑아도 관심이 없었는데 장소 때문인지, 분위기 때문인지 유독 하늘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예쁜 벽지를 붙인 천장 같았다.
“그만 갑시다.”
철수가 시작돼서 어쩔 수 없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시야에 하늘 대신 정면에 있는 카메라가 잡히는 순간 머리가 핑 돌았다. 어지럼증을 몰아내기 위해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자연스럽게 코를 한 번 훌쩍이며 하늘을 봤다. 조금 전이랑 다름없이 맑았는데 이번에는 이상하게 눈이 시렸다.
불안 불안하더라니, 결국 감기에 걸렸다.
티저 촬영을 만족스럽게 끝마치고 나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엎어져서 잤는데, 그게 이런 최악의 몸 상태를 낳았다. 몸이 피곤했어도 약을 찾아 먹던가, 보일러를 돌리던가 해야 했는데. 그냥 자는 바람에 침 삼키기도 힘들어졌다.
“아, 아. 아.”
조심스럽게 목을 열어 텅 빈 집안에서 혼자 소리를 내봤다. 막 일어난 데다가 감기까지 걸린 칼칼한 목에서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소리가 나왔다.
집 안에 남아있는 약도 달랑 종합 감기약 하나뿐이었다. 심지어 두 알을 먹어야 하는데 한 알만 덩그러니 남아 자신을 먹으라며 자기 PR을 하고 있었다. 10정이 들어있어서 딱 맞게 떨어져야 하는데 대체 언제 홀수로 처먹은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잠이나 더 자야겠다.”
티저 영상 제작에 대한 의견을 묻는 문자에 정성스럽게 답장을 하고, 다시 따뜻한 침대 속으로 들어가 한숨 자고 일어났을 때 더 나아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머리는 두 배로 울렸고 목소리는 더 심각해졌다. 충분한 수면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나서야 병원에 가기 위해 옷을 챙겨 입었다. 어제 벗어서 아무렇게나 내팽개쳐둔 셔츠를 발로 한 번 걷어차 주고 따뜻한 털이 달린 집업을 택했다.
“야, 기다려봐! 성격 존나 급해 진짜.”
일회용 마스크까지 착용하고 집 밖으로 나오자마자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학생들이 좁은 길에 가득했다. 그제야 멍청하게 시간 확인을 했고 마침 정확히 하교 시간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게다가 우리 집 근처에는 고등학교가 무려 세 개나 있었다. 조금씩 떨어져 있기는 했지만, 아파트나 주택이 대부분 이쪽에 몰려 있는 데다가 역까지 있어서 하교 시간만 되면 만원 버스에 올라탄 것처럼 답답할 정도로 사람이 늘어났다.
다시 들어갔다가 한 시간 뒤에 나올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이따가 귀찮아서 못 나올 게 뻔했으므로 최대한 길 가장자리에 붙어서 느릿느릿 병원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학생 두 명이 바로 옆에서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너 진짜 수능 볼 거야?”
“실기 떨어졌는데 뭐 어떡해. 최저등급이라도 맞춰야지.”
“솔직히 한국예대는 너무 높았다. 이번에 경쟁률 120대 1이었대.”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학생의 목소리에 심장이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것 같았다. 하필 몸에 열까지 올라있어서 자연스럽게 작년 이맘때가 떠올랐다.
컨디션 조절을 못해서 시험을 못 본 것까지는 상관없었다. 그때다 싶어 본인들이 마음대로 보냈던 기대감에 대해 분풀이를 하는 게 힘들었을 뿐이었다. 설마 네가 그럴 줄은 몰랐다며 탄식을 하는 선생님과 반 아이들 같은 것.
정신을 차려보니 발은 앞으로 나가지 않은 채 멈춰있는 상태였다. 조금 전까지 심각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던 학생들은 이미 인파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고, 혼자 못 박힌 듯이 가만히 서 있었다.
시선을 가만 내려 신발코를 바라봤다. 병원이 문을 닫기 전에 가야 했는데 어쩐지 갑자기 발이 무겁게 느껴졌다.
“선배?”
열 때문인지 몽롱해지는 정신 속으로 또렷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호칭 때문인지 너무 당연하게 지구를 떠올리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헐, 맞네. 야, 잠깐만. 선배!”
함께 있던 친구에게 잠시 기다릴 것을 요구하고 이쪽으로 뛰어오는 건 지구가 아니었다. 가까워질수록 뚜렷해지는 얼굴은 틀림없이 같은 동아리였던 실무과 후배였다. 파란색 넥타이를 달랑거리며 뛰어온 후배가 눈앞으로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선배 저 기억하세요?”
“정현이었나?”
“아뇨, 정한이요!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잠시만요. 선배들한테 연락 좀 하고요.”
다급하게 연락을 하려는 후배의 손을 꾹 잡아 눌렀다. 보자마자 연락을 한답시고 휴대폰을 꺼내 드는 걸 봐서 애들이 나를 얼마나 찾는지 알 수 있었다. 졸업했다고 친구들과의 연락을 전부 끊은 내 잘못이 크긴 했지만 더는 옛날의 인연들과 만나고 싶지 않았다.
“연락하지 마.”
“왜요? 선배 동창회 꼭 데려가야 한다고 하셨는데. 아, 혹시 휴대폰 바꾸셨어요?”
“됐으니까 나 못 본 거로 해.”
대체 그놈의 동창회가 뭐라고 다들 찾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당장 작년에 졸업한 애들이 무슨 동창회를 한다고 모이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들 대학 생활하는데 안 바쁜가, 그렇게 애들을 다 모으고 싶나. 그렇다기보다는 아이돌을 한답시고 TV에 나오는 내가 궁금할 뿐인 것 같았다. 하긴, 다 같이 모여있는 자리에서 나 같은 희귀 케이스가 오면 동창회가 더 즐거워지긴 하겠다.
“왜요?”
“넌 왜요 밖에 할 줄 몰라?”
자꾸만 이유를 꼬치꼬치 캐묻길래 말이 날카롭게 나갔다. 생각보다 길어진 대화에 후배의 친구가 이쪽을 자꾸만 힐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방송에도 나오고 있는 입장에서 길거리에서 목소리를 키우면 좋을 게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냥 내가 피하기로 했다.
“아, 미안하다. 지금 조금 예민하네.”
“요즘 학교에서 선배 얘기 장난 아닌데. 막 다들 우리 학교 나왔다고.”
“바쁘니까 이만 갈게.”
“사인 한 장만 해주시면 안 돼요?”
원래 이렇게 대화가 불가능한 애였는지 의문이 들었다. 내 기억 속에는 그냥 조금 시끄러운 착한 후배로 기억되어 있는데. 아니면 몸에서 열이 끓는 바람에 괜히 내가 더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걸지도 몰랐다.
“사인 없어.”
“그냥 대충만 이름만 써주세요.”
싸인 없다는 사람을 붙들고 후배가 막무가내로 가방에서 공책을 꺼내 내밀었다. 이 상황에서 안 해주고 가기도 뭐 해서 짜증이 머리끝까지 올랐지만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며 건네주는 펜을 잡았다. 사람이 컨디션이 안 좋으니까 성격이 포악해지는구나 싶어 빨리해주고 갈 생각이었다.
“이름이 뭐라고?”
“김정한이요.”
이름 석 자를 대충 휘갈겨 적으며 진지하게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는지가 궁금해졌다. 데뷔한 아이돌도 아니고, 그냥 프로그램 나오고 있는 참가자일 뿐인데 내 사인이 왜 필요한 건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덕담도 하나 써주세요.”
쓸데없이 디테일한 설정을 요구하는 후배 때문에 더 긴 시간이 소요됐다. 항상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열심히 사세요. 온점까지 깔끔하게 찍고 펜 뚜껑을 닫아 돌려주는데 예상 밖의 일이 생겼다.
“헐, 대박. 진짜야.”
“미쳤다 진짜. 아직도 우리 동네 사나 봐.”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오길래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린 것이 시작이었다. 옆으로 옮긴 시선에는 이쪽을 향하고 있는 휴대폰 카메라가 들어왔다. 정신을 차려보니 주변에 하교하던 학생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길거리에서 사인을 해주고 있는데 눈이 안 갈려야 안 갈 수가 없다는 걸 왜 생각을 못 했을까.
정말 공인이 된다면 익숙해져야 할 광경이었으니 크게 상관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열과 짜증이 함께 올라있는 사람이었고, 병원으로 가는 길은 꽉 막혀있는 상태였다. 여러모로 번거로운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황급히 마스크를 최대한 올려 쓰고 고개를 숙였다.
“지나가겠습니다.”
“저도 사인해주세요!”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싶었지만 자라나는 청소년의 동체 시력을 얕봐서는 안 됐다. 이름 몇 자 적어주는 사인이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곤란했다. 마음 같아서는 번호표라도 나눠주고 감기가 다 나으면 찾아오라고 해주고 싶었지만 그런 건방진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선배.”
갑자기 팔을 잡아 오는 손에 깜짝 놀라서 옆을 돌아봤을 때 보인 것은, 사인을 조르던 후배가 아닌 지구였다. 다른 학생들처럼 하교하는 중이었는지 단정하게 교복을 입고, 꽤 무거워 보이는 책가방을 메고 있었다.
“지금은 조금 곤란하니까 지나갈게요.”
지구는 아주 침착하게 학생들을 뒤로 물려 지나갈 틈을 만들었고, 길을 막고 있던 학생들은 더는 다가오지 않았다. 아직 아이돌도 아닌 일반인에게 이성을 잃고 달라붙을 정도로 사인이 필요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조심스럽게 길목을 빠져나온 지구가 팔을 살짝 놓았다. 자유로워진 몸이 갈 곳을 잃고 방황하며 기울어졌다. 갑작스러운 내 비틀거림에 당황한 듯 지구가 바로 몸을 받쳐줬다.
“괜찮으세요?”
“어?”
“일단 병원부터 가야 할 것 같은데.”
이마를 만져본 것도 아니고, 얼굴만 빤히 쳐다보고 알아차릴 정도면 겉으로도 티가 꽤 많이 난다는 건데 왜 아까는 아무도 몰랐을까. 코앞에서 얼굴을 맞대며 싱글싱글 웃었던 후배조차도 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던데.
“병원 가려고 나온 거야. 하교 시간인 줄 몰랐지.”
최대한 같은 학교 학생들이랑 접촉하기 싫어서, 일부러 산책도 밤에만 나가는데. 참았던 숨을 한 번에 내뱉으며 마스크를 턱까지 끌어내렸다. 갑자기 공기가 갑갑했다.
“진짜 학교에서 학생들이 내 얘기 많이 해?”
조금 전 후배에게 들었던 말을 생각하며 나도 모르게 지구에게 두서없이 물었다. 정말 뜬금없는 물음에도 지구는 되묻는 대신 덤덤하게 대꾸를 해줬다.
“네. 선배 우리 학교 출신이라고, 저한테 실물도 물어보고 그래요.”
실물은 또 왜 물어봐. 웃음이 나오려는데 지구가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저는 선배 춤 진짜 좋아해요.”
“왜 매일 그 소리야.”
“춤 선도 좋고 표정 연기도 좋아요.”
갑자기 또 칭찬을 줄줄이 늘어놓길래 손을 대충 휘저으며 그만하라고 말렸다. 얘는 칭찬 로봇도 아니고 틈만 나면 내 춤에게 좋다고 고백을 했다.
“원하던 대학교에 갔든 못 갔든, 선배 춤은 바뀌지 않잖아요. 이렇게 다시 무대에 오르시는 것만 해도 대단해요.”
아, 얘도 같은 학교니까 내가 실기 망친 걸 알고 있구나. 애가 착해서 위로해주는 거겠지. 당장이라도 내 두 손을 꼭 잡아 올 것처럼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하는 얼굴을 쳐다보며 묻고 싶은 말들이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다. 그래도 굳이 묻지 않고 참은 이유는 그 말 하나가 우울했던 기분을 괜찮게 만들어줬기 때문이었다.
동글동글한 눈이 이쪽을 빤히 바라봤다. 그 단정한 얼굴과 마주치자마자 목구멍이 울렁였다.
대학이 뭐라고. 학교의 명성이 내 가치를 대신해주는 것도 아닌데 그때는 왜 그랬더라. 스스로가 왜 그렇게 미웠을까. 기대를 얹어주는 건 쉽고 부응하는 건 아주 힘들었다.
“……선배?”
지금 우는 건 머리가 아파서, 열이 올라서 머리가 띵해서, 쓸데없이 감정이 요동쳐서다. 몸이 아프면 머리까지 약해지는 모양이다. 잘 극복해서 덮어놓은 일을 갑작스러운 감기가 다 끄집어내서 망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