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딩동. 그렇게 가만히 누워있는데 얼마 안 돼서 초인종이 울렸다. 부녀회장님이라도 오셨나 싶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연 현관문 앞에는, 아까 갔던 지구가 여전히 교복을 입고 책가방을 멘 상태로 서 있었다. 아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손에 들린 죽 정도.
“저녁도 안 드시고 주무실 것 같아서 사 왔어요. 약 먹으려면 필요하니까.”
숨소리가 거친 걸 보니 급하게 다녀온 모양이었다. 굳이 이럴 필요 없는데, 당황스러워져서 손을 내저으려는데 지구가 죽이 담긴 종이백을 손에 쥐여줬다.
“뭐 좋아하시는지 몰라서 무난한 야채죽으로 사 왔어요.”
“야, 야. 잠깐만. 기다려봐, 돈이라도.”
“선배.”
현금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찾아라도 보려고 몸을 트는 순간 지구가 살짝 잡아 왔다. 팔을 잡은 그 상태 그대로 숨을 몇 번 고르더니 입을 열었다.
“저, 춤에는 자신이 없어서 힘들었거든요. 근데 선배 춤 보고 온종일 생각났어요. 저렇게 추는 사람도 있구나 해서. 대회 나가실 때마다 꼬박꼬박 챙겨보고, 뒤에서 많이 응원했어요.”
갑작스럽게 후다닥 쏟아지는 커다란 말들을 주워 담을 틈도 없이 또 다음 목소리가 쏟아졌다.
“저는 대입 준비를 안 해봐서 다 안다고는 못하겠지만 우리 학교 부담은 다 학생한테 몰아주잖아요. 그 사이에서 저였어도 못 버텼을 거예요. 선배가 약한 게 아니라, 주변 환경이 약했던 거겠죠.”
저런 말들은 다 골라서 오는 건지. 내가 듣고 싶은 말 리스트에서 복사라도 해온 것 같았다.
“저 처음으로 형 빼고 동경해본 사람이 선배예요. 그 정도로 저한테는 대단한 사람이니까 기죽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이게 마지막 말이었는지 지구가 바로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계단으로 뛰어 내려갔다. 가방 무거울 텐데, 엘리베이터 타지. 잘 말해놓고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뛰어가고 그러냐. 아까 비운의 선밴지 뭔지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괜히 위로하게 만든 것 같았다.
“엄청 그렇게 기죽어 있지는 않은데…….”
현관문을 그대로 열어두고 한참 혼자 웃었다. 힘없는 웃음소리가 복도 가득 한참 울리고, 사람들이 미친 줄 알까 봐 잠시 뒤에 문을 닫았다.
식탁에 앉아 여전히 손에 들려있는 봉투에서 죽을 꺼냈다. MSG가 팍팍 쳐진, 인스턴트 음식에 길든 입맛은 죽과 아주 상극이었다. 게다가 야채라니 끔찍하기 그지없었지만 아무 생각 없이 뚜껑을 열어 숟가락으로 한 입 먹었다. 따뜻하긴 했다.
고마운 마음이 담긴 죽을 다 비우고 약을 먹었다. 그리고 푹 자고 일어나니 몸이 한결 가벼워진 것 같았다. 대체 얼마나 잤는지 또 밤이었고 조용히 휴대폰을 확인해보니 새로운 문자가 도착해있었다.
[정한이가 너 봤다고 해서 다시 연락한다.]
[싫으면 잠깐 와서 나랑 애들만 보고 가도 되니까]
[주소 보낸다]
전대환이 보낸 문자에 적힌 곳은 학교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치킨집이었다. 치킨집치고 규모가 크고 인테리어도 깨끗해서 대학생들이 모임 장소로 자주 애용하는 곳 중 하나였다.
지금은 자정을 막 넘긴 시간이었고, 홈페이지에는 기다렸다는 듯 티저 영상들이 하나씩 올라오는 중이었다. 11시부터라는걸 보니 아마 지금쯤 한창 달리는 중일 것 같았다. 그래서 조용히 침대에서 일어나 씻고 옷을 챙겨 입었다.
치킨집에 도착해서 문을 열자마자 달려있던 종이 요란하게 울렸다. 이미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는 테이블들은 아무도 들어온 사람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시선을 이리저리 옮겨보니 저 안쪽에 익숙한 모습들이 보였다. 테이블을 몇 개나 붙인 건지 대규모의 인원이 다닥다닥 붙어 술잔을 기울이는 중이었다.
“헐? 야, 박하현 왔다.”
가장 먼저 눈이 마주친 반장이 크게 소리를 치며 양옆 아이들을 흔들었다. 동시에 모든 시선이 이쪽으로 꽂혔고 다들 제각각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놀라서 술잔을 쏟은 애도 있고, 치킨 다리를 떨어뜨린 애도 있었다.
애써 기억속에서 지웠던 얼굴들이 속속히 떠올랐다. 다 작년과 다를 게 없어서 알아보기 어렵지 않았다. 그 황당하다는 시선 속에서 어색하게나마 웃어 보였다. 누가 봐도 불행해 보이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있는 애들에게 지금은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야, 너 연락도 없고!”
“무슨 프로그램 나오더니 페북은 탈퇴하고. 놀랐잖아!”
친구들이 자연스럽게 테이블 중앙으로 나를 끌었다. 일부러 신경 써서 차려입고 온 코트가 이곳저곳에서 잡는 손길 때문에 구겨졌다. 오래 있을 생각은 없었지만, 일단은 이끄는 대로 자리에 앉았다. 끊임없이 비꼬고 비난했던 애들은 왼쪽 끝 테이블에 모여있었다.
“너 요즘 인기 진짜 많더라. 대학 동기들한테 너랑 같은 반이었다고 하면 인기 장난 아니야.”
“데뷔할 거 같던데? 사인해주고 가라.”
쟤 전날에 쓰러졌대. 대박, 독하게 하더니? 분명 측은했던 시선이 언제 그랬냐는 듯 돌변했다. 한잔하라며 내미는 술잔을 거절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저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대학 떨어지고 충격받아서 아이돌 하는 거야? 너무 충동적인 거 아니냐?”
“근데 아이돌은 재수 안 해도 되니까. 그래도 잘 된 것 같네, 야.”
“축하한다.”
또 시작이네. 뭔가 이상한 말투에 바로 옆자리에 앉아서 이것저것 물어보고 난리를 치던 전대환이 적당히 하라며 툭 쐈다. 그 정도에 다물 애들이면 그 당시에 그렇게 나한테 스트레스를 주진 않았겠지.
“인철이가 너랑 대학같이 못 갔다고 얼마나 아쉬워했는데.”
“야, 하지 마.”
대학 얘기에 민감한 것을 아는 애들이 급히 눈치 없는 반장의 입을 틀어막았다. 분위기가 싸해졌지만 이제 그 정도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마음을 비우던 반년 동안 달라진 게 있으니까.
“근데 난 하현이가 아이돌 한다고 했을 때는 솔직히 놀랐어. 좀 더 전문적인 걸 할 줄 알았지.”
지금은 대입에 실패한 열아홉도 아니고, 열도 없었다. 그러니까 가만히 듣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어쨌든 춤추는 일이잖아.”
애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집에 가면 그만이었다.
“프로그램 나오고 생각해보니까 대학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더라고. 다른 길도 충분히 많은데 왜 그렇게 집착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잘 모르겠어. 춤으로 성공하는 길이 꼭 예대 진학은 아니잖아.”
아직도 이런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는 정인철과 한 번 시선을 맞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용히 내 말을 듣고 있던 애들이 어딜 가냐며 잡아 왔지만, 지금은 이걸로 충분했다. 집에 가서 티저나 한 번 더 확인해봐야겠다.
“쓸데없는 걱정은 안 해도 돼. 충분히 즐겁게 하고 있어.”
“왜 벌써 가. 한 잔 받지.”
“돈도 안 냈는데 왜. 그냥 얼굴 보려고 온 거야.”
다 잘 살고 있는 것 같네. 바로 걸음을 옮겨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나왔다. 차가운 공기와 접촉하자마자 따라 나온 전대환이 팔을 잡았다. 일 년 전보다 조금 성숙해진 얼굴을 보다가 그대로 손을 떼어내고 갈 길을 갔다. 이대로 옛 인연들은 다 끝낼 생각이었다.
잘했다. 스스로를 끊임없이 칭찬해주며 집으로 가는 길이 유독 길었다.
* * *
오늘은 여러모로 중요한 날이었다. 3차 미션 결과 탈락자와 생존자가 나뉘고, 마지막 4차 미션의 내용이 약 한 시간 뒤에 밝혀지니까.
고작 3일 동안 이루어진 티저 투표는 생각보다 더 엄청난 결과를 낳았다. 투표수는 블라인드 처리 때문에 알 수 없었지만, 전체적인 조회 수나, 달린 댓글 수만 봐도 현재 프로그램 화제성이 어느 정도인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예준 씨. 대체 그런 티저는 어떻게 만든 거예요.”
동창회 자리를 박차고 나와서 집에 도착하자마자 올라온 티저들을 확인했는데, 그중에서도 예준의 것이 유독 조회수가 솟아올라 있었다. 한 번 클릭하면 최소 다섯 번은 봐야 나갈 수 있는 마약 영상이라길래 궁금해서 눌러봤다가 나도 거의 5분이라는 시간을 소비했다.
“형 원래 그런 거 잘해요.”
분명 예준에게 물어봤는데, 대답은 다른 목소리로 들려왔다. 언제 왔는지 옆자리에 살짝 앉은 사람은 나에게 죽을 안겨주고 튀었던 지구였다.
“지구야.”
“아, 안녕하세요.”
그냥 이름만 불렀을 뿐인데 지나치게 움찔하며 말까지 더듬었다. 갑자기 정성스러운 위로를 다다다 뱉어내고 도망쳤던 게 아직도 부끄러운 것이 분명했다.
한참 내 시선을 피하면서 예준과 몇 마디 대화하더니 결심한 듯 갑자기 고개를 이쪽으로 돌렸다. 동그란 눈은 더는 쑥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몸은 괜찮으세요?”
“응. 아, 죽 잘 먹었어.”
요즘 파는 죽은 MSG 조금 쳐서 만든다고 하던데, 어쩜 그렇게 건강한 맛이 나던지. 종이백에 적힌 걸 보니 학교 근처에 새로 생겼다는 곳 같던데 다시 사 먹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지구 덕분에 장장 반년 만에 건강한 음식을 섭취하긴 했다.
“입에 맞으셨어요?”
“어, 맛있더라.”
편의점 음식, 인스턴트, 간편 조리 식품이 아니면 입에도 대지 않은 입맛을 굳이 밝힐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대충 얼버무렸다. 사실, 이 나이 먹고 편식하는 게 부끄럽기도 했다. 아무래도 슬슬 건강하게 먹으려고 노력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언제까지 채소랑 거리를 두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웬 죽?”
“선배 아프셔서 사다 드렸어.”
“진짜? 아프셨어요?”
“그냥 감기 조금요.”
“아, 환절기라 감기가 유행인 것 같더라고요. 지금은 괜찮으신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이제 데뷔 마지막 문턱이잖아요. 몸 관리 잘해야 하는 시기에요.”
예준의 말의 중압감이 생각보다 컸다. 데뷔로 향하는 마지막 단계라는 걸 남의 입으로 들으니까 더 실감이 났다. 오늘의 발표로 살아남은 12명이 마지막으로 코앞에 데뷔를 놓고 치열하게 다툴 터였다.
잘할 수 있겠지. 마지막, 코앞이라는 단어는 그리 편한 느낌을 주지는 못했다. 입시의 악몽이 도전을 두렵게 느끼도록 만들어놓은 것 같았다.
“근데 야, 나한테도 좀 그렇게 해봐라.”
“뭘요?”
“나 아플 때는 병원 가세요, 하고 말더니. 누구는 죽도 사다주고. 좀 서운하네?”
“형.”
“온지구 이거 업어 키운 은혜를 모르네. 너 내가 알려준 기술들 다시 뱉어내.”
조금 심장을 조여오는 것 같던 느낌은 얼마 가지 못해 풀렸다. 지구의 목을 장난스럽게 조르는 예준과 푸스스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니 긴장을 하려야 할 수가 없었다. 그때는 주변이 건조했다면 지금은 아니었다. 성공해야 한다며 압박을 주는 학교도 없었고 멋대로 기대하고 실망할 선생님들도 없었다. 이번에는 완전하게 내가 선택한 길이었다.
훈훈한 분위기도 잠시, 금방 순위 발표와 생존자들의 소감이 시작됐다. 평소 같았으면 멍하게 허공만 바라보며 껌뻑이고 있었을 시선이 지금은 정면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카메라가 앞에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탈락을 바라며 이름이 빨리 불리지 않아서 초조했던 때는 언제냐는 듯 정신이 맑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