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뷔를 피하는 방법-36화 (36/130)

#36

체리 맛 아이스크림을 들고 바로 옆에 있는 대기실로 들어가자마자 스태프가 말했다.

“고른 아이스크림은 바로 드시면 돼요.”

별로 썩 당기지는 않는데. 한 숟가락 크게 퍼 넣은 아이스크림은 굉장히 새콤했다. 무슨 맛이지, 대체. 입안에 오래 머물면 머물수록 퍼지는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오묘한 맛에 숟가락을 살짝 내려놨다. 그리고 엄마는 외계인은 왜 선택지에 없었을까, 하는 일차원적인 생각을 했다.

“어, 이거 고르셨어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온 지구의 손에는 내 것과 똑같은 체리 맛 아이스크림이 들려있었다. 전에 카페 갔을 때는 카페모카 마셨던 것 같은데.

“이거 좋아해?”

“원래 체리 좋아하기도 하고 커피 맛이 없어서요.”

“아까 맨 왼쪽에 있었는데?”

“그거 초코 맛이에요. 새로 나온 신제품인데.”

아, 냄새 한번 맡아볼걸. 색이 흐린 게 커피색 같아서 대충 넘겼는데 초코 맛이었다니. 하지만 그게 초코 맛이었다는 사실보다 그 많은 참가자 중에 딱 지구랑 같은 노래를 하게 됐다는 게 더 신기했다.

“어떤 노래 나올 것 같아?”

“체리 맛이니까 약간 거기 맞춰서 나오지 않을까요.”

“그럼 그린 티는 씁쓸한 노래?”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웃음 장벽이 낮은 건지 유머 코드가 이상한 건지 지구는 한 번 지껄여본 내 헛소리가 굉장히 신빙성 있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우리가 쓸데없이 노래를 유추해보는 동안 참가자들은 계속해서 아이스크림을 골라 들어왔다. 뒤로 갈수록 원하는 맛을 쥐고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이 생겼고 가온도 그중 하나였다.

“무지개 맛 먹고 싶었는데 누가 채갔네요.”

“그런 걸 먹는 특이 취향이 두 명이나 있어요?”

“여기 있습니다.”

민트 초코를 손에 쥐고 무지개 맛을 애타게 찾는 가온 앞에 예준이 본인의 아이스크림을 흔들었다. 입안에서 온갖 오묘한 맛이 섞이기로 유명한 무지개 맛이 예준의 취향이었는지 벌써 반이나 비운 상태였다.

한 입만 달라는 가온이나, 싫다고 피하는 예준이나 둘 다 참 재밌게 논다 싶어 즐겁게 관람하며 내 아이스크림을 지구에게 다 퍼줬다. 물론 아직 감기가 완전하게 낫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지구가 쓰던 숟가락으로 옮겼다.

“많이 먹어. 체리 좋아한다며.”

“안 드세요?”

“감기 걸렸잖아.”

“아아.”

사실 티도 안 날 정도로 거의 다 나았지만. 마지막 한 숟가락까지 지구의 통으로 옮겨주고 나니 손이 가벼워졌다.

빈 통을 앞쪽에 놓인 쓰레기통에 버리고 돌아왔을 때는 마지막 참가자까지 들어온 상태였다. 아이스크림이 정해지자 각자 앞으로 색색의 종이가 배달됐다. 나와 지구가 받은 건 방금 먹었던 아이스크림 색깔과 똑 닮은 분홍빛 종이였다.

“안쪽에 여러분이 소화해야 할 노래가 적혀 있습니다. 아아, 지금 뜯으면 안 되죠.”

아직 개봉하라는 소리도 안 했는데 봉지를 뜯던 예준이 MC의 타박을 들었다.

약 1분 동안 정말 쓸데없는 소리로 시간을 끌던 MC가 이제 열어보라며 시간을 줬다. 굉장히 상큼한 노래가 들어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분홍 종이는 나를 배신했다.

[DANA - 내일의 봄]

제목만 봐도 평화로움이 온몸으로 전해졌고, 실제로도 잔잔한 곡이었다. 특이한 목소리로 감정이 울렁이게 노래하기로 유명한 가수였다. 내일의 봄이라는 곡은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기 직전 그 시기만 되면 차트 상위권을 차지할 정도로 인기 있는 곡이라 모르기가 더 힘들었다.

적어도 댄스곡이 나와야 춤으로 커버라도 치겠는데 노래가 메인이 되면 조금 자신이 없었다. 하긴, 나 지금 춤추는 댄서가 아니라 아이돌 하려고 나온 거였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야 하는.

“개인별 연습실 제공하니까 내일부터 편하게 연습하면 돼요.”

사람이 많이 줄어든 마지막 미션이라고 개인별 연습실까지 제공해주다니 배포가 컸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노래였다. 원곡이 너무 좋아서 내가 부르는 게 사람들 귀에 먹힐지나 모르겠다. 가뜩이나 노래를 잘하는 편도 아닌데.

“아까 갑자기 형이라고 불러서 죄송해요. 카메라 때문에 선배 소리가 안 나와서, 하현 씨 하기도 그렇고.”

카메라가 꺼지고 촬영이 종료되자마자 지구가 한 말이었다. 형 소리 괜찮았는데 뭐하러 사과까지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손을 휙휙 젓는데, 어느새 다가온 예준이 부추겼다.

“이왕 그렇게 부른 김에 그냥 형이라고 불러. 누가 보면 진짜 하늘 같은 선배님이신 줄 알겠다. 고작 한 살 차이에.”

“지구 형 하는 거 보면 진짜 꼬박꼬박 존댓말 쓰긴 해요.”

“이쯤 되면 친해질 때도 됐는데.”

“그러니까요.”

지구가 존댓말을 사용하는 대상이 나에 국한된 것도 아닌데 옆에서 더 난리를 쳤다. 이쯤이면 친해질 때도 됐다는 소리를 하는 휘영을 보며 절로 어이없는 웃음이 나갔다. 그런 거로 치면 휘영 씨도 한참 같은 팀 해놓고 서로 이름도 잘 안 부르잖아요. 물론 이 소리는 속으로만 했다.

“그냥 형이라고 불러.”

고등학교 졸업했는데 계속 선배 소리 듣는 게 조금 이상하기도 했고. 언제까지 선배라고 불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내가 먼저 제안했는데 지구가 눈을 느리게 몇 번 깜빡이더니 입을 열었다.

“하현이 형.”

“어?”

“아까 부를 때는 자연스러웠는데 다시 하니까 어색하네요.”

안경테를 검지로 만지작거리며 지구가 솔직하게 말했다. 사실 나도 어색했다. 선배, 하고 불리는 데 익숙해져서 그런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부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금 말 놓기 딱 좋은 타이밍?”

“하현 씨 저랑도 놓을래요?”

지구랑 호칭 정리만 다시 했을 뿐인데 말 놓기 좋은 타이밍이라며 예준이 자연스럽게 제안했다. 예준과 말을 놓는 상상을 잠시 해봤지만, 썩 좋은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이미 은연중에 예준의 성격을 다 읽어낸 까닭이었다. 분명 형 소리를 꺼내는 순간 헛소리가 나올 게 뻔했다.

“아니요.”

“매정하시네. 저도 형 소리 듣고 싶었는데.”

“예준이 형.”

“넌 뭐야.”

형 소리가 듣고 싶다는 예준에게 나 대신 지구가 형 소리를 선물해줬다. 결국, 소원대로 귀에 못이 박히게 형 소리를 들은 예준은 그만 닥치라고 험악한 소리를 내뱉었고 지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조용히 입만 다물었다. 말 놓는 타이밍은 그렇게 흐지부지 끝났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음악 어플을 켜서 내일의 봄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노래를 잘하는 사람들도 소화하기 힘든 곡이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음색 깡패라고 불리는 목소리가 이어폰을 통해 계속 새어 나왔고, 희망은커녕 걱정만 쌓여갔다. 하지만 노래가 끝났을 때는 이상하게 오기가 생겼다.

3년 동안 하루에 춤 연습했던 시간을 생각해보자. 몇 주에 한 번씩 꾸준히 코피 쏟을 정도로 했었잖아. 연습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니까 자연스럽게 실력도 따라붙었고 3학년에 들어서는 여기저기서 엄청 늘었다고 칭찬받았을 정도로 성장했다.

고작 일 년 지났는데 그때처럼 못할 건 대체 뭐냐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노래랑 춤이 많이 다르긴 하겠지만. 노래에 대한 지식수준과 실력은 유치원생급이었다.

“형.”

집에 가자마자 악보부터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일어나자마자 지구가 재빨리 앞을 가로막았다. 말 대신 눈빛으로 이유를 물었더니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본론을 꺼내놨다.

“저랑 같이 연습하실래요?”

“연습?”

“같은 곡이니까요.”

아. 한 곡에 두 명을 붙여놓은 이유가 서로 도와가면서 하라는 뜻이었나보다. 티끌 하나 없는 얼굴을 보다가 손이 무의식중으로 뻗어 나가 머리에 닿았다. 연습생이든 뭐든 사정을 봐주지 않고 염색은 무조건 금기시되는 학교 규정에 따라 새카만 머리를, 자식을 칭찬해주는 부모님처럼 좌우로 몇 번 휘젓다가 놔줬다.

손을 떼고 나니 지구가 이쪽을 빤히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갑자기 머리는 왜 만졌지. 스스로 생각해도 조금 전 그 행동이 이해가 안 되는데 지구는 얼마나 황당할까 싶어 황급히 다시 주제를 노래로 돌려놓기로 했다.

“그래.”

“혹시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나 노래 잘 못 하는데.”

보컬이 주가 되는 노래에서 도움이 돼줄 수 있는 건 딱히 없었다. 지구가 물속에서 불러도, 누워서 불러도 나보다 잘할 텐데. 물론 조금이나마 춤을 넣을 생각이라면 당연히 도와줄 수 있었다.

“아뇨. 제가 형한테요.”

고개는 멀쩡히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상태로 시선만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웃고 있는 얼굴이 한 장의 백지처럼 깨끗해 보여서 그냥 다시 앞을 보며 몸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낯가려서 표정 관리가 잘 안 된다더니 요즘은 많이 풀렸는지 볼 때마다 웃는 얼굴이다. 사람이 웃는 얼굴이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했는데 지구는 뭔가 신기했다. 주변 신경은 조금도 쓰지 않고 호탕하게 웃어 재끼는 친구들이나, 한 번 터지면 배가 찢어지게 웃는 가족들을 보다가 잔잔하게 웃는 걸 처음 봐서 그런지 웃는 얼굴이 유독 깨끗하게 보였다.

내일 보자며 깍듯이 인사를 한 지구가 지하철역으로 사라졌다. 퇴근 시간과 딱 겹쳐서 수많은 인파 사이로 섞여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혼자 콜택시를 불렀다.

“한국예고 앞에 있는 삼진 아파트 맞아요?”

“네.”

같은 이름의 아파트들이 쭉 나열된 내비게이션을 보며 물으시는 기사님께 착실한 답변을 해드리고 바로 이어폰을 꽂았다. 집까지 도착하는 꽤 긴 시간 동안 한 곡 반복으로 내일의 봄을 계속 들으며 머릿속에 대충 느낌을 그렸다. 떨어지는 하강적인 느낌과 피어나는 따사로움이 공존하는 노래라 메인을 춤으로 삼을 수는 없어도 현대무용을 인용해서 전체적으로 동작이 작은 안무들을 넣는 건 괜찮을 것 같았다.

계속 생각나는 아이디어들을 휴대폰에 메모하며 잔뜩 막힌 도로에 멈춰 선 차의 진동을 느끼며 등을 편하게 기댔다. 그리고 내일 연습이 끝나고는 지구랑 같이 지하철을 타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교통체증이 생각보다 더 심각해서 앞으로 가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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