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뷔를 피하는 방법-39화 (39/130)

#39

“입장 7시부터 아니에요?”

“맞을걸.”

“근데 벌써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요.”

새벽 내내 계속된 연습을 겨우 멈추고 온 공연장 앞에는 이미 사람들이 가득했다. 돗자리를 펴고 앉아 아침 식사를 하는 사람 둘을 조용히 지나쳐 나무 뒤쪽으로 들어갔다.

이른 시간인데 벌써 나눔도 하는 듯 바로 앞에는 빳빳한 슬로건을 나눠주는 사람도 있었다. 슬로건 나눔을 9시부터 하나. 팬들은 참 부지런했다.

“형 건데요?”

준이 이곳저곳으로 퍼져나가는 슬로건을 빤히 바라보더니 예준을 툭 쳤다. 정말 슬로건에는 '예준아 데뷔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고, 중앙에는 프로필 사진이 또렷이 박혀있었다.

“저거 한 장 갖고 싶다.”

“생방 끝나면 많이 버리고 가지 않을까요?”

“내 슬로건이 많이 버려질 거라는 소리냐?”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죠.”

준의 말대로 저 슬로건은 방송이 끝나면 바닥에 잔뜩 널려있을 게 분명했다. 잘 챙겨서 집에 가져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한 번 열심히 흔들고 쉽게 버리고 가는 사람은 더 많았다. 유명 홈마의 슬로건도 아닌 일반 슬로건이라면 아마 더.

“한 장 주세요.”

그런데도 예준은 태연하게 모자를 눌러쓰고 걸어가 나눔 하는 분에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누가 봐도 이상하게 걸걸한 톤이었음에도 여자분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셨는지 웃으며 슬로건을 내밀었다.

“남팬이신가 봐요! 예준이 꼭 뽑아주세요.”

“네.”

뻔뻔하게 본인의 남팬 역할을 수행하고 돌아온 예준의 손에는 슬로건이 쥐어져 있었다. 다들 슬로건을 처음 보기라도 하는지 옹기종기 모여서 반질반질한 종이를 만지작거렸다.

“생각보다 뻣뻣하네요.”

“막 펄럭거릴 줄 알았는데, 현수막처럼.”

“그건 조금 비싼 거고 얘는 저렴한 거.”

“슬로건도 비싼 게 있고 싼 게 있어요?”

“재질 따라 다르지.”

덕질 처음 해보는 팬처럼 이것저것 물어오는 통에 대답해주다가 시간을 꽤 지체했다.

“슬슬 들어가야죠.”

건물 뒤쪽으로 돌아서 들어가려면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조용히 고개 숙이고 가, 숙이고.”

혹시나 누가 들켜서 난리가 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한 명도 빠짐없이 뒷문으로 잘 도착했다. 대기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우리 빼고 다 도착해있는 상태였다. 다들 예민한 상태인 게 육안으로도 확실히 보여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뭐라고 말 한마디를 꺼내는 순간 거센 눈초리를 받을 것 같았다.

리허설은 약 한 시간 뒤에 다시 시작됐다. 당일이라서 그런지 다들 어제보다 다섯 배 정도 예민한 상태였다. 당장 이 공연장 밖에는 벌써 도착한 시청자분들이 한가득한데 완성도는 원하는 대로 나오질 않으니 다들 예민하고 초조한 게 이해가 갔다.

“카메라 테스트 바로 갈게요.”

완벽하게 세팅된 무대 위로 조명들이 화려하게 터져 나왔다. 그 색색의 조명들이 혼합되는 모습을 멍하게 보고 있다가 순간 의자가 뒤로 기우뚱 넘어갔다. 귀가 먹먹할 정도로 큰 음악 소리가 갑자기 튀어나왔기 때문에.

“괜찮으세요?”

지구가 황급히 의자를 잡아준 덕분에 의자와 함께 바닥에 머리를 박는 참사는 생기지 않았다. 부딪히지도 않은 머리가 아파져 오는 것 같아서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허리를 다시 세울 때쯤에는 노래가 멈춘 상태였다.

“음향 사고인가 봐요.”

“깜짝 놀랐네.”

하다 하다 음향 사고까지 나냐. 벌써 스태프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볼륨 설정을 잘못해서 일어난 단순한 실수였지만 대판 싸움이라도 날 것 같은 살벌함이었다.

덕분에 참가자들 분위기도 단번에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고함만 울려 퍼지는 넓은 공연장에서 다들 조용히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고개를 조금 들어보니 저쪽에는 삼촌도 있었다. 뭔가 제대로 안 풀리는지 삼촌은 입술을 열심히 물어뜯는 중이었는데, 저건 불안할 때만 나오는 버릇이었다.

생방송 제대로 끝날 수 있는 건가. 음향이 제대로 안정되었는지 바로 다시 리허설이 진행됐고 내 차례가 오자마자 망설임 없이 무대 위로 뛰어갔다.

* * *

“시작 10분 전!”

메이크업까지 끝내고 가만히 앉아있던 중에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들렸다. 다들 눈치 게임이라도 하는 듯 꾸물꾸물 의자에서 일어났다.

열두 명이 전부 일어나 무대 바로 뒤로 줄지어 걸어갔을 때, 공연장 가득한 사람들을 마주했다.

“헐…… 사람 봐.”

준이 놀란 듯 입을 벌렸다. 음방 사녹 때 보러 왔던 분들의 수랑 비교가 불가능했다. 저 좁은 공간에 서 있는 사람들만 몇백은 족히 될 것 같았고 뒤쪽 좌석들까지 합치면 몇 명일지 유추도 되지 않았다. 노블 콘서트를 갔을 때는 2만 명도 잘 체감이 안 됐는데 그보다 적을 이 인원이 왜 이렇게 많아 보이는지 모르겠다.

“아까 리허설에서 했던 것처럼 해요. MC 멘트 끝나고 쭉 걸어 나가서 저기 앉으면 돼요.”

참가자들이 앉을 자리는 무대 옆쪽에 마련되어 있는데, 문자 투표수가 실시간으로 집계되는 화면 바로 맞은편에 있으니 잔인한 명당이 따로 없었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카운트다운 소리가 어디서 들리더니 MC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무대 위로 걸어 올라왔다. 시작을 알리는 인사가 나오자마자 커다란 환호 소리가 공연장을 가득 채웠다.

“올라갈 준비 해요.”

MC의 자연스러운 멘트가 줄줄 흘러나오고 막바지를 향해 가자 스태프들이 우리를 차례로 세웠다. 입장 순서도 등수별이었다. 덕분에 나는 제일 앞에 섰고, 출발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최대한 자연스럽게 걷도록 노력하며 무대 위에 나 있는 길로 걸어갔다.

“와아아아아아!”

엄청난 함성과 함께 도착한 의자는 푹신했다. 보는 눈이 많아서인지 의자에 앉는다는 단순한 행동조차 조심스러웠다. 천천히 자세를 잡고 가만히 정면을 바라보자 무대와 전광판이 한눈에 담겼다. 불과 3m쯤 떨어진 곳에는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양예준 잘생겼다!”

“하현아 데뷔해!”

수많은 응원 소리가 섞여 들리는 혼란스러운 와중에 한 팬이 엄청나게 큰 목소리로 내 이름을 외치셨다. 다들 깜짝 놀라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정도로 엄청난 목소리 크기라 들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

방금 그 목소리의 주인인 듯한 분이 손을 힘차게 흔들고 계셨지만 나는 그것보다 그 뒤에 살짝 가려진 형이 더 눈에 들어왔다.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누가 봐도 형이었다. 세팅한 머리하며, 깔끔하게 차려입은 비싼 정장까지 형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는 부분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부모님은 옆에 안 계셨다.

“감사합니다.”

입안에만 맴돌던 말을 아무도 듣지 못할 정도로 조용히 입 밖으로 냈다. 공연장이 넓어서인지, 그만큼 팬들이 많아서인지 갑자기 책임감이 들었다. 무대를 꼭 성공적으로 끝내야겠다는 책임감.

빨리하고 끝내고 싶었지만 내 무대는 하필 맨 마지막이었다. 1, 2위가 같은 곡으로 하는 두 무대는 화제성을 생각해서라도 뒤로 빼야 한다며 피디님이 정해준 순서 때문에. 졸지에 엔딩 무대를 맡게 됐고, 덕분에 긴장감이 두 배였다. 아무리 대회 무대에 많이 서봤다고 해도 이 정도로 많은 사람이 있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곧 우리의 연습 과정이 담겨 있는 VCR이 스크린에서 재생되기 시작했다. 저게 지금 방송으로도 나가고 있겠지. 중간중간 웃긴 장면이 나올 때마다 동시에 수천 명에게서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가 계속 내가 앉아 있는 장소와 위치를 상기시켰다.

“이 부분은요?”

“여기는 이렇게…….”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와 지구가 함께 연습하는 부분이 화면에 등장했다. 그리고 동시에 비명과 유사한 웃음소리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한발 늦게 화면으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 하필이면 '얘들아 듀엣 무대 아니야…….'라고 적혀 있는 자막과 아이컨택을 했다.

“아…….”

갑자기 긴장이 싹 풀리면서 현타가 오는 바람에 고개를 푹 숙였다. 여전히 웃음소리들은 멈추지 않았다. 내가 고개를 다시 들어 올린 것은 드러난 목덜미에 지구가 손을 올려놨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들자마자 마지막으로 주인을 잃은 지구의 썰렁한 연습실이 한 번 나오고 바로 화면이 넘어갔다. 드디어 화면의 주인공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에 입 밖으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 우리만 진짜 계속 같이 연습하긴 했나 보다.”

“저는 혼자 연습하는 것보다 훨씬 잘돼서 좋았는데.”

“나도 너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

워낙 주변이 시끄러워서 최대한 옆쪽으로 고개를 숙여서 지구와 한참 대화를 나눴다. 그동안 VCR은 이미 연습 과정을 다 넘기고 감동 스토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어……. 데뷔요?”

화면 속에서 울먹이는 참가자가 등장하자마자 이곳저곳에서 안타까운 목소리들이 터졌다. 예전에 찍었던 인터뷰 영상인데도 울지 말라는 위로들이 빗발쳤고, 영상은 점점 더 시청자들의 감동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꼭 데뷔하고 싶어요.”

눈물을 흘리는 참가자를 마지막으로 VCR이 꺼졌다. 물론 한참 통편집이 이루어질 때 했던 인터뷰라 내 영상은 없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열두 명의 참가자들이 남았는데요.”

VCR이 꺼지자마자 바로 입을 여는 MC의 자연스러운 진행을 들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제일 첫 무대를 여는 휘영과 같은 노래를 고른 참가자가 사라진 상태였다. 아무래도 스탠바이를 하러 내려간 것 같았다.

“일단, 오늘 심사를 맡아주실 심사위원분들이십니다.”

저 뒤쪽에서 심사위원들이 걸어오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음악 쪽에서 유명한 사람들이라 얼굴도 낯이 익었다. 신의 목소리로 유명한 솔로 가수, 내가 기어 다닐 때 데뷔한 댄스 가수, 실력파로 이미 이름을 떨친 8년 차 아이돌 멤버도 있었다. 우리가 앉은 자리 맞은편에 준비된 전광판 옆 의자에 나란히 앉은 세 명에게서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러면 첫 번째 무대부터 만나볼게요.”

간단한 소개가 끝나고 바로 무대 세팅이 이루어졌다. 눈을 동그랗게 뜬 휘영이 마이크를 차고 무대 위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남 일 같지 않아 두 손으로 주먹을 쥐며 아마 지금 이곳에서 제일 떨릴 휘영에게 속으로만 조용히 응원을 보냈다.

곧 반주가 흘러나왔다. 휘영은 내 걱정이 무안해질 정도로 잘 해냈다. 예전부터 쭉 꿈이 아이돌이었다고 하더니 정말 끼가 넘쳐 흘렀다. 무대를 완벽하게 장악해놓고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들어 박수를 쳤다. 그리고 내 박수는 무대가 바뀔 때마다 계속됐다.

춤을 못하든, 노래를 못하든 그런 건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저 넓은 무대 위에 혼자 서있는데도 위압감에 잡아먹히지 않고 자기 무대를 보여준다는 게 멋졌다. 항상 어리숙하게만 보였던 준도 훨씬 성장한 실력을 무대 위에서 아낌없이 보여줬고, 마냥 해맑은 줄만 알았던 가온도 무대에 올랐을 때는 누구보다 진지한 표정이었다.

“지금부터 실시간 문자 투표수 공개합니다.”

여섯 번째 무대가 끝났을 때, 아까부터 쭉 꺼져있던 전광판에 실시간 문자 투표수가 나타났다. 자릿수와 맨 앞 두 글자만 나오는 형식이었지만 대충 어느 정도인지 감을 잡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중요한 건 내 투표수만 딱 눈에 들어올 정도로 기괴했다. 순간 내 시력이 잠깐 사이에 퇴화한 줄 알고 눈을 비빌 뻔했다.

확실히 나만 충격인 게 아니었던 듯 주변이 전부 술렁이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자릿수를 세어봤지만 내가 남들보다 한자리가 많은 건 주변 반응만 봐도 정확한 것 같았다. 저번 주까지만 해도 투표수가 비슷했던 지구와 예준과 갑자기 확 차이가 났다. 나 하나 속이려고 대국민 사기극을 하는 중인지 의심까지 들었다.

실시간으로 끊임없이 올라가는 투표수를 보며 무섭도록 현실감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최대한 의식하지 않기 위해서 시선을 옮겼다. 그렇게 무대만 보기 위해 노력하며 힘겹게 세 무대를 더 봤을 때 지구가 말을 걸었다.

“형. 두 무대만 지나면 우리 차례에요.”

“어?”

“긴장되세요?”

“되기야 하지.”

기절하거나 도망치고 싶을 정도는 아니지만, 확실히 사람인지라 심장이 뛰긴 했다. 심장 부근에 오른손을 올려놓고 얼마나 뛰는지 재고 있는데, 지구가 왼손을 살짝 잡아 왔다.

“저도 떨리니까 같이 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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