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무대 밑으로 내려가는 도중에 다리에 힘이 확 풀렸다. 무대 위에서 마지막 엔딩 곡을 부르면서 손을 흔들 때까지만 해도 정신이 몽롱하긴 할망정 떨리거나 아주 힘들지는 않았는데.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는 줄 알고 급하게 손으로 바닥을 짚으려고 했는데 바로 뒤에 내려오던 지구가 내 셔츠를 잡아챘다.
“괜찮으세요?”
많이 놀란 듯 커진 눈으로 지구가 물었다. 잡아준 덕분에 살긴 했는데 자세가 영 이상했다. 미끼를 무는 바람에 낚싯대에 걸린 생선처럼 공중에 위태롭게 매달려있는 꼴이 굉장히 우스웠다.
“괜찮은 것 같은데 이것 좀 놔주라.”
“아, 네.”
그냥 손을 확 놔버리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지구는 몸을 조심스럽게 끌어당겨 계단 위에 똑바로 세워줬다. 겨우 다시 정신을 차리고 계단 밑으로 내려오자마자 지구가 어깨를 단단히 잡아 왔다. 또 넘어질까 봐 받쳐주는 것 같았는데, 평소 같았으면 고마웠을 그 행동이 지금은 묘하게 불편해서 발을 움직여 살짝 빠져나왔다.
“사진 찍게 들어와 봐.”
다행히 바로 우리를 호출하는 매니저 덕분에 자연스럽게 대기실로 걸어갈 수 있었다. 안쪽으로 들어온 우리를 매니저 형이 소파 위에 앉히고 손에 무언가를 하나씩 쥐여줬다.
회사 디자이너들이 만든, 우리 그룹 이름과 로고가 박혀있는 슬로건이었다. 좋게 말하면 심플한 거고, 나쁘게 말하면 성의 없는 디자인의 슬로건을 우리는 엉거주춤 펼쳐 들었다.
“붙어, 붙어. 웃고.”
화면 안으로 다 다섯 명을 집어넣기 위해 매니저 형은 본인이 뒤로 가는 대신 손을 바쁘게 움직이며 더욱 밀착하라고 명령했다. 꾸역꾸역 가운데로 붙는 와중에 지구가 내 허리에 손을 댔는데 그 사소한 행동에 나도 모르게 놀라서 몸을 비틀었다. 그 덕분에 나름 잘 뭉쳐있던 대형이 와르르 파괴됐다.
“형 왜 그래요. 벌레라도 있어요?”
“아니, 미안.”
“빨리 다시 붙어. 하나, 둘, 셋!”
내가 몸을 비튼 이유가 본인 손 때문이라는 걸 알아차렸는지 이번에는 지구 손이 얌전히 소파에 내려가 있었다. 왠지 미안하기도 하고 눈치가 보여서 사진 촬영이 끝나자마자 총알같이 일어서 테이블 위에 있던 물병을 집었다. 진짜 별것도 아니었는데 왜 그랬지. 혼자 과민반응 중인 게 너무 쪽팔려서 고개도 못 들고 물만 계속 마시다가 한 병을 금세 비워냈다.
“형 엄청 목말랐나 봐요. 이해해요. 형 아까 소감 말하면서 엄청 떨었잖아요.”
내가 목구멍에 마구잡이로 물을 붓는 걸 보며 준이 옆에서 관대한 척 어깨를 토닥였다. 사실 저렇게 말하면서 본인도 첫 무대 끝나고 앞쪽으로 걸어 나올 때 넘어질 뻔한 걸 예준이 겨우 잡아줬다. 티가 안 났으니 망정이지. 내심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슬쩍 쳐다봐주니 준이 꼬리를 내리고 휘영에게로 멀어졌다.
“아무나 로그인해서 공카에 사진 좀 올려.”
차가운 게 들어가니 얼굴의 열이 조금 물러난 것 같아서 휴대폰을 찾으러 뒤를 도는데 매니저 형이 방금 찍은 사진을 우리 단톡방에 뿌리며 말했다. 그리고 그 이상한 말에 가장 먼저 이의를 제기한 것은 예준이었다.
“공카 가입 안 했는데요.”
“가입을 아직도 안 했다고? 뭐 했어?”
“말을 해줘야 가입하든 말든 하죠. 만들어진 것도 인터넷에서 보고 알았거든요?”
날카로운 예준의 반박에 매니저가 할 말을 잃은 듯 조용히 지금 가입하자고 권유했다. 메이크업을 지우고 회식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차에 올라타서 다 같이 공식 카페에 가입했고 그동안 지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옆자리에 앉긴 했는데 귀에 이어폰을 꽂고 뺄 생각을 안 해서 계속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형 가입했어요? 저 지금 글 하나 쓰려고 하는데.”
“어어.”
“저 형은 가입 안 하고 뭐 한데요? 형이 해줘요.”
뒷자리에서 준이 내 팔을 톡톡 치며 지구를 도와주라고 재촉했다. 옆을 슬쩍 보니 지구는 닉네임 칸을 채우지 않은 채로 화면만 쳐다보며 멍을 때리고 있었다.
“지구야.”
“네?”
팔을 아주 살짝 건드리며 불렀더니 깜짝 놀란 듯 이어폰을 뽑는 게 빨랐다. 거칠게 뽑힌 이어폰이 바닥에 떨어지려고 하길래 바로 팔을 뻗어 잡은 뒤에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이상하지만,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얘도 상태가 영 이상하다.
“가입 안 해?”
“아, 닉네임이.”
“앞에 그룹 이름 영어로 쓰고 뒤에 이름 세 글자.”
“죄송해요. 아까 잘 못 들어서.”
“아니야.”
가입부터 멤버로 승격되는 과정까지 봐줄 때쯤 차가 캄캄한 지하주차장에 섰다. 사장님이 말한 고깃집이 공연장에서 얼마 멀지 않았는지, 생각보다 더 빠른 도착이었다.
분명 저렴한 식당에 왔겠구나 싶었는데 내부는 생각보다 고급스러웠다. 룸 형식으로 되어있어서 편하게 먹기에도 딱 좋았다. 물론 이 넓은 룸에 있는 건 우리를 포함해 일곱 명뿐이었다. 사장님이 회사 직원이나 스태프를 챙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회식 자리에 정말 딱 그룹 멤버와 매니저뿐이라니. 삭막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많이들 먹어. 좀 비싼 곳이긴 하지만 부담 갖지 말고.”
“네…….”
사장님은 부담 팍팍 가지라고 앞에 사족까지 붙여주는 정성을 보였다. 이걸 반어법이라고 하나. 하기야 한우라는데 아까울 법도 했다. 대충 냉면이나 시킬까 했는데 우리 팀에는 생각보다 강적이 있었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사장님 정성 봐서라도 많이 먹을게요!”
방긋방긋 웃은 준은 망설임 없이 비싼 부위만 손으로 짚어가며 주문했다. 지금까지 못 먹은 게 한이 쌓여서 일부러 저러는 게 분명했다. 본인이 많이 먹으라고 말해놓고 방금 한 말을 취소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사장님은 어색한 미소만 지으며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중간에 시키면 끊기니까 처음부터 많이 시키는 게 좋죠?”
“보통 그렇게들 많이 드세요.”
예준마저 가담해 속이 뻔히 보이는 물음을 직원에게 던진 뒤 상상을 초월하는 양을 시켰다. 이렇게라도 지금까지 일한 값을 받아내겠다는 두 사람의 의지가 얼마나 멋지고 대단했는지 사장님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주세요.”하고 주문의 마침표를 찍었다.
“내일 밤에 사녹 있으니까 음주는 안 돼.”
“아, 그럼 저 음료수요.”
“여기 사이다도 열 병 주세요.”
추가로 주문하자마자 초록색 병이 무더기로 테이블에 도착했다. 다 마실 수 있냐고 사장님이 물었지만 준은 두말하면 잔소리라는 듯 신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정말 다들 며칠 굶은 거지들처럼 먹었다. 불판 위로 올라가기만 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지는 고기에, 기가 죽은 사장님은 매니저와 함께 옆 테이블로 옮긴 지 오래였다.
“많이 드세요.”
그 전투적인 현장에서도 지구는 쉽게 고기를 건져내 내 접시 위로 산더미처럼 쌓아줬다. 인스턴트가 아니면 금방 질리는 타입이라 얼마 지나지 않아 배가 불러왔고, 내부가 따뜻해서 잠까지 쏟아졌다. 여기서 잠들어버리면 무슨 민폐인가 싶어 젓가락을 내려놓고 세수라도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세요?”
“세수하려고.”
뜨끈뜨끈한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룸에서 나오자마자 화장실이 보였다. 깨끗하고 넓은 화장실에서는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세면대 앞에 서서 최대한 차가운 물을 틀어놓고 과격하게 세수를 시작했다. 어느 정도 잠이 깼다 싶을 때 물을 끄고, 세수하느라 살짝 젖은 앞머리를 털어내는데 거울에 익숙한 얼굴이 비쳤다.
“많이 피곤하세요?”
조금 전까지 고기 먹으면서 잘 앉아있던 지구가 세면대 앞에 서서 물을 틀었다. 혼잣말로 끈적끈적하다고 중얼거리는 걸 보니 아무래도 손에 사이다를 쏟은 것 같았다.
“다들 피곤하겠지. 무대 위가 생각보다 더 위압감이 심하더라. 너는 괜찮아?”
“예전부터 꿈꿨던 상황이라 머릿속으로 상상 많이 했었는데…… 직접 다가오니까 현실감이 없더라고요. 꿈같았어요.”
웃는 얼굴이 맑았다. 서바이벌 ID 촬영할 때, 무겁게 소속사 이야기를 뱉어내며 괴로워하던 얼굴과 눈앞에서 웃고 있는 얼굴이 겹쳐졌다. 왠지 나까지 기분이 좋아져서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근데 형 아까 무대 올라가기 전에 저한테 하실 말씀 있다고 하셨잖아요.”
시원하게 콸콸 쏟아지던 물소리가 뚝 끊겼다. 벌써 다 닦은 건지 지구가 공중에 손을 몇 번 털어내며 묻고 있었다.
“아……”
내가 말해놓고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돼 있는데. 하지만 나중에 다시 말하자고 하기도 이상한 상황이었다. 결국, 잠깐의 고민 끝에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우리 다 같이 술 마셨던 날 있잖아. 너 술 취해서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
“제가 형한테 고백한 거요?”
“어, 그래 그…… 거?”
자연스럽게 지구의 말을 받다가 문득 느껴지는 이상함에 고개를 들었다. 지구는 전혀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표정으로 대꾸하고 있었다.
아니, 기억 안 난다며. 이미 머리로는 바로 앞까지 다가가서 멱살을 잡고 흔들고 있었지만 정작 발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난 상태였다.
“제가 한 말인데 당연히 기억해야죠.”
“너 그때 안 취해있었어?”
“아니요. 처음부터 끝까지 취해서 한 말이었는데요.”
“아, 그러면 다 취해서 막 나온 헛소리라는 거지?”
“그것도 아니요. 취중 진담이었어요.”
놀랍게도 솔직한 대답에 할 말이 다 사라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바싹 마르는 입을 애써 움직이며 침착하게 다음 말을 골랐다.
“너도 참 춤이 얼마나 좋으면 사람까지 좋아져.”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그것도 맞네요.”
“아니, 원래 뜻은 뭔데?”
“형도 알고 있으니까 피하신 거 아니에요?”
이것도 묘하게 할 말이 없어지는 질문이라 절로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꾹 다물렸다. 그래도 설마설마했는데. 취중 진담이라고 했으니까 없는 말을 한 것도 아니라는 거고, 단순히 사람이 좋다는 의미도 아니라는 거면 남은 답이 너무 명확했다.
“……기억나는데 왜 모르는 척했어?”
“제 실수로 일어난 일이고 형이 모르는 척하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아서 말 안 하려고 했어요. 근데 먼저 물어보셔서 하는 말이에요. 거짓말하기 싫어서요.”
적당히 낮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하는 게 누가 봐도 지구였는데, 무표정 때문인지, 하는 말 때문인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앞으로는 형 곤란하게 할 일 없을 거예요. 술 마시고 고백할 일도 없을 거고.”
그래, 하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뭔가 혼자서 다 끝내는 것 같은 분위기에 당황스러워서 뭐라도 한마디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묵직한 한마디가 툭 떨어졌다.
“그래도 좋아하는 건 하고 싶은데 안 될까요?”
조금 전까지 무표정하던 얼굴이 지금은 웃고 있었다. 아, 내가 쟤한테 대체 뭐라고 해야 하지. 무엇보다 나는 남자인데. 지구가 본인의 성별과 나의 성별, 둘 중 하나를 잊었을 리는 없었다. 지금까지 받아본 고백 중 상대가 남자였던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편견은 없었으나 난생 처음 겪어보는 상황이 생각보다 더 당황스러워서 입안이 바싹 말랐다.
쟤가 나를 왜? 차라리 내가 지구를 좋아하는 거면 이유라도 있지, 이건 마땅한 이유도 없었다. 살뜰하게 챙겨준 것도 아니고 특별하게 잘해준 적도 없는데.
아무리 혼자 생각해봐도 납득할 수가 없어서 대화가 오래 끊겼다. 지구는 내 대답을 들을 때까지 나갈 생각이 없는지 그 자리에 계속 서서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꽉 막힌 목에 힘을 줘서 대답했다.
“……그런 걸 무슨 허락을 받아.”
“그럼 된다는 소리네요. 부담스럽게 안 할 테니까 피하지 마세요.”
그제야 지구가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 보니까 여기 화장실이었구나. 뒤늦게 귓가로 부드러운 클래식이 파고들었다.
한참을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어서 뿌리내린 나무처럼 서 있다가 겨우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중간에 정신이 다 혼미해져서 고개를 한 번 거칠게 털어내다가 목이 빠질 뻔했다.
“형 얼른 와서 더 먹어요!”
처음 시킨 게 모자랐는지 돌아왔을 때는 더 쌓인 고기를 앞에 두고 준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자리에 앉으면서 살짝 눈이 마주쳤다. 분명히 피하지 말라고 한 게 떠올라서 3초 정도 가만히 바라보다가 시선을 치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