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뷔를 피하는 방법-49화 (49/130)

#49

오후 5시 30분이 조금 넘어서 도착한 곳은 회사였다. 오늘 하루 종일 스케줄이 꽉 차 있어서 바쁘다더니 회사는 왜 온 건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매니저를 따라 들어간 연습실은 평소와 다른 분위기였다. 구석에 다섯 명이 족히 앉을 크기의 소파도 놓여 있었고, 지저분한 거울도 깨끗하게 닦여 있었다.

“여기서 뭐 찍어요?”

이유는 조금만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었다. 여기서 뭔가 진행을 하니까 저렇게 관리를 해놨겠지. 매니저가 손목시계를 힐끔 쳐다보더니 우리를 연습실 구석에 놓인 소파에 차례로 앉혔다.

“조금 전에 공식 유튜브에 너희 뮤직비디오 올라갔고, 이따가 6시 정각에 음원 발표될 거거든?”

“네.”

“그래서 6시 정각에 바로 브이앱 켤 거야.”

“…….”

그리 넓지 않은 연습실에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았다. 브이앱이면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건데 그걸 지금 말해주면 어쩌자고. 어차피 거의 팬들만 시청하는 방송이니 가볍게 해도 괜찮겠지만, 당장 남은 시간이 30분도 채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음원이 6시 정각에 나오는데 브이앱을 그때 켜면 노래를 못 듣는 게 아닌가.

“아, 형! 그런 건 미리미리 말해줘야죠. 저희 뭐 할지 생각도 안 했는데.”

“대충 진행은 이거 보고하면 돼.”

미리 준비해둔 진행 카드가 있는 것 같긴 했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방송 시간은 무려 1시간이었고, 그 긴 시간의 절반을 우리 토크로 채우기는 턱도 없었다.

“이왕이면 지금 바로 팬덤 이름도 발표해버려.”

“안 정했잖아요.”

“우리 전에 정하지 않았어?”

“설마 흥청이 말하는 건 아니죠?”

영양가 없는 대화들로 아까운 시간들을 흘려보내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자세를 잡았다. 정말 6시 정각이 되자마자 카메라가 켜졌고,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채팅들이 고스란히 보였다. 일단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인사부터 했는데 다섯이서 하나도 안 맞아서 저절로 파도타기가 됐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어, 저희가 오늘 처음으로…….”

일단 리더랍시고 예준이 나서서 말을 이끌어가다가, 안 되겠는지 슬쩍 눈빛을 보냈다. 다른 그룹들은 한마디라도 더 하려고 카메라 앞으로 몰려드는 판국에 우리는 서로에게 진행을 미루는 이상한 상황이 연출됐다.

“지금 막 저희 음원이 올라왔대요.”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진행을 떠맡았다. 휴대폰으로 뮤직 어플을 켜서 방금 올라온 음원들을 재생하자 그 뒤로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서로의 목소리를 칭찬하기도 하고 기계음으로 바뀐 예준의 목소리를 놀리며 기나긴 방송 시간을 어느 정도 흘려보냈다.

“타이틀곡을 만들 때 있었던 비하인드요?”

음원을 싹 듣고 나니 이제는 채팅창으로 눈을 돌렸다. 수없이 올라오는 팬들의 채팅 중에서도 적절한 것만 쏙쏙 뽑아내는 준을 보며 잘한다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었다.

“이거 가사를 지구 형이 썼거든요. 형. 어떤 마음으로 썼어요?”

“데뷔 준비하던 시간 동안 느꼈던 감정들을 고스란히 적었어요. 멤버들 얘기도 다 녹아들어 있어요. 다 같이 공유했던 감정들이거든요.”

아무리 생각해도 지구는 말을 참 예쁘게 잘했다. 나중에 은퇴하고 나면 싱어송라이터를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을 정도로 가사도 예쁘게 잘 쓰고. 노래를 만든다면 멜로디도 분명 예쁠 것 같았다.

“어, 그러면 다음 질문이…….”

다음 질문을 고르기 위해 채팅창을 바라본 준이 말을 쭉 흐렸다. 마땅한 질문이 없는 듯 곤란한 기색으로 계속 말을 끄는 모습에 다 같이 고개를 앞으로 빼 채팅창을 살폈는데 그럴 만도 했다.

[오빠들 다이어트하는 거 진짜에요???ㅠㅠㅠㅠ]

[안태민이 다이어트 시키는거 아니죠?]

[oppa 다이어트 하는가? 지금도 충분히 마른]

[디렉터들 있죠?? 안무 하현오빠가 고친건 뭔가요ㅠ]

[ATM 일 잘하고 있는건가요? 착취당하고 있다면 손가락하트 해줘요ㅠㅠ]

강제 다이어트 시킨 건 언제 어떻게 퍼진 건지 벌써 채팅창을 점령하고 있었다. 다이어트나 ATM이 일을 똑바로 하고 있는지 등의 질문들이 태반이라 나머지 질문들이 다 묻혀 보이질 않았다. 결국, 준이 과감히 질문을 포기하고 저 옆에서 아이패드를 집어왔다.

“그럼 저희 뮤비 한 번 볼까요?”

이럴 때 보면 준이 제일 눈치가 빨랐다. 갑작스럽긴 해도 이상한 진행은 아니라 다섯이서 모여서 아이패드로 뮤비를 재생시켰다.

저예산으로 제작해서 퀄리티가 썩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색감은 마음에 들었다. 전체적으로 파스텔 톤을 사용해서 부드럽고 잔잔한 분위기의 뮤비는 약 4분짜리였다. 쉴 새 없이 코멘트를 달면서 뮤비를 감상하고 나니 채팅창은 많이 가라앉아 있는 상태였다.

“뮤비 촬영할 때 힘들었던 게 뭐냐면…….”

휘영이 자연스럽게 뮤비 촬영 비하인드를 꺼내기 시작한 덕분에 다이어트 논란은 금방 사라졌다. 재치 있는 말에 키읔으로 가득 차기 시작한 채팅창을 바라보는데 위에 있는 하트 수가 무섭게 올라가는 게 보였다. 노블 브이앱 때나 봤던 천문학적인 숫자에 새삼 실감이 됐다. 지금 이 방송을 얼마나 많은 사람이 보고 있는 건지.

“헉. 저희 음원이 지금 차트 1위래요!”

7시 정각이 조금 지난 상태에서 준이 휴대폰을 보며 감탄했다. 8개 차트에서 전부 1위를 차지한 타이틀곡을 보며 다섯 명이서 서로 얼굴 보고 눈만 깜빡였다. 수록곡들까지 싹 줄 세우기 돼 있는 걸 보며 또 두 번째로 화제성을 실감했다.

차트 1위, 수록곡 줄 세우기. 전부 다른 세상의 유명 연예인들 얘기인 줄로만 알았는데 우리가 해낼 줄은 몰랐다. 벅차오르는 기분에 한 박자 늦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할게요!”

아까 처음 인사할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다섯 명이서 딱 맞춰 화면을 향해 인사했다. 너무 길어서 어떻게 방송을 하나 싶었던 1시간은 금방이었다. 음원 차트 1위 감사 인사를 하고, 준에게 방송 종료를 하고 오라고 등을 툭툭 쳤다.

“지금까지 레브였습니다!”

준이 대표로 마지막 인사를 마치고 브이앱을 끄자마자 다 같이 소파에서 내려와 연습실 바닥을 굴렀다.

“와, 다이어트 뭐예요. 저 깜짝 놀랐잖아요.”

“김경자 샐러드인 건 대체 어떻게 아시는 걸까요.”

소름 돋는 팬들의 추리력에 당황하기도 잠시, 9시에 있을 음방 사전 녹화를 위해서 마음 추스를 시간도 없이 차를 타고 달려야 했다.

* * *

오늘 촬영은 선공개 무대 녹화였다. 당장 내일모레 방송되는 음악 방송으로, 많은 가수가 본격적으로 나오기 전에 선공개 형식으로 많이 나오는 곳이었다. 촬영할 무대는 타이틀곡 해몽과 수록곡 하나, 인트로 한 곡이었다.

“안녕하세요!”

꽤 많은 팬이 무대 앞에 서 있었는데 모두 손에 응원봉을 든 상태였다. 어제는 잘 몰랐는데 이렇게 적은 인원이 들고 있는 걸 보니 새삼 디자인이 별로라는 게 느껴졌다.

촬영은 무대마다 여러 번 진행됐는데, 주로 팬들 호응이나 응원법 때문에 재촬영이 들어갔다. 척 봐도 다른 가수들 사녹보다 팬 수가 적은데, 감독님은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계속해서 재촬영을 했고, 결국 기진맥진해진 상태로 촬영이 끝났다.

“우학, 대체 몇 번씩 한 거예요.”

“여기서 토하면 안 돼.”

무대에서 내려오자마자 준이 이보다 더 거칠 수는 없을 만큼 힘겹게 숨을 내쉬었다. 등을 쿵쿵 몇 번 두드려주고 있으니 이제는 등이 아프다며 앓는 소리를 냈다.

대기실로 돌아가기 위해 복도를 걸으면서 미안함에 준의 등을 문질러주고 있는데, 앞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누가 있나 싶어 고개를 들었을 때 보인 건 남자 다섯이었다.

맞춘 게 분명해 보이는 검은 가죽 재킷은 무대 의상 같았고, 하나같이 화려한 머리 색과 메이크업을 보니 아이돌인 것 같았다. 일반인들이 보라색, 빨간색 머리를 하고 이 시간에 여기 돌아다닐 리는 없으니까. 게다가 가슴팍에는 동그란 이름표들까지 붙이고.

아직 저쪽은 우리를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본인들끼리 떠드느라 바빠 보이는 다섯 명을 살짝 쳐다보는데 뒤에서 누가 툭 치는 게 느껴졌다.

“죄송해요. 괜찮으세요?”

“아냐. 별로 세게 안 닿았어.”

잘만 걷던 애가 갑자기 균형을 못 잡고 비틀대기에 잽싸게 손을 높이 들어 어깨를 잡아줬다. 조금 전까지 무대에서 뛰다 내려왔으니 숨이 차는 건 당연했지만 그거랑 별개로 표정이 안 좋았다.

“내가 아니라 네가 안 괜찮은 거 같은데.”

안색을 살필 새도 없이 시끄러운 목소리들이 점점 가까워졌다. 우리가 멈춰 있다고 해도 저쪽은 계속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으니 만나게 되는 건 당연했다. 다섯 명은 신나게 떠들며 걷다가 우리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준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누군지는 몰라도 어쨌든 바로 어제 데뷔한 우리보다 후배일 리는 절대 없으니 선배가 맞을 터였다. 선후배 관계가 엄격한 연예계에서, 어제 막 데뷔한 후배 그룹이 본인들 지나가는데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있으면 화가 날 법도 했다. 그래서 일단 고개를 꾸벅 숙였는데 지구는 여전히 좋지 않은 표정으로 정면을 보고 있었다.

“지구야. 반가운 건 알겠는데 인사는 좀 하자.”

“……안녕하세요.”

사람 좋은 얼굴로 웃던 멤버 하나가 묘하게 비틀린 말을 꺼냈다. 절대 호의적인 감정으로 하는 말은 아니었다. 인사 좀 하라고 콕 집어 비꼬는 말이나, 마지못해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한 지구를 보며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얘네 스페이스구나. 괴로운 표정으로 연습생 시절을 얘기하던 목소리가 속속히 떠오르며 내가 다 기분 나빠졌다.

스폰을 거절했다고 했었지. 미성년자인 애한테 강제로 스폰 몰아주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까 웃고 있는 얼굴들이 순식간에 불쾌해졌다.

“오랜만에 본다고 낯가리네. 아, 데뷔 축하해요.”

“아, 네!”

아무것도 모르는 준과 휘영이 스페이스의 말을 받아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예준 역시 알고 있는 건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인사를 받았으면 그냥 쭉 갈 길 가면 될 것을 스페이스는 그 자리에 가만히 멈춰 서서 계속 말을 걸었다.

“음악 방송 처음이에요?”

“아, 데뷔하고는 이번이 처음……”

“그럼 아직 어색하겠네요. 익숙해지면 요령이 생기거든요.”

본인들도 데뷔한 지 오래되진 않은 거로 알고 있는데도 대선배인 것처럼 이것저것 말하며 자리를 뜰 생각을 안 하더니 화살이 갑자기 나에게 넘어왔다.

“프로그램할 때 많이 응원했어요. 박하현 씨 맞죠?”

“아, 네.”

유독 화장을 짙게 한 멤버가 나에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내 손의 두 배는 될 법한 커다란 손을 잡는 것보다, 좋지 않아 보이는 지구의 표정이 백 배는 더 신경 쓰였지만 일단 잡을 수밖에 없었다. 위아래로 짧게 손을 흔드는 걸 받아주다가 바로 미련 없이 손을 놨다.

“실물이 더 잘생기셨네요. 아, 저희는 알죠?”

이미 우리가 본인들을 알고 있다고 전제를 깔아놓은 질문이 날아왔다. 하기야 스페이스 정도면 시상식에도 자주 오고 인지도도 높으니까 후배 아이돌이 모르는 게 이상했다.

근데 나는 그룹명 빼고 아는 게 전혀 없었다. 모른다고 하면 작살날 분위기였는데, 다행히 그들은 가슴팍에 이름표를 하나씩 붙이고 있었다. 대충 아는 척해주고 넘겨야겠다는 생각에 이름표를 살짝 곁눈질하고 말했다.

“선배님들 엄청 유명하시잖아요.”

“아, 뭐 그렇게까지 띄워줘요.”

“수혁 선배님도 실물이 더 잘생기셨어요.”

“…….”

하지만 슬프게도 내 말이 끝나자마자 정적이 찾아왔다. 아무래도 오답인 모양이었다.

“……저희 지금 이름표 바꿔서 붙였거든요. 실물이 잘생긴 수혁이는 저기 쟵니다.”

순하게 웃고 있는 얼굴이 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네 이름을 아는데 네가 감히 날 몰라? 같은 언어인데 귀에 절로 번역이 돼서 들렸다. 의도치 않게 자존심을 밟아 부순 것 같았다.

내가 네 이름 모르는 게 죄야? 혼자 생각하고 있는데 진짜 죄인 것마냥 쳐다보길래 그냥 입을 꾹 다물며 어색하게 웃었다. 사실 그러면서도 떨리는 입꼬리를 보는 게 묘하게 통쾌해서 어색하게 웃는 얼굴에 즐거움이 묻어나면 어쩌나 조금 걱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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