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지금 이벤트 때문에 일부러 이름표 바꿔 달았거든요.”
사녹에 와준 팬들과 뭔가 할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뭐가 어쨌거나 나는 조금도 궁금하지 않은 사실을 변명처럼 줄줄 늘어놓는 이유를 당최 알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룹 이름은 아는데.”
“아뇨,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입꼬리를 끌어내리며 사과했더니 바로 대인배처럼 용서해주는 얼굴이 떨떠름했다.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 얼굴로 괜찮다고 대답한 멤버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자기 멤버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연약한 동물이 무리로 되돌아가 안정감을 얻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저희 녹화 때문에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네. 안녕히 가세요.”
가야 한다기에 정중하게 고개 숙여 인사해줬는데, 순간 마주친 눈빛이 싸했다. 대체 왜 신인 그룹 멤버가 자기 좀 모른다고 저렇게 자존심 상해하나, 했는데 눈을 마주치고 확신했다. 지구 때문에 저러는구나.
스페이스 멤버들이 본인들 대기실로 들어가고 나서 바로 지구가 내 오른손을 잡았다. 그러더니 손가락으로 손을 살살 쓸어내리며 물었다.
“혹시 꽉 잡지 않았어요?”
“뭐가.”
“형 방금 민서진이랑 악수하셨잖아요.”
“세게 안 잡았어.”
정말 세게 잡지는 않았는데 믿지 않는 건지 한참 더 손을 살피던 지구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대체 뭐 하는 놈이길래 악수 한 번 한 거 가지고 저렇게 걱정을 하지. 짙은 눈화장 사이로 보이던 적대감 가득한 눈빛을 떠올리며 고개를 몇 번 더 저었다.
“방금 그분들이죠. 그, 스페이스……?”
갑작스럽게 지나간 돌풍에 당황한 듯 준이 눈을 깜빡이며 묻는데 예준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오른손으로 입까지 가려가며 큭큭 대는 걸 보니 사람이 미쳐도 곱게 미쳐야지 싶었다.
“형. 미칠 거면 차에 가서 미쳐요.”
“민서진 면전에 대고 수혁 선배님 잘생겼어요……. 아, 진짜. 하필 쟤네 둘이야. 하현아. 개그 해볼래?”
토크쇼 나가면 재밌겠다. 예준은 이 상황이 본인만 웃긴다는 걸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어디가 웃긴 지 조금 공유해줬으면 좋으련만, 예준은 본인의 개그 코드를 공유할 생각이 없는지 차에 도착할 때까지 혼자만 웃었다.
차 문이 열리자마자 나는 잽싸게 지구 옆자리에 앉았다. 스페이스 만나고 나서 계속 표정이 안 좋은 게 영 신경 쓰여서 자연스럽게 나온 행동이었다.
평소에도 워낙 덤덤하고 말이 별로 없는 편이라 속을 알기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지금도 그랬다. 아까 그 표정은 다 어디로 간 건지 무표정한 얼굴만 남았다. 안 좋은 기억 속 사람들을 만났으니까 당연히 기분이 안 좋겠지. 이 상황에서는 물어보는 건 고사하고 말을 거는 것도 민폐일 것 같았다.
“지구야.”
“네?”
“노래 들을래?”
아까 나한테 이어폰을 준 상태라 할 일 없이 창문에 머리만 기대고 있길래 한 말이었다. 곱게 말아서 보관하고 있던 이어폰을 손에 쥐고 내밀었더니 조용히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시트 위에 떨어져 있는 오른손에 쥐여줬는데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 꽂아주세요?”
“뭐가?”
“형이 선곡해주시는 거 아니었어요?”
웃으며 다시 내 손에 이어폰을 쥐여주는 걸 보며 잠시 상황판단이 안 돼서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같이 듣자는 소리가 아니라 너 들으라는 소리였는데. 이미 기대감 가득한 목소리로 내 손에 이어폰까지 쥐여준 상태라 싫다고 하기도 뭐해서 그냥 조용히 내 휴대폰에 이어폰을 연결했다.
그러고 보니까 얘 나 좋아하잖아. 뒤늦게 밀려온 생각에 달달한 사랑 노래를 재생하려던 손가락을 틀어 다른 곡을 눌렀다.
“힙하고 좋네요.”
귀가 시끄러울 정도로 파워풀한 랩을 귓가에 때려 박는 목소리가 거칠었다. 지구는 실없이 웃으며 선곡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정작 나는 끊임없이 나오는 영어 욕이 듣기 싫어서 볼륨을 낮췄다.
* * *
그 이후로 엄청나게 바쁜 나날을 보냈냐고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 이후라고 해봤자 고작 이틀이었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예능을 두 번, 라디오를 한 번 나갔고, 음방 사녹 촬영도 3번이나 했다. 유일하게 잘 수 있는 시간은 이동할 때가 전부였고, 꽤 긴 거리를 이동할 때면 멤버들은 단체로 신나서 목베개를 끼우고는 했다.
그리고 날이 점점 밝아오는 새벽인 지금도 우리는 한창 이동 중이었다. 음악 방송 리허설 때문이었다.
“너네가 찍은 CF 상품, 판매율이 미친 듯이 오른다더라. 여기저기서 브로마이드 품절이라고 수량 다시 찍는대.”
“그래요?”
그러고 보니 요즘 우리와 별개로 팬들도 엄청 바쁘다고 들었다. CF 촬영한 물건들 사야지, 잡지 구해야지, 앨범 사서 포카 바꿔야지 굉장히 바쁘다고. 게다가 학생들 방학 시즌이라 가게 앞에 새벽같이 줄 서 있는 일이 허다하다고.
“그래서 CF 요청이 아주 물밀 듯이 들어와. 너네 활동 기간 내내 엄청 바쁠 거야.”
“지금도 바쁜데 이거보다 더요……?”
피곤에 찌든 얼굴로 준이 기겁하며 물었지만, 매니저는 가차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딱 다섯 시간만 자면 소원이 없겠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지. 한 2주쯤 지나면 좀 잘 수 있을 거야.”
“2주……. 와, 2주…….”
준이 격하게 현실을 부정하며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30초도 지나지 않아 곯아떨어지는 모습이 거의 마술을 보는 것 같았다. 나도 자고 싶긴 한데, 요즘 들어 차만 타면 머리가 아파서 잠도 잘 안 왔다. 가만히 앉아있는 것도 힘들어서 몸을 이리저리 틀면서 최대한 편한 자세를 찾다가 의도치 않게 지구를 깨웠다.
“형, 왜요……. 어디 불편하세요?”
“어, 아니. 미안. 쳤어?”
“아니요. 근데 안 주무시고 뭐 하세요.”
깨운 게 미안해서 대충 토닥여주면서 다시 재우려고 했는데 지구는 눈을 감지 않았다. 오히려 걸치고 있던 동그란 안경을 살짝 내리더니 눈을 비비기 시작했다.
“맞다. 하현이랑 지구랑 내일 예능 촬영 잊지 말고.”
“그거 결국 나가요?”
“신인이 공중파 예능 나가기가 어디 쉽냐. 다른 것도 아니고 3사에서 온 프로인데 당연히 받아야지.”
밀려오던 두통이 싹 사라질 만큼 불행한 소식이었다. 매니저가 말하는 예능은 그거였다. ‘Chef of you’라고 화제성 있는 프로그램들이 전부 몰리는 일요일 저녁에 방송하는 요리 예능인데, 그 쟁쟁한 예능들 사이에서도 동시간 시청률 1위를 기록하는 인기 프로였다.
게스트가 나서서 요리하는 건 아니고, 그냥 셰프들이 요리를 해주면 먹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냥 맛있게 먹고 별 몇 개라고 평가만 내려주면 끝인데, 출연료도 많이 줘서 여러 연예인이 초대를 원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나는 요리 예능이랑은 완전 상극이었다. 거기서 대놓고 채소를 골라내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먹긴 해야겠고 맛있는 표정은 나올 리가 없고. 게다가 저 프로그램은 게스트 위주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정통 코스요리가 나오는 거라 따로 음식을 선택할 수도 없었다.
“못 먹는 음식 물어보길래 샐러드 못 먹는다고 얘기는 해놨어. 채소 위주인 요리는 최대한 빼달라고도 했고.”
“편식 심하다는 소리 듣고도 저를 부르시겠대요? 먹는 게 전부인 예능에?”
“너 요즘 화제성 최고야. 여기저기서 너 부른다고 난리인데. 서바이벌 ID 화제성 빠지기 전에 많이 나가둬야지. 아이돌이 팬들 빼고 대중들 눈에 각인되는 게 얼마나 힘든데.”
매니저의 말도 일리가 있긴 했다. 근데 그게 하필 요리 예능일 건 대체 뭐냐고. 인생이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입맛 좀 고쳐놓는 건데. 기억도 잘 안 나는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편식했지만, 부모님도 지적하거나 고치려고 한 적이 없어서 한 번도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하현이 형 말고 다른 멤버는 안돼요?”
“그쪽에서 쟤라고 콕 집었는데. 어차피 음식량 많지도 않을 테니까 대충 먹을 수 있을 거야.”
매니저의 단호한 대답을 들은 지구가 손을 들어 내 머리카락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고백하고 나서는 한 번도 안 하더니.
“형 토할 정도는 아니죠?”
“그 정도로 과격하진 않은데.”
“채소는 먹어야 좋긴 한데, 그것도 천천히 고쳐야 하는 건데. 정 그러면 제가 다 먹을 테니까 저한테 넘기세요.”
이 나이 먹고 식습관 안 고치고 뭐 했냐. 밀려오는 자책감에 지구의 손이 점점 얼굴로 내려오는 것도 못 느꼈다. 샐러드만 빼면 못 먹고 뱉어낼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걸 황홀하게 맛있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삼킬 수 있느냐가 문제였다. 어쩌면 촬영하는데 표정 더럽다고 태도 불량 문제가 터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이미 촬영이 결정 난 판국에 나에게 거부권은 없었다. 원래 다 싫은 일도 하면서 살고 그런 거니까. 그래서 가는 길 중간에 매니저가 사 온 아침인 제육볶음에서 일부러 양파를 집어먹고 차창에 비친 얼굴을 보며 표정을 살피는 훈련을 해봤다.
“오, 형. 별로 맛없어 보이진 않아요!”
“근데 맛있어 보이지도 않는 게 함정이다.”
“좀 웃어봐요, 형.”
결과는 조금 희망찼다. 두 번 먹고 싶은 맛은 아니었지만, 막상 먹어보니 크게 거슬리지는 않았다. 바로 옆에서 지도해주는 멤버들의 말에 따라 쉴 새 없이 입꼬리를 올려보고 나니 생각보다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왔다.
“이 정도면 그냥 막 먹겠는데요.”
“표정 관리 완벽했지.”
과한 칭찬들까지 듣고 나니 뒤늦게 쪽팔림이 몰려왔다. 이게 뭐라고 멤버들한테 다 보여주면서 연습하고 있냐. 아무래도 이번 촬영이 끝나고 나면 꼭 입맛을 고쳐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처음으로 제육볶음을 야채 하나 남기지 않고 꼭꼭 씹어 먹었다.
“오늘 첫 1위니까 수상소감 잘 생각하고.”
“에이, 형. 누가 보면 저희가 이미 1위 한 줄 알겠어요.”
“너희가 하지, 그럼 누가 하냐. 스페이스 걔들이 받으면 조작이야.”
오늘은 음악 방송에서 처음으로 1위 후보로 올라갈 수 있는 날이었다. 하필 같은 시기에 컴백한 스페이스도 오늘 1위 후보였고, 결과적으로 같은 무대 위에 서야 한다는 소리였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얼굴 맞대기 거북할 텐데. 벌써 걱정이 넘실넘실 밀려왔다.
“형, 전 사실 좀 무서워요. 스페이스 애들한테 맞으면 어떡하죠?”
“걔네한테 네가 왜 맞아. 네가 팼으면 팼지.”
“와, 형 너무하네.”
무서운 척하면서 스페이스를 비꼬려고 했던 예준의 계획은 매니저의 일침으로 물거품이 됐다.
사실 나는 두 사람의 말에 전부 동의했다. 스페이스는 진짜로 우리에게 1위를 뺏기면 집에 가서 저주 인형을 만들어서 샌드백으로 쓸 것 같았고, 예준은 맞기 전에 본인이 먼저 때릴 것 같았다.
머릿속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칠 때쯤 차가 멈춰 섰다. 밖에는 출근길을 보러 온 팬들과 기자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빡빡했다. 내리고 잠깐 포토타임이 있다고 했지. 눈만 몇 번 깜빡이다 바로 차 문을 열고 맨 처음으로 내렸다.
“하현아! 왜 그렇게 잘생겼어!”
차에서 내려 포토존으로 걸어가는 그 잠깐 사이에 목소리들이 쏟아졌다. 얼마나 소리가 큰지 일당백이라는 단어가 새삼 실감 날 정도였다. 쇼케이스 때도 느꼈지만, 우리 팬들 목소리 진짜 크구나.
“얘들아 왜 그렇게 잘생겼어!”
“휘영아 사랑해!”
“지구야! 지구야! 온지구!”
멤버들이 전부 차에서 내리고, 포토존에 서서 사진을 찍는 동안 이곳저곳에서 우렁찬 칭찬과 고백이 들리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그게 얼마 가지 않았다는 게 문제지.
“넘어오시면 안 됩니다.”
펜스를 넘어온 팬들이 이쪽으로 손을 뻗었다. 황급히 옆쪽으로 피했더니 바로 뒤에 서 있던 지구가 잽싸게 나를 잡아 안쪽으로 들여놨다. 팔까지 뻗어서 보호해주는 걸 보다가 문득 얘가 경호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작 진짜 경호원들은 셋이서 다섯을 보호하느라 고군분투 중이었다.
“다치니까 나와요!”
어찌어찌 안쪽까지 도착했을 때는 모두가 기진맥진했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는 것 같아서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확인하는데 준의 셔츠가 어깨선을 크게 벗어나 있었다. 손을 뻗어 셔츠를 올려줬더니 화들짝 놀라서는 뒤를 쳐다봤다.
“왜요. 뭐 잘못됐어요?”
“너 셔츠 다 밀려서.”
“아. 아까 뒤에서 어떤 분이 잡아당기시던데 그래서 그런가 봐요.”
별거 아니라는 듯 등을 툭툭 친 준이 준비된 대기실로 쏙 들어갔다.
수십 명의 참가자가 억지로 몸을 끼워 넣었던 전과 달리 대기실은 넓고 쾌적했다. 사탕 하나를 까서 입에 넣는 지구는 태평해 보였다. 손등 까진 게 여기서도 보이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