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뷔를 피하는 방법-52화 (52/130)

#52

“아, 어서 와요.”

감독이 다가와서 인사를 했고 우리는 바로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옆에는 광고주로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 오늘 촬영하는 CF는 화장품 광고라고 들었다. 요즘 대세 아이돌들은 다 거쳐 지나간다는 화장품 광고가 들어온 것에 대해서 매니저는 굉장히 뿌듯해하는 것 같았다.

매일 앞자리에 앉아서 장시간 운전을 하는데도 매니저는 피곤한 기색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 얼굴로 자랑스럽게 웃었다.

“이게 이번에 새로 나온 제품이거든요.”

설명을 다 듣고, 제품을 바른 상태로 새로 메이크업을 마치고 카메라 앞으로 걸어가는 동안 정신이 멍했다. 셔터 소리가 몇 번 터지고, 표정과 자세 요구가 늘어날수록 점점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피곤에 전 표정으로 화장품 CF를 찍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최대한 밝게 웃으며 요구를 착실히 이행했다.

“손 하트 한 번 해볼까? 좋아요. 좋아.”

개인 촬영, 다음에는 단체 촬영. 촬영 시간이 길어서 다들 본인 차례가 아닐 때는 그 잠깐 사이에 또 의자에 앉아서 잤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입까지 벌린 채로 잠을 자는 예준을 보고 기겁해서 누가 볼까 봐 얼굴을 가려주기도 했다.

“형. 형 잠깐만요.”

준과 휘영 둘이서 같이 촬영하는 걸 팔짱 끼고 구경하고 있는데 저쪽에서 지구가 불렀다. 왜 그러나 싶어 다가가 보니, 아무 말 없이 손에 들린 비타민 음료를 내밀었다.

“아까 스튜디오 올라오기 전에 편의점에서 샀어요.”

“뭐 이런 걸 다. 고마워.”

뚜껑을 따서 입안에 조금씩 흘려 넣으니 달콤한 맛이 밀려왔다. 좀 상큼할 줄 알았는데 엄청 달다.

“형 요즘 무슨 일 있으세요?”

마지막 한 모금까지 깔끔하게 마셨더니 질문이 날아왔다. 나에게 있는 일이라고는 우리 멤버들이 전부 함께하는 스케줄 뿐이었기에 대충 손을 저었다.

“그냥 피곤해서 그렇지.”

“그게 아니라 형 차에서도 잘 안 주무시는 것 같아서요. 잠깐씩 깰 때마다 항상 형 옆에서 휴대폰 하고 계시던데요. 자꾸 뒤척거리시는 것도 어디 불편하신 것 같고.”

지구는 참 예리했다. 최대한 자는 애 방해 안 하려고 조심스럽게 움직인 건데도 그걸 다 느끼는구나.

“잠이 잘 안 와서. 활동 기간 끝나고 푹 쉬면 돼.”

“활동 기간 거의 2주 남았잖아요. 내일 팬 사인회도 있는데. 멤버들 다 피곤한 건 맞는데 형이 유독…….”

지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끌었다. 그 와중에 내 손에서 다 마신 병을 수거해가는 손길이 자연스러워서 가져가는 줄도 몰랐다.

“걱정해줘서 고맙다.”

“형은 힘들어도 티를 안 내시니까요. 준이처럼 투정도 부리고 하세요.”

“준이도 요즘 투정 안 부리잖아. 그리고 제일 티 안 내는 건 넌데.”

“전 괜찮은데 형은 컨디션 안 좋으신 게 보여요.”

“다른 애들도 다 메이크업 안 한 거 보면 안 좋아 보이던데.”

지구는 내 말에 조금 뜸을 들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전 형이 제일 신경 쓰이니까요.”

그러더니 또 묵직하게 직구를 던졌다.

“……너 안 한다며.”

“이건 고백이 아니라 그냥 사실인데요.”

웃어 보이는 얼굴에 당해낼 재간이 없어서 대화를 관두기로 했다. 저 얼굴만 보면 타박을 하려다가도 말이 쏙 들어갔다. 왜 저렇게 순하게 생겨서는. 서바이벌 ID 촬영 초반에 무표정한 얼굴 때문에 오해를 받았던 게 지금 생각하면 웃겼다. 저게 어딜 봐서 싸가지없는 얼굴로 보일 수가 있지. 다음 컷을 찍는다는 말에 바로 뛰어가느라 생각은 금방 지워졌다.

CF 촬영은 오전을 다 사용하고도 한 시간 뒤에 끝났고 나와 지구는 곧바로 방송국에 내려졌다. 우리가 촬영하는 동안 나머지 멤버들은 점심시간과 휴식시간이었다.

“형들 열심히 하고 와요.”

“점심 먹고 푹 자.”

“한 세 시간은 잘 수 있을 것 같아요.”

“하현아. 스마일하고 먹는 거 잊어먹으면 안 된다.”

“형은 그냥 주무세요.”

주어진 쉬는 시간 동안 당연하게도 수면을 택한 멤버들이 손을 흔들며 배웅을 해줬다. 매니저 형과 함께 세트장으로 들어가자마자 바로 고개를 숙여 이곳저곳 인사를 하고 다녔다.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을 설명으로 들었는데 별거 없었다. 그냥 여러 셰프들이 만든 요리가 순서대로 나오는데 먹고 맛 평가만 해주면 되는 간단한 방식이었다.

게스트로 초대된 사람은 딱히 유머 감각도 필요하지 않았다. 옆에 쭉 함께 앉는 고정 출연진들이 빵빵 웃겨줄 테니까 적당히 받아치기만 하면 됐다. 물론 맛있게 먹으면서.

프로그램 컨셉이라며 건네준 정장을 입고 세트장 의자에 앉자마자 긴장감이 휘몰아쳤다. 내가 살다 살다 음식 예능을 다 나오는구나. 넥타이를 너무 헐렁하게 맨 건가 싶어서 한 번 꽉 묶은 다음에 침착하게 촬영 시작을 기다렸다.

“형. 드실 수 있겠어요?”

“먹을 수 있어, 걱정하지마.”

먹을 수 있는지를 걱정해주는 게 쪽팔려서 황급히 고개를 젓자마자 바로 촬영이 시작됐다. 간단하게 시작 멘트를 날린 MC가 이쪽을 바라보며 게스트를 소개하기 시작했고, 이렇게 앉아서 하는 예능은 처음이라 엉거주춤 카메라를 향해 인사했다.

“요즘 그렇게 전국에서 그렇게 서디, 그러니까 서바이벌 ID 앓이를 한다고.”

“그건 지났고 이제 레브 앓이죠.”

과하게 쏟아지는 칭찬과 찬사에 일일이 고개를 숙이며 웃었다.

난 진짜 아무리 생각해도 예능감이 없다. 프로그램에서 1, 2위를 했다는 이유로 나와 지구를 불렀다면 별로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그룹에서 제일 안 웃긴 두 명이니까. 차라리 예준이 왔으면 적당히 여유롭게 받아치면서 잘 먹었을 텐데. 준이 왔으면 뭐가 나와도 보는 사람이 기분 좋아질 정도로 잘 먹었을 것이고, 하다못해 휘영이 와도 웬만한 잡지 뺨치는 설명과 칭찬을 해줬을 게 분명했다.

프로그램의 주된 내용은 요리였으므로 토크는 길지 않게 끝났다. 음식에 별 관심이 없어서 잘 몰랐는데, 얘기를 들어보니 5성급 호텔에서 일하는 셰프들인 것 같았다. 저 사람들 음식 한 접시 가격이 어마어마하다고. 저런 음식을 공짜로 먹고 출연료까지 받으니까 엄청난 이득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음식 먹는 걸 조금만 좋아했어도.

“첫 번째부터 들어와 주세요.”

뚜껑 덮인 요리들이 순서대로 하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첫 번째 요리는 수프였다. 좋아하는 음식은 아니었지만 못 먹을 것도 아니라 무난하게 먹어서 속을 달랬다. 평범한 수프랑 뭐가 다른지 모르겠는데 일단 정말 맛있다고 극찬을 한 뒤에 두 번째 접시를 열었다.

확실히 고급 코스요리라더니 한 접시에 담긴 양이 굉장히 적었다. 포크로 콕 집어서 한 입 먹으면 없는 양이라 맛이 없어도 꿀꺽 삼켜 넘길 수 있었다. 벌써 열 번째 접시인데 별로 먹은 것 같은 기분도 안 들었다.

“해파리를 이용한 요리입니다.”

살다 살다 해파리를 다 먹어보네. 소스 맛이 새콤하긴 했다. 별로 씹기 좋은 식감은 아니라 몇 번 입안에서 굴리다가 삼켜버렸다. 계속해서 나오는 접시에는 하나같이 내가 먹어본 적 없는 음식들이 가득했다. 처음 보는 해산물들을 보며, 내가 얼마나 한정적인 음식만 먹고 살았는지 새삼 실감했다.

흐물거리는 해산물이 있는가 하면 쫄깃한 식감의 고기도 있었다. 대부분이 입맛에 안 맞긴 했지만, 확실히 유명 셰프들이 만든 요리라 그런지 퀄리티가 높았다. 아예 별로인 건 아닌데 태어나서 처음 먹어보는 맛이라 어색해서 그런지 단번에 확 맛있다는 생각이 들질 않았다. 이렇게 불만족스럽게 제대로 씹지도 않고 삼키는 게 죄스러울 정도로 정성스러운 요리였다. 차라리 옆에서 열심히 먹는 지구에게 먹여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굴을 베이스로 해서 만들어봤습니다.”

열두 번째 접시를 설명하는 셰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살짝 입안에 넣어봤다. 아버지가 해산물을 싫어하셔서 태어나 먹어본 해산물이 손가락에 꼽혔다. 생선이랑 새우, 조개, 게 정도는 먹어 봤는데. 이건 정말 처음 먹어보는 해산물이었는데 입안에서 녹아내리는 게 묘하게 비릿하기도 하고 별로 맛있지는 않았다. 그래도 최대한 웃으면서 맛 평가를 하고 다음 접시를 받았다.

작은 고기가 담겨 있었는데 나이프로 썰기도 뭐한 크기라 바로 포크로 집었다. 야채 하나 곁들여지지 않은 상태라 별생각 없이 입에 넣고 씹어보니 생각보다 더 맛있었다.

“이거 하나 더 먹고 싶어요. 진짜 맛있어요.”

“한 접시 더 드릴까요?”

처음으로 감동받은 맛이라 고개까지 끄덕이며 말했는데 갑자기 목이 따가워지더니 숨 쉬는 게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넥타이를 너무 꽉 조였나 싶어 살짝 풀어봤는데도 똑같았다. 혹시 공기가 너무 무겁고 따뜻한가 싶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촬영장은 음식을 먹기 좋게 최적의 환경을 자랑하고 있었다.

“아.”

간지러운 느낌이 나서 살짝 걷어 올린 소매 안쪽으로 빨갛게 올라온 게 보였다. 그제야 깨달았다. 나 알레르기 있구나.

처음 먹은 음식들이 너무 많아서 뭐 때문에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고기는 아닐 거고. 해파리인가? 아니면 그보다 더 전에 나왔던 해산물? 얼굴까지는 아직 올라오지 않은 건지 나를 바라보는 MC들의 얼굴에는 여전히 웃음이 가득했다. 이대로 계속 촬영을 진행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 손을 들려는데 지구가 이쪽으로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놀란 표정이었다.

“왜 그래?”

많이 당황한 건지 평소에 꼬박꼬박 쓰던 높임법도 사라진 상태였다. 갑자기 다급하게 나를 살피는 지구를 보며 진행하던 출연진들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봤다.

“무슨 일 있어요?”

MC가 카메라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대답하기가 버거웠다.

“헉.”

순간 숨이 턱 막혀왔다. 등이 확 굽어져서 식탁에 몸을 박을 뻔했는데 지구가 한쪽 팔로 급하게 나를 잡아 식탁과의 충돌을 막아줬다.

“저기, 잠깐만요!”

내 몸을 붙잡은 상태로 지구가 급하게 소리쳤다. 그 잠깐의 난리 통에 식탁 위에 있던 그릇을 몇 개 쳤는지 바닥에 음식들이 다 쏟아져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카메라를 조종하던 스태프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게 보였다.

“119 좀 불러주세요!”

119를 부르라는 말에 잠깐 버퍼링 걸린 듯 멍청하게 있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유롭게 촬영을 하던 넓은 촬영장이 순식간에 혼잡해졌다.

“야! 뭐야, 촬영 중단해! 당장 끊어!”

“잠시만요!“

“119 불렀어? 누가 전화했어?”

돌발 상황에 당황한 듯 이곳저곳에서 고함이 날아다녔다. 여러 사람이 이쪽으로 동시에 뛰어왔다. 한 명이 등을 받쳐 들고 몸을 비스듬하게 세웠다. 숨을 쉴 수가 없으니 당연히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은 이끄는 대로 끌려갔다.

“형, 심호흡해봐요. 숨 쉴 수 있어요?”

지구가 다급하게 심호흡을 해보라며 최대한 편한 자세를 취해줬지만, 여전히 호흡이 힘들었다. 정신이 다 혼미했다. 진작 알레르기 검사를 받아야 했는데. 20년 동안 한 번도 몸과 맞지 않는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어서 알레르기 같은 게 있는지도 몰랐다.

“의식 있어?”

“네, 있어요! 119 얼마나 걸린대요?”

“바로 옆이 소방서니까 3분이면 올 거야.“

3분이면 정말 금방인데 그 시간을 기다릴 수 없을 것 같았다. 너무 답답하고 머리까지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붙잡을 곳이 없어서 넥타이를 잡았는데 금방 손이 떨어져서 누군가의 손에 잡혔다. 손등에서 상처가 만져지는 걸 보니 지구인 모양이었다.

“들려요?”

주인 모를 목소리가 점점 희미하게 들렸다. 시야까지 흐릿해서 누가 누군지 얼굴도 똑바로 구별이 안 됐다. 뿌옇게 보이던 사람들 얼굴이 어느 순간 시야에서 사라졌다. 까맣게 점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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