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뷔를 피하는 방법-55화 (55/130)

13화

뒤늦게 확인한 휴대폰에는 부모님의 부재중 전화가 잔뜩 쌓여 있었다. 전화를 걸어 괜찮다고 한참 안심을 시키는 동안 병실에 도착한 형은 전과 달리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그냥 마땅치 않은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쉬어, 하고 나갔다. 뭔가 불만족스러울 때 짓는 표정인 걸 알고 있어서 그냥 말없이 보냈다. 형은 내 일에 간섭하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부터 1:1 편식 개선 솔루션이 시작됐다.

지구는 지극정성으로 내 식사를 챙겼다. 싱겁기 짝이 없는 병원 밥은 먹고 싶지 않았는데, 열심히 달래더니 끝끝내 아침을 깨끗하게 비우게 만들었다. 진짜 맛없는 나물까지.

그 후에도 지구는 꿋꿋이 병실에 발을 붙이고 있었다. 오늘 하루 스케줄이 다 증발해버렸으니 완전한 자유 시간인데도.

나가라고, 숙소 가서 잠이라도 자라고 잔소리를 해봤지만, 전혀 소용없었다. 결국, 저녁까지 먹고 침대 밖으로 숙소로 가라는 의미가 담긴 손을 뻗어 단단한 등을 살짝 밀었다.

“이제 진짜 가. 저녁도 먹었잖아.”

“저녁도 먹은 김에 자고 가려고요.”

아무리 더 권해도 갈 것 같지 않아 결국 포기했다. 문득 아직 팬들에게 직접 상황을 전하지 못했다는 게 떠올라 휴대폰을 들어 공식 카페에 접속했다. 뭐라도 글을 남기기 위해서였다.

“공식 카페에 글 쓰려는데 뭐라고 쓸까?”

“음.”

그냥 대충 대꾸해줄 거라고 생각했던 지구는 굳이 몸을 일으켜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 어깨가 부딪히자마자 몰래 움츠렸다. 지구는 눈치채지 못한 듯 얼굴까지 바싹 붙였다.

“일단 예준이 형이 했던 것처럼 형이 전체적인 상황 설명은 하셔야 할 것 같고…….”

“알았어. 이제 내려가.”

몸이 닿는 게 유독 불편하다고 생각하며 휴대폰을 쥔 채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이불 속으로 완벽하게 자취를 감추자 지구가 물었다.

“갑자기 왜요?”

일부러 대꾸하지 않고 계속 글을 써나갔다.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오타가 있나 없나 확인하고 글을 업로드하자마자 댓글이 폭발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거 댓글 비허용으로 해야 했나. 뒤늦게 생각이 들었지만, 걱정이 한가득 담긴 댓글들을 한참 보며 생각이 싹 사라졌다. 많이 걱정해주셨구나. 문득 멀쩡히 살아있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확 들었다.

“형.”

“왜?”

“이불 뒤집어쓰고 계실 거예요?”

아직 대답도 안 했는데 지구가 무작정 손으로 이불을 살짝 걷어냈다. 온통 새하얗던 시야에 담긴 얼굴이 똑같이 하얘서 두 눈만 멍청하게 깜빡이다가 다시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너 잠깐만 나가봐.”

“네?”

“밖에 자판기에서…… 어, 사이다 좀 뽑아 와주라.”

“아플 때 탄산음료는 안 좋아요. 이온 음료로 뽑아올게요.”

잠깐 진정하기 위해서 아무렇게나 뱉은 말에 지구가 바로 일어나 병실을 나갔다. 다시 돌아오기 전에 잠을 자기 위해서 두 눈을 감고 최대한 지루한 생각을 했다. 숙소에 놓고 온 책을 생각하자. 놀랍게도 순식간에 잠이 쏟아져 내렸다.

눈을 떴을 때는 아침이었고 무사히 퇴원 수속을 밟았다. 병원 측에서는 더 푹 쉬어야 한다고 했지만 나 때문에 미뤄버린 수많은 스케줄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퇴원하고 생긴 변화는 매니저가 바뀐다는 것, 또 지구를 조금 티 나게 피하기 시작했다는 것뿐이었다.

* * *

“너 지구랑 싸웠어?”

라디오 촬영이 끝나고 나오면서 휘영이 꺼낸 말이었다.

“아니, 안 싸웠는데?”

아무렇지 않게 보이려고 일부러 어깨까지 으쓱하며 대답했지만,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나한테만 말해봐. 왜 화냈어?”

“일단 내가 화낸 건 확정이냐.”

“지구가 너한테 먼저 화냈을 리가. 그리고 누가 봐도 너만 피하고 있잖아. 계속 나 찾고, 준이 찾고.”

너무 정확한 사실이라 할 말이 없었다.

병실에서 나온 순간부터 지구 얼굴만 보면 왠지 모를 어색함이 밀려왔다. 눈만 마주치면 나도 모르게 자꾸 행동이 멈칫멈칫하게 돼서. 고백받은 직후에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과한 친절이 부담스러운 건 정상이지?”

“그렇지. 왜, 갑자기 지구 친절이 부담스러워졌어?”

“이게 부담스럽다기보단…….”

기분이 이상해. 뒷말은 그냥 삼켜내고 고개만 저었다.

“됐어, 그냥 오늘 컨디션이 안 좋은가 봐.”

컨디션이 안 좋다고 갑자기 사람을 피하는 이상한 놈이 됐지만, 그냥 이상한 놈 하고 말아야겠다.

“형. 약…….”

“다음 스케줄 뭐였지?”

하필 타이밍이 안 맞아서 또 일부러 무시한 것처럼 돼버렸다. 이번에는 정말 고의 아니었는데. 이쪽을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냥 모르는 척했다. 진짜 스케줄 물어보려고 한 거였으니까.

“이거 봐, 이거. 또 피하네.”

“이번엔 진짜 기억 안 나서 물어본 거야.”

“예능 촬영이잖아. 그 아이돌 팀 셋 나와서 대결하는 거.”

“그게 오늘이야?”

“너 쓰러져서 이틀 미룬 거잖아. 원래 사인회 바로 다음에.”

“빨리 나와, 이동해야 될 거 아니야.”

설명하던 휘영의 목소리를 싹둑 자른 것은 매니저였다. 회사로 날아드는 팩스들과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거세지는 팬들의 반발 때문에, 매니저는 새 매니저가 고용되면 해고되는 거로 되어 있었다.

예준이 말하길, 열심히 변명하는 매니저의 말을 사장님이 싹둑 잘라버렸다고 했다. 이렇게 거센 항의를 받아본 적이 없어서 퍽 당황한 눈치였다고.

매니저의 해고 소식을 듣자마자 준은 신나서 병실 벽에 주먹질까지 했다. 어쨌거나 매니저는 지금 굉장히 심기가 불편하고 예민한 상태였기 때문에 건들면 안 됐다. 그래서 휘영을 붙잡고 주차장으로 조용히 걸었다.

“점심 먹고 약 드셨어요?”

“…….”

“형.”

형 뚫리겠다. 항상 옆자리에 앉았는데 자리까지 바꿔버리면 눈치가 두 배로 보일 것 같아서 지구 옆자리에 앉았더니 얼굴이 뚫릴 것 같았다. 날씨가 워낙 추워서 차 안도 싸늘했는데, 왠지 모르게 후끈후끈해서 온몸이 따끔거렸다.

쳐다보지 마라, 고개 좀 돌려라. 속으로만 중얼거려봤자 지구는 대답을 들을 때까지 말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먹었어.”

“형 약이 저한테 있는데요?”

“……까먹었네.”

“제가 아까부터 계속 약 드시라고 불렀는데.”

뒷자리에서 휘영이 숨을 들이켜는 게 여기까지 들렸다.

왜 피하세요? 지구가 눈으로 말했다. 곤란할 정도로 신경 쓰이는 건 맞는데 나도 이유를 모르겠다. 어제 숟가락을 들고 직접 떠먹여 주려고 했던 게 충격이었나. 아닌데, 그거보다 조금 더 전부터. 웃는 얼굴 때문에 그랬던 것 같은데. 쟤 웃는 게 한두 번도 아닌데 왜 갑자기?

신경 쓰인다고 솔직하게 말하기에는 자리가 좋지 않았다. 멤버들도 있고, 엄청 예민한 매니저도 있는 차 안에서 그런 소리를 하긴 조금 그렇지. 그래서 대충 둘러댔다.

“먹기 싫어서 그랬지.”

“아, 그래요?”

“나 원래 그런 약 싫어해. 물에 닿으면 바로 녹더라.”

정작 상대방은 믿지도 않는데 혼자 구체적인 예를 들어가며 주절댔다. 지구는 대놓고 열심히 변명하니 대충 들어주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내리깔고 있는 눈에 불신이 가득했다.

“약 주라. 먹게.”

최대한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표정을 다듬고 손을 내밀었다. 생수와 함께 넘어온 약봉지를 뜯어 입안에 털어 넣자마자 쓴맛이 진동했다. 약을 다 먹었는데도 계속 쳐다보는 게 느껴져서 괜히 휴대폰을 꺼내 관심도 없는 실시간 검색어를 하나하나 눌러봤다.

“근데 형. 게스트 누구 나올까요?”

두 배우의 결혼 소식을 아무 흥미 없는 눈을 쭉 훑어보는데 준이 뒷자리에서 불쑥 얼굴을 내밀며 물었다. 궁금하긴 했지만 일단 화를 내야 했다.

“너 거기서 얼굴 내밀지 말라니까. 깜짝깜짝 놀란다.”

“형 전혀 안 놀란 것 같은데.”

“놀란다니까. 그래서 게스트 누구 나올 거 같냐고?”

“네!”

하루 푹 쉬고 나니까 금방 쌩쌩해진 준의 목소리 볼륨이 높았다. 오랜만의 긴 수면도 수면이었지만, 팩스로 한 번 뒤덮였던 회사가 아침부터 굉장히 비싼 도시락을 보내준 것도 한몫했다. 점심에는 무려 보쌈과 족발이 세트로 왔다. 그걸 두 세트나 먹어 치웠으니 힘이 남아돌 만도 했다.

“게스트 인원수는 다 똑같은 것 같던데. 우리가 다섯이면 나머지 두 그룹도 다섯이겠죠?”

“다섯 명인 그룹이 워낙 많아야지.”

“그래도 최근에 컴백한 분들이 나오지 않을까요.”

다섯 명, 현재 활동 중. 순간 스쳐 가는 얼굴들이 있었지만, 불길한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맴도는 생각에 자연스럽게 시선을 옆으로 돌렸는데 지구가 이어폰을 꽂은 채로 창밖을 보고 있었다. 요 며칠은 이어폰 안 꽂더니. 몇 초 더 쳐다봤는데도 끝까지 시선을 못 느끼길래 나도 잽싸게 고개를 돌렸다.

“넌 누구 나올 것 같은데?”

“음, 다섯 명이니까…… 그, 걸그룹도 같이 나와요? 마로 컴백했다고 들었는데.”

“걸그룹은 안 나와. 몸 부딪히는 게임이 있어서.”

뒷자리에 앉아서 게임하던 예준이 툭 끼어들었다. 휴대폰을 양손으로 꼭 잡고 왼쪽, 오른쪽으로 팔을 비트는데 그 모습이 퍽 기괴했다.

“저 형 뭐 해?”

어이없다는 듯이 물었더니 준이 힐끔 보더니 운전한다고 말해줬다.

“그럼 누굴까요. 형은 짐작 가는 그룹 있어요?”

“어……, 잘 모르겠는데. 스페이스 분들 나오지 않을까.”

휘영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나도 모르게 지구 얼굴부터 살폈다. 워낙 볼륨을 크게 들으니 안 들렸을 게 분명했다. 매번 음방 1위 후보로 마주치는 것도 곤욕인데 같이 예능 촬영이라니. 무슨 난리가 나도 골백번은 날 게 뻔했다.

“아닐 것 같은데. 스페이스 예능 잘 안 나올걸.”

“그래요?”

당연히 모르지. 그냥 바람이었다. 스페이스가 예능을 밥 먹듯 나오든, 한 번 보기 힘들 정도로 드물게 나오든 상관없는데, 오늘만 없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또 지구 옆모습을 힐끔 쳐다봤다. 귀에 반듯하게 꽂혀있는 이어폰이 왠지 소통 차단의 도구로 보였다. 먼저 피해 다닌 건 생각도 안 하고 슬쩍 눈치만 보다가 차에서 내렸다.

촬영은 철저하게 팀전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예능일 뿐이니까 진지하게 할 필요는 없다고, 적당히 웃기면서 설렁설렁하라고 했지만, 성인 남자 열다섯이 모이는데 그게 될 리가 없었다.

“형. 우리 오늘 꼭 이깁시다.”

“승리에 의미 없다잖아.”

“전 있거든요? 아, 하현이 형은 몸쓰는 거 하지 말고요. 지구 형 운동 잘하잖아요. 형이 나서서 하드 캐리 하세요.”

넓은 등을 쿵쿵 작지 않은 주먹으로 두드리며 준이 웃었다. 그 해맑은 얼굴을 본 지구가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이어폰을 휴대폰에서 완전히 분리했다.

* * *

스튜디오는 중앙에 테이블과 의자가 세팅되어 있고, 문 세 개가 있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었다. 각각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으로 이루어진 문은 마치 서바이벌 ID 팀 미션을 떠올리게 했다. 이미 다른 그룹들도 안쪽에서 대기 중이라며 우리는 빨간색 문으로 들어가면 된다고 했다.

“이게 다 뭐예요.”

맨 처음으로 발을 들인 준이 문 앞에서 우뚝 섰다. 일단 얼른 들어가라며 등을 떠밀어 다섯 명이 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문이 닫혔다. 잠기는 소리가 선명하게 방 안을 울렸다. 여러 대의 카메라가 여러 각도에서 우리를 찍었다.

“방 탈출인 것 같은데……. 추리하는 건 아니네.”

“공부 잘하는 사람?”

예준이 웃으며 가리킨 곳에는 커다란 화이트보드가 있었다. 그리고 그 앞 책상에 과목별로 놓여 있는 문제지 다섯 개.

“어디 보자, 제일 점수 높은 팀만 나갈 수 있다는데요.”

“오. 안 나가면 되겠다.”

“그리고 가장 점수가 낮은 팀은 벌칙이 있습니다.”

“형은 현역 고등학생인 너를 믿는다.”

뛰어난 태세 변환을 보여준 예준이 준의 등을 토닥였다. 항상 공부가 제일 싫다고 입에 달고 사는 애를 뭘 믿어. 시끄러운 둘을 뒤로하고 양옆으로 눈을 굴려봤지만, 문제지를 보자마자 급격하게 말수가 적어진 거로 봐서 우리는 망한 것 같았다. 일단 뭐라도 해보자며 예준이 수학 문제지를 집어 들었다.

“미적분 아는 사람? 너 예습 안 해?”

“수 1도 몰라요…….”

“온지구 이거 봐봐. 너 작년에 배웠을 거 아니야.”

“전 실기 위주라서요.”

모두에게 수학은 저 문제지 중 기피 1순위였다. 아무래도 벌칙은 우리가 받겠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수학 문제지는 내 앞에까지 넘어왔다.

“전 머리가 아파서.”

아직 환자잖아요. 눈으로 말했더니 예준이 조용히 문제지를 눈앞에서 치웠다. 사실 그냥 변명이고 수학 못한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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