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먼저 하실래요?”
자진해서 나와 놓고 가만히 서 있는데 서진이 웃으며 물었다. 뭐지, 인심 써서 차례 양보해준다는 건가? 한 번 아니꼽게 보이기 시작하니까 행동 하나하나가 예쁘게 보이질 않았다.
“괜찮아요. 선배님 먼저 하세요.”
최대한 밝게 웃으면서 거절했더니 서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앙 카메라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노래 틀어주세요.”
피디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스튜디오 가득 음악이 울려 퍼졌다. 프리스타일이라길래 이상한 노래 틀어줄 줄 알았더니, 무난한 팝송이었다. 게다가 처음 댄스 배울 때 연습곡으로 많이 쓰이는 곡이기까지 했다.
스페이스의 댄스라는 말이 정말인지 확실히 실력이 뛰어났다. 딱딱 떨어지는 팔 각도만 봐도 전문적으로 꽤 오랜 시간 배운 것임이 틀림없었다. 무엇보다 동작 하나하나에 힘이 철철 넘쳐 흘러서 보는 사람이 다 바짝 힘이 들어가는 춤이었다.
사람이 좋고 싫고는 뒤로하고 잘 추는 건 인정해야겠다. 멤버들이 괜히 우리 그룹의 춤이라고 등 떠밀어준 게 아니었네.
“서진이 형 추는 거 볼 때마다 팔 나갈 것 같아요.”
“저 형은 설렁설렁 추라고 해도 싫다 그래요.”
1분 남짓한 짧은 춤이 끝나고 스페이스 멤버들의 코멘트가 줄줄이 이어졌다. 하나같이 구름 위로 둥실둥실 띄워주는 말들이라 서진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 게 선명히 보였다. 그래서 그냥 박수만 몇 번 쳐주고 중앙 카메라 앞으로 걸어갔다. 내가 오자마자 서진은 아무 말 없이 걸음을 옮겨 자리를 비켜줬다.
“5번 곡 주세요.”
난 왜 따로 번호까지 붙어있어. 눈을 깜빡이는 나에게 피디는 생전 처음 듣는 노래를 선사했다.
진한 힙합의 기운이 느껴졌다. 처음 듣는 곡이어도 특유의 느낌만 읽어내면 어렵지는 않았다. 게다가 전공하고도 잘 맞았다. 타이틀곡이 워낙 부드럽고 상냥한 느낌이라 안무도 정적으로 만들어서 이런 느낌은 졸업하고 처음이었다.
노래는 금방 끊겼다. 끝났는데도 우리 멤버들은 다 침묵 중이었다. 스페이스 멤버들처럼 입발린 칭찬을 줄줄 늘어놓으면 쪽팔릴 테니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정말 한마디 말도 없이 넷이서 박수만 쳤다. 조금 무섭다 싶은 광경이 전염이라도 된 건지 스튜디오 가득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스페이스한테 박수받는 기분이 묘했다.
“하현 씨 서바이벌 ID 때도 춤으로 유명하시다고 듣긴 했는데.”
“진짜 잘 추신다.”
끝까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우리 멤버들 대신 코멘트를 쳐준 건 스페이스였다. 서진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며 입에 칭찬 모터를 달은 듯 멈추지 않는 입에 할 수 있는 건 웃는 것뿐이었다.
가요계 선배들의 칭찬에 일단 고개를 꾸벅 숙이는 거로 대답했다. 근데 얘네가 도무지 말을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칭찬 한마디 해줄 때마다 고개를 푹푹 숙이고 있었는데 무슨 오디션 프로그램 심사위원도 아니고 말이 너무 많다.
“개인적으로 더 좋았던 무대에 들어주세요.”
그 거지 같은 상황을 종료시켜준 것은 피디의 진행이었다. 그제야 고개를 뻣뻣하게 세우고 아무렇지 않게 의자에 앉았다. 곧 나온 결과는 만족스러운 승리였다. 완승은 아니었지만 1:4면 충분했다.
“제가 원래 저런 장르를 더 좋아해요. 팝핀? 맞나?”
“네.”
“그런 춤도 소화 잘하는 것 같아요. 항상 살랑살랑 춤추는 것만 봐서.”
“저도요. 의외라서 놀랐어요.”
한참 이어지는 말들을 듣고 있자니 할 말이 사라졌다. 원래 이쪽이 전공인데. 팝핀하고 왁킹하고 그랬는데. 확실히 아이돌이 된 이후로 화면 앞에서 이런 춤을 춰보는 건 처음이긴 했다. 그래도 저렇게 의외라는 표정으로, 안 어울릴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소화를 잘한다는 말들을 듣고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전공을 현대무용으로 고쳐야 하나.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면 되겠네요. 아이돌한테 애교는 필수 덕목이잖아요.”
자연스러운 진행의 끝은 애교였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멤버들이 준에게 눈치를 주기 시작했다. 예준은 팔을 길게 뻗어 준의 옆구리를 쿡 찌르기까지 했다.
“막내잖아. 막내.”
“애교하면 막내.”
자기만 아니면 된다는 이기적인 마음가짐으로 멤버들이 대동단결했다. 물론 나도 애교는 때려죽여도 못할 것 같아서 슬쩍 준의 등을 토닥였다. 필수 덕목이라는데, 우리 멤버 중에는 할 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그럼 우리는 글러 먹은 걸까. 그나마 준이 평소에 애교 있는 성격이긴 한데 귀여운 제스처나 표정을 짓는 걸 본 적은 없었다.
결국, 형들의 과격한 지지에 견디지 못한 준이 엉거주춤 앞으로 나갔고 참패했다. 사실상 애교만 봐서는 상대방의 10%도 미치지 못했는데도 빨간색을 들어준 사람들은 분명 어린 나이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풋풋함에 점수를 준 게 틀림없었다. 그 정도로 상대방은 기계처럼 애교를 쭉쭉 뽑아냈다. 사실 중간에 팔 두 개 쭉 뻗으면서 혀 짧은소리를 낼 때는 내가 다 부끄러워져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애교봇이네요, 애교봇.”
아마 매니저에게 해고 통보가 내려오지 않았다면, 백 퍼센트 촬영이 끝나자마자 연습실에 데려다 놓고 애교 연습을 시켰을 것이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인터넷을 뒤져서 귀요미송 같은 거 찾아와서 따라 하라고 닦달했겠지. 춤출 때 자연스럽게 나오는 표정 연기랑 애교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저런 게 맨정신에, 자발적으로 나올 수가 있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1:1 대치 상황에서 마지막 게임은 가위바위보였다. 분명 처음에 무대 관련된 거로 한다고 해놓고 무슨 관계가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시간 관계상이라는 말에 어쩔 수 없이 수긍하며 마지막 운 게임에 출전할 주자를 뽑기 위해 다 같이 회의를 가졌다.
“주먹 제일 큰 사람이 할까요?”
“……휘영아 그건 대체 무슨 기준이야?”
“그냥 지구 형이 해요.”
어차피 운 게임인데 아무나 나가면 되지, 하면서도 열심히 대화에 동참하고 있는데 준이 지구를 강력하게 추천했다. 이 형 아니면 안 된다면서 팍팍 밀어붙이는 바람에 얼떨결에 지구가 나갔고 5판 3선승제에서 무려 세 판을 연속으로 이겨 끝내버렸다. 깔끔하게 승리를 거두고 자리로 되돌아올 때까지 지구는 단 한마디도 안 했다.
결국, 스페이스는 다시 자기들이 문제 풀던 파란색 방으로 돌아갔고 우리는 밖으로 나갔다. 가장 먼저 나와서 밥을 먹고 있던 노란색 방의 주인들은 잘 모르는 얼굴이었다. 데뷔 4년 차 그룹이라고 하는데 나 빼고는 다들 아는 눈치라 대충 아는 척을 하며 옆 식탁에 앉아 밥을 먹었다. 온갖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이 한 상 가득 있었는데 다행히 굴 반찬은 없었다.
저쪽 멤버들은 시끌시끌한데 우리는 침묵만 계속 이어졌다. 분위기가 왜 이러나 했더니 항상 대화를 이끌어나가는 준이 밥그릇에 머리를 박고 먹는 데만 집중하고 있어서였다. 반쯤 넋을 놓은 상태로 반찬은 먹지도 않고 밥만 계속 입에 넣는 지구를 힐끗 보다가 나물 반찬을 젓가락으로 집었다. 맛은 없었는데 그냥 다섯 번이나 먹었다.
“근데 아까 왜 지구 내보내려고 한 거야?”
계란찜이 마음에 들었는지 꾸준히 저것만 먹고 있던 휘영이 물 한 모금을 마시고 준에게 물었다. 그러자 밥을 한 숟가락 크게 떠서 입에 넣으려던 준이 멈칫하더니 말했다.
“전에 서바이벌 ID 할 때 부루마블 했던 거 생각이 나서요. 그거 말고도 저 형 원래 운 좋잖아요. 가끔 보면 저 형은 하는 일마다 자기 원하는 대로 간다니까요?”
“부루마블은 그럴 수도 있지.”
“맞아.”
“그런 수준이 아니에요. 며칠 전에 일기예보에서 비 온다고 해서 지구 형이 싫다고 했더니 다음 날 쨍쨍했어요. 진짜 뭐 있다니까요?”
정말 우연히 발생한 일이긴 했지만 저걸 제외해도 생각해보면 지구는 한결같이 운이 좋았던 것 같다. 뭐 할 때 걸린 적도 없고. 결국, 운 좋은 지구의 이야기로 식사를 마쳤다.
그 뒤로 계속 이어진 촬영은 늦은 시간이 돼서 끝났다. 마지막으로 미션을 통과해서 방문을 열고 나온 스페이스까지 합류해서 근처 공원으로 이동했고 거기서 우리는 운동회를 했다.
이번 주제가 운동회인지 미션들이 하나같이 몸 쓰는 것들뿐이었다. 장애물 달리기부터 100m 달리기까지. 보기만 해도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는데 몸이 아직 다 낫지 않았다는 이유로 나는 자연스럽게 대결에서 열외당했다. 5인 6각이나 줄다리기 같은 단체전에만 간간이 끌려 나왔는데도 피곤해 죽을 것 같았다.
“야, 준아. 서서 자면 어떡해.”
“형. 저 침대 좀 갖다 주세요.”
“침대가 어디 있어. 일단 오늘은 스케줄 더 없으니까 숙소 가서 자.”
서서 잠드는 고급 스킬을 아낌없이 보여주는 준을 억지로 차 안으로 밀어 넣어 자리에 앉혀줬다. 그렇게 숙소까지 가는 동안 아무도 말이 없었다. 각자 휴대폰을 하거나 잠을 자는 멤버들 사이에 대화는 필요하지 않았다.
“엄마…….”
“엄마 아니다.”
여전히 비몽사몽한 준이 엄마를 부르며 머리카락을 잡는데도 꿋꿋하게 숙소까지 부축해 올라가 방에 눕혀줬다. 이 정도면 우리 그룹에서 제일 도움 되는 사람 아닌가. 흐뭇한 기분에 비록 마지막 순서였어도 기분 좋게 씻고 나왔다.
괜히 뻐근한 것 같은 어깨를 주무르며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지구랑 눈이 딱 마주쳤다. 자기 침대에 있지 않고 문 앞에 서 있던 거로 봐서는 나를 기다린 게 분명했다.
“형. 저 불편하시죠.”
예상보다 너무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이 날아왔다. 전에 화장실에서 고백할 때도 생각했지만 얘는 너무 의외의 부분에서 직구를 날려댄다.
“안 불편해.”
분명히 살살 눈치를 봐놓고 대꾸하는 게 스스로 생각해도 뻔뻔했다. 최대한 티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긴 했지만, 확실히 예전과 다르긴 했다. 고백을 받기 전과 후가 아예 똑같을 수는 없는 거지만 새삼 생각해보니까 미안함이 확 밀려와서 시선을 바닥으로 쭉 내렸다.
“형 지금 불편하시잖아요.”
“괜찮아.”
“솔직하게 말씀하셔도 돼요. 저 화내는 거 아니에요. 제가 뭐라고 형한테 화를 내요.”
그 말에 아래로 내리깔았던 고개를 슬쩍 들어 올렸다. 제가 뭐라고? 저 말을 듣는데 내 심장이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기분이었다. 뭔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저지른 사람처럼 마음이 불안했다.
지구가 눈치가 빠른 건 알고 있었다. 그리고 뭔가 질문할 때마다 이미 내 속을 다 알고, 그걸 전제로 깔고 하는 소리인 것도. 한 살 어린 갓 스무 살 남자애 속이라기에는 너무 깊어서 나는 죽어도 들여다볼 수가 없는 것도.
“좋아하는 건 마음대로 하게 해달라고 하긴 했는데 형이 계속 그렇게 불편하시면 제가 관두는 게 사실 맞잖아요.”
“…….”
“죄송해요. 오늘은 제가 거실에서 잘게요. 편하게 주무세요.”
말을 마친 지구가 바로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잠깐만.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가 그대로 내리고 말도 삼켰다. 혼잡한 마음에 스스로 확신을 못 가지고 있는데 잡긴 뭘 잡나 싶어서. 그래서 그냥 내버려 뒀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