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다음날부터 나는 격하게 후회를 시작했다. 게임기가 아니라 문제집 세트를 사주는 게 맞았는데. 삐져서 말을 안 섞으려고 해도 그냥 모르는 척 시간이 해결해주기를 기다렸어야 했는데. 화가 풀린 것 같으면 슬쩍 다가가서 “형은 네가 잘 되길 바라서 그랬어.”라고 해야 했는데.
“형은 현질하지 말고 그 돈 주고 과외를 받아요.”
“너 지금 몇 번째 떨어지는지 알아?”
TV에 게임을 연결해놓고 한창 싸우고 있는 준과 예준의 모습을 보지 않으려 고개를 돌렸다.
처음에는 게임하는 준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그래, 너만 재밌으면 됐지. 비록 하루 주어진 완벽한 자유시간에 내내 게임을 하는 건 실용적인 일은 아니었지만 자기가 즐겁다는데 뭐 어떤가 싶었다.
근데 이렇게 배틀을 할 줄은 몰랐다. 심지어 저렇게 싸울 거면 배틀 플레이를 하면 될 것을, 그건 싫다고 굳이 협동 플레이를 하는 게 더 황당했다. 게다가 둘 중의 한 명만 잘해도 충분히 통과할 수 있는 게임인데 서로 너 때문에 못 넘어간다고 으르렁대고 있으니 의미 없는 싸움이 따로 없었다.
“휘영아. 한 조각 더 먹을래?”
“아니.”
예준과 준의 게임을 구경하며 케이크를 무표정한 얼굴로 밀어 넣고 있던 휘영이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분명 준이 혼자 한 층을 다 먹었는데도 아직도 건들지도 않은 케이크가 세 층이나 남아 있었다. 심지어 크기도 일반 케이크랑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커서 처리가 아주 곤란했다. 단 걸 좋아하는 휘영에게 일어나자마자 먹으라고 줬더니 세 조각째에서 무릎을 꿇은 모양이다.
“이걸 다 어쩌라고.”
일단 차곡차곡 잘라서 담아놓긴 했는데 다 먹으려면 한참 걸릴 것 같았다. 최대한 빨리 먹어치워야 하는데. 고민하다가 몇 조각 챙겨서 통에 담았다. 매니저 형 줘야지. 깨끗하게 챙겨놓고 물을 한 잔 따라 마시는데 준의 허탈한 목소리가 들렸다.
“와, 형…….”
“…….”
이번에는 누가 봐도 완벽한 예준의 실수였다. 바닥으로 고꾸라진 캐릭터 위에는 안타깝게도 사망 표시가 떠 있었다. 죄 없는 캐릭터는 주인들을 잘못 만나서 다양한 방법으로 죽음을 맞이했는데 결국 보다 못한 휘영이 벌떡 일어났다.
“저도 할래요.”
“휘영이 형 리듬 게임 빼고 못하잖아요.”
“해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알아.”
속이 답답했는지 ”나도 저거보다는 잘하겠다.”하고 조용히 게임기 하나를 더 연결한 휘영 때문에 반쯤 남은 케이크는 처참하게 버려졌다. 다시 가져가서 먹을 것 같지 않아서 그냥 치우는 동안 휘영은 두 사람의 캐릭터와 함께 누웠다. 왜들 저렇게 게임을 다 못하는 걸까. 아니면 저 단순해 보이는 게임이 의외로 난이도가 극악인가.
“하현이 형도 와서 해요.”
“난 그런 게임 별로……. 두 시간 있다가 스케줄 있는 건 알지?”
분명히 스케줄이 있음을 강조했음에도 세 명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매일 하루에 한두 시간 자면서 활동하던 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정말 별것도 아니었다.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드러누워 자기 바빴던 사람들이 이렇게 개인적인 취미활동을 하는 것만 봐도 얼마나 여유로워졌는지 알 수 있었다.
“둘 다 빨리 올라오기나 해.”
“형이 살려줘야 갈 거 아니에요!”
“아, 조금 있으면 진짜 죽어요!”
온갖 괴성이 난무하는 거실에 계속 있다가는 게임기 코드를 뽑아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자고 있을 줄 알았던 지구는 책상 위에 앉아서 뭔가 열심히 하고 있었다.
“뭐 해?”
“아. 저 작곡 공부요.”
책상 위에 빼곡히 널린 악보들을 흐린 눈으로 보며 알 수 없는 단어들이 적힌 공책도 한 번 스캔했다. 바쁜 활동이 끝나자마자 작곡 공부하고 싶다고 하더니 진짜 시작했을 줄은 몰랐다.
“이걸로 되긴 해?”
“그냥 대충, 겉핥기만요. 작업실은 회사에만 있으니까.”
확실히 우리 숙소는 작업하기에는 환경이 썩 좋지 않았다. 여분의 방이 남는 것도 아니고 컴퓨터도 없고. 회사 작업실이 그나마 괜찮았다. 딱 두 그룹 있는 소속 가수들이 모두 해외 투어 중인 덕분에 우리 회사에서 작업실을 쓰는 아이돌은 우리밖에 없으니까 언제든지 들어가서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처음 하는 거지? 실음과는 수업시간에 하나?”
“보컬 전공이라 작곡은 잘 몰라요. 하는 친구가 있어서 관심은 갔는데 노래랑 춤 연습하느라 바빠서 해볼 엄두는 안 났거든요.”
지구는 손을 쉬지 않고 뭔가를 적으면서도 꾸준히 내 질문에 대답했다. 집중하고 있는 것 같은데도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자세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냥 네, 하고 넘기면 되는 걸 꼬박꼬박 대답해주는 게 미안해서 그냥 질문을 그만뒀다.
집중하고 있을 때 옆에서 알짱거리는 것도 방해니까 그냥 침대로 돌아가 누웠다. 두 시간 뒤에 나가야 하니까 한 시간 반만 딱 자면 되겠다. 침대 옆 탁상에 휴대폰을 내려놓고 알람을 맞추는데 지구가 물었다.
“얼마나 주무실 거예요?”
“한 시간 반.”
“그럼 11시 20분이네요. 깨워 드릴 테니까 그냥 주무세요. 형 많이 피곤하시면 가끔 알람 못 들으시더라고요.”
정곡을 찌르는 말에 알람 설정하던 손을 잠깐 멈췄다. 그리고 그냥 못 들은 척 알람을 다시 11시 15분에 맞추고, 소리를 최대로 설정했다. 진짜 정신도 못 차릴 만큼 피곤한 거 아니면 알람 못 들을 일은 없는데.
그리고 정말 한 시간 반 뒤에 알람이 시끄럽게 울렸다. 울린 지 거의 3초 만에 정신은 깼는데 눈이 떠지질 않았다. 중간에 잠깐 자는 잠은 안 자느니만 못하다더니 그 말이 진짜 딱 맞다. 차라리 안 자는 게 덜 피곤했겠네. 일단 이 시끄러운 알람은 꺼야 하니까 더듬거리며 손을 뻗었는데 휴대폰 대신 사람 손이 잡혔다. 그리고 바로 알람 소리가 꺼졌다.
“천천히 일어나세요. 5분 남았어요.”
바로 귓가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간지러워서 있는 힘껏 이불을 끌어 올려 얼굴까지 덮었다. 그리고 곧바로 벌떡 일어나 침대 밖으로 나왔다. 진짜 요즘 머리부터 발끝까지 미쳐 돌아가는 것 같다.
분명 붙어있으면 안심되고 든든한데 방에만 같이 있으면 온몸으로 이상한 공기가 느껴지는 건 왜지. 이게 불편한 거야, 아니면 편안한 거야. 그전에 고백받았던 건 어떻게 된 거지.
입고 있던 반팔 티셔츠 위에 셔츠를 껴입으면서 가만히 앉아있는 지구를 힐끔 쳐다봤다. 왼쪽 귀에 이어폰을 꽂은 상태로 책상 위를 정리하는 얼굴은 더없이 평온해 보였다.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옷을 마저 입고 매니저 형에게 연락이 오기를 얌전히 기다렸다.
방송국에는 금방 도착했다. 오늘 하루 처음이자 마지막 스케줄은 지상파의 꽤 유명한 토크쇼였다. 물론 예능이었기 때문에 웃기는 게 중요한 촬영이었는데 몸으로 웃기는 데만 자신 있는 준은 굉장히 시무룩한 상태로 촬영을 마쳤다. 이번 촬영에서 의외로 활약한 사람은 지구였다. 본인 딴에는 솔직하게 꺼낸 말들이 너무 팩트 폭력이라 MC들이 신나서 몰아가더라.
“말빨을 꼭 키워야겠어요.”
“넌 말빨 대신 춤과 노래를 키워야 돼.”
“와…… 맞는 말이긴 한데.”
“천천히 하겠지. 그래도 많이 늘었잖아.”
“웬일로 형이 쉴드를 다 쳐줘요?”
항상 예준이 준을 어떻게 몰아가든 묵묵하게 있던 지구가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한 번 감싸줬다고 준이 깜짝 놀랄 정도로 지구는 평소에 주로 방관을 하는 파였다.
“그러니까 형이랑 연습 좀 해볼래?”
“……형이랑 노래 연습할 바에는 예준이 형이랑 할게요.”
준이 마치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것처럼 아연실색했다. 지구 친절하게 잘 알려주는데 왜. 하지만 준은 거듭해서 차라리 예준과 연습하겠다며 거절 의사를 확고하게 내비쳤다. 예준이 형 노래 못하고 랩만 하잖아.
“헐.”
매니저 형이 졸릴 때마다 씹으라고 차에 배치해둔 젤리를 한참 씹으면서 걷던 준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지는 젤리를 보며 절로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야, 젤리 다 쏟아졌다.”
“저거 가온이 형 아니에요?”
준이 입을 벌리고 가리킨 곳에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 가온이 서 있었다. 혼자 서 있는 건 아니고, 또래 남자애들 거의 일고여덟 명과 함께. 어쨌거나 반가운 얼굴이었다. 준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도란도란 옆 사람들과 대화 중이던 가온이 이쪽을 바라보더니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진짜 오랜만에 본다. 잘 지냈어?”
“전 당연히 잘 지냈죠. 형 진짜 반가워요.”
거의 분홍색에 가까운 염색을 한 가온은 스타일링 때문인지 사람이 굉장히 다르게 보였다. 그래도 웃는 얼굴은 여전히 한결같았다. 머리 색이 밝아지니까 전보다 웃는 게 더 돋보였다.
“저 방송 끝나고 바로 소속사 들어갔거든요. 세 달쯤에 뒤에 데뷔해요.”
저쪽에 서 있는 저 사람들이 다 같은 그룹 멤버들인 모양이었다.
“야, 가야지.”
일정이 촉박한지 유독 화장을 짙게 한 멤버가 손짓을 하며 가온을 불렀다.
“알았어. 저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다음에 다시 봬요!”
우리 다섯 명에게 일일이 인사한 가온이 급하게 같이 가자며 뒤돌아 뛰어갔다. 분홍색 머리가 공중에서 휘날리는 걸 보며 왠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마지막 방송 날에 꼭 데뷔하겠다며 마이크 쥐고 얘기했었는데, 진짜 딱 그 약속을 지키러 나오는구나.
“가온이 형 진짜 약속 빨리 지키네요.”
“칼같이 들어가서 칼같이 데뷔하고.”
“소속사 들어가자마자 데뷔조 되는 게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준이 다 떨어진 젤리를 주워서 다시 봉지 안으로 집어넣는 동안 멤버들은 기다려주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한발 늦게 이쪽으로 달려온 준과 자연스럽게 합류해서 차를 타고 바로 숙소로 향했다.
“너희 4월 중순쯤에 컴백 예정 잡혀 있거든.”
“두 달하고 조금 더 남았네요.”
“이제 이 주일만 더 쉬다가 새 활동 준비해야지.”
매니저 형이 핸들을 돌리면서 말할 때마다 차가 덜컥덜컥 흔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숙소에 도착한 차가 멈춰 섰고 바로 아까 나올 때 챙겨왔던 케이크를 조수석에 내려놨다.
“형 이거 드세요. 케이크.”
“어제 그거 남았냐?”
“네.”
“어쩐지 남을 것 같더라. 사이즈가 아주. 어쨌든 고맙다. 먹던 건 아니지?”
“절대 아니에요. 손도 안 댄 부분인데.”
쿨하게 케이크를 받아준 매니저 형에게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 숙소 현관까지 가는 그 짧은 순간에도 이리저리 주변을 살피는 건 이제 거의 버릇이 됐다. 습관처럼 지구 팔을 살짝 잡고 걷는데 지구는 내 속도를 잘 맞춰줬다.
처음 숙소에 왔을 때는 펜션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들어온 지 꽤 돼서 그런지 이제 우리 집처럼 익숙해졌다. 그래서 점점 방이 지저분해지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아까 옷 갈아입으면서 허물 벗듯이 두고 갔던 옷을 집어 들어 급하게 옷걸이에 걸었다. 엄청 지저분하게 사는 편은 아니었지만, 지구가 워낙 사람 사는 곳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심플하고 깔끔하게 살아서 거기에 최대한 맞춰주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씻자마자 바로 자려고 침대에 누웠는데 지구는 책상 앞 의자에 앉았다. 내일 회사 작업실에 가본다더니 마지막으로 작업 정리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평소에는 불 켜놓고도 잘 잤으면서 요 몇 달 끄고 잤다고 잠이 안 오나. 그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잠이 안 올 리가 없었다. 분명 3분 전까지만 해도 피곤했는데.
결국, 휴대폰을 켜서 농작물 수확을 시작했다. 휴대폰 너머로 얌전한 지구의 뒷모습을 곁눈질하면서 의미 없이 거의 두 시간을 보냈다.
“종이 떨어졌다.”
지구가 뭔가 적다가 실수로 팔꿈치로 미는 바람에 침대 바로 앞에 종이 몇 장이 순서대로 서로를 덮으며 차곡차곡 떨어져 내렸다. 바빠 보이니까 그냥 내가 주워주려고 침대에서 바로 몸을 일으켜 종이들 앞에 앉았다. 손바닥만 한 것들을 하나로 모아서 정리하는 도중에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적혀있는 글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거나, 내일을 같이 예상해보는 것. 혹은 좋아하는 인디 음악을 같이 듣는 것. 나란히 누운 새벽에 사소한 일상을 공유하는 조심스러운 시간.]
한줄 한줄 정갈한 글씨체로 적혀있는 문장들이 적혀있었다. 맨 위에 적힌 ‘사랑’이라는 단어 밑으로 나열된 것을 보니 가사를 쓰기 전에 전체적인 느낌을 정리한 것 같았다. 말할 때도 항상 신중하게 단어를 고른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좀 알겠다. 적힌 문장 하나하나에서 지구 특유의 느낌이 묻어났다.
“어떠세요?”
돌려줄 생각은 안 하고 종이 뭉치를 엉거주춤 손에 쥐고 앉아있었는데 지구가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추면서 물었다. 끈질기게 내 시선이 향하는 곳을 찾아서 쫓아오는 걸 보다가 종이를 바닥에 내려놨다.
“좋아.”
사소하고 담백한 느낌이 딱 본인 같았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정말 지구가 느끼는 사랑은 이런 느낌일 것 같았다.
“형 생각하면서 쓰고 있었어요.”
“…….”
웃는 얼굴을 마주하고 나서야 방금 전에 읽었던 글이 누구 얘기인지 알 수 있었다. 나란히 누워서 그날 스케줄 중에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고, 내일의 계획을 떠들고, 같이 노래를 듣고. 그냥 지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연애라고만 생각했다. 갑자기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순간적으로 심장이 쿵 떨어져서 바닥에 고꾸라졌다. 아까 수없이 죽어가던 예준의 캐릭터처럼. 야, 올라와. 얼른. 닦달했는데도 묵묵부답이었다. 말없이 방망이질로 대꾸하는 심장을 살리고 싶었지만 얘는 게임 캐릭터가 아니라 세이브가 불가능했다. 처음 그 상태로 다시 되돌릴 수도 없었고, 아예 초기화를 하고 다시 시작할 수도 없었다. 결론은 이제 돌이킬 수가 없다는 소리였다.
“아.”
망했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