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뷔를 피하는 방법-68화 (68/130)

25화

뜨끈뜨근해진 귀가 신경 쓰여서 괜히 만지작거리다 보니 금방 숙소에 도착했다. 평소처럼 편의점을 들러 간식을 사서 올라오는 발걸음이 평소보다 더 가벼웠다.

“휘영이 형, 씻고 나와서 한판 해요.”

“그래.”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방문 앞에 서서 게임 약속을 잡는 두 사람을 보며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한마디 했다.

“내일 생각해서 밤늦게까지 하지 말고 적당히 자. 게임하면서 너무 소리 지르지 말고.”

하지만 준과 휘영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듯 각각 욕실과 방으로 들어갔다.

내 방으로 돌아왔을 때는 한참 지구가 옷을 갈아입는 중이었다.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빠른 손놀림으로 풀어나간 지구가 졸업식이 끝나자마자 버리겠다던 교복을 옷걸이에 깔끔하게 걸더니 넥타이까지 가지런히 함께 내려놨다.

“안 버려?“

예상 밖의 행동이 이상해서 물었더니 지구가 제일 두꺼운 옷걸이에 툭툭 턴 마이를 걸며 대꾸했다.

“형한테 잘 어울리니까 내버려 둘래요.”

“네 교복인데 나는 왜?”

이유가 너무 뜬금없어서 순간 헛웃음을 흘렸더니 지구가 뒤를 돌며 말했다.

“나중에 한 번 입어주세요.”

그러면서 또 웃는다. 졸업식, 고백, 포옹. 세 가지가 함께 일어난 날이라고 하기에는 놀랍게도 평온했고,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내내 머리를 쥐어뜯게 했던 어색한 기류와 고민이 사라진 것만 빼면. 아, 사소한 배려 하나하나가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도 빼야겠다. 이렇게 하나하나 빼다 보면 끝이 없을 것 같아서 그냥 웃으면서 대답했다.

“네 교복 나한테 클걸.”

* * *

일이 휘몰아치다가 갑자기 느슨해지니까 몸도 마음도 다 편해지고 스케줄을 소화하는 것도 한결 가벼워졌다.

무엇보다 연애를 시작한 이후로 방에서 보내는 별거 아닌 시간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별로 특별한 게 생긴 건 아니고 그냥 같은 침대 위에 누워서 노래를 듣거나 자기 전에 한참 얘기를 나누는 식이었는데, 이 사소한 일상이 여러모로 간질간질하고 행복했다.

“촬영이 벌써 다음 주에요?”

“참가자들 합숙은 이미 예전에 시작했나 봐. 나한테 좀 늦게 출연 제안 온 거고.”

대화는 보통 지구가 뭔가를 묻고 내가 대꾸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최근 대화 주제는 거의 내가 촬영하게 될 서바이벌 프로그램 예능이었다.

“프로필 봤는데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수두룩하더라고.”

평균 나이가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대부분 20대 중반이었다. 아, 내가 스물한 살밖에 안 먹었으니까 다 나이가 많을 수밖에 없구나.

“저한테는 형 춤이 최고인데요.”

“네 눈이 판단 기준이 아니잖아.”

어이가 없어서 냉큼 대답했더니 지구가 말없이 손을 뻗어 내 머리카락을 살살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한동안 안 하더니 졸업식 이후로 간간이 습관처럼 매만졌다.

“춤추는 사람들 경력에 예민하잖아. 자존심도 있고. 난 대학도 안 나왔는데.”

자기보다 어린놈이 멘토로 온다는 것부터 언짢을 게 뻔했다. 게다가 대학도 안 나왔으니까 이렇다 할 스펙도 없고. 단순히 한국예고 졸업 정도는 스펙의 시옷 자도 그리지 못할 테고 애초에 나를 알기는 할지 의문이었다.

“춤추는 사람들이면 보면 딱 알 테니까 상관없을 거예요.”

“그건 좀.”

“진짜요. 제가 형 처음 봤을 때가 한참 춤 때문에 애먹을 때였거든요. 근데 보자마자 놀라서, 그냥 자연스럽게 존경하게 되던데요.“

“왜 애먹었는데?”

“같은 데뷔 조에 있던 형들하고 비교가 됐거든요. 맨날 놀림 받는 것도 싫었고.”

함께 연습하면서 봐온 지구는 누가 봐도 노력파였다. 재능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닌데 동작 하나를 될 때까지 물고 늘어지는 타입. 일곱에 대형 엔터테인먼트 데뷔 조에 들어갈 정도의 실력이 그때라고 해서 심하게 뒤떨어지지는 않았을 텐데, 어린애를 얼마나 기죽였을지가 눈앞에 훤했다.

“충분히 잘 춰. 섬세한 건 네가 나아.”

“제가요? 누구보다요?”

“그, 스페이스 춤 잘 추는 애.”

“아, 민서진보다요?”

“응.”

“형만 그렇게 생각해주시면 됐어요.”

지구가 웃으면서 침대에 편하게 누웠다. 오늘은 본격적인 컴백 준비에 들어가기 딱 하루 전이었다. 내일부터 다음 활동 곡들을 받고 쉴 틈 없이 연습해야 하니까 이렇게 평화롭게 보낼 수 있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2주일 뒤에 해외 공연도 있고.

침대 위에서 뒤척이면서 곧 다가올 춤 연습을 생각하며 괜히 팔을 쭉 늘려보는데 지구가 탁상 위에 있는 스피커를 켜며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이 노래 좋다.”

“이분 노래 다 좋아요. 목소리도 독특하고.”

며칠 전에 들고 온 소형 블루투스 스피커는 외형도 예뻤지만, 음질도 깨끗했다. 좋아하는 곡이라며 지구가 보여준 화면에는 좋아요가 백 개도 채 찍히지 않은 노래가 재생되고 있었다. 매일 이렇게 좋아하는 곡들을 들려주는 시간마다 지구는 항상 찾은 게 신기할 정도로 처음 듣는 곡들만 가져오곤 했다. 보통은 잔잔한 곡들이었고 가끔가다 파워풀한 곡들도 몇 개 섞여 있었다.

“그럼 이것도 들어주세요.”

뮤직 어플을 종료한 지구가 개인 뮤직 플레이어 앱에 접속했다. 제목에 0215라고 적혀있는 건 날짜 같았다. 재생 버튼을 누르자 반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적당히 신나는 분위기의 리듬이 계속 무한 반복됐다. 50초가 넘어가도 가사가 나오질 않는 걸 봐서는.

“직접 만든 거야?”

“그냥 전체적인 느낌만 잡은 거예요.”

새벽까지 책상 앞에 앉아서 하더니, 작곡 배우겠다고 한지 얼마나 됐다고 반주를 하나 만들어 왔다. 별로 독창적이라거나 퀄리티 있는 작품은 아니었지만 혼자 힘으로 이걸 만들어온 게 대견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칭찬을 끌어와 해줬다.

“듣기 좋다. 잘 만들었네.”

사실 더 칭찬해주고 싶었는데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한마디만 하고 말았다. 그 말 한마디에도 지구는 만족하는지 웃으면서 정지 버튼을 눌렀다. 방을 채우던 반주가 순식간에 뚝 끊어졌다.

“열심히 배우려고요. 완벽한 제 곡을 만들 수 있을 때까지.”

“지금도 열심히 하는데.“

뻐근한 팔을 뻗어 조금 위에 있는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 졸업도 했고 컨셉도 바뀌니까 머리 색이 어떻게 변할지 몰랐다. 검은색이 제일 예쁘긴 한데, 다른 색도 다 잘 어울릴 것 같고. 결 좋은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머릿속으로 혼자 염색 체인지 시뮬레이션을 펼치고 있는데 순간 손이 딱 잡혔다.

“그럼 형이 제일 먼저 들어주셔야 해요.”

마주 잡은 손을 꼼지락꼼지락 움직이던 지구가 곧 살짝 깍지를 꼈다. 커다란 손에 붙잡힌 그 상태로 눈이 마주쳤다. 눈을 깜빡일 생각도 하지 못하고 한참 멍청하게 쳐다보기만 하는데, 천천히 웃어 보인 지구가 손을 놓더니 침대에서 일어났다.

저 잠깐 나갔다 올게요. 벽걸이 후크에 걸려있던 모자와 마스크를 집어 들고 나가는 지구에 순간 참고 있던 숨이 뒤늦게 터졌다. 와중에 들고 간 모자는 내 거였다.

* * *

“이번 컨셉은 저번 활동의 연장선처럼 가는 거야.”

오랜만에 도착한 회의실에서 사장님이 손바닥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꺼낸 말이었다. 중 2병 같은 것만 아니면 될 것 같은데. 옆에서 중얼거리는 준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어떤 느낌인데요?”

“저번 컨셉이 꿈꾸는 소년들이었으면 이번에는 좀 더 심오하게….”

사장님은 뭔가를 애타게 설명하고 싶은 듯 손을 배배 꼬아가며 인상을 찌푸렸지만 전달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옆에 앉아있던 매니저 형이 불쑥 끼어들어 상황을 중지시켰다.

“세 곡을 받아왔는데 들어보고 어떤 게 제일 타이틀곡으로 좋을지 골라봐.”

저번 활동 때는 이미 정해놓은 타이틀곡을 툭 던져줬는데 이번에는 우리에게 선택권까지 줬다. USB를 노트북에 연결한 매니저 형이 파일을 열며 말했다.

“나머지 두 곡은 수록곡으로 들어갈 거야.”

차례로 재생되기 시작한 곡들은 다 묘하게 심오했다. 그래도 저번 타이틀곡을 생각하면 가사의 의미 전달도 정확한 편이었고 반주도 괜찮았다.

“다 느낌은 저번 것보다 세네요.”

“저번 컨셉이 꿈의 인트로였으면 이번 건 좀 더 나아간 느낌? 작곡가들이 좀 더 격정적인 느낌을 담았다고는 하더라.”

턱없이 부족한 회사의 직원 탓에 매니저 형은 잘 알지도 못하는 음악 쪽에까지 손을 대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디렉터가 없으니 바깥에서 노래와 춤도 받아오는 입장이고. 사장님도 제대로 모르는 컨셉까지 대신 신경 쓰는 매니저 형이 안타깝기까지 해서 결국 우리끼리 이해해보기로 하고 노트북 앞으로 모여 세 번씩 더 들었다.

“타이틀곡으로는 2번이 제일 낫지 않아요?”

“나도. 제일 중독성 있는 것 같아.”

“3번도 괜찮긴 한데 딱 들어서 꽂히는 건 2번 같아요.”

“2번 만장일치에요?”

모두가 2번을 선택한 와중에도 성급히 해서는 안 된다며 두 번씩 더 듣고 나서야 결정했다. 사장님이 임시로 고용한 디렉터가 와서 정확한 컨셉을 설명해주고 2번 곡 안무 영상까지 받고 나서야 회의가 끝났다.

최대한 빨리 곡을 숙지해서 전체적으로 녹음도 해야 했고, 앨범 재킷부터 뮤비 촬영 일정도 빡빡했다.

“이거 4월에 컴백할 수는 있는 거예요? 한 달 밖에 안 남았는데.”

눈앞에서 무한 반복되는 안무 영상을 보며 준이 말했다. 이번 안무는 저번 것보다 조금 힘 있는 느낌이었다. 저번 곡처럼 다 뜯어고치고 싶은 퀄리티가 아니라 나름 만족하면서 동작을 따고 있는데 옆에서 한창 바쁘게 뭔가를 하던 매니저 형이 영상을 멈췄다.

“오늘부터 안무랑 곡 숙지는 계속해야 하는데, 이거 빼고도 너희 스케줄 많은 거 알지? 준이는 내일 출국하고 지구는 발로 뛰는 예능 있고…….”

다 말하기 힘들 정도로 늘어난 개인 스케줄에 매니저 형이 말하다 말고 구레나룻을 살짝 움켜쥐는 이상행동까지 보였다. 준은 여행 가는 프로그램에 합류하게 돼서 5일 정도 해외에 나가 있을 예정이었고 나머지 멤버들도 스케줄이 주르륵 잡혀 있었다.

“앨범 촬영은 최대한 앞쪽으로 미뤄서 빡세게 할 거야.”

겨우 설명을 끝낸 매니저 형이 숨을 몰아쉬었다.

“진짜 많네요. 경호 형 숨넘어가겠어요.”

“인기의 척도지. 힘들겠지만 신난다고 생각해. 준이는 다시 한국 돌아오기 전까지는 연습 못 할 테니까 다녀와서 열심히 하고. 2주 뒤부터 안무가분 오셔서 봐주실 거야.”

“아……. 제가 연습 제일 많이 해야 되는데.”

남들 세 시간할 때 다섯 시간을 해야 하는 준이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러다가도 바로 여행 갈 생각에 들떠서 떠들기 시작하는 준을 데리고 1대 1로 안무를 알려줬다. 여행 다녀오면 다 까먹겠지만 가기 전에 잠깐이라도 빡세게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저녁을 먹고도 한참 연습을 하다가 아무래도 일찍 출국하는 애를 더 지치게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적당히 재웠다.

* * *

다음 날 캐리어를 들고 로마로 떠난 준을 배웅하고, 다시 연습. 그다음 날부터는 하루 종일 풀로 연습. 개인 스케줄로 중간중간 멤버들이 연습실을 비우든 말든 서로에게 관심도 없을 정도로 빡세게 연습만 했다.

어제는 노래 부르다가 랩 파트 한 번만 불러 달라고 예준을 불렀는데, 휘영과 나란히 스케줄 갔다는 소리를 듣고 언제 나갔나 싶어 놀랐을 정도였다.

“형 잘 다녀오세요.”

그리고 오늘은 드디어 내가 자리를 비우는 날이었다. 개인적으로 정장을 입고 오라길래 매니저 형이 들고 온 셔츠를 팔에 끼워 넣는데 지구가 침대에서 일어나 조금 빠른 배웅을 했다.

“넌 바로 연습실 가?”

“아니요. 저 헬스 먼저하고 가려고요.”

지금도 보기 좋은데 지구는 활동 전에 관리하겠다며 헬스를 끊었다. 춤 연습만 해도 충분히 빡센데 그거까지 할 시간이 있냐고 했더니, 무리 가지 않게 조금씩만 한다고 열심히 나를 안심시켰다. 지구는 연습만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자기 관리도 참 철저했다.

단추를 다 잠그고 넥타이를 매려는데 손에서 자연스럽게 넥타이가 빠져나가더니 지구가 아무렇지 않게 대신 매주기 시작했다. 나도 솔직히 잘 매는 편은 아닌데 얼마 전에 교복을 벗은 애가 뭘 이렇게 매듭을 잘 짓나 싶었다.

“왜 이렇게 잘 묶어?”

“공부 좀 했어요.”

이런 걸 대체 누가 공부해. 황당하게 내려다보는 나를 모르는 지구는 깔끔하게 묶인 넥타이를 놔주며 침대 옆에 걸어뒀던 마이까지 집어서 팔을 넣으라는 듯 들어줬다. 혼자 입을 수 있다고 하려다가 저러고 서 있는 게 귀여워서 그냥 아무 말 없이 팔을 끼워 넣었다.

“누가 시비 걸면 프리즈 한 번 보여주세요.”

“……거기서 갑자기?”

헛웃음을 치든 말든 지구는 어깨를 톡톡 치며 옷매무새까지 정리해줬다. 누가 보면 스타일리스트인 줄 알 정도로 세심한 손길이었다. 드디어 다 끝냈는지 살짝 떨어져서 위에서부터 쭉 훑어보더니 말없이 눈만 깜빡이던 지구가 살짝 머뭇거렸다. 뭔가 할 말이 더 있나 싶어 눈을 마주 봤다. 지구는 아래로 떨어뜨린 두 손을 가만두질 못하고 이리저리 매만지더니 한 박자 늦게 인사했다.

“잘 다녀오세요.”

배웅을 받고 방에서 나와보니 예준과 휘영이 나란히 앉아 뭔가 하고 있었다. 뭐 하냐고 물으려다가 딱 봐도 안무 영상을 보는 것 같길래 그냥 구두에 발을 끼워 넣는데, 휘영이 휴대폰을 든 상태로 손을 흔들었다.

“언제쯤 와?”

“나도 잘 모르겠는데 8시까지는 갈걸.”

“그럼 기다렸다 저녁같이 먹자. 열심히 하고 와.”

“형은 배고프니까 이왕이면 좀 더 일찍 와줬으면 좋겠어.”

기다려주겠다는 휘영의 말에 훈훈해졌던 가슴은 예준 덕분에 금방 가라앉았다. 싸해지는 표정을 감출 길이 없어 마음껏 내비쳤더니 예준이 슬쩍 말을 고쳤다. 천천히 와, 동생.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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