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뷔를 피하는 방법-69화 (69/130)

26화

숍에 들러서 메이크업을 받고, 바로 합숙이 이루어지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서울 외곽에 있는 청소년수련관까지 가는데 시간이 꽤 걸려서, 중간에 내가 담당하게 될 C 팀 프로필을 다시 넘겨봤다.

고등학생 한 명과 스무 살 한 명을 빼고는 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다. 일단 나는 이름과 얼굴을 열심히 매칭시키며 외웠다.

5층으로 이루어져 있는, 규모가 꽤 큰 청소년수련관은 임시로 프로그램 촬영 장소로 사용되고 있었다. 스태프는 나를 3층의 수많은 방 중에서도 문에 C라고 적혀있는 방으로 데려갔다.

“여기 앉아계시다가 촬영 시작되면 C 팀 들어올 거예요.”

자세히 설명을 들어보니 벌써 2화분은 촬영이 끝난 상태였다. 약 3주 전에 이곳에 들어온 참가자들은 이미 한 번씩 개인 미션도 수행하고, 팀도 나누고, 과제 곡까지 받았다고 했다. 이제부터 내가 그 과제 곡 연습을 도와주면 된다는데.

“그냥 편하게 반말하시면 돼요.”

“저보다 나이 많으셔도……?”

“그래도 참가자랑 멘토 사이니까요.”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멀어져 가는 스태프에 한 박자 늦게 머릿속으로 상황을 그려봤다. 안녕. 내가 앞으로 너희를 담당하게 될 멘토야. 춤 똑바로 못 춰? 팔 각도가 그게 아니잖아. 이런 식으로 하면 너네 다음 주에 다 탈락이야. 상상의 언성이 높아졌을 때 문이 열리더니 일곱 명이 우르르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던 사람들과 눈이 딱 마주쳤다. 순간 딱딱하게 변해가는 눈빛들을 실시간으로 감상하며 일단 같이 고개를 숙였다. 눈빛에 이미 불신이 가득 얽혀있긴 했지만 일단 납득시키는 건 뒤로 미뤄놓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아, 맞다. 반말하랬는데.

“앞으로 여러분들이랑 쭉 함께하게 될 C팀 멘토입니다.”

다시 말을 정정할까 하다가 그냥 존댓말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스태프는 편하게 반말로 해달라고 했지만 그게 더 불편하기도 하고, 막말하지는 않을 테지만 이미지적인 부분에서도 이쪽이 나을 것 같았다. 최대한 평범하게 인사를 마치자마자 형식적인 박수 소리가 쏟아져 내렸다.

뭔가 진행은 계속해야 하는데 할 말이 없었다. 아마 본격적인 연습에 들어가기 전에 멘토와 팀원들이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는 시간인 것 같았는데, 아무도 먼저 입을 떼는 사람이 없었다.

아, 분위기 진짜. 맨 왼쪽 끝에서부터 눈만 열심히 굴리다 결국 아무 말이나 주절이기로 했다.

“열심히 하면 다 할 수 있으니까요. 잘 해봤으면…… 좋겠네요, 네.”

당장 얼마 전까지 한낱 참가자였던 사람이 약 반년 만에 멘토로까지 출세했는데, 어색하지 않은 게 더 이상하지.

스스로 합리화를 시키면서 결국 어이없이 인사 시간을 다 흘려보냈다. 무표정한 얼굴로 살짝 고개 숙이고 서 있는 C팀 멤버들도 내가 누군지 전혀 궁금해하는 것 같지 않았으니, 쓸데없는 소개는 필요 없겠다고 생각했다.

바로 연습에 들어가겠다며 스태프가 태블릿PC와 이어폰을 건네줬다. 며칠 전에 휴대폰으로 전송받았던 C팀의 과제 곡은 올해 5년 차 아이돌 그룹의 히트곡이었다.

칼군무로 워낙 유명한 데다가 중독성까지 있어서 케이팝 커버댄스를 하는 사람들에게 한 번씩은 다 스쳐 지나갔을 곡이었다. 발 스텝이 굉장히 고난도인데 딱딱 맞으면 그거보다 멋질 수 없다는 춤. 학창시절에 연습했던 적도 있어서 이미 익숙했지만, 정확하게 보기 위해서 세 번 정도 더 자세히 감상하고 스태프에게 태블릿PC를 돌려줬다.

“그럼 일단 춤만 한 번 볼게요.”

노래를 내가 틀어야 하나. 주변에 스피커가 있나 하고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팀원 하나가 나와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본인이 재생시키고 내려놓고 다시 대형으로 들어가려면 힘들 것 같아서 팔을 뻗었다.

“이리 주세요. 제가 틀게요.”

“아, 네.”

팀원이 본인 자리로 돌아갈 때까지 기다리다가 바로 재생 버튼을 눌렀다. 시작하자마자 딱딱 각을 맞춰 넓게 퍼지는 걸 만족스럽게 본 지 30초도 안 돼서 대형은 박살이 났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안 맞는 줄 하며, 안무도 다 못 외웠는지 1절부터 흐지부지했다. 일단 하이라이트까지는 지켜보려고 했는데 동선이 꼬였는지 어깨를 살짝 부딪치는 두 사람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정지 버튼을 눌렀다.

“어…….”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총체적 난국?

아무리 과제 곡을 이틀 전에 받았다고는 하지만, 합숙까지 하면서 하루 종일 했으면 적어도 이거보다는 나아야 할 텐데. 춤 한 번도 안 춰본 사람들도 아니고. 뭐부터 지적해야 할지 막막해서 가만히 있다가 일단 전체적인 것부터 이야기하기로 마음먹고 입을 열었다.

“혹시 연습 안 했어요? 지금 처음 하는 거예요?”

“그, 저희 파트 정하느라.”

“파트를 이틀 내내 정했어요?”

“……죄송합니다.”

리더로 보이는 팀원이 고개를 푹 숙이면서 사과하는 걸 보면서 부담감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왠지 모르게 마주 고개를 숙이면서 함께 사과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손가락만 어쩔 줄 몰라 하며 허공에서 계속 움직였다.

“아, 그냥 물어본 거예요. 연습은 어느 정도 했어요?”

솔직하게 대답만 들으려고 최대한 친절한 목소리로 물었는데, 팀원들이 대답 대신 서로 시선만 주고받았다. 어색한 기류에 내가 다 답답해질 지경이 됐을 때 저 구석에 있던 팀원 하나가 손을 들었다.

“다섯 번 정도…….”

말하는 목소리가 땅을 파고 들어갈 정도로 작았다. 못할 만했네. 노래를 이틀 전에 받았는데 고작 다섯 번 연습했다는 게 말이 되나 싶어서 쳐다보는데 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눈을 마주칠 수는 없었다.

얘네 혹시 다 나처럼 대타로 출연자 수 맞추려고 들어왔나? 간절함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연습량에 한참 고민하다가 결론을 내렸다. 어쩌면 정말로 파트 정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있어서 오래 걸렸을 수도 있고,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연습을 못 한 걸 수도 있으니까. 일단 안무 숙지부터 해야 할 것 같아서 스태프에게 태블릿PC를 다시 받아왔다.

“일단 영상 계속 보면서 안무 숙지하는 게 우선이에요.”

어쩌다 내가 춤 따는 것부터 봐줘야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일단 상황이 급하니 어쩔 수 없었다. 팀원들을 동그랗게 모여 앉게 한 다음에 중앙 자리에 앉아 태블릿PC를 내려놓고, 받아온 종이를 펼쳐 펜을 들었다.

“도입부는 괜찮았는데 랩 파트 들어가는 순간부터 대형이 다 무너지잖아요. 이게요, 동선이 꼬이기 쉬워서 그래요. 2번이 4번 뒤로 확 치고 들어갈 때 이렇게 곡선으로…….”

최대한 알기 쉽게 동그라미를 그려 동선 이동을 설명하기 시작하자 팀원들은 나름 고개까지 끄덕이며 들었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간에 일단 잘 들어주는 것 같아 1절만 설명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까지 연습하고 계속 고치고 하면 될 것 같아요.”

“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일곱 명이 우르르 방을 빼져 나갔다. 어디를 가나 싶어서 옆을 돌아보자마자 스태프가 따로 연습실이 있다고 알려줬다. 서바이벌 ID 때보다 스케일이 훨씬 크구나 싶어서 볼 것도 없는 방만 쭉 돌아보며 구경의 시간을 가졌다. 기껏해야 거울에 비치는 내 얼굴만 실컷 봤지만.

그리고 팀원들은 내 퇴근 시간까지 방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멘토에게 검사나 평가를 받는 건 자유였는데, 스태프 말을 들어보니 다시 들어오지 않는 팀은 C팀이 유일하다는 것 같았다. 뭐 때문인지 대충 알 것 같아서 나도 딱히 기다리지는 않았다. 한마디 말도 없이 조용하던 팀원들이 방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시끌벅적해진 것만 봐도 대충 답 나오고.

“오늘은 그만 가셔도 될 것 같아요. C팀 애들이 연습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좀 더 확실하게 하고 피드백 받으려나 봐요.”

“네. 수고하셨습니다.”

멘토가 이 방에 존재하는 건 고작 3시간뿐이었지만 나름 바쁜 사람인데 서운하긴 했다. 연습실 가서 연습하기도 빠듯한데 매일 이렇게 시간을 쓸데없이 빼야 한다니, 계속 와서 물어봐 주기라도 하면 몰라. 지구가 매준 넥타이를 소중하게 어루만지며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옆방에서 나오는 사람과 만났다.

“안녕하세요.”

“어머. 안녕하세요.”

B팀이라고 적힌 방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TV에서 자주 보이는 얼굴이었다. 정확히 몇 년인지는 모르겠지만 몇 달 전에 15주년 콘서트를 했던 댄스 가수. 잘은 몰라도 어쨌거나 대선배님인 건 확실했기 때문에 바로 고개부터 숙였다.

이제 좀 정확히 알겠다. 옆방 멘토가 이런 분인데, 나 같아도 인정 못 하겠다.

“서바이벌 ID 다 챙겨봤어요. 진짜 잘 추시던데요?”

“아니에요. 선배님한테 칭찬 들을 실력은 안 되는데.”

“겸손하시네요. 저 방송 보면서 깜짝 놀라서 투표도 했는데. 어휴, 동작 디테일이 저도 못 따라가겠던데요? 사실 아이돌이 멘토로 온다고 했을 때 좀 걱정했거든요. 근데 하현 씨 정도면 가르치기 충분한 실력이라 괜찮겠어요.”

대선배님의 과한 칭찬에 어쩔 줄 몰라서 고개만 푹푹 숙이다가 문득 떠오르는 조금 전 상황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B팀은 피드백 받으러 자주 오나요?”

“엄청 와요. 방금 나갔다 싶으면 또 들어오고.”

역시 우리 팀만 그랬구나. 나름 잘 알려줬다고 생각했는데 뭐가 문제인지 몰라 잠시 고민해보자 이유가 바로 나왔다.

그냥 나 자체가 문제네. 데뷔한 지 2개월도 안 된 아이돌. 이미 색안경을 쓰고 보는데 친절한 설명이 귀에 들어올 리가. 질문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한 듯 선배님이 웃으며 어깨를 두드렸다.

“원래 자기 주 분야일수록 예민하잖아요. 그리고 얘네가 천재급으로 재능 있는 애들도 아니거든요. 솔직히 실력으로 뭔가 못 보여준 애들도 많고.”

“아…….”

“멘토가 말로만 지적해주는 역할이라 처음부터 납득시킬만한 경력이 없는 이상은 좀 힘들어요. 그래도 열심히 해서 결과가 잘 나오면 자연스럽게 믿게 되지 않을까요?”

선배님은 조언을 끝내자마자 슬슬 가보겠다며 매니저와 함께 복도 끝으로 멀어져 갔다. 그러니까 결과가 중요하다는 말이지. 그 한마디에 갑자기 오기가 생겨서 연습실로 가는 내내 내일 계획을 짜느라 정신이 없었다.

연습실에 도착해 편한 옷으로 갈아입자마자 매니저 형이 도시락을 내려놨다. 오늘은 불고기였다.

“형, 오늘 괜찮으셨어요?”

본인 도시락은 가져오지도 않고 내 도시락 뚜껑부터 열며 지구가 물었다. 지구가 예쁘게 쪼개서 건네준 나무젓가락으로 계란말이를 하나 집으면서 대꾸했다.

“그냥. 그랬어.”

“아직 다들 잘 몰라서 그래요. 인정받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얘는 진짜 눈치가 얼마나 빠른 거야. 별말도 안 했는데 벌써 내 속을 다 읽어버린 지구가 맑게 웃으며 내 등을 토닥였다.

“일단 신경 쓰지 말고 많이 드세요.”

그러더니 본인 도시락통에 계란말이를 집어 내 밥 위에 가지런히 올려뒀다.

“야, 나 계란말이 안 좋아해.”

다급하게 말했더니 지구가 내 도시락통을 물끄러미 보면서 웃었다.

“근데 벌써 네 개를 다 드셨어요?”

정말 텅 비어있는 공간에 할 말을 잃고 눈만 찡그리는데 지구가 젓가락을 뻗어 한쪽에 있는 샐러드를 집어갔다.

“대신 이거만 빼고 편식하시면 안 돼요.”

지구가 자연스럽게 커다란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길래 알았다고 채소를 집어 드는데 예준이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불고기를 떨어뜨리는 모습을 봤다. 그냥 슬쩍 머리 위에 있는 지구 손을 밀어내고 아무 일도 없던 척했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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