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C팀은 결국 전체 탈락이라는 최악의 결과를 받았다. 시작부터 심사위원들 얼굴이 조금씩 굳어간다 싶더니 2절 하이라이트에서 도미노처럼 우르르 대형이 무너진 게 가장 큰 문제인 것 같았다.
멘토 입장에서 봐도 암담한 실력에 솔직히 2명 이상은 못 살아남겠다 싶었는데 결국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하고 다 떨어졌다.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열심히 가르쳤지만, 본인들이 흡수를 못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짧은 멘토 생활을 끝내고 다시 연습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춤 연습이 거의 완벽하게 끝나갈 때쯤에 해외에 나갔던 준이 돌아왔고, 정말 본격적인 컴백 준비가 시작됐다.
연습시간이 다른 멤버들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준을 1대 1로 가르치고, 노래 연습도 빡세게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숙소에서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오늘은 지옥의 녹음 날이었다. 저번 활동보다 파트가 많이 줄어든 데다가 그때보다는 실력이 좀 나아졌지만, 여전히 불안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음…….”
역시나 첫 소절부터 작곡가의 입에서 의미심장한 소리가 나왔다.
“다시 한번 해볼래?”
당연하게 시작된 무한 녹음의 늪에 다시 헤드셋을 끌어 올렸다.
“조금만 더 올려보자.”
끝음 끊지 말고 쭉 끌고 가야지. 좀 감정을 실어서 불러봐. 다시 부르면 부를수록 늘어가는 지적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결국, 조금 쉬었다가 다시 가자는 말에 일단 앞부분만 녹음하고 부스에서 빠져나왔다. 보컬 트레이너도 전보다는 많이 좋아졌다고 했는데 긴장해서인지 평소보다 목소리가 유독 뻣뻣했다.
“형, 이리 와보세요.”
다음 타자로 휘영이 녹음 부스로 들어간 사이에 제일 구석에 있는 소파에서 혼자 악보를 보고 있던 지구가 조용히 불렀다. 그러더니 불쑥 물을 내밀었다.
“나도 물병 있는데.”
저쪽 테이블에 놓인 생수를 가리켰더니 지구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이거 뜨거운 물이랑 섞어서 따뜻한 물이에요. 지금 목 안 좋으시잖아요.”
“아프진 않은데.”
“소리가 건조해서요. 일단 따뜻한 거로 목 좀 축이고 계세요.”
가만히 앞자리에 앉아서 물을 마시는 동안 지구는 옆에서 사소한 조언들을 얘기했다. 워낙 목소리가 좋아서 하나도 빠짐없이 듣긴 했는데 그걸 실제로 부를 때 적용할 수 있냐 없냐는 완전히 달랐다. 휘영이 나오자마자 다시 들어간 부스에서 겨우 오케이를 받고 지쳐 나왔을 때는 목이 다 지친 상태였다.
“형은 부스 한 번 들어갈 때마다 십 년씩 늙어 나오는 것 같아요.”
“네 미래기도 하잖아.”
“아…….”
지친 내 모습이 뭐가 그렇게 웃긴지 소파까지 팡팡 내리치며 웃던 준이 한순간에 웃음기를 싹 지웠다. 방금 들어간 지구가 나오고 나면 준의 차례였다.
비어 있는 옆자리에 앉자마자 지구의 녹음이 시작됐다. 사장님의 억지로 인해서 내 파트가 제일 많았던 저번 활동과 달리 이번에는 메인보컬인 만큼 하이라이트는 거의 지구 파트였다. 애초에 하이라이트가 너무 높아서 올라가는 멤버가 지구밖에 없었다.
“저 형은 진짜 잘 부르는 것 같아요.”
언제 챙겨온 건지 주머니에서 목캔디를 꺼내 먹으며 준이 순수하게 감탄했다. 말마따나 언제 들어도 목소리가 참 좋았다. 적당히 낮고, 목소리에서까지 다정함이 뚝뚝 묻어나는 게 들을 때마다 낭만적인 노래를 부르면 잘 어울리겠다 싶은 목소리였다. 좋은 목소리에 노련함이 더해지니 뛰어난 실력이 나오는 건 당연했다.
단 몇 분 만에 녹음을 끝내고 나온 지구가 부스 밖으로 나오는 걸 보면서 괜히 뿌듯해졌다. 나중에 노래 불러 달라고 해볼까. 혼자 머릿속으로 어울릴 것 같은 곡 리스트를 작성하는데 지구가 앞으로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왜 웃으세요?”
그제야 웃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당황해서 급하게 입꼬리를 끌어내렸다.
* * *
새벽부터 다들 분주했다. 어제 뮤직비디오 촬영을 했는데, 야외촬영인 데다가 소품이고 장비고 다 말썽을 피우는 바람에 생각보다 딜레이가 심하게 됐다. 덕분에 자정이 넘어서 숙소로 돌아갔는데 해외 공연 스케줄 때문에 출국을 위해 몇 시간 자지도 못하고 일어나야 했다.
“형 세수 꼭 해야 할까요?”
“솔직히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
공개된 스케줄이니 환영홀에 사진을 찍으러 온 홈마들이 많을 게 확실했다. 더러운 꼴로 사진이 찍히고 싶지 않으면 씻으라고 했더니 준이 아무 말 없이 욕실로 들어갔다. 저렇게 세수하는 것조차 귀찮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피곤하지도 않은지 열심히 짐을 챙기는 지구도 있었다.
“뭘 그렇게 챙겨?”
“지금 가면 3일이나 있잖아요. 시간 아까우니까.”
언제 생각해도 참 성실하다고 생각하며 뒤에서 조용히 옷을 입었다. 3월이라 아직 싸늘하긴 하지만 우리가 가는 나라가 딱 봄 날씨라고 해서 고민하다가 옷장에서 회색 후드집업을 꺼냈다. 지금 입기에는 좀 얇아서 넣어두고 있었는데 거기 가면 입기 딱 좋을 것 같았다.
“형.”
“왜?”
후드집업에 팔을 끼워 넣는데 의자에 앉은 상태로 고개만 뒤로 꺾은 지구가 넌지시 물었다.
“저 겉옷 하나만 빌려주세요.”
그 말에 슬그머니 바로 옆에 붙어있는 열린 옷장으로 시선이 갔다. 두 번을 보고 한 번 더 봐도 옷장 안은 빽빽하게 가득 차 있었다. 데뷔 서포트로 받았던 옷들부터 시작해서 개인적으로 산 옷들까지 입을 게 모자라 보이지는 않았다. 워낙 무채색을 좋아해서인지 전체적으로 칙칙한데 탈취제를 놓은 건지 좋은 냄새가 나는 옷장을 쭉 둘러보다가 그냥 내 옷장으로 손을 뻗었다.
“이거 입을래? 커서 맞을 거야.”
편한 게 좋아서 일부러 큰 사이즈로 주문한 검은색 후드집업을 옷걸이에서 빼서 건넸다. 나름 아끼는 옷이라 자주 입지 않는 거였는데 지구가 옷을 받아들며 물었다.
“이거 형이 제일 아끼시는 거라면서요.”
그런 소리를 언제 했더라. 그러고 보니 예전에 한 번 인터뷰 때 입고 가서 그런 말을 했던 것도 같았다. 이런 사소한 걸 다 기억하고 있는 게 신기해서 고개 돌려 쳐다보다가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한소리 뱉었다.
“네가 더 소중해.”
“……네?”
당황한 듯 항상 나긋하던 목소리에서 삑사리가 났다. 딱 거기의 두 배만큼 당황해서 입만 벌리고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다가 그냥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니까.
지구는 더 이상 짓궂게 물어보거나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는데, 그 틈을 타서 옷장 문을 발로 걷어차서 닫았다. 쾅 소리와 함께 쑥스러움이 아주 약간 사라졌다.
공항까지 가는 길은 길지 않았다. 그리고 본격적인 싸움은 거기서부터 시작이었다. 마스크 쓰고, 집업에 달린 모자 쓰고 손을 흔들면서 갈 때까지는 좋았다. 사람이 좀 많긴 해도 잘 배치된 경호원들과 옆에서 잡아주는 지구도 있어서 괜찮았는데 환영 홀에서 벗어나는 순간부터 고난의 시작이었다.
출국 심사장 줄에 서 있는 동안 계속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게 비행기 안에서까지 이어졌다. 개인 비행기도 아니고 일반인들도 전부 타는 비행기니까 사진이 찍히는 건 이해하지만 쉬지 않고 계속 찍히고 있는 게 느껴지니까 불편했다.
“형.”
오늘따라 내 옆에 앉겠다고 먼저 자원한 준이를 깔끔하게 내치고 옆자리를 차지한 지구는 말없이 휴대폰만 만지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부르길래 고개를 돌려봤더니, 아까 빌려줬던 후드집업이 얼굴 위로 가볍게 떨어졌다.
“신경 쓰지 마시고 주무세요. 아니면 자리 바꿔드릴까요?”
“아니야. 할 거 해.”
얼굴을 덮으니 더 이상 피부로 시선이 와닿는 일은 없었다. 아까 옷장에서 꺼낼 때는 섬유 유연제 냄새가 연하게 났던 것 같은데, 그 잠깐 사이에 시원한 향으로 잔뜩 뒤덮였다. 익숙한 향기에 잠깐 숨을 들이마시다가 이상한 기분에 바로 그만뒀다. 시야가 캄캄하니 잠이 잘 오긴 하는데 코끝을 스치는 향기 때문에 결국 한참을 뒤척이다가 겨우 잠들었다.
* * *
비행기가 착륙하고, 너무 오래 잔 바람에 잠에서 똑바로 깨어나지 못하고 허우적대면서도 호텔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예준이 혼자 방을 쓰는 건 이제 거의 고정이었고 준이 자연스럽게 형 둘이 쓰라며 밀어준 덕분에 지구와 한 방에 배정받는 건 어렵지 않았다.
푹신해 보이는 침대도 큰 사이즈로 두 개였고 전체적으로 가구를 흰색으로 배치해서 더 넓고 깨끗해 보였다. 그중에서도 제일 좋은 건 방에서 내다보이는 경치가 최고라는 점이었다.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하늘도 맑았고, 아래로 보이는 경치도 묘하게 동화 속 같았다. 나중에 이런 곳 와서 살면 좋겠네. 하기야 어느 나라든 한국보단 좋겠지.
“내일 아침부터 리허설 나갈 거니까 오늘은 푹 쉬고. 그리고 다 이거 받아.”
할 말이 있다는 매니저 형 때문에 짐도 안 풀고 바로 휘영과 준의 방에 다 같이 모였는데 갑자기 눈앞에 카메라가 불쑥 들이밀어 졌다. 적당한 크기에 깔끔한 디자인의 디지털카메라였다. 받자마자 신나서 켜본 준이 셀카 모드도 된다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선물이에요?”
“그거 얼마짜리인 줄 알고 그렇게 막 다루는 거야?”
“아…….”
그제야 카메라 브랜드를 확인한 듯 준이 머쓱하게 카메라를 어루만졌다. 각자 손에 카메라를 하나씩 안겨준 매니저 형이 설명을 시작했다.
“너희 저번 앨범 포카 사진은 촬영장에서 찍었잖아. 풀 세팅하고.”
“그랬죠.”
“이번에는 좀 자연스러운 분위기 내보자고. 오늘 안에 셀카 한 장씩 찍어와. 한 번 써봤는데 색감 예쁘게 잘 찍히더라.”
그 말을 듣고 무심코 확인한 카메라 안에는 매니저 형의 미소 짓는 셀카가 담겨 있었다. 뭔가 당첨된 기분이었다.
“그냥 막 찍으면 돼요?”
“야, 그래도 앨범에 넣을 건데 똑바로 찍어야지. 남친짤 그런 거.”
“얼굴이 똑바로잖아요.”
“그래, 너 잘났다…….”
카메라를 셀카 모드로 전환한 예준이 화면에 얼굴을 이리저리 비춰보더니 마구잡이로 셔터를 눌렀다. 자신감 넘치는 예준을 보고 자극을 받았는지 갑자기 한 번 도전해보겠다며 셀카를 찍기 시작하는 준을 뒤에서 보며 절로 표정이 굳어졌다.
“준아. 그 각도는 좀 아닌 것 같아.”
“45도 아니에요?”
“대체 언제……?”
애교도 그렇고 준은 가끔 눈물 셀카 시절의 사람 같았다. 찍으라는 자기 얼굴은 안 찍고 테라스에 나가 바깥 풍경을 찍고 있는 휘영과 남의 침대에 드러누워서 이리저리 각도를 잡아보는 예준을 번갈아 보다가 그냥 지구 손을 잡고 방을 나왔다.
창문을 통해서 경치를 구경하다가 바로 옆에 있는 침대 위에 누웠는데, 막 가방을 들어 올린 지구가 넌지시 물었다.
“형 그쪽에서 주무실 거예요?”
“아, 응. 네가 이쪽에서 잘래?”
“아니요. 전 이쪽이 좋아요.”
어차피 콘서트만 끝나면 바로 출국하는 터라 짐도 단출했다. 대충 갈아입을 옷만 챙겨서 침대 위에 올려두고 바로 테라스로 나갔다. 휘영이 경치 촬영에 푹 빠져있던 게 이해될 정도로 내려다본 경치는 여러모로 완벽했다.
“형.”
한참 숨죽이고 왼쪽 오른쪽 왔다 갔다 하면서 발을 옮기다가 문득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았다. 조금 전에 받은 본인의 디지털카메라를 손에 든 지구가 테라스 바로 앞에 서 있었다.
“거기 딱 서보세요.”
“여기?”
“네.”
서라는 말에 가만히 발을 멈췄다. 지구랑 눈을 맞추다 보니 자연스럽게 몸이 뒤로 넘어가는데, 지구가 카메라를 만지면서 눈을 살짝 찌푸렸다.
“거기 기대지 마세요.”
진지한 목소리에 바로 몸을 똑바로 세우는 순간 셔터가 눌렸다.
“나 아직 아무 자세도 안 잡았는데.”
“그냥 가만히 서 계시면 돼요.”
가만히 서 있으라는 지령을 마지막으로 지구는 더 이상 한마디도 하지 않고 서서 카메라 셔터만 계속 눌러댔다. 스무 번째부터 세는 걸 포기했다. 한참을 찍더니 드디어 촬영이 끝났는지 정신을 차려보니 지구가 카메라를 내리고 찍은 것들을 확인하고 있었다.
“이거 예쁘다.”
혼자 살며시 웃으며 중얼거리는 말은 못 들은 척 넘기고 안쪽으로 들어왔다. 그 잠깐 나가 있었다고 따뜻했던 겉옷이 차가워져 있었다.
“사진은 이걸로 하면 될 것 같아요.”
지구가 테라스로 나가는 입구 바로 앞에 누워 카메라를 구경하며 말을 걸었다. 정작 나는 보여주지도 않고 혼자 사진 셀렉까지 끝냈는지 뿌듯한 얼굴이었다.
근데 지구야, 매니저 형은 셀카 찍어오라고 했는데.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