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뷔를 피하는 방법-76화 (76/130)

32화

결국, 그날 타이밍을 놓친 뒤 더는 그런 분위기는 찾아오지 않았다. 어색해질 틈도 없었다. 왜냐면 깊은 생각이라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바빴으니까.

저번보다 일주일 길어진 활동 기간이 끝나도 스케줄이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정도로 화력이 길게 가는 게 감사한 일이라 그냥 입 다물고 열심히 뛰어다니다가 4월이 다 지났다.

“나 생각하면서 하나씩 먹어요.”

컷! 좋았어!

연기를 그만둬도 괜찮다는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열심히 웃고 있던 입꼬리가 밑으로 뚝 떨어졌다. 지금 몇 번째 촬영인지 기억도 나질 않아서 안면근육이 너무 괴로웠다.

“괜찮으세요?”

어색하게 웃으며 걱정해주는 상대 배우에게 미안해서라도 인상을 찌푸릴 수는 없었다. 다소 형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괜찮다고 손을 내두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쁘게 앉아야 한다고 해서 허리를 뻣뻣하게 펴고 있었더니 잠깐 사이에 몸이 굳은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촬영 길어져서.”

“아뇨, 아뇨. 원래 다 이 정도 해요. 아이돌분들은 연기 경험이 많지 않잖아요. 이 정도면 빨리 끝낸 편이에요.”

상냥하게 웃으며 위로하는 얼굴은 묘하게 지쳐 보였다.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건지 모르겠지만 잔뜩 돌아간 시곗바늘이 많이 지난 시간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고개를 다섯 번이나 꾸벅꾸벅 숙이고 나서야 세트를 빠져나왔다.

오늘 촬영한 건 이미 우리 얼굴을 내걸고 잘 팔리고 있는 초콜릿의 두 번째 CF 영상이었다. 밸런타인데이의 남자친구 컨셉이라는데 왜 5월에 이걸 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지만 찍으라니 찍을 수밖에.

“진짜…… 못하겠다.”

“형은 왜 웃는 걸 못해요? 입꼬리 지진 난 줄 알았어요.”

“대사가 입 밖으로 안 나와서.”

“아, 대사 좀 오글거리긴 했어요. 형은 이해해요. 근데 지구 형이 제일 의외에요. 저 형은 형한테 하는 거에 반만 해도 다정한 남자친구 그 자체인데. 왜 형한테는 잘하면서 이건 못하는지 모르겠어요.”

준이 신나게 웃어대며 놀리는데 그게 뭔가 찔려서 말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여자분이라 부끄럽나.”

“반대지.”

맨 첫 번째 순서에 보여준 자연스러운 연기로 극찬을 받았던 예준이 자연스럽게 준의 자리를 뺏고 의자에 앉았다.

“쟨 원래 감정이 얼굴로 티가 잘 안 나. 저건 배우분이랑 초면이라 낯가려서 저래.”

“그래요? 하긴 지구 형 낯 많이 가리잖아요.”

“그리고 워낙 사랑꾼이셔서.”

싱글싱글 웃는 얼굴은 놀리려는 의도가 다분해 보였다.

“사랑꾼이요?”

무슨 소리인지 이해도 못 했으면서 준이 따라 웃기 시작했다.

“다음 촬영은 넌데 웃음이 나와?”

장난으로 쏘아붙였더니 준이 웃음을 뚝 멈췄다.

“아, 맞다……. 나지……?”

한껏 우울해진 목소리로 준이 비척비척 세트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마 저 세트 정리가 끝나고 나면 방금 내 대사 뺨치는 오글거림으로 무장한 다른 대사가 준의 입에서 나올 것이다.

“형. 잠깐, 이 밑에 내려갔다가 올래요?”

매니저 형과 할 말이 있다며 본인 몫의 촬영이 끝나자마자 사라졌던 지구가 돌아왔다. 그러더니 뜬금없는 제안을 했다.

“어디 가려고?”

“형 단 거 좋아하잖아요. 이 밑에 카페 새로 생겼다고 직원분이 그러셔서.”

예전에는 한결같이 깍듯이 높이던 말투가 요즘은 오락가락하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만 해도 깨울 때는 일어나세요, 하더니 화장실 문 열어주면서 씻어요, 하고 밥 먹으라고 부를 때는 드세요, 그러다가 또 나갈 때는 옷 챙겨요, 라고 했다.

그냥 편하게 말해도 괜찮은데 지구는 자연스럽게 넘어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사실 갑자기 반말해도 뭐라고 안 할 텐데.

“그래? 가자.”

“얘 말고 예준이 데려가자.”

우리 그룹에서 단 음식을 제일 좋아한다고 확신할 수 있는 예준이 긴 팔을 휘적거리며 들었다. 눈앞에서 대놓고 자기 이름 3인칭으로 외치는 예준을 투명인간 취급한 지구가 손을 내밀었다.

“그래. 내가 이것들 사이에서 무슨 좋은 꼴을 보자고.”

포기한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예준을 내버려 두고 지구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 물론 잔뜩 중무장하고. 눈앞이 잘 안 보일 정도로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를 끼니까 위아래로 얼굴이 답답했다. 그래도 괜히 누구한테 걸려서 시끄러워지는 것보다는 이게 나았다.

1층에 있는 카페는 새로 생긴 가게인 만큼 깨끗했다. 전체적으로 따뜻한 계열의 색으로 이루어진 가게는 아늑해 보였고, 거기에는 천장에 매달린 노란 조명이 한몫했다. 통나무집에 들어온 것 같은 카페 분위기와는 다르게 내부는 상당히 소란스러웠다. 빈자리 없이 꽉 차 있는 테이블을 보니 시끄러운 게 이해가 됐다.

“뭐 드실래요?”

“아이스 초코.”

“카페라떼 하나랑 아이스 초코 하나 주세요.”

지구가 주문하는 틈을 타서 쇼케이스를 구경하다가 색색의 마카롱이 10개 담겨있는 박스를 가리켰다.

“저것도 하나 사가자.”

“네. 저것도 하나 주세요.”

계산이 끝나고 진동벨을 받아들었다. 투명한 쇼케이스 안쪽으로 보이는 음식들 비주얼이 다 뛰어나서 한참 정신 팔려 구경하고 있는데 갑자기 지구가 배를 어루만지는 게 보였다.

“어디 아파?”

“아니요. 요즘 운동을 못 해서.”

“복근 사라질까 봐?”

스케줄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데 운동할 시간이 생길 리 없는 게 당연했다. 하루에 춤으로 소비하는 칼로리만 해도 충분할 것 같은데. 뜬금없이 몸 걱정을 하는 게 웃기기도 하고 귀여워서 배를 한 번 어루만졌다가 느껴지는 단단함에 금방 손을 뗐다.

하나도 안 없어진 것 같은데. 아무래도 이번 활동이 끝나면 같이 헬스를 다니던가 해야겠다. 아, 저번에도 이 생각 했었던가.

* * *

오늘은 초콜릿 팬 사인회가 있는 날이었다. 꽤 값이 나가는 그 초콜릿을 다섯 개 이상 구매하면 브로마이드와 팬 사인회 응모권을 한 장씩 줬다. 전에 한 번 받아봤는데 응모권이 포토카드의 절반만 해서 귀엽긴 했는데 잃어버리면 어쩌나 싶었다.

“오늘이 며칠이지 대체.”

“날짜 감각 하나도 없어.”

휘영은 온몸이 다 쑤시는 듯 팔을 쭉 뻗으며 중얼거렸다. 어제는 목이 아파서 잘 안 꺾인다고 하더니. 안쓰러워서 뒤쪽으로 팔을 뻗어 목을 주물러줬더니 시원하다며 앓는 소리를 냈다.

“그래서 오늘이?”

“5월 16일.”

날짜를 듣자마자 머릿속에 번뜩 떠오르는 게 있었다. 5월 셋째 주 월요일이 성년의 날이니까 바로 다음 주네. 꽃다발은 몇 달 전에 줬는데 장미꽃을 또 주기는 좀 그렇고 무난하게 향수나 선물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주차장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던 차가 잠깐 멈춰 섰다.

“아, 쟤는 또 왜 여기 서 있어.”

인상을 찌푸린 매니저 형이 차를 거칠게 돌려 뒤쪽 주차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차 뒤에 숨어서 카메라를 들고 있는 건 분명히 그 홈마였다.

“진짜 징글징글하다. 이번 사인회도 왔네.”

“그 비행기까지 탄 사람이요?”

“어. 아오, 이게 출근길이야? 찍어서 어디다 쓰려고.”

매니저 형이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하는 동안 준이 휴대폰으로 저 홈마 이름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네이버에 검색했더니 자연스럽게 트위터로 연결해줬다.

“이 사람이네요.”

“팔로워 수 진짜 많다.”

“내버려 두라고 한 이유를 알겠어요.”

준이 놀랄 정도로 홈마의 팔로워 수는 많았다.

“K가 0이 몇 개 붙은 거예요?”

심오한 얼굴로 휴대폰을 들여다보던 준이 스크롤을 밑으로 내리며 말했다.

“잘 찍는데요?”

“스케줄마다 거의 다 있네. 공항도 있고, 음악방송 출근길도 있고.”

일단 업로드된 사진들은 다 공개된 일정들뿐이었다. 공항도 환영홀에서 찍은 사진만 있고 음악방송 출근길도 포토존이 마련되어 있던 날 사진인 거로 봐서 찍어서 올리는 것 같지는 않았다.

“비공개 스케줄인 이유가 있지. 피곤에 절어서 터벅터벅 걸어가는 게 찍고 싶나.”

“내 말이 그 말이다. 아니, 하현이가 비공개 스케줄에서 갑자기 더 잘생겨지기라도 하냐?”

매니저 형은 입 밖으로 뱉는 말 하나하나가 명언이었다. 차라리 무대 위를 찍는 게 낫지, 그냥 걸어가는 거 찍는 게 뭐가 잘 나온다고. 대기실에 도착한 멤버들은 갑자기 본인들 홈마 찾는데 재미가 들렸는지 사진 저장에 열을 올렸다.

“이거 잘 나왔지.”

“이게 무슨 형이에요. 조작 사진급인데.”

“그냥 잘 나왔다고 해줘. 조용히 지나가자.”

저럴 때 보면 휘영은 중재를 해주는 건지 예준에게 기름을 붓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가끔 보면 카리스마 넘치는데 이상하게 멤버들 하고만 있으면 본인이 막내라고 착각하는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시간이 다 돼서 들어간 사인회장에서는 우리가 찍었던 그 CF가 대형 스크린을 통해서 열심히 재생되고 있었다. 제발 꺼줬으면 좋겠다. 바람이 먹혀들어 갔는지 약 10초 뒤에 예준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영상이 꺼졌다.

“맛있는 초콜릿 먹고 덤으로 레브도 보는 팬 사인회!”

진행자분이 준비된 멘트를 치는데 팬들이 몸서리를 치며 부정을 표시했다. 팔로 엑스 자까지 치며 격한 반응을 보이는 탓에 진행자가 당황한 듯 진행을 빨리했다. 팬 사인회 온 팬들에게 행사장 측에서 나눠준 듯 다들 팔에 똑같이 생긴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데뷔하고 팬 사인회를 거의 열 번 가까이했으니 못해도 천 명 이상과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고, 사인했다. 그러니 익숙해지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이제 사인하는 속도도 꽤 붙었고 앞에 선 팬을 대하는 것도 능숙해졌다.

한참 사인을 하던 중에 한 팬이 사진과 앨범을 함께 내밀었다. 로고가 익숙했다.

“홈 이름 써주세요.”

매니저 형이 말했던 그 홈마다. 마주 본 얼굴은 굉장히 익숙했고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고등학생 아닌가 싶을 정도로 어려 보였다. 카메라를 들고 비공개 스케줄까지 이곳저곳 쫓아다니는 걸 보니 시간은 넘치게 많은 것 같은데 왜 이렇게 학생 같은 건지.

“스케줄마다 오시네요. 바쁘실 텐데.”

“자퇴해서 시간 많아요.”

아……. 별생각 없이 물은 말에 아무렇지 않게 툭 떨어진 대답은 좀 놀라웠다. 자퇴해서 시간이 많다는 건 아직 고등학생이라는 소린가? 천천히 사인하며 아래에 익숙한 홈 이름을 적어 넣었다.

“오늘 아침에 샌드위치 먹고 왔는데 양배추가 너무 많이 들었더라고요. 아아, 양배추 맛없어요. 그렇죠? 오빠도 양배추 싫어해요?”

“저 원래 야채 다 싫어해요.”

“와. 통했다. 저도요. 그래서 다 빼고 먹어요.”

한참 이어진 대화는 지극히 정상적이었다. 눈을 찔러보겠다는 둥 그런 정상인의 상식에서 빗나간 말들은 전혀 나오지 않았고 여느 다른 팬들과 다름없이 계속 웃으며 일상 얘기를 했다.

“이거 써주세요.”

거의 시간이 끝날 때쯤 홈마가 내민 포스트잇은 굉장히 많았다. 네 개, 아니 다섯 개. 우르르 떨어지는 포스트잇 중 하나를 들며 홈마에게 알고 있는 규칙을 말해줬다.

“이거 1인 1장으로 정해져 있는 거로 아는데.”

“부탁받은 거라 그런데 안 될까요?”

무슨 부탁을 다섯 장씩이나. 금방 이동할 시간이 올 것 같아서 그냥 급하게 해주기로 했다. 빛의 속도로 문제를 읽고 기타 문항은 무시하고 숫자들에 동그라미를 쳐준 뒤에 웃는 얼굴 이모티콘을 하나씩 그려줬다. 다섯 개를 전부 해서 건네자 홈마가 환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고개를 숙였다.

아슬아슬하게 경호원들이 넘어가라는 신호를 보냈고 홈마는 미련 없이 지구의 앞으로 옮겨갔다.

“안녕하세요. 이름이?”

“아, 저 홈 이름이요. 잠시만요.”

홈마가 허둥지둥 앨범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지구 사진이 있는 곳을 펼쳤다. 홈 이름을 전해 들은 지구가 조용히 사인하더니 홈마가 내미는 분홍색 포스트잇을 받았다. 이번에도 나에게 줬던 것처럼 여러 장이었다.

“많네요?”

“부탁받은 거라서요. 해주시면 안 될까요?”

지구는 대답 대신 무표정한 얼굴로 포스트잇을 하나 집어서 질문은 읽지도 않고 텅 비어있는 뒷장을 펼치더니 뭔가 적기 시작했다. 갑자기 뭘 쓰는 거지. 슬쩍 고개를 내밀어 쳐다보고 싶었지만 내 앞에 선 다른 팬이 불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정면을 봐야 했다.

팬과 신나게 대화하는 동안 지구가 드디어 다 적었는지 포스트잇을 뒤집어 앞으로 내밀었다. 나머지 포스트잇들은 건들지도 않은 상태였다. 영문 모르는 홈마만 얼떨결에 포스트잇을 집어 들고 정갈하게 사인이 되어 있는 앨범까지 받아 품에 안았다. 당황했는지 더 해달라고 조르지는 않았다.

“이건 팔지 말고 집 가서 꼭 읽어봐요.”

판다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한 팬이 살짝 주춤하는 동안 지구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눈을 맞췄다.

“부모님 걱정하시니까 집에 바로 들어가요. 퇴근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알겠죠?”

웃음기 하나 없는 무표정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나긋한 목소리로 걱정의 탈을 쓴 날카로운 충고를 한 지구가 느긋하게 손을 흔들었다. 다정한 인사를 받은 홈마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단상 위에서 뛰어 내려갔다.

그날 저녁 그 홈마는 클로즈를 걸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