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일단 무작정 입술을 살짝 맞대긴 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몸이 잠깐 굳었다.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부드럽다. 말랑말랑한 감촉을 가만히 느끼다가 일단 뭐라도 해봐야 할 것 같아서 입술을 달싹거리며 벌리는 순간.
“…….”
주도권이 순식간에 뒤집혔다. 분명 하얀 양 볼을 잡고 있는 건 나였는데 어느 순간 내 얼굴이 커다란 손에 붙잡혀 있었다. 혀가 섞이기 시작한 시점부터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이게 능숙한 건지, 서툰 건지, 잘하고 있는 건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드는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아, 생각보다 더 기분 좋다.
거침없이 귀로 파고드는 소리가 부끄럽다가도 바로 앞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금방 잊어버렸다. 든든한 몸을 끌어안고 있는 것도, 뜨거운 공기도, 그냥 다 좋아서 뭐라 표현할 말이 없었다. 첫 키스가 아닌데도 처음 느끼는 기분에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자연스럽게 몸이 침대 위로 넘어졌다.
“형. 선물 말이에요.”
입이 떨어지자마자 숨을 몰아쉬며 지구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물었다. 살짝 열이 오른 얼굴이었다.
“일회성은 아니죠?”
“그러면 안 줬지.”
망설임 없이 대답하자마자 지구가 한 번 더 천천히 입을 맞춰왔다. 푹신한 침대가 아래로 살짝 꺼질 정도로 누르면서.
한번 시작하니 다음부터는 쉬웠다. 그냥 시간만 나면 했다. 바쁜 스케줄 속에 시간이 나서 숙소에 왔을 때, 활동 기간이 끝나고 나서는 문 잠그고 조용히, 혹은 새벽에.
* * *
사건이 일어난 건 다음 컴백 활동 막바지였다. 올해에만 벌써 세 번째 컴백이었는데 정말 푹 쉴 시간도 없이 정신없는 활동이라 다들 기진맥진해서 금방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분기마다 컴백하는 아이돌이 어딨어.”
“여기…….”
1월, 4월, 그리고 7월. 서바이벌 ID 화제성이 떨어지기 전에 몰아붙여야 한다며 3달 간격으로 잡아놓은 컴백은 너무 고달프고 힘겨웠다. 거의 돌려막기 식으로 저번 활동의 노래들을 꾸역꾸역 채워가면서 어찌어찌 나오고는 있지만 이러다가 진짜 몸살이 날 것 같았다.
“기다려봐. 올해 연말 시상식도 있고…… 내년에는 좀 넉넉해질 거야.”
“와, 시상식.”
힘들다며 팔을 주무르던 준이 시상식 소리에 눈을 빛냈다. 그 어떤 연예인도 시상식 소리가 설레지 않을 리 없었다. 게다가 완전 생 신인인 데뷔 7개월 차인 우리가 듣기에는 더 먼 것 같으면서도 가까운 영광의 행사였다.
“벌써 반이나 왔어요. 아, 형. 모자 어떤 게 나아요?”
“흰색.”
팬들이 준 서포트 물품들을 열심히 인증하고 있는 준이 모자를 하나 골라 눌러썼다. 시원한 여름을 컨셉으로 잡은 이번 활동도 어느덧 막바지였다. 오늘 사전녹화가 마지막 음악방송이었고 다음 주부터는 해외 일정이 잡혀 있었다.
“형. 저 창문 조금만 열어도 돼요?”
“왜?”
“멀미 나서요.”
“얼굴 안 보일 정도로 살짝만 열어.”
지구가 고개를 끄덕이며 창문을 아주 살짝 내리고 살짝 숨을 쉬었다. 오늘 아침부터 상태가 영 안 좋아 보이더니 생전 안 하던 멀미를 하는 게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감기 기운 살짝 있나 봐요.”
“약은 먹었어?”
“아까 아침 먹고 먹었어요.”
이마에 살짝 손을 올려보니 확실히 미열이 있긴 했다. 얼굴 이곳저곳에 차가운 손을 대보고 매니저 형에게 에어컨 온도 좀 높여달라고 부탁했다. 에어컨 때문에 시원한 차 안과 어울리지 않는 뜨끈뜨끈한 볼을 손으로 살짝 잡고 있는데 지구가 웃으며 손을 잡아떼어냈다.
“괜찮아요. 그 정도 아니니까.”
괜찮다고 말해도 마음이 놓이질 않아서 이따 점심 먹고 약을 꼭 챙겨 먹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구는 남을 챙기는 건 잘하는데 자기 몸을 챙기는 건 잘 못했다. 내가 감기에 걸렸을 때는 약 먹일 시간을 칼같이 계산해서 먹여놓고 정작 자기는 바쁘다고 넘기는 일이 태반이었다.
마지막 녹화인 만큼 최선을 다했다. 무대에서 막 내려와 정신없이 대기실에 도착하자마자 힘겹게 숨을 쉬면서 답답한 겉옷부터 벗어 걸어놨다. 쉬는 시간도 별로 없이 연달아 세 번을 녹화해서 다리에 힘이 다 풀릴 지경이었다. 준은 거의 대기실 바닥을 기어 다니며 무릎으로 청소를 하고 있었다.
“야, 야! 너 의상!”
매니저 형은 기겁하며 준을 일으켜 의자에 앉히고 손수 무릎을 손으로 탁탁 털어줬다. 정신없이 뛰다 내려온 터라 잔뜩 헝클어진 머리를 스타일리스트 누나 손에 맡긴 채로 가만히 서 있는데 저쪽 소파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지구야. 너 팔 괜찮았어?”
“네?”
“핀 빠져서 계속 팔 찌르고 있었잖아. 몰랐어?”
“아…… 계속 따끔거리긴 했는데.”
“세상에. 이러고 무대를 계속했어?”
걱정 어린 높은 목소리가 전달하는 내용에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더니 스타일리스트 누나가 머리를 꾹 눌렀다.
“가만히 있어 봐.”
그렇게 잠깐 발목이 잡혀 있다가 다 됐다는 말에 바로 소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디 잘못됐어요?”
“의상 핀에 찔려가지고. 방금 막 소독하고 밴드 붙였어.”
커다란 밴드가 팔 중간에 떡하니 붙어 있었다. 반팔이라 하얀 팔에 붙은 커다란 살구색 밴드는 생각보다 더 눈에 띄었다.
“괜찮아? 핀이 빠진 거야?”
“네. 심하게 찔린 건 아니라 괜찮아요.”
지구는 멀쩡하다는 걸 보여주려는지 팔을 좌우로 몇 번 흔들었다. 눈앞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팔을 잡아다가 조용히 소파 위로 올려주자 지구도 조용히 동작을 멈췄다. 곧바로 멤버들끼리 둘러앉아 모니터링을 하는 동안 대기실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나가고 매니저 형은 조용히 뒷정리를 했다.
“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쉬고 있어. 바로 다음 스케줄 갈 거니까.”
그렇게 매니저 형이 잠시 자리를 비운 지 1분도 채 안 돼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정중하게 두 번 두드리는 소리에 가장 먼저 예준의 고개가 문 쪽으로 돌아갔다.
“누구지?”
방금 나간 매니저 형이 노크하고 다시 들어올 리는 없고 지금 들어오기로 한 인터뷰도 없었다. 스태프인가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 문고리를 돌려 여는 순간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어…….”
오랜만에 보는 스페이스의 서진이었다. 컴백이라는 소리는 못 들은 것 같은데 한바탕 스케줄을 하고 온 듯 의상이 아주 화려했다. 눈앞에서 반짝이는 티셔츠에 박힌 홀로그램을 보다가 고개를 들어 눈빛으로 왜 왔냐고 묻는데 서진이 살짝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그리고는 대기실을 쭉 한 번 둘러보고는 다시 상냥하게 물었다.
“혹시 지금 촬영 중이에요? 잠깐 이야기하고 싶은데.”
“아뇨. 카메라 없는데…….”
갑작스러운 상황에 휘영이 고개를 저으며 띄엄띄엄 대답하자마자 순식간에 무표정한 얼굴로 변해 대기실 문을 닫았다.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진 대기실 안에서 서진이 성큼성큼 지구의 앞으로 걸어갔다.
“지구야, 형 부탁 하나 하자.”
물병을 입술에 걸치고 영문 모를 표정을 하고 있는 지구 앞에서 서진은 다짜고짜 부탁하겠다며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갑자기 들어와서 뭐 하는 거지. 대놓고 이러는 거로 봐서 작은 일은 아닌 것 같아 옆에서 지켜보는데 서진이 팔을 뻗었다.
“이거.”
지구의 눈앞으로 서진이 잔뜩 구겨진 사진을 내밀었다. 잘 안 보이는지 한쪽 눈을 살짝 찡그리는 게 느리게 눈에 담겼다.
“뭔지 알지? 얘기 좀 하자.”
“무슨…….”
여전히 이유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지구가 사진을 받아 가까이 들여다봤다. 그리고 몇 초 지나지 않아 사진들이 바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서진은 아무렇지 않게 떨어진 사진들을 주워들고 말했다.
“우리 일본 진출도 취소되게 생겼어.”
서진은 밋밋한 표정으로 지구에게 말했고, 그건 누가 봐도 부탁하는 태도는 아니었다. 뒤에서 눈을 찡그리며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서진의 표정을 관찰하는데 갑자기 돌연 지구가 오른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밴드가 붙여진 팔이 다급히 위로 올라갔다.
지구는 금방이라도 토할 것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갑자기 숨도 똑바로 못 쉬는 것 같길래 깜짝 놀라서 일단 서진을 손으로 살짝 밀어내고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숨, 숨 쉬어.”
등을 이리저리 쓸어주며 다급하게 진정시켜보려는데 다행히 지구는 금방 원래 호흡을 되찾았다. 갑자기 찾아와서 뭘 보여줬길래 애가 이래. 절로 생기는 적대감에 선배임에도 불구하고 일단 나가라고 무작정 밀어냈는데 서진은 끝까지 한 마디 덧붙였다.
“네가 피해 보는 거 없어. 진짜.”
서진은 더 할 말이 없는지 고개를 한 번 숙이더니 밖으로 나갔다. 순식간에 대기실 안에 싸한 공기가 맴돌았다. 소파를 살짝 걷어차며 살짝 욕을 한 예준이 잘 세팅해주고 간 머리를 만졌다.
“저 새끼는 또 뭐야.”
“형 괜찮아요?”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상황 판단이 안 되는 건 모두 마찬가지였다. 준이 가장 먼저 눈치를 보며 물었고, 휘영이 눈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서진이 살짝 열고 간 문을 툭 밀어 닫았다.
“아…… 괜찮아. 별일 아니야.”
별일이 아닌 게 분명 아니었음에도 지구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을 돌렸다. 당사자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하는 일을 꼬치꼬치 캐물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으므로 준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무대 괜찮았던 것 같아요.”
준이 눈치를 보며 아직 다 보지 않은 영상을 껐다. 한참 정적만 맴도는 대기실 분위기를 깬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매니저 형이었다.
“빨리 나와. 시간 촉박하다.”
그렇게 정신없이 차에 올라타 다음 스케줄 장소로 향하는 내내 입이 떨어졌다 붙었다 반복했다. 일본 진출이 취소될 정도의 사진이 퍼졌다는 건 인성 논란인가.
지구에게 물어보지는 못하고 조용히 휴대폰을 들어 네이버에 스페이스를 검색했다. 혹시라도 옆에서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지구가 볼까 봐 조심하며 휴대폰을 내 쪽으로 확 기울여서. 스페이스 인성 논란까지 골고루 검색해봤지만 뜨는 사진은 없었다.
대체 무슨 사진이길래 그렇게 반응한 거지. 계속 묻고 싶었지만 결국 빡센 스케줄이 끝나고 숙소로 들어올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괜히 쓸데없이 물었다가 다시 건드리는 게 싫었고,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걸 굳이 묻기 싫었다.
“…….”
숙소에 도착해서 씻고 나올 때까지 결국 사소한 대화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아까 점심때 약 먹는 걸 못 봤는데. 저녁도. 괜히 심란해져서 침대에 누워 가만히 있는데 지구가 불을 껐다. 그리고 처음으로 벽 쪽으로 몸을 돌려 누웠다. 그게 너무 신경 쓰여서 결국 조용히 이름을 불렀다.
“지구야.”
“네.”
대답은 곧장 돌아왔다. 방금 누웠는데 자다 깬 것처럼 목소리가 턱 막혀 있었다.
“네 침대로 가도 돼?”
뒤돌아있는 등을 안아주고 싶었다. 조용히 등만 쓰다듬어 주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이불 밖으로 발을 살짝 꺼내놓는 순간, 지구가 한 박자 느린 대답을 했다.
“……아니요. 오늘은 아니요.”
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침대를 나서려고 했던 발을 다시 조용히 이불 속으로 집어넣었다. 더운 날씨에 맞춰 새로 바꾼 얇은 천 이불이 맨다리에 부드럽게 얽혔다. 기분 좋은 감촉이었는데도 이상하게 불쾌했다.
지구는 밤새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뭘 보냐고 물어볼 수도 없었고, 그만 자라고 한마디 할 수도 없었다. 지구가 아니요, 라고 대답한 순간부터 이미 대화는 차단된 상태였다.
“…….”
게임도 안 하고 SNS도 잘 안 하는 지구가 저렇게 밤새 휴대폰을 붙잡고 있을 일은 거의 없었다. 밝기를 최대로 낮춰놨는지 잠을 자는데 방해되는 빛은 아니었는데도 계속 잠이 오지 않아서 뜬 눈으로 계속 천장만 쳐다보고 있었다. 잠버릇이 아예 없어서 자는 척을 하기도 힘들었다. 뒤척거리지도 못하고 누워있다가 어느 순간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지구는 숙소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하룻밤 사이 문제의 사진은 순식간에 일파만파 퍼져 나왔다. 스페이스 스폰서 논란이라는 이름을 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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