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1
거의 반년 동안 해외를 돌며 공연을 하다가 돌아온 한국은 막 12월에 접어든 상태였다. 지구 반대편에서 더위에 뻘뻘 거리며 공연을 한 게 불과 2주 전이라 그런지 확 추워진 날씨에 적응이 안 됐다. 결국, 태어날 때부터 글러 먹은 면역력은 이런 극심한 날씨 변화와의 기 싸움에서 패배했다.
“형 기침 너무 많이 하는 거 아니에요?”
내가 생각해도 1분 동안 수십 번은 족히 콜록거리는 것 같았다. 참아보려고 해도 참을 수가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칼칼하고 따가운 목을 손으로 어루만지면서 따뜻한 물만 계속 마셨다.
“감기 걸려서…….”
“약 먹었어요? 아까 아침 먹고?”
“아니.”
“이거 봐요, 내가 안 챙기니까 안 먹잖아.”
지구는 그간에 잔소리 스킬이 많이 늘은 상태였다. 거의 3년을 사귀다 보니 이제 웬만큼 편한 사이가 되어서 이제 지구는 반말 빼고 다 했다.
“형 감기 걸리면 잘 안 떨어지잖아요.”
“한동안 스케줄 없잖아. 그동안 낫겠지.”
“이리 와봐요.”
말로는 이리 와보라고 해놓고는 본인이 친절하게 내 침대까지 걸어온 지구가 얼굴을 양손으로 붙잡고 천천히 입을 맞췄다. 꽤 긴 시간 동안 그 상태로 타액을 수십 번 섞었다. 몸에 힘이 빠져서 뒤로 넘어가겠다 싶었을 때야 지구가 먼저 입을 뗐다.
“감기는 옮겨야 나아요.”
형, 약을 먹어야 감기가 낫죠. 습관처럼 하던 말은 저 뒤로 밀어버린 건지 웃으면서 새로운 주장을 했다.
“키스로 안 옮는다니까.”
“계속 붙어 있으면 옮아요.”
“일단 약부터 먹고.”
분명 탁자 위에 놓은 것 같은데 그사이에 약봉지가 사라졌다. 혹시 떨어졌나 싶어서 침대 아래쪽을 살펴보는 사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 지구가 방문을 열고 나갔다. 그리고 잠시 뒤에 보이지 않던 약봉지와 함께 물이 담긴 컵을 들고 들어왔다.
“어제 부엌에서 먹고 그대로 놨잖아요.”
“그랬나?”
잠깐 생각해보니 그랬던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이며 약을 받아 들었다. 봉지를 뜯어 손바닥 위에 올려놓는 동안 지구는 할 일이 생겼는지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물컵을 들어 올리는 동안 책상 서랍을 연 지구가 안쪽을 뒤지기 시작했다.
뭘 하는 건지 부스럭거리는 뒷모습을 쭉 주시하며 약을 삼키자마자 지구가 서랍을 닫았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와 어깨를 붙잡았다. 갑자기 맞닿은 입술에서 달달한 맛이 확 끼쳤다. 곧 입안으로 넘어온 것은 초콜릿이었다. 방금 뭘 부스럭거리나 했더니, 이거 먹고 왔구나. 혀에 닿자마자 부드럽게 녹은 초콜릿이 입안 가득 퍼졌다.
단맛이 채 가시기도 전에 입술을 놓아준 지구가 머뭇거리더니 한 마디 툭 꺼냈다.
“어…… 형 쓴 거 싫어하잖아요.”
알약이 쓸 리가 있냐. 본인도 알고 있는 듯 귀가 살짝 붉어졌다.
다 해놓고 쑥스러워하는 게 귀여워서 충동적으로 얼굴을 붙잡고 다시 입을 맞췄다. 그렇게 엎치락뒤치락, 감기를 옮기느니 마느니 몇십 분을 뒹굴다가 겨우 떨어져 각자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해외 투어를 도는 동안 쌓인 알람들이 수천 개였다. 부재중 전화가 몇백 통이 넘게 쌓여 있었다. 3년 가까이 활동을 하면서 친분을 쌓은 아이돌 선후배들이 대부분이었고, 예능 촬영 후에 번호를 교환했던 연예계 선배님들도 많았다. 이분은 너무 대선배님이신데 전화를 못 받았네.
시차와 다른 나라의 공기에 적응하느라 휴대폰을 거의 꺼놓고 사는 바람에 생긴 대참사였다. 뭔가 사정이 있었다고 생각해주겠지, 하고 자기합리화를 하며 쌓인 연락들을 하나씩 확인하는데 중간에 형의 이름이 보였다. 거의 연락하는 법이 없는 형이 한 달쯤 전에 전화했었다.
“형. 전화 왜 했었어?”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는데, 회사에 있을 시간인데도 몇 번 신호음이 가지 않고 건너편에서 전화를 받았다.
-나 결혼해.
전화 너머로 들려온 형의 결혼 소식은 솔직히 조금, 아니 너무 많이 충격이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형, 괜찮아요?”
살짝 걸터앉아 있던 침대 위에서 그대로 넘어지는 바람에 책상 앞에 앉아있던 지구가 놀라서 달려왔을 정도로. 세게 부딪힌 무릎이 아팠는데 그거보다는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더 신경 쓰여서 아픔조차 흐릿해졌다.
“야, 야…….”
뒤통수를 둔기로 두들겨 맞은 것처럼 머리가 띵하고 황당해서 형 소리도 안 나왔다. 여자친구가 있다는 소리도 못 들었는데 갑자기 결혼이라니. 형이 올해 몇 살이더라. 스물…… 몇 살이지?
“박상현!”
어쨌거나 중요한 건 나이가 아니었다. 몇 년 만에 입 밖으로 내보는 형의 이름 석 자가 방에 크게 울리자마자 지구가 움찔하며 살짝 뒤로 물러섰다.
“언제 하는데?”
-세 달 뒤에.
“그걸 지금 말하는 거야?”
-전화했었는데 네가 안 받았잖아. 그전에는 너 바쁘니까 일부러 연락 안 했지. 그래서 지금 말하는 중이잖아. 주말에 올래?
“어딜?”
-주말에 가족끼리 만나기로 했어.
심지어 이번 주말에 양쪽 가족이 만나기로 했단다. 이미 몇 달 전에 부모님들끼리 만남을 가졌고, 예식장 예약도 이미 다 끝냈다고. 나만 모르는 사이에 한국에 입국한 부모님이나, 착실하게 결혼 준비를 하고 있던 친형이나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스케줄 있냐?
슬쩍 눈치를 보는 목소리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스케줄 있으면 뭐 어쩌려고. 얼굴도 모르는 형의 결혼 상대를 머릿속으로 그려보며 휴대폰을 고쳐 잡았다. 석 달 전에라도 말해줘서 다행이지. 하마터면 청첩장부터 받을 뻔했네.
형의 결혼 상대는, 그러니까 회사 동기라고 했다. 같은 부서에서 야근하고, 상사 욕하고, 부어라 마셔라 회식하고, 집 방향이 같아서 술주정하며 함께 돌아가는 와중에 사랑이 싹텄단다.
연애를 시작한 지는 2년이 조금 넘었다는데, 어떻게 하나뿐인 동생에게 연애한다는 문자 하나를 못 보내주는지. 2년 동안 연애하고 결혼까지 할 정도면 가볍게 사귄 사이도 아닌데.
학생 때는 여자친구를 밥 먹듯이 만들길래 형은 죽을 때까지 외로울 일 없을 것 같다고 했는데,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는 영 소식이 없어서 형이 독신주의자라도 된 줄 알았다.
-이번 주 토요일 점심인데 올 수 있어? 장소 문자로 보내줄게.
“가야지. 알았어.”
-근데 너 감기 걸렸냐? 기침 계속하네.
“별거 아니야. 주말에 봐.”
전화를 끊고 나니 또 혼란스러워졌다. 석 달 뒤에 형 결혼하면 형수님 생기는 건가? 마흔이 다 돼서야 결혼하겠다고 할 줄 알았던 형의 결혼 소식은 생각보다 너무 빨랐다. 좋은 사람이니까 저렇게 서둘러서 하겠지. 내심 누구일지 궁금해졌다.
“무슨 일이에요? 누구 결혼해요?”
“우리 형.”
옆에 바싹 붙어서 어깨를 감싸 안던 지구가 놀란 듯이 살짝 멈춰 섰다. 그러더니 기억을 더듬는 듯 눈을 살짝 찡그렸다.
“그, 그 예전에…… 몇 번 뵀던.”
“기억나?”
“기억나요. 결혼하신대요?”
“응. 그런가 봐.”
그 뒤로 한참 대화가 끊겼다. 토요일에 입고 갈 옷을 고르기 위해서 지구 옷장을 열었다. 내 옷과 지구 옷이 마구잡이로 섞여 있는 옷장 속에서 빳빳하고 무난한 새 셔츠 한 장을 꺼냈다. 모든 옷에서 다 똑같은 섬유 유연제 냄새가 났다.
* * *
시간 계산을 잘못하는 바람에 약속 시각보다 약 10분 늦게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직원에게 안내받은 룸으로 들어가자마자 이미 모여서 화목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 가족이 있었다. 마침 딱 물을 마시려고 컵을 들어 올린 형의 여자친구와 눈이 마주쳤다. 짧은 단발을 한 여자는 컵을 90도로 기울여 식탁 위에 물을 쏟았다.
“오늘 여기서 스케줄, 스케줄이…… 있었…… 나?”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아직 음식도 나오지 않았는데 냅킨으로 입 주변을 반복해서 닦던 여자를 보다가 뒤늦게 깨달았다. 연예인이 갑자기 나타났으니까 놀랐을 만도 했다.
“혹시 결혼 진행 프로그램…… 그런 거……?”
“그런 거 아니고 예진아, 내 동생이야.”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이 상황이 벌어진 이유를 예상하던 여자는 결국 식탁 위에 컵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다행히 깨지지는 않았지만, 식탁보가 다 축축하게 젖었다.
“박상현, 박하현…….”
말장난 같은 우리의 이름을 한 번씩 소리 내 읊던 여자는 손을 바르르 떨었다. 심하게 충격을 받은 것 같은 상황에 급히 안쪽으로 발을 옮겨 식탁 위에 넘어져 있는 컵을 세우고 냅킨으로 닦아냈다.
“괜찮으세요?”
“어, 어, 어, 네, 괜찮아요…….”
여자가 허둥대며 함께 식탁을 닦기 시작했다. 형은 이마 위에 손을 올려둔 채로 고개를 젓고 있었다. 그제야 이 상황이 이해가 됐다. 서바이벌 ID 막방에 형과 같이 왔던 동기, 부모님한테 나를 좋아하는 동기가 있다고 말하던 형.
세상 그 많은 아이돌 중에 하필 좋아한 게 나고, 그 아이돌의 형과 결혼이라니. 무슨 드라마에 나오는 내용도 아니고. 현실성이 전혀 없는 상황에 급히 원래 내 자리에 앉았다.
“우리 둘째 아들이에요.”
엄마가 웃으며 나를 소개했다. 여자는 드디어 정신을 차렸는지 심호흡을 하며 인사를 했다. 맞인사를 하며 마주친 눈이 맑았다. 계속 보고 있으니까 익숙한 것 같기도 했다.
“아, 네, 알아요. 그, 연예인…… TV에 나오는…….”
“TV는 무슨. 네 방에 사진 한가득 있잖아.”
아, 아빠. 여자가 입술을 살짝 깨물고 옆자리에 앉아있는 중년 남자를 툭툭 쳤다. 둘이 형제예요? 상현이랑? 여자의 부모님도 놀란 듯 말이 빨라졌다.
이 혼란스러워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어색하게 웃는 것뿐이었다.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얼굴로 여자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실물 영접, 아니 실물을 이렇게 보게 될 줄 몰라서…….”
만남의 자리는 그렇게 대혼돈으로 시작돼서, 생각보다 안정적으로 끝났다. 음식은 맛있었고, 계속 보니까 형이 정말 많이 좋아하는 게 보였다. 아주 잠깐의 만남이었지만 형의 여자친구도 좋은 사람인 것 같았다.
“바로 숙소 가?”
“응.”
“사인 한 장 해주고 가. 예진이가…….”
내 어깨에 팔을 걸친 형은 말을 다 끝마치지 못하고 여자친구에 의해서 떨어져 나갔다. 다른 곳도 아니고 목덜미를 잡은 게 살벌해 보였다.
“너 지금까지 왜 말 안 했냐? 어? 사인회 응모하는 거 보면서 웃겼겠다?”
“아니,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피곤해질까 봐.”
“그리고 너 어제 술 먹었지. 그래서 오늘 늦었지.”
“축구 보느라…… 맥주 조금…….”
아무 말도 못 하고 우물쭈물하는 형을 위협하는 작은 주먹을 빤히 보고 있는데, 이쪽으로 시선이 돌아왔다. 잠시 말과 행동을 멈춘 형의 여자친구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제가 오늘 좀 주책이었던 것 같은데…… 너무 놀라서…….”
“아니에요.”
“조심히 가세요. 너 이리 와봐.”
형의 미래가 훤히 보이는 거 같아서 웃으며 마주 인사했다. 형수님 진짜 좋은 분이시다.
* * *
비포 @B__4_RV · 3시간 전
여러분 저 오늘 남자친구 가족들 만나러가요ㅠㅠㅠㅠㅠ 아 진짜 넘ㅈ떨려요ㅠ
└ 헉 비포님 드디어!! 떨지마세용ㅠㅠ 잘 될거에요!!
└ ㅠㅠㅠㅠ 그렇겠죠? 저 진짜 옷만 한시간동안 골랐어요ㅜㅡㅜ
└ 괜찮을거에용 비포림 빠이팅ㅠㅠ! 점심 약속인가요?
└ 네 근데 남친이ㅋㅋㅋㅋ 전화를 안받아욬ㅋㅋㅋㅋㅋ 술처먹고 뻗어서 자나봐요ㅠ
└ 헉ㅠㅠㅠㅠㅠ8ㅅ8 집 한 번 가보셔용
└ 그러려구요ㅋㅋㅠ 빡치는김에 하현이 사진보면서 진정할게요..
비포 @B__4_RV · 1시간 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꿈인가?
└ 비포님 무슨일이에요ㅜㅜ?
└ 식사 다 끝나셨어용?
[CLOSE]비포 @B__4_RV · 1분 전
여러분 제가 오늘부로 모종의 이유로 더 이상 하현이 덕질을 계속할 수 없게 됐습니다...... 서바이벌ID 첫방때부터 곧 데뷔 3주년을 앞둔 오늘 아침까지 프로아이돌 하현이 정말정말 사랑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런데ㅠㅠㅠㅠㅠ 아ㅠㅜㅜㅠ 그동안 같이 덕질해주셔서 감사했어요ㅠㅠㅠㅠㅠ
└ ?????? 에????
└ 비포밈 머에오 갑자기ㅠㅠㅠㅠ 남친가족이 덕질반대라두 하셨나요???ㅠㅠ
└ 헉 이게모람 ,,,? 언젠가 돌아오세요ㅜㅜㅠ
└ 저 주변분들 중에 비포님만큼 하현이 진성으로 조아하는 분 못뵀는데ㅠㅠㅠ 뭔가 이유가 있으시겠지만 아쉽네요ㅜㅡㅜ 탐라에서 같이 앓으면서 넘 즐거웠어여T_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