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뷔를 피하는 방법-90화 (90/130)

2화

눈을 살짝 떠서 본 시계는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놀라서 스케줄이 없었나, 생각해보니 쉬는 날이었지 싶어 다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3초 뒤에 준과 점심을 같이 먹자고 약속했던 게 떠올랐다. 벌떡 몸을 일으켰더니 옆에 누워서 휴대폰을 보고 있던 지구가 휴대폰을 내려놓고 물었다.

“깼어요?”

“왜 안 깨웠어? 준이랑 점심 먹기로 했잖아.”

“푹 자는데 어떻게 깨워요.”

와중에 내가 베고 있던 건 베개가 아니라 지구 팔이었다. 얼마나 오래 베고 있었으면 잔뜩 눌려서 빨개져 있었다. 딱딱한 팔을 문지르다가 뒤늦게 반쯤 떠진 눈을 비볐다. 목소리도 잘 나오질 않았다.

“그냥 깨우지.”

“형 시상식마다 긴장 많이 하잖아요, 어제 무리도 했고.”

“누구 때문인데?”

“그래서 푹 자라고 둔 거예요. 그리고 형이 더 해달라고 해놓고.”

“……그랬지.”

어젯밤에 정신없이 매달리며 했던 말들이 떠오르기 시작해서 말을 아끼기로 했다. 안 그래도 피곤한데 그렇게 격하게 새벽까지 했으니까. 거기에 방 공기도 따뜻하고, 약하게 눌러오는 익숙한 손도 좋아서 눈 깜빡한 사이에 잠들어버린 것 같았다.

“제가 단톡에 보내놨으니까 괜찮아요.”

“그럼 점심은 셋이 먹었대?”

“아니요. 우리도 있어야 된다고 저녁에 다시 모이재요.”

준도 참 특이했다. 한 명이라도 없으면 레브가 아니라는 말을 달고 사는 만큼 뭘 해도 함께해야 한다는 게 신조였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사는 그룹이 되자고. 물론 그런 준의 그룹 사랑은 5년 동안 큰 싸움 없이 좋은 분위기를 유지하는데 큰 몫을 했다.

소리 없이 침대에서 일어난 지구는 곧 따뜻한 물을 컵에 담아서 들고 왔다. 조금씩 마시면서 뻑뻑한 목을 달래는데 지구가 물었다.

“피곤하면 그냥 더 자요. 아니면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아니야, 저녁으로 미뤘다는데 가야지.”

푹신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서 곧장 욕실로 향했다. 대충 씻고 나갔더니 지구가 입으라며 옷을 챙겨 건넸고, 다 입고 나니 춥다며 패딩을 들고 와 팔을 끼워줬다. 이제 나가려고 했더니 또 모자며, 마스크며 바리바리 들고 와서 꽁꽁 감싸기 시작하는 바람에 잠깐 멈춰야 했다.

“금방 가는데 뭘 이렇게 감싸.”

“형 지금 사진 찍히면 큰일 나요.”

방에 놓아둔 전신거울로 다시 한번 얼굴을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에 그 상태로 열 시간을 내리 더 잤으니까. 결국, 잘 쓰지도 않은 안경까지 찾아 끼고 집을 나섰다.

“형 왔어요?”

초인종을 누른 지 10초도 지나지 않아서 현관문이 벌컥 열리면서 준이 튀어나왔다. 문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기분 좋게 웃는 얼굴 밑으로 파란색 앞치마가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디자인이다 했더니 예전에 출연했던 예능에서 기념으로 받아왔던 앞치마였다. 저걸 왜 하고 있지. 갑자기 코스튬이라도 하고 있던 게 아니라면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너 앞치마 왜 하고 있어?”

“요리하고 있었거든요.”

“갑자기? 왜?”

“조금만 기다리면 끝나요.”

불길한 예감이 맞아떨어졌다. 절망적인 대답을 세상에서 가장 밝은 얼굴로 한 준이 탈지도 모른다며 후다닥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현관문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말고 뒤에 선 지구와 아이컨택을 했다.

“집에 갈까요?”

“쟤 분명 십몇 인분 했을걸.”

“하아…….”

지구가 머리를 거칠게 헝클며 얌전히 집안으로 발을 들여놨다. 집 안에서는 음식 냄새가 진하게 났다. 달달한 냄새로 추측해봤을 때 아마 갈비찜을 만드는 것 같았다.

요리할 줄 아는 멤버가 한 명도 없는 우리 그룹 중에서도 준은 그 실력이 유독 참담했다. 단순히 재료 손질을 못한다거나, 잘 태워 먹는다거나 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냥 간 자체를 못했다. 하지만 자기가 만든 음식에만 관대한 준은 요리를 잘하고 싶다며 종종 위험한 도전을 하고는 했는데, 운 나쁘게도 그게 오늘인 모양이었다.

“갈비찜이야?”

“네.”

“고기는 또 언제 사 왔어?”

“형 아파서 늦는다길래, 보신하라고 나가서 장 봐왔어요.”

단톡에 아프다고 보냈나? 쓸데없는 거짓말을 한 지구의 다리를 뒤꿈치로 살짝 쳤더니 옆에서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예나 지금이나 형들 참 지극정성으로 챙긴다니까.

“오늘은 믿어도 돼요! 우리 엄마가 제일 잘하는 요리가 갈비찜인데, 엄마 레시피거든요.”

그게 네 손에 들어가면 멀쩡한 요리로 나오질 않으니까 그렇지. 딱 봐도 기분 좋은 게 보여서 그냥 아무 말 없이 거실로 가서 앉았다.

소파 위에 앉아서 멍청하게 허공을 바라보는 동안, 휘영과 예준이 동시에 도착했다. 준이 요리를 하는 것을 보고 발을 돌리려던 둘을 붙잡아 겨우 거실에 데려다 놓고 휴대폰을 켰다. 오랜만에 농장에 접속해볼 생각이었다. 최근 바빠서 농작물을 잘 수확하진 못했지만, 장장 7년이라는 시간을 꾸준히 해온 덕에 이제는 거의 농장이 아니라 백화점이 되어 있었다.

“근데 너 왜 그렇게 왜 꽁꽁 싸매고 있어?”

한참 게임을 하는데, 거실에 엎드려서 만화책을 읽고 있던 휘영이 말을 걸었다. 모자도, 마스크도, 안경도 벗지 않고 앉아있는 이유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대상 가수라서 얼굴 막 안 보여줘.”

저 멀리 베란다 문에 기대서 휴대폰 게임을 하던 예준이 이죽대며 장난을 쳤다.

“그런 거 아니거든요.”

“보는 사람이 더 답답하다. 얼른 벗어.”

계속 이러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냥 마스크부터 벗었다. 눈가를 잘 가리고 있던 테가 두꺼운 안경을 내려놓자마자 어디선가 탄식이 들렸다.

“어…….”

휘영이 할 말을 잃은 듯 눈을 굴렸다. 휴대폰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예준도 이쪽을 한 번 보더니 말을 아꼈다.

“형 어제 시상식 때 울어서 그래요.”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지만, 지구가 먼저 나서서 뻔뻔하게 거짓말을 했다.

“쟤가 언제 울었어.”

“어제 삼관왕 하고 다 같이 신나서 집에 들어갔잖아.”

물론 시상식의 모든 순간을 함께 한 멤버들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는 거짓말이었다. 손등으로 두 눈을 한 번씩 비비는데, 드디어 다 됐는지 갈비찜이 담긴 냄비를 들고 오던 준과 눈이 마주쳤다.

“지구 형 진짜 너무 한 거 아니에요? 쉬는 날이라서 천만다행이지.”

심각한 표정과 달리 말투는 장난스러웠다. 알 건 다 아는 스물셋이 된 준이 넌지시 타박을 했고, 지구는 대답 대신 멋쩍게 한 번 웃어 보였다.

처음부터 알고 있던 예준과 달리 휘영과 준이 우리의 관계를 알게 된 것은 2년이 조금 넘은 일이었다. 아니, 사실 훨씬 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숨겼던 사실을 처음 용기 내 털어놨을 때의 반응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설마 지금까지 우리가 모를 줄 알았냐며 어이없다는 듯 웃던 얼굴이 여전히 선했다.

“아픈 이유가 있었네. 다들 빨리 와서 먹어요.”

“하현이는 이거 먹으면 더 아프겠는데.”

“아니에요. 이번에는 진짜 맛있어요.”

강력하게 맛있음을 어필하며 준이 수저를 놓았다. 그리고 어머니의 레시피로 만들었다던 준의 갈비찜은 예상과 달리 정말 맛있었다. 요리도 못하는 애가 이런 건 어떻게 잘 만들었지. 다들 마찬가지로 놀랐는지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했다.

“어떻게 갈비찜만 잘할 수가 있냐?”

“고기 자체가 맛있네.”

“엄마가 하던 그대로 했다니까요.”

“어머니 레시피가 사기인데? 음식점 하시냐?”

“근데 아래쪽은 탔네.”

“진짜요?”

물론 아래쪽을 태워 먹긴 했지만, 굉장히 성공적인 결과물이었다. 양도 많아서 느긋하게 넉넉히 먹을 수 있었고. 갈비찜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쯤, 세 그릇이나 비운 준이 배를 두드리며 말했다.

“가위바위보 해서 진 사람이 설거지하기 해요.”

“됐다. 내가 할게.”

이런 일에는 절대 나서는 법이 없는 예준이 웬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탁 위에 놓여있던 그릇들을 치우고, 집들이 선물로 휘영이 선물했던 주방용품 세트 중 하나였던 고무장갑까지 야무지게 착용하는 모습은 굉장히 낯설었다.

“형 사진 찍어도 돼요?”

“대체 밥 먹으러 오는데 카메라는 대체 왜 들고 온 거야?”

원래부터 풍경 사진 찍는 게 취미였던 휘영은 작년에 새 카메라를 장만했다. 꽤 많은 금액을 정산받은 만큼 비싼 브랜드의 DSLR 카메라였다. 결국, 남는 건 다 사진뿐이라면서 시도 때도 없이 들고 다니며 찍어대는 바람에 예준이 네가 그렇게 안 해도 언제 어디서든 찍히고 있다며 진저리를 치기도 했었다.

“찍을게요.”

“뭘 찍어, 그릇으로 찍히고 싶냐?”

“아니요.”

말은 저렇게 해놓고 막상 휘영이 셔터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니, 얼른 찍으라며 포즈까지 취해줬다. 별 난리를 다 치며 설거지하는 예준을 가만히 바라보던 준이 엉덩이를 끌고 다가와 지구의 옆에 착석했다.

“형. 작업은 잘 되고 있어요?”

“응. 아직 여유로워서 괜찮을 것 같아.”

데뷔 초부터 시작한 작곡에서 지구는 또 다른 재능을 발견했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도 처음 하는 것 치고는 속도도 빠르고 퀄리티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경험이 쌓일수록 무서운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이제는 곡 작업에도 많이 참여하는데, 지금 준비하고 있는 건 음원 황제라는 별명을 가진 아티스트의 앨범이었다.

“겨울 가기 전에만 나오면 괜찮을 것 같다고 해서.”

“아아.”

그렇게 다 같이 둘러앉아 평소처럼 이야기를 나눴다. 하는 얘기는 평소와 비슷했다. 앞으로 남아있는 시상식, 스케줄, 소속사 연말 파티 같은 것. 지친 티를 내다가도 우리 힘으로 쌓아 올린 결과물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그보다 뿌듯할 수가 없었다.

“이제 슬슬 가서 자야겠다.”

“잘들 가요.”

한참을 떠들다 준의 집에서 나온 것은 오후 10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었다. 고작 밥을 먹고, 얘기를 좀 하다 왔을 뿐인데 이상하게 몸이 지쳤다. 요즘 기운이 없어서 그런가. 집에 도착하자마자 씻고 나와 침대에 쓰러지듯 엎드렸다. 베개에 얼굴을 묻자마자 졸음이 몰려와서 눈이 감기던 찰나, 막 씻고 나온 지구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똑바로 누워서 자요.”

엎드려 있던 몸을 똑바로 돌려준 지구가 이불까지 꼼꼼히 덮어줬다. 그리고 불을 끈 다음, 자연스럽게 이불 안으로 들어와 옆자리를 차지했다.

“너네 집 안 가도 돼?”

“뭐 하러 가요.”

“이럴 거면 집은 뭐 하러 샀어.”

“위장용이죠, 그냥. 멤버들 다 같은 아파트 샀다고 기사도 났는데 우리만 같은 집 살면 이상하잖아요.”

그래도 아무도 우리가 사귀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 안 할 텐데.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지만, 연애설이 날 확률은 제로에 가까웠다.

“근데 형, 있잖아요.”

침대 바로 옆 탁상 위에 놓여있는 수면등을 향해 손을 뻗으며 지구가 말했다.

“다음 주에 크리스마스잖아요.”

탁 소리가 나며 불이 켜졌다. 은은한 조명이 어두운 방위로 내려앉았다.

“크리스마스 때 놀러 가요.”

“그날 스케줄 있을 것 같은데.”

우리의 모든 스케줄은 매니저 형을 통해 전달됐다. 크리스마스 날, 못해도 스케줄 한두 개 정도 있을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어디 멀리 가자는 게 아니라, 사소한 것도 좋아요. 늦으면 영화라도 한 편 보러 가고, 케이크라도 먹어요.”

“그래.”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바빴지만, 단 하루도 떨어져서 보낸 적은 없었다. 연말에 스케줄이 있어봤자 그룹 스케줄이었기 때문에 같은 그룹 멤버라는 미명 하에 함께 시간을 보내는 건 쉬웠다.

“뭘 해도 형이랑 보내면 즐거울 것 같아요.”

언제나처럼 예쁜 말로 사람을 설레게 한 지구가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올렸다. 그리고 이불 속에 푹 파묻힌 그대로 팔을 뻗어 나를 끌어안았다.

“많이 피곤해요?”

표정을 보아하니 무슨 의미로 묻는 건지 충분히 알 것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내일 스케줄 있는 거 알면서 그래.”

“하긴, 내일은 부으면 안 되니까요.”

빠르게 물러선 지구가 손을 뻗어 거의 다 가라앉은 눈가를 매만졌다. 막 씻고 와서인지 약간 차가운 손이 뜨끈한 눈가 위에 내려앉았다.

“얼른 자요.”

작은 속삭임을 끝으로 더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편안하고 따뜻한 품 안에서 완전히 잠이 들기 직전까지, 지구는 잠이 오지 않는지 계속 뒤척였다.

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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